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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조지의 세계관>
- 저서와 연설문에서 뽑은 명구 -
헨리 조지 저
김윤상 역
머리말
필자는 헨리 조지의 대표작인 {진보와 빈곤}을 1989년에 그 축약본을, 1997년에 그 원본을 번역 출판한 바 있다. 그러나 {진보와 빈곤} 이외에도 헨리 조지가 일생 동안 남긴 수많은 저작에 담긴 멋진 논리와 빛나는 문장을 소개하고 싶은 마음이 늘 있었다. 그래서 이번에 헨리 조지의 여러 저서와 연설문 가운데 명구를 뽑아 담은 작은 책을 번역하게 되었다. 번역 대본은 다음과 같다.
The Economics and Philosophy of Henry George 1839-1897: Being Memorable Passages from His Writings and Addresses, Selected and Arranged by A. C. Auchmuty, London: Land & Liberty Press, 1980.
책에는 모두 11개 출처에서 192개의 항이 선정되어 있다. 항의 배열 순서는 원서와 같으나 소제목은 내용에 맞게 필자가 일부 변경하기도 하였다. 각 항을 찾기 쉽도록 하려고 원문에 없는 항별 번호를 붙였고 인명 또는 특이한 문구에 대해서는 책의 말미에 간략한 주를 두었다.
번역에서 일반 저작은 평어체를, 연설문은 경어체를 사용하였다. 일반 저작 중 {노동자의 상태}는 교황에 대한 공개서한 형식으로 되어 있어 경어체로 번역하는 것이 원칙이겠으나, 교황이 직접 언급되는 [31]을 제외하고는 다른 저작처럼 평어체를 사용하였다.
이 책에 수록된 문장의 출처는 다음과 같다. (발행순)
"모세"(Moses), 연설문, 1878.
{진보와 빈곤}(Progress and Poverty), 1879.
{토지문제}(Land Question), 1881.
{사회문제}(Social Problems), 1883.
"부정으로의 귀결"(Reduction to Iniquity: A Reply to the Duke of Argyil), 1884.
{보호냐 자유무역이냐}(Protection or Free Trade), 1885.
"빈곤이라는 범죄"(Crime of Poverty), 연설문, 1885.
"도둑질하지 말지니라"(Thou Shalt Not Steal), 연설문, 1887.
{노동자의 상태}(The Condition of Labor: An Open Letter to Pope Leo ⅩⅢ), 1891.
{갈피를 잃은 철학자}(A Perplexed Philosopher), 1892.
{정치경제학}(The Science of Political Economy), 1898(사후 출판).
2001년 11월 1일 번역자
Ⅰ. 빈곤의 문제
1. 진보 속의 빈곤
[1] 지난 세기에 살았던 프랭클린이나 프리스틀리 같은 인물이, 증기선이 범선을 대체하고, 기차가 마차를 대체하고, 수확기가 낫을 대체하고, 탈곡기가 도리깨를 대체하리라고 예견할 수 있었을까? 또 지구상의 사람과 가축을 모두 합한 것보다 더 큰 힘을 내면서 시키는 대로 인간의 욕구를 충족시켜 주는 엔진의 고동소리를 들을 수 있었을까? 또 사람이 손을 거의 대지 않는데도 숲 속의 나무가 문짝, 문틀, 창문가리개, 상자, 술통 등의 목제품으로 변하는 장면을 상상할 수 있었을까? 또 과거의 구두공이 구두창을 붙이는 것보다 더 적은 노동으로 장화나 구두가 상자 떼기로 생산되는 공장은? 또 여공 한 사람이 지켜보는 가운데, 과거에 수백 명의 건장한 직조공이 수직기로 짜던 것보다 더 빠르게 목화가 천으로 변해 나오는 공장은? 또 대형 샤프트와 거대한 닻을 만드는 증기 해머나 작은 손목시계를 만드는 정교한 기구는? 바위를 뚫는 다이아몬드 드릴이나 고래기름을 대체하는 석유는? 또 교환과 통신 시설이 개선되어 노동이 대폭 절약된다는 사실, 예를 들어 호주에서 도축한 양고기를 영국에서 싱싱하게 먹을 수 있다든지, 오후에 런던의 은행원이 발송한 주문이 같은 날 오전에 샌프란시스코에서 처리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 있었을까? 그들이 만일 이러한 수많은 발전을 예견했다면 인류의 사회 상황이 어떻게 되리라고 추리를 했을까?
사실 이 정도는 추리라고 할 것도 없다. 그들은 발전의 결과로 나타날 사회 상황을 마치 눈으로 보는 것처럼 예상했을 것이고, 마치 사막의 목마른 대상(隊商)이 바로 눈앞에 살랑거리는 수풀과 반짝이는 샘물을 언덕 위에서 바라볼 때처럼 심장의 고동이 뛰고 신경이 전율했을 것이다. 새로운 힘에 의해 사회가 근본에서부터 개선됨으로써 극빈층도 전혀 부족함을 느낄 수 없고 최하층도 생활물자의 결핍에서 해방될 것이라고 상상의 눈으로 내다보았을 것이다. 지식의 마술램프에서 나온 노예가 과거의 저주받은 노동을 대신하고 무쇠와 강철로 된 근육이 극빈 노동자의 생활을 휴일처럼 만들어 주어, 높은 자질과 고상한 본성이 자랄 수 있을 것으로 내다보았을 것이다.
그들은 또 물질의 풍요에 따른 당연한 귀결로 도덕 수준이 높아지고 인류가 꿈꾸어 온 황금시대가 이룩될 것으로 내다보았을 것이다. 어린이가 굶주림으로 못 크는 일이 없고 노인이 물자 부족으로 시달리는 일이 없으며 젊은이는 열심히 일하는 한편 찬란한 별빛 아래서 술잔을 기울인다! 악은 사라지고 불화는 조화로 변한다! 모든 것이 풍족한 곳에 어찌 탐욕이 있을 것인가? 빈곤이 사라진 세상에, 빈곤 또는 빈곤에 대한 두려움의 산물인 죄악이나 범죄나 무지나 잔인함이 어찌 존재할 수 있을까? 모든 사람이 자유인인데 누가 굽실거리며 살 것인가? 모든 사람이 평등한 곳에 어찌 압제자가 있을 것인가? ({진보와 빈곤})
[2] 어느 사회에서든 물질적 진보가 이룩되면 빈곤과 그 부수적인 문제가 같이 나타난다는 이 엄청난 사실을 통해 우리는, 진보가 일정한 단계에 이른 곳마다 존재하는 사회문제는 어느 지역의 특수한 사정에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식으로든 진보 그 자체에 의해 발생됨을 알 수 있다.
인정하고 싶지 않은 사실이지만, 금세기에 들어 생산력이 엄청나게 증가했고 또 지금도 가속적으로 증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극심한 빈곤을 퇴치하거나 고통받는 노동자의 짐을 덜어주는 경향은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빈부격차를 더 심하게 하고 생존경쟁을 더 치열하게 만들고 있다. 꼬리를 이은 발명의 덕으로 인류는 일 세기 전에는 꿈도 꾸지 못한 힘을 갖게 되었지만, 고도의 노동절약적 기계장치를 갖춘 공장에서 어린이들이 일에 시달리고 있다. 새로운 힘이 만개한 사회에서 대중이 자선에 의지해서 살아가거나 그 한계선상에 있다. 거대한 부의 축적 속에서 사람들이 굶주리고 있으며 갓난아이들은 나오지도 않는 엄마의 젖을 빨고 있다. 어느 곳에서든 재산을 탐내고 부를 숭상하는 것을 볼 때 궁핍에 대한 두려움의 힘을 알 수 있다. 약속의 땅은 신기루처럼 우리 앞에서 날아가 버린다. 지식나무의 열매도 손대면 부스러지는 소돔의 사과처럼 우리가 얻는 순간 변질된다.
부가 엄청나게 증대된 것도 사실이고 평균적으로 보아 더 안락해지고 여가가 많아지고 교양이 향상된 것도 사실이지만 이러한 개선이 일반화되지 못했다. 사회의 최하층은 개선의 혜택을 누리지 못하고 있다. 최하층의 상태가 어느 곳에서나 어느 면에서나 전혀 개선된 점이 없다는 뜻이 아니라, 생산력 증가에 기인한 개선은 어느 곳 어느 면에도 없다는 뜻이다. 소위 물질적 진보라고 하는 추세는, 건강하고 행복한 인생의 필수 요소를 기준으로 볼 때, 최하층의 상태를 개선해 주지 못한다. 아니 실은 최하층의 상태를 오히려 압박한다. 새로운 힘은 기본적으로 사회를 향상시키는 효과가 있지만 오랫동안의 희망과 믿음과는 달리 사회구조의 밑바닥에서부터 작용하지 않고 상층과 하층의 중간의 어느 지점에 작용한다. 마치 커다란 쐐기가 사회의 밑바닥이 아니라 그 한 가운데를 관통하는 것과 같다. 그리하여 분리점의 상층에 있는 사람들은 향상되지만 그 하층에 있는 사람들은 부서지고 만다. ({진보와 빈곤})
[3] 사회 진보 삼천 년에 아직도 신음소리가 높아만 가고 있습니다. "모르타르와 벽돌로 만든 것처럼 견고한 굴레가 우리를 온갖 방법으로 옭아매고 있습니다!" 진보가 삼천 년 동안이나 이루어졌는데도 어린아이들의 애처러운 신음소리가 들립니다!
사회는 진보하고 또 진보합니다. 철도가 대륙을 횡단하고 전선이 도시를 그물처럼 수놓습니다. 매일 새로운 발명품이 등장합니다. 매년 새로운 발전이 이룩됩니다. 그리하여 생산력이 증가하고 교환의 통로가 개척되고 확대됩니다. 그러나 못 살겠다는 소리는 날로 커지고 있습니다. 곳곳마다 사람들이 근심에 싸여 있고 빈곤에 대한 두려움에 떨고 있습니다. 인간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노동의 힘은 빠르게, 꾸준하게, 힘차게 발전하고 확대됩니다. 그러나 단순한 생존을 위한 싸움은 더욱더 어려워지고 있으며 노동은 어느 상품보다도 헐값으로 떨어지고 있습니다. 가득한 창고 옆에서 사람들은 굶주려 말라가고 추워서 떨고 있습니다. 교회의 그늘에는 빈곤에서 오는 죄악이 자라고 있습니다. (연설문, "모세")
[4] 많은 계층을 빈곤과 악에 빠뜨리는 나쁜 사회제도로 인해 사회가 입는 손실을 금전으로 나타낼 수 있다면 가공할 금액이 될 것이다. 영국에는 공적인 구호 대상으로 백만 명 이상이 등록되어 있다. 뉴욕 시 하나만 해도 비슷한 목적으로 연간 칠백 만 달러 이상을 지출하고 있다. 그러나 공공자금의 지출액과 자선단체 또는 개인의 지출액은 총 손실의 첫 항목이자 극히 작은 항목에 불과하다. 그 외에 현재의 부정의하고 불평등한 부의 분배로 인해, 사회가 현 생산수단을 가지고 얻을 수 있는 생산총량을 온전히 달성하지 못하는 사례를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자선사업으로 인해 노동의 잠재소득이 소멸되고 또 무기력하고 준비성도 없고 게으른 습관이 생김으로써 입는 손실. 빈곤계층의 사망률 특히 유아사망률 통계에서 알 수 있듯이 조기 사망으로 인한 엄청난 금전적 손실. 빈곤이 심화되면 더욱 늘어나는 유흥주점으로 인한 낭비. 도둑, 창녀, 거지, 부랑자 등 빈곤과 절망에서 생기는 사회의 기생충 같은 존재로 인한 손실. 이들로부터 사회를 방어하는 데 드는 비용. ({진보와 빈곤})
[5] 다섯 세기 전 영국 성인 남자가 부를 생산하는 능력은 오늘날에 비해 아주 보잘것없었다. 증기기관이 도입된 이래 기계 공업에 혁명을 일으킨 각종 발명과 발견이 없었음은 물론이고, 농업조차도 아주 미숙하고 생산성이 낮았다. 개량종 목초도 발견되지 않았고 감자, 당근, 무, 기타 오늘날과 같이 수확이 좋은 각종 식물이나 야채도 없었다. 윤작을 통한 이익도 잘 몰랐다. 농사도구도 삽, 낫, 도리깨, 조잡한 형태의 쟁기와 써레 등이 고작이었다. 가축도 지금에 비해 반 정도 크기 이상으로 자라지 못했고 양 한 마리의 털도 지금의 반에 못 미쳤다. 도로도 제대로 없었지만 그나마 상태가 아주 좋지 않았고 수레도 숫자가 적었을 뿐 아니라 성능도 조잡하였기 때문에 백마일 떨어진 곳은 사실상 오늘날 런던과 홍콩 사이처럼 또는 샌프란시스코와 뉴욕 사이처럼 교통이 어려웠다.
그러나 이 시기를 자세히 살펴보면 영국 노동자의 생활수준이, 상대적으로만이 아니라 절대적으로도, 5세기 동안 생산기술이 발전한 후인 오늘날의 영국보다 나았다. 당시의 노동자는 요즘의 노동자처럼 힘들게 일하지 않고도 더 잘 살았다. 직장을 잃고 빈곤 속에서 동냥질을 하게 될까, 가족이 굶어죽지 않기 위해 자선에 기대게 될까 하는 염려에 시달리지 않았다. 오늘날 19세기 부유한 영국 도처를 지배하고 있는 극도의 빈곤은 당시 훨씬 가난했던 14세기 영국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의술은 경험에 의존할 뿐 미신적이었으며 위생과 방역은 아예 없었다. 전염병도 자주 돌았고, 교통 때문에 풍족한 지역에서 어려운 지역으로의 물자 상통이 어려웠기 때문에 기근도 더러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처럼 풍요 속에서 굶어죽는 일은 없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사실은, 여성이나 어린이가 지금처럼 일하지 않았고, 노동절약적 기계류가 즐비한 오늘날의 미국 노동자도 달성하지 못한 하루 8시간 작업제가 당시에는 일반적이었다! ({보호냐 자유무역이냐})
[6] 미개 부족의 경우, 노동생산물 총량은 얼마 되지 않지만 각자 독립적 생활을 해나갈 능력이 있다. 각자 자신의 거처를 지을 수 있고 나무나 가죽으로 카누를 만들 수 있고 옷을 만들 수 있고 무기나 덫이나 도구나 장식품을 제조할 수 있다. 누구나 자기 부족이 알고 있는 자연에 대한 모든 지식을 안다. 예를 들면 식용이 되는 식물은 무엇이며 어디에 가면 캘 수 있는지를 안다. 짐승, 새, 물고기, 곤충이 서식하는 방식과 장소를 안다. 해와 별 또는 꽃의 방향과 나무에 붙은 이끼를 보고 길을 찾아갈 수 있다. 즉 모든 필요한 물자를 스스로 조달할 수 있다. 자기 부족에서 떨어져도 살아나갈 수 있다. 그리하여 자신이 속한 공동체에 대한 관계에서 자유로운 계약 당사자가 될 수 있다.
이 미개인과 문명사회의 최하층 노동자와 비교해 보라. 사회의 부 가운데에는 인간의 아주 기본적인 욕구를 만족시키는 데 필요한 물자도 많다. 그런데 노동자는 이 가운데 한 가지 물자 내지 그 물자의 아주 작은 한 부분을 생산하면서 산다. 노동자는 자기가 일하는 데 필요한 도구조차 만들 수 없으며, 자신이 소유하지도 않고 또 소유할 능력도 없는 도구로 일을 한다. 노동자는 미개인보다 더 장시간 더 힘들게 일을 하지만 미개인이 얻는 단순한 생활필수품 이상을 얻지 못한다. 그러면서도 미개인이 누리는 독립성을 잃고 산다. 자신의 힘으로 욕구를 직접 충족하지도 못하고, 다른 사람이 동시에 일해 주지 않으면 간접적으로 충족하지도 못한다. 이 노동자는 생산자와 소비자로 구성된 거대한 체인의 한 연결 부분에 불과하여 자신을 분리할 수 없다. 다른 사람이 움직이지 않으면 혼자서 움직일 수도 없다. 사회 속의 지위가 낮을수록 사회에 더 의존적이 되고 무엇이든 혼자 힘으로 처리할 수 있는 능력이 극히 줄어든다. 자신의 욕구 충족을 위해 노동을 행하는 힘조차 자신의 통제 밖에 놓인다. 다른 사람의 행동에 의해서 또는 자신이 영향력을 미칠 수 없는―마치 태양계에 대해 영향력을 미칠 수 없듯이―어떤 일반적인 원인에 의해서 이 힘이 박탈되기도 하고 회복되기도 한다. 그런데 이와 같은 원초적 저주를 은혜처럼 생각하는 시대가 되었다. 사람들은 단순한 육체노동이 그 자체로 악이 아니라 선인 양 그리고 수단이 아니라 목적인 양 생각하고 말하고 주장하고 법제화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노동자는 인간성의 본질적인 요소, 즉 신처럼 환경을 변화시키고 통제하는 능력을 잃고 만다. 노동자는 노예나 기계나 상품이 되어 버리고 어떤 점에서는 동물보다도 못한 존재가 되고 만다.
나는 미개 상태를 감상적으로 동경하는 사람이 아니다. 루소, 샤또브리앙, 쿠퍼의 자연사상을 순진한 어린이처럼 추종하는 것도 아니다. 나는 자연 상태가 지능적 물질적으로 빈곤하며 그 생활이 저급하고 협소하다는 것을 안다. 문명은 인간의 자연스러운 운명이며, 문명은 인간의 모든 힘이 해방되고 고양되고 세련된 것이라고 믿는다. 문명의 혜택을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는 처지에서, 미개 상태를 그리면서 아쉬워하는 수도 있지만 이는 인간이 반추동물을 선망하는 수가 있는 것과 같다고 하겠다. 그러나 현실에 직시하는 사람이라면 우리 문명의 핵심에는 극도의 미개인이라도 자기 처지와 바꾸고 싶지 않을 계층이 널리 존재한다고 결론 내리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테라델푸에고의 토인, 호주의 흑인, 북극의 에스키모, 고도로 문명된 영국의 최하층 중 하나를 골라 삶을 산다면 앞의 세 미개인의 운명 중에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 훨씬 나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부의 한 가운데서 빈곤에 처한 계층은 미개인이 누리는 인간적 자유도 없이 빈곤하기만 하기 때문이다. 생활의 협소함과 왜소함에서는 미개인보다 더 하면서 천부의 능력을 성장시킬 기회도 없기 때문이다. 미개인보다 더 너른 세상에 산다고 하지만 이는 누리지 못할 축복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진보와 빈곤})
[7] 아질 공작(Duke of Argyil)이 스코틀랜드 사람들이 "현대의 아테네"라고 자랑하고 있는 에딘버러에 간다고 하자. 지붕에서 활을 쏘아 맞힐 수 있는 거리 내에 교회가 스무 군데나 있는 그런 지역의 주택에서 사는 사람의 생활이 공작이 기르는 천한 개만도 못함을 알게 될 것이다. 또 공작이 그런 기괴한 건물의 계단을 걸어 올라가서 어두컴컴한 집에 들어간 다음 문을 닫고 암흑 속에서 이런 곳에 사는 사람이 어떤 생활을 할 것인가를 생각한다고 하자. 그런 후에 공작이 필자를 비판한다면 어떻게 될까? 또 공작이 자선기관에 (아, 정의가 없는 자선은 얼마나 공허한가!) 간다고 하자. 이곳에서는 엄마가 일터로 간 동안 굶고 지낼 아이들을 돌보면서 음식을 먹이고는 있으나 아이들의 사지가 영양 결핍으로 오그라들었음을 보게 될 것이다. 이곳에서는 나에게도 해주었듯이 공작에게도, 맨발로 누더기를 걸친 채 굶주리고 있는 어떤 여자 애에게 빵을 주자 여자 애는 눈을 들고 두 손을 깍지 끼고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베풀어주신 풍요에 감사드렸다고 하는 이야기를 해 줄 것이다. 그 이야기를 내게 해 준 사람은 그 심각한 의미를 전혀 생각하지 못했겠지만 그러나 나는 공작에게 묻고 싶다. 빵 한 조각에 감사하는 그 애는 하나님이 자기에게 마련해 주신 것을 과연 얻었는가 하고. 하나님이 그렇게 인색하시다는 말인가? 그렇지 않다면 그 아이와 하나님 사이를 무엇인가 또는 누군가 가로막고 있단 말이 아닌가? 그것이 사회제도라면 쉬지 않고 그 제도를 제거해 버리는 것이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우리의 의무가 아닌가? 그것이 사람이라면 그 목에 맷돌을 매어 바다 깊숙이 보내버리는 것이 낫지 않을까? ("부정으로의 귀결")
[8] 우리는 빈곤에 너무 익숙하다 보니 최고로 발전한 나라에서조차 수많은 사람의 빈곤을 그저 팔자라고 생각한다. 오늘날과 같이 고도로 발달한 문명 속에서도 건강한 생활을 위한 필수품을 구하지 못하는 사람과, 힘들여 일해도 그저 입에 풀칠이나 겨우 하는 사람이 많은 것을 당연하게 생각한다. 정치경제학 교수들은 이런 현상이 사회법칙의 결과이므로 불평할 이유가 없다고 가르친다! 성직자들은 이런 현상이 전지전능하신 창조주께서 하나님의 자녀에게 의도하신 삶의 모습이라고 설교한다! 만일 관중의 10분의 1도 제대로 구경을 못하게 극장을 설계하는 사람이 있다면 우리는 그를 엉터리라고 부를 것이다. 만일 잔치를 치르면서 손님의 10분의 9에게 대접을 하지 못할 정도로 음식을 조금밖에 준비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우리는 그를 바보 또는 그 이하의 말로 부를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빈곤에 너무 익숙하기 때문에 기독교리를 설교하는 성직자마저 우주의 위대한 설계자께서, 오묘한 자연을 만드는 능력을 갖추신 그 분께서, 이 세상을 이처럼 볼품없이 만들었으며 그로 인해 그 분의 피조물인 인간의 대다수가 결핍과 고통과 잔인한 노동에 시달리면서 정신력의 발전을 위한 기회를 갖지 못하고, 그래서 전 생애를 단순한 생존을 위해 바쳐야 하는 존재로 운명 지워졌다고 한다! ({사회문제})
2. 자연은 풍요롭다
[9] 물질의 비파괴성 또는 힘의 계속성으로 인해 인간은 자연력을 소진시킬 수도 없고 감소시킬 수도 없다. 생산과 소비는 상대적인 용어에 불과하다. 절대적으로 표현하면 인간은 생산도 소비도 할 수 없다. 모든 인류가 무한히 일한다고 해도 회전하는 지구를 원자 하나 만큼도 무겁게나 가볍게 할 수 없으며, 끊임없이 순환하면서 모든 운동을 만들어내고 모든 생물을 지탱하는 힘의 총계를 단 한 치도 보태거나 줄일 수 없다. 바다에서 나온 물은 반드시 다시 바다로 되돌아가며 자연이라는 창고에서 취한 식품도 취하는 순간부터 다시 그 창고로 되돌아간다. 한정된 면적의 토지에서 무언가를 취하면 그 토지의 생산성은 일시 줄어들 것이다. 되돌아가는 곳이 다른 토지일 수도 있고 그 토지와 다른 토지 내지 모든 토지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가능성은, 대상 면적이 넓어짐에 따라 줄어들다가 전 지구가 대상이 되면 사라지고 만다. ({진보와 빈곤})
[10] 생명은 생명유지에 필요한 힘을 소진시키지 않는다. 우리는 아무 것도 가지지 않은 채 우주에 태어났고 우리가 떠날 때도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않는다. 인간은, 육체만을 본다면 물질이 일시적으로 취하는 한 형태이며 운동이 변화하는 한 방식이다. 물질은 남고 힘은 지속된다. 줄어든 것도 없고 약해진 것도 없다. 이런 관계로 인구에 대한 지구의 한계는 공간의 한계뿐이다. ({진보와 빈곤})
[11] 생존물자를 제공하는 동식물이 여러 배로, 때로는 수천 배, 수만 배, 수억 배로 불어난다면, 고작 배수로 불어나는 인구가 최대한 증가하더라도 인구 증가는 생존물자 증가를 넘어설 수 없다고 해야 하지 않는가? 동식물계에서 각 종(種)은 재생산력을 통해, 증식의 한계가 되는 조건에 자연적, 필연적으로 압박을 가하지만 이런 조건은 어디에서도 고정되어 있지도 않고 최종적인 것도 아니라는 점을 생각해 보면, 이 점이 명백하다. 어느 종도 토양, 물, 공기, 햇빛의 궁극적 한계에 도달하지 않는다. 각 종의 실제적 한계는 다른 종이 경쟁자로서, 적으로서, 먹이로서 존재한다는 데 있다. 그리하여 인간은 자신의 생존물자가 되는 종의 생존을 제약하는 조건을 완화시킬 수 있고―어떤 경우에는 단순히 인간이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완화가 가능하다―따라서 인간에게 필요물자를 공급하는 종의 재생산력은 종전의 한계에 부딪쳐 맥을 못 추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증식력이 따라 잡을 수 없는 속도로 불어나 인간에게 도움을 주게 된다. 인간이 매를 사냥하면 다른 새가 증가하고, 덫을 놓아 여우를 잡으면 산토끼가 늘어나고, 개척자가 가는 곳에 꿀벌도 따라 가고, 인간이 사는 곳에서 생기는 유기물이 강으로 들어가서 물고기가 먹고산다. ({진보와 빈곤})
[12] 사람 아닌 곰이 유럽에서 북아메리카 대륙으로 건너왔다고 해도 현재의 곰의 숫자는 콜럼버스가 대륙을 발견했을 때보다 더 많지 않을 것이다. 아니, 오히려 더 적을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곰이 건너왔다고 해서 곰의 먹이가 더 늘어나지도 않았을 것이고 또 곰의 생활 조건이 더 개선되지도 않았을 것이며 오히려 그 반대의 가능성이 더 크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람의 경우, 미국에 국한시켜 말하면 과거 수십만에 불과했던 인구가 현재 4천5백만 명으로 늘어났으나 일인당 식품의 양은 과거보다 훨씬 늘어났다. 이로써 식품 증가가 인구 증가의 원인이 아니라 반대로 인구 증가가 식품 증가의 원인임을 알 수 있다. 즉 인구가 늘어났기 때문에 식품이 늘어났다는 것이다. ({진보와 빈곤})
[13] 자연이 인색한 곳에서 20명이 일하면 자연이 풍요로운 곳에서 한 사람이 생산하는 부의 20배보다 더 많이 생산한다. 인구가 조밀할수록 노동의 분업이 더 세밀하게 이루어지고 생산과 분배의 경제성이 더 높아진다. 그에 따라 진리는 맬서스 학설과 정반대가 된다. 우리가 상식적으로 상상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인구가 증가한다면, 문명상태가 일정할 때 많은 인구는 적은 인구보다 부의 상대적 생산량도 많고 필요물자의 조달도 쉽다. ({진보와 빈곤})
[14] 진정한 기독교 사회, 예수의 가르침을 입으로만이 아니라 행동으로 받드는 사회에서는 들에 핀 백합처럼 그 누구도 물질적인 부족함을 염려하는 일이 없을 것으로 저는 믿습니다. 물질은 충분하고도 남을 정도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극심한 생존경쟁을 통해 우리 모두에게 풍족한 물자를 진창 속에 뭉개버리고 있다는 데 있습니다. 우리는 서로 헐뜯고 빼앗으면서 이를 진창 속에 뭉개고 있는 것입니다. (연설문, "빈곤이라는 범죄")
3. 사회문제와 사고의 힘
[15] 양심이 우리에게 옳다고 알려주는 것과 생존을 위해 필요한 것 중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는 사회 상황은 도대체 누구의 잘못입니까? 저는 사회의 잘못이자 우리 모두의 잘못이라고 봅니다. 전염병은 재앙입니다. 콜레라를 이 나라에 가져오는 사람이 있다면, 콜레라를 막을 수 있으면서도 막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이런 사람은 범죄인입니다. 빈곤은 콜레라보다 더 지독합니다. 빈곤은 경기가 좋은 시절에도 전염병보다 더 많은 사람을 죽게 합니다. 여러 도시의 사망통계를 통해 평균수명이 가장 짧은 지역이 어디인지, 어린아이들이 파리처럼 죽어 가는 곳이 어디인지를 보십시오. 그곳은 바로 빈민지역입니다. 빈곤이라는 전염병의 창궐을 주의해서 살피지 않는 자, 이 전염병을 근절하려고 애를 쓰지 않는 자, 저는 이런 자를 범죄인이라고 부르겠습니다. (연설문, "빈곤이라는 범죄")
[16] 사회가 진보함에 따라 각 개인은 사회 전체의 문제를 걱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진보는 모든 사람을 더 긴밀하게 엮어 놓아 아무도 이를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이다. 법과 예절을 잘 지키면서 자기 가족을 돌보는 사람, 그러나 사회 전체의 행복에는 관심이 없고 발 밑에 짓밟히는 사람을 고려하지 않는 사람, 그러면서 때때로 빈민구호금품이나 내놓는 사람, 이런 사람은 진정한 기독교인이 아니다. 훌륭한 시민도 아니다. ({사회문제})
[17] 우리는 정치를 정치인에게만 맡겨 놓을 수 없고 정치경제학을 대학 교수들에게만 맡겨 놓을 수 없다. 국민 모두가 스스로 생각하여야 한다. 행동할 수 있는 자는 국민밖에 없기 때문이다. ({사회문제})
[18] 사람이 자기가 아무 것도 알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자기가 모든 것을 안다고 생각하는 것만큼이나 나쁘다. 이성을 활용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수 있는 일이 있다. 예수는 당대 석학의 비웃음을 샀고 고위 성직자의 박해를 받았으며 예절을 잘 지킨다는 사회는 자기가 무슨 짓을 하는 지도 모르는 자들의 여론을 통해 그를 십자가에 못박았지만 그의 가르침은 학자나 현인에게는 이해되지 않았어도 보통사람은 쉽게 이해할 수 있었다. ({갈피를 잃은 철학자})
[19] 사회문제에 관한 사고가 매우 혼란스럽게 갈피를 잃고 있는 것이나 많은 사람들이 부정의를―분명하게 알 지는 못해도―깊이 느끼면서도 결국 효과도 없고 위험하기까지 한 대책을 지지하게 되는 것은, 사회적 경제적 법칙에 대해 남보다 더 잘 안다는 사람들이 부정의의 소재를 밝히기는커녕 오히려 감추며, 일반인의 생각을 명확하게 해주기는커녕 오히려 혼란시키기 위해 노력한다는 데 대체로 기인한다. ({갈피를 잃은 철학자})
[20] 정치경제학은 학문 중에서 가장 단순한 학문이다. 정치경제학은 사회생활과 관련된 법칙을 지적으로 인식하는 작업이다. 그 법칙의 도덕적 측면은 사람이면 본성적으로 인식하고 있으며, 말씀으로 보통사람들에게 기쁨을 주었던 예수의 소박한 가르침에 다 들어 있는 내용이다. 그러나 기독교가 그런 것처럼 정치경제학도, 인간의 평등함과 형제됨을 부인하고 권위를 내세우고 반대 의견을 묵살하는 사회제도, 구태의연한 사고 습관에 의해 형성된 사회제도에 의해 왜곡되어 왔다. ({보호냐 자유무역이냐})
[21] 특수층의 이익은 일반국민의 이익에 반하면서도 국민의 생각에 영향을 미쳐서 오류가 진리인 것처럼 통용되도록 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는 점은 분명한 사실이며, 이 점을 간과하고는 우리 시대와 인간 또는 다른 시대와 그 인간의 역사를 이해할 길이 없다. 일반국민의 이익에 보탬을 주지 않고 개인만 부유하게 해주는 어떤 원인이 존재하며 그로 인해 소수의 사람들이, 명시적인 합의를 하지 않고서도 사실상 단결된 사고나 행동을 하기 때문에 그 숫자에 비해 큰 영향력을 발휘하게 된다. 이런 특수층과 일반국민의 관계는 정규군과 조직화되지 않은 군중과의 관계에 비유할 수 있다. 특수층은 그 이익이 특수한 것이기 때문에 결집력과 힘을 갖게 되고 사회 전반으로부터 상당한 부를 취하기 때문에 여론 형성력을 갖게 된다. 부유하면 사회적 존경을 받을 수 있는 여유와 문화, 환경과 상황이 가능하며 지식인도 부에 이끌린다. 반면, 다수의 것을 빼앗아 소수에게 주는 부정의로 의해 시달리는 사람은 바로 시달리기 때문에 생각할 여유를 잃고 자신의 사고를 적절히 표출하는 데 필요한 기회, 교육, 세련미를 박탈당한다. 이런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문맹자," "무식꾼," "속물"이 되고, 자신의 처지가 미약함을 알기 때문에 부유함이 줄 수 있는 장점을 가진 사람을 지도자 내지 인도자로 우러러보게 된다. ({정치경제학})
[22] 우리는 자신의 지식을 믿지 않는 게 좋겠다. 그 지식을 검증하기 전에는 소위 이성적인 추론이라는 것도 믿지 않는 게 좋겠다. 그러나 이성 그 자체를 불신해서는 안 된다....... 우리가 주변의 사물을 검토하고 또 우리 자신의 의식을 고찰할 경우에 우리의 이성은 스스로, 인간 이성의 힘은 불완전하고 실수와 실패가 있기 마련이라는 사실을 가르쳐 준다. 그러나 인간의 이성은 우리가 가질 수 있는 유일한 이성이며, 만일 인간의 이성이 명백하게 인식하는 것에 대해서도 무엇이 진리인지는 알 수 없다고 말한다면,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은 자신이 인간의 이성 이상의 것을 가지고 있다는 의미가 될 뿐 아니라 모든 사고의 타당성을 부정하고 정신 세계를 혼돈에 빠뜨리는 결과를 초래한다. ({정치경제학})
[23] 사회개혁은 소란과 고함으로, 불평과 비난으로, 정당 결성이나 혁명 추진으로 달성되는 것이 아니라 생각의 각성과 사상의 진보에 의해 달성된다. 올바른 생각이 없으면 올바른 행동이 나올 수 없고 올바른 생각이 있으면 반드시 올바른 행동이 나온다. 힘은 언제나 대중의 손에 있다. 대중을 억압하는 것은 그 자신의 무지이며 그 자신의 근시안적 이기심이다. ({사회문제})
[24] 누구도 자신이 영향력이 없는 사람이라고 여겨서는 안 된다. 그가 누구든, 어디에 있든 생각하는 사람은 빛이 되고 힘이 된다. ({사회문제})
[25] 공공문제에 관해 여성에게 기회를 주지 않는 것은 큰 실수이며 여성에게 참정권을 부여하면 사회문제의 해결에 활용할 수 있는 관심과 지성과 열성을 대폭 증가시킬 수 있다고 확신한다. 단순한 사회에서라면 한 쪽의 성만으로 공통의 문제를 충분히 해결할 수 있겠지만, 문명의 진보가 야기하는 복잡 미묘하고 중요한 공공문제를 해결하려면 남성만이 아니라 여성의 지성도 필요하다. 여성이 공공문제에 관심을 가지도록 하지 않는다면 그에 대한 올바른 해결을 얻을 수 없다. 중대한 공공문제와 관련하여 나타나는 무관심, 경솔함, 양심 결핍 현상의 상당 부분은 여성이 이러한 문제에 대해 적절한 역할을 하지 못하게 하는 데 원인이 있다고 나는 믿게 되었다. 여성이 관심을 갖지 않는 일에는 남성도 충분한 관심을 가질 수 없다. 여성이 지적으로 남성에 못 미친다고 말하는 사람은 있지만, 여성의 영향력이 적다고 누가 말할 수 있을 것인가? ({사회문제})
[26] 일반적인 주제에 관해 정확하게 추론하는 힘은 학교에서 배우는 것도 아니고 특별한 지식에서 나오는 것도 아니다. 그 힘은 조심스럽게 분리하고 결합하고 우리가 사용하는 단어의 의미를 자신에게 묻고 단계마다 확인을 하는 습관에서 나온다. 또 무엇보다도 진리에 대한 충성에서 나온다. ({갈피를 잃은 철학자})
Ⅱ. 용어의 정의
1. 토지와 노동
[27] 정치경제학에서 토지라는 용어는 생산에서의 자연적 수동적 요소, 인간이 접근할 수 있는 모든 외부 세계를 의미하며 힘, 질, 산출물을 포함한다. 그러나 일시적으로 인간의 신체를 구성하거나 인간의 생산물의 일부가 되어 인간 및 부의 범주에 속하는 것―이것도 시간이 지나면 다시 토지의 범주 속으로 되돌아가게 되지만―은 제외된다. ({정치경제학})
[28] 토지는 생산에서 수동적인 요소라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토지는 행동하지 못하며 사람이 토지에서 행동할 뿐이다...... 이 점은 토지라는 용어로 토지소유자를 상징적으로 나타낸다고 해도 동일하다...... 토지소유자라는 사람도 물론 자신의 노동이나 자본으로 생산에 기여할 수 있다. 그러나 토지소유자이기 때문에 기여한다거나 토지소유권을 통해 기여한다고 누가 생각한다면 마치 자신이 달을 소유하기 때문에 달빛이 환하다고 믿는 것처럼 웃기는 일이다. ({정치경제학})
[29] 나는 타자기에서 몸을 일으켜 창문으로 가서 아무리 보아도 물리지 않는 멋진 경치를 바라본다.
"무엇이 보입니까?" 일상의 대화에서 이런 질문을 받는다면 나는 물론 이렇게 대답했을 것이다. "땅과 물과 하늘, 배와 집, 옅은 구름, 나지막한 언덕 너머로 지고 있는 해를 바라봅니다."
그러나 정치경제학 용어에 대한 질문이라면 이렇게 대답해야 한다. "토지와 부가 보입니다." 토지란 자연적 생산요소이고 부는 인적 생산요소인 노동을 통해 자연적 생산요소를 인간의 욕구 충족에 적합하도록 변화시킨 것이다.
사람이 태어나기 전부터 존재했고 사람이 죽은 후에도 남아 있을 이 경치는 경제적인 범주로 보면 토지에 속한다. 노동이 생산한 것은 인간의 욕구를 만족시킬 수 있는 것이라면 경제적으로 부의 범주에 속한다.
그러나 창문 밖으로 보이는 이 해변에는 직사각형의 땅이 있는데 분명히 바위와 흙으로 바다를 메워 조성한 땅이다. 이것은 무엇인가? 일상 대화에서는 이것은 수면과 구분되는 토지이며 "인공 토지"라고 불러 그 생성 경위를 나타낼 수 있다. 그러나 정치경제학의 범주에는 "인공 토지"라는 용어는 설자리가 없다. 토지라는 용어는 오로지 순전히 자연으로부터 도출되는 생산력만을 의미하여 인공에 의한 것은 제외된다. 노동이 토지에 적용되어 도출되는 것은 무엇이나 부이다. 해수면 위로 솟은 이 직사각형의 땅은 돌과 흙을 채워서 만든 것으로서 토지가 아니라 부이다. ({정치경제학})
[30] 노동이라는 용어는 부의 생산에 들어가는 모든 형태의 인적 노력을 포함한다. 일상적으로는 머리노동과 손노동이 완전히 별개인 것처럼 이야기하기도 하고 노동이란 말이 근육을 쓰는 일만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모든 형태의 노동은, 즉 부를 생산함에 있어서 가축이 할 수 있는 수준 이상의 모든 인적 노력은, 인간의 손만이 아니라 머리도 쓴다. 이런 일은 노동자의 지능을 사용하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사실 노동은 외면상으로는 육체적인 것이지만 내면으로 보면 지적이며 엄격히 보면 정신적이다. ({정치경제학})
[31] 교황님은 그리스도가 목수의 아들이 되었고 또 스스로 목수로서 일함으로써 "노동으로 밥벌이를 하는 것은 수치가 아니다"는 점을 보여 준 사실의 중요성을 놓치고 계신 듯합니다. 이를 조금 다르게 표현하면, 그리스도가 다른 사람의 것을 빼앗지 않음으로써, 정직한 삶에는 수치를 느낄 것이 없다는 점을 보여주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인간은 크게 보아 노동자, 거지, 도둑의 세 계층으로 분류된다는 진리를 교황님이 생각하신다면 그리스도가 지상에 있을 때 노동자 이외의 다른 계층이 될 수 없었음도 이해하실 것입니다. 율법을 완성하기 위해 온 분은 하나님의 노동법칙을, 말씀으로서만이 아니라 행동으로 순종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지상에서의 일생이 이 법칙을 얼마나 완전하고 아름답게 보여주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보통 사람과 다름없이 연약한 아기로 지상의 생활을 시작하고 자연의 질서에 따라 부모가 자식에게 베푸는 사랑의 보살핌을 받았습니다. 성년기에 접어들어서는 대부분의 사람들처럼 평범한 노동으로 자신의 생계를 벌었습니다. 더 높은 단계, 노동 중의 최상의 단계에 가서는 도덕적 영적 진리를 가르치고 이에 감사하는 자의 사랑의 헌금을 받음으로써, 또 마리아가 발에 부은 향유를 거절하지 않음으로써, 생계를 벌었습니다. 제자를 선정할 때에도 토지소유자 등 다른 사람의 노동에 기대어 사는 독점자에게 가지 않고 평범한 노동자에게 갔습니다. 그리스도가 제자들을 높은 단계의 노동으로 부르고 도덕적 영적 진리를 가르치도록 내보냈을 때, 이 노동에 대한 사랑의 대가가 있으면 겸양할 것도 없고 수치감을 느낄 필요도 없이 이를 받도록 가르쳤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노동자는 임금을 받을 자격이 있다"고 하면서 노동에는 육체노동만 있는 것이 아니며 인생을 물질적, 지적, 도덕적, 영적으로 채우는 사람은 누구나 노동자임을 보여 주었습니다. ({노동의 조건})
[32] 연구원, 철학자, 교사, 예술가, 시인, 성직자는 부를 생산하지는 않지만 부를 생산하는 목적이 되는 효용과 만족을 생산할 뿐 아니라 지식을 획득, 전파하며 정신력을 자극하고 도덕심을 높임으로써 부의 생산능력을 크게 향상시킬 수 있다. 인간은 빵만으로 살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은 연료만 부으면 그 만큼 동력을 내는 엔진이 아니다. 고된 일을 하는 선원에게는 좋은 노래가 근육과 같으며, 훌륭한 군가는 전투에서 총검과 같은 작용을 한다. 기분 좋은 웃음, 고귀한 생각, 조화에 대한 인식은 물질을 다루는 능력을 향상시킬 수 있다.
심신의 노력을 통하여 부의 총량을 증가시키거나 인간의 지식을 늘이거나 인간의 삶을 더 높이 더 충실하게 만드는 사람은 누구나 넓은 의미의 생산자요, 일하는 자요, 노동자이며, 임금을 정직하게 버는 사람이다. 그러나 인류를 부유하게, 현명하게, 선량하게, 행복하게 하는 데 아무런 기여도 하지 않고 다른 사람의 노력에 기생하는 자는, 어떤 훌륭한 호칭으로 불리든 또 금전숭배자들이 이런 자를 아무리 귀하게 여기든 간에, 궁극적으로 거지이고 도둑일 뿐이다. ({보호냐 자유무역이
2. 자본, 가치, 부
[33] 자본은 노동을 지원하기 위해 생산에 투입되는 부라는 점에서 그 자체는 독자적인 생산요소가 아니며 일차적인 생산요소도 아니다. 자본이 없어도 생산이 가능하며 또 자본이 존재하려면 그 이전에 자본 없는 생산이 반드시 선행되어야 한다. 즉 자본이 앞서 존재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자본은 이차적이고 복합적인 생산요소로서 부의 생산 과정에서 노동과 토지가 결합한 이후에 그리고 그런 결합의 결과로 생긴다. 자본은 본질적으로 노동이며, 토지와 이차적으로 결합하여 큰 힘을 발휘하는 노동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문명생활에서는 아주 필요하고 또 중요하기 때문에 정치경제학에서 제3의 생산요소로 인정을 받는 것이다. ({정치경제학})
[34] 자본 그 자체는 아무 일도 하지 못한다. 자본은 언제나 부차적일 뿐 주동적인 생산요소가 되지 못한다. 주동적이 생산요소는 언제나 노동이다. 부의 생산에서 언제나 노동이 자본을 사용하며 자본이 노동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다. 이 점은 자본이 물자로서의 자본을 의미할 때만 옳을 뿐 아니라, 의인화하여 자본을 소유하는 사람을 의미할 때도 역시 옳다. 순수한 자본가 즉 자본을 소유하는 사람은 노동이 생산하는 것을 지원하는 힘을 가지고 있지만 순수한 자본가로서 이 힘을 행사할 수는 없다. 이 힘은 오로지 노동을 통해서만 행사할 수 있다. 이 힘을 행사하기 위해서는 스스로 최소한의 노동 기능을 수행하거나 그런 기능을 수행할 사람에게 일정한 조건을 걸고 자기의 자본을 맡겨야 한다. ({정치경제학})
[35] 그러므로 토지나 노동에 해당되는 것은 자본의 범주에서 제외해야 한다. 그렇게 하면 토지나 노동이 아닌 것, 이 두 가지 본원적 생산요소의 결합에 의해 생산된 것만이 남게 된다. 이 범주에 들지 않으면 자본이 될 수 없다. 즉 부(富)가 아닌 것은 자본이 될 수 없다. ({진보와 빈곤})
[36] 따라서 정부 공채는 자본이 아니며 자본을 대표하지도 않는다. 정부가 공채로 조성한 자본이 비생산적으로 소모되어 버렸다고 해보자. 예를 들어 대포의 화염으로 사라졌고, 전함으로 소비되었고, 행진, 제식훈련, 살상, 파괴를 하는 군인을 유지하기 위해 지출되었다고 해보자. 공채는 이미 파괴된 자본을 대표할 수 없다. 이런 공채는 자본을 전혀 대표하지 않는다. 공채는, 정부가 어느 시기에 가서 국민이 당시에 축적한 것 중에서 조세로 징수하여 공채 금액만큼 변제하며 또한 변제기까지 공채 금액에 해당하는 자본을 실제로 소유한다고 할 때 일정 기간 후에 얻을 수 있는 증가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방법으로 재원을 조달하여 수시로 보상한다는 엄숙한 선언일 뿐이다. 현대 국가에서 국민의 생산물 중에서 엄청난 액수를 떼어 정부 부채에 대한 이자로 지불하고 있는데 이것은 자본이 생산한 것도 아니고 자본의 증가분도 아니다. 이것은 엄격한 의미에서 이자가 아니고 노동과 자본의 생산물에 부과하는 조세라고 할 수 있으며, 그로 인해 임금도 줄고 진정한 의미의 이자도 줄어든다. ({진보와 빈곤})
[37] 이미 본 바와 같이 자본은 더 많은 부를 획득하기 위해 사용되는 부로서 욕구의 직접적 만족을 위해 사용되는 부와 구별된다. 혹은 교환 과정에 있는 부라고 정의할 수도 있다고 본다.
그러므로 자본은 부를 생산하는 노동의 힘을 다음과 같은 방법으로 증대시킨다.
(1) 노동의 능률을 높인다. 예를 들면 손 대신에 삽을 사용하여 조개를 더 쉽게 잡는 경우, 노를 젓는 대신 기관에 석탄을 때어 배를 움직이는 경우.
(2) 노동이 자연의 재생산력을 이용할 수 있도록 해 준다. 예를 들면 씨를 심어 더 많은 옥수수를 수확하거나 가축을 길러 수를 늘리는 경우.
(3) 분업을 가능하게 해 준다. 분업을 하면 한편으로는 개인의 특별한 능력의 활용, 기술의 습득, 낭비의 감소를 통해 인적 생산요소의 능률이 높아지고, 다른 편으로는 다양한 토양, 기후, 입지의 이점을 살려서 자연조건에 가장 적합한 부를 생산함으로써 자연적 생산요소를 최대로 이용할 수 있게 된다.
자본은, 통설과 달리, 노동에 의해 부로 전환되는 원료를 공급하지 않는다. 부의 원료는 자연에 의해 공급된다. 그러나 일부 가공된 원료와 교환 과정에 있는 원료는 자본이다. ({진보와 빈곤})
[38] 가치 현상은 기본적으로 어떤 원리의 표현이다. 분필, 핀에서부터 대양을 운항하는 일급 기선의 시설과 장치에 이르기까지 노동에 의해 생산된 것의 가치는, 결국 이런 것을 같은 장소에서 같은 형태로 재생산하는 데 들어가는 노동의 가치와 같다. 반면 노동에 의해 생산되지 않는 것도 때로는 소유의 대상이 되는데 그 가치도 역시 이런 것을 소유함으로써 획득하거나 절약할 수 있는 노동의 가치와 같다. ({갈피를 잃은 철학자})
[39] 사회의 부가 증가하였다고 할 경우에, 토지가 더 많아졌다거나 토지의 자연력이 더 커졌다거나 인구가 많아졌다거나 사회구성원 상호간의 부채가 증가하였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사회의 부가 증가한다고 하면 유형적인 물자, 상대적인 가치가 아니라 실질적 가치를 가지는 물자가 증가하였음을 의미한다. 예를 들면 건물, 가축, 도구, 기계, 농업이나 광업의 생산물, 공산품, 선박, 마차, 가구 등이 이런 것이다. 이러한 물자에 공통된 점은 이들이 인간의 사용 또는 만족을 위해 인간의 노동에 의해 변형된 자연물 또는 생산물로서 그 가치는 그런 물자를 생산하는 데 평균적으로 필요한 노동량에 의해 결정된다는 점이다. ({진보와 빈곤})
[40] 부는 노동의 유일한 목적이 아니다. 노동이 인간의 욕구를 직접 만족시키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소위 생산적 노동 즉 원료에 가치를 부여하는 노동에 있어서는 부가 목적이자 결과이다. 자연이 인간에게 부여한 것이 인간의 노동 없이 부가 될 수 없으며 노동을 하더라도 욕구를 만족시키는 힘을 가지는 유형적인 생산물이 나오지 않으면 부가 되지 않는다. ({진보와 빈곤})
[41] 축적된 부라는 개념에 대해 잠시 검토하는 것이 좋겠다. 사실 부가 축적될 수 있는 양은 아주 조금밖에 안 되며, 사회도 대부분의 개인이나 마찬가지로 손에서 입으로 먹고산다. 몇 가지 사소한 형태를 제외하면 부의 축적이 많이 이루어질 수 없다. 우주의 물질은 노동에 의해 원하는 형태로 변했다가 끊임없이 원 상태로 되돌아가는 경향이 있다. 어떤 형태의 부는 몇 시간, 어떤 것은 며칠, 어떤 것은 몇 달, 어떤 것은 몇 년 지속되기도 한다. 그러나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이어지는 형태의 부는 드물다. 매우 유용하고 수명이 긴 형태―예를 들어 선박, 가옥, 철도, 기계류 등의 부를 보더라도 노동을 통해 계속 보수하지 않으면 얼마 안 가서 못 쓰게 된다. 어느 사회에 노동이 중단되면, 마치 분수로 흘러가는 물을 잠그는 것처럼 부가 사라지고 말 것이다. 노동이 다시 시작되면 부는 금방 되살아난다. 축적된 부가 사회 유기체에 대해 하는 역할은 축적된 영양이 신체 유기체에 대해 하는 역할과 같다. 얼마간의 축적된 부는 필요하며 긴급 상황에 이것을 사용할 수 있다. 그러나 과거 세대가 만든 부는 현재 세대의 소비를 감당할 수 없다. 마치 작년에 먹은 음식이 현재의 힘을 공급하지 않는 것과 같다. ({진보와 빈곤})
3. 임금
[42] 부를 생산하는 모든 인적 노력을 노동이라 하고 임금은 생산물중 노동에 돌아가는 부분으로서 인적 노력에 대한 모든 대가를 포함한다. 그러므로 정치경제학에서 임금이라는 용어는 노동의 종류나 고용주를 통해서 받느냐의 여부와 관계없이 사용된다. 즉 임금은 노동의 대가이며 자본 사용의 대가나 토지 사용의 대가와 구별된다. ({진보와 빈곤})
[43] 임금이 자본에서 나온다는 정리(定理)는 현 정치경제학에서 가장 기본이 되고 가장 잘 확립된 것으로서 정치경제학의 발전을 위해 정력을 쏟은 모든 위대한 사상가들이 공리(公理)처럼 받아들이고 있는 것으로 나는 알고 있다. 그러나 이는 본질적인 오류이며 그 후의 수많은 오류를 낳은 원조인 동시에 현실적으로 가장 중요한 결론을 망쳐 놓았다는 점을 입증할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진보와 빈곤})
[44] 모든 정치경제학적인 추론에서 확실히 해야 하는 근본적인 진리는 고도의 선진 사회도 초기 사회의 발전된 형태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단순한 사회에서 명백히 나타나는 어떤 원리는, 분업이나 정교한 도구와 수단을 사용하여 형성된 복잡한 사회에서도―다소 덜 분명하게 보일 수는 있어도―원리 자체가 타당하지 않거나 반대의 내용을 갖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현대의 복잡한 생산과정을 단순화시켜 보면 고도의 분업과 정교한 생산 교환 기구에 참여하는 사람의 일도 결국 나무에 올라가서 과일을 따거나 썰물에 맞춰 바닷가에서 조개를 잡던 원시시대 사람의 일과 마찬가지이다. 즉 자신의 힘을 사용하여 자연으로부터 욕구를 만족시키려고 하는 노력이라는 것이다. 이런 점을 분명히 이해하고 또 사회의 모든 생산은 각 개인의 욕구를 만족시키기 위해 모두가 협동하는 것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각자가 자기 노력에 대해 받는 보상은 원시인이 그랬던 것과 같이 노력의 결과로 자연으로부터 얻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보자. 상상할 수 있는 가장 단순한 사회에서는 각자 스스로 미끼를 마련하고 스스로 물고기를 잡는다. 시간이 지나면 분업의 이익을 알게 되어 한 사람은 미끼를 마련하고 다른 사람은 물고기를 잡게 되지만 미끼를 마련하는 사람도 실제로 물고기를 잡는 사람과 같은 정도로 생산에 기여한다. 어선의 장점을 알게 되면, 모두 물고기를 잡으러 나가기보다 일부는 남아서 어선을 제조하거나 수리하게 되는데 이 때 어선을 제조 수리하는 사람들도 어부나 마찬가지로 고기잡이에 기여하는 셈이고 어부들이 귀항한 후 어선 제조 수리자가 먹는 물고기는 자신의 노동의 산물임이 분명하다. 이와 같이 분업이 잘 이루어지면 욕구 충족을 위해 모든 사람이 직접 자연을 상대로 일을 하기보다는 일부는 물고기를 잡고 일부는 사냥을 하고 일부는 딸기를 따고 일부는 과일을 채취하고 일부는 연장을 만들고 일부는 집을 짓고 일부는 옷을 만든다면―각자의 직접 생산물을 다른 사람의 직접 생산물과 교환하는 범위 내에서는 자기가 사용하는 물자를 생산하는 데 자기 노동을 투입하는 것과 같다―각자는 자신의 특정한 힘을 사용하여 자신의 특정한 욕구를 만족시키는 것과 같은 효과를 갖는다. 즉 각자의 보수는 자신이 실제로 생산한 것이라는 말이다. ({진보와 빈곤})
[45] 임금을 화폐로 받는 경우에도, 화폐가 노동이 있기 전에 주조되거나 인쇄되었더라도, 부의 증가에 기여한 자기 노동의 대가로 부 중에서 일정량을 인출할 수 있는 일종의 인출권을 받는 것과 같다. 노동자는 그 인출권을 가지고 자신의 욕구에 맞는 형태의 부를 조달할 뿐이다. 인출권인 화폐 또는 그 화폐로 얻는 특정 형태의 부도 자신의 노동력 유지를 위해 자본의 일부를 미리 받는 것이 아니며, 그 반대로 자신의 노동이 이미 증가시킨 부 또는 부의 일부를 표시할 뿐이다. ({진보와 빈곤})
[46] 네바다의 컴스탁(Comstock) 광산 지하 5천 피트에서 은광석을 캐는 광부도 다양한 교환 과정 덕분에 실제로 곡물을 수확하는 것과 같은 결과를 얻는다. 북극 빙원에서 고래를 잡는 것, 버지니아에서 담배 잎을 따는 것, 온두라스(Honduras)에서 커피 열매를 거두는 것, 하와이에서 사탕수수를 수확하는 것, 조지아에서 목화를 따거나 영국의 맨체스터나 미국의 로웰(Lowell)에서 목화를 가공하는 것, 오스트레일리아의 하츠마운틴(Hartz Mountains)에서 어린이용 나무 장난감을 만드는 것, 녹색과 황금색이 어우러진 로스앤젤레스의 밭에서 오렌지를 수확하고 교대 시간이 되면 몸이 아픈 아내에게 오렌지를 갖다 주는 것, 이 모든 것이 다 마찬가지이다. 공장에서 토요일 밤에 받는 주급은 전 세계에 대해 이 노동자가 일을 하였다고 확인해 주는 증거이며 노동자가 노동을 통해 얻고자 하는 물자를 손에 넣기까지 필요한 긴 과정의 첫 단계 교환이 아니고 무엇인가? ({진보와 빈곤})
[47] 노동이 항상 임금에 선행한다. 이것은 자가노동을 하고 직접 임금을 취하든 고용주에게서 임금을 받든 보편적인 진리이다. 그 어느 경우에도 일이 있어야 대가가 있다. 임금이 일당이건 주급이건 월급이건 연봉이건 간에, 또 완제품이 아닌 부품을 생산한다고 하더라도 노동자가 고용주의 이익을 위해 먼저 노동을 제공했기 때문에 고용주가 임금을 지급하는 것이다. 간혹 개인적 서비스에 대한 보수가 서비스에 앞서 선불되는 수도 있지만 이것은 자선이거나 보증금 내지 사람을 사는 돈이라고 할 수 있다. ({진보와 빈곤})
[48] 임금의 지불은 항상 노동의 사전 제공이 있었음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노동의 사전 제공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분명히 부의 생산을 의미하며 생산된 부가 교환용 또는 생산용이라면 그 부분은 자본이 된다. 그러므로 임금의 지불은 임금을 대가로 하는 노동에 의해 생산이 먼저 이루어지는 것을 전제로 한다. 일반적으로 고용주는 일정한 몫을 이윤으로 취하기 때문에 고용주의 입장에서 보면 임금이란 노동으로부터 받은 자본의 일부를 노동자에게 되돌려 주는 것이다. 또 노동자의 입장에서 보면 임금은 자신이 이미 생산한 부의 일부를 되돌려 받는 것에 불과하다. 이와 같이 임금으로 지불되는 가치는 노동에 의해 창출된 가치와 교환되는 것인데, 어떻게 임금이 자본에서부터 나온다고 할 수 있겠는가? 노동과 임금의 교환에 있어 고용주는 반드시 자기 자본에서 임금을 지불하기 전에 노동이 창출한 자본을 먼저 얻게 되는데 어떻게 고용주의 자본이 일시적으로라도 줄어들 수 있겠는가? ({진보와 빈곤})
[49]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자신을 위해 일하는 사람은 생산하는 가운데 자신이 생산하는 물품으로 임금을 얻으며, 그 생산물을 팔아 그 가치를 다른 형태로 교환하기도 한다. 남을 위해 일하고 정해진 임금을 돈으로 받는 사람은 어떤 교환 계약 하에 일하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은 노동을 제공하는 과정에서 임금을 창출하지만, 정해진 시점에 정해진 금액의 임금을 노동의 생산물이 아닌 다른 형태로 받게 된다. 이 때 노동자는 노동을 미리 제공하며, 교환은 임금을 받는 시점에 완료된다. 노동자는 임금을 생산하는 동안에 고용주에게 자본을 선불하며, 고용주가 작업 완료 전에 임금을 지불하지 않는 한 고용주가 자본을 선불하는 경우는 없다. 임금과 교환하여 생산물을 받은 고용주가 이를 즉시 재교환하든 일정 기간 보유하든 거래의 성격이 달라지지 않는다. 이는, 생산물의 최종 수령자가―수백 단계의 교환을 거쳐서 최종적으로 지구의 다른 쪽에 사는 사람에게 돌아갈 수도 있을 것이다―생산물을 어떻게 처분하든 거래의 성격이 달라지지 않는 것과 같다. ({진보와 빈곤})
[50] 인간 행동의 기본 원리는 최소의 노력으로 욕구를 충족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이 원리가 정치경제학에서 갖는 의의는 물리학에서 중력의 법칙이 갖는 의의와 같다. 이 원리와 자유의 조건하에서, 타인을 고용하려면 임금을 얼마나 지불해야 할까? 분명히 그 임금은 노동자가 자가노동을 할 때의 소득과 같게 될 것이다. 고용주가 노동자에게 자가노동의 소득 이상을 지불할 리가 없고―때로는 노동자에게 직업 전환에 드는 비용을 별도로 지불할 수는 있겠지만―노동자도 그 이하를 받을 리가 없다. 어느 노동자가 이보다 더 많은 것을 요구한다면 경쟁을 통해 다른 사람이 고용되고 만다. 고용주가 이보다 더 낮은 임금을 제시한다면 노동자는 자가노동을 하는 것이 더 유리하므로 아무도 응하지 않을 것이다. 이와 같이 고용주가 아무리 적게 주려고 해도 또 노동자가 아무리 많이 받으려고 해도 임금은 자가노동의 가치에 의해 정해진다. 일시적으로 임금이 이 수준을 초과하거나 미달한다고 해도 그 수준으로 복귀시키려는 경향이 즉시 발생한다. ({진보와 빈곤})
[51] 여러 직업간의 임금 차등을 야기하는 여러 가지 사정의 효과는 공급과 수요로 설명할 수도 있다. 서로 다른 직업의 임금은 노동의 수요와 공급의 차이에 의해 상대적으로 변한다고 하는 말은 전적으로 옳다. 여기에서 노동의 수요란 특정 서비스에 대한 사회 전체의 요구를 의미하며, 노동의 공급이란 현재의 조건하에서 특정 서비스의 수행에 투입할 수 있는 노동의 상대적인 양을 의미한다. 이것은 임금의 상대적인 차이를 설명할 수 있는 진리이기는 하지만 일반적인 임금률이 공급과 수요에 의해 결정된다고 한다면 이는 무의미하다. 공급과 수요라는 용어는 상대적인 용어이기 때문이다. 노동의 공급이란 다른 노동 또는 다른 노동 생산물과 교환되기 위해 노동이 제공되는 것을 말하며, 노동의 수요란 노동과 교환되기 위해 다른 노동 또는 다른 노동 생산물이 제공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렇듯 공급은 곧 수요이고 수요는 곧 공급이며, 사회 전체를 두고 본다면 공급과 수요는 동행하는 관계에 있다. ({진보와 빈곤})
[52] 여러 직업의 임금 간의 관계는 각 직업의 상대적 수준을 결정하는 사정의 변화에 따라 달라질 수 있지만, 어떤 직업의 임금이든 궁극적으로는 가장 낮고 가장 넓은 직업층의 임금에 의존한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이 직업층의 임금률이 상승, 하락하는 데 따라 일반적인 임금률이 상승, 하락한다는 것이다.
다른 모든 직업의 임금률에 기초가 되는 이 일차적이고 기본적인 직업은 자연으로부터 부를 직접 획득하는 직업이다. 따라서 이 직업에서의 임금법칙은 임금의 일반법칙이 된다. 그리고 이 직업에서의 임금은 노동이 관습적으로 투입되는 자연 중 생산력이 최저인 자연에서 노동이 생산할 수 있는 양에 의해 정해진다. 따라서 임금은 일반적으로 경작의 한계, 좀더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지대를 지불하지 않고 노동을 자유롭게 투입할 수 있는 자연의 최고생산점에 의존한다. ({진보와 빈곤})
4. 지대, 이윤, 이자
[53] 토지가 교환가치를 가지는 곳에는 언제나 정치경제학적 의미의 지대가 존재한다. 가치를 가지는 토지는 소유자가 사용하든 임차인이 사용하든 언제나 실현지대(rent actual)가 존재한다. 가치를 가지는 토지는 사용하지 않더라도 언제나 잠재지대(rent potential)가 존재한다. 토지가 가치를 갖게 되는 이유는 바로 이 지대 발생 능력에 있다. 토지소유권이 어떤 이익을 주기 전에는 토지는 가치를 갖지 않는다.
토지의 능력이 어느 정도이건 간에 토지사용권을 얻는 대가로 노동 또는 노동 결과를 지불하려는 사람이 없다면 지대도 생기지 않고 가치도 발생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 사용자가 지불하려고 하는 대가는 당해 토지 자체의 능력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고 대가 없이 사용할 수 있는 다른 토지에 대한 상대적 능력에 의존한다. ({진보와 빈곤})
[54] 뒤집어 말하면, 노동과 자본을 투입하여 어떤 생산을 하건 이 두 요소가 임금과 이자로 받는 대가는 지대를 지불하지 않고 사용할 수 있는 토지에서―즉 사용되는 것 중 최저생산 토지 또는 최저생산점에서―얻을 수 있는 생산물에 국한되기 때문에 지대법칙은 필연적으로 임금과 이자의 법칙을 포괄하게 된다. ({진보와 빈곤})
[55] 이제 풀, 꽃, 나무, 시내 등 모든 조건이 동일한 토지가 무한히 펼쳐져 있는 광대한 평원을 상상하고 여기에 최초의 이주민 마차가 들어 왔다고 해보자. 모든 토지가 다 좋기 때문에 이 사람은 어느 곳에 정착할지 마음을 정하기 어려울 것이다. 숲이나 물이나 비옥도나 환경이나 아무런 차이가 없어 그 풍요로움에 오히려 당황하게 된다. 보다 좋은 장소를 찾아 헤매다 지쳐서 결국은 어디에선가 멈추고 가정을 꾸미게 된다. 토양은 처녀지로서 풍요롭고 사냥감도 많으며 강에는 최상급의 송어가 번쩍인다. 자연은 그야말로 최적의 조건을 갖추고 있다. 이 사람은 인구가 많은 고장에서라면 부자로 지낼 수 있는 조건을 갖추고 있다. 그러나 이 사람은 가난하다. 다른 사람에 대한 심리적인 그리움은 그만 두고라도―이런 환경에서라면 반갑지 않은 손님이 없을 것이다―혼자라는 데에서 생기는 물질적인 불리함 속에서 일하지 않으면 안 된다. 많은 사람이 힘을 합쳐서 해야 하는 일이 있어도 자기 가족을 빼면 아무런 도움을 얻을 수 없다. 가축이 있다고 해도 신선한 고기를 즐길 수 없다. 비프스테이크를 먹으려면 소 한 마리를 다 잡아야 하기 때문이다. 이 사람은 스스로 대장장이도 되어야 하고 마차도 수리해야 하고 목수 일도 해야 하고 구두도 수선해야 한다. 말하자면 뭐든지 하지만 제대로 하는 것은 하나도 없는 상태가 된다. 자녀를 학교에 보낼 수도 없다. 그렇게 하려면 독선생을 모실 경제력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 사람 혼자서 생산할 수 없는 물자는 한꺼번에 많이 사다가 두고두고 쓰거나 아니면 없는 채로 지내는 수밖에 없다. 다른 일을 제켜 놓고 마을까지 먼 길을 자주 왕래할 형편이 못 되기 때문이다. 약을 구한다든지 송곳을 산다든지 해서 꼭 마을에 가야 할 사정이 생기면 며칠간 자신과 말이 일을 못하게 된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자연이 아무리 풍요롭다고 해도 가난하게 사는 수밖에 없다. 먹을 것은 쉽게 구할 수 있겠지만 혼자의 노동으로는 아주 원시적인 생활의 단순한 욕구나 충족시키는 정도밖에 할 수 없다.
이제 또 다른 사람이 이주해 온다고 하자. 광대한 평원의 어느 곳이나 조건이 동일하지만 이 사람은 정착지를 정하는 데 고심하지 않는다. 모든 토지가 동일하지만 이 사람에게 유리한 위치는 한 군데이다. 이 곳은 바로 먼저 이주한 사람이 정착한 곳 즉 이웃을 둘 수 있는 곳이다. 그래서 이 사람은 최초의 이주자 옆에 자리를 잡는데 이로 인해 먼저 이주한 사람의 상황은 대폭 개선되며 지금까지 불가능했던 여러 일이 이제는 가능하게 된다. 왜냐하면 두 사람이 서로 도우면 혼자서는 할 수 없었던 일을 해낼 수 있기 때문이다.
또 다른 사람이 이주해 오면 이 사람도 같은 이유로 먼저 온 두 사람이 살고 있는 위치에 정착할 것이다. 이주자가 계속 들어오면 첫 이주자의 주변에 작은 마을이 형성된다. 이제 노동은 혼자서는 얻을 수 없었던 효과성을 갖는다. 힘든 일을 같이 할 수 있는 사람이 생겼기 때문에 혼자서는 몇 해가 걸릴 일도 단 하루에 끝낸다. 한 사람이 소를 잡으면 다른 사람이 나누어 먹고 다음에 자기 소를 잡아 갚기 때문에 언제나 신선한 고기를 먹을 수 있다. 공동으로 교사를 들여 자녀를 교육시키면 첫 이주자가 독선생을 모실 때보다 훨씬 적은 비용이 든다. 마을 사람 중 누군가는 다른 마을에 가는 경우가 많을 것이므로 다른 마을에 일을 보기도 쉬워진다. 그러나 다른 마을에 가야할 일도 적어질 것이다. 대장간이나 마차수리점이 곧 들어 설 것이고 연장을 수리하는 데에도 종전보다 훨씬 수고를 덜 하게 된다. 상점이 생겨 원하는 것을 구할 수 있고 우체국이 생겨 외부와 통신도 할 수 있다. 구두수선공, 목수, 마구(馬具)기술자, 의사도 있을 것이고 소규모의 교회도 생긴다. 혼자 살 때는 불가능했던 여러 가지 만족감을 이제는 얻을 수 있다. 인간이 동물보다 더 우월한 부분도―즉 사회적, 지적 충족감도―느낄 수 있다. 일체감, 동료의식, 경쟁심 등으로 인해 생활은 넓고 다양하게 전개된다. 기쁠 때도 같이 기뻐해 주는 사람이 있고 슬플 때도 같이 슬퍼해 주는 사람이 있다. 모두 모여 옥수수도 까고 사과껍질도 벗기며 누비이불도 만든다. 장식도 없는 무도회장에 반주는 바이올린뿐이라고 해도, 그 선율 속에는 마술사가 있고 무도회에는 큐피드가 춤춘다. 결혼식에는 축하하고 기뻐해 주는 하객이 있고 장례 때에는 지켜주는 사람이 있다. 하관식에도 사람들이 참석하여 동정으로써 상주를 위로해 준다. 때로는 떠돌이 연사가 와서 과학과 문학과 예술의 세계에 대한 소식을 전한다. 선거철이 되면 후보자들이 유세를 하고 국가의 흥망을 둘러싼 논쟁을 하면서 지지와 한 표를 호소할 때에는 이곳 주민들이 자신의 존엄성과 힘을 느끼게 된다. 몇 달 동안 온다온다 하던 서커스단이 드디어 나타나서는 들판밖에 모르던 어린이들에게 모든 상상의 세계를 열어 보여 준다. 동화 속의 왕자와 공주, 갑옷을 입은 십자군과 터번을 두른 무어인, 신데렐라의 요술마차, 이야기 속의 거인의 세계를 보여 준다. 또 사자가 다니엘 앞에 엎드리거나 로마의 원형경기장에서 하나님의 성자를 갈기갈기 찢는다. 타조가 모래로 뒤덮인 사막을 회상하며, 낙타 옆에서 못된 형제들이 요셉을 우물에서 건져 노예로 팔아 치운다. 코끼리와 함께 한니발 장군이 알프스 산을 넘고, 마카베 형제의 칼이 번득인다. 햇빛 찬란한 쿠빌라이칸의 궁전처럼 장엄한 음악이 울려 마음을 설레게 한다.
이제 이주민에게 가서 이렇게 말해 보라. "선생은 과수도 많이 심었고 울타리도 튼튼하게 쳐두었고 우물도 팠고 창고와 주택도 지었습니다. 선생의 노동으로 인해 이 농장에 많은 가치가 생긴 것입니다. 그러나 선생의 토지는 전만큼 비옥하지 않습니다. 오래 동안 농사를 지었으니 이제 거름도 주어야 합니다. 모든 개량물 가치를 충분히 드릴 테니까 모두 나에게 팔고 가족을 데리고 다시 새로운 지역으로 이주하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그러면 그 사람은 웃고 말 것이다. 그의 토지에서 수확되는 밀이나 옥수수나 감자의 양은 전만 못하겠지만 이 토지로 인해 생기는 생활필수품과 편리품은 훨씬 많다. 이 토지에서 농사를 짓는다면 수확이 전만 못하지만 물자는 훨씬 많이 생긴다. 다른 이주자의 존재 즉 인구의 증가가 토지에 투입되는 노동의 생산성을 높였고 이러한 생산성 향상으로 인해 이 토지는 사람이 살지 않는 곳의 동일한 질의 다른 토지보다 우수한 토지가 되어 있다. 첫 이주자가 왔을 때처럼 다른 마을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토지 외에는 이 마을에 토지가 남아 있지 않게 되면 마을의 토지가치 즉 지대는 향상된 토지 능력 전부에 해당될 것이다. 그러나 위에서 가정하였듯이 동일한 토지가 끝없이 존재하여 사람들이 계속 퍼져 나간다고 해도 새 이주자는 첫 이주자와는 달리 사람도 없는 들에 정착하지 않을 것이다. 근접성이라는 유리함이 있기 때문에 이미 사람들이 정착해 있는 곳의 이웃에 정착하게 될 것이다. 마을의 토지가치 내지 지대는 변두리 땅 이상으로 그 토지가 갖는 유리함에 의존한다. 어떤 경우에는 생산의 한계가 종전과 같을 것이고 어떤 경우에는 생산의 한계가 상승할 것이다.
인구 증가가 계속되고 그로 인해 경제성이 높아지면 토지의 생산성도 높아진다. 첫 이주자의 토지는 이제 인구의 중심이 되어 상점, 대장간, 마차목공소 등이 이 토지 또는 그 주변에 들어서며 곧 이어 마을 규모로 또 소도시 규모로 성장하여 전체 지역 주민의 교환 중심지가 된다. 이 토지는 농업 생산성에 있어서는 처음보다 못하지만 그보다 높은 종류의 생산성이 발전하기 시작한다. 옥수수, 밀, 감자를 재배하는 노동에서는 처음보다 많은 생산이 생기지 않는다. 그러나 다른 생산자와의 근접성이 필요한 생산 분야에 투입되는 노동에서는, 특히 생산 과정의 최종 단계인 분배 단계에 속하는 분야에 투입되는 노동에서는, 훨씬 많은 대가가 발생한다. 밀을 재배하는 사람은 변두리로 이주하더라도 전과 같은 양의 밀을 생산하여 비슷한 부를 유지할 수 있다. 그러나 기술자, 공장 주인, 상점 주인, 전문직 종사자는 교환의 중심이 되는 곳에 노동을 투입하면 변두리에서 일하는 것보다 많은 수입을 올릴 것이다. 이러한 경우에 생기는 생산성의 초과분에 대해서는 토지소유자가 대가를 요구할 수 있다. 따라서 이 토지를 소유하는 첫 이주자가 자기 토지의 일부를 떼어 택지로 팔면 토지의 비옥도가 몇 배 높은 토지에서 밀을 재배하는 경우에도 받을 수 없는 비싼 가격을 받을 수 있다. 이렇게 해서 그는 고급 주택을 짓고 고급 가구를 들여놓을 수 있다. 이런 거래 내용을 달리 표현해 본다면, 토지사용자는 인구 증가로 인해 토지가 갖게 된 높은 생산성을 이용하는 대가로 토지소유자를 위해 고급 주택과 고급 가구를 마련해 주는 셈이 된다.
인구가 자꾸 증가하면 토지의 효용이 엄청나게 커지고 토지소유자의 부도 크게 불어난다. 마을이 커져서 센트루이스, 시카고, 샌프란시스코와 같은 대도시가 되었고 또 계속해서 커진다. 이곳에서의 생산은 최고의 기계와 최선의 설비를 통해 대규모로 이루어진다. 노동의 분업도 극히 미세하게 이루어져서 능률성이 몇 배로 증가한다. 상품 교환의 마찰이나 손실이 극소화되어 그 양과 속도가 엄청나게 증가한다. 이곳은 최초의 한 가족으로부터 출발하여 이제는 거대한 사회 기구의 심장이자 두뇌가 되었다. 여기는 인간 세계의 거대한 중심의 하나가 되었다. 모든 도로, 모든 흐름이 모든 주변 지역에서 이곳으로 들어온다. 여기는 판매할 물건이 있으면 시장이 되고 매입할 물건이 있으면 다양하고 풍부한 재고가 있다. 이곳은 지적 활동의 초점이며 정신의 교섭에서 나오는 지적 자극이 생기는 곳이다. 여기에는 거대한 도서관, 지식의 창고, 학식이 깊은 교수, 유명한 전문가가 있다. 박물관, 미술관이 여기에 있으며 모든 희귀하고 소중한 물건, 최고급 물건도 있다. 세계 각처에서 모여든 위대한 연기자, 웅변가, 성악가도 이곳에 있다. 간단히 말해서 이곳은 모든 방면에서 인간 생활의 중심이 된다.
이 토지가 노동에 제공하는 이익이 너무나 크기 때문에, 한 사람이 말을 몰고서 땅을 가는 정도가 아니라 지상으로부터 여러 층을 올린 건물에서 그리고 지하에서는 수천 마력을 내는 기관이 가동되는 가운데 수천 명의 노동자가 일하는 곳도 여러 군데 생긴다.
이 토지에 결부되는 모든 유리함은 이 토지가 아닌 곳에서는 누릴 수 없다. 이곳이 인구의 중심이며 교환의 초점이자 고급 산업이 입지한 곳이기 때문이다. 인구 밀집으로 인해 이 토지에 결부된 생산력은 토지의 비옥도가 수백 배, 수천 배 증가한 것과 맞먹는다. 그리고 이 토지의 지대는 이 토지와 사용 토지 중 최열등지 간의 생산성 차이를 의미하므로 당연히 상승한다. 이 토지의 첫 정착자 또는 그에게서 권리를 승계한 사람은 이제 거부가 되어 있다. 이 사람이 립 밴 윙클처럼 일을 않고 잠만 잔다고 해도 그 동안 인구가 증가하기 때문에 역시 부자가 된다. 이러한 토지를 한 조각만 소유하여도 기계기술자보다 더 많은 소득이 생긴다. 어떤 땅은 금화로 포장해도 좋을 만큼의 값으로 거래된다. 중심 도로에 선 높은 빌딩은 화강암, 대리석, 철, 판유리 등의 건축자재를 쓰고 호화스런 마감재, 각종 편의시설로 가득 차 있다. 그러나 이런 건물도 바닥의 토지가치에는 미치지 못한다. 그런데 이 토지는 최초의 이주자가 정착했을 때 즉 아무런 토지가치를 갖지 않았을 때와 달라진 것이 없는 동일한 토지이다.
인구 증가가 지대를 상승시키는 이런 모습은 진보하는 지역에서라면 누구나 직접 목격할 수 있다. 그 과정이 바로 눈앞에서 전개되고 있기 때문이다. 사용되는 여러 토지간의 생산성 차이가 커지면 지대 상승폭도 커진다. 이러한 결과는, 인구 증가로 인해 필연적으로 열등한 토지를 추가 사용함으로써 생긴다기보다는 인구 증가가 기존에 사용하던 토지에 더 높은 생산성을 부여하기 때문에 생긴다. 지구상에서 가장 비싼 토지, 지대가 제일 높은 토지는 그 자연적 비옥도가 특히 높은 토지가 아니라 인구 증가로 인해 생긴 효용이 특히 높은 토지이다. ({진보와 빈곤})
[56] 이윤은 우리의 탐구와 분명히 무관하다. 우리는 총생산이 토지, 노동, 자본의 대가로 나누어지는 원리를 찾으려고 한다. 그런데 이윤이라고 하는 어휘는 이 세 부분 중 어느 하나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정치경제학에서 말하는 이윤은 위험부담에 대한 보상, 기업관리에 대한 임금, 자본 사용에 대한 대가라는 세 부분으로 구성된다. 이 셋째 부분은, 자본 사용의 대가는 모두 포함하지만 그 밖의 것은 전혀 포함하지 않는 이자의 범주에 속한다. 기업관리에 대한 임금은, 인간의 노력에 대한 대가는 모두 포함하지만 그 밖의 것은 포함하지 않는 임금의 범주에 속한다. 위험부담에 대한 보상은 어디에도 들어 갈 곳이 없다. 사회의 모든 거래를 종합해 보면 위험부담이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진보와 빈곤})
[57] 부의 분배에서 추상적인 용어로서의 이자는 자본 사용에 대한 모든 대가를 포함하며, 차용자가 대여자에게 지불하는 것에 국한되지 않는다. 또 위험부담에 대한 보상은 (일상 용어로서의 이자의 상당 부분이 여기에 해당되지만) 제외된다. 위험부담에 대한 보상은 여러 분야의 자본 사용 대가를 균등하게 하는 작용을 할뿐이다. ({진보와 빈곤})
[58] 또 같은 사람에게도 좋고 다른 사람―이론과는 거리가 멀고 돈벌이에만 밝은 어느 무식한 사업가―에게도 좋은데 이렇게 말해 보자. "어느 작은 마을이 있다. 이 마을이 10년 후에는 큰 도시로 성장하여 마차 대신 기차가 다니고 기계류와 기술이 많이 발달하여 노동력의 효과가 대폭 상승한다고 하자. 그러면 10년 후에 이자율이 높아질 것으로 보는가?"
그가 대답할 것이다. "아니다!"
"그러면 단순노동의 임금이 오르겠는가? 노동 이외에는 가진 것이 없는 사람들이 독립적인 생활을 하기가 쉬워지겠는가?"
그가 대답할 것이다. "아니다. 단순노동의 임금은 오르지 않는다. 오히려 더 내릴 가능성이 많다고 본다. 순전히 노동만 하는 사람은 독립적 생활을 하기가 쉬워지지 않고 오히려 더 어려워질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그렇다면 오르는 것은 무엇인가?"
"지대 즉 토지가치이다. 당신도 토지를 구입해서 보유하도록 하라."
이러한 상황에서 이 사람의 조언에 따른다면 더 이상 일할 필요가 없어진다. 그저 가만히 앉아서 담배나 피우고 있으면 된다. 나폴리나 멕시코의 거지처럼 누워 있어도 좋다. 풍선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든지 땅을 파고 지하로 들어가도 된다.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또 사회의 부에 아무런 보탬을 주지 않고 있더라도 10년 후에는 부자가 되어 있을 것이고 새로운 도시의 호화주택에서 살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도시의 공공건물에는 빈민구호소가 설치되어 있을 것이다. ({진보와 빈곤})
Ⅲ. 사회 생활의 법칙
1. 정치경제학
[59] 현재 정치경제학이란 학문이 도대체 존재하는가, 즉 자연적인 경제법칙에 대한 우리 지식이 학문이라는 이름을 붙일 만한 양과 깊이를 가지는가에 대해 논쟁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어느 곳에서나 그 법칙의 지배를 받고 있음을 인식하는 사람간에는 이런 학문의 가능성에 관해 이론이 있을 수 없다. ({정치경제학})
[60] 자연현상에만 법칙이 있는 것이 아니다. 물질과 운동의 법칙처럼 정신과 도덕의 세계에 그리고 사회의 성장과 사회생활에 적용되는 확고한 법칙이 있다. 사회생활을 건전하고 행복하게 만들려면 이러한 법칙을 발견하여 그에 조화되는 행동을 하여야 한다. ({사회문제})
[61] 정치경제학은 도그마의 집합체가 아니다. 정치경제학은 사실의 집합체에 대한 설명이다. 정치경제학은 일정한 현상 속에서 상호관계를 추적하고 원인과 결과를 밝히는 학문이며 이 점에서, 연구대상은 달라도, 자연과학과 같다. 정치경제학은 확고한 기반에서 출발한다. 정치경제학은 최고의 인정을 받는 진실에서부터 논리를 연역한다. 이 진실은 우리 모두가 인정하는 공리이다.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사고하거나 행동하면서 늘 이 공리에 기초를 두고 있다. 이 공리는, 물체는 최저 저항선을 따라 움직이려 한다고 하는 물리학의 법칙을 형이상학적으로 표현한 것에 불과하다. 즉 사람은 최소의 노력으로 욕구를 충족하려 한다는 것이다. 정치경제학은 이와 같이 확실한 근거에서 출발하며 분명한 방법을 통해 논리를 전개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정치경제학은 기하학과 같은 엄밀성을 가진 과학이라고 할 수 있다. 기하학은 공간에 관해 비슷한 성격의 공리에서 출발하여 비슷한 방법으로 결론을 얻으며 옳게 도출된 결론은 그 자체로 명백하다. ({진보와 빈곤})
〔62] 최소의 노력으로 욕구를 충족시키려는 성향은, 노동이 불편했던 경험으로 인해 이를 피하려고 하려는 데서 나온 것인지 아니면 그보다 더 심층적으로 인간의 내면에 자리잡고 있는 원리에서 비롯된 것인지 간에, 너무나 보편적이고 예외가 없어서 변함없는 원리 내지 추론의 안전한 기초가 되는 자연법칙이라고 할 수 있다. 자연법칙은 연역과 설명을 도출할 수 있는 확실한 기반이며 또 유일한 기반이다. 정치경제학의 근본법칙은 바로 이 자연법칙에서 도출된다. 이 자연법칙이 정치경제학에서 가지는 위상은 물리학에서 중력법칙이 가지는 위상과 같다. 이 자연법칙이 없으면 질서를 인식할 수 없고 모든 것이 혼란에 빠진다...... 이 자연법칙은 중력법칙처럼 인간 욕구의 이기성이나 이타성과는 무관하다. 그저 단순한 사실일 뿐이다. ({정치경제학})
2. 교환, 생산, 분배
[63] 17세기 영국 스튜어트 왕조의 폭정에 대한 반란이 일어났던 시기에 철학자 홉스는 왕의 절대적 권위를 이성적으로 인정하기 위해 {리바이어던}(Leviathan)을 집필하였다....... 이 책에 의하면 리바이어던 즉 국가는 인조인간과 같으며 이 인조인간은 자연인보다 몸집도 크고 힘도 세며 자연인을 보호하고 지켜주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고 되어 있다.
사람들이 물질적 욕구를 충족시키려는 노력에 의해 형성하는 사회제도는 문명이 발달함에 따라 통합 정도가 더 높은 제도로 발전해 가는데, 개개인이 모여 하나의 거인이 된다는 비유는 단순한 정치적인 통합의 경우보다 이런 경우에 더 분명하게 적용된다. 이러한 큰 리바이어던과 정치구조 즉 의식적으로 구성한 국가와의 관계는 신체의 무의식적인 기능과 의식적인 행위간의 관계에 견줄 수 있다. 큰 리바이어던은 협약이나 헌장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저절로 자라는 것이다. 인간의 본성이나 사물의 이치에 내재한 자연법칙에 따라 사람이 자라고 나무가 자라는 것과 같다. ({정치경제학})
[64] 문명의 기원을 추적해 보자. 인간만이 인과관계를 연결짓는 능력을 부여받았기 때문에 진정한 의미의 생산자는 모든 동물 중에서 인간뿐이다...... 인간을 생산자이게 하는 바로 그 이성의 작용으로 인해 인간은, 교환이 가능한 경우에는, 역시 교환자가 된다. 경제체제가 발전하는 것은 교환의 덕이며 또 문명이 발달하는 것도 기본적으로 교환의 덕이다...... 사람 사이의 교환 또는 무역이 시작됨으로써 경제체제가 시작되었고 경제체제의 초기에 문명도 싹텄다...... 완전히 미개한 종족을 찾으려면 교환이나 무역이 없는 곳으로 가야 한다. 그런데 이런 종족은 현재 존재하지 않으며 우리가 알고 있는 범위 내에서는 과거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한편 완전히 문명화된 종족을 찾으려면 교환이나 무역이 절대적으로 자유로운 곳 그리고 인간의 욕구가 달성할 수 있는 최고의 수준으로 발전해 있는 곳으로 가야 한다. 그러나 불행히도 이런 종족은 아직 존재하지 않는다. ({정치경제학})
[65] 생산에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방식이 있다.
적응시키기(Adapting): 자연의 산물의 형태나 장소를 인간의 욕구 충족에 적합하도록 바꾼다.
키우기(Growing): 식물이나 동물을 기르는 경우처럼 자연의 생명력을 활용한다.
교환하기(Exchanging): 자연의 힘은 위치에 따라 다르고 인간의 힘은 상황, 직업, 성격에 따라 다르므로, 부의 총량을 증가시키기 위해 그 중 더 큰 힘을 활용한다. ({진보와 빈곤})
[66] 인간 사회의 발전과 더불어 생산의 세 방식이 등장하는 순서 및 중요성을 가지는 순서는 적응시키기-키우기-교환하기의 순서이다...... 인간 생활의 초기 단계에서 욕구를 충족시키는 가장 쉬운 방법은 존재하는 원료를 사람의 용도에 맞게 적응시키는 것이다. 그후 생활이 정착되면 채소를 기르고 짐승을 번식시키는 등 성장과 번식의 원리를 활용하여 욕구를 더 쉽고 더 완전하게 충족시킬 수 있음을 알게 된다. 그 이상의 발전단계에 가면 어떤 욕구는 교환에 의해 더 잘 그리고 더 쉽게 충족시킬 수 있음이 분명해진다. 교환을 하면 교환하지 않는 경제단위에 비해 협동의 원리를 더 완전하고 철저하게 활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정치경제학})
[67] 생산이라는 용어를 경제학적 의미로 보면 일차적인 채취자나 제조자만이 아니라 수송자, 교환자 기타 이와 유사한 기능을 하는 업종에 종사하는 사람은 모두 생산자이다. 예를 들어 신문배달원이나 신문판매대 주인은 보통 분배자라고 하지만 경제학적인 용어로는 부의 분배자가 아니라 생산자이다. 신문이 최종 독자에게 전달되는 생산과정에서 이런 사람의 역할은 처음이 아니라 맨 나중이지만 이런 사람도 종이 제조자, 활자 제조자, 편집자, 인쇄 종사자와 같은 생산자이다. 생산의 목적은 욕구의 충족 즉 소비에 있는데 부가 소비 위치에 배달되어 욕구 충족 대상자의 수중에 들어가야만 생산의 목적이 달성되기 때문이다. 즉 그 때까지는 생산이 완성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정치경제학})
[68] 생산과 분배는 별개가 아니다. 인간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하나의 노동을 둘로 구분해서 생각하는 것에 불과하다. 설혹 양자가 구분이 된다고 해도 이는 사이폰의 양 끝과 같다. 사이폰의 한 쪽 끝으로 물이 흘러 들어가는 것은 다른 쪽 끝에서 물이 흘러 나가기 때문인 것처럼, 분배가 생산의 원인이지 생산이 분배의 원인이 되는 것은 아니다. 보통의 경우라면, 생산되었기 때문에 분배되는 것이 아니라 분배되기 위해 생산된다. 이리하여 부의 분배에 간섭하는 것은 부의 생산에 간섭하는 것과 같아서 생산을 줄이는 결과를 낳는다. ({정치경제학})
[69] 부의 분배에 대한 우리의 탐구는 사회의 실정법에 대한 탐구와는 달리, 특정의 시간과 장소에서 부를 사람들 사이에 분배하는 방식을 지정하려는 탐구가 아니다. 특별히 설명에 도움이 되는 경우가 아니라면, 우리는 실정법을 다루지 않는다. 우리가 추구해야 하는 것은 자연적 질서로서의 부의 분배법칙이다. 이 법칙은 문명과 더불어 등장하여 문명과 함께 발전하는 큰 리바이어던―즉 정치체제 내지 국가와는 구별되는 사회 유기체 내지 경제체제―의 일부로서의 법칙이다. 이러한 법칙은, 시간과 장소를 불문하고 동일하며, 인간의 행위에 의해 간섭을 받을 수는 있어도 그 본질은 절대로 변하지 않는다. 이 점은 특히 명심해 둘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정치경제학에 관한 체계적인 이론으로 인정받고 있는 저서에서도, 부의 분배에 관해서는 인위적인 법칙이 아닌 자연의 법칙을 논해야 한다는 사실이 완전히 무시되거나 전적으로 부정되고 있기 때문이다. ({정치경제학})
[70] 정치경제학 저술에서는 생산법칙은 자연의 법칙이고 분배법칙은 인위적인 법칙이라고 잘못 가르치고 있으나 두 가지 법칙은 모두 자연의 법칙이다. 진정한 차이점은 생산에 관한 자연법칙은 물질적 법칙이고 분배에 관한 자연법칙은 도덕법칙이라는 점이다...... 부의 생산에 관한 법칙에서 부의 분배에 관한 법칙으로 연구 대상이 이동하면 당위와 의무의 관념이 중심이 된다. 모든 분배법칙은 윤리적 원리와 연결되어 필연적으로 당위와 의무를 고려하게 되며 정당성과 정의의 관념이 출발점에서부터 연관된다. ({정치경제학})
3. 협동과 경쟁
[71] 자연이 각 개인에게 부여한 정도 이상으로 생산력을 증가시키려면 개인간의 협동이 필요하다. 그런데 협동에는 두 가지 방식이 있다. 1. 노력의 결합. 이 방식으로는 개인의 힘을 모두 합한 것보다 더 큰 일을 할 수 있다. 2. 노력의 분리. 이 방식으로는 힘을 합할 필요가 없는 일에서 각자가 한 사람 분 이상의 일을 할 수 있다...... 예를 들어보자. 노동의 결합을 통해서는 혼자에게는 너무 무거운 바위나 통나무를 여럿이서 치우거나 들어올릴 수 있다. 이 방법은 여러 사람을 합쳐서 힘 센 한 사람이 되는 것과 같다. 미국 개척기에는 소위 "통나무 굴리기"―이 용어는 이제 입법과정에서의 결탁을 의미하게 되었다―가 흔히 있었다. 갑, 을, 병, 정 네 사람이 개척지에서 서로 이웃하여 집을 짓는다고 할 때 나무는 각자 혼자서 벨 수 있지만 베어놓은 나무는 너무 무거워서 혼자서 옮길 수가 없다. 그래서 네 사람이 힘을 합쳐서 통나무를 굴려 차례로 각자가 원하는 위치로 옮겨 준다. 이 결과는 네 사람이 따로 네 번 쓸 힘을 일시에 집중시킨 것과 같다...... 이처럼 여러 개인을 거인 한 사람으로 합치는 것과 같은 노동의 결합에 의해서 큰 이점을 얻을 수 있지만, 또 어떤 경우에는 개인을 여러 소인으로 나눔으로써 더 많은 성취를 이룰 수 있다...... 사람을 나누는 것과 같은 노동의 분업은 전체적인 효과성을 엄청나게 증가시킬 수 있다. 갑, 을, 병, 정 네 사람이 통나무를 굴려야 할 때가 있는가 하면, 왕복 이틀 걸리는 다른 마을에 가서 일을 처리해야 할 때도 있다. 이런 일을 각자 해결하려면 모두 이틀씩을 소비해야 한다. 그러나 갑 혼자 다른 마을로 가서 다른 사람의 일까지 대신 처리해주고 을, 병, 정은 하루의 반만 갑의 일을 대신해 준다면, 모든 사람이 이틀씩 걸릴 일을 하루의 반씩만 소비하여 처리하는 결과가 된다. ({정치경제학})
[72] 위에서 협동을 통해 생산력을 증가시키는 방식에는 두 가지가 있음을 보았다. 그런데 협동이 이루어지는 과정도 두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하나의 과정은 외면적 과정이라고 할 수 있는 것으로서, 특정의 목적을 가진 의도적인 지시 내지 통제에 의한 협동이다. 이를 강제적 협동 또는 의식적 협동이라고도 부를 수 있겠다. 다른 하나의 과정은 내면적 과정이라고 할 수 있는 것으로서, 각 개인이 전체적인 결과를 의식하지 않고―전혀 무시한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각자 자신의 의지에 따라 자신의 목적만을 추구하지만 이런 개별 행위가 서로 관련을 맺어 생기는 협동이다. 이를 자발적 협동 내지 무의식적 협동이라고 부를 수 있겠다. 대규모 군대의 이동은 첫 번째 협동의 좋은 예가 된다. 군대에서는 수많은 개인이 한 사람의 의식적인 의지에 복종하고 그 명령을 받아 행동함으로써 마치 명령자의 신체와 사고의 일부를 이루는 것과 같은 결과가 된다. 한편 대도시에서 주민이 필요로 하는 다양한 물자가 공급되는 과정은 두 번째 협동의 좋은 예가 된다. 이런 협동은 군대의 이동과 같은 협동보다 훨씬 범위가 넓고 정교하며 조직이 훨씬 강력하고 세밀하다. 그러나 자신이 의도하는 전체적인 결과를 알고 있는 한 사람이 의식적인 의지를 통해 내리는 명령에 복종하는 협동이 아니라, 전체적인 결과를 생각하지 않은 채 각기 자기 자신의 작은 목적을 가진 수많은 독립적인 의지로부터 나온 갖가지 행동의 상관성에 의한 협동이다. 첫 번째 협동은 우리 신체에서 의식적으로 지시할 수 있는 움직임에 비유할 수 있다. 두 번째 협동은 신체의 기본을 유지하는 수많은 무의식적인 움직임에 비유할 수 있다. 그 복잡성, 미묘성, 정밀성은 우리의 의식적 명령에 비할 바가 아니다. 그럼에도 상호간 및 전체적인 목적에 완벽하게 조화되어, 인간의 신체를 구성하고 생명과 활력을 유지하는 각 부분간 및 각 기능간의 협동이 이루어지고 지속된다. ({정치경제학})
[73] 외부로부터의 지시가 필요한 종류의 협동을 내부로부터의 지시가 필요한 종류의 협동에 적용하는 것은 닭장을 지을 수 있는 목수에게 닭을 만들어 달라고 하는 것과 같다. ({정치경제학})
[74]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생물은, 종류와 정도는 달라도 어떤 협동을 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한 어떤 생물도 혼자서 또 독력으로 살 수는 없다. 그러나 인간은 교환을 통해 협동하는 유일한 생물이며, 교환하는 동물이라는 점에서 지구에서 더불어 살고 있는 수많은 다른 생물과 구별된다...... 교환은 부의 생산에서 자발적 내지 무의식적 협동을 이룩하고 개별 경제단위를 큰 리바어던인 사회 유기체로 엮어준다. 교환을 통해 개별 경제단위가 결합함으로써 형성되는 경제체제인 큰 리바이어던에 대한 교환의 기능은, 인간의 신체에 대한 신경이나 신경절의 기능에 비유할 수 있다. 또 다른 비유를 하자면, 우리의 물질적 욕구나 그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능력에 대한 교환의 기능은, 전보, 전화 기타 전기회로에 있어 그 회로에 부착되어 있는 스위치가 가지는 기능과 같다. 즉 교환은 한 장소, 한 종류의 작용을 다른 장소, 다른 종류의 작용으로 전이시키고 그리하여 개별 단위의 노력을 결합하고 상관시켜 가장 유용한 장소에서 가장 유용한 방식으로, 다른 방법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훌륭하게, 욕구를 충족시킨다. ({정치경제학})
[75] 정치경제학 저자의 상당수는 교환을 분배의 한 부분으로 취급하고 있다. 그러나 교환은 생산에 속한다. 사람은 교환에 의해서 또 교환을 통해서 협동의 힘을, 문명의 발달과 더불어 부의 생산력을 크게 증가시키는 협동의 힘을, 획득하고 또 발휘한다. ({정치경제학})
[76] 인간이 경쟁에 치여 극도로 비참해지는 모습을 보고 경쟁을 철폐해야 한다고 성급한 결론을 내리는 사람은 집이 화재로 무너지는 것을 보고 불의 사용을 금지하려는 사람과 같다.
우리가 숨쉬는 대기는 신체의 구석구석에 15파운드의 압력을 가한다. 만일 이 압력이 한 방향으로만 가해진다면 우리는 바닥에 눌려 젤리처럼 분쇄되고 말 것이다. 그러나 압력이 모든 방향으로 작용하기 때문에 압력 속에서도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다. 대기의 압력은 불편함이 없을 뿐 아니라 압력이 없다면 우리가 죽게 되므로 반드시 필요하다고 하겠다.
경쟁도 이와 같다. 생활과 노동의 필수 요소에 대한 권리를 부정 당하는 계층이 있다면 경쟁은 일방적이 되고, 인구가 증가함에 따라 그런 최하계층은 사실상의 노예상태, 심지어는 굶주리는 상태에까지 몰린다. 그러나 모든 인간의 자연권이 보장된다면 경쟁은 모든 당사자에게 작용하여 피고용자 사이에만이 아니라 고용주 사이에도 경쟁이 있고 판매자 사이에만이 아니라 구매자 사이에도 경쟁이 있게 되므로 아무도 해를 입지 않는다. 오히려 경쟁으로 인해 가장 단순하고 광범위하고 탄력적이고 세련된 협동 체제가 이룩된다. 현재의 사회발전 단계에서 보면 이런 체제는, 경쟁이 자유롭게 작용하는 영역에서는 산업간의 조화 및 사회적 힘의 절약이라는 점에서 신뢰할 수 있는 체제이다.
요약하자면, 사회조직에서의 경쟁은 신체조직에서 무의식적으로 뛰는 맥박과 같은 역할을 한다. 경쟁도 맥박처럼 자유롭게 작용하도록 해주기만 하면 된다. 자유로운 경쟁이 불가능한 영역에는 국가의 간섭이 필요하다. 비유하자면 신체조직에서 무의식적 기능과 의식적 기능이 구분되는 것과 같다. 이런 구분이 존재하는데도 극단적인 사회주의자나 개인주의자는 이를 무시한다. 극단적인 개인주의자는 배고프면 자동적으로 음식이 생긴다고 하는 사람과 같고 극단적인 사회주의자는 의식적으로 위장에게 음식의 소화 방법을 지시해 주는 사람과 같다. ({보호냐 자유무역이냐})
[77] 자유로운 사회에서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정도의 노동의 분업을, 사회주의 이론에서처럼 외부적 지시에 의해 달성하려는 사회가 있다고 생각해 보라. 이러한 경우에, 천사나 대천사가 있다고 해도 이들에게 일을 시킬 수는 없기 때문에, 어떤 사람을 선출하여 지시를 내리는 임무를 맡길 수밖에 없다. 권력의 수탁자를 선출하는 것은 언제 어디서나 어렵고 다른 사람에 대한 명령권은 필연코 전제와 압제로 화하게 되지만 이런 점은 일단 무시하자. 설혹 최선의 인물이 선출되었다고 하더라도 언제, 어디에서, 어떻게, 누가, 무엇을 하라는 명령을 내리는 임무―유능한 지시를 내리는 임무 그리고 문명사회의 노동의 분업과 같이 끝없이 복잡하고 계속해서 변화하는 관계를 감독하는 임무―가 얼마나 어려운지 생각해 보라. 이러한 임무는, 마치 인간의 신체를 건강하고 활기차게 유지하는 것이 그렇듯이, 의식적인 지시 능력을 훨씬 초과한다. ({정치경제학})
Ⅳ. 사회주의와 자유방임
1. 사회주의와 정부
[78] 사회주의의 이상은 위대하고 숭고하다. 또 실현 가능성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런 사회는 인위적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성장하여야 한다. 사회는 유기체이지 기계는 아니다. 사회는 사회를 구성하는 개인의 삶에 의해서만 지속된다. 각 개인의 자유롭고 자연스러운 발전 속에서 전체의 조화가 이루어진다. ({진보와 빈곤})
[79] 사회주의는 우리 문명의 폐단이 자연스러운 관계의 부적절성 내지 부조화에서 비롯된다고 보고 이를 인위적으로 조직화하고 개선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산업 관계를 의도적으로 조직화하는 책임, 마치 거대한 기계―수많은 부품을 가지고서 인간의 지시에 따라 적절하게 작동하는 기계―를 제조하는 것과 같은 책임을 국가에 지운다. ({노동자의 상태})
[80] 반면에 우리는―우리가 주장하는 구체적인 제도의 이름을 따서 단일세론자라고 자칭하는 우리는―사회적 산업적 관계를 기계로 인식하지 않는다. 우리는 이를 저절로 자라는 유기체로 인식하며 자연법칙, 사회법칙 및 산업법칙에서 인간의 신체―인간의 지능으로 도저히 그 생명의 작용을 명령하고 지시할 수 없는 신체―에 존재하는 조화를 본다. 이러한 사회․산업법칙은 도덕법칙과 너무나 긴밀한 관계를 갖기 때문에 두 법칙이 모두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으로 이해하며, 인간의 지능만으로는 길을 찾지 못하는 경우에는 도덕법칙이 확실한 길잡이가 됨을 입증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신체라는 유기체와 사회라는 유기체가 유사하다고 볼 수 있다면, 국가의 고유 기능과 인간 신체에서 의식적인 지능이 담당하는 기능이 유사하다고 볼 수 있다면, 개인의 충동 및 이해관계의 작용과 인간 신체의 무의식적인 본능 및 비의지적 동작이 하는 기능이 유사하다고 볼 수 있다면, 무정부주의자들은 머리 없이 살아나가려는 사람과 같고 사회주의자는 엄청나게 복잡하고 섬세한 신체 내부의 여러 관계를 의식에 의해 지배하려는 사람과 같다고 하겠다. ({노동자의 상태})
[81] 그러나 모든 유형의 사회주의는 문제를 뿌리까지 파고드는 근원적인 대책이 결여되어 있다는 단점을 가지는 것으로 생각된다...... 사회주의는 임금이 최저한으로 내려가는 경향을 자연법칙이라고 생각하여 임금을 철폐하려고 한다. 사회주의는 경쟁의 자연스러운 결과에 의해 노동자가 몰락한다고 생각하여 경쟁을 철폐하고 규제, 금지, 정부권력 확대를 시도한다. 이렇게 사회주의는 결과를 원인이라고 착각하고 어린애처럼 돌에 부딪혔다고 돌을 나무라며 효과 없는 대책을 추구하느라 힘을 낭비한다. 사회주의가 여러 나라에서 민주적 열망과 연결되어 있기는 하지만 이는 이스라엘 백성이 선지자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왕을 요구했던 것과 본질적으로 같은 종류의 망상이다. 사회주의는 여러 나라에서 민주주의를 망치고 군주를 강화시켜 주고 있는 망상이고, 국민 위의 권력이 국민의 이익을 위해 사용될 수 있다고 하는 망상이며, 개인의 일을 각자가 처리하는 것보다 더 현명하고 효율적으로 처리하는 기계를 만들 수 있다고 하는 망상이다. ({노동자의 상태})
[82] 사회주의는 원인을 찾는 노력이 없이 결론으로 비약한다. 사회주의는, 노동에 대한 압박은 자본의 성질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노동을 토지에서 분리함으로써 노동에서 자본을 박탈하는 잘못에서 나온다는 점을 모른다. 그 때문에 자본화된 독점이 문제인데도 마치 자본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으로 착각한다. 사회주의는, 노동이 생산의 천연 원료를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으면 자본이 노동을 압박할 수 없다는 사실을 모른다. 또 임금제도 그 자체는 상호 편의에서 비롯되며 당사자 중 한 쪽이 불확실한 수입보다는 안정된 수입을 원하는 경우의 서로 협동하는 한 방식이라는 사실도 모른다. 사회주의는, 소위 "임금 철칙"은 임금의 자연법칙이 아니라 단지 생활과 일에 필요한 물질이 박탈됨으로써 무기력하게 된 부자연스러운 상황에서의 임금법칙이라는 사실을 모른다. 사회주의가 경쟁의 폐단이라고 하는 것은 실은 제한된 경쟁의 폐단이며 이는 사람이 토지를 박탈당했기 때문에 당하는 일방적인 경쟁에 기인한다는 사실을 모른다. 사회주의의 방법 즉 사람들을 산업군대로 조직화하고 모든 생산과 교환을 정부 내지 준정부의 관료가 지시 통제하는 방법은, 만일 완벽하게 실시된다면, 마치 이집트 전제정치와 같은 사회를 초래하고 만다. ({노동자의 상태})
[83] 개인주의와 구분되는 사회주의에는 나름대로의 의심할 수 없는 진리가 있으며 이에 대해서는, 특히 자유무역론자에 속하는 사람들이, 너무 주목을 하지 않아 왔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개별적인 존재이다. 별도의 개체로서 욕구와 능력 면에서 타인과 다르며 능력을 발휘하거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서는 개별적인 노력과 자유가 필요하다. 그러나 인간은 사회적인 존재이기도 해서 타인의 욕구와 조화되는 욕구도 있고 타인과의 협력을 통해서만 발휘될 수 있는 능력도 있다. 그러므로 개인의 영역과 함께 사회의 영역도 존재하는 것이다. 각자 알아서 해야 잘 되는 일이 있고 사회가 모든 구성원을 위해 나서야 잘 되는 일이 있다. 진보하는 문명의 자연적 경향을 보면 사회적인 조건이 상대적으로 더 중요해지고 있으며 사회의 영역이 확대되고 있다. 이 점이 충분히 인정받지 못해 왔으며, 사회의 성장과 기술의 발달에 따라 사회의 영역으로 이전된 기능을 여전히 개인에게 맡겨둠으로써 발생하는 문제가 오늘날 분명히 존재한다. 이는 개인의 영역에 속하는 것에 사회가 간섭함으로써 발생하는 문제가 분명히 존재하는 것과 같다. 사회는 전신과 철도를 개인의 관리와 통제에 두어서는 안 된다. 또 사회는 개인간의 채무관계에 관여하여 이를 대행해서도 안 되고 개별 산업에 간섭해서도 안 된다. ({보호냐 자유무역이냐})
[84] 정부의 일차적 목적이자 궁극적 목적은 모든 사람의 자연권과 자유를 보장하는 데 있으므로 독점적 요소를 가진 모든 사업은 당연히 정부의 규제 대상이 되며 성질상 완전한 독점이 되는 사업은 당연히 국가의 고유 기능에 속한다. 사회가 발전함에 따라 국가는 개인간의 협동이 필요한 성격의 기능을 담당함으로써 모든 사람의 평등권과 자유를 보장하여야 한다. 말하자면 사회가 통합되는 과정에서 개인은 전체에 대해 점점 더 의존적 종속적이 되어 가는데, 모든 개인으로 구성되는 집합체를 대표하는 유일한 존재인 정부는 개인에게 맡겨둘 수 없는 일정한 기능을, 모든 사람의 이익을 위해서 담당하여야만 한다는 것이다. ({사회문제})
[85] 사람에게 덕을 쌓도록 하거나 종교를 믿도록 하는 일, 어리석은 자가 바보짓을 하는 걸 막는 일과 같은 것은 정부의 업무에 속하지 않는다. 타인의 침해로부터 개인의 평등권을 보호함으로써 자유를 보장하는 데 필요한 활동 이상을 하지 않도록 정부활동을 제한하여야 한다. 정부의 규제가 이 경계를 넘어서는 순간 정부의 존립 목적 자체를 부정하는 결과가 발생할 위험성이 있다. ({사회문제})
2. 보호의 문제
[86] 부를 분배하는 권한을 정부에 줌으로써 평등성을 확보하려는 모든 방법은 본말전도라는 치명적인 오류를 안고 있다. 이런 방법은 순수한 정부를 전제로 한다. 그러나 정부가 사회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사회가 정부를 만든다는 점을 생각하면 부의 분배가 실질적으로 평등하게 되기 전에는 순수한 정부를 기대할 수 없다. ({보호냐 자유무역이냐})
[87] "우리 시장은 우리 생산자를 위해 보호해야 한다"는 명제에 대해 상당수의 사람들이 "우리 목초지는 우리 소를 위해 보호해야 한다"는 명제와 같은 종류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사실은 "우리의 입맛을 우리 요리 솜씨에 맞추어야 한다"거나 "우리 교통수단을 우리의 다리에 맞추어야 한다"는 명제와 같다. ({보호냐 자유무역이냐})
[88] 국민 대중의 보호는 모든 시대 모든 독재자가 내세운 명분이었고 군주정, 귀족정, 모든 특권의 구실이었다. 노예 소유자도 노예를 보호한다는 이유로 노예제도를 정당화하였다. 영국이 아일랜드에서 실정을 하고 있으면서도 아일랜드 국민의 보호를 이유로 지지를 받고 있다. 군주정이든 공화정이든 근로 대중의 "보호"를 압제의 명분으로 삼지 않은 사례가 세계 역사상 있는가? 그러나 법을 제정하는 권력을 손에 넣은 자들이 노동자에게 베푼 보호는 언제나 기껏해야 사람이 가축에게 베푸는 보호, 즉 이용하고 잡아먹기 위한 보호에 지나지 않았다. ({보호냐 자유무역이냐})
[89] 아무도 지주와 자본가를 보호해야 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이들 계층은 자기 문제를 스스로 해결한다고 보며 오로지 가난한 노동자만이 보호 대상이 된다고 한다.
도대체 노동자가 무엇이기에 보호를 받아야 한단 말인가? 노동자는 자본의 창출자요 모든 부의 생산자가 아닌가? 모든 사람을 먹이고 입히는 자는 바로 노동하는 사람이 아닌가? 사회의 계급은 "노동자, 거지, 도둑"의 순서라는 말이 있는데 이것은 진실이 아닌가? 그렇다면 어찌하여 유독 노동자만이 보호가 필요하단 말인가? ({보호냐 자유무역이냐})
[90] 모든 가족으로 하여금 끊임없이 다른 가족을 경계하도록 하고, 모든 가족으로 하여금 이웃과의 교역을 막기 위해 많은 시간과 노력을 바치도록 하고, 모든 가족으로 하여금 자신이 잘 되기 위해 다른 가족이 잘 되는 데 필요한 자연의 기회를 박탈하도록 하는 정부, 이런 정부를 위해 마련된 인간의 법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그러나 보호무역 이론에 의하면 이러한 법은 창조주께서 지구의 세입자인 인간 가족에게 부여하신 것이 된다. 이런 이론에 의하면 물리법칙처럼 확실한 사회법칙에 따라 각국은 다른 나라를 철저히 경계하여야 하며 나라 사이의 거래에 인위적인 장벽을 설치해야 한다고 한다. ({보호냐 자유무역이냐})
[91] 다른 나라로부터 구매하는 것을 막아서 국가를 번성하게 하려는 정책은, 타인으로부터 구매하는 것을 막아서 개인을 부유하게 하려는 것처럼 불합리하다. 개인의 경우에 이런 방식이 어떤 결과를 낳는가 하는 것은 아일랜드 토지 사태 때의 소위 "보이콧"이 좋은 사례가 된다. "보이콧"이라는 동사는 불명예스럽게도 보이콧이라는 지주의 이름에서 유래되었는데 이는 사실상 완벽한 "보호"와 같다. 보이콧에 대해 그 주변 지역에서 의회의 법률보다 더 효과적인 봉쇄령을 내려 일체의 거래를 막았는데 그 결과 가장 능률적인 보호관세를 실시한 것처럼 되었다. 아무도 보이콧에게 노동을 제공하지 않고 아무도 그에게 우유, 빵, 고기, 기타 어떤 상품이든 용역이든 팔지 않았다. 그런데 이 철저히 보호된 보이콧은 자신의 생산물을 위해 자신의 시장이 보호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부유하게 되기는커녕 도주하고 말았다. 보호무역주의자의 주장은 우리 국내 시장을 국내 생산자를 위해 유보하자는 것인데 이것은 아일랜드 토지연맹이 보이콧에게 한 것과 같은 것을 우리 자신에게 하자는 것이다. 즉 우리 자신을 대상으로 보이콧하자는 것이다. ({보호냐 자유무역이냐})
3. 자유무역과 자유방임
[92] 인위적으로 방해하지 않을 경우 무역이 어떤 과정을 밟는 경향이 있다면 그것이 당연한 과정이라는 증거이고, 제한은 그 자체로 해로우며 해로운 정도는 제한의 정도에 비례한다. 국가가 부강하게 되는 방법은 무역을 하려는 자연스러운 경향을 제한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이는 사람이 건강하게 되는 방법은 자연이 거부하는 것을 위장에 억지로 밀어 넣고 밴드로 묶어 폐의 작용을 억제하고 실로 묶어 피의 순환을 통제하는 것이라고 하는 것처럼 어불성설이다. ({보호냐 자유무역이냐})
[93] 다른 나라 사람들끼리 무역을 하는 이유는 국내 거래의 이유와 같다. 이익이 되기 때문이며 스스로 생산하는 것보다 노동을 적게 들이고 원하는 것을 획득할 수 있기 때문이다. ({보호냐 자유무역이냐})
[94] 무역은 침입이 아니다. 무역은 침략과 방어의 관계가 아니라 상호 동의와 상호 만족의 관계이다. 마치 쌍방의 의견 차가 없으면 언쟁이 안 되는 것처럼 쌍방이 합의하지 않으면 무역이 있을 수 없다. 영국이 중국에, 미국이 일본에 무역을 강제하였다고 하지만 실제로 있었던 일은 그 국민에게 무역을 강제한 것이 아니라 그 정부에게 국민으로 하여금 무역할 수 있도록 허용하라고 한 것이다. 국민이 무역을 원하지 않았다면 개항을 해도 아무 소용이 없었을 것이다. ({보호냐 자유무역이냐})
[95] 무역에는 강제력이 필요 없다. 자유무역이란 단지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 사고 파는 것이다. 그러나 보호무역의 경우에는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 행동하는 것을 막아야 하기 때문에 강제력이 필요하게 된다. ({보호냐 자유무역이냐})
[96] 사람에게 필요한 물자를 지구 표면의 어느 지점에서나 동일하게 생산할 수 있다면 동물로서의 인간에게는 더 편리할 것처럼 생각되지만 그래서는 인간이 어떻게 동물의 수준 이상으로 상승할 수 있었을까? 사회발전의 역사를 보면 과거나 현재나 상업이 문명과 교육을 촉진했음을 알 수 있다. 토지의 능력은 지구상의 각 위치마다 끝없이 다양하기 때문에 생산물의 교환이 일어나며 이는 고립을 막고 편견을 깨고 지식을 늘리고 사고를 넓히는 데 크게 기여한다. 자연이 다양해지면―우리가 자연력에 대해 더 많이 알게 될수록 다양성은 더욱 커지는 것으로 보인다―사회발전과 더불어 개인과 사회의 취향이 다양해질 때처럼, 숨은 능력을 일깨우고 기쁨을 준다. 이 능력과 기쁨은 인간이 끝없이 클로버로 덮인 목초지의 소와 같은 환경에서 살아갈 경우에 결코 얻을 수 없을 것이다. 우리가 관세를 무기 삼아 대항하고 있는 "하나님의 국제법"은―인간의 이기적인 편견은 얼마나 근시안적인가?―정신적 도덕적 진보를 자극하는 법이고 문명의 원동력이 되는 법이다. ({사회문제})
[97] 브라이트와 뜻을 같이 하여 자유무역을 옹호했던 콥든은 이렇게 말했다. "함께 나아갑시다. 영국에는 아녀자들이 굶주림으로, 그것도 악법으로 인한 굶주림으로 죽어가고 있습니다. 함께 나아갑시다. 악법이 철폐될 때까지 쉬지 말고 나아갑시다."
자유무역운동은 이러한 정신 속에서 성장하여 단순한 재정개혁운동 이상의 열정을 불러 일으켰다. 이 운동은 제한된 선거권, 부패한 선거구, 귀족적 특권에 의해 완강하게 저지되었으나 결국 영국의 보호무역은 무너졌다.
그런데도 영국에는 아직도 굶주림이 존재하고 아녀자들이 그 때문에 죽어가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자유무역의 실패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보호무역이 철폐되고 재정관세로 대체되었을 때 자유무역은 단지 하나의 전초기지를 확보했을 뿐이다. 영국에서 아직도 아녀자들이 굶어죽는 이유는 개혁이 그 이상으로 진전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영국에는 아직 자유무역이 실시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자유무역이 완전하게 실시된다면 굶주림이 사라질 것이다. ({보호냐 자유무역이냐})
[98] 보호관세를 재정관세로 대체하는 식의 단순한 보호주의의 철폐는 자유무역원리를 완전하게 실천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를 자유무역이라고 부르기가 곤란하다. 재정관세는 보호관세보다 다소 완화된 모습의 제약일 뿐이다.
진정한 의미의 자유무역이 되려면 보호관세만이 아니라 모든 관세를 철폐해야 하며 공중보건이나 도덕의 이유를 제외하고는 국내외로 물자가 들어오고 나가는 데 대한 모든 제한을 철폐하여야 한다.
그러나 자유무역은 논리적으로 볼 때 세관을 폐지하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국제무역만이 아니라 국내거래에도 적용하여야 한다. 진정한 자유무역이 되려면 물자의 구매, 판매, 수송이나 교환, 각종 영업행위에 부과하는 모든 내국세를 철폐해야 한다. 물론 공공의 안전, 보건, 도덕의 관점에서 부과하는 조세는 제외한다.
이처럼 진정한 자유무역을 채택하면 모든 종류의 간접세가 철폐되며 모든 재정수입은 직접세에 의존하게 된다.
그러나 이것이 전부가 아니다. 앞에서 보았듯이 무역이란 생산의 한 방식이고 무역의 자유화는 생산의 자유화라는 점에서 이익이 된다. 그러므로 귀중한 물자를 수입함으로써 국가의 부를 증가시키는 행위에 대해 조세를 부과해서는 안 되는 것과 같이, 국내에서 귀중한 물자를 생산함으로써 국가의 부를 증가시키는 행위에 대해서도 조세를 부과해서는 안 된다. 이처럼 자유무역의 원리는 모든 간접세만이 아니라 노동의 생산물에 부과되는 모든 직접세까지도 철폐해야 함을 의미한다. 간단히 말해서 생산물의 소유와 소비 등 생산의욕을 촉진하는 자연적 유인이 완전하게 발휘되도록 해 주어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노동의 산물인 부의 생산, 축적, 보유에 대해 과세하지 말고 모든 사람이 자유롭게 교환하고, 증여하고, 지출하고 상속할 수 있게 해 주어야 한다. ({보호냐 자유무역이냐})
[99] 자유무역이 재정개혁의 문제로 왜소화되면 그 아름다움이 감춰지고 도덕적인 힘이 사라지고 사회악을 치유하는 힘이 드러나지 않고 보호주의가 갖는 부정의와 비열함이 노출되지 않는다. 자유무역이라는 "하나님의 국제법"은 가슴이 아니라 머리에, 양심이 아니라 호주머니에 호소하는 한낱 재정의 문제로 전락하며 거대한 이해관계와 맞설 수 있는 열정을 불러일으킬 수 없다. ({보호냐 자유무역이냐})
[100] 중농학파는 진정한 의미의 자유무역론자였다. 아담 스미스를 추종했던 영국의 자유무역론자도 중농학파에는 미치지 못했다. 중농학파의 구체적인 개혁안인 단일세는 자유무역 원리의 완전한 논리적 결론―무역에서의 자유만이 아니라 모든 형태의 생산에서의 자유, 모든 생산에 필수적인 자연 요소의 사용에 관한 완전한 자유―에 도달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중농학파는 "Laissez faire!" 즉 "방임하라"라는 말의 원조인데 이 말은 영어 사용권에서 아주 왜곡 사용되고 있다. 이 말은 원래는 "Laissez faire, laissez aller!" 즉 "길을 열어주고 방임하라"에서 나온 것으로서 그 기원은 중세 시합에서 싸움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였다고 한다. 이 프랑스 말의 정신에 가장 가깝게 모토를 만들자면 "특혜 없는 공정한 사회"(A fair field and no favor)정도가 되지 않나 생각한다. ({정치경제학})
[101] 강도의 습격을 받아 결박당하고 눈을 가리우고 입에 재갈이 물린 여행자를 만났다고 하자. 이 사람 주위에 둘러서서 뺨에 난 상처에 고약을 바를 것인가, 찢어진 옷을 기울 것인가를 의논한다든지, 혹은 이 사람이 어느 길로 가야하는가, 자전거나 삼륜차나 마차나 기차 중 어느 것을 이용하는 게 좋은가를 놓고 논란을 벌이면 이 사람에게 제일 큰 도움이 되겠는가? 차라리 이런 의논에 앞서 이 사람을 풀어 주어야 하지 않을까? 그렇게 해 주면 이 사람이 스스로 보고 스스로 말하고 스스로 일을 처리할 것이다. 뺨의 상처나 찢어진 옷은 스스로 해결할 수 있으며, 마땅한 교통수단을 찾지 못해도 적어도 자유롭게 걸어갈 수는 있다.
현재 각종 사회문제와 관련하여 꼭 이런 의논과 비슷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 노동에 대한 제약을 풀어 노동이 자신의 힘을 사용할 수 있게 해주는 단순한 방안은 젖혀두고 온갖 부적절하고 불가능한 방안을 옹호하고 있다. ({보호냐 자유무역이냐})
Ⅴ. 실업과 토지사유제
1. 일자리는 자연권
[102] 흔히 노동의 공급과 노동에 대한 수요라는 말을 사용하는데 이 두 용어는 상대적인 의미를 가질 뿐이다. 노동의 공급은 어느 곳에서나 동일하다. 입이 하나 태어나면 손이 두 개 같이 생기며, 남아 21명에 여아 20명이 출생한다. 그리고 노동만으로도 생산할 수 있는 물자가 인간에게 필요한 한 노동에 대한 수요는 항상 존재한다고 보아야 한다. 또 흔히 "일자리가 부족하다"는 말도 하는데 인간이 물자를 필요로 하는 한 일자리의 부족이란 있을 수 없다. 노동생산물이 부족한데도 노동의 공급이 너무 많거나 노동에 대한 수요가 너무 적은 경우는 분명히 있을 수 없다. 문제의 원인은 수요에 맞는 공급이 어디에선가 제약된다는 데 있으며 또 필요한 물자를 노동이 생산하는 것을 막는 장애가 어딘가에 존재한다는 데 있다.
수많은 실업자 중 아무나 예로 들어보자. 맬서스가 누구인지 전혀 모르는 사람이라도 세상에는 인구가 너무 많다고 생각할 것이다. 자신이나 근심에 잠긴 부인이나 제대로 양육 받지 못하고 굶주림과 추위에 떠는 자식에게는 필요한 물자가 많다. 그러므로 노동에 대한 수요는 충분하다. 이것은 하늘도 안다. 일하려는 손이 있으므로 공급도 있다. 무인도에 이 사람을 데려다 놓으면, 문명사회의 협동과 분업과 기계의 혜택이 없이도 두 손으로 자신에게 딸려 있는 식구의 입을 채워 주고 등을 따스하게 해 줄 수 있다. 그러나 생산력이 최고도로 발달한 곳에서는 그렇게 하지 못한다. 왜 그런가? 한 곳에서는 자연의 원료와 힘을 이용할 수 있고 다른 곳에서는 그 이용을 거부당하기 때문이 아닌가? ({진보와 빈곤})
[103] 사람이 왜 이런 낮은 임금을 받고 일을 해야 합니까? 그 이유는, 더 높은 임금을 요구하면 그 자리를 대신할 실업자가 얼마든지 있기 때문입니다. 임금을 생존수준으로 끌어내리는 치열한 경쟁을 불가피하게 하는 사람은 바로 이들 실업자들입니다. 그렇다면 실업자는 왜 생깁니까? 사람이 일자리를 찾지 못한다는 것은 너무나 이상한 일임을 생각해 보셨습니까? ..... 일자리를 줄 사람을 찾지 못한다면 왜 스스로 일자리를 마련하지 못합니까? 그 이유는 자신의 노동을 투입할 대상에서 배제되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고용주가 주는 임금을 받으려고 서로 경쟁을 벌이는 이유는 스스로 일자리를 마련할 수 있는 자연의 기회를 빼앗겼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특권의 대가를 지불하지 않고 사용할 수 있는 땅을 하나님이 베푸신 이 세상에서 한 조각도 찾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연설문, "빈곤이라는 범죄")
[104] 소위 "고용을 창출"하는 사람을 사회의 은인이라고 칭송한다. 또 "고용을 창출"한다거나 "일거리를 마련"하는 것이 사회에 베풀 수 있는 가장 큰 은혜라도 되는 듯이 끊임없이 이야기한다. 이런 말이나 글을 많이 듣고 읽다보면 빈곤의 원인이 많은 사람에게 돌아갈 일거리가 없다는 데 있는 것처럼 생각하게 된다. 또 창조주가 지금보다 바위를 더 단단하게, 토양을 덜 비옥하게, 철을 금처럼 금을 다이아몬드처럼 희소하게 만들었다면, 또 배가 더 자주 난파되고 도시에 화재가 더 자주 발생한다면, 일거리가 많아지기 때문에 빈곤이 적어질 것으로 생각하게 된다. ({사회문제})
[105] 노동자가 일자리를 얻을 권리와 고용주로부터 금액이 확정되지 않은 임금을 받을 권리를 갖는다고 하지만 이런 권리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 누구도 다른 사람이 자기를 고용하도록 요구할 권리가 없고 다른 사람이 지불하려는 금액보다 높은 임금을 요구하거나 다른 사람이 자기 의사에 반하여 임금을 올려주도록 압력을 가할 권리가 없다. 노동자라고 해서 고용주에게 이런 요구를 한다면, 노동자가 원하지 않는데도 일을 시키고 원하는 금액보다 낮은 임금을 받으라고 고용주가 강제하는 경우와 마찬가지로, 하등의 도덕적 정당성이 없다. ({노동자의 상태})
〔106] 모든 인간이 가진 자연권은 다른 사람에게 고용이나 임금을 요구할 권리가 아니라, 스스로 일자리를 마련할 권리이며 창조주가 모든 인간을 위해 토지에 마련해 주신 무한한 창고에 자신의 노동을 가할 권리이다. 우리가 단일세를 수단으로 하여 이룩하려는 것처럼 이 창고가 개방된다면 노동에 대한 자연스러운 수요는 공급과 일치하고, 노동을 사고 파는 사람간에는 상호 이익이 되는 자유로운 교환이 이루어지며, 노사쟁의의 모든 원인이 사라질 것이다. 그렇게 되면 모든 사람이 자신의 일자리를 자유롭게 마련할 수 있으므로 노동의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 은혜가 될 수 없다. 스스로 일해서 벌 수 있는 것보다 낮은 보수를 받고 남을 위해 일하려는 사람이 없을 것이므로 임금은 필연적으로 완전한 수준으로 상승하게 되고 노동자와 고용주와의 관계는 상호 이익이 되는 수준에서 결정된다. ({노동자의 상태})
[107] 인간이 창조주의 평등한 허락을 받아 이 땅에 존재한다고 하면 우리 모두는 창조주의 하사품을 평등하게 향유할 수 있는 권리를 갖고 있으며 또 자연이 공평하게 제공하는 모든 것을 평등하게 사용할 수 있는 권리를 갖고 있다. 이것은 자연적인 권리이며 양도할 수 없는 권리이다. 이것은 또 모든 인간이 세상에 태어나면서 취득하는 권리이며 생존하는 동안에는 다른 사람의 동일한 권리에 의해서만 제약될 수 있는 권리이다. 자연은 상속무제한 토지소유권(fee simple)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토지의 배타적 소유를 정당하다고 인정할 수 있는 권한은 어디에도 없다. 현재 살고 있는 모든 인류가 합의하여 토지에 대한 자기들의 평등한 권리를 포기한다고 하더라도 후세대의 권리까지 포기할 수는 없다. 인간은 지구에 임시로 세 들어 사는 자에 불과하지 않은가? 후세대가 세 들어 살 권리를 우리가 대신 결정하다니, 도대체 우리가 지구를 만들기라도 했단 말인가? 인간을 위해 지구를 그리고 지구를 위해 인간을 창조한 전능자는 만물의 헌법에 명시된 섭리에 의해―인간의 행동으로는 저지할 수 없고 실정법으로 좌우할 수도 없는 섭리에 의해―지구를 인간의 모든 후손에게 베풀었다. 확실한 토지 문서가 아무리 많고 토지를 아무리 오래 보유해 왔더라도 자연적 정의는 다른 사람의 동등한 권리를 부정하는 개인의 토지 보유 및 향유의 권리를 인정하지 않는다. ({진보와 빈곤})
[108] 잔치에 가장 먼저 도착했다고 해서 연회석의 의자를 돌려놓고서 자기와 계약을 하지 않으면 아무도 음식을 먹을 수 없다고 할 권리가 있는가? 극장에 제일 먼저 표를 내고 입장했다고 해서 극장 문을 닫아걸고 자기 혼자서만 공연을 관람할 권리가 있는가? 기차에 먼저 승차했다고 해서 자기 짐을 온 좌석에 흩어 놓고 뒤에 타는 승객을 세워 둘 권리가 있는가?
이런 사례는 적절한 비유가 된다. 우리는 도착했다가는 떠난다. 잔치의 손님도 계속해서 흩어진다. 우리는 모두를 수용할 수 있는 공연장의 관객이자 출연자이다. 우리는 우주를 질주하는 궤도상의 역에서 역으로 이동하는 승객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취득하고 보유하는 권리는 결코 배타적인 것이 될 수 없다. 이러한 권리는 어느 곳에서나 다른 사람의 동등한 권리에 의해 한계가 지워진다. 기차의 첫 승객이 다른 사람의 승차 전에는 자기 짐을 여러 좌석에 흩어 놓을 수 있듯이, 토지의 첫 정착자는 토지를 마음대로 취득하고 사용할 수 있지만 다른 사람이 그 토지를 원하면―이 사실은 토지가치의 발생에 의해 표현된다―다른 사람의 동등한 권리에 의해 첫 정착자의 권리는 제한된다. 토지를 먼저 차지했다고 해서 다른 사람의 동등한 권리를 박탈할 수 있는 권리가 발생하는 것은 아니다. ({진보와 빈곤})
2. 사유재산의 근거
[109] 소유권의 올바른 근거는 무엇인가? 사람이 정당하게 '내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인가? 자기 자신이 배타적인 권리를 가진다고 인식하는 감정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개인의 소유를 정당화하는 근거는 일차적으로 인간의 자기 자신에 대한, 자기 힘의 사용에 대한, 그리고 자기 노력의 결실을 향유할 수 있는 권리가 아니겠는가? ...... 사람은 각자 자기 자신의 것이기 때문에 구체적인 대상에 투입되는 노동도 자기 자신의 것이다. ({진보와 빈곤})
[110] 소유에 대한 모든 정당한 권원은 모두 생산자의 권원과 인간의 자기 자신에 대한 자연권에서 도출된다. 그밖에는 정당한 권원의 근거가 있을 수 없다. 그 이유는 첫째로 다른 정당한 권원을 도출할 수 있는 자연권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며, 둘째로 만일 다른 권원이 존재한다면 두 권원이 상호 모순되어 이 근거가 붕괴되기 때문이다. ({진보와 빈곤})
[111] 단순하고 자명한 두 원리는 다음과 같다.
Ⅰ. 모든 사람은 자연이 베풀어준 것을 사용하고 향유할 평등한 권리를 가진다.
Ⅱ. 각인은 자신의 노동에 의해 생산한 것을 사용하고 향유할 배타적인 권리를 가진다.
두 원리 사이에는 모순이 없고 오히려 상관성이 있다. 노동의 산물에 대한 개인의 완전한 권리를 보장하려면 자연이 베풀어 준 것을 공동의 재산으로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보호냐 자유무역이냐})
[112] 자연은 노력의 결과 이외에는 인간에게 어떠한 소유나 통제력도 인정하지 않는다. 인간의 노력이 없으면 자연의 보물을 채취할 수 없고, 자연의 힘을 다스리고 활용하고 통제할 수 없다. 자연은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며 누구에게나 공평하다. 자연은 주인과 노예를 구분하지 않으며 왕과 신하를 구분하지 않으며 성자와 죄인을 구분하지 않는다. 자연에 대해서는 모든 사람이 동등한 처지에 있고 동등한 권리를 갖는다. 자연은 노동의 결과 외에는 인정하지 않으며 노동의 결과라면 사람을 가리지 않고 인정한다. 해적의 배에도 바람은 불어 주고 평화로운 상인이나 선교사의 배에도 바람은 불어 준다. 왕과 백성이 같이 바다에 빠져도 헤엄을 치지 않으면 아무도 물 밖으로 머리를 내놓을 수 없다. 새는 밀렵꾼의 총보다 토지소유자의 총에 먼저 맞아 주지 않는다. 물고기도 주일학교에 다니는 착한 소년의 낚시나 못된 결석쟁이 소년의 낚시를 구별하지 않고 문다 (또는 안 문다). 곡식도 밭을 갈고 씨를 뿌려야 자란다. 광석이 광산에서 채취되는 것도 노동이 있기 때문이다. 정의로운 사람에게나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나 해는 골고루 비치고 비도 골고루 온다. 자연의 법칙은 창조주의 뜻이다. 자연법은 노동의 권리 외에 어떠한 권리도 인정하지 않는다. 자연법에는 모든 인간이 자연을 사용하고 향유할 권리, 노력을 자연에 투입할 권리, 자연으로부터의 대가를 수취하여 소유할 권리의 평등성이 폭넓게 그리고 명백히 규정되어 있다. 자연은 노동에게만 주므로 노동을 생산에 투입하는 것이 배타적 보유의 유일한 권원이다. ({진보와 빈곤})
[113] 도덕적으로 모든 종류의 결혼을 인정할 수는 없듯이 사유재산도 그렇다. 적절한 결혼이 하나님의 법에 합치한다고 해서 일부다처제, 일처다부제, 근친혼까지―일부 국가에서는 법적으로 허용되고 있지만―정당화되는 것은 아니다. 부도덕한 결혼이 있을 수 있듯이 부도덕한 사유재산도 있을 수 있다. ({노동자의 상태})
[114] 국가가 인정한다고 해서 모든 사유재산이 다 도덕적으로 옳은 것은 아니다. 폭력과 강탈에 의해 취득한 정당하지 않은 재산을 국가가 인정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노동자의 상태})
〔115] 노동에 의해 생산된 물자에 대해 인정하는 소유권을 하나님이 창조하신 물자에 대해서 인정한다면 사유재산권은 훼손되고 부인되고 만다. 토지라는 용어가 포괄하는 것 즉 바다, 공기, 햇빛, 토양 등을 사용하는 사람이 그 대가로 자신의 노동으로 생산한 것을 타인에게 지불해야 한다면, 사용자는 정당한 사유재산을 박탈당하는 결과가 된다. 이는 강도행위와 다름없다. ({노동자의 상태})
[116] 그렇다면 사람들이 우리를 재산권을 부인하는 사람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무엇인가?
필자가 어릴 적에 미국의 남부에서건 북부에서건 선량한 국민의 10분의 9는 노예철폐를 주장하는 사람을 재산권을 부인하는 사람이라고 불렀는데, 그 이유와 같다. 웨슬리는 밀수꾼을 일종의 강도라고 보았고 세관에서 남의 물건을 압수하는 자를 법과 질서의 옹호자라고 보았는데, 그 이유와도 같다. 재산권의 침해가 관습과 법에 의해 오랫동안 인정이 되면 진정한 재산권을 주장하는 사람을 처음에는 오히려 이를 부인하는 자라고 생각하기 쉽다. 이러한 상황하에서 재산권이라는 관념은 혼란스러워지고 재산권을 침해하는 것을 오히려 재산권이라고 생각한다. ({갈피를 잃은 철학자})
[117] 토지소유자는 자기 사건에 적용할 법을 인간의 법과 도덕의 법 중 선택해야 한다. 토지가 인간의 법에 의해 정당한 사유재산이 되었다고 주장한다면 강도를 합법화하는 입법을 한다고 할 때 이를 비난할 수 없다. 그러나 인간의 법을 이렇게 개정하는 것은 강도에 해당한다고 비난한다면 토지가 인간의 법과 관계없이 정당한 사유재산임을 입증하여야 한다. ("부정으로의 귀결")
3. 토지사유제는 노예제
[118] 토지사유제는 노예사유제와 마찬가지로 진정한 사유재산권을 침해하는 제도이며 둘 다 형태는 달라도 모두 강탈행위를 정당화하는 제도이다. 인간이 타락한 능력을 이용하여 만들어낸 제도로서, 힘센 자와 교활한 자가 노동을 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자기의 책임을 다른 사람에게 뒤집어씌울 수 있도록 하는 쌍둥이 제도이다. ({노동자의 상태})
[119] 우리는 로빈슨 크루소가 프라이데이를 노예로 삼았다는 사실을 잘 안다. 그러나 프라이데이를 노예로 삼는 대신 그를 인간으로서 형제로서 맞이하여 독립선언문과 노예해방선언과 미국 헌법 제15차 수정 조항을 읽어주면서 프라이데이가 자유롭고 독립적인 시민으로서 투표권과 공무담임권을 가진다고 알려 주는 한편, 다만 그 섬은 로빈슨 크루소의 사유지라고 하였다면 결과에 무슨 차이가 있었을까? 프라이데이는 하늘로 솟아오르거나 바다로 헤엄쳐나갈 수 없고 오로지 섬에서 살 수밖에 없으므로 이렇게나 저렇게나 노예신세를 면할 수 없었을 것이다. 로빈손 크루소가 섬을 소유한다면 프라이데이를 소유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 ({사회문제})
[120] 새로운 고용주인 지주는 과거의 노예소유자처럼 노예를 몰아 부쳐 일을 시킬 필요가 없다. 빈곤과 빈곤에 대한 두려움이 채찍보다 더 효과적으로 몰아 부쳐 주기 때문이다. 이들은 일손을 구하러 다니고 노동을 고용하는 수고를 할 필요도 없다. 또 노예가 일을 할 형편이 못 될 경우에 돌보는 비용을 지출할 필요도 없다. 이런 것은 모두 노예의 부담으로 넘어갔기 때문이다. 노동에서 착취하는 부분도 이제 자발적으로 지불한 것처럼 되었다. 실제로도 이들은 지대수입을 생산의 결과에 대한 자신의 정당한 몫이라고 생각한다. 자신이 생산에 토지를 제공하였다는 것이다! 소위 기독교 설교자는 물론이고 정치경제학자라는 사람마저도 지주에게 그렇게 설명해주고 있다. ({사회문제})
[121] 앞서 말했던 두 영국 청년이 미국으로 와서 미국인을 많이 사들였다고 한다면 지금쯤 그들이 얻는 노동생산물은 토지를―미국인이 수확의 반을 지대로 바치더라도 경작하려고 안달을 하는 토지를―사들인 것만큼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인신매매가 법적으로 허용된다고 하더라도 어느 영국 귀족이 미국으로 건너와 미국의 아기 만 명을, 이 아기들이 자라서 노동을 하면 큰 대가가 돌아올 것이라고 기대하여, 매입하기로 계약을 한다면 어리석은 짓이 될 것이다. 그 대신 땅 백만 에이커를 매입하여 울타리를 쳐 두면, 토지는 도망갈 염려도 없고 먹이고 입히고 교육시킬 필요도 없으며, 20년 내지 30년 후에는 자신이 생산하는 것의 반을 내놓고 나머지 반으로 자기와 가족의 생계를 유지하려고 하는 어른이 된 미국인 만 명을 쉽게 구할 수 있다. 이렇게 하면 만 명을 노예로 데리고 있는 것보다 더 많은 이익을 얻게 된다. ({보호냐 자유무역이냐})
[122] 도덕수준이 동일하다고 하면 두 가지 노예제도 가운데 토지를 사유재산으로 인정하는 노예제도보다 사람을 사유재산으로 인정하는 노예제도가 인간적으로 더 낫다는 점에 의문이 없다고 생각한다. 노예사유제 하에서 자행되는 잔혹행위는 개인의 의식적인 행위라는 점에서 더 충격적이고 분노를 야기한다. 그러나 세련된 방식의 노예제도인 토지사유제 하에서 가난한 사람들이 받는 고통에 대해서는 아무도 책임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바로 이 사실이, 노예사유제에서라면 용서받지 못할 잔혹행위가 토지사유제에서는 거의 주목을 받지 않은 채 지나간다. 사람들이 혹사당하고 굶주리고 인생의 모든 빛과 감미로움을 강탈당하고, 무지와 야만과 육체적 도덕적 질병에 시달리고, 범죄와 자살로 내몰린다. 그것도 사람에 의해서가 아니라 아무도 특별한 책임이 없어 보이는 불가피한 사정에 의해 그렇게 된다.
기독교 문명 속에서 드러나지 않은 채 매일매일 발생하는 공포스러운 일에 상응하는 사례를 노예사유제에서 찾으려면 고대의 노예제도나 스페인의 신세계 정복사나 노예수송선으로 거슬러 가야 한다. ({사회문제})
[123] 사회 발전이 어느 단계에 도달했을 때 늘 나타나는 것처럼 일반 대중이 소수에 복속하는 형태는 토지가 사유재산으로 전유된 데에서 비롯하였다. 토양이 사유됨으로써 그 위에서 사는 인간이 사유된 것이다. 이집트의 피라미드나 거대한 기념물은 이런 종류의 노예제를 증거하고 있으며 성서에 나오듯이 이집트 왕(Pharaoh)이 백성의 토지를 사들일 당시에 기근이 심했다고 하는 이야기에서도, 분명하지는 않지만, 이런 종류의 노예제의 전통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역사의 여명기에 그리스를 침공한 민족이 그리스 반도의 원주민을 농노(helots)로 만들어 지대를 납부토록 하였는데 이것도 이런 종류의 노예제이다. 고대 이탈리아 민족이 근면한 농민이었던 덕으로 세계를 정복하기도 하였으나 그 후에 비굴한 농노로 전락한 것은 라티푼디움(latifundium) 즉 거대 사유토지가 성장했기 때문이다. 자유롭고 평등했던 골 족, 튜턴 족, 훈 족의 전사들이 콜로니(colonii) 또는 빌린(villeins) 등의 소작인으로 변하고 슬라브족 마을의 독립적인 주민이 러시아의 소작농(boors)이나 폴란드의 농노(serfs)로 전락한 것도 그 부족장이 토지를 절대적 사유재산으로 전유해 버렸기 때문이다. 중국과 일본이 유럽처럼 봉건제도를 성립시킨 것, 폴리네시아 부족장이 부족민에 대한 절대적 지배자가 된 것 또한 마찬가지이다. 비교언어학에서 알 수 있듯이 아리안 족의 유목민과 전사들이 인도-게르만족의 공통 발상지에서부터 인도의 저지대로 이동하여 초라하고 비굴한 힌두족이 된 경위도, 앞서 인용한 바 있는 산스크리트 격언이 시사하는 바가 많다. 인도 왕(rajah)의 하얀 일산과 자랑에 겨운 코끼리는 토지소유의 꽃이다. ({진보와 빈곤})
[124] 풍요 속에서 빈곤을, 지식 속에서 무지를, 민주주의 속에서 특권계급을, 굳건함 속에서 허약함을 만들어내는 원인―그리하여 우리 문명에 일방적이고 불안정한 발전을 가져오는 원인―을 뿌리까지 추적해 보십시오. 그러면 유태인의 지도자 모세가 삼천 년 전에 인식하고 해결하려고 하였던 것과 같은 그 무엇을 발견할 것입니다. 모세는 이집트 대중이 노예상태에서 허덕이는 진정한 이유는 한 계층이 모든 사람의 삶의 터전인 토지를 장악하였기 때문임을 알았습니다. 이것은 다른 곳에서의 노예화의 원인이기도 합니다. 모세는, 노동에 의해 생산한 물자에 부여되는 사적 소유권과 동일한 무제한적인 권리를 토지에 대해서도 허용하면 불가피하게 극부층과 극빈층이 발생하고 노동자의 노예화가 초래된다는 사실, 그리하여 정치체제를 불문하고 극소수의 지배자가 다수를 장악하게 되고 종교를 불문하고 죄악과 타락을 야기한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단 하루의 필요를 위해서가 아니라 모든 미래를 위해 법을 만드는 철학적 정치가였던 모세는 그 시대의 사정에 맞는 방식으로 이러한 오류를 시정하려고 노력하였습니다. (연설문, "모세")
4. 빈곤과 타락의 원인
[125] 수천 명의 소녀가 하루에 열세 시간, 열네 시간, 열여섯 시간까지 허리를 구부리고 바느질과 재봉일에 매달려 있습니다. 남편을 여읜 과부가 자녀를 기르기 위해 온갖 고초를 겪고 있습니다. 자녀들은 빈민가에서 못 입고 못 먹고 교육도 제대로 못 받고 이 도시에서조차 뛰어 놀 곳이 없이 자라고 있습니다. 교도소나 창녀촌에 예약된 것과 다름없는 이런 환경에서 자녀들이 순수하게 자란다면 기적입니다. 자녀들이 고통받고 죽어 가는 이유는 이 세상에 태어나는 대다수 아이들을 배제하는 잘못된 제도를 통해 자녀들이 생래의 권리를 도둑맞는 것을 우리가 용인하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는 물자가 충분하며 물론 이들에게 돌아갈 물자도 있습니다. 창조주께서 주신 토지에 대해 이들이 동등한 권리를 가진다면 어린 소녀가 여자로서 벅찬 일에 내몰려 근근히 살아가는 일이 없을 것이고, 과부가 어린 자녀에게 먹일 빵을 구하려고 이처럼 쓰라리게 발버둥치지 않을 것이고, 미국에서 최대라고 하는 이 도시의 빈곤과 타락이―오늘날과 같은 문명사회의 가장 크고 부유한 중심지에서 오히려 더 심각하게 나타나는 빈곤과 타락이―사라질 것입니다. (연설문, "도둑질하지 말지니라")
[126] 발전하는 문명 속에서 다수의 대중이 겪고 있는 빈곤은, 현인이 추구하고 철인이 찬양했던 것과는 달리, 혼란과 유혹으로부터의 자유가 아니다. 그것은 인간을 타락시키고 짐승 같은 노예로 만들며 고상한 천성을 얽어매고 미묘한 정서를 둔하게 하며, 사람이 그 고통으로 인해 짐승도 마다할 짓을 하게 된다. 빈곤은 남자다움을 분쇄하고 여자다움을 파괴하며 어린이에게서조차 순진함과 즐거움을 앗아가고 저항할 수 없는 무자비한 기계와 같은 힘으로 노동 계층을 몰아 간다. 보스턴에 시간당 2센트를 주고 여자아이들을 고용하는 공장이 있는데 그 주인은 아이들의 처지에 동정할 것이다. 그러나 아이들이나 공장주나 경쟁의 법칙에 지배되어 임금을 더 주고는 운영이 안 된다. 교환은 감정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위로는 아무런 기여 없이 노동의 소득을 지대로 취하는 계층에 이르기까지 모든 단계를 공급과 수요의 법칙이 지배함으로써 하층민을 궁핍의 노예로 압박하고 개인은 그 힘에 대해 마치 바람이나 조수(潮水)의 힘에 대해서처럼 아무런 대항도 항변도 할 수 없다.
그러나 진정한 원인은 과거에도 노예제도를 초래했고 또 언제나 초래할 수밖에 없는 그 원인이다. 즉 자연이 모든 사람에게 베풀어준 것을 일부가 독점한다는 사실이다....... 토지사유제는 맷돌의 아랫돌이다. 물질적 진보는 맷돌의 윗돌이다. 노동 계층은 증가하는 압력을 받으면서 맷돌 가운데서 갈리고 있다. ({진보와 빈곤})
[127] 인류 문명 발달의 불평등을 설명해 주는 원리는 자본과 노동의 관계에 관한 원리가 아니며, 인구가 생존물자에 압력을 가한다는 원리도 아니다. 부의 분배가 불평등한 큰 원인은 토지소유의 불평등에 있다. 토지소유는 인간의 사회적․정치적 상황, 그리고 그 결과로 나타나는 지적․도덕적 상황을 궁극적으로 결정하는 기본이 되는 큰 요인이다. 이 점은 틀림이 없다. 토지는 인간의 삶터이고 인간이 필요한 물자를 꺼내 쓰는 창고이며 욕구를 충족시킬 물자를 공급하기 위해 노동을 투입하는 대상이 되는 원료이다. 토지 또는 토지생산물이 없다면 해산물도 취할 수 없고, 태양열도 이용할 수 없고, 그 밖의 어떠한 자연력도 이용할 수 없다. 우리는 토지에서 태어나 토지로부터 물자를 얻어 살다가 토지로 돌아간다. 인간은 들의 풀이나 꽃과 마찬가지로 흙의 자녀이다. ({진보와 빈곤})
[128] 현재 세계를 당황하게 하는 현상 중에 이상하거나 불가해한 것은 하나도 없다. 물질적 진보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다. 자연이 먹여 살리지 못할 아이를 탄생시키는 것도 아니다. 물질적 진보가 쓰디쓴 열매를 낳는 것이 창조주가 인간의 마음으로도 승복할 수 없는 부정의한 오점을 자연법에 남겼기 때문이 아니다. 우리의 고도 문명 속에서 결핍으로 인해 인간이 쓰러지고 죽어 가는 것은 자연의 인색함이 아니라 인간의 부정의에 기인한 것이다. 죄악과 비참, 빈곤과 궁핍은 인구 증가와 산업 발전의 당연한 결과가 아니다. 이런 결과가 인구 증가와 산업 발전에 뒤따르는 이유는 토지가 사유재산으로 인정되기 때문이다. 자연이 모든 인간을 위해 제공하는 것을 일부가 배타적으로 보유함으로써 최고의 정의의 법칙을 위반하기 때문에 생기는 결과라는 말이다. ({진보와 빈곤})
[129] 구약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사막을 가로질러 이동할 때 굶주림에 시달리자 하나님이 하늘로부터 만나를 내려주셨는데 그 양이 충분하여 모든 사람이 먹고 구제를 받았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사막이 사유토지였다고 가정해 보겠습니다. 한 사람은 1평방 마일을, 또 한 사람은 20평방 마일을, 또 한 사람은 100평방 마일을 소유하고 나머지는 발을 붙일 땅 조각 하나도 소유하지 않았다고 가정해 보겠습니다. 그러면 만나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백성 대다수에게 어떤 도움을 주었을까요? 아무 도움도 주지 못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위해 충분한 양의 만나를 내리셨음에도 불구하고 만나는 토지소유자의 사유물이 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토지소유자는 사람들을 고용하여 만나를 끌어 모아 쌓아두고 배고픈 동포에게 팔았을 것이고, 만나의 매매는 이스라엘 백성 대다수가 가진 것을 모두 내놓고 드디어 몸에 걸친 옷가지마저 내놓을 때까지 계속되었을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만나와 바꿀 수 있는 것이 바닥나면 백성은 굶주리고 만나 더미는 수북히 쌓인 상태에서 토지소유자는 만나가 과잉생산 되었다고 불평했을 것입니다. 만나의 양이 풍족한데도 굶주리는 사람이 존재하며, 이는 오늘날 우리 사회에 나타나는 현상과 다를 바 없습니다. (연설문, "빈곤이라는 범죄")
[130] 토지사유제는 노예사유제와 마찬가지로 노동의 산물을 사유하는 제도와는 본질적으로 다른 제도이다. 어떤 강도가 한 사람 또는 한 국민의 돈과 물자와 가축을 빼앗은 후 강탈행위를 중단했다고 하자. 시간이 흐른다고 해서 그른 것이 옳은 것으로 바뀌지는 않지만 그 행위의 결과는 점점 잊혀진다. 일단 지나간 일은, 잘못이 빠른 시일 내에 시정되지 않더라도, 그 행위의 당사자와 함께 쉽게 과거로 묻혀버리며 그 행위를 짐작할 만한 흔적도 사라지고 추억만이 남게 된다. 이를 시정하려고 해도 그 과정에서 새로운 잘못을 저지를 위험성도 있다. 과거에 대해서는 우리가 어쩔 수 없다. 죽은 사람에 대해서는 처벌할 수도 없고 보상할 수도 없다. 그러나 국민으로부터 삶의 터전인 토지를 빼앗는 경우에는 강탈행위가 지속된다고 하겠다. 이는 세대를 이어가면서 새롭게 강탈하는 것과 같고, 매년 매일 새로운 강탈행위를 하는 것과 같으며, 노예의 자식을 다시 노예로 삼는 것과 같다. 따라서 이런 제도를 법제화한다면 과거의 강탈행위를 묵인하는 정도가 아니라 미래의 강탈행위까지 정당화하는 결과가 된다. ({토지문제})
[131] 노동자는 소득을 얻어 귀가하는 도중에 여러 차례 강도를 만나는 사람에 비유할 수 있다. 이 놈에게 이만큼, 또 저 놈에게 저만큼 뜯기다가 마지막으로는 겨우 생명을 유지하여 다음 날 다시 일하러 갈 수 있을 만큼만 남기고 모두 빼앗긴다. 이 마지막 강도가 남아 있는 한 다른 강도를 물리쳐 본들 무슨 이익이 있겠는가?
이것이 오늘날 문명 세계의 노동자의 실상이다. 그리고 남아 있는 모두를 빼앗아 가는 강도는 토지사유제도이다. 아무리 굉장한 개선이 이루어지고 개혁이 그 자체로는 아무리 유익한 것이라고 해도, 원료를 사용할 수 있는 모든 권리를 박탈당한 채 오직 노동할 수 있는 힘만 가지고 있는 계층에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런 힘은 바람 없는 돛, 물 없는 펌프, 말 없는 안장과 같다. ({보호냐 자유무역이냐})
Ⅵ. 근본 대책
1. 지대를 환수하자
[132] 악을 제거하는 방법은 단 하나이다. 원인을 제거하는 방법뿐이다. 부가 증가하는데도 빈곤이 심화되고 생산력이 커지는데도 임금이 억제되는 이유는 모든 부의 근원이자 모든 노동의 터전인 토지가 독점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빈곤을 타파하고 임금이 정의가 요구하는 수준 즉 노동자가 벌어들이는 전부가 되도록 하려면 토지의 사적 소유를 공동소유로 바꾸어야 한다. 그 밖의 어떠한 방법도 악의 원인에 도움을 줄 뿐이며 다른 어떤 방법에도 희망이 없다. ({진보와 빈곤})
[133] 두 사람이 다이아몬드 하나를 공동으로 발견했다고 해도 보석상으로 가져가서 반으로 자를 필요가 없다. 세 아들이 배 한 척을 물려받았다고 해도 톱으로 배를 세 조각 낼 필요가 없다. 이 사람들도 그런 방법이 아니면 똑같이 나누는 게 불가능하다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철도회사를 여럿이 소유한다고 할 때 철길이나 기관차나 수송 중인 화물이나 역을 사람 수대로 잘게 쪼개는 방법이 아니면 소유자의 권리를 보장하는 방법이 없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토지에 대한 평등권을 보장하기 위해 토지를 동일하게 나눌 필요는 없다. 단지 지대를 징수하여 공동의 이익이 되도록 사용하면 된다. ({사회문제})
[134] 우리의 주장은, 사회의 것 즉 사회의 성장으로 인해 토지에서 발생하는 가치는 사회로 돌리고 개인의 것에 대해서는 불가침의 권리를 주자는 것뿐이다. 그리고 독점이 불가피한 것은 국가의 기능으로 하고, 공중의 건강, 안전, 도덕, 편의에 필요한 것만 제외하고는 모든 제한과 금지를 철폐하자는 것뿐이다. ({노동자의 상태})
[135] 인간은 본능의 지배를 받으며 사회를 이루고 살게 되어 있다. 이렇게 형성된 사회는 일정한 업무와 기능을 가지며 그에 맞는 수입이 있어야 한다. 사회가 발전하면 그 업무와 기능도 커지므로 점점 더 많은 수입이 필요하게 된다. 인간은, 본성적으로 인식할 수 있다고까지 할 수는 없더라도, 경험을 통해서나 분석을 통해서 모든 자연적 필요를 충족시키는 자연적인 방법이 있음을 알게 된다. 인간 사회가 자연의 일부라면―실제로 분명 자연의 일부이다―이 원리는 사회적 필요에나 개인적 필요에 적용될 것이고, 자연적인 내지 올바른 보행법이 있듯이 자연적인 내지 올바른 과세방법이 반드시 존재한다. ({사회문제})
[136] 과세 방식은 금액에 못지 않게 중요하다. 무거운 짐도 잘 실으면 말이 거뜬하게 운반할 수 있지만 가벼운 짐도 잘못 실으면 말에게 큰 고통을 줄 수 있다. 적절한 방식으로 부과하면 별 어려움 없이 부담할 수 있는 조세도 잘못 부과하면 국민을 궁핍하게 하고 부의 생산력을 파괴할 수 있다. ({진보와 빈곤})
[137] 건물에 조세를 부과하면 궁극적으로 건물의 사용자가 조세를 부담하게 된다. 건물임대료가 정상이윤과 세액을 합한 액수에 미치지 못하면 건물의 건축이 중지될 것이기 때문이다. 공산품이나 수입품에 조세를 부과하면 생산자나 수입상은 가격을 올리게 되고 그 세액은 도매상과 소매상을 통해 결국 소비자에게 전가된다. 이 때 궁극적으로 조세를 부담하는 소비자는 세액만을 부담할 뿐 아니라 이 세액에 대한 이윤까지 부담하게 된다. 업자는 상품구입을 위해 선불한 자본 이외에 조세로 납부한 자본에 대해서도 이윤을 취하려 하기 때문이다. ({진보와 빈곤})
[138] 조세는 생산비를 올리고 공급을 억제함으로써 가격을 상승시킨다. 그러나 토지는 인간의 생산 대상이 아니며 지대에 매기는 조세는 토지의 공급을 억제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 조세로 인해 토지소유자의 세액이 늘어나더라도 토지소유자가 토지의 사용대가를 올릴 힘이 없다. 오히려 투기 목적으로 토지를 보유하는 사람은 토지를 시가대로 매각 또는 임대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이 조세는 토지소유자 간의 경쟁을 촉진하고 따라서 지가를 하락시키는 효과를 갖는다. ({진보와 빈곤})
[139] 토지가치에 부과하는 조세는 사회로부터 특별한 혜택을 받는 사람에게만 부담을 지우며 또 그 혜택에 비례해서 부담을 지운다. 이 조세는, 사회가 창출한 가치를 사회가 거두고 또 사회를 위해 사용하는 조세이다. 이 조세는 공동재산의 공동사용이라는 원리를 구현한다. 모든 지대가 과세되어 사회의 필요경비에 충당되면, 자연이 예정하는 평등성이 성취된다. 각 국민은 개인적인 근면, 기술, 지적 능력에 의한 이익 이외에는 다른 사람보다 더 이익을 받는 일이 없다. 모든 사람은 자신이 정당하게 번 것을 갖게 된다. 그 때가 되면, 그리고 그 때가 되어야, 노동은 정당한 보수를 받고 자본은 자연적인 대가를 받는다. ({진보와 빈곤})
[140] 지대는 사회의 성장에 따라 증가하는 필요를 충당하기 위해 자연법이 마련해주는 기금이다. 지대를 환수하면 사회의 자연적인 진보는 불평등이 아니라 평등을 향해 이루어지게 된다. 이는 통일을 지향하는 구심력이 다양성을 지향하는 원심력으로부터 발생하면서도 원심력과 균형을 이루는 것과 같다. 지대는 사회 전체에 속하는 기금으로서, 개인이나 단체가 주는 구호금품에 의존하지 않고도 약자, 무의탁자, 노령자를 이 기금으로 도울 수 있으며 국민 각자의 공동의 권리로서 사회전체의 필요를 이 기금에서 충당할 수 있다. ({사회문제})
[141] 토지가치에 대한 조세는 경제이론으로 검토를 하더라도 공공재정의 원천으로서 적절할 뿐 아니라 영국의 관습에 비추어 보아도 역시 그러하다. 영국에서는 오늘날에도 명목상으로 임대가치 1파운드에 4실링씩의 토지세가 시행되고 있다. 다만 윌리엄 3세 치하에서의 실시한 토지평가액을 기준으로 부과하기 때문에 실제로는 파운드당 1페니 정도에 불과하다. 간접세를 철폐하면 자연히 이 세금에 의존하게 될 것이다. 이에 대한 지주의 저항이 일어난다면 토지소유권의 정당성 여부에 대한 논란이 일어날 것이고 간접세를 직접세로 대체하자는 운동은 불가피하게 영국 국민의 생래의 권리를 회복하자는 움직임으로 연결될 것이다. ({보호냐 자유무역이냐})
[142] 봉건제도는 유럽에 고유한 제도라기보다 평등성과 개인성을 강하게 보존하고 있는 민족이 정착된 국가를 정복했을 때 자연스럽게 나타날 수 있는 제도라고 볼 수 있다. 이 제도에서는, 적어도 이론상으로는, 토지가 개인이 아니라 사회 전체에 속한다. 권리가 힘에 의해 가장 잘 보호되었던―권리의 개념은 인간의 마음에서 지울 수 없으며 해적이나 도적 떼 사이에도 어떤 형태로건 자리를 잡고 있다―시대의 결과라고 할 수 있는 봉건제도는 어느 누구에게도 통제되지 않는 배타적인 토지권을 인정하지 않았다. 봉토는 본질적으로 신탁이었고 봉토의 향유는 의무와 연계되어 있었다. 군주는 이론상 모든 국민의 집합적 권력을 대표하였으며 봉건적 관점에서는 유일한 절대적 토지소유자였다. 개인에게 토지 보유가 허용되었지만 보유에는 의무가 따랐고 그 수입을 얻는 자는 공동의 권리를 할애 받아 생기는 혜택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르도록 되어 있었다. ({진보와 빈곤})
[143] 영국의 장기의회(Long Parliament)가 의결하고 찰스 2세가 즉위한 후 집행한 조치 즉 군대토지 제도를 철폐한 것은 국가의 공동토지를 보유하는 조건으로 일정한 부담을 지던 토지보유자에게서 부담을 면제하는 대신 모든 소비자에게 조세를 부과함으로써 일반 국민에게 부담을 이전한 것에 불과하다. 이 조치는 오랫동안 자유 정신의 승리라고 인정해 왔으며 아직도 법률 서적에는 그렇게 소개하고 있다. 그러나 영국의 대규모 부채와 중과세의 기원이 여기에 있다. 만일 봉건적 부담 방식이 시대의 변천에 맞추어 개선되었다면, 영국은 수 차례의 전쟁에도 불구하고 부채를 지지 않았을 것이고 영국의 노동과 자본도 군대의 유지를 위해 한 푼의 조세도 부담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모든 비용을 지대로 충당할 수 있었는데, 그 다음부터는 토지소유자가 지대를 가져가고 있다. 지대는 토지소유자가 노동과 자본의 소득에 부과하는 조세와 같다. 영국의 토지보유자는 토지를 얻는 대신 인구가 희박했던 노르만(Norman) 시대에 6만 명에 달하는 완전 군장한 기병을 유사시에 조달하는 의무를 지고 있었으며 그 외에도 지대의 상당 부분에 해당하는 각종 부과금을 납부해야 했다. 이러한 역무와 부담금을 금전으로 평가하면 지대의 반을 넘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러한 계약 조건이 유지되는 동시에 그후 종획 시에도 유사한 조건이 부과되었다면 현재에는 잉글랜드 지방의 토지에서 나오는 수입만으로도 영연방 전체의 공공수입보다 수 백만 파운드 더 많을 것이고 오늘날 영국은 완전한 자유무역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관세, 물품세, 면허세, 소득세 등이 없어도 현재의 모든 경비를 충당할 수 있을 것이고 그렇게 하고도 남아서 여러 좋은 목적에 사용함으로써 전체 국민의 편의와 복지를 증진시킬 수 있을 것이다. ({진보와 빈곤})
[144] 영국 국민이 자연권을 가지는 대상이자 우리가 단일세로 환수하여 영국 국민 모두가 사용하자고 하는 대상은 토지의 현재가치이다. 여기에는 사유토지에 조성된 토지개량물의 현재 가치는 제외된다. 이를 환수할 때 토지소유자가 갖는 것은 동산, 토지개량물의 현재가치, 환수된 토지가치에 대한 다른 국민과 동등한 지분이다. 이 점은 극도로 명료하지만 그다지 공정하지는 않아 보인다면, 토지소유자의 동산과 토지개량물 속에 소유자 자신이나 그 조상의 노력에 기인하지 않고 다른 사람 노동의 산물을 부당하게 차지한 부분이 들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갈피를 잃은 철학자})
[145] 불의에서 정의로 이행하는 경우에 불의를 통해 이익을 얻고 있던 계층이 손실을 입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며 이런 현상은 평행선이 서로 만날 수 없는 것처럼 어쩔 수가 없는 일이다. 그러나 손실은 상대적이고 이익은 절대적이다. 누구나 이 문제를 자세히 검토한다면, 현재의 부자연스럽고 부당한 정부세입 조성 방법을 버리고 자연스럽고 정의로운 방법을 채택한다면 상대적으로 손실을 입는 사람마저 큰 이익을 얻게 됨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갈피를 잃은 철학자})
[146] 상당수의 토지보유자는 어떤 형태이건 노동을 하는 사람이다. 노동자도 자본가도 아닌 토지소유자는 드물다. 대체로 보아 대지주일수록 대자본가이다. 이런 사정 때문에 흔히 이 계층의 성격을 혼동하고 있다. 그러므로 토지가치에 모든 조세를 부과한다면 거대한 재산이 줄어들기는 하지만 부자를 무일푼으로 만들지는 않는다. 웨스트민스터(Westminster) 공작은 런던 토지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있으며 아마도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토지소유자일 것이다. 지대를 모두 조세로 징수하면 그의 거대한 소득이 줄겠지만 건물은 그대로이며 건물과 기타 여러 형태의 동산에서 생기는 수입은 그대로이다. 공작은 누릴 수 있는 모든 복을 그대로 누릴 것이고 더구나 전보다 훨씬 좋아진 사회에서 그 복을 누릴 수 있다. ({진보와 빈곤})
2. 부자와 빈자
[147] 토지사유제는 거대한 사회악으로서, 사회적 고통의 원인이 되며 서로 반대 입장의 부자와 빈자를 다같이 희생시킨다. 그러므로 빈자의 고통에 대해서는 부자가 개인적으로 책임을 져야한다고 하면 이는 기독교 자선의 원리에 어긋나는 것으로 생각된다. 이런 식으로 말하면 엄청난 부와 지독한 빈곤이 생기는 원인을 건드려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는 결과가 되기 때문이다. 흉칙하고 위험한 혹을 가진 사람이 있다고 하자. 한 의사는 혹을 부드럽게 그러나 단호하게 제거하려고 하고, 다른 의사는 혹을 제거해서는 안 된다고 하면서 불쌍한 환자를 사람들에게 내보여 증오와 조롱의 대상으로 만든다고 하면, 어느 의사가 옳은가? ({노동자의 상태})
[148] 부 그 자체, 물질의 지배 그 자체에는 잘못이 없으나, 다른 사람이 빈곤에 빠져 있는데 부를 소유하는 것은 잘못이다. 부자가 인간적인 생활을 넘어서는 것이 잘못이고 또 일과 노력, 희망과 불안, 인생의 감미료인 사랑, 인간에 대한 신뢰와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돈독하게 하는 친절한 마음과 관대한 행동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이 잘못이다. 부자가 인간성의 비열한 측면에 얼마나 많이 노출되는가를 생각해 보라. 부자는 주변에 아첨꾼으로 둘러싸여 있고, 사악한 충동을 쉽게 만족시킬 수단이, 나아가서는 이를 충동하고 자극하는 각종 수단이 주위에 널려 있다. 부자는 사기를 당하지 않으려고 늘 조심해야 하고, 친절한 행위와 다정한 말 뒤에 숨어 있는 동기를 자주 의심해야 하며, 조금이라도 관대해지려고 하면 염치없이 구걸하는 거지와 계략으로 등을 치려는 사기꾼이 판을 친다. 부자에 대해서는 가족도 사랑을 하는 것이 아니라 재산 상속의 기대에 부풀어 죽기를 바란다. 빈곤의 가장 악랄한 면은 물질의 부족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고상한 품격을 억누르고 왜곡하는 데 있다. 정당하지 않은 부를 소유하는 것도, 이와 방법은 다르지만, 인간의 높은 품성을 억누르고 왜곡한다.
하나님의 명령에는 면책이 없다. 노동으로 사람이 자신의 빵을 벌어들이는 것이 하나님의 명령이라면, 일하지 않고 부유하게 사는 자는 벌을 받아야 한다. 또 실제로도 벌을 받고 있다. ({노동자의 상태})
[149] 아무도 빈곤을 두려워 할 필요가 없는 사회에서는 아무도 큰 부를 갈망하지 않을 것으로 생각한다. 적어도 지금처럼 큰 부를 얻기 위해 분투하고 긴장하지는 않을 것이다. 여생이 몇 년 남지 않은 사람이 부유한 상태로 죽기 위해 시간을 노예처럼 일하며 흘려 보낸다면 그 자체로 부자연스럽고 어리석은 짓이다. 궁핍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지면 현재 수많은 사람들이 대부호에게서 느끼는 부러움이 소멸될 것이고, 사용할 것 이상을 얻기 위해 고생하는 사람이 있다면 마치 모자를 여러 개 쓰고 다니는 사람이나 뜨거운 햇빛 아래 외투를 입고 다니는 사람처럼 보일 것이다. 모든 사람이 충분히 가질 수 있으면 아무도 일벌레가 되려고 하지 않는다. ({진보와 빈곤})
[150] 인간은 본능적으로 도덕과 진리를 동경하지만, 궁핍의 아픔과 궁핍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부자를 더욱 동경하고 재산가를 따른다. 정직하고 정의로운 것은 좋은 것이고 사람들은 이를 칭찬한다. 그러나 사기와 부정으로라도 백만 달러를 버는 사람은 이를 거부하는 사람보다 더 존경과 동경과 영향력을 얻으며, 마음에서 우러나온 것은 아니라도 선망과 칭송을 듣는다. 정직하고 정의로운 사람은 미래에 보상을 받을 수도 있다. 자신의 이름이 위인전에 새겨지리라고 예상할 수도 있으며 이것으로서 유혹을 이긴 자신에게 충분한 영광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사기와 부정으로 부자가 된 사람은 당장의 보상을 받는다. 그의 이름이 사회 저명인사 명단에 올라가며 남자들은 그를 모시고 여자들은 그에게 아양을 떤다. 교회에서도 상석을 차지하고 기품 있는 성직자가 개인적 관심을 보이면서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부자의 복음(Gospel of Dives)을 설교하고 약대와 바늘귀의 비유를 무의미한 장식적 동방 설화로 격하시킨다. 예술의 후원자, 문학 애호가가 되기도 하고, 지성인과 대화를 하여 무엇인가 얻을 수도 있고 교양 있는 사람과의 교유를 통해 세련될 수도 있다. 자선금을 내어 가난한 자를 먹이고 고통받는 자를 돕고 그늘진 곳에 햇빛을 날라다 주기도 한다. 사후에는 고상한 공공기관에서 그의 이름과 명예를 기념한다. 사탄이 어린이 같은 인간을 유혹할 때는 뿔과 꼬리가 달린 끔직한 괴물의 모습이 아니라 빛의 천사의 모습으로 위장한다. 그는 현세의 왕국만이 아니라 정신적 도덕적 왕국과 권세도 약속한다. 그도 짐승이 아니기 때문에 동물적 욕심뿐만 아니라 인간의 내면에서 약동하는 열망에 호소하기도 한다. ({진보와 빈곤})
[151]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다." 성경 말씀이 곡해되어 마귀를 도운 일이 있다면 바로 이 구절일 것이다. 이 말씀의 본래 의미는 명백하다. 그런데도 수없이 왜곡되면서 양심의 가책을 달래고 인간의 비참과 타락을 묵인하는 데 사용되어 왔고,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부정하고 부인하는 신성모독을 뒷받침하는 데 사용되어 왔다. 큰 지혜이시고 가장 자비로우시며 영원한 아버지이신 그 분이 선택하신 피조물의 일부가 자선을 베푸는 기쁨과 덕성을 누리도록 하시기 위해 수많은 피조물이 가난에 시달리도록 하셨다는 것이다! 그리스도가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다"고 하셨으나 그 가르침에는 "하나님의 왕국이 임할 때까지"라는 한계가 있다. 지상의 하나님 왕국, 그리스도가 제자들에게 이루기 위해 노력하고 기도하라고 가르치신 정의와 사랑의 왕국에는 가난이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사회문제})
[152] 우리는 자연히 빈곤을 경멸하게 되며 이는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이 말은 가난한 사람이 항상 자기의 잘못 때문에 가난하게 되었다는 뜻도 아니고 또 대체로 그렇다는 뜻도 아닙니다. 이런 해석은 저 자신부터 싫어합니다. 그러나 저는 잘못하는 사람만이 가난해야 한다고 봅니다. 선량한 사람이 세상을 창조할 힘을 가졌다고 하면 그 세상은 자신이 게으르거나 사악하지 않은 한 가난하게 되지 않는 세상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창조주께서 만드신 세상이므로 꼭 이런 세상입니다. 자연은 노동에게, 그리고 노동에게만 베풉니다. 어떤 종류라도 부가 생산되려면 반드시 노동이 있어야 합니다. 자연 상태에서는 정직하게 노력한 사람은 부자가 될 것이고 일하지 않는 사람은 가난하게 될 것입니다. 지금은 이러한 자연의 질서가 너무나 왜곡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는 노동자를 가난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데 익숙해져 있습니다. (연설문, "빈곤이라는 범죄")
[153] 누구는 부자이고 누구는 빈자라고 할 수 있는 어떤 경계선이 있지 않을까? 장소와 상태를 막론하고 어느 사회에서든 부자와 빈자를 구분할 수 있는 소유액의 경계선이 있지 않을까? 어떤 자연적 내지 정상적인 경계선이 있어 그 이하에서는 여러 수준의 빈자가 존재하고 그 이상에서는 여러 수준의 부자가 존재하지 않을까? 내 생각으로는 그런 경계선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 또 우리가 잘 생각해 보면 있을 것도 같다. 서비스라는 경제학 용어는, 부 속에 체화된 간접 서비스와 구분되는 직접 서비스만을 의미하는 좁은 의미로 사용되고 있지만, 인간의 욕구를 직접 간접으로 충족시키는 모든 것을 마치 분수를 통분하는 것처럼 서비스라는 용어로 나타내 보자. 이 용어를 써서 질문을 바꾸자면 '서비스의 소유 또는 향유에 관한 자연적 내지 정상적인 경계선이 존재하지 않을까?'와 같이 된다. 이런 경계선은 분명히 존재한다. 이는 주는 사람이 있으면 받는 사람이 있는 것과 같다. 이는 공자의 금언 중 영어로 reciprocity(호혜성)라고 번역되는 균형을 의미한다. 인간 사회의 어느 한 구성원이 다른 구성원으로부터 권리로서 받아야 하는 서비스는 그가 다른 사람에게 제공하는 서비스와 맞먹는 것이 자연스럽다. 바로 여기에, 우리가 부와 빈곤이라고 부르는 것의 출발점이 되는 정상적인 경계선이 존재한다. 남에게 주어야 하는 것보다 더 많은 서비스를 받게 되어 있는 사람은 부자이다. 남에게 주는 것 또는 줄 마음이 있는 것보다 더 적은 서비스를 받게 되어 있는 사람은 빈자이다. '줄 마음이 있는'이라는 표현을 쓴 것은, 불행히도 오늘날 우리 문명에서는 일할 마음이 있어도 일할 기회를 제대로 찾지 못하기 때문이다. 부자는 가져야 하는 정도 이상을 가지는 사람이고, 빈자는 가져야 하는 정도 이하를 가지는 사람이다. 부자와 빈자의 관계는 이와 같다. 부유층의 존재는 빈곤층의 존재를 동반하며 그 역도 성립한다. 한 쪽에 비정상적인 사치가 있으면 다른 쪽에는 비정상적인 결핍이 있음은 필연이다. 이런 관계를 도덕적인 용어로 표현한다면, 부자는 적어도 강도질한 것을 나눠 가지는 자이기 때문에 그 자신 강도이며 빈자는 강도의 피해자이다. 일부 기독교인은 예수의 말을 잘못 해석하기도 하지만, 예수는 무기력한 말씀을 하신 분이 아니었으며 언제나 빈자를 동정하고 부자를 배척하였다. 예수는 강도질하는 것보다 강도 당하는 것이 낫다는 철학을 가지고 있었다. 예수가 지향한 정의의 나라에서는 부유함도 가난함도 없다. 진정한 의미의 부유함과 가난함은 불의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예수는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고 하였는데 이는 마치 두 평행한 직선은 만나지 않는다는 것과 같은 냉엄한 진리를 동양적인 은유의 형식으로 강조하신 말씀이다. 정의가 지배하는 곳에 부정의가 살아남을 수 없다. 사람은 어떻게든 빠져나간다고 하더라도, 그의 부 즉 서비스를 베풀지 않으면서 서비스를 강요할 수 있는 힘은 도저히 빠져나갈 수 없다. 하나님의 나라에 빈자가 있을 수 없다면 부자도 있을 수 없다. 이 세상에서, 또는 다른 어느 세상에서도, 부당한 소유를 철폐하지 않고는 부당한 빈곤을 철폐할 수 없다. 이 말은, 비유적으로 표현하자면 악마를 성나게 하지 않고 하나님과 잘 지내고 싶다는 식의 사람 좋은 박애주의자의 귀에는 너무 엄혹하게 들릴 것이다. 그렇더라도 이 말은 진실이다. ({정치경제학})
3. 토지보상의 문제
[154] 존 스튜어트 밀은 위대하고 순수하며 더운 가슴과 고결한 심성을 가진 인물이지만 경제 법칙의 진정한 조화를 보지 못했고 궁핍과 비참, 죄악과 수치의 근원이 되는 이 본질적인 잘못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렇지 않다면 그가 다음과 같은 귀절을 썼을 리가 없다. "아일랜드의 토지 그리고 모든 나라의 토지는 그 나라 국민의 것이다. 도덕과 정의에 의하면 토지소유자라는 개인은 지대 또는 시장가격에 대한 보상액 이외에는 아무 권리도 갖지 못한다"
참으로 답답한지고. 어느 나라의 토지가 그 국민의 것이라면 토지소유자라는 개인이 지대에 관한 권리를 갖는 것이 어째서 도덕적이고 정의롭다는 말인가? 토지가 국민의 것이라면 왜 국민이 도덕과 정의의 이름으로 자기 물건의 시장가격을 남에게 지불해야 한다는 말인가?
허버트 스펜서는 말했다. "인류의 공동유산을 원초적으로 도둑질한 자를 처리해야 할 경우라면 단숨에 해 치우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단숨에 해 치우자. 토지의 절도는 말(馬)이나 돈의 절도와는 달리 행위 그 자체로 끝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것은 매일 매시 계속되는 반복적인 절도에 해당된다. 지대는 과거의 생산물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생산물에서 나온다. 지대는 지속적으로 노동에 부과되는 부담이다. 해머를 칠 때마다 곡괭이를 휘두를 때마다 직기가 움직일 때마다 증기기관이 고동칠 때마다 지대에 공물을 바친다. 지대는 깊은 지하에서 생명을 걸고 일하는 사람에게도, 배를 타고 세찬 파도를 무릅쓰며 일하는 사람에게도 부과된다. 이런 절도는 자본가의 정당한 보수와 발명가의 끈질긴 노력의 열매를 가져간다. 어린이에게서 놀이와 학교를 빼앗으며 뼈가 튼튼해지고 근육이 단단해지기도 전에 일터로 몰아낸다. 추위에 떠는 사람에게서 온기를, 배고픈 사람에게서 음식을, 병자에게서 약품을, 불안한 사람에게서 평온을 빼앗는다. 사람을 타락시키고 포악하게 하며 비참하게 한다. ({진보와 빈곤})
[155] 보통법은 이성의 극치라고들 하며 또 보통법은 토지소유자에 의해 그리고 토지소유자를 위해 형성된 것이므로 그 결정에 대해 그들이 불평할 수 없을 것이다. 어느 선의(善意)의 토지소유자가 돈을 지불하고 토지를 매입했지만 이 토지가 다른 사람이 정당하게 소유하는 토지라는 판결이 난다면 법은 이 선의의 토지소유자에게 무엇을 허용하는가? 아무 것도 허용하지 않는다. 선의로 매입했다고 해도 아무런 권리가 없다. 법은 선의의 매입자와 관련해서 "보상이라는 복잡한 문제"에 신경 쓰지 않는다. 존 스튜어트 밀은 "토지는 갑의 것이다. 그러므로 자기가 소유자라고 생각했던 을은 지대 또는 매매가격에 대한 보상액 이외에는 아무 권리가 없다"고 했지만 법은 이와 다르다. 노예 탈출 사건을 다룬 유명한 재판에서 미국 법원이 법은 북부에 주고 검둥이는 남부에 주었다는 말이 있는데 밀의 논리는 이것과 다름없다. 법은 단순히 "토지는 갑의 것이다. 집행관은 토지를 갑에게 돌려 주라!"고 판결한다. ({진보와 빈곤})
[156] 무엇에 대해 보상한다는 말인가? 과거에 부당하게 취한 것을 포기하는 데 대해 보상한다는 것인가? 토지소유자가 주장하는 보상은 그런 것이 아니다...... 우리는 노동자로부터 부당하게 취한 것을 원상회복 시키라고 하지 않는다. 지나간 일은 지나간 일로 치부하려고 한다. 과거에 토지가치를 취함으로써 노동의 과실을 빼앗은 사람들이 이미 가져간 것은 그냥 가지도록 놔두자는 것이 우리의 제안이다. 우리의 제안은 단지 앞으로 노동에 대해 강탈하는 것을 막자는 것이다. ({노동자의 상태})
[157] 어떤 사람이 가지고 있던 기대가 국가의 조치로 인해 깨졌다고 해서, 도덕적으로 잘못이 없는데도 국가가 그에게 보상을 하여야 하는가? 국가의 조치가 평화를 이룩하였을 때 전쟁이 계속될 것으로 기대하고 투자를 한 사람에게 보상을 해야 하는가? 국가가 지름길을 개설하였을 때 구 도로의 통행이 줄어들어 손실을 입는 사람에게 보상을 해야 하는가? 열을 이용하여 직접 발전을 하는 능률적인 방법의 발견을 국가가 촉진했을 때, 소용이 없게 되어 폐기하는 증기기관의 소유자와 생산자에게 보상을 해야 하는가? 국가가 비행선을 발전시킬 경우 비행선 때문에 사업에 지장을 받는 사람에게 보상을 해야 하는가? 이러한 주장은 어불성설이다. 그러나 토지소유자의 보상 요구는 이보다 더욱 못하다. 불의가 계속될 것이라는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했다고 해서 국가가 보상을 하라는 주장이기 때문이다. ({갈피를 잃은 철학자})
[158] 보상액은 손실에 상응하는 금액이 되어야 한다. 불의를 중단한다고 해서 보상을 한다면 불의를 통해 이익을 보던 사람에게 불의의 지속에 상응하는 금전을 주는 결과가 된다. 오늘날 국가의 경비는 모두 국민에게서 나온다. 정부가 일부 국민에게 무언가를 베푼다면 그만큼 다른 국민에게서 징수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철폐와 보상을 병행한다면 이는 철폐하는 것이 아니라 모습만 바꿀 뿐 한 쪽에서는 부당하게 빼앗기고 다른 편에서는 부당한 이익을 얻는 제도를 지속시키는 결과가 된다. ({갈피를 잃은 철학자})
[159] 다른 사람을 해롭게 하면서도 선의로 매입자가 될 수 있다고? 이것은 어불성설이 아닌가? 우리 세속의 법정에서도 "법의 무지는 변명이 되지 못한다"는 원리가 적용되는데, 도덕의 법정에서는 말해 무엇할 것인가? 보상을 해주자는 주장은 바로 이와 같다.
선의란 고의적인 범죄에 대한 처벌을 면제받을 수 있는 근거는 될지언정 권리의 근거가 되는 것은 아니다. 당신이 내 발을 선의로 밟았다고 할 때 나에게 화를 내지 말라고 부탁할 수는 있어도 내 발을 계속 밟을 권리를 갖게 되는 것은 아니다. ({갈피를 잃은 철학자})
[160] 물건을 교환하는 사람은 자기 물건을 그 부대조건과 함께 포기하는 대신 다른 사람의 물건을 그 부대조건과 함께 인수한다. 벽돌을 팔아 건초를 산 후에, 벽돌과 달리 건초는 쉽게 타 없어진다고 불평할 수는 없다. 건초가 불에 타기 쉽다는 성질은 건초를 구입할 때 용인한 부대조건의 하나이다. 마찬가지로, 도덕적으로 인정되는 물건을 법적으로만 인정된 물건과 바꾸면서, 매각한 물건에 대한 도덕적 인정이 이제는 매입한 물건에도 적용된다고 할 수는 없다. 도덕적 인정은 교환된 물자와 함께 상대방에게 넘어 가버렸다. 교환이란 서로 양도하는 것이지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게 아니다. 각 당사자는 자신이 가지고 있던 모든 권리를 포기하고 상대방이 가지고 있던 모든 권리를 취득한다. 최초의 소유자가 가지지 않았던 도덕적 권리를 마지막 소유자가 가질 수는 없는 것이다. ({갈피를 잃은 철학자})
[161] "매입자의 인지 책임"(caveat emptor)은 법의 원칙이다. 중력의 법칙과 역학의 법칙을 무시하고 지은 건물을 매입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그 법칙에 의한 피해를 각오하여야 한다. 도덕법칙에 위반하는 물자를 매입하는 사람도 같은 각오를 하여야 한다. 매입자가 도덕적 인식을 무시하고 불의가 계속될 것으로 보아 위험을 무릅쓰다가 일반인의 양심이 각성하여 불의가 계속되는 것을 거부할 경우에, 매입자가 일반인에게 보상을 요구할 수 있을까? 일반인은 불의에 동참하기를 거부하고 그로 인해 손해를 보았으며 앞장서서 불의에 맞섬으로써 탄압 받고 모욕을 당하였는데, 매입자가 일반인도 국민의 일원으로서 공동책임이 있다는 이유를 대면서 자신의 피해에 대해 보상을 하라고 주장할 수 있을까? 도덕적 인식이 높아지면 불의가 지속될 가능성이 점차 줄어들 것인데도 불구하고 이런 뻔뻔스러운 요구를 받아준다면 불의가 약화되고 소멸될 가능성을 없애는 것이 아닌가? 투자자에게 위험을 보전해 주기로 약속한다면 불의의 힘과 에너지가 마지막 순간까지 유지되지 않겠는가? ({갈피를 잃은 철학자})
[162] 토지에 대한 불평등한 권리를 철폐하는 데 대해 보상을 요구하는 것은 정의를 회피하고 불의를 지속시키기 위한 구실에 불과하다. 보상 요구는 정의의 요체인 평등을 철저히 부정한다는 점에서 철폐 대상이 되는 불의와 다름없다. 선량한 사람의 눈에도 이런 요구가 그럴 듯해 보일 수 있겠지만, 곰곰이 따져보면 그 이유는 그가, 아마도 무의식적으로 그랬겠지만, 부정의한 제도로 이익을 얻는 자를 동정할 뿐 그로 인해 상처를 받는 자는 외면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가 평등권이 회복될 때 소득이 줄어드는 몇몇 사람을 생각하는 반면, 평등권이 부정됨으로써 가난하고 천하게 살면서 심지어 생명까지 잃은 수많은 사람은 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가 횡포한 고정관념을 깨뜨리고 모든 인간은 평등하게 자연의 기회를 사용하여 자신의 삶을 영위하고 능력을 발전시킬 수 있는 권리를 가진다는 점을 진정으로 인식한다면, 토지 독점을 철폐할 때 보상을 해야 한다는 주장의 부당함과 사악함을 깨닫게 될 것이다. 불의를 철폐할 때 보상을 받아야 할 자가 있다면 불의에 의해 고통을 받았던 자이지 그로 인해 이익을 얻었던 자가 아님을 깨닫게 될 것이다. ({갈피를 잃은 철학자})
[163] 해묵은 잘못에 대한 비판이 처음 시작될 무렵 정의의 여신은 비굴할 정도로 겸손하다. 영어 사용국에 속하는 우리는 아직도 색슨 시대 노예의 질곡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며 고대 이집트 사람들이 악어를 숭상한 것과 같은 근거 없는 존경심을 가지고 지주의 "기득권"을 존중하도록 교육받았다. 그러나 관념은, 처음에는 대단치 않아 보이더라도, 때가 무르익으면 자라기 마련이다. 한 때, 왕이 모자를 쓸 때 평민은 머리를 가려야 했으나 그 얼마 후 성 루이(St. Louis)의 어느 자손의 머리가 단두대에서 구른 일도 있었다. 미국의 노예제도 철폐운동은 노예소유자에 대한 보상에 관한 이야기에서부터 시작되었다. 그러나 4백만 명의 노예가 해방되자 노예소유자는 보상을 받지 못했고 보상을 내놓고 요구하지도 못했다. 영국이나 미국과 같은 나라의 국민이 토지의 사적 소유의 부정의성과 단점을 충분히 인식하여 토지의 국유화를 시도할 무렵이 되면, 토지의 매수보다는 더 직접적이고 용이한 방식으로 국유화하는 방안을 추구하게 될 것이다. 이 때가 되면 토지소유자에게 보상하는 문제에 신경을 쓰지 않게 될 것이다. ({진보와 빈곤})
4. 지대세의 효과
[164] 여러 가지 현상이 하나의 원인에서 발생하고 갖가지 해악이 하나의 단순한 개혁으로 치유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려면 신중한 사고가 필요하다. 의술의 초기단계에서는 각 증상에 각기 다른 약을 사용하였던 것처럼 사회문제에 처음으로 관심을 두기 시작할 때에는 각 사회악마다 개별적인 대책을 추구하는 경향이 있다. 또 이와 같은 근시안적 오류로서, 그 사회문제가 없다는 전제하에서만 가능한 대책을 유일한 해결책으로 제시하는 경향도 있다. 예를 들면 죄악과 범죄의 문제를 해결하려면 모든 인간이 선하게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든지, 빈곤 문제를 해결하려면 정부가 모든 국민에게 물자를 마련해 주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등이다. ({보호냐 자유무역이냐})
[165] 모든 단계의 교환을 저해하고 모든 형태의 산업을 압박하는 현재의 각종 조세를 철폐하면 마치 성능이 좋은 용수철에 실린 무거운 짐을 들어내는 것과 같은 효과가 생긴다. 참신한 힘이 주입되므로, 생산은 새로운 모습으로 활기를 띨 것이고 교환도 새로운 자극을 받아 그 효과가 멀리까지 파급될 것이다. 현재의 과세 방식은 인공의 사막과 산처럼 교환을 저해한다. 상품이 세관을 통과할 때 무는 관세는 전세계를 둘러오는 수송비보다 더 무겁다. 현재 부과되는 조세는 인간의 노력, 근면, 기술, 절약에 벌금을 물리는 것과 같은 효과를 낸다. 갑은 오두막에 살고 을은 갑보다 더 열심히 일하여 좋은 집을 짓고 산다고 하면 을이 갑보다 세금을 더 물게 되는데, 이는 을이 자기의 노력과 근면에 대해 벌금을 무는 것과 같다. 갑이 낭비할 때 을은 저축을 한다면 갑은 벌금이 면제되고 을이 벌금을 물게 된다. 누군가 배를 만들면 나라에 해라도 준 것처럼 그 사람의 노력에 세금을 매긴다. 철도가 개설되면 철도가 공해라도 되는 듯이 세금을 받으러 온다. 공장이 건설되면 세금을 매기는데, 이런 세금을 내고도 이윤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부작용이 꼬리를 물게 된다. 우리는 자본이 필요하다고 하면서도 누군가 자본을 축적하거나 형성하면 우리가 그에게 특혜라도 준 것처럼 세금을 부과한다. 황무지를 옥토로 바꾸어 놓는 사람을 조세로써 처벌하며, 기계를 도입하고 늪을 농지로 바꾸는 사람에게 벌금을 물린다. ({진보와 빈곤})
[166] 황금 알을 낳는 거위를 죽이지 않으면, 농사를 거들어 주는 황소의 여물을 빼앗지 않으면, 근면과 절약과 기술에 대한 자연스러운 보상이 완전히 그리고 공제 없이 이루어지도록 하면, 사회 전체에 이익이 되지 않겠는가? 자연스러운 보상이 사회 전체에 대해서도 이루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사회의 법칙은 개인은 전체를 위하고 전체는 개인을 위하는 것이다. 개인이 좋은 일이나 나쁜 일을 하면 자기 혼자서만 영향을 받는 것이 아니다. 생산적인 기업은 그 기업인에게도 대가를 주지만 다른 사람에게도 부수적인 이익을 준다. 어떤 사람이 과일나무를 심으면 이 사람은 과일을 적기에 수확하여 이익을 본다. 그러나 사회 전체도 덕을 본다. 소유자가 아닌 다른 사람도 과일의 공급이 많아져 덕을 본다. 새들도 나무에 둥지를 틀고 멀리 그리고 넓게 날아다닐 수 있다. 나무가 강우도 돕지만 비가 자기 과수원에만 내리는 것은 아니다. 멀리서 나무를 바라보는 사람도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 다른 것도 마찬가지다. 주택, 공장, 선박, 철도를 건설하면 그 혜택은 직접 이윤을 취하는 사람 이외에까지 미친다. 자연은 인색한 자를 비웃는다. 이런 사람은 밤을 묻고 다시 파내지 않는 다람쥐와 같다. 묻은 밤은 싹이 트고 자라서 나무가 될 것이다. 미이라를 고급 광목과 비싼 향료로 치장하여 안치하기도 한다. 그러나 수 천 년의 세월이 지난 후 베두윈족(Bedouin)이 미이라의 관으로 불을 피워 요리를 해먹을 수도 있고, 미이라가 김을 내뿜어 나그네의 걸음을 재촉할 수도 있고, 미이라가 먼 나라에 이송되어 다른 민족의 호기심을 충족시킬 수도 있다. 벌이 나무 구멍에 꿀을 저장하지만 곰이나 사람이 나타나 먹어 치울 수도 있다. ({진보와 빈곤})
[167] 이러한 변화가 노동시장에 미칠 효과를 생각해 보자. 현재와 같은 일방적인 경쟁은 사라진다. 노동자가 일자리를 얻기 위해 경쟁을 벌여 임금이 최저 생존 수준으로 하락하는 대신, 어디서든지 고용주가 노동자를 구하기 위해 경쟁을 벌이고 임금은 정당한 수준으로 올라간다. 왜냐하면 노동수요에 있어 최대의 경쟁자라고 할 수 있는 자가노동 수요가 노동시장에 등장하기 때문이다. 이 경쟁자는 인간의 욕구가 완전히 충족되기 전에는 절대로 노동수요를 멈추는 일이 없다. 이 때 고용주는 교역 확대와 이윤 증대라는 자극을 감지하는 다른 고용주와도 경쟁을 해야 하며 또 토지독점을 막는 조세제도로 인해 활짝 개방된 자연의 기회를 이용하여 자가노동을 하려는 사람과도 경쟁을 해야 한다. ({진보와 빈곤})
[168] 우리 도시의 빈민가에서 질병과 죽음, 죄악과 범죄를 키우는 환경 속에 살고 있는 많은 가족들이 저마다 정원을 갖춘 위생적인 주택을 가진다고 해 보자. 농민이 노동이라기보다는 기분전환에 가까운 하루 평균 두 세 시간의 일을 통해서도 생계를 유지할 수 있고, 가정마다 지금은 사치품이라고 여겨지는 각종 편리품이 있다고 해 보자. 집에는 햇빛이 잘 들고 난방이 잘 되며 더 바란다면 전기도 들어오고, 이웃과 전화로 연결도 된다고 해 보자. 가족은 자유로이 도서관과 강연회와 과학장치에 관한 교습에 참여할 수 있고, 극장이나 연주회나 오페라에도 원하는 만큼 갈 수 있고, 다른 지방이나 유럽으로 때때로 여행도 다닐 수 있다고 해보자. 간단히 말해서 천 명에 한 명 정도의 성공한 사람만이 아니라 보통 정도의 신체와 지능과 알뜰함을 갖춘 사람이라면 누구나, 발전된 문명 사회에서 인간생활의 수준을 높이고 범위를 확대하기 위해 생겨난 모든 것을 누릴 수 있다고 해 보자. 이런 것은 현재의 상태에서 생각해 보면 대마초를 피우는 사람의 머리 속에서나 그려질 현실성 없는 꿈처럼 여겨진다. 그러나 이미 인간의 능력 내에 속하는 힘만으로도 이런 상태를 쉽사리 달성할 수 있다. ({사회문제})
[169] 노동에게 자유로운 일터와 완전한 대가를 주고 사회의 성장으로 인해 생긴 기금을 사회 전체의 이익을 위해 징수하면 여러 가지 변화가 나타난다. 궁핍 내지 궁핍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지게 된다. 생산이라는 용수철은 자유롭게 튀어 오르고 부가 엄청나게 증가하여 최하층도 안락한 생활을 할 수 있게 된다. 숨쉴 공기에 대해 염려하지 않듯이 일자리에 대해서도 염려하지 않게 된다. 들에 핀 백합과 같이 먹고 살 걱정을 할 필요가 없게 된다. 과학이 발전하고, 발명이 계속되고, 지식이 보급되어 모든 사람이 혜택을 보게 된다.
궁핍 내지 궁핍에 대한 두려움이 없어지면 부에 대한 동경도 숙어들고 부의 획득과 과시가 아닌 다른 방법으로 타인의 존경과 인정을 얻으려 할 것이다. 이렇게 해서 공적인 문제의 처리나 공적인 자금의 관리에 있어서도 사익을 추구할 때처럼 신경을 써서 기술을 발휘하고 정성을 들이게 된다. 철도나 가스 등을 공영화하더라도 지금의 주식회사 방식보다 오히려 더 경제적, 능률적으로 운영할 수 있으며 소유자가 혼자인 경우처럼 경제적, 능률적으로 운영될 것이다. 고대 그리스 올림픽 게임에서 우승하려면 끈질긴 노력이 필요하지만 그 상은 그저 야생 올리브 가지로 만든 머리띠에 불과했다. 사람들은 이런 머리띠를 얻기 위해 돈으로는 도저히 살 수 없는 노력을 하고 또 하였다. ({진보와 빈곤})
Ⅶ. 개혁의 길
1. 인간 진보의 법칙
[170] 인간 행동의 근본 동기를 이기심이라고 보는 철학은 단견이다. 이러한 철학은 이 세상에 가득 찬 여러 사실을 외면한다. 이 철학은 현재도 모르고 과거의 역사도 읽어보지 않은 사람의 견해이다. 사람을 움직이려면 무엇에 호소하는가? 돈에 호소하는 것이 아니라 애국심에 호소한다. 이기심에 호소하는 것이 아니라 이해심에 호소한다. 이기심은 강력하며 매우 큰 결과를 낳을 수 있기는 하지만, 비유하자면 기계적인 힘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의 본성에는 화학적인 힘과 같이 녹이고 융합하고 감싸면서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는 무엇이 있다. "인간은 목숨을 위해서는 모든 것을 바친다"고 할 때는 사익을 말한다. 그러나 인간은 차원 높은 동기에 충실하기 위해 목숨까지도 바칠 수 있다.
모든 민족의 역사에 많은 영웅과 성자가 출현하는 것은 이기심 때문이 아니다. 세계사의 페이지마다 고결한 행동과 자비로운 생활이 빛나는 것도 이기심에 의해서가 아니다. 석가가 왕궁을 떠나고, 오를레앙의 처녀가 제단의 검을 빼어 들고, 테르모필레의 3백 용사가 용기를 잃지 않고, 빙켈리드가 가슴에 창 다발을 끌어안고, 뱅상 드 뽈이 쇠사슬에 묶여 노를 젓고, 인도에 기근이 들었을 때 어떤 어린이가 자신도 굶주리면서도 더 굶주린 아이를 안고 구호소로 찾아든 것이, 어느 하나 이기심에서 나온 일이 아니다. 종교, 애국심, 이해심, 인간성에 대한 열정, 하나님의 사랑 또는 그 밖의 무슨 이름으로 부르든 간에 여기에는 이기심을 극복하고 몰아내는 어떤 힘이 작용한다. 이것은 도덕세계에서의 전기(電氣)라고 할 수 있는, 무엇보다도 강력한 힘이다. 이것은 인간이 살았던 모든 사회에 존재했던 힘이고 오늘의 사회도 여전히 이 힘으로 가득 차 있다. 주변을 둘러 보라! 보통 사람들 가운데, 일상생활의 근심과 고통, 시끄러운 거리의 소음, 궁핍에 절은 빈민가―이 모든 어둠 속에는 반드시 이를 비추어 주는 조용한 불빛이 있다. 이것을 보지 못하는 사람은 눈을 감고 길을 걷는 사람이다. 보려고 하는 자는 플루타르크가 한 다음과 같은 말을 이해할 수 있다. "인간에게는 자비의 원리가 있다. 인간에게는 인식하고, 생각하고, 기억하는 본성과 함께 사랑하는 본성도 있다."
우리에게 의욕만 있으면 이러한 진정한 힘은, 현재는 아무 쓸모가 없거나 잘못된 형태로 나타나고 있지만, 사회를 강하게 하고 사회를 건설해 나가고 사회를 고결하게 만드는 데 사용할 수 있다. 마치 한 때는 파괴력만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던 자연력을 지금은 유용하게 쓰고 있는 것과 같다. 우리는 단지 이 힘에 자유와 기회를 부여하기만 하면 된다. ({진보와 빈곤})
[171] 노동의 능률은 언제나 일반적인 임금과 같이 상승한다. 임금이 오르면 자존심, 지적 능력, 희망, 활력도 증가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기계도 아니고 동물도 아니다. 기계나 동물은 정해진 능력이 있으며 그 이상은 할 수 없다. 생산의 큰 원동력은 근육이 아니라 마음이다. 인간의 신체가 낼 수 있는 힘은 보잘 것 없다. 그러나 인간의 지적 능력에는 거스를 수 없는 자연의 물결이 흐르고 인간의 의지 앞에 물질은 찰흙처럼 유연하게 된다. 대중의 안락과 여가와 독립을 증대시키면 지적 능력도 증대된다. 그리하여 두뇌가 손을 도우며, 극미한 생물을 측정하고 별의 궤도를 추적할 수 있는 자질이 평범한 일상사에서도 발휘된다. ({진보와 빈곤})
[172] 동물은 만족하여 늘어지는 시기에 인간에게는 끊임없는 욕구가 생겨서 밖으로는 자연을 향하고 안으로는 자신을 향해서, 뒤로는 감도는 안개를 뚫고 과거를 향하고 앞으로는 드리운 어둠 속의 미래를 향해서 탐구한다. 사물의 밑바닥에서 법칙을 찾는다. 지구의 생성과 별의 구조를 알려고 하며 생명의 기원을 캐려고 한다. 그리고는 자신의 고상한 천품을 계발함에 따라 고차적인 욕구가―정열 중의 정열, 희망 중의 희망이―발생한다. 인간은 이런 욕구의 도움으로 생활을 더 좋게 더 밝게 만들 수 있으며 빈곤과 악 그리고 슬픔과 수치를 무찌를 수 있다. 인간은 동물을 정복하고 지배한다. 향연에 등을 돌리고 권좌도 마다한다. 다른 사람이 부를 축적하고 미각의 즐거움을 채우고 짧은 날 따듯한 양지쪽에서 출세를 하더라도 개의하지 않는다. 자신이 본 적도 없고 보지도 못할 사람을 위해 일한다. 자신의 관에 흙이 덮인 후에야 나타날 수 있는 명예나 희소한 정의를 위해 일한다. 춥기만 하고 칭찬도 못 받으며 날카로운 돌과 굵은 가시가 즐비한 곳에서 선봉이 되어 고생을 한다. 다른 사람의 비웃음과 칼날 같은 비난 속에서 미래를 건설한다. 좁은 길을 개척하여 언젠가 인간성이 진보할 때 넓은 길이 될 수 있도록 준비한다. 욕구는 더 높은 세계로 발전하고 더 큰 세계로 손짓하며, 동녘에 떠오르는 별이 인간을 계속 인도한다. 보라! 심장은 하나님을 동경하여 고동치고 마침내 인간이 천체의 운행을 도울 수도 있다! ({진보와 빈곤})
[173] 정신력은 진보의 동력이며 인간은 진보에 투입하는 정신력―즉 지식의 확대, 방법의 개량, 사회 상태의 개선에 투입하는 정신력―에 비례하여 전진한다. ({진보와 빈곤})
[174] 사회를 배에 비유한다면 다음과 같다. 선원의 행위와 노력에는 배를 전진시키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이 있다. 배에 들어온 물을 퍼낸다든지, 선원들 간에 싸운다든지, 다른 방향으로 배를 끌어당긴다든지 하는 행위에 힘을 소비하면 배의 전진이 더디게 된다.
사람이 따로따로 떨어져 살면 개인의 모든 힘이 생존 유지에 다 소요된다. 정신력은 사람들이 사회 속에서 서로 어울릴 때에 한하여 자유롭게 되어 고차적인 목적에 사용될 수 있다. 어울림으로 인해 분업이 가능해지고 다수인의 협력에 의해 생기는 경제성이 나타난다. 그러므로 어울림은 진보의 첫째 요소이다. 개선은 사람들이 평화롭게 어울릴 때 이루어지며 어울림이 넓고 긴밀할수록 개선의 가능성이 더 커진다. 그리고 인간에게 평등한 권리를 부여하는 도덕의 법칙이 무시되느냐 존중되느냐에 따라 정신력이 대립 속에 낭비되느냐 아니냐가 결정되므로, 평등(또는 정의)은 진보의 둘째 요소이다.
이렇듯 평등 속의 어울림이 진보의 법칙이다. 어울림은 정신력을 자유롭게 하여 개선에 바칠 수 있도록 해 주며 평등, 정의, 자유는―이 세 용어는 도덕 법칙을 존중한다는 의미에서 동일하다―정신력이 쓸 데 없는 싸움에 소모되는 것을 막아 준다. ({진보와 빈곤})
[175] 인간 진보의 법칙은 도덕 법칙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정의를 촉진하고 권리의 평등성을 존중하며 개인의 자유는 타인의 동등한 자유에 의해서만 제약되도록 하는 사회제도는 문명을 발전시킨다. 사회제도가 이렇지 못하면 문명의 발전은 중단되고 퇴보한다. 1,800여 년 전 십자가에 못 박힌 그 분이 가난한 어부와 유태 농민에게 가르쳤던 단순한 진리 이상의 교훈을 정치경제학과 사회과학이 가르칠 수 없다. 이 단순한 진리는, 이기심에 의해 변질되고 미신에 의해 왜곡되는 수는 있지만, 인간의 영적인 열망을 담아내기 위해 애를 써온 모든 종교의 밑바닥에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진보와 빈곤})
[176] 풍요 속에서 인간을 괴롭히고 짐승처럼 만드는 빈곤, 그리고 빈곤으로 인해 생기는 여러 가지 악은 정의를 부정하는 데에서 발생한다. 자연이 모든 사람에게 자유로이 베풀어 준 기회를 개인이 독점할 수 있게 함으로써 우리는 근본적인 정의의 법칙을 무시하였다. 우리가 아는 한, 큰 안목으로 보면 정의는 우주의 최고법칙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부정의를 일소하고 모든 사람에게 자연의 기회에 대한 권리를 보장하면 우리는 정의의 법칙에 순응하게 된다. 그에 따라 부와 권력의 분배에 있어 자연에 반하는 불평등을 야기하는 큰 원인을 제거하게 된다. 빈곤을 추방하게 된다. 탐욕이라는 무자비한 욕망을 길들이게 된다. 죄악과 비참의 근원을 고갈시킨다. 어둠 속에 지식의 등불을 비춘다. 발명에 새로운 활력을 주고 발견에 신선한 자극을 준다. 정치적인 취약점을 보강하게 된다. 전제정치와 무정부주의를 방지하게 된다. ({진보와 빈곤})
2. 종교의 임무
[177] 정의가 도덕의 계층에서 가장 상위의 덕목이라고는 말하지 않겠다. 그러나 정의는 최우선적인 덕목이다. 정의보다 상위에 있는 덕목은 반드시 정의에 기반을 두어야 하고 정의를 내포하여야 하며 정의를 통해서만 도달할 수 있다. 기독교를 통해 우리에게 영향을 준 히브리 종교가 발전하는 과정에서 사랑의 하나님이 나타나기에 앞서 "네 하나님이신 주님은 정의의 하나님"이라고 선언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영원불변의 정의가 인식되기 전에는 영원불변의 사랑은 감추어져 있다. 사람이 진실로 관대하기 위해서는 정의로워야 하듯이 인간 사회가 자비에 기반을 두려면 먼저 정의에 기반을 두어야 한다. ({사회문제})
[178] '자비'(Benevolence)보다 더 위대하고 '자선'(Charity)보다 더 존엄한 '정의'(Justice)는 이 잘못을 시정하라고 명령한다. 저울과 칼을 들고 있는 정의는 부정할 수도 없고 제거할 수도 없다. 우리가 예배나 기도를 드린다고 해서 정의가 내려치는 칼날을 빗겨갈 수 있을까? 굶주린 어린이가 신음하고 지친 어머니가 울고 있는데, 교회를 세운다고 해서 저 불변의 법칙의 명령을 피할 수 있을까?
빈곤에서 생기는 고통과 야만성을 하나님의 불가사의한 섭리로 돌린다거나 또는 두 손을 모으고 만물의 아버지 앞에 가서는 대도시의 궁핍과 범죄의 책임을 미룬다면 형식상으로는 기도일지 모르나 실제로는 신성모독이다. 영원하신 존재를 폄하하는 행위이다. 정의로우신 분을 욕되게 하는 행위이다. ({진보와 빈곤})
[179] 하나님이 인간 문제를 서툴게 다루신 것도 인색하게 다루신 것도 아니다. 이 세상에 인구를 너무 많이 내신 것도 아니고 물자를 풍족하게 베푸시는 데 소홀하셨던 것도 아니다. 단순한 동물적 생존을 위해 대중이 벌여야 하는 치열한 경쟁이나 우리 문명을 특징 짓는 그 엄청난 부의 축적을 의도하신 것도 아니다. 이와 관련하여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기도 하고 더 불경스럽게는 그것이 하나님이 마련하신 질서라고 하기도 하지만, 이런 폐단은 우리가 하나님의 도덕법칙을 부인하기 때문에 생긴 것이다. 정의의 법칙인 황금률은 단순히 말로만 그치는 법칙이 아니고 진실로 사회생활의 법칙이다. 이 법칙을 지키면 모든 사람에게 일자리와 여가와 풍요가 생긴다. 이 법칙을 지키면 문명은 극빈자에게도 생필품은 물론 모든 편리품과 적당한 수준의 사치품까지 마련해 줄 수 있다. 그리스도가, 들의 백합이 옷 걱정을 할 필요가 없듯이 하나님의 나라와 공의를 추구한다면 물질에 대해 걱정할 필요가 없게 된다고 하였는데 이는 단순한 몽상가의 말이 아니다. 그리스도는, 정치경제학의 최근 연구결과에 비추어 볼 때 완벽한 진리를 설파한 것이다. ({노동자의 상태})
[180] 거의 1900년 전 로마문명이 극도의 불평등으로 치닫고 도처에서 대중이 절망적인 노예상태로 전락하고 있을 때, 한 유대 마을에 교육도 받지 못한 목수가 나타나서 당시의 교단과 형식주의를 비웃으며 노동자와 어부에게 하나님의 아버지 되심과 모든 인간의 평등함과 형제됨에 관한 복음을 설교하고 하늘나라가 이 땅에 임하도록 기도하라고 제자들에게 가르쳤다. 학자들은 그를 조롱하였고 교단에서는 그를 비난하였다. 그는 꿈꾸는 자, 훼방꾼, "공산주의자"라고 매도당했고 결국에는 기성사회가 그를 위험인물로 인식하여 도둑 두 명 사이의 십자가에다 못박아 죽였다. 그러나 도망자와 노예들의 입을 통해 말씀이 퍼져나가 권력과 박해를 이겨내면서 마침내 세계를 일신하고 부패한 옛 문명에서부터 새로운 문명의 싹을 이끌어 내었다. 그러자 특권층이 다시 힘을 발휘하여 그를 우상으로 조각하여 궁중에도 세우고 왕의 무덤에도 세우고는 그의 이름으로 이를 봉헌하고 그의 복음을 왜곡하여 사회의 부정의를 옹호하였다. 그러나 이제는 하나님이 아버지이시고 인간 모두가 형제이며 사회의 그 누구도 과도하게 일하거나 가난하게 살아서는 안 된다는 위대한 이념이 사람들 사이에 급속하게 퍼지기 시작한다. ({사회문제})
[181] 종교가 인간 상호간의 행동에서 반드시 지켜야 할 원리를 가르치지 않는다면 종교의 임무는 무엇이란 말인가? 인간이 모든 생활 관계 속에서―교회에서만이 아니라 직장에서, 시장에서, 토론장에서, 상원에서―지켜야 할 분명하고 확실한 정의의 규칙을 제시하지 않는다면, 또 욕심의 폭풍, 과욕에 의한 탈선, 근시안적인 편의주의 속에서 인간이 안전하게 항해할 수 있는 나침반을 제공하지 않는다면 종교의 임무는 무엇이란 말인가? 가장 중대한 문제 앞에서 꼼짝도 못하고 이를 얼버무린다면 종교는 무슨 소용이 있는가? 내세에 대해서 무슨 약속을 하건 간에 현세의 부정의를 방지하기 위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면 종교는 무슨 소용이 있는가? 초기의 기독교는 이런 종교가 아니었다. 그 당시에도 이랬다면 로마의 박해를 절대로 받지 않았을 것이고 후에 로마 전역에 전파되지도 못했을 것이다. 회의주의적인 로마 지도자들은 온갖 신에 대해 너그러웠고 하급의 미신에 대해서조차 무관심했었으나 평등권에 기반을 둔 이 종교에 대해서는 예민하게 대처했다. 노예와 빈자에게 새로운 희망을 불러일으킨 이 종교, 십자가에 못 박힌 목수를 중심에 둔 이 종교, 하나님이 모든 이의 평등한 아버지이시고 모든 인간은 평등한 형제임을 가르치는 이 종교, 정의가 빨리 지배하기를 추구하면서 "나라이 임하옵시며"라고 기도하는 이 종교를 로마 지도자들은 본능적으로 두려워하였다. ({노동자의 상태})
3. 우리가 할 일
[182] 우리는 '자유'를 받든다. 그 여신상도 세워 찬양한다. 그러나 우리는 자유를 충분히 신뢰한 적이 없다. 사회가 커지면 자유의 요구도 커진다. 자유는 어중간하게 끝내지 않는다.!
자유! 이는 신비한 힘을 가진 단어이며 공허하게 귀를 어지럽히는 단어가 아니다. 자유는 정의이고 정의는 자연법이며, 건강과 조화와 힘과 동지애와 협동의 법이다.
세습적 특권이 타파되고 보통선거가 실시되면 자유가 그 소임을 충분히 완수하였다고 생각하거나 자유는 인간의 일상생활과 그 이상의 관계가 없는 존재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진정한 위대함을 모르는 사람이다. 이 사람들에게는 자유를 노래하는 시인이 광기에 어린 사람으로 보이며 자유의 순교자가 바보로 보일 뿐이다. 인간에 있어 자유는, 생명과 빛의 주인인 태양과 같고, 구름을 뚫고 만물을 성장시키며 모든 움직임을 도와 차디찬 무생물에서 극도로 다양한 생명과 아름다움을 이끌어 내는 햇빛과도 같다. 사람들이 자유를 위해 노력하고 죽은 것이, 그리고 시대마다 자유의 증인이 일어서고 자유의 순교자가 고통받은 것이 단지 추상적인 개념을 위해서가 아니었다.
때때로 우리는 자유는 자유이고 미덕, 부, 지식, 발명, 국력, 국가의 독립은 별개인 것처럼 이야기한다. 그러나 자유는 이 모든 것의 근원이고 어머니이고 필요조건이다. 자유와 미덕은 빛과 색채의 관계와 같다. 자유와 부는 햇빛과 곡식의 관계와 같다. 자유와 지식은 눈과 보이는 대상의 관계와 같다. 자유는 발명의 천재이고 국력의 근육이며 국가 독립의 정신이다. 자유가 신장되면 미덕이 자라고 부가 증가하고 지식이 늘어나고 발명이 인간의 힘을 배가하며, 자유를 누리는 국가는 힘과 정신에서 다른 국가를 능가하게 된다. 반면에 자유가 위축되면 미덕은 사라지고 부는 감소하고 지식은 잊혀지고 발명은 중지되며, 한때 무력이나 기술에서 융성했던 강대국이 자유로운 미개인에게 힘없이 멸망당한다.
자유라는 태양이 아직도 충분히 빛나지 못했지만, 모든 진보는 자유가 이룩한 결과이다.
이집트의 채찍 아래 굽실거리며 노예생활을 하던 유태인에게 자유가 나타나 속박의 집에서 데리고 나왔다. 자유는 이들을 사막에서 단련시켜 정복민족으로 변화시켰다. 모세의 율법에 나타난 자유정신에 의해, 유태 사상가들은 높은 경지에 도달하여 유일신을 보았으며 유태 시인들은 영감을 받아 이 사상을 찬양하는 최상급의 시를 남겼다. 자유가 페니키아 해안에 나타나자 페니키아인들은 헤라클레스의 기둥을 지나 미지의 바다를 항해하였다. 자유가 그리스에 약간의 빛을 비추자 대리석이 이상적인 아름다움의 형체로 변하고 언어는 미묘한 사상의 도구가 되었으며, 자유를 누리는 그리스 도시국가의 빈약한 의용군 앞에서 수많은 침략자가 바위 앞의 파도처럼 허물어졌다. 자유가 이탈리아 농부의 조그만 땅에 빛을 내리자 로마는 힘이 생겨 세계를 정복할 수 있었다. 자유의 빛이 게르만 투사의 방패에서 번쩍이자 아우구스투스 황제는 군대를 잃고 눈물을 흘렸다. 자유가 한동안 빛을 내지 않다가 다시 자유도시에 나타나자 과거의 학문이 되살아나고 현대문명이 시작되고 새로운 세계가 열렸다. 자유가 신장됨에 따라 예술, 부, 힘, 지식, 문화가 따라서 신장되었다. 모든 나라의 역사에서 우리는 같은 진리를 읽을 수 있다. 영국이 크레시와 아쟁꾸르 지역을 손에 넣을 수 있었던 것은 대헌장에서 태어난 힘 덕분이다. 엘리자베스 여왕 치세의 영화는 튜더 왕조의 전제로부터 자유가 되살아났기 때문이다. 미국에 강력한 나무의 씨를 뿌린 것은 전제군주를 끌어내린 정신의 덕이다. 스페인은 고대의 자유의 힘이 통합되자 세계 최강국이 되었으나 전제정치가 자유를 억누르자 가장 허약한 나라로 전락하고 말았다. 프랑스에서도 지성의 활력이 17세기 전제정치 하에서는 죽어갔으나 18세기의 빛나는 자유 속에서 다시 피어났으며, 대혁명 당시 프랑스 농민이 참정권을 갖게 되면서 우리 시대에 필적할 상대가 없는 막강한 힘의 기초가 되었다.
그런데도 자유를 신뢰하지 않을 수 있을까?
과거에도 그랬듯이 현대에도 숨은 세력이 준동하면서 불평등을 낳고 자유를 파괴한다. 멀리 지평선에는 먹구름이 내려오려고 한다. 자유는 다시 우리를 부른다. 우리는 자유를 따라야 하며 완전히 신뢰하여야 한다. 자유는 우리가 완전히 받아들이지 않으면 떠나 버린다. 사람들이 투표권을 갖는다든가 이론상 법 앞에 평등한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사람들이 생활의 기회와 수단을 이용할 수 있어야 하고 자연의 혜택을 동등하게 누릴 수 있어야 한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자유는 빛을 거두어 버린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암흑이 찾아오고 진보의 결과로 생긴 힘이 파괴의 힘으로 변질되고 만다. 이것은 보편적인 법칙이다. 이것은 오랜 세월의 교훈이다. 정의에 기초를 두지 않는 사회구조는 지속되지 못한다. ({진보와 빈곤})
[183] 그러나 아직 시간 여유가 있는 지금이라도 우리가 정의의 여신에 복종하고 자유를 믿고 따른다면, 현재 사회를 위협하는 위험은 사라지고 사회에 해를 주는 세력은 발전의 주체로 변할 것이다. 오늘날 힘은 낭비되고 있으며, 개척해야 할 지식 분야는 아직도 무한하고, 놀라운 발명도 이제 겨우 시작에 불과하다. 빈곤이 타파되면, 탐욕이 고결한 열정으로 변하면, 인간을 반목하게 하는 질투와 두려움 대신 인류애가 평등으로부터 피어나면, 최하층민도 안락과 여가를 누리는 상황이 되어 정신력에 대한 속박이 풀리면, 우리 문명이 얼마나 높이 날아 오를지 누가 측정할 수 있겠는가? 언어는 생각에 못 미친다! 이는 시인이 노래하고 예언자가 은유로 표현했던 황금시대이다! 이는 언제나 현란한 광선과 함께 다가왔던 그 영광의 비젼이다. 이는 요한이 파트모스(Patmos) 섬에서 황홀경에 빠져 감은 눈으로 보았던 바로 그것이다. 이는 기독교 정신의 극치이며 지상에 실현되는 하나님의 나라로서 벽옥 담장과 진주 대문을 가진 곳이다! 이는 평강(平康)의 왕이 다스리는 나라이다! ({진보와 빈곤})
[184] 위대한 대중운동을 출범시키고 유지해가려면 지식보다는 도덕 의식에, 이기심보다는 이해심에 호소하여야 한다. 개인 개인은 그렇지 않을 수 있어도 집단으로서의 인간은 지적인 인식보다는 정의감이 더 예민하고 진실하기 때문이다. 문제를 옳고 그름의 문제로 제기하지 않으면 사회적인 논의를 유발할 수 없고 다수를 행동하게 할 수 없다. 물질적인 손해나 이익은 많은 사람과 관련될 경우 그에 대한 인식이 분명하지 않게 되지만 이해심의 힘은 이 사람 저 사람에게 퍼질수록 커진다. 이 힘은 쌓이고 번지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 ({보호냐 자유무역이냐})
[185] 나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라고 권유하는 것도 아니고 자신보다 못한 사람들의 권리를 보호해주라고 부탁하는 것도 아니다. 사회 개선을 위해서는 의무감이 이해관계보다 더 강력하다고 나는 믿는다. 보다 강한 사회적 힘은 이기심보다는 이타심 속에 있다고 나는 믿는다. 모든 위대한 사회 개선은 반드시, 자기 자신만의 즐거움을 추구하는 사람보다는 다른 사람을 위해 삶을 더 선하고 더 고결하고 더 행복하게 만들려는 사람에 의해 시작되고 또 활성화된다고 나는 믿는다. 불의한 탐욕의 신은, 충분한 대가를 치를 각오를 한다면, 이기적인 사람을 언제라도 매수할 수 있다. 그러나 이타적인 사람에 대해서는 그렇게 할 수 없다. ({사회문제})
[186] 신의 성육신(成肉身, incarnation) 즉 하나님이 이 땅에 강림하시어 인간을 돕는다는 관념은 기독교만이 아니라 다른 위대한 종교에도 존재하는데, 여기에는 교회에서 가르치는 이상의 깊은 진리가 있다고 때때로 생각한다. 인간을 구원하고 해방시키고 발전시키는 자는 언제나, 그 자신이 겪는 고난 때문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당하는 불의와 비참함을 목도하고 마음이 움직인 사람이라는 사실은 분명하다. 모세를 예로 들면, 그는 이집트의 온갖 학문을 다 배웠고 왕의 궁전을 자유로이 드나들 수 있었으며 지푸라기도 없이 흙벽돌을 만들어야 하는 노예도 아니었으나 이스라엘 백성을 속박의 집으로부터 인도해 나왔다. 그라쿠스 형제를 예로 들면, 귀족의 혈통에다 재산도 있었으나 후일 로마 멸망의 원인이 된 토지독점 제도에 반대하여 싸우다 죽었다. 이처럼, 압박 받고 몰락하고 짓밟히는 사람이 해방되고 그 지위가 높아졌다면 그것은 자신의 힘에 의해서가 아니라 언제나, 그들만큼 운명이 가혹하지 않았던 다른 사람들의 노력과 희생에 의해서였다. 인간이 자신의 자연권을 철저히 박탈당할수록 그를 되찾을 수 있는 힘은 더 약해지기 때문이며 도움이 많이 필요한 사람일수록 스스로를 돕기가 더 어렵기 때문이다. ({사회문제})
[187] 모세와 같은 생애는 당시 사회에 미친 영향으로서만이 아니라 모범 사례로서도 도움이 됩니다. 이런 생애는 인간의 본성을 고귀하게 하고 인간의 노력을 영광되게 하며 투쟁하는 자에게 희망과 믿음을 주기 때문입니다. 모세의 생애와 모세가 세운 제도는, 대다수 인류의 빈곤과 고통은 하나님의 불가사의한 섭리이며 여기에 대해서 한탄할 수는 있어도 이의를 제기할 수도 없고 변화시킬 수도 없다고 하는 주장에 대한 항거입니다. 이런 신성모독적인 주장은 삼천 년 전인 당시에나 지금이나 성행하고 있으며 기독교 강단에서조차 흔히 설교되고 있습니다. 이런 주장이 옳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나 현대 문명의 중심지에 널려있는 누추하고 잔인한 모습은 자기가 알 바 아니라고 하는 사람은 이런 생애를 모범 사례로 삼아야 합니다. 보려고 하는 자의 눈에는 떨기나무가 불타는 모습이 보이고 들으려고 하는 자에게는 "백성이 고통을 받고 있으니 누가 인도하겠느냐?"라는 말이 들릴 것이기 때문입니다. (연설문, "모세")
[188] 오늘날 넓고 깊고 은혜로운 혁명이 싹트고 있다. 한 나라에서만이 아니라 전세계에 걸쳐 싹트고 있다. 하나님의 진리가 이를 추진하고 있으며 하나님이 지금까지 인간에게 주신 어떤 힘보다 더 큰 힘이 이를 밀어주고 있다. 사람이 태양을 멈출 수 없듯이 기존의 사회악이 가진 힘으로는 이를 멈출 수 없다...... 오늘날의 사회 불안 속에서 귀를 가지고 들을 수 있는 사람은 산업시대의 노예제도가 그 운명을 마감하는 소리를 들을 것이다.
다가오는 투쟁, 아니 이미 여기에 와 있는 투쟁 속에서 교회의 유지들은 어디에 있게 될 것인가? 정의와 자유의 편에 있을 것인가 아니면 불의와 노예제의 편에 있을 것인가? 탬버린이 다시 울릴 때 구원을 받은 자와 함께 할 것인가 아니면 전차와 말을 타고 바다로 가라앉을 것인가? ({노동자의 상태})
[189] 오늘날 세계를 돌아 보라.
우리 문명사회에서도 옛 비유가 의미를 가지며 옛 신화가 맞아떨어진다. 의무의 길은 죽음의 그림자 계곡을 향하고, 크리스찬과 페이스풀은 허영의 시장으로 걸어가며, 그레이트하트의 갑옷이 쨍그렁 소리를 낸다. 아후라마즈다는 아리만과 싸운다. 들으려고 하는 사람의 귀에는 전쟁의 나팔소리가 울린다. 나팔소리가 울리고 또 울려서 드디어 듣는 사람의 가슴이 끓어오른다. 지금 세계에는 강한 정신과 고결한 노력이 필요하다. 아름다움은 아직도 감옥에 갇혀 있고, 인생에서 피어나는 진선미를 철의 수레바퀴가 깔아뭉개고 있다. 아후라마즈다의 편에서 투쟁하는 사람은 지금은 서로를 잘 모를지라도 언젠가 어디선가 함께 모일 날이 반드시 올 것이다. ({진보와 빈곤})
[190] 이것은 인간이 몰입할 수 있는 가장 고귀한 목표입니다. 인생에 있어서 이보다 더 귀한 투쟁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 강연장에 모이신 여러분은 물론이고, 다른 어떤 사람에게도 절대적으로 확실한 단 한 가지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죽음입니다. 어차피 길지 않은 인생인데 얼마를 더 사는가 하는 것이 우리에게 무슨 문제가 되겠습니까? 우리가 불의와 싸우고, 여론을 계몽하고, 수많은 사람을 타락과 참담 속으로 몰아넣는 저주받은 제도를 깨뜨리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 하며, 그리하여 후손이 보다 선하고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무언가를 한다면 이것이야말로 인생을 가장 고귀하고 훌륭하게 활용하는 것이 아닙니까?
우리 앞에는 길고도 험한 싸움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 중에는 이 싸움의 성공을 보지 못하는 사람도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게 무슨 문제가 됩니까? 이런 투쟁에 동참하는 것만으로도 특권입니다. 이 투쟁은 모든 시대의 정의롭고 선한 사람들이 세계 곳곳에서 오랜 세월 동안 동참해온 위대한 투쟁의 일부임을 우리는 압니다. 우리가 이 투쟁에 참여함으로써 이 땅 위에 하나님의 나라를 구현하기 위해 우리 나름의 방식으로 기여하게 됩니다. 또 우리 뒤에 올 사람들―하늘나라에서 승리하게 될 것으로 우리가 믿는 사람들의 삶의 조건을 보장하기 위해 기여하게 됩니다. (연설문, "도둑질하지 말지니라")
[191] 우리가 일생을 마감할 때 하나님의 사역을 위해 우리가 부여받은 능력을 잘 활용하였는가 라는 기준에 비추어 본다면, 일생을 맛있는 음식을 먹고 살았는가, 부드러운 옷을 입고 살았는가, 큰 유산을 남겼는가, 사후에 명예를 누릴 것인가 경멸을 받을 것인가, 지식인 대접을 받았는가 등이 무슨 중요한 문제가 될 것인가? 눈도 잘 안 보이고 귀도 잘 안 들리는 가운데 어둠 속에서 내미는 손이 보이고 정적을 울리는 다음과 같은 말이 들린다면 다른 것은 무슨 문제가 될 것인가?
"장하도다, 그대 선하고 충실한 종이여. 그대는 몇 가지 일에 충실하였으므로 나는 그대에게 여러 일을 맡길 것이다. 그대는 주의 기쁨이니라." ({사회문제})
[192] 얼마 전에만 해도 국가를 매매하거나 조약에 의해 교환하고 유언에 의해 물려주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왕의 신성한 권리라는 것이 어디에 있습니까? 얼마 전에만 해도 인간의 육신도 법률적으로 사유재산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노예사유제가 어디에 있습니까? 사회악―군주제나 노예제의 공통 원인이 되는 사회악이 오래 계속될 것 같습니까? 고된 노동의 운명에 처한 사람들을 등쳐먹는 계층이 오래 갈 수 있겠습니까? 욕망의 맷돌이 가난한 사람들의 얼굴을 언제까지나 갈 수 있겠습니까? 신사, 숙녀 여러분, 우주의 질서는 이렇지 않습니다! 저는 다년간 관찰하고 기다려온 사람으로서, 새벽노을이 이미 하늘에 서려 있음을 봅니다. 찬송가, 종달새와 함께든 아니면 전쟁의 북소리와 함께든 아무튼 지금 오고 있습니다. 오늘 밤 제가 말씀드린 기준은 편견에 의해 찢기고 비방에 의해 더럽혀질 것입니다. 지금은 전진했다가 다시 후퇴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한번 펼친 후에는 다시 말아 넣지 못합니다! 오늘 밤 제가 분명히 말씀드린 진리를 무시하고 은폐하면 무지 위에서 이기심이 성행할 것입니다. 그러나 진리는 그 자체에 진리의 힘을 여는 싹이 들어 있고 이제 그 시기가 무르익었습니다. 여기에 완고하게 부딪치면 조각나고 분쇄될 것입니다! 사람이 씨를 뿌리고 물을 주면 하나님이 이를 키우십니다. 밭을 갈고 씨를 뿌렸으니 이제 선한 나무는 자랄 것입니다.
지금은 너무 작아서 믿음의 눈으로만 볼 수 있습니다. 지금은 너무 작고 부드럽고 미약합니다. 그러나 언젠가는 천국의 새가 그 나무 가지에서 노래를 하고 피곤한 자가 그 그늘에서 쉬게 될 것입니다! (연설문)
번역자 주
* 각 항목의 머리에 표시한 숫자는 본문의 항 번호임.
[1] 프랭클린(Benjamin Franklin, 1706~1790): 미국 독립운동기의 지도자, 학자.
[1] 프리스틀리(Joseph Priestley, 1733~1804): 영국 화학자. 아메리카 식민지 정책 비판.
[2] 소돔의 사과(apples of Sodom): 겉보기는 아름다우나 나무에서 따면 연기와 재로 변한다고 하는 옛 과일.
[6] 루소(Jean J. Rousseau, 1712~1778): 프랑스 철학자. {사회계약론}(Contrat Social).
[6] 샤또브리앙(Fran ois R. Chateaubriand, 1768~1848): 프랑스 작가. 프랑스 혁명의 반동적인 인물.
[6] 쿠퍼(Thomas Cooper, 1759~1840): 미국 교육자, 정치철학자.
[6] 테라델푸에고(Terra del Fuego): 남아메리카 대륙 남단에 있는 미개지.
[7] 아질 공작(Duke of Argyil): 헨리 조지의 {진보와 빈곤}을 비판한 당대의 명사. 조지는 그의 비판에 대응하여 "부정으로의 귀결"을 집필하였다.
[13] 맬서스: 102 해설 참조.
[46] 컴스탁(Comstock): 금 은이 많이 생산되던 미국의 유명한 광산. 1859년에 발견되었으며 현재 네바다 주 버지니아 시티(Virginia City)의 자리에 있었다.
[55] 마카베 형제(Maccabees): 기원 전 2세기 예루살렘을 지배하였던 마타이아스(Mattathias)와 다섯 아들. 시리아 왕 안티옥(Antiochus Esiphanes)과 싸워 승리한 후 기원 전 40년 헤롯 왕 이전까지 집권.
[55] 쿠빌라이칸(Kublai Khan, 1216?~1294): 몽고 왕조를 창설하고 북경을 수도로 정하여 훌륭한 건물을 축조.
[55] 립 밴 윙클(Rip Van Winkle): 어빙(Washington Irving)작 스케치북(The Sketch Book)의 한 주인공의 이름. 산에 가서 잠을 자고 와 보니 세월이 많이 변했다는 이야기임.
[63] 홉스(Thomas Hobbes, 1588-1679): 영국의 정치학자. {리바이어던}(Leviathan).
[91] 보이콧(Charles Boycott): 아일랜드의 악질 지주.
[97] 브라이트 (John Bright, 1811-1889) 와 콥든 (Richard Cobden, 1804-1865): 두 사람 모두 영국의 정치인. 자유무역을 옹호하여 곡물법 폐지를 위해 투쟁.
[102] 맬서스(Thomas R. Malthus, 1766~1834): 영국 경제학자. {인구론}(An Essay on the Principle of Populations, 1798).
[116] 웨슬리((John Wesley, 1703-1791): 영국 종교인. 감리교 창설자.
[119] 미국 헌법 제15차 수정 조항: 노예해방을 명문화한 조항.
[123] 콜로니(colonii) 또는 빌린(villeins): 농민. 로마 제국 후기에는 농노 내지 소작인이 되어 토지에 예속되었고 고정액의 지대를 납부하였다.
[143] 장기의회(Long Parliament): 1640년부터 1653년까지 휴회 없이 계속된 의회. 왕권의 견제를 시도하는 가운데 내전이 발발하였고 1649년에 찰스 1세를 처형하였다.
[143] 찰스 2세(Charles II, 1630~1685, 재위 1660~1685): 영국 국왕.
[150] 약대와 바늘귀: 마태복음(19:24)의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보다 약대가 바늘귀에 들어가기가 더 쉽다"는 표현에서 온 말.
[151]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다": 마태복음 26장 11절.
[154] 밀(John S. Mill, 1806~1873): 영국 경제학자. {정치경제학 원리}(Principles of Political Economy).
[170] 오르레앙의 처녀(Maid of Orleans): 잔 다르크(Jeanne d'Arc, 1412~1431). 영국과 프랑스 간의 백년전쟁 당시 오를레앙의 영국군을 격파하여 프랑스를 위기에서 구출하였다.
[170] 테르모필레(Thermopylae): 그리스의 로크리스(Locris)에서 테살리(Thessaly)에 이르는 군사 요충로. 기원 전 480년 스파르타 왕 레오니다스(Leonidas)가 300명의 군사로 페르샤 왕 크세르크세스(Xerxes)의 군대를 막아 낸 것으로 유명하다.
[170] 빙켈리트(Arnold von Winkelried, ?~1386): 스위스 애국자. 1386년 오스트리아 군의 창을 가슴에 끌어 안고 전사.
[170] 뱅상 드 뽈(Vincent de Paul, 1576~1660): 프랑스의 가톨릭 개혁가, 성인. 자선 수녀회(Sisters of Charity) 창설.
[170] 플루타크(Plutarch, 46?~120?): {영웅전}의 저자.
[182] 속박의 집(House of Bondage): 출애급기(20: 2)에 나오는 표현. 이스라엘 백성이 노예생활을 하던 이집트를 의미한다.
[182] 헤라클레스의 기둥(Pillars of Hercules): 지브롤터 해협에 있는 바위 이름. 헤라클레스가 게리온(Geryon)을 찾으러 다닐 때 그 위치에 두었다는 말이 있다. 게리온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괴물로서 머리와 몸통이 셋이고 날개가 있는데, 현재 스페인 카디즈(Cadiz) 지방에 살았으며 헤라클레스가 죽였다고 한다.
[182] 크레시(Cr cy), 아쟁꾸르(Agincourt): 프랑스의 마을로서 병력의 절대적 열세에 있던 영국 군대가 프랑스 군대를 격파한 곳. 크레시는 1346년의 전지. 아쟁꾸르는 1415년 헨리 5세가 프랑스 군을 격파했던 전지.
[183] 파트모스 섬(Patmos): 성 요한이 귀양살이를 하던 섬으로서 계시 록에 기록된 계시를 보았다. 밧모 섬이라고도 함.
[183] 벽옥 담장과 진주 대문: 하나님의 나라을 의미. 요한계시록(21:18~21)의 표현.
[183] 평강(平康)의 왕(Prince of Peace): 예수를 의미. 이사야(9: 6) 참조.
[186] 그라쿠스 형제(Tiberius Gracchus, 기원 전 162~133, Gaius Gracchus, 기원 전 153~121) 로마 정치가. 빈민을 위해서 토지개혁을 시도. 모두 반대파에 암살됨.
[187] 떨기나무가 타는 모습: 구약 출애급기 3장에 나오는 말로서, 모세가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에서 인도하여 나왔다.
[189] 죽음의 그림자 계곡(Valley of the Shadow of Death), 크리스찬(Christian), 페이스풀(Faithful), 그레이트하트(Greatheart): 번연(John Bunyan, 1628~1688)의 {천로역정}(Pilgrim's Progress)에 나오는 주인공 이름. 그리스찬의 아내와 자식이 성지(Celestial City) 순례를 가는데 그레이트하트가 안내를 맡으며 페이스풀은 허영의 시장(Vanity Fair)에서 죽는다.
[189] 아후라마즈다(Ahura Mazda, Ormazd, Ormuzd): 조로아스터교에서 최고의 신적인 위치를 가진 선신(善神). 세상의 창조자, 인류의 수호자. 아리만과 반대 존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