무학 대사는 원효 대사 만큼이나 유명한 역사 인물이기 때문에 떠도는 설화도 많은 것이다. 고향인 합천에서는 무학이 어려서 읍내 제일가는 부잣집에 꼴머슴을 살았다는 전설이 전해 오고 있는데, 그때 벌써 축지법 같은 도술을 썼다는 것이다. 부모 없는 고아에 머슴살이를 했다는 설화가 있는 것으로 미루어 무학은 매우 가난하게 자라난 것이 확실하다.
그러나 머리는 뛰어나서 하나를 배우면 열 가지를 알았다는 천재 소년이었다. 18세에 홀연히 집을 나가기로 결심한 무학은 머리를 깎고 중이 되었다. 그가 찾아간 곳은 경기도 양평의 용문산이었는데 이 산의 용문사에는 유명한 혜명국사가 계셨다.
무학은 혜명국사를 사사한 뒤 묘향산 금강굴에 들어가 도를 닦았다. 어느 날 무학은 새벽 종소리를 듣고 크게 깨달았다고 한다. 깨닫는다는 것을 도에 통한다, 즉 도통이라 하는데 강도 높은 수도 끝에 갑자기 깨닫게 되는 것이 보통이다. 무학은 비범하여 20세 남짓에 일차로 도통하고 그것도 모자라 여러 산사를 돌아다니면서 자기보다 더 높은 스승을 찾았다.
옛날 사람은 스승을 찾아 헤맸다. 그런데 무학이 만난 스님들은 젊은 무학보다 나을 것이 없어 보였다. 그래서 마침내 중국에 유학가기로 결심했는데 그때 중국은 몽고족이 지배하는 원(元)나라 이었다. 공민왕 2년(1353). 원나라에 들어간 26세의 무학은 뜻밖에 나옹선사를 만나 사사하게 되었다. 나옹은 중국인이 아니라 고려인이었으니 이국에서 스승을 발견한 것이다.
그 는 무학을 한눈에 알아보고 장차 큰일을 할 인물로 점찍었다. 나옹은 귀국하여 공민왕의 왕사(王師)가 되어 전남 승주의 송광사에 자리 잡게 되고 무학은 경기도 여주 고달산에 들어가서 조그만 암자에 머물게 된다.
공민왕의 왕사가 된 나옹은 경기도 양주에 크게 회암사를 짓고 그 낙성식에 무학을 불러 고려의 국사(國師)가 되어 달라고 청했으나 무학은 굳이 사양하였다.
고려의 멸망을 미리 알아차려서 그랬을까. 아니면 그 보다 훨씬 앞서서 태조 이성계와를 만나서 그랬을까. 아무튼 무학은 고려의 국사 되기를 거절하고 조선 건국자 이성계의 왕사가 된었다.
출처 : 카페 나무아미타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