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지개를 찾아
문경자
햇빛을 받은 거품 속에 여러 개의 무지개가 피어났다. 입으로 후하고 불었다. 무지개는 단숨에 날아가서 창가에 붙고 매달렸다.
동글동글한 어릴 적 내 친구들 얼굴이 그려졌다. 엄마가 만들어준 비눗방울을 대롱에 묻혀 순이 얼굴을 향해 두 볼에 힘을 주어 불었다. 순이 콧등에, 보라색 머리띠에도, 꽃무늬 블라우스에도, 보라색 운동화에도 내려앉아 동그란 무지개가 박혔다. 우리는 신이 나서 하늘을 향해 날아가는 비눗방울을 잡으려고 달리다가 돌부리에 채 넘어지기도 하였다. 언젠가는 꼭 무지개를 찾아 가야지 하는 야무진 꿈을 꾸었다.
초등학교 입학하는 날. 어머니가 하얀 손수건을 가슴에 달아 주었다. 엄마는 한복을 입고 10여 리나 되는 학교로 출발하였다. 들길도 지나고, 산길도 지나면서 엄마는 이렇게 말했다. 이젠 훌륭한 사람이 되어야 하고, 무지개 같은 꿈도 꾸어야 한다고 일러주었다. 빨, 주, 노, 초, 파, 남, 보는 잘 외워도 산수 공부는 꼴찌였다. 구굿셈도 외우지 못해 두 손 들고 벌을 서기도 하고, 늦게까지 남아서 일주일에 3일 정도는 청소하였다. 담임선생님은 열심히 공부하면 100점도 문제가 없다고 하였다. 그날 담임선생님이 같은 학교에 근무하는 아버지께 귀 띔을 해주었는지 날카로운 눈으로 쳐다보았다. 아버지 앞에서 외워 보았지만, 도저히 가능성이 없다는 것을 알고 웃음을 지었다. 지금도 잘하지 못하기는 마찬가지다.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재미있었다. 흙먼지를 날리면서 화물차와 버스가 지나가면 손을 흔들었다. 황강물이 흐르는 모래사장은 반짝반짝 보석이 박혀 있는 듯하였다. 모래성을 쌓았다. 내 다리에 붙은 모래가 햇빛을 받아 반짝였다. 고기잡이도 했다. 햇빛이 물속을 비출 때는 무지개가 보였다. 해 질 무렵 노을이 산등선을 넘어갈 때면 모든 것들이 붉게 취하여 드러누웠다. 하루라도 재미없는 날은 없었지만, 비가 오면 심심하고 졸음도 왔다.
학교에 가는 날이라 잠자리에서 일어났다. 날씨가 흐린 날은 등하굣길이 걱정되었다. 우산도 제대로 없다. 어쩌다가 갑자기 비가 쏟아지는 날이면 밭에 심어 놓은 토란 잎을 하나 꺾어 우산처럼 쓰고 다녔다. 토란 잎 가장자리에는 빗방울이 굴러다녔다. 유리구슬 속에 들어있는 무늬 모양의 무지개가 그 안에서 놀고 있었다. 신기하게 보여 손가락으로 톡 치면 까르르 웃으면서 내 발등에 떨어져 흩어졌다. 물방울을 주워서 반지를 만들어 엄마 손가락에 끼워주면 얼마나 좋아할까! 엄마 이마에도 고운 주름 일곱 빛깔 무지개가 피어나겠지. 비가 내리는 길을 걸으면서 무지개는 어디에 살고 있을까 하는 상상을 해본 적도 있었다.
장마가 오래 계속되면 밖에 나갈 수가 없다. 그럴 땐 친구들과 마루 끝에 걸터앉아 희뿌옇게 보이는 웅덩이가 있는 곳을 바라보았다. 마침 내리던 빗줄기가 가늘어 지면서 긴 꼬리를 감추었다. 태양의 반대쪽 하늘에 반원 모양으로 오랜만에 무지개가 떴다. 우리는 그 순간 무지개가 있는 곳을 바라보았다. 틀림없다. 무지개는 웅덩이가 있는 곳에 뿌리를 내렸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빨리 좇아가면 무지개를 찾을 수가 있겠지. 골목을 지나고, 논두렁 밭두렁을 지나, 우리 동네 600년 된 정자나무가 있는 곳까지 달려왔다. 고목 뿌리에 메어 놓은 황소의 눈과 마주쳤다. 황소의 눈에 무지개가 박혀 있었다. 황소의 눈을 보다가 돌아보니 무지개는 사라지고 말았다. 우리는 황소 눈을 살펴보았다. 그 속에도 없었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빨리 시냇물을 건너고 분이네 집을 지나 웅덩이가 있는 곳에 도착하였다. 물은 고요하고 아무 일도 없었다. 물고기들도 지느러미를 움직이면서 한가롭게 놀고 있었다. 무지개가 여기에 있었다는 증명도 할 수가 없다. 분명 여기에 무지개가 살고 있어. 무지개가 뜰 때까지 기다려 보자.
해는 저물어 여름밤 벌레 소리와 풀냄새가 풍겼다. 어두워진 길을 따라 돌멩이를 차면서 천천히 걸었다. 가끔 반딧불이가 내 앞에 와서 무지개 대신 보석 같은 빛을 비추어 주었다. 무지개를 찾아갔다가 허탕만 치고 돌아왔다. 그날 밤 꿈속에 선녀가 내려와 일곱 빛깔 무지개 왕관을 씌워 주었다.
첫댓글 좋은 글입니다
고운글 보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