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남의진열전(山南義陣列傳) 15
산남창의지(山南倡義誌, 1946년 간행)와 산남의진유사(山南義陣遺史, 1970년 간행), 산남의병 서훈 자료 등을 살펴보니 포항 71분, 청송 49분, 영천 43분, 경주와 의성 각 6분, 대구 4분, 칠곡 3분, 안동 ․ 영덕 ․ 울산 ․ 서울 ․ 상주 각 2분, 봉화 ․ 청도 ․ 창녕 ․ 하양 각 1분씩이다. 그리고 출신 또는 거주지가 기록되지 않은 분이 100여분이나 된다. 의진이 일어난 지역인 영천을 굳이 표현하지 않았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겠으나 전적지나 참진 의사들이 포항과 청송지역이 많다. 산남의진의 기념사업들을 영천에 국한시킬 수 없는 이유다. 또한 영천시만이 아닌 경상북도가 산남의진 추모제를 비롯한 선양사업에 관심과 지원을 아끼지 말아야 할 까닭이기도 하다.
장대익(張大翼) 義士
자는 치준(致俊), 관향은 인동(仁同). 여력(膂力)이 뛰어나고 명사수로 이름을 날렸다. 정미(丁未:1907)년에 우포장(右炮將)으로 활약하다가 입암전투에서 중상을 입고 돌아가서 은신하다.<山南義陣遺史 제5편 列傳 P479><山南倡義誌 卷下 P63>
황보근(皇甫覲) 義士
초명(初名)은 용(瑢), 자는 원직(元直), 관향은 영천(永川). 영천 신녕(新寧) 출신. 처음에 신녕지방을 책임지고 소모(召募)하였고 정미(丁未:1907)년에 족친 몇몇 사람과 문중을 대표하여 입진하니 나이가 24세요, 접전이 있을 때 선봉장으로 활약한 일도 있고 해서 군중에서 이사장(二四將)으로 불리었다. 입암전투에서 중상을 입고 귀가하여 치료하다가 적에게 피집되어 17회의 고문을 받고도 불복하였다. 출옥 후 광복운동에 협조하였고 해방 후 1946년 입암위령제와 영천기념비 추모식에서 생존 의사의 우대를 받고 경북도지사의 초청연에도 참석하였다. 1963년에 서거(逝去).<山南義陣遺史 제5편 列傳 P479><山南倡義誌 卷下 P63>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장준호(張俊灝) 義士
자는 경팔(景八), 호는 회산(回山), 관향은 옥산(玉山), 세거지는 칠곡(漆谷). 무자(戊子:1888)년 출생. 을사늑약 당시 18세로 나라의 위기에 의분심을 견디지 못하여 학업을 폐지하고 국내정세를 탐문하며 돌아다니다가 병오(丙午:1906)년에 영덕 청련사에서 청송 출신 임용상을 만나 유격부대 참모장(參謀將)이 되었다. 정미(丁未:1907)년에 산남의진 본진의 상영집사(上營執事)로 임명되어 활약하다가 정용기, 정환직 두 대장이 차례로 순국하고 최세윤 대장이 취임하여 유격전으로 재편할 때 청도 운문산 일대에서 임용상 대장 휘하의 중군장(中軍將)이 되었다. 왜적과 수십 차례의 접전을 치르고서 임용상 대장이 청하에서 적에게 잡힌 뒤 잔군(殘軍)을 이끌고 청송을 경유하여 팔공산으로 들어가다가 영천 화북면 자천에서 피금되었다. 5년형을 받아 옥고를 치르고 출옥한 뒤 1919년 3.1운동에 가담하였다가 다시 체포되어 고초를 겪으니 그 여독으로 1930년 43세를 일기로 서거하다.<山南義陣遺史 제5편 列傳 P480>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손수만(孫秀滿) 義士
자는 치옥(致玉), 관향은 월성(月城). 포항 죽장면 매현리 출신. 산남의진이 일어남에 손씨 문중이 남 먼저 문중회의를 열어 청장년을 징발하여 의병으로 내보낼 때 포함되어 입진하여 활약하였다. 의진이 무너진 후 처자를 거느리고 해안 등지로 피신하여 해촌인부(海村人夫)로 살았다 한다.<山南義陣遺史 제5편 列傳 P483><山南倡義誌 卷下 P6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