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자 순 임금(舜帝) 김붕래 1. 산서성山西省 만절필동(萬折必東)이란 말이 있습니다. 청해성에서 발원한 황하는 동서남북을 제 멋대로 종횡합니다. 그 큰 흐름은 감숙성의 성도인 난주(蘭州)에 이르러 북상해서 내몽고 중부를 관통하고는 동쪽으로 방향을 틉니다. 그러다 포두(包頭)를 지나 이번에는 급히 남하합니다. 계속 급류를 이루며 남으로 달리다가 오악(五嶽)의 서쪽 산인 화산(華山)을 저만큼 남겨두고 다시 동쪽으로 물줄기를 바꿉니다. 그리고는 낙양, 정주, 제남을 거쳐 황해를 온통 흙탕물로 만들며 5천여 km의 대장정을 마칩니다. 백번 천번 만번 그 흐름이 바뀌어도 마지막에는 동쪽 바다로 빠지는 황하의 흐름을 선비의 지조를 비유해 공자가 <만절필동(其萬折也必東似志)>이라 했습니다. 이 말은 속세를 헤치며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의 기구한 한 평생 같기도 하고, 목표 세운 삶이란 역경이 많지만 결국은 이루어진다는 집념의 표상이기도 합니다. 이 황하의 동쪽 그리고, 태항산(太行山)의 서쪽에 산서성이 있습니다. 산동(山東)과 산서(山西)라는 명칭은 그 사이에 태항산(太行山)이 세로로 놓여져 붙여진 이름입니다. 산서성은 황하가 북에서 남으로 흐르는 그 긴 흐름을 서쪽 경계로 하고, 하남성과의 동쪽 경계가 태항산입니다. 그러니까 산서성은 산과 강으로 둘러 쌓인 천혜의 요새인 셈입니다. 이곳은 춘추시대에 진(晉)나라였던 곳, 춘추 5패의 한 분인 진문공(晉文公,-重耳)의 족적이 빛나는 곳입니다. 개자추(介子推)라는 충신이 자신의 허벅지살을 베어 굶는 임금의 시장기를 달랜 곳이기도 하고, 관운장의 생가도 이곳에 있습니다. 태평성대의 표적이었던 요, 순 임금이 부지런히 백성들을 돌보던 땅이 바로 이곳 산서성 남부입니다. 순 임금의 능은 산서성의 동남 끝 운성시(運城市)에 있고, 요능(堯陵)과 요묘(堯廟)는 그 바로 윗동네 임분시(臨汾市)에 있습니다. 2. 순제릉舜帝陵
2010. 5. 2. 아침 8시. 산서성 운성시 서장하촌(西張賀村)에 있는 순제릉을 찾았습니다. 운성시 기차역에서 택시로 30여 분 거립니다. 10차선도 넘는 넉넉한 도로 양 편으로는 밀밭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는데, 순제릉에 도착해 보니 정문 앞에 꾸며진 광장만도 서울의 시청 앞 광장보다 넓게 꾸며져 있었습니다. 사진에 보이는 무지개 지붕이 순제릉에 이르는 정문이고, 그 앞에 보이는 돌 조각품들은 ‘우순성세도(虞舜盛世圖)’라 하여 열두 폭의 조각품들이 순임금의 치세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 조각 속에는 당시의 기라성 같은 인물, 황하를 잘 다스려 왕위를 선양 받은 우임금, 주 왕실의 선조 후직, 은나라의 조상 설 …… 이런 치세의 달인들이 임금을 보필해서, 순임금의 시대는 공자의 기림을 받은 태평성세가 된 것입니다 정문을 들어서니 앞이 가물가물 멀리 보일만큼 신도(神道)가 끝없이 펼쳐집니다. 좌우로는 우거진 나무 말고는 아무 장식이 없는 것이 오히려 신비감을 줍니다. 걷다보니 스피커에서 들릴 듯 말 듯 「엘리제를 위하여」가 울려 퍼지고 있었습니다. 여기는 4천 년 전 순임금의 궁궐터. 시공을 초월해 이런 곳에서 베토벤의 소품을 듣다니. 이렇게 해서 동양과 서양은 서로 만나고, 현재와 과거는 함께 있을 수 있는 거구나. 갑자기 주변 공기가 더 달콤해집니다. 아침이 풍선처럼 가벼워집니다. 음악에 취해 걸으며 귀와 눈의 차이점을 생각합니다. 눈은 즉시 모든 것을 받아들입니다. 단테는 첫눈에 베아트리체에게 함몰된 채 사랑의 열병을 어쩌지 못했습니다. 한 눈에 알아차리지 못하면 열 번 보아도 그 비밀은 풀리지 않습니다. 그런데 나에게 있어 귀는 무척 보수적입니다. 한 두 번 들어서는 그 내부의 묘미가 이해되지 않아요. 사실 나에게는 아직도 「엘리제…」와 「소녀의 기도 」가 그저 비슷한 피아노 소품입니다. 오늘 아침, 베토벤 대신 순임금이 즐겨 연주했다는 그 「남풍가(南風歌)」가 흘러 나왔다면, 나는 그게 뭔지 모른 채 원래 중국 음악은 좀 우중충하니까 - 그 정도로 넘어갔을 것입니다. 긴 신도가 끝 날 즈음 날아갈듯 한 무지개다리가 나왔습니다. 오른쪽이 아황교, 왼쪽이 여영교, 순 임금의 두 아내이자 요임금의 현숙한 두 딸의 이름을 따서 세운 다리입니다. 가운데 다리는 중화교(重華橋)인데 이는 순 임금의 이름이기도 합니다. 이 다리 아래 흐르는 금수하는 성과 속(聖俗)의 경계입니다. 돌문(石牌坊)을 나서면 정면에 흰 대리석으로 잘 다듬어진, 오현금을 타는 순임금의 석상이 나타납니다. 뒤로 천년 고백(古柏)의 위용에 비겨 하나도 손색이 없을 집채만 한 순임금의 좌상입니다. 그 우편에 세워진 화표(華表) 몇 주가 순임금의 석상에 비하면 왜소할 정도로 오직 순임금 홀로 우뚝합니다. 주변에는 아무 것도 배치되어 있지 않습니다. 아주 깔끔한 여백의 미에 주존(主尊)인 순 임금의 모습이 혼자 산 같이 침묵합니다. 순임금의 머리 위를 하얀 비둘기들이 날고 있었습니다. 카메라를 꺼냈을 때 그들은 이미 하늘 높이 날아가 버렸습니다. 하기는 비둘기 같은 새들은 멀리 볼 때 더 사랑스럽습니다. 가까이 보면 사람의 손때가 너무 묻어서 안쓰럽기도 하지요. 한 여름날의 신선한 아침이, 보고 듣는 것이 경이로웠습니다. 순임금이 나를 위해「엘리제」를 들려주고, 하늘에는 하얀 꽃들을 띄워 환영하는 것 같았습니다. 3. 효자 순은 기주(冀州 -현 산서성)사람이다. 황제의 둘째 아들이 창의이고, 창의는 전욱을 낳고, 낳고 낳고 ……하여 순은 황제의 8세손쯤 되는데, 아버지는 장님이고 어려서 어머니를 여의었다. 계모에게서 낳은 아들을 편애하여 순을 죽이려 했으나 오로지 효성으로 순은 부모를 섬겨 자식의 도리를 다했다. 지붕을 고치게 하고는 사다리를 치워 불을 질렀고, 우물을 파게 하고는 위에서 흙을 부어 메웠지만 그 때마다 순은 슬기롭게 살아나서 더욱 효성으로 부모를 모시고, 동생을 사랑하였다. 그가 역산에서 농사를 짓자 주민들은 밭의 경계를 서로 양보하였다. 뇌택에서 물고기를 잡았는데 마을 사람들은 서로 좋은 장소를 양보하였다. 또 하빈이라는 마을에서 질그릇을 구웠는데 (마음에 사심이 없기 때문에)일그러진 그릇이 없었다. 순이 사는 곳은 늘 사람이 모여들어 1년이 지나면 취락이 되었고, 2년이 지나면 읍이 되었고, 3년이 지나자 도시가 되었다. 이에 요임금은 순에게 갈포 옷과 거문고를 하사하였고 소와 양을 상으로 주었다. 순은 이렇게 20세에 이미 효자로 명성이 자자하였고, 30에 요임금에게 등용되었다. 50에는 천자의 일을 대행하다가 58세에 요임금이 붕어하자 3년 상을 마치고 61세에 제위에 올랐다. 순임금은 제위에 오른 지 39년 만에 남쪽을 순수하다가 창오(蒼梧 -호남성 남부)의 들에서 붕어, 구의산(九疑山) 영릉(零陵 - 호남성 永州市 寧遠縣)에 묻혔다. 요임금은 그를 등용할 때, 아황과 여영 두 딸을 순에게 아내로 시집보냈는데 이 두 딸은 남편이 죽은 소식을 듣고 동정호 군산(群山)에 이르러 애통하여 피눈물을 흘리다 죽었다. 이 피가 댓잎에 묻어 얼룩져, 소상반죽이라 일컬어지고 두 부인은 동정호의 여신이 된다. - 이런 자료가 『사기』오제본기 여기 저기 기록되어 있는 순임금의 내력입니다. <산해경>에는 장님인 그의 아버지가 자애로운 요임금의 얼굴을 보지 못해 하염없이 눈물짓자 효자인 순이 아버지의 눈물을 혀로 핥았는데 눈이 시원해지면서 못 보던 눈이 뜨였다는 야담도 있습니다. <장자(莊子)>인가 어딘가에는 이런 우문현답도 있습니다. 만약 순의 아비가 살인죄로 잡혀왔다면? 임금인 순은 당연히 아비에게 사형을 선고했을 것이다. 그리고는 그날 밤 몰래 아비를 들쳐 없고는 절해고도로 달아나 이름 없는 촌부가 즐겨 되었을 것이다-. 이 곳 운성의 순임금 능묘는 당 현종 때 개축하여 여러 번 중수한 것입니다. 정면에 사방을 압도하는 순제(舜帝)의 석상은 최근에 제작한 듯 별로 연륜의 흔적을 느낄 수 없었습니다. 4. 노래
순임금 석상을 지나면 일주문이 나옵니다. 도관고금(道貫古今)이란 현판이 참 좋았습니다. 효도라는 만고의 진리는 예나 지금이나 시대를 초월하여 관통하고 있겠지요. 그 뒤에 순제릉이 있습니다. 우리 경주의 왕릉과는 양식이 다릅니다. 무덤 위로는 잡초는 물론 커다란 측백나무까지 자라고 있습니다. 무덤 앞에는 「맹자」<이루장 하 순생>의 장구가 소개되어 있습니다. <孟子曰 舜生於諸馮 遷於負夏 卒於鳴條 東夷之人也. 文王生於岐周 卒於畢郢 西夷之人也> 순은 저풍에서 태어나 부하에서 천도하였다가 명조에서 돌아가셨으니 동쪽 변방 사람이다. 문왕은 기주에서 태어나서 필영에서 돌아가셨으니 서쪽 변두리 사람이다. 地之相去也 千有餘里 世之相後也 千有餘歲 得志行乎中國 若合符節 先聖後聖 其揆一也 땅이 서로 떨어져 있음이 천 리가 넘었고 세월의 선후가 천 년이 넘었지만 뜻을 얻어서 나라 가운데에서 행하신 것은 부절이 합쳐진 것과 같았다. 앞의 성인과 뒤의 성인은 그 성품이 하나이셨다. 저는 여기서 순이 '동이' 사람이라는 구절을 가지고 '우리 할아버지' 운운할 자신은 없습니다. '동이'란 개념이 역사에 따라 산동성이었다가, 요동쪽을 지칭하기도 했으니까요. 다만 천년이라는 시간, 천리라는 공간을 격해 있으면서도 두 성인이 똑 같이 추앙받는 이유는 아마도 서러운 사람들의 눈물을 잘 닦아 주셨던 그 빛나는 마음이라고 해석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공자는 요순시절로의 회귀를 가장 열망하였고, 주나라 문물제도를 본받고자 했던 것일 겁니다. 마지막 볼거리는 능 옆에 모셔진 석벽입니다. 순임금이 '남풍가'를 탄주하는 모습과 함께 그 가사가 적혀 있었습니다. 남풍이 훈훈함이여, 백성들의 원망을 풀어주리로다(南風之薰兮 可以解吾民之慍兮) 남풍이 때맞추어 붊옴이여, 백성의 재물이 풍족함이로다.(南風之時兮 可以阜吾民之財溫 兮) 공자님이 순임금의 소(韶)를 듣고 너무 좋아 석 달 동안 고기 맛을 몰랐다고 하는데, 하여간 노래란 천사들의 언어임이 틀림없을 것 같습니다 능원을 나올 때 스피커에선 중국 노래가 흘러나왔습니다. 물론 귀에 설은 음악입니다. 그러니 벌써 고도에 오른 햇볕은 따가울 수밖에. 어찌 거룩한 천사들의 속삭임을 한두 번 듣는다고 즐길 수 있겠습니까? '현(弦) 위의 인생'이란 한 20년 전의 영화였던가? 주인공은 장님 악사였는데, 줄이 1000번 끊어지면 눈을 뜰 수 있다는 스승의 말을 믿고. 한 평생 음악과 사는, 결국 그는 육체의 눈은 못 뜨지만 마음의 눈이 활짝 열리는. 음악을 통하여 그는 이미 성(聖)을 이루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예와 악은 고래로부터 내려온 인격의 수련이자 치국 이념이기도 했습니다. 요·순 시절은 말에 의한 설명이 아니라, 예와 악이 순수하게 발현됐던 태평성대였습니다. 그래서 공자님이 그 시절을 인간의 낙원으로 설정했던 것이려니 생각하니 삼황오제 시절이란 우리가 회귀하고자 또 하나의 신천지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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