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성김씨(義城金氏)의 득성(得姓)은 신라 경순왕과 고려태조 왕건의 딸 신란공주(神鸞公主)사이에서 태어난 석(錫)께서 의성군(義城君)에 봉해짐으로써 이루어졌다. 9세 김용비(金龍庇)는 벼슬이 고려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태자첨사(太子詹事)이며, 고려 중기에 활약하여 의성현민(義城縣民)에게 큰 공덕을 베푼 결과 사후에는 지역주민들로부터 민심을 진정시키고 향토를 수호해준 은덕자로 추앙을 받아 의성현의 토성이민(土姓吏民)들이 현사(縣司)에 사당을 세우고 봉향했다. 슬하에 3남 5녀를 두었으니, 장자 의(宜)는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이고, 다음 굉(紘)은 의성부원군(義城府院君)이며, 다음 영(英)은 집현전직제학(集賢殿直提學)이다. 후손들이 크게 번창하여 의성김씨의 영남 2대 파계(派系)인 안동(安東), 성주(星州)파가 모두 김용비의 후손들이니, 그를 의성김씨의 중시조로 추앙한다. 특히 둘째 아들 굉(金紘)의 손녀는 증(贈)영의정 한영정(韓永石丁)에 출가하였는데, 그 손녀가 덕종비(德宗妃) 소혜왕후(昭惠王后)를 출생하여 성종(成宗)과 월산대군(月山大君)을 낳았으니 김용비는 조선 왕가의 외조상이 된다. 12세 김태권(金台權)은 벼슬이 고려 봉익대부(奉翊大夫) 문예부좌사윤(文睿府左司尹)이다. 흥왕사(興王寺)에서 일어난 김용(金鏞)의 란(亂)에 변을 당하였다. 묘소는 고려조(高麗朝)에서 예장(禮葬)과 사패(賜牌)를 받았다. 슬하에 2남 2녀를 두었으니 거두(居斗)와 거익(居翼)이다. 13세 김거두(金居斗)는 고려 봉익대부(奉翊大夫) 공조전서(工曹典書)에 올랐다. 고려의 국운이 기울어져 가는 것을 보고 안동 풍산현(豊山縣)으로 낙향하면서부터 그 후손들이 안동에 터를 잡고 살게 되었다. 16세 김한계(金漢啓)는 1438년(世宗20년 戊午)에 성삼문 하위지와 동방(同榜)으로 문과에 급제하여 집현전(集賢殿)에 들어가 문종(文宗) 단종(端宗) 임금을 섬겼다. 삼사(三司)를 거쳐 벼슬이 지승문원사(知承文院事)에 올랐으나, 세조가 즉위하고서 병을 칭탁하고 고향에 내려와 다시 벼슬길에 나가지 아니 하였다. 정조 때에 편찬한 장릉지(莊陵誌)에 ‘김한계는 가히 6신(六臣)과 같은 충절이다.’라고 하였으며, 단종절의(端宗節義)로 숙모전(肅慕殿)에 배향하였다 한다. 19세 김진(金璡)의 자는 영중(瑩仲)이요, 호는 청계(靑溪)이다. 1500년(燕山君6년 庚申)에 태어나, 1580년(宣祖13년 庚辰)에 생을 마쳤다. 맏아들 극일(克一)이 문과에 오르고 둘째 수일(守一)과 셋째 명일(明一)이 생원시에 올랐으며, 넷째 성일(誠一)과 복일(復一)이 문과에 오르는 등으로, 아들 5형제가 모두 대소과(大小科)에 올랐으니, 김진(金璡)은 의성김씨 내앞파의 대조(大祖)로 추앙받는다. 평소에 자제들에게 이르기를 “옥처럼 부서질지언정 기왓장 같이 완전하기를 바랄 것 없다. 나는 너희들이 군자가 되어 죽는다 해도 살아있는 것으로 알 것이고, 소인이 되어 살아간다면 살아있어도 죽은 것으로 보겠다.”고 하였다. 자헌대부(資憲大夫) 이조판서 겸지의금부사(吏曹判書兼知義禁府事)에 추증되었다. 20세 김수일(金守一)의 자는 경순(景純)이요, 호는 귀봉(龜峰)이니, 청계(靑溪) 진(璡)의 아들이요 운천(雲川) 용(涌)의 아버지 이다. 1528년(中宗23년 戊子)에 태어나 1583년(宣祖16년 癸未)에 생을 마쳤다. 문장이 쏟아지는 폭포와 같이 시원하고 세속의 냄새가 없었다. 1555년(明宗10년 乙卯)에 생원시(生員試)에 오르고 뒤에 향시에 여러 번 장원하였다. 유일(遺逸)로 천(薦)을 받아 자여도찰방(自如道察訪)에 임명되었다.
[운천공(雲川公) 김 용(金 涌)의 생애(生涯)] 선생의 휘(諱)는 용(涌)이요, 자(字)는 도원(道源) 호(號)는 운천(雲川)이며, 본관은 의성(義城)이다. 귀봉 김수일(龜峯 金守一, 1528~1583)의 장남이요, 청계 김진(靑溪 金璡, 1500~1580)의 손자이며, 세종조 집현전 학사 김한계(金漢啓)의 5대손이다. 어머니는 한양조씨(漢陽趙氏)로 우의정 한평부원군(漢平府院君) 조연(趙涓)의 5대손인 부사과(副司果) 조효분(趙孝芬)의 딸이다. 선생은 1557년(明宗12년 丁巳) 11월 4일에 안동 일직현 귀미리(龜尾里)에서 출생하여, 1620년(光海君12년 庚申) 10월 19일에 향리인 안동 천전리(川前里)에서 생을 마쳤다. 선생은 신언서판(身言書判)을 구비하였는데 특히 글씨에 뛰어났다고 한다. 일찍이 논어 한 질을 한 자도 틀림이 없이 외우니, 조부께서 크게 기뻐하여 문장답(文章沓)과 신라 경순왕 때부터 전해오던 문장보검(文章寶劍)을 상으로 주고 장래를 격려하였다. 1583년(癸未)에 아버지의 상을 당하여 3년을 시묘하고 탈상한 후 향시(鄕試)에 나아가 장원하고, 1590년(宣祖23년 庚寅) 10월에 문과에 급제하여 이듬해 1591년(辛卯) 여름에 승문원(承文院)에 보직되고, 이해 겨울에 예문관(藝文館)에 발탁되는 등 왕의 신임이 두터웠다. 춘추관(春秋館)에 들어가 검열(檢閱)로 봉직할 때 천연두에 걸려 위독하니 왕이 몇 번이나 내시를 보내서 위문하고 “하늘의 두터운 은혜를 받은 몸이니 이 병으로 그 생명에는 영향이 없을 줄 믿는 바이나, 단지 좋은 얼굴을 버릴까 근심이다.” 하였다. 선생이 병으로 고향에 돌아온 해인 1592년(壬辰) 4월에 임진왜란(壬辰倭亂)이 발발하였으니 당시 선생은 36세였다. 선생은 아직 신병이 완치되지 못하였으나, “이때가 어찌 구차히 살려 할 때냐.”고 하며 아우인 대박 김철(大朴 金澈) 및 재향 동지들과 더불어 의병을 일으켜 왜적을 토벌하기에 힘썼다. 당시 도산(陶山) 토계(土溪)에 있던 선생 댁에는 안집사(安集使) 백암 김륵(栢岩 金玏)도 왕명을 받들고 와서 머물고 있었으니, 6월 1일에 그곳에서 선생과 더불어 금역당 배용길(琴易堂 裵龍吉), 안집사 김륵, 예안현감(禮安縣監) 오봉 신지제(梧峰 申之悌) 등이 회합하여 의병결성을 논의하였으며, 이후 안동지방에 세 갈래의 창의군(倡義軍)이 조직되었다. 그렇듯 선생의 집은 임진왜란 초기 안동지방 의병결성에 산실의 역할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선생은 8월에 김륵(金玏)에 의해 안동수성장(安東守城將)에 추대되었으며, 모병문(募兵文)을 지어 각지에 발송하여 향군을 일으키자 각처에서 호응하고 용사가 휘하에 모여 들었다. 선생은 약 1년간 안동지역 임진의병을 진두지휘하면서 다수의 왜적을 죽이거나 사로잡았다. 이듬해인 1593년(癸巳) 여름 선생은 안동을 떠나 7월 선조임금이 파천(播遷)해 있던 평안도 강서현(江西縣) 행재소(行在所)에 부임하여 예문관검열(藝文館檢閱) 겸 춘추관기사관(春秋館記事官)에 복직하여 호가(扈駕)하였으며, 다시 예문관대교(藝文館待敎)‧ 봉교(奉敎)가 되었다. 당시의 상황을 소상히 기록한 호종일기(扈從日記)가 전해 내려온다. 그 후 성균관전적(典籍)에서 병조좌랑(兵曹佐郎)이 되었다가 1594년(甲午)에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에 세 번이나 임명되었고 세자시강원사서(世子侍講院司書)를 겸하였으며, 봉상시주부(奉常寺主簿)‧ 이조좌랑(吏曹佐郞)을 거쳐 1595년(乙未)에 사간원헌납(司諫院獻納)이 되고 그해 2월에 홍문관부수찬지제교(弘文館副修撰知製敎) 겸 경연검토관(經筵檢討官)‧ 춘추관기사관(春秋館記事官)이 되었다가 3월에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이 되었다. 4월에는 이조정랑(吏曹正郞) 겸 춘추관기주관(春秋館記注官)이 되어 인사를 공명히 처리하여 추호의 사사로움도 없었다. 다시 사간(司諫)‧ 사성(司成)‧ 집의(執義)가 되면서 세자시강원보덕(世子侍講院輔德)을 겸하였다. 1597년(宣祖30년 丁酉)에 왜병이 다시 쳐들어오니 선생은 영남체부종사관(嶺南體府從事官)으로서 기무(機務)를 잘 보필(輔弼)하여 영남체부사(嶺南體府使) 오리 이원익(梧里 李元翼)이 오로지 믿고 ‘참으로 능통한 재능을 가진 사람’이라 칭찬하며 군국사무대소사를 일일이 상의하여 처결하였다. 1598년(戊戌) 겨울에 사헌부집의(司憲府執義)‧ 홍문관교리(弘文館校理) 겸 경연시독관(經筵侍讀官)으로서 집의(執義)를 겸하였다가 독운어사(督運御史)가 되고 또 종묘령(宗廟令)이 되었다. 1599년(己亥) 정월에 다시 성균관사성(成均館司成)이 되었으나 가을에 서인(西人)의 탄핵(彈劾)으로 선산부사(善山府使)에 전임되었다. 선산은 난중에 왜병이 내왕하는 통로가 되었던 고을이어서 거의 쑥밭이 되어있었으나 선생이 부임하여 덕정(德政)을 펴니 민생이 안정하게 되었다. 1603년(癸卯)에 제용감정(濟用監正)‧ 군자감정(軍資監正)이 되고 또 시강원필선(侍講院弼善)이 되고, 1604년(甲辰)에는 직강(直講)· 집의(執義)· 사예(司藝)를 거쳐서 상주목사(尙州牧使)로 가게 되었는데, 선생께서 어머니를 모시고 배를 타고 풍악을 벌이고 낙동(洛東)으로 가며, 하회(河回)를 지나는 길에 서애(西厓 柳成龍)를 찾아 인사하니 공이 탄식하기를 “인자로서 부모님을 이렇게 기쁘게 하여드리니 참으로 영광스러운 일이라, 옛날 나도 상주목사로 갈 때에 이렇게 하였으나 이제는 어머니도 아니 계시니 어찌 다시 이렇게 하겠는가.” 하고 눈물을 닦았다 한다. 임진왜란 후 1605년(乙巳)에 조정에서 논공행상을 할 때 선생에게 선무원종공 2등(宣武原從功 二等)을 서록(敍錄)하고, 전지(傳旨)에 이르되 “國多難而靡定 爾旣宣力於中興”(나라가 숱한 난관으로 안정되지 못하자, 그대는 국가의 중흥에 있는 힘을 다하였도다.)이라 하였다. 1606년(丙午)에 사예로 옮겼다가 다시 예천군수(醴川郡守)가 되어서 학교를 일으켜 인재를 기르고 수재를 모아서 강의하여 경내를 흡연(翕然)케 하였다. 1609년(光海君2년 己酉)에는 홍주목사(洪州牧使)가 되었으나 모친의 병환으로 고향에 돌아와 1610년(庚戌) 2월에 어머니 상고를 당하였다. 3년상을 마치고 다시 봉상시정(奉常寺正) 겸 선조실록편수관(宣祖實錄編修官)으로 실록 찬수(纂修)에 참여하였다. 당쟁관계로 실록 편수에 여러 가지 난관이 많았으나, 선생은 만세에 전할 보전(寶典)을 실상대로 정확히 실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왜곡된 사초는 사실에 의거하여 삭제하고 고침에 있어 춘추필법으로 처리하였다. 이에 실록청영사(實錄廳領事)였던 기자헌(奇自獻)이 탄복하여 말하기를 “선왕 때의 일을 환히 아는 이로 조정에 있는 이는 몇 명에 불과한데 김용(金涌)은 그중 두드러진 사람이다.”라고 하였다. 이때 부평(富平) 땅에 발생한 의옥(疑獄)이 수년간 흑백을 분간치 못하고 있다는 경기감사의 보고가 있자 조정에서 선생을 천거 특파하였다. 명을 받고 가서 한 번 신문에 정확히 해결하니 사람들이 경탄하며 신명이라고 하였다. 1615년(乙卯)에 절충계(折衝階)에 오르고 2월에는 여주목사(驪州牧使)에 제수되었으며, 이후에도 무과참시관(武科參試官)‧ 문과전시대독관(文科殿試對讀官)‧ 부호군(副護軍)‧ 병조참의(兵曹參議) 등 여러 관직에 계속 봉직하였다. 선생은 예문관(藝文館)에 재직할 때 가차 없는 직필(直筆)로 난세(亂世)에 맞섰으며, 사간원(司諫院) 시절에는 기축옥사(己丑獄事)시 부당하게 희생되었던 최영경(崔永慶)의 억울함을 풀어 주기 위한 합계(合啓)의 글을 주로 선생이 작성하여 사류(士類)들을 통쾌 찬탄케 하였다. 홍문관(弘文館)‧ 사헌부(司憲府) 시절에는 지론(持論)이 정직하여 사람들의 칭송을 받았을 뿐더러, 전조(銓曹)에서는 매사를 청직 공정하게 처리하였기에 조정립(趙正立)으로 하여금 “청렴 강직하여 흔들리지 않는 사람은 오직 김용(金涌)과 정경세(鄭經世)를 보았을 뿐이다.”라는 찬사를 하게 하였다. 또한 선생이 사간원사간 겸 세자시강원보덕(司諫院司諫兼世子侍講院輔德)으로 제수되었을 때는, 중국 춘추전국시대 진나라 목공(穆公)이 전쟁을 반대하는 신하의 말을 듣지 않다가 전쟁에서 패하고 나서 자책(自責)했던 고사를 인용하기도 하면서, 세자인 광해군의 실덕을 거론하고 선행을 진술하였다. 이는 광해군의 실덕을 애석히 여겨 과오를 바로잡으려는 생각에서 성심으로 충고한 것이었다. 왜란 후에 외보(外補)로 선산부사(善山府使)‧ 상주목사(尙州牧使)‧ 예천군수(醴泉郡守)‧ 홍주목사(洪州牧使)‧ 여주목사(驪州牧使) 등 다섯 고을의 수령을 역임하면서 선생은 주로 전재(戰災) 복구에 진력하여, 이산(離散) 난민(難民)을 구휼하고 흥학권업(興學勸業)과 유풍선속(儒風善俗)을 진작하며, 시비선악을 바르게 판결하니 정사가 맑았다. 야은(冶隱 吉再)을 모시는 선산의 율리사(栗里祠) 중건 및 금오서원(金烏書院) 이건과, 세종대왕이 친히 거동한 곳인 여주의 청심루(淸心樓) 중건 등도 선생의 재임 시에 이루어졌다. 선생은 천품(天品)이 청렴결백하여 각 기관의 요직을 역임하고 대소 다섯 고을의 수령을 역임하였음에도, 벼슬을 그만 두고 돌아 올 때는 언제나 무거운 짐이 없었다. 예천군수로 재임 시 서애(西厓 柳成龍)의 부음을 듣고 문상하려해도 소복(素服)조차 상비한 것이 없어 빌려 입어야 하였으며, 홍주목사를 그만 두고 집에 도착하였을 때 수행한 군졸이 모시실 한 광주리를 바치자 엄히 책망하고 돌려보냈고, 여주목사를 그만 두고 돌아올 때는 단지 사계화(四季花) 분재(盆栽) 두 개를 가지고 돌아왔을 뿐이었다. 가세가 극빈하여 언제나 집에 돌아와서는 자녀들과 더불어 아침저녁 식사에 목맥죽(木麥粥)을 둘러앉아 먹을 뿐이었다 한다. 이렇듯 선생은 벼슬을 시작하고 30년을, 몽진한 임금을 모시는 일, 군영에서 기무에 참여하는 일, 왜적을 쳐서 난을 평정하는 일, 사관으로서의 임무에 충실한 일, 전쟁의 후유증에서 벗어나게 하는 일, 난민을 구제하는 일, 학생을 위해 학교를 일으키고 백성들에게 생업에 힘쓰기를 권하는 일 등에 심혈을 경주하였다. 광해군 등극 이후 북당(北黨)의 횡포로 시정이 점점 더 문란하여 영창대군(永昌大君)이 죽임을 당하고, 마침내 1618년(光海君 10년 戊午)에 인목대비를 유폐하는 상황에 이르자 “윤강(倫綱)이 끊어지고, 천리(天理)가 없어졌다.”라며 세도(世道)의 뜻을 단념하였으며, 더하여 맏아들 좌랑공(佐郞公)의 상보(喪報)를 받자 바로 환향하였다. 다시 병조참의(兵曹參議)와 명나라에 갈 동지하사(冬至賀使)등에 제수되었으나 병이 있어 응할 수 없다고 하고 거절하였다. 이때의 심경을 시로 읊었다.
抱病三年疑隔世 병든 지 삼 년이라 격세지감 들던 중, 蒙恩萬里許朝天 만 리 길 가서 황제 배알할 은혜 내리셨네. 鴻毛一擲微臣願 힘 다하여 충성함이 미천한 신하의 소원이나, 誰解膏肓二豎纏 고황에 깊이 든 병마를 뉘라서 물리치리오.
선생은 한 칸 초가집조차 지을 여력이 없었다 한다. 만년(晩年)을 산수 간에 의탁하여 비바람을 막지 못하는 허름한 집에서 거주하였으며, 이후 세상의 시비득실에 마음을 쓰지 아니하고 두건을 쓰고 명아주 지팡이를 짚고 아버지 귀봉공이 향리에 지어놓은 백운정(白雲亭)에 올라 향을 피우고 정좌하여 독서와 수양으로 지냈다. 또 동방 명현의 유산시(遊山詩)와 한거잡영(閒居雜詠)을 모은 촉령록(矗泠錄)을 편찬하였다. 항상 자제들에게 훈계하기를 “나는 맹자(孟子)가 말씀하신 ‘궁곤하여도 의를 잃지 아니하고(窮不失義), 현달하여도 도를 떠나지 말라(達不離道).’라는 8자를 평생 가슴에 담아왔다. 이것을 마음에 두고서 잊지 말라.” 고 당부하였다. 선생은 백운정으로 돌아와서 작고하던 해 다음과 같은 감회시를 지었다.
可笑東西客 우스워라 떠도는 나그네, 何時枕席寧 그 어느 때라서 침석이 평안할까. 行年滿易卦 나이는 주역 예순 네 괘수에 다 찼고, 衰齒損台星 늙은 치아는 서너 개만 남았구나. 逃病病相覓 병을 피하면 병이 찾아오고, 送窮窮自停 궁귀(窮鬼)를 보내도 절로 머무르니. 不如歸舊宅 차라리 나의 옛집으로 돌아와, 牢鎖一巖扃 암혈의 빗장을 잠그느니만 못하구나. 부인 진성이씨(眞城李氏)는 첨정(僉正) 이준(李寯)의 딸이니, 퇴계선생(退溪先生)의 손녀이다. 5남2녀를 두었으니 장남 시주(是柱)는 생원시에 장원하고 문과에 급제하여 병조좌랑에 올랐으며, 시건(是楗)은 좌승지에 증직되었고, 다음 시정(是楨)은 생원이고, 다음은 시릉(是棱)‧시상(是相)이며, 두 딸은 진주판관(晉州判官) 배상익(裵尙益)과 생원 이정준(李廷俊)에게 갔다. 1620년(光海君 12년 庚申) 10월 선생은 백운정(白雲亭)에서 향년 64세로 생을 마쳤다. 미수 허목(眉叟 許穆)이 묘비명(墓碑銘)을 지었고 옥천 조덕린(玉川 趙德隣)이 행장을 지었다. 그 후 1651년(孝宗 2년 申卯)에 선생은 임진란에 모병토적한 공으로 가선대부(嘉善大夫) 이조참판(吏曹參判)에 추증되고, 1892년(高宗 29년 壬辰)에 이조판서(吏曹判書)로 가증 되었으며, 부인은 정부인(貞夫人)이 되었다. 후학들은 선생의 유덕(遺德)을 존모하여 노림서원(魯林書院)‧ 덕봉서원(德峰書院)‧ 묵계서원(默溪書院)‧ 임호서원(臨湖書院) 등에 선생을 제향 하였다. 문집 6권 4책이 간행되었고 호종일기(扈從日記) 1책이 보존되어있는데 보물 484호로 지정되었다.
[운천공(雲川公) 김 용(金 涌)의 임진년 모병문(募兵文)]
오호라! 이 어떠한 때인가? 이 어찌 몸을 숨기고 해(害)를 멀리하여 자신의 안일을 도모할 때이겠는가? 어가(御駕)가 파천하고 도성이 함락되어, 열두 대(12代) 선왕들의 능침(陵寢)이 전란의 먼지에 덮였고 무수한 백성의 간과 뇌가 땅에 쏟아졌으니, 신하되고 자식된 이들로서는 군부(君父)의 수욕(羞辱)이 무궁하고 부모 되고 형제 되며 부부된 이들로서는 골육의 원통함이 이미 지극하도다. 아! 죽지 않고 살아남은 이들은 그 어찌 밝은 햇빛아래 얼굴을 들고 요사한 기운을 수수방관하고서 이 수욕과 원통함을 씻을 길을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물며 혹염과 같은 적의 기세가 사방에 치성(熾盛)하여 우리를 잠식해 들어와 걷잡을 수 없이 무너지게 될 근심이 차츰차츰 이르고 있으니, 비록 한 모퉁이에서 구차히 살아보고자 하더라도 그렇게 될 수 없음에랴! 우리들이 사람이 아닌 이류(異類)가 될 수 있다면 그만이겠지만, 진실로 나의 군부를 생각하여 저 원수들과는 한 하늘을 이고 살 수 없음을 안다면 어찌 한번 죽음을 각오하고 일어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우리들이 와신상담한 지 여러 달 동안 한밤중에 팔을 걷어 부치기도 하면서 관병을 모으려 했으나 관병은 이미 흩어졌고, 막부(幕府)를 도우려 했으나 막부는 우리의 직임이 아니었다. 썩은 선비의 오활한 계책은 쓸데가 없는 줄은 안지가 오래지만, 그런데도 오히려 구구히 여기에 이르러 나라를 위해 목숨을 버릴 것을 생각하는 것은 참으로 복수에는 의리가 있고 부질없이 죽는 것은 무익하기 때문이다. 만약 용감한 사람들을 얻어서 복심(復心)의 군사로 관계를 맺는다면 바다와 산을 옮기는 큰일을 할지라도 아무런 어려움이 없을 터이니, 저 적들이 비록 무리가 많을 지라도 무슨 두려울 것이 있으리오. 이에 감히 남은 장정들에게 두루 유시(諭示)하고 승도(僧徒)들을 널리 모아 채 수 십일이 못 되어 무리가 수 백 명이나 되었다. 이에 거의 자기 몸을 잊고 우리의 약속을 지켜 마음과 힘을 하나로 뭉쳐 나아가 죽는 것은 영광이고 물러나 사는 것은 치욕인줄 알게 되었으니, 저 흩어져 도망가 오직 숨기에 겨를이 없었던 병졸들에 비한다면 그 용감과 비겁이 또한 현격하지 않겠는가. 그렇지만 전란을 겪은 후로 혼란한 나머지 나라의 살림이 이미 바닥나 군량은 콩 반 알도 없고 무기는 화살 하나 남은 것이 없어, 날랜 병졸들은 군량 배낭이 텅텅 비고 힘센 군사들은 반이 빈주먹뿐이라, 한갓 적을 무찌를 뜻만 간절할 뿐 힘 한 번 써 볼 데가 없으니, 이것이 실로 오늘날의 큰 근심거리이다. 여러모로 생각건대 열 집의 작은 고을에도 반드시 충신 한 사람이 있게 마련이고 적은 흙이라도 모으면 태산을 이룰 수 있는 법인데, 우리 한 두 이웃 고을들은 모두 열 집이 넘고 선비들은 모두 의리를 아니, 적이 아직 지경(地境)에 들어오지 않았을 때 조처할 길이 있을 것이다. 윗사람을 친애하여 관장(官長)을 위해 죽은 을가(乙可; 주인을 위해 목숨을 바친 노복의 이름) 같은 종이 어찌 없을 것이며, 대대로 근본인 농업에 힘썼으니 또한 류거달(柳車達; 고려 개국 공신으로 문화 류씨의 시조)이 그랬던 것처럼 군량미로 보내올 곡식도 많을 것이다. 진실로 바라건대 이 글이 도착하는 날 저마다 정성을 기울여 충성을 다 할 것을 생각하고, 향병이 이미 나갔다는 것으로 핑계를 삼지 말고 관군에게 모두 맡겼다는 것으로 구실을 삼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힘이 미치는 대로 마치 메아리처럼 응모하여 혹은 자제를 보내고 혹은 노복을 보내며 혹은 군량으로 쓸 쌀이나 콩‧ 피곡(皮穀) 또는 무명필을 보내고, 혹은 무기 만드는 데 쓰이는 아교나 깃털‧ 화살대나 쇠붙이 등을 보내어, 여러 방면으로 돕고 한 번 승낙을 바꾸지 않는다면, 가진 자로서는 이 정도 내 놓기가 그리 어려운 것이 아니지만 군수(軍需)에는 매우 요긴하게 쓰일 것이다. 멸망의 위기에 놓인 나라를 건지는 정성이 반드시 이 한 번의 도움에 힘입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을 터이니, 어찌 위대하지 않겠는가. 만약 "큰 번진(藩鎭)들도 곳곳마다 여지없이 무너졌고 용맹한 장수들도 모두 바람에 불리는 풀처럼 쓰러졌는데, 백면서생(白面書生)이 무슨 일을 하리오."하면서 시큰둥하게 비웃고서 힘을 다하지 않는다면, 이는 제현들에게 바라는 바가 전혀 아니니, 서로 힘을 모아 원수를 갚자는 바람을 그 어디에다 맡겨 이룰 수 있으리오. 오호라! 이제부터 삶과 죽음이 적을 토벌하느냐 토벌하지 못하느냐로 결판이 날 것이니, 나라를 위한 충성이 어찌 녹을 먹었느냐 먹지 않았느냐는 것으로 차이가 있으리오. 우리의 일이 이루어지면 유명(幽明)간에 통분을 씻을 수 있을 것이요, 일이 이루어지지 않더라도 헛된 죽음은 아닐 것이니 바라건대 제현들은 힘쓰시라.
[운천공(雲川公) 김 용(金 涌)의 주요 유물(遺物)]
호종일기(扈從日記) : 보물 제 484호 임진왜란 이듬해인 1593년(宣祖 26년, 時年 37세) 선조(宣祖)가 서북지방에 파천해 있을 무렵 운천선생이 사관(史官)으로 수행하며 당시 정사를 기록한 친필 일기로서 난중 정사를 기록한 사초(史草)이다. 선생은 두질(痘疾)로 휴직하고 귀향하여 요양하고 있던 중, 1592년 왜란이 발발하자 향군을 일으켜 안동수성장으로 의병을 이끌다가 이듬해 6월 12일 안동을 출발하여 혈로를 뚫고 7월에 평안도 강서현 행재소(行在所)에 도착해 선조를 알현하고, 예문관검열겸춘추관기사관에 복직하면서 조정의 국난극복에 참여하기 시작하였다. 1593년(癸巳) 8월 8일부터 기록이 시작되는 이 일기는 사관 직책을 겸직하며, 8월에 예문관대교 9월에 동 봉교 직을 거쳐 12월 26일 병조좌랑으로 전임될 때까지 쓰였는데, 모두 165일 가운데 기사가 수록되어있는 부분은 현재 26일분만 남아있다. 9월 1일 등 날자만 기록된 28일분을 제외하면 111일분이 더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호종일기를 통하여 당시의 국정과 왜적의 천인공노할 잔학행위, 할지강화(割地講和)를 도모하는 흉계와 명군(明軍)의 동태, 소인 간당(肝黨)들의 부역(附逆)행위 및 탐관오리의 추태, 그리고 아사자(餓死者)가 적시여산(積屍如山)이었던 처참상과 충신열사의 절행(節行)을 비롯하여 군왕의 고충 등 여러 면모를 상세히 알 수 있다. 20년 후 1613년(光海君 5년) 선생이 선조실록을 찬수할 때 자료로 활용되었으며, 일기의 기사는 선조실록 권 41부터 권 46까지에 등재되어 있다. 양자를 대조해 보면 실록은 계사 주체의 소속관청만 기재하였으나, 일기는 직책뿐 아니라 이름도 밝히고 있고 선조(宣祖)가 유숙(留宿)한 민가의 주인 이름까지도 밝히고 있으니, 해당 개별 사실을 파악하는 데 있어 선조실록보다 더 자세한 부분이 많다. 1968년 보물 제 484호로 지정되었으며, 지금은 한국국학진흥원에 기탁되어있다.
승정원일기초(承政院日記草) : 一名 경연주대(經筵奏對)
현존하는 최고(最古)의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초고(草稿)로서, 운천선생이 59세 때이던 1615년(光海君 7년)에서 60세 때인 1616년에 걸쳐 지제교(知製敎)로 입시(入侍)하여 기록한 것이다. 이것은 인조조(仁祖朝) 이전 승정원일기의 원모(原貌)를 살펴볼 수 있는 현존하는 유일한 자료인데다, 애초 형식대로 기록된 승정원일기로서도 현재 가장 오래되었기에 사료적 ‧ 역사적 가치가 탁월한 귀중한 문서이다. 이 일기에는 1615년(乙卯) 윤 8월 6일, 9월 21일, 10월 5일‧ 24일, 11월 2일‧ 10일‧ 11일‧ 12일‧ 13일‧ 16일‧ 22일‧ 26일‧ 27일과, 1616년 1월 9일‧ 15일‧ 16일, 2월 2일‧ 24일, 6월 18일 등 모두 21일간 승정원에서 이루어졌던 정무(政務)가 기록되어 있다. 호종일기와 함께 한국국학진흥원에 기탁되어있다.
[운천공(雲川公) 김 용(金 涌)의 묘명(墓銘)] [증(贈) 참판 김공 묘명(參判金公墓銘)]- 미수 허목(眉叟 許穆) 찬 공은 본래 강좌(江左)의 문소(聞韶) 사람으로서 성은 김씨이다. 고려 때 태자첨사(太子詹事)를 지낸 용비(龍庇)는 신라 경순왕(敬順王)의 후손으로서, 공에게는 12세조(12世祖)가 된다. 공은 명나라 가정(嘉靖) 36년(1557, 明宗12) 11월 4일에 안동부(安東府) 일직현(一直縣) 귀미리(龜尾里)에서 태어났다. 공의 휘는 용(涌), 자는 도원(道源)이다. 증조는 승정원좌승지에 추증된 예범(禮範)이고, 조부는 성균관 생원으로 이조판서에 추증된 진(璡)이고, 부친은 자여도찰방(自如道察訪)을 지낸 수일(守一)이며, 모친은 한양 조씨(漢陽趙氏)로 사과 효분(孝芬)의 따님이다. 공은 어려서부터 글을 읽고 행실을 닦아 재주와 학문으로 이름이 드러났다. 27세에 부친이 별세하였다. 34세에 과거에 급제하여 승문원권지정자(承文院權知正字)에 보임되었다가 얼마 후 예문관검열(藝文館檢閱)로 옮겼다. 겨울에 입직을 하던 중에 천연두를 심하게 앓아 생기를 잃게 되자 상(上)이 중관(中官)으로 하여금 좇아가 상태를 묻게 하고, 또 한편으로 이르기를, “비록 병에 걸리기는 하였지만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것이 많은 사람이니 일찍 죽지는 않을 것이다.” 하였는데, 병이 과연 치유 되었다. 고향 집으로 갔다가 돌아오기도 전에 왜적이 침입하여 상(上)이 서쪽으로 피난을 가게 되니, 때는 소경왕(昭敬王) 25년(1592)이요 공의 나이 36세에 일어난 일이다. 왜적이 삼경(三京)을 연이어 함락하여 길이 통하지 않게 되자 공이 향병(鄕兵)을 모집하고 의병들을 모아 왜적에 항거하느라 이듬해 가을에야 비로소 행재소(行在所)에 다다랐고, 다시 한림원(翰林院 예문관)으로 들어가 훌륭한 사관으로 칭송 받았다. 이때 황제(皇帝;明 神宗)가 이미 요동(遼東)의 병력을 구원병으로 보내와 연거푸 승리를 거두었으나 고양(高陽)에 이르러 가볍게 무장한 기병으로 왜적을 만나 싸우다가 그만 크게 패하였고 제독(提督;李如松)은 달아나 화를 면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그들과 화의를 맺고 군중에 명령을 내려 교전하지 못하게 하였다. 겨울에 상(上)이 서울로 돌아왔다. 공은 봉교(奉敎)에서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으로 승진하였다가 병조좌랑(兵曹佐郞)으로 자리를 옮겼다. 얼마 후 정언 겸 춘방사서(正言兼春坊司書)를 거쳐 헌납(獻納)으로 승진하였고 부수찬 겸 경연검토관(副修撰兼經筵檢討官)으로 옮겼다. 얼마 후 지평(持平)을 거쳐 이조좌랑(吏曹佐郞)에 제수되고 정랑(正郞)으로 승진하였다. 이에 당시 사람들로부터 추중(推重)을 받아 학사 조정립(趙正立)은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벼슬살이를 시작한 이래 깨끗하고 곧은 마음을 간직한 이로는 김도원(金道源) 정경임(鄭景任) 두 사람밖에 보지 못했다.” 하였다. 오래지 않아 사간(司諫)을 거쳐 사성(司成)으로 옮겼고 집의 겸 춘방보덕(執義兼春坊輔德)에 제수되니, 때는 소경왕 31년으로 공의 나이 42세였다. 왜적이 해상에 주둔하면서 큰 소리를 치며 다시 쳐들어오자 황제가 또다시 남북의 관병(官兵) 10여만 명을 동원하여 왜적을 정벌하였다. 좌상(左相) 이공 원익(李公元翼)이 제도도체찰사(諸道都體察使)가 되고 공이 종사관(從事官)이 되었는데, 이공이 매사를 공과 함께 계획하면서 자신의 강력한 보좌관(强佐)이라고 칭찬하였다. 바야흐로 명나라의 대병력이 와서 병기와 식량이 매우 부족하게 되자 공이 교리(校理)로서 독운어사(督運御史)로 나갔다. 이때 유공성룡(柳公成龍)이 영상(領相)으로서 위급하고 혼란한 때에 중임을 맡아 죽기를 각오하고 임무를 수행하였으며, 상(上) 또한 유공에게 매우 깊이 의지를 맡겼는데, 소인들이 틈을 엿보아 밤낮으로 온갖 계책을 동원해 유공을 비방하여 상(上)의 마음을 노하게 만들었다. 그리하여 유공(柳公)이 자리를 떠나고 조정에 있는 어진 신하들이 하나하나 쫓겨나게 되었다. 공 또한 배척을 받아 조정에 발을 붙일 수 없게 되어 더러는 산직(散職)으로 떨어지기도 하고 더러는 외직(外職)으로 나가 선산(善山), 예천(醴泉), 상주(尙州), 홍주(洪州)의 수령이 되기도 하였다. 전란을 당하여 온 나라가 혼란하고 치도(治道)가 크게 무너져 있을 때였으므로 공은 가는 곳마다 한결같이 백성들을 보호하고 학교를 일으키며 풍속을 교화하는 것을 급선무로 삼아 정사를 폈다. 그러나 같은 관직에 오래 있지 못하고 길어야 1년이나 2년에 지나지 않았다. 홍주의 수령으로 있은 지 1년 만에 태부인(太夫人)이 나이가 많아 부모가 연로하다는 이유를 들어 관직을 사직하고 돌아왔다. 그 이듬해에 태부인이 별세하였다. 공이 54세나 되었으나 상을 치르는 절차가 나이가 많다하여 조금도 줄이거나 변경하지 않았다. 상기를 마친 뒤에 봉상시정(奉常寺正)에 제수되었고, 편수관(編修官)으로서 소경왕(昭敬王)의 실록(實錄)을 편찬하는 일에 참여하였다. 그런데 소인배들이 정권을 잡고 있어 사건의 시비(是非)가 크게 어긋나 있었으므로 공이 정색을 하고 하나하나 바로잡았다. 영상 기자헌(奇自獻)이 탄식하기를, “선왕(先王) 때의 일을 분명하게 알기로는 이 사람보다 나은 이가 없다.” 하였다. 부평(富平)에 의옥사건(疑獄事件)이 발생하여 오랫동안 해결이 되지 않자 본도에서 이를 보고하였고, 조정에서는 특별히 사람을 가려서 파견하였다. 공이 명을 받고 그곳에 가서 원고와 피고의 말을 듣고 실정을 조사하여 진실과 거짓을 그 자리에서 밝혀내자, 사람들이 크게 열복(悅服)하여 모두들 말하기를 “인물이로다. 인물이로다.” 하였다. 봉상시정으로서 규례에 따라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승품하여 서반(西班)에 있은 지 1년 만에 여주목사(驪州牧使)에 제수되었다. 그때 공의 나이 이미 60이 된 데다 세도(世道)가 크게 어지러운 상태라 더욱 세상일에 뜻이 없어져, 공무를 마치면 여강(驪江) 가를 거닐며 한가로이 세월을 보낼 뿐이었다. 공의 맏아들이 죽자 고향으로 운구하여 장사 지낸다는 이유로 사직 장계를 올리고 고향으로 떠났다. 배를 타고 북강(北江)에 오르니 행색이 초라하여 고을의 부로(父老)와 아전들이 강가에서 전송하며 서로들 바라보고 공의 정사가 깨끗했음을 한참 동안 감탄하다가 흩어져 돌아갔다. 공이 시골로 돌아온 지 4년 만에 세상을 떠나니, 경신년(1620, 光海君12) 10월 19일로 향년 64세였다. 공은 평소에 말과 웃음이 적고 용모가 수려하며, 다른 사람의 잘잘못이나 조정의 득실에 대하여 입에 올리지 않았다. 책을 즐겨 읽고 외부의 사물에 마음을 두지 않았으며, 친족을 사랑하고 선(善)을 권장하였으니, 공의 몸가짐과 마음가짐이 얼마나 올바른가를 알 수 있다. 자제들에게 훈계할 때마다 늘 말하기를, “성현의 글을 읽고서 실천을 하지 않는다면 그 말씀이 빈말이 되어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나는 젊어서 학문에 뜻을 두었으나 중간에 반평생이나 다른 길을 살았다. 늙어서 아무리 잘못을 후회해 본들 소용이 없는 일이었다. 다만 나는 평소 ‘곤궁해도 의를 잃지 않고, 출세해도 도를 떠나지 않는다.[窮不失義 達不離道]’는 여덟 글자를 가슴에 새기고 살았다. 너희들도 이 말을 실천하도록 힘써 보거라.” 하였다. 공은 성품이 담박하여 달리 좋아하는 것도 없이 산수를 즐기며 살았으며, 자호(自號)를 운천(雲川)이라 하였다. 혼란한 세상을 만나 세상과 더불어 까다롭지 않고 어질게 처신하면서 자신의 재주를 감춘 채 일생을 마쳤다. 임종 때가 되자 여자들을 물리치면서 말하기를, “예법에 남자는 여자의 손에서 임종하지 않으며, 집안일에 대하여는 말하지 않는다 하였다.” 하고는 조용히 돌아가시니, 군자의 훌륭한 임종이라 이를 만하다. 이듬해 정월 갑신일에 임하(臨河)의 신곡(申谷)에 안장하였다. 숙부인(淑夫人) 이씨(李氏)는 군기시첨정(軍器寺僉正) 준(寯)의 따님으로 도산(陶山) 이문순공(李文純公;李滉)의 손녀이다. 부인은 평소 부덕을 갖추어 시부모 섬기기를 예에 맞게 하였으므로 온 집안이 그 현숙함을 칭찬하였다. 또 잉첩(媵妾)을 사랑하고 친족들과 돈독하게 지냈으므로 모든 사람들이 부인을 두고 대현(大賢)의 후손으로 가정교육을 잘 받았다고 칭찬하였다. 부인은 공과 같은 해에 태어났다. 공이 별세하자 부인이 슬픔에 빠져 3년을 곡읍(哭泣)하고 67세에 별세하니, 10월 9일이었다. 임당(林塘)에다 안장하였다. 아들 다섯을 두었는데, 시주(是柱) 시건(是楗) 시정(是楨) 시릉(是棱) 시상(是相)이다. 시주는 기유년(1609, 광해군1)에 국자시(國子試)에 장원하고 대과(大科)에 급제하여 기조원외랑(騎曹員外郞)이 되었고, 시정 또한 함께 생원시에 합격하였으나 불행하게도 일찍 죽었다. 공보다 먼저 죽은 아들이 넷이나 된다. 시주는 43세에 죽었는데, 공이 여주(驪州)에 있을 때 죽어서 귀장(歸葬)했던 바로 그 아들이며, 시건은 21세, 시정은 34세, 시상은 28세에 죽었다. 시릉은 공이 세상을 떠날 때 44세였는데, 초상을 감당하지 못하고 그 또한 1년도 지나지 않아 죽었다. 공이 별세한 지 20년째 되던 기묘년(1639, 仁祖17)에 장손(長孫) 희(煕)가 산소 터를 다시 잡아 임하(臨河)의 지동(枝洞)에 두 분을 합장하였다. 다시 13년이 지난 효종 초 신묘년(1651, 孝宗2)에, 지난 임진년에 공이 향병(鄕兵)을 모집하여 왜적에 대항한 일을 임금에게 아뢴 사람이 있어 특별히 이조참판에 추증되고, 부인은 정부인(貞夫人)이 되었다. 이번에 명(銘)을 부탁하러 온 사람은 김 원외랑의 손자로 지금 효릉참봉(孝陵參奉)으로 있는 김태기(金泰基)이다. 그 묘명(墓銘)은 다음과 같다.
嗚呼 오호라 君子之邦 군자의 고장에서 君子之敎 군자의 가르침 받아 君子之人 군자다운 인물이 되었도다 魯無君子 노나라에 군자가 없었다면 斯焉取斯 어디에서 이런 덕을 취하랴 하였으니 信有若人 참으로 이와 같은 사람이로다
[운천공(雲川公) 김 용(金 涌)의 후예(後裔)들의 행적] 일생을 명리(名利)에 연연치 아니하고 참다운 군자의 길 만을 택하여 걸었던 선생의 호국애민정신은 변치 않고 전해내려, 그 후손들 까지도 끊이지 않고 부국안민의 길을 모색했다. 그들 중 어떤 이는 관직에 진출하여 난민구휼(難民救恤)과 흥학근업(興學勸業)에 심혈을 기울였고, 또 어떤 사람은 향촌에서 후학들을 양성하는데 힘을 쏟았다. 선생의 후손들은 백성이 연명조차 힘든 곤경에 처하고 나라가 백척간두의 위험에 직면한 현실을 외면하고 서실(書室)에 들어앉아 오직 심성수양론(心性修養論)만을 연마한 고루한 선비가 아니었다. 나라와 백성이 그를 필요로 할 때는 자신의 안위를 돌보지 않고 헌신하였던 것이다. 그러한 후손들의 무수한 행적 및 공적을 일일이 들추어 모두 기록할 수는 없는 터라, 과거에 급제하였거나 문집을 남긴 후손들과 일제 강점기 항일운동의 발자취가 두드러지는 사람들만을 추려 간략히 나열한다.
급제자 명단 (及第者 名單)
諱
號
雲川公과의
關係
及第 年度
文 集
生員,進士試
文 科
용 (涌)
雲 川
1590
雲川集
시주(是柱)
開 湖
子
1599
1603
開湖集
시정(是楨)
敬 齋
子
1609
敬齊集
휴 (烋)
敬 窩
孫 子
1627
敬窩集
임 (㶵)
野 庵
孫 子
1635
野庵集
학기(學基)
寒溪堂
曾 孫
1641
寒溪堂集
선기(善基)
菊 巖
曾 孫
1662
이기(履基)
一柳堂
曾 孫
1652
一柳堂集
세흠(世欽)
七 灘
玄 孫
1672
1687
七灘集
창석(昌錫)
月 灘
玄 孫
1687
1690
月灘集
세호(世鎬)
龜 州
玄 孫
1681
1690
龜洲集
세추(世錘)
玄 孫
1671
세선(世銑)
玄 孫
1697
상열(相說)
雲 山
6代孫
1762
雲山遺稿
이운(履運)
晩懼齋
7代孫
1702
晩懼齊遺稿
현운(顯運)
惺 庵
7代孫
1777
惺庵遺稿
호운(虎運)
雨 澗
7代孫
1804
1809
雨澗集
형수(亨壽)
雨 泉
8代孫
1809
雨泉遺稿
조수(祖壽)
西 泉
8代孫
1825
西泉遺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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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락(金秀洛, 1840~미상) 경기도에서 봉기한 이강년 의진이 남하하여 봉화에 이르자 김수락은 노구임에도 불구하고 산간벽지 험로를 뚫고 의진의 근거지를 내왕하며 일본군의 동태를 알려주고, 자신의 재산을 팔아서 군수물자를 지속적으로 공급하는 등으로 의병활동을 도왔다. 1995년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다.
김대락(金大洛, 1845~1914) 자는 중언(中彦)이요, 호는 비서(賁西)·백하(白下)이다. 1907년 안동 내앞[川前]에 설립된 근대식 학교인 협동학교(協東學校)의 운영에 적극 참여하여 안동지방의 개화에 크게 영향을 주었고, 문중 개화와 혁신유림으로 전환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문중의 청장년들이 신민회(新民會)와 더불어 해외 독립운동기지 건설을 위해 서간도(西間島) 망명을 계획하자, 그는 만삭(滿朔)인 손부와 손녀까지 대동하고 앞장서서 망명길에 올랐다. 1911년 5월에 설립된 신흥학교(新興學校) 교장에 추대되었으나 사양하고 취임하지 않았다. 이후 경학사(耕學社)와 공리회(共理會) 결성에 참여하였다. 만주망명 후 줄곧 이주한인들의 안정된 정착을 위해 노력하다가, 1914년 삼원포(三源浦) 남산(藍山)에서 작고하였다. 1977년 대통령표창,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김 락(金 洛, 1862~1929) 독립운동 가문의 한 가운데를 지킨 여성독립운동가이다. 가족을 이끌고 서간도로 망명한 김대락의 누이요, 파리장서의거(長書義擧)라 일컫는 제1차 유림단의거(儒林團義擧)의 핵심인물인 이중업(李中業)의 아내이며, 예안(禮安) 의병장을 지내고 1910년 나라를 잃자 단식하여 순국한 이만도(李晩燾)의 며느리이자, 광복회와 제2차유림단의거에 참여한 이동흠(李棟欽) 이종흠(李棕欽)의 어머니이다. 1919년 3월 안동지역에서 일어난 3·1만세시위에 참가했다가 일본경찰에 끌려가 모진 고문을 당해 두 눈을 모두 잃었다. 2001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김만식(金萬植, 1866~1933) 백하 김대락의 조카이다. 대한협회 안동지회(大韓協會 安東支會) 설립에 참여하고 활동하였다. 1910년 신민회와 더불어 해외 독립운동기지 건설을 추진하였으며, 그해 12월 만주로 망명하였다. 서로군정서 조직에 참여하여 활약하였고, 1928년 압록강 청성진에서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고초를 겪었다. 1999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김동삼(金東三, 1878~1937) 본명은 긍식(肯植)이며, 자는 한경(漢卿)이요, 호는 일송(一松)이다. 29세이던 1907년 3월 협동학교를 설립하고 교감이 되고 비밀결사조직인 신민회와 대동청년단(大東靑年團)에 가입하여 활동하던 중, 1910년 대한제국이 멸망하자 문중인사들과 함께 1911년 서간도로 망명하였다. 신흥학교를 설립하고 경학사 사장 이상룡(李相龍)을 도와 독립운동기지 건설에 힘을 쏟았으며, 1914년에는 백서농장(白西農莊)을 건립하였다. 1919년 민족대표 39인 가운데 한 사람으로 길림(吉林)에서「대한독립선언서(大韓獨立宣言書)」를 발표하였다. 독립운동 전선이 새롭게 정비되어 백서농장을 해체하고 삼원포로 귀환하여, 한족회(韓族會)의 서무사장(庶務司長)을 맡았다. 1920년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의 참모장으로서 청산리전투(靑山里戰鬪)를 치른 후 북상하여, 10여 개 독립군과 연합하여 대한독립군단(大韓獨立軍團)을 결성하고, 러시아로 넘어갈 때 그는 서간도에 남아 독립전선을 재정비하였다. 1922년 6월 경신참변으로 붕괴된 동포사회와 독립군을 통합하기위해 통군부(統軍府), 전만한족통일회(全滿韓族統一會)를 결성하였다. 그는 통군부가 확대 개편된 통의부(統義府)의 총장을 맡았다. 1923년 1월 상해에서 국민대표회의(國民代表會議)가 열려 의장으로 선출되고, 독립운동세력의 통일을 위해서 노력하였다. 1924년 10개 단체대표를 모아 전만통일회의주비회(全滿統一會議籌備會)를 열었으며, 그는 의장에 선임되어 정의부(正義府)를 탄생시키는 데 주역을 맡았다. 1926년 임시정부 국무령에 취임한 이상룡이 김동삼을 국무위원으로 임명하였으나, 그는 만주에서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하기 위해 취임하지 않았다. 1929년 좌우 합작을 도모하기 위해 민족유일당재만책진회(民族唯一黨在滿策進會)가 조직되었고, 김동삼은 중앙집행위원장으로 선출되어 민족유일당 결성에 노력하였다. 이어서 1930년 7월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이 조직되자 그는 고문을 맡았다. 1931년 만주사변이 일어나자 김동삼은 북만주로 가서 활동을 모색하던 중, 하얼빈에서 일제 밀정의 밀고로 일본영사관 경찰에 체포되어 국내로 압송되었다. 평양지방법원에서 10년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 1937년 4월 13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김동만(金東滿, 1880~1920) 일송 김동삼의 동생이다. 안동지역 인사들과 신민회와 더불어 만주로 망명 후 1912년 삼원포에 세워진 삼광학교(三光學校)의 교장으로 취임하여 민족교육에 힘을 쏟았다. 이후 1919년 4월에 조직된 서로군정서에 참여하여 활동하다가, 1920년 9월 경신참변 때 일본군에 의해 살해되었다. 1963년 대통령표창,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김규식(金圭植, 1880~1945) 백하 김대락의 조카이다. 1907년 설립된 협동학교에서 교사로 활동하였으며, 1910년 12월 서간도로 망명하였다. 1919년 3월 부민단이 한족회로 확대 개편될 때 학무부장으로 선임되어 만주 이주한인들의 생활안정에 기여하였으며, 서로군정서에도 참여하여 활동하였다. 이후 정의부에 참여하여서 항일투쟁을 전개하였으며, 중국 관내와 러시아지역 동포와 연락하며 활동하다가, 1944년 8월에 일본경찰에 체포되었으며 이후 행적을 알 수 없다. 1996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김두형(金斗衡, 1884~미상) 1920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지원을 목표로 조직된 구국단(救國團)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충남 논산과 전북 익산 등지에서 군자금을 모금하던 중 체포되어 징역 1년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2012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김정식(金政植, 1888~1941) 백하 김대락의 조카이다. 1910년 대한제국이 멸망하자 서간도로 망명하여 독립군 기지건설에 앞장섰다. 1920년 경신참변으로 망명 촌락이 폐허가 되자, 이를 재건하기 위해 국내로 들어와 군자금 모금활동을 벌이던 중 일본경찰에 검거되어 3년간의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다시 만주로 건너가 항일투쟁을 지속적으로 전개하였다. 1993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김장식(金章植, 1889~1949) 1919년을 전후하여 만주로 망명 후 서로군정서에 가담하여 만주와 국내를 오가며 군자금 모집활동을 하였다. 통군부‧통의부‧정의부에 참여하여 활동하였으며, 1932년 4월 향방(香方) 농무계에 참여하여 항일투쟁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1995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김성로(金聲魯, 1890~1922) 1907년에 설립된 협동학교를 졸업하였다. 만주로 망명길에 올라 부민단에 참여하여 독립운동 기지 건설에 힘을 쏟았다. 1919년 3월 부민단을 한족회로 확대 발전시킬 때 그 주역을 담당하였으며, 김동삼의 후임으로 서무사장(庶務司長)에 선임되었다. 또한 서로군정서에서도 서무를 맡아 만주 이주한인들의 생활 안정에 기여하였다. 1920년 경신참변으로 인해 동포사회가 폐허로 변하자 국내에 들어와 모금활동을 전개하였다. 1922년 통의부 공작대가 체포됨에 따라 김성로도 체포되었다. 5년형을 언도받고 평양감옥에서 옥고를 치르던 중 1922년 감옥에서 순국하였다. 1963년 대통령표창,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김주로(金宙魯, 1895~1963) 1920년 7월 흠치교에 가입하여 1924년 자금모집 및 교도포섭에 힘을 쏟다가 일본경찰에게 체포되었다. 징역 1년을 받았다가 대구복심법원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다. 2005년 건국포장이 추서되었다.
김성로(金成魯, 1896~1936) 조부(祖父) 김대락과 함께 만주로 망명하여, 신흥중학교(新興中學校)를 졸업하였으며, 3‧1운동 후 북로군정서 사관연성소(士官鍊成所)에 교관으로 파견되어 활동하였다. 1920년 10월 북로군정서 독립군단에 편성되어 청산리전투에 참전하여 부상 후유증으로 사망하였다.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김시태(金時兌, 1896~1979) 1920년 흠치교 교단(敎團)의 8인조에 가입하여 1924년 자금모집 및 포교에 힘을 쏟다가 체포되어 약 7개월의 옥고를 치렀다. 2005년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다.
김술로(金述魯, 1898~1946) 1920년 흠치교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자금모집 및 포교에 힘을 쏟다가, 1924년 체포되어 1년 동안 옥고를 치렀다. 2012년 건국포장이 추서되었다.
김후식(金厚植, 1907~1961) 1927년 8월 신간회에 참여하여 활동하였다. 1930년 안동콤그룹을 조직하고 반제부(反帝部)의 책임자로 선임되었으며, 안동콤그룹의 산하 임하그룹 결성에 주도적 역할을 하였다. 이후 민중봉기를 계획하였으나 사전에 발각되어 실패로 돌아갔고, 이 활동으로 검거되어 징역 1년 6월에 집행유예 4년형을 선고받았다. 2000년 건국포장이 추서되었다.
김영춘(金永椿, 1924~1991) 1945년 1월 주중 일군 창(槍) 부대를 탈출하여 중국 호북성 신점진(新店鎭)지구에서 중국 중앙군 유격대에 편입되어 활동하였다. 그 후 광복군에 편입되어 대적공작을 위해 활동하였다. 1982년 대통령표창,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김영종(金永鍾, 1928~미상) 안동농림학교(安東農林學校) 재학 시 비밀결사조직인 조선회복연구단(朝鮮回復硏究團)에 가입 활동하였다. 1945년 3월 체포되어 5개월의 옥고를 치르다가 1945년 8월 16일 기소유예로 풀려났다. 2011년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다.
▣참고 및 인용문헌 『景泗流芳』『川前小誌』『雲川先生文集』『靑溪先生六父子傳』『내앞(川前)500년』『記言-許穆文集』『안동독립운동 인물사전』
*이 글은 운천선조 15대손 승태[昇泰]가 임진란 공신관련 자료 제출을 위하여 상기 참고 및 인용문헌 등을 바탕으로 발췌하고 정리한 것입니다. 마지막부분 독립운동 내용은 관련자 모두를 열거할 수 없어서 포상자를 위주로 출생일 순으로 나열한 것입니다. 따라서 추가로 포상을 받았거나 또는 누락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오류 등으로 바로잡을 부분이 있으면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첫댓글 무더위 건강 조심하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