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현/해설사
제주 4.3사건은 분단 후 일어난 가장 강력한 통일운동이다(한홍구*). 도올 김용옥 선생은 ”4.3은 결코 ‘무장봉기‘가 아니다. 그것은 민중항쟁의 가냘픈 호소일 뿐이다...미군정의 미곡수집령이야말로 제주 4.3과 여순항쟁의 가장 큰 근원적인 요인이다‘“라고 주장했다.
‘제주 4.3사건’을 다룬 대부분의 서사는, 토벌대의 민간인 학살에 희생된 25,000내지 30,000명의 ‘무고한’ 희생에 초점을 맞추다보니 많은 희생자들이 전개한 항쟁은 초점 밖에 남았다. 나에게 4.3 사건은 점령군 미군과 이에 빌붙은 세력의 압제와 폭력에 맞서 비폭력으로 처절하게 맞서 항쟁하다가 종국에는 무장 궐기하는 제주도민의 이야기다.
먼저 4.3사건의 단초인 1947년 3.1 절 기념식부터 들여다보자.
제주 북초등학교 기념식에만 삼만 여명이 모였다. 마지못해 참석한, 동원된 청중이 아니었다. 행진에는 이런 저런 플랜카드들이 앞장섰다. 어떤 현수막은 거적 데기로 만들었고 구호는 숱으로 썼다. 가난한 시절 최선의 노력으로 만든 시위 도구이다. 어떤 것은 장례행렬의 만장을 닮았다.
‘친일파 민족반역자 친 파쇼 분자의 근멸!’
”정권은 즉시 인민위원회로 넘기라’ 등등.
인민위원회에 정권을 넘기라고 주장하는데 그 정체가 무엇인가? 요즈음 말로 바꾸면 주민치위원회가 되겠다. 당시에 ‘인민‘이라는 용어는 ’동무’라는 말이 친구를 의미하듯 그냥 ‘백성’을 의미하는 말로 사용되었으니까. 일본이 항복하자 경찰들이 줄 행낭을 쳐 버렸다. 주민자치위원회는 빈 행정과 치안의 공백을 메우기 위하여 전국적으로 자발적으로 조직되었다. 이 섬에서 하나밖에 없는 정당인 동시에 모든 면에서 정부행세를 한 유일한 조직체였다.
제주도 인민위원회(위원장 오대진) 의 구성을 보면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가ㆍ 사회명망가 심지어 우익인사 까지 포함한 조직이었다. 존속기관이 전국에서 가장 길었고 중앙의 조직과도 일정하게 거리를 두었고 가장 독자성이 강했다. 인민위원회의 70% 정도가 좌익성향이었다. 당시 미군정이 실시한 여론 조사에 따르면 전국적으로 사회주의 지지 세력이 70%정도였다. 인민위원회가 백성을 적절히 대표하고 있다는 뜻이다. 비슷한 시기에 결성된 남조선 노동당(남로당)은 이 좌익인사들이 만든, 미군정에 정식으로 등록된 합법적인 좌익 정당이었다. 제주도 군정장관 베로스 중령이 1947년 7월 “좌. 우익의 정당은 물론하고 그 관계자가 관공리 직원으로 취직할 수 있다”고 한 것을 보면 좌익은 인민이라는 말처럼 아직까지 빨간딱지가 붙여지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제주도는 처음으로 해방구를 경험했다.
제주도 건국준비위원회가 결성한 날(45.19.10)로부터 시작해 미군이 제주에 들어오는 날(1945.119)까지 60일 동안 제주는 진정한 해방구였다. 도민은 외세의 개입 없이 자치적으로 인민위원회를 구성했다. 탐라국 이래 전후 후무한 일이다! 일본군은 이미 항복했고 미국도 소련도 아직 이 땅에 들어오지 않은 때. 제주도민은 스스로 지도자를 뽑았다. 지도자를 뽑을 때 좌익도 우익도 차별하지 않았고 독립 운동가를 주로 뽑되 온건한 친일파도 배제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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