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습적 규범과 반성적 규범, 타율적 도덕성과 자율적 도덕성
‘도덕적 행위’는 인간관계에서 요구되는 규칙 혹은 원리, 즉 ‘규범’을 준수하는 행위이다(이돈희, 19쪽).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지키는 규범들은 우리 사회의 역사적⋅문화적 전통과 함께 주어진 것도 있고, 외래문화와 함께 유입된 것도 있으며, 시대적 특수성과 함께 새로 나타난 것도 있다. 정직이나 협동과 같이 거의 어느 사회에서도 지키고 있는 보편적 규범도 있고, 조상 숭배나 경로 정신과 같이 오랜 역사를 통해 전승된 것도 있고, 인권 존중이나 의사 존중과 같이 영속성을 띈 것도 있으며, 인사법이나 의식(儀式)과 같이 변화하는 것도 있다. 이러한 규범들은 사회적으로 결정된 행위 양식이니만큼 일종의 문화적 특징으로 일상생활에서 적어도 어떤 집단에 의해서 지켜지고 있는 것들이다. 아무리 새로 나타난 규범이라고 해도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습관화되기 위한 일정 시기를 가지고 형성된 것이다. 이와 같이 집단 혹은 사회의 구성원들에 의해서 일종의 습관으로 형성되어 우리의 행동을 통제하는 규범, 즉 집단 혹은 사회의 성원들이 다 같이 생활의 규칙 혹은 원리로 지켜가는 규범을 ‘인습적 규범’(conventional 혹은 customary norm)이라고 한다.
우리는 수많은 인습적 규범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다. 우리 사회의 문화권에서 결정된 규범, 특정한 종교에서 요구하는 규범, 특정한 가문에서 요구하는 규범, 혹은 어떤 직업 집단에서 요구하는 규범들이 있으나 이들을 선택할 때나 평가할 때 자신이 스스로 개발하여 신봉하는 규범들도 있다. 즉, 때로는 자신만이 가진 규범일 수도 있고, 때로는 다른 사람들도 가진 규범일 수도 있으나 타인과는 어떤 약속이나 합의에 의한 것이 아닌, 그러한 규범이 있다. 다른 사람들도 내가 가진 규범을 가질 수 있으나 단지 우연적인 것이지 결의에 의한 것이 아닌 경우가 보통이다. 예컨대, 매사에 대범하게 임하며 원만하게 살 것을 스스로 결심했다면, 이는 다른 사람도 그럴 수 있으되 우연한 결과일 뿐이다. 이와 같이 자신의 행동방식과 자신의 도덕적 성숙이나 완성을 위하여 스스로 자신의 행위를 통제하기 위한 규범을 형성할 때, 이러한 규범을 가리켜 ‘반성적 규범’(reflective norm)이라고 한다.
반성적 규범은 인습적 규범을 변용하거나 그것에서 추리하여 얻을 수도 있고, 그와는 관계없이 개발해낼 수도 있다. 상당히 많은 것은 우리의 생활에서 찾을 수 있는 교훈에서도 구하며 자신의 생활경험을 통하여 결정하기도 한다. 이러한 규범은 사회적⋅문화적⋅역사적으로 주어진 객관적 규범이라기보다는 자신의 완성을 위하여 결정한 개인적⋅주관적⋅사적 규범이다. 그것은 사회적 요구의 충족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아의 실현을 위해, 자신의 인격적 특징을 결정하기 위하여 스스로 자신에게 의무로서 부과한 규범이다. 이러한 반성적 규범에 기초하여, 한 인습적 규범을 다른 인습적 규범보다 중히 여기고, 어떤 상황에서 한 인습적 규범을 택하고 다른 것을 버리는 결정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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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습적 규범은 한 사회의 인간 경험의 역사와 더불어 정착되면서, 그 사회에 살고 있는 성원들의 도덕 생활을 통제하는 권위로 굳어진 것이다. 그리하여, 그러한 문화적 유산으로 규범을 물려받은 후세대들은 흔히 맹목적으로 추종하기에까지 이르게 된다. 말하자면, 그 규범을 신념으로 성립시킨 조건에 관한 엄격한 검토 없이 이를 타성적으로 혹은 맹목적으로 지키게 된다. 자신의 판단에 의해서가 아니라 사회적 규범을 권위로 인정하고 자신의 행동을 그것에 의존시킨다. 이러한 특징을 가진 도덕적 판단을 가리켜 ‘타율적 판단’(heteronomous judgement)이라 하고, 그러한 판단의 결과로 형성된 도덕적 신념을 소유했을 때 그것을 ‘타율적 도덕성’이라고 한다. 그와 반대로 자신의 입법(立法)에 의해서 근거를 밝히면서 정당성 혹은 합리성을 주장하는 판단을 일컬어 ‘자율적 판단’(autonomous judgement)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러한 판단의 결과로 형성된 신념을 소유했을 때 그것을 ‘자율적 도덕성’이라고 한다.
피아제와 같은 심리학자들이 타율적 도덕성과 자율적 도덕성을 구별하여, 전자는 인습적 규범을 준수하며, 후자는 반성적 규범을 준수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방식의 구분이 심리학적 연구를 위해서는 매우 편리할지 모르겠으나 옳은 구분이라고 할 수는 없다. 자율성과 타율성은 준수하는 규범이 인습적이냐 혹은 반성적이냐로 구분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행위자가 지적 미성숙성으로 인하여 혹은 외적 강제나 유혹에 못 이겨 어떤 규범을 준수하느냐, 아니면 자신의 도덕적 사고의 결과로 신봉하는 규범을 준수하느냐로 특징지어진다. 인습적 규범이라도 자의에 의하여, 즉 자신의 선택과 결정에 의하여 - 물론, 때로는 비합리적일 수도 있지만 - 신봉하고자 한다면, 그것은 자율성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물론, 가설적으로 말해서, 자율성을 형성한 사람은 아마도 인습적 규범보다 반성적 규범을 우선할 경향이 높을 것이다. 그리고 타율성의 소유자에게는 반성적 규범의 형성이 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반성적 규범은 자율성의 조건으로 충분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떤 자율성의 소유자도 인습적 규범을 완전히 버리지 않으며, 또한 인습적 규범만 선택할 수도 있다.
도덕교육에서 도덕적 자율성의 형성은 중요한 과제이다. 그러나, 그것은 언제나 건전한 도덕적 신념과 함께 의미를 가지는 것이며, 건전한 신념은 성숙한 판단력에서만 기대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므로 도덕성의 지적 조건에 관한 한, 판단 능력의 형성과 신장은 가장 중요한 교육적 과제이다.
* 출처: 도덕교육 (이돈희 저. 교육과학사) pp26∼31 요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