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백의 정직성을 신앙처럼 작품 속에 담는
정의와 진실의 수필가 윤형두 선생
최원현
봄인데도 바람이 차다. 햇볕은 따사롭건만 스쳐가는 바람엔 아직도 냉기가 가득하다. 누군가를 만나러 가는 길, 그 길은 늘 가슴 두근대는 기대감이다. 아니 만남을 위해 달려가는 길은 때로 두려움이 더 클 때도 있다.
오늘은 독자들로부터 끊임없는 사랑을 받고있는 범우문고의 산실인 범우사 사장실로 출판인 수필가 윤형두 선생님을 뵈러 가는 길이다. 내겐 범우문고 애독자의 한 사람으로서 갖는 감회도 무시할 수 없을 것 같다.
출판인 수필가 윤형두 선생님, 토요일 오후는 유난히 바쁘신데 수필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이렇게 시간을 내어 주신 것이다. 오랜만에 뵙게되어 근황부터 여쭤봤지만 어느새 대화는 수필 이야기로 들어가고 있었다.
"나는 고해성사를 하는 마음으로 수필을 씁니다. 진실은 인간이 가장 귀중히 여겨야 할 정신적인 토양입니다. 작가가 희노애락오욕의 정(情)을 담아내고 자기 자신을 표현하는 최종적인 목적은 더욱 높은 차원의 진실을 갈망하고 추구하기 위해서입니다.
수필은 이런 진실을 담아내는 영혼의 그릇입니다. 현실을 토대로 하여 과거와 미래를 거짓없이 그려내야 합니다. 살아온 삶을 돌이켜보면서 내가 얼마나 거짓없이 사람답게 살아왔는가를 회상하고, 잘못을 뉘우치며 참회하는 마음으로 수필을 씁니다. 또한 현실을 소재로 글을 쓸 때는 현재의 내 삶이 타인에게 누를 끼치지 않고 올바른 길을 가고 있는지 채근하면서 내 삶의 거울을 바라보듯이 씁니다. "
수필은 시나 소설보다 역사성, 시대성이 약하다란 말을 듣는다. 시대의 아픔, 대중의 고통을 보면서도 자신의 직접적인 체험이 아니면 쓸 수 없다고 생각하는 수필의 한계성일까. 그래서 시인 소설가 수필가가 똑같이 한 시대를 살아왔으면서도 유독 수필에서만 그런 시대성 있는 작품을 쉽게 발견할 수 없는 것일까.
그런데 그런 아쉬움 속에서도 우리는 한 분을 찾아 낼 수 있다. 작가이기 앞서 출판인이고, 출판인이기에 앞서 시대적 양심이었던 수필가 윤형두 선생, 그는 온갖 시대적 격랑과 인고(忍苦) 속에서 아픔을 감내하며 그 아픔의 현장에서 아픔의 역사로 존재해 왔고, 인간이면 지녀야 할 '최소한의 양심'을 고수하기 위하여 남들이 외면하는 괴로움까지 경험했다. 그러면서도 그런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오히려 더욱 겸허한 목소리로 수필을 써온 분이다.
"나는 1935년 12월 27일 일본의 고베(神戶)에서 아버지 윤민식(尹珉植), 어머니 김처례(金處禮)의 아들로 태어나 일본 오노제일국민학교에 입학을 했습니다. 그러나 졸업은 여수서국민학교에서 했고, 순천농림중학교와 고등학교를 거쳐 동국대 법학과, 고려대 경영대학원, 중앙대 신문방송대학원(출판잡지전공/문학석사)에서 공부를 했습니다. 월간 <신세계>, <고시계>, <법제> 등의 편집장 및 주간을 지냈고, 1966년에 현재의 범우사를 창립했으며, 월간<다리>지를 발행하다 1971년에는 징역 2년 자격정지 2년을 구형받고 (뒤에 대법원에서 무죄 확정) 옥고를 치르기도 했습니다."
윤형두 선생은 초등학교 때부터 쓰기 시작한 일기를 지금까지 쓰고 계시단다. 일본에서도 일본아이들보다 책을 더 많이 읽는 소년이었으며, 중학생 때는 너무 책만 읽는다고 어머니께서 책을 아궁이에 넣어버리기까지 할만큼 책읽기에 열심이었다고 한다.
책을 사랑하는 마음은 작가가 되거나 출판인이 되는 한 길을 선택하도록 했을 것이다. 그러나 윤형두 선생은 문인을 키워내겠다는 생각에서 출판인이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 많은 독서량과 문학에 대한 자질은 윤형두 선생을 아주 자연스럽게 수필가 윤형두가 되게 하고도 남았다.
"초등학교 때부터 다른 성적은 보통이었지만 작문 성적은 최고였습니다. 순천농고에선 학도호국단 문예부장으로 잡지도 만들고 시도 썼으며, 출판인이 되어서도 여기 저기에 글들을 자주 쓰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1972년 김승우 선생이 발행하던 <수필문학>에 '콩과 액운'이란 수필을 발표하면서 수필가란 이름을 얻게 되었습니다. 내가 수필을 쓰게 된 데는 특히 박연구 선생의 권유가 컸습니다."
윤형두 선생은 특히 미래에 대해 각별한 애정을 갖고 오늘을 사는 수필가이다. 곧 그것은 어떻게 사는 것이 사람답게 사는 것인가. 자기 성찰과 함께 의미 있는 삶을 사는 것에 대한 끊임없는 질문이요 대답이요 다짐일 것이다.
"나는 미래를 설계하면서 글을 씁니다. 지난 과거와 현재보다 더 의미 있고 보람있는 일을 다짐하기 위해 씁니다. 그 다짐을 먼저 예시하고 그것을 따르기 위해 노력합니다. 자신을 연마하고 채찍질하며 가능한 한 선한 길을 걸어가게 하는 스승의 역할을 해 줄 수 있는 글을 쓰려고 노력합니다. 그래서 내가 쓴 글이 과연 위선이나 과장 없이 진실 그대로인지 그리고 글로 쓴 것 같은 삶을 살고 있는지, 지난날에 대한 확인과 오늘에 대한 점검, 거기에다 매일에 대한 다짐을 하기 위해 글을 씁니다. 그러므로 나는 진실을 말하고 진실을 옹호하기 위해 수필을 쓴다고 할 것입니다."
그래서 김우종 교수는 '그의 글은 글과 사람 사이에 전연 괴리(乖離)가 없는 그 인격 자체일 뿐만 아니라 우리는 그 같은 수필의 세계를 통해서 그와 함께 인생공부의 길을 떠나게 된다'고 했을 것이고, 박연구 선생도 '그의 수필세계는 <나>를 그리되 결국은 시각을 <우리>의 문제로 돌려서 고뇌와 비판과 애정을 담아 쓴 것인 만큼 독자에게 감응되는 열도도 크리라고 생각한다'고 했을 것이다.
선생님은 수필과 현실의 삶이 하나가 되고 곧 그것은 정직한 삶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서정수필보다 삶과 사회를 올곧게 이끌어 가는데 변화를 줄 수 있는 수필이어야 합니다. 수필은 진실의 문학입니다. 문학이기 때문에 가상의 세계를 그릴 수도 있겠지만 제가 고해성사를 하는 기분으로 수필을 쓴다고 했던 것처럼 나에게 있어서 수필은 과거를 돌아보며 미래를 설정하고 또 좌표를 설정함으로써 늘 정직하게 살아야겠다는 다짐의 글이 되게 합니다."
그러나 윤형두 선생님의 수필에선 교훈적이고 강한 이미지보다도 바다 냄새와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내가 짙게 풍긴다. 바다는 그의 내면 세계를 포근히 감싸주는 모태같은 존재로 숱한 고난의 길에서도 언제고 부담 없이 몸을 맡길 수 있는 자애롭고 포근한 품이었다. 감사원장을 지냈던 한승헌 시인도 '윤형두의 회상에서는 바다와 어머니가 해류처럼 흘러가고 있다. 생각하면 그것들은 우리 모두의 모태이자 고향이다. 그러기에 그의 글은 사적인 회고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고 했다.
선생은 참으로 많은 고생을 하셨다. 하지만 오히려 그 많은 아픔의 시대를 겪어 왔으면서도 오늘 이 시대가 더 어렵다고 말씀하신다.
"생활이 어려웠을 때는 잘 살아보겠다는 희망이 있었습니다. 또 정의가 필요할 때 겪었던 고통 속에서는 희망을 보았습니다. 일본에서 한국으로, 여순사건, 육이오, 민주화운동 등 참으로 많은 파란의 세월이요, 굶주림과 아픔의 시절이었습니다. 그런데 풍요로와 보이는 지금이 더 정신적 기갈의 시대이고, 사회 정의나 정신적인 면에서 더욱 황폐해 가는 것 같습니다. 내가 살아오고 겪었던 아픔과 고통의 시대보다도 오히려 희망이 보이지 않는 지금 이 때가 제게는 더 살기 어려운 때라는 생각이 듭니다."
선생님께서는 주로 피천득, 김우종, 한승헌, 박연구 선생 등의 타천에 의한 '연처럼', '콩과 액운', '아버지의 산 어머니의 바다', '10월의 바다', '월출산 천황봉' 같은 수필을 대표작으로 들고 계셨다. 그렇다면 30여년 전이 되겠지만 선생님께서 처음으로 수필을 발표하시던 그 당시의 수필계는 어떠했을까?
"수필 전문지로는 <수필문학>과 한국수필가협회의 기관지격인 <수필문예>(1971. 4. 10. 창간)가 있었습니다. <수필문예>는 6집까지 내다가 계간 <한국수필>로 다시 창간을 해서 오늘에 이르고 있고, <수필문학>은 관동출판사의 김승우 선생이 어려움을 많이 겪으며 발간을 하고 있었는데, 수필문학 발전과 이런 어려움에 도움이 되어 보고자 한국수필문학진흥회가 발족했지만 <수필문학>의 발간은 중단되어버렸으며, 한국수필문학진흥회에서 <隨筆公園>이란 동인지(비정기 간행)를 발간케 되는데 바로 정기 간행물로 되어서 어쩌면 수필문학에서 수필공원으로 그리고 지금의 에세이문학으로 그 맥이 이어졌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선생님께선 특히 조지훈의 '지조론', 변영로의 '명정 40년', 신채호의 '역사 평론', 토마스 모어의 '유토피아' 등을 좋아하신다고 한다. 그러나 작품도 중요하지만 살아가는 삶이 더욱 중요하다는 말씀을 곁들여 주신다.
윤형두 선생님은 출판인으로서 여러 차례의 한국출판문화상과 서울시문화상을 비롯한 많은 상과 국민훈장 석류장을 받으셨다. 뿐아니라 수필가로써 <사노라면 잊을 날이>('79), <넓고 넓은 바닷가에>(('83), <책의 길 나의 길>('90), <책>('93), <아버지의 산 어머니의 바다>('95) 등의 수필집을 내셨으며, 1991년에 현대수필문학상과 1994년에 동국문학상을 수상 하셨다.
선생님께서는 우리 한국수필문학의 방향성과 출판인으로서 수많은 수필집이 발간되는 현상에 대해서도 말씀해 주셨다.
"많은 것 속에서 좋은 것도 나올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수필이 양적으로 너무 양산되는 것 같다고 비판만 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엄선된 수필도 좋지만 풍요로운 수필도 좋지 않겠습니까?
또한 수필집 한 권에는 그 작가의 인생과 문학, 철학이 충족되어 있기 마련입니다. 다다익선(多多益善)이지 않겠습니까. 되지도 않는 글을 책으로 엮어내는 것은 그 작가 자신의 인격문제입니다. 독자는 결코 좋지 않은 작품이나 책을 사 보지 않습니다. 결국 문제는 질이지 양은 아닌 것입니다."
그러면 잡지가 문학에 미치는 영향과 급변하는 시대 속에서 그런 변화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잡지는 그 시대의 거울이어야 합니다. 활자만의 책에서 사진, 그림을 곁들인 책, 소리를 곁들인 책, 영상을 곁들인 책, 그렇게 책과 더불어 문학도 독자도 변해갈 것입니다. 특히 인터넷, 디지털 시대로 출판의 영역이 좁아진 것이 아니라 오히려 넓어진 것이며, 다만 종이의 책에서 다른 여러 형태의 책으로 바뀌어 가는 것인 만큼 수필가도 그런 변화에 적응하여 작품을 써야 할 것입니다. 이제는 읽는 수필에서 듣는 수필, 보는 수필로 보다 영역이 넓어진 것입니다."
윤형두 선생님께는 2남 1녀가 있으신데 모두 아버지와 함께 전문적으로 출판학을 공부한 출판학 석사들로서 범우사 부사장, 대학교수, 전문출판 기획자로 새 시대의 출판문화를 여는 주역들이었다.
범우사 사시(社是)인 '진리와 자유를 위하여, 새 시대의 새 지식을 위하여, 독서의 생활화를 위하여' 처럼 진리와 지식과 생활이 조화를 이루는 삶을 위한 윤형두 선생님의 깊은 뜻은 '그래서 책방 이름이나 출판사 명칭에도 꼭 '벗 우(友)'자를 썼다. 그리고 나는 성공 중에서도 가장 큰 성공은 재물이나 지위보다도 좋은 인간을 얻는 것이라 여겨왔다.'(수필, 아는 길을 걷겠다 중)와 같이 사람을 중시하는 인간 사랑으로부터 출발한 것이란 생각이 들어 더욱 존경스런 마음을 금할 수가 없었다.
한국수필의 새로운 방향성과 함께 변화의 시대를 살아가야 할 우리에게 누구보다도 많은 변화를 겪어오셨던 분답게 들려주시는 한 말씀, 한 말씀은 진정 우리가 어떻게 수필가의 길을 가야 할 것이며, 변화의 시대를 살아야 할 것인가를 보다 확실하게 눈뜨게 해 주셨다.
선생님의 수필 비명(碑銘)의 끝 부분이 유난히 가슴속으로 파고드는 날이다. "그리하여 많은 벗과 친지들이 '여기 인간답게 살다 간 한 무덤이 있다'고 비명을 새겨 주면서 못내 죽음을 아쉬워하는 내가 되어보자고."
주차장까지 나오셔서 배웅을 해 주시는 선생님의 따산 마음 때문일까? 아까까지도 쌀쌀하게만 느껴지던 날씨가 한껏 봄기운으로 넘쳐나고 있었다. 길가의 개나리가 더 이상 짙어질 수 없을 만큼 샛노랗게 피어 봄을 알리고 있었다.
< 수필과 비평> 2000년 5.6월호. 特別企劃 '원로 수필가 초대석'
첫댓글 선생님
평안하신지요?
선생님의 글
저희 수향 식구들과 나누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