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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시 |
시간 |
장 소 |
내 용 |
비 고 | |
시작 |
종료 |
분 | |||
06:30 |
07:00 |
30 |
봉은사 |
참석자 확인 및 출발 |
|
07:00 |
11:30 |
270 |
봉은사-수도암 |
이동 285 km |
금강휴게소 |
11:30 |
12:00 |
30 |
수도암 경내 |
예불참석 |
|
12:00 |
13:00 |
60 |
수도암 경내 |
점심공양 및 참배 |
|
13:00 |
15:30 |
150 |
수도암 선원 |
강설 및 법담회 |
|
15:30 |
16:10 |
40 |
수도암-청암사 |
이동 |
|
16:10 |
16:50 |
40 |
청암사 |
참배 |
|
16:50 |
19:00 |
130 |
청암사-식당 |
이동 180 km |
이천 근교 |
19:00 |
20:00 |
60 |
식당 |
저녁공양 |
|
20:00 |
22:00 |
120 |
식당-봉은사 |
이동 100 km |
|
22: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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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은사 |
회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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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예산 계획
항 목 |
예산 |
내 용 |
비고 |
버스비 |
700,000 |
1대, 40인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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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간 준비물 |
105,000 |
@3,000원 x 35 명 |
|
점심공양 |
200,000 |
5,000/인 x 35명 + 25,000 |
수도암 |
스님법문 |
500,000 |
수도암 원인스님 |
|
저녁 공양 |
420,000 |
@12,000원x 35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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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상금 |
50,0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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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출 합계 |
1,975,0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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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행사비 확보 방안
항목 |
금 액 |
내 용 |
비 고 |
참가비 개인 |
1,750,000원 |
1인당 50,000원 x 35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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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조금 |
200,000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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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계 |
1,950,000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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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가 비용 발생시는 후원금으로 충당
별첨 : 원인스님 법문
수도암 까페: http://cafe.daum.net/soodoam/9MWM/196
마음 속의 불교 (2016.7.4.대승사 초하루법회 법문)
*원인스님은 경북 봉화에서 태어나 1969년 합처 해인사로 출가해서 40여 년을
오롯한 수행을 해오다 도림사 선원장을 거쳐 현, 김천 수도암 선원장으로 계신다.
저서로는 '피안으로 가는 노래' '산사의 메아리' 가 있으며, 번역서로는 '대비심
다라니경' '마하반야의 노래' 등이 있고, '한글 신행의식집'을 엮었다.
아침부터 장대비가 시원스럽게 내리고 있습니다.
오랜 가뭄 끝에 단비가 내리니 만물들은 제각기 활력을 찾아가는 것 같습니다. 이렇게 자연은 때로는 어긋나는 것 같아도 알맞게 움직이고 있으므로 있는 그대로 완전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설사 가뭄이 극심해서 사람들이 살아가기 어렵다고 해도 그런 부조화 속에 많은 정화를 이루게 되고 이 속에서 더 큰 조화로움을 만들어가고 있는데 우리는 과연 이 세상을 향해서 어떤 조화로운 일을 하는지 오늘 이것을 한번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불교를 흔히 마음의 종교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말하는 마음이란 매우 포괄적이라 바른 이해가 어려울 수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세상 사람들이 마음이라 하는 것은 일상적으로 생각하고 느끼는 것을 뜻하겠지만 불교에서 마음이라 하는 것은 6근에서 일어나는 6식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한 생각 일어나기 이전 자리이며 부모가 나를 낳아주기 이전 자리를 뜻하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할 수 있습니다.
불교는 본체적인 자리를 만법의 근본이라고 할 수 있는 마음이라고 합니다. 일찍이 부처님께서 “심시만법지근본(心是萬法之根本)”이라고 했습니다. 즉 이 마음은 만가지법의 근원이라는 것입니다. 그 옛날 석가모니부처님이 6년간 초인적인 고행을 통해서 마음을 깨닫고 처음으로 이 법을 설하여 수 많은 중생을 제도하셨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의 법을 마음을 가르치는 법이라고 합니다
부처님의 법이 점점 히말라야를 넘어 중국에 전해지니 역대 큰 도인스님들이 부처님의 법을 구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인도로 유학을 했습니다. 중국과 인도 사이에는 높은 산을 넘어야 되고 넓은 강을 건너야 하며, 끝도 없는 모래사막을 지나가야 하는데 홀연히 모래바람이 불어오면 갑자기 평지에 산이 생겼다가 없어지기도 해서 자칫 그 속에 묻혀버릴 수도 있지만 도를 위해 이 모든 위험을 무릅쓰고 인도 순례를 했던 것입니다.
무엇 때문에 이토록 목숨을 걸고 가지 않으면 안 되는가요? 그 옛날 먹고 살기도 어려웠던 시절에 왜 수 많은 스님들이 도를 구하기 위해 인도로 가지 않으면 안 되었는지 이것을 우리가 한번 생각해 봐야 합니다. 사람이 순수할수록 도를 구하는 마음이 커지게 되고 물질이 풍요할수록 도심은 사라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스님들과 불자들의 신심이 약해진 이유도 물질의 풍요에 정신이 도심에서 물러나 있기 때문은 아닐까요.
신라시대에 의상대사는 넓은 서해바다를 조각배 하나에 몸을 싣고 당나라로 건너가 불교 최고의 가르침인 화엄경(華嚴經)을 배우기 위해 화엄종의 종주인 지엄화상에게 가서 10년간 수학하고 돌아왔으며, 이 밖에 원광국사(圓光國師) 자장율사(慈藏律師) 경흥법사(憬興法師) 등 수많은 고승들이 도(道)를 구하기 위해 중국으로 갔습니다. 과연 부처님의 가르침을 통해서 어떤 이익을 얻을 수 있으며 어떤 공덕이 있는지 그리고 영원한 행복과 영원한 안락을 얻을 수 있는지 이것을 먼저 알아야 됩니다.
불교의 근본은 마음을 가르치는데 있습니다. 마음은 만 가지 법의 근원이기에 이 마음은 참으로 불가사의 합니다. 아무리 세속적으로 안락한 삶을 산다고 해도 마음에 평화를 갖고 있지 못하다면 그 세속적 안락과 행복은 불안할 수밖에 없고 세속적 지위가 아무리 높아도 내려올 때가 있으며, 물질이 아무리 많아도 한 순간에 사라질 수가 있습니다.
누구도 뺏어갈 수 없고 누구도 가져갈 수 없는 마음의 보배를 우리는 빨리 이루어야 됩니다. 이것만이 확실한 것이고 윤회의 생사에서 걸림이 없는 진정한 행복을 얻을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마음 밖에서 얻은 것은 허망이라는 근원적 문제를 가지고 있으므로 우리는 이 마음속에서 진정한 가치를 찾아야 합니다. 그럼 어떻게 이 마음에서 영원한 가치를 얻을 수 있을까요?
먼저 참 마음을 가리는 삿된 망념을 놓아야 합니다. 이 미혹된 망념이 온갖 어리석음을 일으키는 근본입니다. 내가 나의 참 마음을 찾아가는 길, 이것이 부처님이 중생들에게 가르치는 종지입니다. 이 가르침에 의지하여 모든 고뇌를 벗어난 지혜의 길로 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근본적으로 신심과 원력이 따라야 합니다. 그래야 참 마음의 세계인 피안의 저 언덕으로 나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과연 오늘날 같은 불자들의 신심으로 진정한 마음의 평화를 이룰 수가 있을까요? 세월이 갈수록 인심은 박하고 영리하지만 순수하지 못하므로 인해 불심은 점점 멀어져 가는 세태에서 참 나의 세계에 가기는 더욱 어려울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신심과 원력을 가져야 합니다. 이 마음이 마침내 불심으로 승화되어 진정한 안락을 가져다 줍니다. 그러나 중생들의 오랜 무명의 습관은 한 순간에 지울 수 없지만 꾸준히 노력하다 보면 언젠가는 불심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어느 누구도 처음부터 완벽할 수 없지만 실망하지 말고 나아가면 희망의 빛은 다가오게 됩니다.
하찮은 세속의 일도 노력해서 이루어지는 것인데 다겁생 동안 살아오면서 익혀온 습관은 참으로 무거워 단숨에 제거될 수 없으므로 끊임없이 생활 속에서 불심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절차탁마(切磋琢磨)” 라고 하듯이 조금씩 조금씩 닦아 가다가 마침내 어느 한 순간 확연히 깨달음을 이루기도 합니다.
우리는 이생에 불법을 만난 것을 참으로 다행스럽게 생각해야 합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이 마음의 이치를 깨우치지 못하고 물질이라는 허망한 세계에 속아서 일생을 허망하게 보내고 있습니다. 진정한 가치는 이 마음에서 찾아야 하는데 세상에서는 끊임없이 허망한 속에서 영원한 것을 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는 어떤 것도 영원한 것은 없지만 중생들은 이 한 몸 유지하기 위해 온갖 악업을 지으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업의 불길은 치성하고 지어온 악업의 무게는 사람을 압도하고 있습니다. 애초에 이 몸은 잠시 빌린 물건이라고 생각 했다면 그토록 집착하지 않았을 것인데 내 것이라는 애착 집착 때문에 가지가지 악업을 짓고 괴로움을 받게 되었습니다. 빌린 것은 언젠가는 돌려줘야 하는데 애착한들 무슨 소용 있겠습니까. 빌린 것이 우리에게 영원한 것이 될 수 없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지만 이 모든 집착 때문에 바른 길을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 몸은 본래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하나의 물질이기에 처음부터 내 것이란 있을 수 없는데, 어느 누가 말하기를 나의 재산목록 1호는 이 몸뚱아리라고 하기에 산승이 옆에 있다가 그럼 재산 목록 2호는 무엇이냐고 물으니 그것은 돈이고 물질이고 명예라고 했어요. 과연 그럴까요? 다 아닙니다. 왜냐하면 몸이다. 재산이다. 하지만 그것이 나온 출처가 더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출처가 무엇일까요. 이 몸을 만든 것은 이 마음이므로 이 마음이 모든 것을 조작합니다. 만일 마음이 없다면 몸은 어디에도 쓸모없는 물건이 되고 맙니다.
마음이 있기에 이 몸이 생겨났다면 이 마음은 어디서 나왔는가요? 이 마음은 무시무종(無始無終)이라 언제 생겨난 것이 없으니 불생불멸(不生不滅)이라 또한 소멸할 것도 없습니다. 이렇게 생겨나지도 않고 소멸하는 것도 아니지만 일체처 일체시에 분명하고 역역하니 이것을 일찍이 부처님들이 가장 중요하게 여겼던 부분입니다. 우리 불자들은 반드시 이 마음의 소중함을 잘 깨우쳐서 마음 닦는 일에 정성을 들여야 합니다. 우리가 만일 이 마음 닦는 일을 잘한다면 이 세상 어떤 일에도 만족한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일을 진리로 승화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만일 세상일을 하드라도 인격적 바탕에서 나오는 내공이 있다면 세상에서도 존경 받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비록 그것이 허명이라도 선신들마저 칭찬하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오늘날 유명했던 사람들이 하루아침에 나락에 떨어져 곤란을 당하는 일들이 뉴스를 통해서 비일비재 (非一非再)하게 나타나고 있는데 그것은 내공이 뒷받침이 되지 않아서 그런 겁니다. 그럼 내공은 어디서 나올까요? 바로 이 마음 다스림에서 나옵니다.
이 마음을 잘 다스리면 누구도 감히 그 사람을 거역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이 마음의 능력은 무한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마음은 만물의 근원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이 마음을 잘 닦아 출세간 뿐만 아니라 세상일도 편안하게 경영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불교는 처음부터 물질을 이야기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물질은 결과요 마음은 근원이기 때문에 이 마음에서 모든 것을 갖추어야 결과가 좋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사회 흐름은 아직 물질에 끌려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물질사회는 반드시 정신사회로 바뀌게 되어있어요. 우리 불자들은 멀리 내다보고 정신사회로 전환하는 자세를 갖추어야 합니다. 그래야 행복한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정신세계에 들어가면 물질세계는 저절로 따라 옵니다. 왜냐하면 정신과 물질은 둘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만일 정신을 우선시하는 사회에서는 저절로 물질을 다룰 수 있는 능력이 생겨나게 되고 초능력에 가까운 과학자들이 나와 보다 세상을 부작용 없는 사회를 만들어 가게 됩니다. 오늘날 전 세계적으로 보면 물질제조업 보다는 지식정보사회라고 합니다. 이미 요즘은 지식이 사회를 어느 정도 지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애플이나 구글 같은 회사는 물질적인 큰 공장은 없어도 세계최대 기업으로 평가 받고 있듯이 정신세계가 앞서갈 때 사회는 매우 부작용은 최소화 되고 효율적인 사회로 전환 됩니다.
우리불자들은 적어도 10년20년30년을 내다보는 신앙생활을 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만이 시대를 앞서가는 지혜로운 불자가 되어 나와 남을 모두 이롭게 할 수 있습니다. 세상은 앞으로 정신과학의 세계로 나아갈 것이므로 우리는 정신 속에서 많은 노력을 해야 합니다. 종교에서도 물질에 기반을 둔 종교와 정신에 기반을 둔 종교가 있는데 마음을 중요시하는 종교가 미래세상의 지도자로써 살아 갈수 있습니다.
불교는 처음부터 끝까지 마음을 중요시 합니다 그래서 일체유심조 (一切唯心造)라고 합니다. 모든 것은 다 마음이 지었다는 것입니다. 만일 불자들이 불심을 잘 가지면 이 세상에서 가장 앞서가는 사람이 되고 세속을 구제하는 선지식이 됩니다. 이처럼 앞서가는 사람은 어떤 뜻이 있는가요? 그들은 다음 생에 태어나면 세상을 구제하는 가장 위대한 사람이 됩니다.
왜냐하면 이생에 높은 정신세계를 구축한 사람이 다음 생에는 더욱 높은 정신세계를 갖출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만일 이생에서 마음수행을 하지 않고 혼탁한 물질세계에 떨어져 있어 항상 앞서가는 사람만 따라가는 후진성(後進性)이 되면 남의 부림을 항상 받아야 하므로 정신세계에서 안락을 이루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앞으로 미래 20년30년 후에는 반드시 정신세계에서 꽃을 피우게 될 것입니다. 산승이 50년간 수행을 통해서 본 미래세상은 그렇습니다. 아마 틀림없을 겁니다. 그렇다면 우리들은 지금 전환기에 살고 있어요. 전환시대에 어떻게 하면 이상적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요. 내가 내 자신을 변화에 주도적으로 바꾸질 못한다면 언제나 시대적 상황에 함몰되어 바른 길로 나아가지 못하게 됩니다. 만일 그렇다면 우리는 언제까지나 세상의 찌꺼기로만 남아 있을 것인가요? 이것은 정말 암담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제라도 우리는 정신을 바짝 차리고 부처님 가르침에 의지하여 황폐화된 정신세계를 개발해야 합니다. 물질을 개발하면 부작용이 따르나 정신을 개발하면 부작용을 없애 줍니다. 그러므로 불자들은 부처님 도량에 오면 지혜로움을 배워야 합니다. 그래야 세상으로부터 속임을 당하지 않고 좋은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정신세계에서 앞서 간다는 것은 경쟁사회에서 누구를 앞서 간다는 개념이 아니라 세상을 똑바르게 보고 미래를 설계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10년 후에 벌어질 일을 예측하지 못하면 어떻게 됩니까? 마치 현재 사업하는 사람이 10년 후를 내다보고 투자할 곳에 투자를 하면 지금은 힘들어도 10년 후에는 사람들이 생각하지 못한 부분에서 크게 성공을 하는 것과 같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들 삶이 미래를 내다보고 그 삶을 살아가는 사람은 미래에 훌륭한 결과를 이룰 수 있고 가정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국가에나 모두 도움이 되는 삶을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한낱 사회에 부담이 되는 존재가 되어서는 하근기를 면할 수 없습니다. 나로 인해서 이 세상에 도움이 되어야지 세상에 부담 주는 인생이 되지 말라는 것입니다.
내가 내 자신을 바르게 보고 자신의 잘못된 부분을 빨리 알아차리면 곧 바로 바꿀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부질없는 고집을 부릴 필요가 없어요. 사람들은 전통과 여러 가지 생활의 관습에서 벗어나지 못하므로 인해 현실적으로 문제점을 인식하고도 바꾸질 못해요. 이제 우리는 시대의 흐름을 빨리 알아차리고 거기에 능동적으로 대처 할 줄 아는 지혜로운 불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 사람이 세상을 이롭게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부처님 도량에서 기도를 많이 하고 마음을 닦으면 저절로 마음이 맑아지고 밝아집니다. 밝아지면 세상을 바르게 보는 눈을 갖게 됩니다. 그런 사람은 세상에 흘러가는 모든 문제점에 휘말리지 않습니다. 이렇게 흔들리지 않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은 자신의 참 모습에 의지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사람들이 자신의 참모습에 의지하면 부질없는 세상의 시비와 논리에 흔들려서 고통을 받지 않습니다.
우리가 불교를 배우는 것은 고통으로부터 벗어나 진정한 행복을 이루자는데 뜻이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 먼저 마음을 맑혀야 하고 그 다음 주어진 상황에 따라 참되게 살아가야 합니다. 무슨 일을 하고 어떤 일을 하던 우리가 그 일 자체에서 존재의 참뜻을 바르게만 깨우친다면 어떤 것도 바꾸지 않고도 그 일에서 완전성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생활 속에서 선(禪)을 알아야 됩니다. 그리고 생활이 곧 선이요 선이 곧 생활이라는 사실을 똑똑히 알아야 합니다. 그럴 적에 그 사람의 삶은 풍요로워지고 어떤 일에서도 주인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결코 물질과 명예에 의한 풍요가 아니라 이 마음을 바로 보고 바로 깨우침으로써 얻어지는 진정한 여유와 낭만이 있습니다. 이것이 소멸되지 않는 영원한 풍요가 됩니다.
자기 내면에서 얻어진 풍요는 누구도 뺏어갈 수 없기에 영원한 행복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이 가르침을 통해서 마음수행을 해야 하며 그러기 위해 일상생활 속에서 항상 염불해야 합니다. 그러면 저절로 마음이 맑아져 누구도 뺏어갈 수 없는 마음의 보배를 가지고 영원한 행복을 이뤄내게 됩니다.
여러 불자님들! 시들지 않는 마음의 행복이 함께 하기를 축원 합니다.
성불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