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 108/언제 또 어떻게 만날까?
드디어 졸문 행진이 108편에 이르렀다. 옛글을 뒤져보니 ‘살며 생각하며’ 1편이 2013년 3월 26일 중국 계림과 양삭 여행기였다. 3년 하도고 5개월만이다. 그동안 나의 대처(大處)의 삶은 무슨 일들이 있었던 것일까? 하나하나 들춰보자면 ‘그때 그때의 일’을 다 알게 되겠지만, 새삼스레 그럴 필요는 느끼지 않는다. 좀더 늙어 할 일이 없을 때, 차분히 읽어볼 생각이다. ‘그래, 그때는 그랬었지’ ‘이러면서 내가 늙었구나’ 가늠해볼 수 있을 것이다.
아무튼, 새벽내내 반가운 비가 내렸다. 8월내내 진짜 36도를 웃도는 폭염과 열대야에 시달렸다. 사람도, 동식물도, 무생물도 모두 파김치가 되었다. 맥이 빠져 풀이 없고, 그냥저냥 어떻게 하루하루를 넘겼을 뿐이다. 6시 10분 출근길, 단 하룻밤 사이에 무더운 여름에서 선선한 가을이 되어 있었다. 정말 가을이 되기는 순식간이었다. 반팔 차림이 춥다니? 웃음이 절로 비어져 나왔다. 처서(處暑)가 23일이었으니, 더위가 가실 때도 되지 않았나. 지구촌은 이런 이상기온이 계속되다가 사람이 살지 못하는 혹성으로 변해 버리는 걸까. 그럼, 우리 아이들은 어떻게 살까? 우리야 그래도 60년을 살았으니, 살만큼 산 거라 치지만 말이다. 올 여름내내 들었던 ‘불길한’ 생각들이었다. 그러나, 이제 여지없이 가을이다. 그럼 그렇지. 이렇게 가을이 오는 것이겠지. 기분이 한없이 상쾌하다. 몸도 가벼워진 느낌이다. 자, 힘을 내어 출근을 하자.
배드민턴 2게임을 가볍게 마치고, 7212번 버스를 탔다. 늘 그렇지만, 조계사에서 풍문여고, 동십자각쪽으로 버스가 좌회전을 하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이 ‘인왕산’이다. 다음에 경복궁 앞을 지나다보면 ‘북악산’이 들어온다. 이 두 산은 ‘한양 500년’ 때만이 아니고 지금도 서울에서 비중이 굉장히 큰 산이다. 북악산은 알다시피 경복궁이 터를 잡게 한 주산(主山)이자 진산(鎭山)이고, 인왕산은 ‘우백호’에, ‘낙산’은 ‘좌청룡’에 해당된다. 인왕산은 해발 338m 밖에 안되지만, 정상에서 서울을 조망하기에 딱 좋은 산이다. ‘인왕산 호랑이’를 들어보았으리라(실제로 구한말때까지 살았다한다. 일본제국 군인들의 ‘대호(大虎)’작전에 씨가 말랐다). 선바위, 치마바위, 열차바위, 국사당…, 전설들이 주저리주저리 박혀 있다. 꼭 한번은 올라볼 일이다. 진경산수화의 대가 겸재 정선은 ‘인왕제색도’라는 명작을 남겼다. 그 산자락 아래가 중인들이 살았다는 서촌(西村)이다. 세종대왕이 태어났다고하여 ‘세종마을’이라고 불린다. 서촌은 ‘금천교시장’ 맛집으로 거듭나 시도때도 없이 북적거린다. ‘오래된 서울’이라는 책을 보면 서촌의 이야기는 차고 넘친다. 물소리가 너무 좋았다는 수성(水聲)동 계곡을 아시는가. 겸재의 그림으로 찾은 ‘기린교’를 복원해 놓았으며, 안평대군의 꿈이 서려 있는 무계정사(武溪精舍)도 정비되어 있다. 자하문고개를 막 넘으면 자그마한 ‘윤동주 문학관’도 볼 수 있다. 나의 출근버스는 늘 이 도로를 지난다.
단박에 가을이 되어버린 오늘 아침, 두 산의 전모를 보니, 산이 평소보다 우뚝 더 높아진 것같다. 맑고 드높은 하늘, 거의 두 달만에 ‘물 맛’을 본 서울의 산, 그동안 찌는 듯한 태양볕 아래 소나기 한 점 없이 견디고 버티느라 말 한마디 못하고 얼마나 힘들었을까. 산에 무한히 고맙고 미안한 생각까지 드는, 이 감상(感想)은 무엇일까. 내달에는 주말에 두 산을 오르며 ‘우리만의 대화’를 해야겠다고 다짐했다. 인왕산은 1976년 문민정부때, 북악산은 2007년 참여정부때 개방이 되어, 오늘날 우리가 한양도성 성곽길 18.6km를 순례할 수 있게 되었다. 세종대왕때 모두 석성(石城)으로 쌓았다는 이 성곽이, 고스란히 전해져만 왔다면, 우리나라는 그리스나 이탈리아를 하나도 부러워할 일없이, 단지, 이 돌로 쌓은 성곽만으로 세계적인 관광지가 됐을 것이 불보듯 뻔한 일이다. 세계의 모든 관광객이 이 특이한 성곽(중국의 만리장성하고는 종류가 다르다)을 순례해 보려고 줄을 이었을 것이다.
조상들이 물려준 이 엄청난 문화유산은 복원율이 70%도 채 되지 못하여 세계문화유산 잠정등재만 되어 있다. 선현들의 문집에도 ‘순성(巡城)놀이’라 하여 1년에 한번씩 이 성곽을 돌며 개인의 건강과 가정의 행복, 국태민안(國泰民安)을 비는 풍습이 있었다 기록돼 있다. 너무나 안타까운 문화재 훼손이 아니고 무엇인가. 해방 이후 서울도심을 재개발하면서 우리 손으로 훼손한 부분도 많긴 하지만. 숭례문으로 이어진 성곽을 끊은 것도, 서대문과 소의문을 부순 것도, 남산(목멱산)의 국사당 이전과 봉수대 성곽 등을 헐은 것 등 훼손의 대부분은 일본강점기때 그들에 의해 저질러졌다. 그들은 인왕산(仁王山)의 ‘왕’자에 ‘날 일(日)’변을 붙여 ‘인왕산(仁旺山)’이라고 바꾸기도 했다. 한 나라의 궁(宮)을 격하시켜 ‘창경원’이라고 하고 동물원과 식물원을 만들고 사꾸라를 허벌나게 심었다. 어디 그뿐인가,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에 있던 수많은 궐내각사(闕內各司. 궐안에 있는 관청)들을 헐어 부자재를 팔거나 일본에 가져갔으며, 그 터에는 무덤 위에 떼를 입히는 사초(莎草.잔디)를 깔았다. 전국 명산이라는 명산의 정수리에 쇠말뚝을 박아 민족정기를 끊고자 했다. 심지어는 창씨개명과 신사참배를 강요하고 조선어교육을 금지시켰으니, 참으로 천인공노할 짓이 아니고 무엇인가.
북악산 입구에는 유서깊은 4소문(四小門)의 하나인 ‘창의문’(彰義門)이 있다. 인조반정때 김류, 이괄 등 반란군이 들어온 곳으로, 자하문(紫霞門)이라고도 한다. 사무실에서 바로 보이는 곳이 북악산 백악마루(해발 342m)이다. 볼 때마다 기분이 좋아진다. 복원된 돌계단은 가파라서 오르기가 쉽지 않다. 바로 얼마 전까지 고사포가 있었다. 그 아래 숙정문(肅靖門)은 사대문(四大門) 중의 북대문에 해당한다. 조선시대엔 홍수와 여성들의 풍기문란을 우려해 365일 문을 닫아 놓았다던가. 극심한 가뭄에 기우제를 지낼 때에만 열었다는데, 지금은 연중 개문(開門). 서울이 밤마다 불야성을 이루는 환락가가 되어 ‘소돔과 고모라’의 도시가 된 까닭이 숙정문의 개문 때문이라며 풍수가들은 폐문을 주장한다는데, 이 노릇을 어찌할까. 상명대를 지나면 도로 옆에 위치한 정자가 바로 정(丁)자형 세칸 팔작지붕의 세검정(洗劍亭)이다. 지난해 영화 ‘사도(思悼)’를 보셨는가. 세검정 차일암(遮日巖)에서 세초(洗草)를 하던 장면말이다. 52년 재위 동안 영조는 치명적인 사고를 친다. 바로 한때는 엄청 총애하던 세자를 창경궁 편전 앞마당 뒤주에 가둬 1주일만에 죽게 만든 ‘임오화변(壬午禍變)’이 그것이다. 당시 11살의 왕세손 이산(李祘)은 절망했으나, 곧 정신을 차려 문무(文武)를 겸비하고자 피나는 노력을 했다. 어떻게든 할바마마의 눈에 들어 이 나라 임금이 되어야 했으므로. 승정원일기에는 ‘그날의 일’(임오화변)이 자세히 기록돼 있었다한다. 할바마마에게 상소를 올린다. “제가 임금이 되어 정치를 잘하려면 승정원일기의 ‘그날의 일’ 기록을 지워주소서” 영조는 “역시 국본(國本)”이라며 칭찬이 넘쳤다. 조선왕조실록을 편찬한 후에도 사초(史草)를 모두 이곳에서 세초했다. 그 종이들은 건너편에 있는 ‘조지서(造紙署)’에서 재활용을 했다고 한다. 지금은 표지석으로만 남아 있다.
세검정은 인조반정때 반란군들이 광해군의 폐위를 논의하고, 칼을 갈아 씻었다하여 유래된 명칭이라고 한다. 큰 장마가 지면 도성사람들이 이곳에 와 물구경을 했다고도 하고, 다산 정약용은 시회(詩會)를 벌이며 ‘유세검정(遊洗劍亭)’이라는 글을 남겼다. 세검정을 따라 올라가면 그 유명한 ‘백사실계곡’이다. 백사 이항복의 별장터가 있었다하며, 서울 도성에 이런 자연생태지역이 있을까 의심할 정도로 문화 사적인 백석동천과 자연이 잘 어우러진 곳이다 월요일에서 금요일까지 이 길을 다니며, 나는 조선의 역사(歷史)를 여실한 기록으로 남긴 선현들을 생각한다. 목에 칼이 들어와도 생생한 기록을 양보하지 않았던 사관(史官)들의 결기는 누구와 무엇을 위한 것이었던가. 조선시대보다 언로(言路)는 더 개방되어 있는가. 군신(君臣. 대통령과 국민)간의 소통은 문제가 없는가.
인근 세검정초등학교 정문 옆에는 ‘총융청(摠戎廳)터’라는 표지석이 있다. 총융청은 인조 2년(1654)에 수도 외곽의 방어를 목적으로 설치한 5군영 중의 하나이다. 사무실에 들어와 6층 옥상에서 북한산을 바라본다. 북한산 연봉이 한눈에 들어온다. 조망대치고는 최고다. 풍수적으로 중요한 의미가 있는 보현봉과 문수봉 사이에는 대남문이 있다. 문수봉 옆에는 승가봉이, 그 사이에는 사모바위가 있고, 승가봉 옆에는 유명한 ‘비봉(碑峰)이다. 추사 김정희가 처음 발견했다는, 진흥왕북한산순수비(원본은 국립박물관에 있다). 얼마나 역사적인 의미가 큰 곳인가. 모처럼 온 비가 개인 청명하기 그지 없는 오늘같은 날 아침에 북한산의 연봉들을 바라보니 흐뭇한 미소가 절로 지어진다. 비록 주마간산격이지만 직장생활 말년을 이런 사적, 기념물, 문화재들을 보면서 출근하는 나는 역시 행운아임이 틀림없다.
이제 ’살며 사랑하며‘라는 또 하나의 ’글 고개‘를 넘는다. 앞으로 어떤 이름으로 생활잡글들을 엮을지 모르지만, 조금 더 성찰하고 절제하며 깊이있는 글들을 쓰고 싶다. 그 출발이 언제일지 모르지만, 오늘 108편으로 쫑을 치며, 내일을 기약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