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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단양우씨 집의공파 종친회 원문보기 글쓴이: 왕명
초헌관(初獻官) 제 영(濟 永) 아헌관(亞獻官) 복 희(福 熙) 종헌관(終獻官) 종 선(鍾 璿) 축 관(祝 官) 종 선(鍾 璿) 집 례(執 禮) 용 정(鎔 鼎) 봉 향(奉 香) 송 명(松 命) 봉 작(奉 爵) 송 명(松 命) 봉 로(奉 爐) 종 석(鍾 石) 전 작(奠 爵) 제 오(濟 午) 사 준(司 罇) 형 정(衡 鼎) |
□ 산신제 집사 분장(山神祭 執事 分掌)
헌 관(獻 官) 제 영(濟 永) 축 관(祝 官) 종 선(鍾 璿) 집 례(執 禮) 용 정(鎔 鼎) |
6. 산신제 축문(山神祭 祝文)
유세차 신묘 시월 을묘 삭
維歲次 辛卯 十月 乙卯 朔
초오일 기미 유학 우제영 감소고우
初五日 己未 幼學 禹濟永 敢昭告于
[2011년 음력 10월 초 5일에 유학 우제영이 감히 밝게 고하나이다]
토지지신 복이공수세사우
土地之神 伏以恭修歲事于
이십사대 조고 고려 삼중대광
二十四代 祖考 高麗 三重大匡
보국숭록대부 봉 적성부원군 부군 지묘
輔國崇祿大夫 封 赤城府院君 府君 之墓
[오늘 24대 조고 고려 삼중대광 보국숭록대부를 지내셨고,
적성부원군으로 봉해지신 할아버지 묘소에 공손히 제사를 올립니다]
유시보우 신뢰신휴
維時保佑 實賴神休
[진실로 항상 토지신령님께서 보호하여 주시고
도와주신 은덕을 입었습니다]
감이주찬 경신전헌 상
敢以酒饌 敬伸奠獻 尙
향
饗
[감히 술과 제물을 차려서 공경히 제사를 올리오니
부디 흠향하옵소서!]
7. 묘소 시향 축문(墓所 時享 祝文)
유세차 신묘 시월 을묘 삭
維歲次 辛卯 十月 乙卯 朔
초오일 기미 이십사대손 제영 감소고우
初五日 己未 二十四代孫 濟永 敢昭告于
[2011년 음력 10월 초 5일에 24대손 제영이 감히 밝게 고하나이다]
현 이십사대 조고 고려 삼중대광
顯 二十四代 祖考 高麗 三重大匡
보국숭록대부 봉 적성부원군 부군
輔國崇祿大夫 封 赤城府院君 府君
[24대 조고 고려 삼중대광 보국숭록대부를 지내셨고,
적성부원군으로 봉해지신 할아버지]
현 이십사대 조비 정경부인 경주 김씨
顯 二十四代 祖妣 貞敬夫人 慶州 金氏
[24대 조비 정경부인 경주 김씨 할머니]
기서유역 상로기강 첨소봉영 불승감모
氣序流易 霜露旣降 瞻掃封塋 不勝感慕
[절후가 바뀌어 이미 서리가 내렸으므로
묘소를 깨끗이 하고 바라보매
감회와 사모함을 이기지 못합니다]
근이청작서수 지천세사 상 향
謹以淸酌庶羞 祗薦歲事 尙 饗
[삼가 맑은 술과 여러 가지 제물로써 공경히 제사를 올리오니
부디, 흠향하옵소서!]
8. 적성군 단양우공 길생 묘소 홀기
설위포석(設位鋪席)
제단앞에 자리를 펴시오
제자손성복서립(諸子孫盛服序立)
모든 제관들은 제복을 입고 차례로 서시오
중행서상(重行西上)
서쪽부터 연장자 순으로 동쪽을 향하여 차례로 서시오
제집사개관세(諸執事皆盥洗)
모든 집사자는 차례로 나와서 손을 씻으시오
각취위(各就位)
모든 집사자는 제자리에 서시오
설과포(設果脯)
과일과 포를 올리시오
초헌관관세(初獻官盥洗)
초헌관은 나와서 손을 씻으시오
진예신위전궤(進詣神位前跪)
헌관은 신위 전에 나아가 무릅을 꿇고 앉으시오
봉향진우 봉로진좌(奉香進右 奉爐進左)
봉향은 헌관 오른쪽에 봉로는 헌관 왼쪽으로 나가 향합과
향로를 제자리에 놓으시오
헌관삼상향(獻官三上香)
헌관은 향을 세 번 분향하시오
부복흥(俯伏興)
헌관은 보복을 하고 일어서시오
소퇴궤(少退跪)
헌관은 뒤로 조금 물러나서 꿇어 앉으시오
행강신례(行降神禮)
강신례를 올리겠습니다
집사자짐주우잔(執事者斟酒于盞)
집사자(봉작)은 잔을 들고 (사준)은 술을 따르시오
봉작궤진우헌관지우(奉爵跪進于獻官之右)
집사자(봉작)은 술잔을 받아 헌관 오른쪽에 꿇어앉으시오
헌관수지관우지(獻官受之灌于地)
헌관은 술잔을 받아서 향안 옆 땅에 세 번 지우시오
수허작반지고처(受虛爵反之故處)
집사자(전작)은 빈잔을 받아서 제자리에 올리시오
부복흥재배(俯伏興再拜)
헌관은 부복을 하고일어서 재배하시오
평신․복위(平身․復位)
헌관은 바로서서 제자리로 돌아가시오
행참신례(行參神禮)
참신례를 올리겠습니다
재위자개재배(在位者皆再拜)
제관들은 모두 절을 두 번하시오
설찬(設饌)
3적을 제단옆에 준비하시오
행초헌례(行初獻禮)
초헌례를 올리겠습니다
헌관예신위전궤(獻官詣神位前跪)
초헌관은 신위전에 나아가 꿇어 앉으시오
집사자짐주우잔(執事者斟酒于盞)
집사자(봉작)은 술잔을 들고 (사준)은 술을 따르시오
진우헌관지우궤(進于獻官之右跪)
집사자(봉작)은 술잔을 들고 헌관 오른쪽에 나아가 앉으시오
헌관수지(獻官受之)
헌관은 술잔을 받아서 집사자(전작)에게 전하시오
제주․전작(祭酒․奠爵)
집사자(전작)은 술잔을 올리시오
비위전여전의(妣位前如前儀)
비위 전에는 전과 같은 의식으로 시행하시오
진적․계반개(進炙․啓飯盖)
육적을 올리고 그릇의 뚜껑을 여시오
재위자개부복(在位者皆俯伏)
제관은 모두 부복하시오
축진헌관지좌궤(祝進獻官之左跪)
축관은 나아가 헌관 왼쪽에 꿇어 앉으시오
독축(讀祝)
축관은 축문을 읽으시오
개흥(皆興)
제관은 모두 일어나시오
헌관부복흥 재배(獻官俯伏興 再拜)
헌관은 부복했다가 일어나서 재배를 하시오
평신․복위(平身․復位)
헌관은 제자리에 돌아가시오
집사자 퇴작(執事者退爵)
집사자는 술잔을 내리시오
행아헌례(行亞獻禮)
아헌례를 올리겠습니다
헌관관세(獻官盥洗)
아헌관은 나와서 손을 씻으시오
예신위전궤(禮神位前跪)
신위 전에 나아가 꿇어앉으시오
집사자짐주우잔(執事者斟酒于盞)
집사자(봉작)은 술잔을 들고 (사준)은 술을 따르시오
진우헌관지우궤(進于獻官之右跪)
집사자(봉작)은 술잔을 들고 헌관 오른쪽에 나아가 앉으시오
헌관수지(獻官受之)
헌관은 술을 받아 집사자(전작)에게 전하시오
제주․전작(祭酒․奠爵)
집사자(전작)는 술잔을 올리시오
비위전여전의(妣位前如前儀)
비위 전에는 전과 같은 의식으로 하시오
진적(進炙)
어적을 올리시오
부복흥․재배(俯伏興․再拜)
헌관은 부복했다가 일어서 재배하시오
평신․복위(平身․復位)
헌관은 바로서서 제자리로 돌아가시오
집사자퇴작(執事者退爵)
집사는 술잔을 내리시오
행종헌례(行終獻禮)
종헌례를 올리겠습니다
헌관관세(獻官盥洗)
종헌관은 나와서 손을 씻으시오
예신위전궤(禮神位前跪)
신위 전에 나아가 꿇어 앉으시오
집사자짐주우잔(執事者斟酒于盞)
집사자(봉작)은 술잔을 들고 (사준)은 술을 따르시오
진우헌관지우궤(進于獻官之于跪)
집사자(봉작)은 술잔을 들고 헌관 오른쪽에 나아가 앉으시오
헌관수지(獻官受之)
헌관은 술을받아 집사자(전작)에게 전하시오
제주․전작(祭酒․奠爵)
집사자(전작)는 술잔을 올리시오
비위전여전의(妣位前如前儀)
비위 전에는 전과 같은 의식으로 하시오
진적(進炙)
치적을 올리시오
부복흥․재배(俯伏興․再拜)
헌관은 부복했다가 일어서서 재배하시오
평신․복위(平身․復位)
헌관은 바로서서 제자리로 돌아가시오
행유식례(行侑食례)
유식례를 올리겠습니다
초헌관진예신위전궤(初獻官進詣神位前跪)
초헌관은 신위전에 나아가 꿇어앉으시오
집사자짐주궤(執事者斟酒跪)
집사자(봉작)은 술잔을 들고 (사준)은 술잔에 술을 따르시오
진우헌관 헌관수지(進于獻官 獻官受之)
헌관은 앞으로 나아가 술잔을 받으시오
취첨신위전 잔중주(就添神位前 盞中酒)
헌관은 신위 전 술잔에 첨작하시오
집사자삽시정저(執事者揷匙正箸)
집사자(봉작, 전작)은 숟가락을 꼽고 저를 바로 하시오
헌관재배(獻官再拜)
헌관은 일어나 재배를 하시오
재위자개부복(在位者皆俯伏)
제관은 모두 부복하시오
축희흠삼성(祝噫歆三聲)
축관은 헛기침을 세 번 하시오
개흥(皆興)
제관은 모두 일어나시오
집사자철갱(執事者撤羹)
집사자는 갱기를 내리시오
진다(進茶)
물을 올리시오
삼초반(三抄飯)
집사자는 밥을 세 번떠서 물에 마르시오
재위자개국궁(在位者皆鞠躬)
제관은 모두 국궁하시오
평신(平身)
제관은 일어서시오
초헌관서향립(初獻官西向立)
초헌관은 서족을 향하여 서시오
축동향립고이성(祝東向立告利成)
축관은 동쪽을 향하여 이성을 세 번 고하시오
합반개․철시저(合飯盖․撤匙箸)
집사자는 그릇의 뚜껑을 닫고 수저를 거두시오
행사신례(行辭神禮)
사신례를 올리겠습니다
헌관이하개재배(獻官以下皆再拜)
헌관 이하 제관 모두 재배를 하시오
축분축(祝焚祝)
축관은 축문을 태우시오
행음복례(行飮福禮)
음복례를 올리겠습니다
초헌관진예향안전궤(初獻官進詣香案前跪)
초헌관은 향안 전에 나아가 꿇어 앉으시오
축봉선조고위전잔반(祝奉先祖考位前盞盤)
축관은 선조고위 앞에 술잔을 들고
진우헌관지우궤(進于獻官之右跪)
축관은 헌관 오른쪽에 꿇어앉으시오
헌관수지졸음(獻官受之卒飮)
헌관은 술잔을 받아 마시시오
축수허작치우고처(祝受虛爵置于故處)
축관은 빈잔을 받아 제자리에 놓으시오
헌관흥축부복흥(獻官興祝俯伏興)
헌관은 일어서고 축관은 부복했다가 일어나시오
복위(復位)
제자리에 가시오
집사자철찬(執事者撤饌)
집사자는 제물을 거두시오
예필(禮畢) 모든 행사를 마치겠습니다
문하시랑 평장사 우현(門下侍郞 平章事 禹玄)
(?~1035, 성종 연간 ~ 정종 1년)
단양우씨(丹陽禹氏)의 시조이다. 제8대 현종(顯宗) 5년(1014) 향공진사(鄕貢進仕)로 등과하여 정조호장(正朝戶長)을 지냈다.
고려의 과거는 1차 시험을 개경(開京)과 지방에서 나누어 치렀는데 지방의 합격자를 향공(鄕貢)이라고 불렀다.
한편 개경에서 합격한 이를 상공(上貢), 그리고 외국인으로서 합격한 이를 빈공(賓貢)이라고 불렀다. 이들 향공, 상공, 빈공은 국립중앙대학 격인 국자감(國子監)에서 간단한 시험을 치룬뒤 국자감에서 3년 이상 공부한 학생, 벼슬에 오른지 300일 이상이 지난 이들과 함께 최종시험인 감시(監試)를 치른다. 감시는 문장을 짓는 제술과와 경서를 시험과목으로 한 명경과가 있었다. 감시 제술과 합격자를 진사라하였다. 고려조 때는 진사는 조선조 때의 소과(小科) 합격자와는 달리 대과합격자를 진사로 불렀다.
우현(禹玄)은 후에 문하시랑 평장사(門下侍郞 平章事)를 증직 받았는데 이는 <방목열기>, <성씨의 고향>, <한국인의 족보>등에 기록되어있다. 5대손이 고종때 문과에 합격한 문하시중 우중대(禹仲大)이며 우중대의 손자로 7대손이 동방이학(東方理學)의 조종(祖宗)으로 일컬어지는 역동(易東) 우탁(禹倬)이다. 고려 말에 문하시중을 지낸 단양부원군(丹陽府院君) 우현보(禹玄寶)는 9대손이 된다.
묘소는 장구한 세월로 인하여 실전되어 1998년에 단양의 시중공(侍中公) 우중대의 묘 서편에 2세 신(臣), 3세 인가(仁可), 4세 잉순(仍順), 5세 경절(慶節)과 제단비(祭壇碑)가 건립되어 향화를 올리고 있다. 2007년 10월에 경기도 파주시 고려통일대전에 배향되었다.
[참고문헌] 방목열기, 성씨의 고향, 한국인의 족보
문하시중 우중대(門下侍中 禹仲大)
(? ~ ?, 희종 즉위 전후 ~ 충렬왕 즉위 전후)
본관은 단양(丹陽)으로 지도평의사사 우경절(禹慶節)의 아들로 태어났다. 단양우씨의 시조 우현(禹玄)의 5대손으로 이후 단양우씨가 고려의 대표적 문벌의 하나로 성장하였기에 중시조로 추숭되고 있다. 제23대 고종 16년(1229) 향공진사(鄕貢進仕)로 문과에 급제하여 문하시중에 이르렀다고 <대동운부군옥(大東韻府群玉)>에 실려있다. <대동운부군옥>은 조선 선조때 권문해(權文海)가 저술한 일종의 백과사전으로 임진왜란 3년 전인 선조 22년(1589)에 탈고되어 임진왜란으로 유실된 많은 자료를 참고하였다.
우중대의 유지(遺趾)는 충청북도 단양군의 옛 향교 터인 품달리(品達里)에 있는데 그 기초가 아직 있고 ‘우령공(禹令公)의 다섯 아들의 등과지(登科地)’라 일컬어지고 있다. 한편 단양군 적성면 현곡리 신원에 유지비각(遺趾碑閣)이 있다. 단양군 영춘면 상리 북벽에는 우중대가 지었다는 시가 전해지고 있는 등 단양의 곳곳에 자취가 남아있다.
묘소는 단양군 적성면 애곡리 금수산(錦繡山) 남쪽 희역동(羲易洞) 간좌(艮坐)이고 산 아래에 재실인 희역당(羲易堂)이 있다. 1998년 묘소 서편에 시조 현(玄)으로부터 2세 신(臣), 3세 인가(仁可), 4세 잉순(仍順), 5세 경절(慶節) 등 위의 조상 5위의 제단비(祭壇碑)가 설치되었다. 해마다 음력 10월 1일에 전국 각지에 있는 후손들이 이곳에 모여 추향(秋享)을 올리고 있다. 배위는 임성박의 딸 임씨이며, 맏아들 천규(天珪), 둘째 천계(天啓), 셋째 천석(天錫), 넷째 천우(天佑), 다섯째 천성(天成)이 있다. 2007년 10월에 경기도 파주시 고려통일대전에 배향되었다.
[참고문헌] 대동운부군옥, 한국인물대사전, 한국성씨총감, 단양우씨세보
문희공 우탁(文僖公 禹倬)
(1262 ~ 1342, 원종 3년 ~ 충혜왕 복위 3년)
본관은 단양(丹陽), 자는 천장(天章), 탁부(倬夫), 호는 단암(丹巖), 또는 백운당(白雲堂)이다. 세상 사람들은 ‘역동선생(易東先生)’이라고 불렀는데 이는 특히 역학(易學)에 뛰어난 성리학자였기 때문이다. 시호는 문희(文僖)이다. 제24대 원종 3년(1262) 단산(丹山) 현 품달리 신원(현 충북 단양군 적성면 현곡리)에서 남성전서 문하시중(南省典書 門下侍中)으로 증직된 우천규(禹天珪)의 아들로 태어났다. 조부가 문하시중(門下侍中) 우중대(禹仲大)이며 단양우씨(丹陽禹氏)의 시조 문하시랑 평장사(門下侍郞 平章事) 우현(禹玄)의 7대손이다.
충렬왕 4년(1278) 17세로 향공진사(鄕貢進仕)가 되었으며 곧 발탁되어 홍문관 수찬(弘文館 修撰)에 임명되었다. 그 뒤 충렬왕 16년(1290) 5월에 정가신(鄭可臣)이 지공거(知貢擧)로서 주관한 대과에서 29세로 합격하였다. 다음 해 영해사록(寧海司錄)에 임명되어 외직으로 나갔다. 이 때 그 지방에 팔영(八鈴)이라는 요괴(妖怪)한 신사(神祠)에 백성들이 현혹하여 많은 폐해가 자행되므로 사당 건물을 부수어 바다에 버려 더 이상 음사(淫祠)가 이루어지지않도록 했다. 그 뒤 9개 군의 지방관과 진주목사(晋州牧使)를 역임했는데 새로 임지에 부임할때마다 요괴 숭배를 엄금하고 괴이한 신사(神祠)를 불태워 버렸다.
우탁(禹倬)은 이처럼 원과의 항쟁의 여파로 만연했던 미신을 타파하여 음예(淫穢)한 풍속을 개혁하여 혹세무민을 바로잡고 민심을 안정시켰다. 더 나아가 지나친 불사(佛事)의 폐단과 승려의 타락에도 제재를 가하였다. 지방관을 역임한 뒤 중앙으로 올라와 감찰규정(監察糾正)에 임명되었다. 이 직책은 시정(時政)을 논하고 백관(百官)을 감찰탄핵(監察彈劾)하며 국가의 기강을 바로 잡는 일을 한다. 47세 때인 1308년 8월에 충선왕이 즉위하였는데 왕이 그해 10월 24일 부왕인 충렬왕의 후궁이었던 숙창원비(淑昌院妃) 김씨를 범간(犯姦)하는 패륜(悖倫)을 자행했다. 바로 그 이튿날 감찰규정으로있던 우탁은 도끼를 들고 임금 앞에 나아가 자신의 말이 잘못되었을때는 목을 쳐 달라는 비부상소(持斧上疏)를 올렸다. 자신의 생명을 돌보지 않고 군왕의 비행을 직간한 우탁의 충의(忠義)와 기개(氣槪)에 근신(近臣)들은 모두 두려움에 몸을 떨었고 왕도 부끄러운 빛을 감추지 못하였다. 이 상소 후 벼슬을 포기하고 향리인 단양으로 돌아가 학문에 전념하였으나 그 뒤 진현관 직제학(進賢冠 直提學)에 임명되어 다시 관직으로 나가게 되었다. 이어 성균관좨주(成均館 祭酒)로 봉직하면서 성균관 유생들에게 정주(程朱)의 성리학을 강명(講明)하여 새로운 학품으로서의 신유학(新儒學) 진흥에 전력하였다. 벼슬에 뜻이 없었던 우탁은 당시 상황에서 정도(正道)의 구현이 어려운 때임을 알고 치사(致仕)한 뒤에 복주(福州)의 예안현에 퇴거하였다. 그 뒤 충숙왕이 여러번 불렀으나 끝내 사양하고 오로지 학문연구와 후진양성에 전념하였다.
충혜왕 3년(1342) 2월 7일 타계하니 향년 81세였다. 묘소는 안동시 예안면 정산리 정정산 자좌(子坐)에 모셔졌다.
우탁은 도학(道學)과 문행(文行)에서 모두 뛰어났으며 높은 학덕(學德)을 쌓고 의리(義理)의 실천으로 일관하였다. 후학들은 우탁의 삼대덕(三大德)인 도학(道學), 예의(禮義), 절조(節操) 등을 추모하여 지삼의(知三宜)라 일컬었다. 조선조의 퇴계 이황(退溪 李滉)은 우탁을 ‘동방이학지조(東方理學之祖)’, 즉 ‘동방이학의 할아버지’라고 극찬하였으며 선조 3년(1570)에 안동 예안에 역동서원(易東書院)을 건립하여 우탁의 학덕을 추숭하였다. 그리고 경북 경산시 영남대학교 민속원 내 구계서원(龜溪書院)에 배향됐다.
[참고문헌] 고려사, 고려사절요. 조선왕조실록
적성군 우길생(赤城君 禹吉生)
(? ~ ?, 충숙왕 연간 ~ 공민왕 연간)
본관은 단양(丹陽), 봉호는 적성군(赤城君)이다. 충숙왕 17년(1330)에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나갔으며 공민왕 10년(1361)에 안우(安祐), 정세운(鄭世雲), 김득배(金得培) 등과 함께 홍건적을 물리쳐 개성을 수복하였고, 그 다음 해인 공민왕 11년(1362)에는 아들인 우현보(禹玄寶)와 함께 왕을 호종(扈從)하여 청주에 이르러 공북루(拱北樓)에 올라 응제시(應製詩)를 지어 화답하였다.
공민왕 12년(1363)에 판운관사(判雲館事)로 단성익대보조공신(端誠翊戴補祚功臣) 2등에 녹훈되고 삼중대광보국승록대부(三重大匡輔國崇錄大夫)에 올랐으며 적성군(赤城君)에 봉해졌다. 이와 함께 문형(文衡)을 겸하였다. 우길생은 그러나 이후 훈업(勳業)에 뜻을 두지않고 가학(家學)을 이어서 서술하니 연원이 매우 정확하였다고 한다. 그러므로 포은 정몽주가 일찍이 그를 스승으로 삼았다. 시문이 모두 웅건하여 가정 이고(稼亭 李穀), 익재 이제현(益齋 李齊賢)과 더불어 당대에 이름을 떨쳤으나 유감스럽게도 유문(遺文)이 산일(散逸)되어 지금은 다만 <화공북루시(和拱北樓詩)>가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 <송홍진사시(送洪進士詩)>가 <동문선(東文選)에 실려 전해 올 뿐이다. 전남 완도군 고금면 덕암리의 덕암사(德巖祠), 장흥군 대덕면 거정리의 관남사(冠南祠), 충북 보은군 회북면 애곡리의 상현사(尙賢祠), 대구 월배 상인동의 낙동서원(洛東書院)에 우탁(禹倬), 우길생(禹吉生), 우현보(禹玄寶) 등 3위가 병향되었다.
묘소는 세대가 멀어 실전되어 알길이 없었으나 1937년 종인(宗人)이 파주 적성면 어유지리 단양곡 간좌(丹陽谷 艮坐)에서 지석(誌石)을 찾아내어 이곳에 비석을 세워 수호하고 있으며 지금은 많은 후손들이 찾아와 향사를 올리고 있다.
[참고문헌] 고려사, 고려사절요, 적성군실기, 단양우씨세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