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2부 멋진 꽁지머리> 쑥맥과 머저리의 사랑
언제까지나 처음 만났을 때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을 줄 알았는데, 한껏 멋을 부리며 외출 채비를 하는 아내를 보니 문득 흘러온 세월의 두께가 얇지 않다는 것을 실감한다.
"어떤 남자가 골목까지 쫓아왔어요."
허겁지겁 신발을 벗고 들어오며 불안해하던 아내에게 "젊어 보여 좋겠다"며 웃던 신혼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2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다. 중년 티가 물씬 풍기는 것을 화장으로도 더는 어쩌지 못할 때가 된 것이다. 그래서인지 요즘 들어 아내의 치장 시간은 예전보다 길어진 것 같다.
내가 아내를 처음 만난 것은 대학 2학년 여름방학 때였다. 방학이 되어 목포로 내려가면 나는 친구들과 함께 서한태 박사 댁을 자주 찾았다. 서한태 박사는 목포중고등학교 대선배로, 까마득한 후배들과 격의없이 어울려 술 마시기를 좋아했다. 우리는 그분의 그런 점에 이끌려 틈만 나면 몰려가 술을 축냈다.
그때나 지금이나 서한태 박사는 내게 지극한 존경의 대상이다. 의사일로 눈코뜰새 없이 바쁜 와중에도 사회활동과 환경운동에 젊은이 못지 않게 앞장서는 열정적인 모습이나 모든 일을 사리에 맞게 처리하는 깔끔한 일솜씨, 넉넉한 인품은 언제나 나를 매료시킨다.
요즘은 환경운동가답게 "쓸데없이 쓰레기를 만들지 마라.", "분리수거는 이렇게 하라."는 등 우리가 실천해야 할 환경지침을 일러주느라 바쁘다. 내가 폐식용유로 비누 만드는 방법을 알게 된 것도 다 그분 덕이었다.
내가 대학에 다니던 시절이나 지금이나 서한태 박사는 젊은이들과 어울리기 좋아하는 데에는 변함이 없다. 아들이나 사위는 말할 것도 없고 주위의 젊은이들과 사회 문제와 정세 토론을 자주 벌이는데, 결코 자신의 의견을 고집스레 내세우는 법이 없다. 나이가 들면 대개 마음에 문도 닫히고 아집이 쌓이게 마련인데, 서한태 박사는 언제 보아도 청춘을 살고 있는 분이다.
아내를 처음 만나던 날에도 나는 서울에서 대학에 다니는 목포 친구들과 함께 서한태 박사를 찾아갔다. 낯선 서울살이며, 세상 돌아가는 꼴이며, 우리가 없는 동안 목포에서 벌어졌던 일을 두고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는데, 웬 아가씨가 차를 가지고 들어왔다.
그 순간, 나는 이전에도 이후에도 두 번 다시 느껴보지 못한 야릇한 기분에 휩싸였다. 눈앞이 아뜩하고 가슴이 벼랑 아래로 내려앉는 것만 같았다. 그 아가씨에게 홀딱 반해 버린 것이다.
그 아가씨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스칼렛 오하라처럼 가지런히 앞가르마를 타 이마가 예쁘게 드러나 있었다. 길게 늘어뜨린 머릿결과 수줍음을 머금은 두 볼이 이를 데 없이 청순했다. 그가 입고 있던 하얀 투피스는 산골에 내린 첫눈처럼 눈부셨다.
"우리 막내딸이네. 올해 고려대 사범대에 들어갔으니, 서울에서 가끔 만날 수도 있겠군. 인사들 나누게."
서한태 박사의 설명에 겨우 정신을 차리고 소개를 했는데, 무어라고 나를 소개했는지 지금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혼이 빠져도 단단히 빠졌던 것이다.
대학에 들어가면서부터 서한태 박사의 다른 딸들과는 가깝게 지내던 터인데, 어찌된 일인지 막내딸은 그날 처음 본 것은 물론이고, 그 딸이 있었다는 사실도 까마득히 모르고 있었다.
서한태 박사의 막내딸을 만나기 전까지 나는 무뚝뚝하기 이를데 없는 사내였다. 연애 경험은커녕 연애를 하겠다고 마음 한번 먹은 적이 없었으니 그럴만도 했다. 어쩌다 친구들이 여자를 소개시켜 준다고 할 때에도 나는 늘 시큰둥했다. 내숭을 떨어서가 아니라 진짜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가 무뚝뚝하고 운치 없는 남자라는 것을 친구들이나 나나 공히 인정하는 바였다.
그런데 이제 사정이 바뀌었다. 서한태 박사의 막내딸을 만난 이후로는 도무지 다른 생각에 몰두할 수가 없었다. 나는 그 해 여름 방학 내내 열병을 앓았다. 누구에게 속시원히 털어놓지도 못하고 속으로만 끙끙거리느라 몰골도 말이 아니었다.
어느덧 방학이 끝나고 친구들은 모두 서울로 올라왔다. 내 "사랑"에는 한치의 진전도 없었지만, 그녀도 서울에 있다는 게 그나마 작은 위안이었다. 그러던 차에 서울에 있는 목포 출신 학생들이 "진클럽"이라는 써클을 만든다는 소식을 들었다.
독서 토론도 하고, 등산도 하고, 탁구장에도 가는 친목을 위한 써클이었는데, 써클의 목적 같은 것은 안중에도 없었다. 거기에 가면 그녀를 만날 수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만이 머리 속에서 왕왕거렸다.
머뭇거릴 것 없이 나는 "진클럽"에 가입했고, 기대했던대로 그녀를 만날 수 있었다. 그러나 막상 만나고 보니 어떻게 해야 할 지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요즈음 여학생들은 남자 선배에게 "형"이라 부르지만, 그때는 다들 "오빠"라 고 불렀다. 그녀도 나를 오빠라고 불렀는데, 도무지 고향 오빠 이상으로 생각하지 않는 눈치였다. 그렇다고 내 속마음을 선뜻 털어놓을 수도 없었다. 연애에 관한 한 나는 경험도 숫기도 없는 쑥맥이었다.
어느덧 "진클럽"에 그녀의 발길이 뜸해졌다. 그러고 나서는 서울에서 좀처럼 그녀를 만날 기회가 오지 않았다. 방학이 되어 서한태 박사에게 찾아갔을 때나 잠깐씩 만나볼 수 있었다.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나는 이 타령을 벗어나지 못했다.
그런데 마침 가까운 친구인 유선호 변호사가 그녀의 오빠와 국민학교 동창이었다. 그 핑계로 친구들과 만나는 자리에 그녀를 가끔 불러내기도 했다. 그러면 친구들도 눈치가 있었던지 이런 저런 구실을 대면서 그녀와 나만 남겨놓고 슬그머니 사라지고는 했다. 그래봐야 나는 애틋한 표현 한번 제대로 못하고 딴소리만 실컷 늘어놓다가, 하숙방으로 돌아오고는 했다. 그런 날 밤에는 뒤늦게 후회를 하느라 잠을 설치기 일쑤였다.
어찌 그렇게 쑥맥이었던지, 하다못해 덕수궁 돌담길 한번 걸을 생각도 못 하고, 어디 풍광이 좋은 곳에 가서 분위기 잡을 생각 한번 못했다. 딱 한번 그녀를 데리고 간곳이 별로 좋아하지도 않는 야구장이었다.
이렇게 우리는 가끔 만났지만 좀처럼 특별한 관계로 발전하지 못 했다. 그런데 누가 퍼뜨렸는지 목포에 이상한 소문이 돌았다. 나와 그녀가 약혼을 했다는 그야말로 낭설에 불과한 소문이었다.
손 한번 잡은 적이 없는데, 어디서 그런 소문이 시작되었는지 모를 일이었다. 이 소문이 나에게 유리한 국면을 조성해 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백제의 무왕 서동은 신라의 공주 선화를 얻기 위해 일부러 헛소문을 퍼뜨리기까지 하지 않았는가.
아무튼 서동이 선화 공주를 아내로 맞아들인 것처럼 나도 그녀를 아내로 맞이하는 데 성공했다. 나중에 아내는 나에게 이렇게 털어놓았다.
"당신이 나한테 관심이 있는 것 같았는데, 도무지 아무런 표현을 하지 않아 기연가 미연가 하다가 아니라는 쪽으로 결론을 내렸죠. 한번 은근히 속마음을 떠 볼 생각도 못했으니 나도 참 머저리 같죠?"
아내는 고등학교 때부터 주위에서 나에 대해 하는 말을 여러 차례 들었다고 한다. 대체로 수석감이라느니, 큰 인재로 자랄 사람이라느니 하는 말들이었다. 그래서 아내는 내가 앞뒤 꽉 막힌 수재형의 남자일 것이라고 짐작했단다.
그런데 막상 만나 보니, 자신이 보기에 순진하고 꾸밈이 없어 은근히 마음에 두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알고 지낸 지 4년이 넘도록 좋다는 말 한 마디는 고사하고 우회적인 표현조차 없었으니, 아내로서도 무덤덤하게 있을 수 밖에 없었다.
결혼을 하고 나서 아내가 내게 물은 적이 있다.
"그땐 왜 좋다는 말을 하지 않았어요?"
"다른 여자 같으면 쉽게 얘기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당신 앞에서는 도무지 입이 떨어지지를 않았어. 얘기를 하면 어디론가 멀리 달아나 버릴 것 같아서 불안했거든."
정말 그랬다. 적당히 내 뜻이 비친 다음 잘 되면 좋고 잘못되면 포기할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에 섣불리 내 마음을 털어놓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다 보니 날이 갈수록 고백하기가 점점 힘들어졌다.
그렇게 또 시간이 흘렀다. 어느덧 나는 대학을 졸업했고, 사법 연수원에 들어갔다. 아내도 4학년이 되어 있었다.
장가들 나이가 되었으니 여기저기서 중매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내게 들어오는 중매쯤이야 거절하면 그만이지만, 더 큰 일은 아내에게도 중매가 줄을 잇는다는 사실이었다. 그것도 목포에서 이름깨나 날리는 집안의 헌헌장부들이라니 잘못하다가는 닭 쫓던 개꼴이 나지 않을까 애가 바짝바짝 탔다.
나는 점점 불안해졌다. 그녀를 빼앗기면 세상을 빼앗기는 것이나 다름없을 것이라는 기분이 들었다. 그러니 이제 물불 가릴 처지도 아니었다. 그래서 마음을 다부지게 먹고 아내에게 전화를 걸었다.
"할말이 있으니, 신촌에 있는 왕자 다방으로 나와."
내 말투에는 전에 없이 힘이 잔뜩 들어가 있었다.
어둑시근한 다방 조명 아래 우리는 마주 앉았다. 나는 무슨 대단한 일을 앞둔 사람처럼 테이블 가에 시계를 풀어놓았다. 그리고 당장 핵심부터 치고 들어갔다.
"우리 결혼하자."
아내는 놀라서 눈이 휘둥그래졌다.
"지금 당장 결혼하겠다고 대답해."
4년 동안 억눌러 왔던 말이 터져 나오자 걷잡을 수가 없었다. 나는 거의 협박을 하듯 아내를 몰아세웠다. 그러나 아내는 그 다방에서는 끝내 대답을 하지 않았다. 다만 약간의 웃음을 머금은 아내의 눈빛에서 내 뜻을 받아들이고 있다는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몇 달 뒤, 아내의 졸업식을 앞두고 우리는 약혼을 했다.
이렇게 간단한 일을 가지고 왜 그렇게 속만 태우고 있었는지 요즘도 그 생각을 하면 자다가도 웃음이 절로 나온다. 알고 보니 장인인 서한태 박사도 일찌감치 막내딸의 신랑감으로 나를 점찍어 두고 있었다고 한다.
순탄한 집안의 딸들이 대체로 그렇듯이 아내는 아버지의 뜻을 순순히 따랐을 텐데, 나는 섣불리 말했다가 잘못되면 끝장이라는 두려움만 키우고 있었던 것이다.
약혼한 뒤에 우리는 본격적으로 연애를 시작했다. 아내는 대학을 졸업한 뒤에 목포에서 교사가 되었고, 나는 사법연수원에 다녔기 때문에 우리는 1년 동안 주말마다 서울과 목포를 오가면서 만났다. 나중에는 오가는 시간을 줄이기위해 대전이나 정읍쯤에서 만나고는 했다. 간데없는 쑥맥이었던 나도 차츰 연애하는 요령을 터득했지만. 천성이란 어쩔 수 없는 것인지 애틋한 말 한 마디 건넨 기억이 없다.
그렇게 운치 없는 연애를 한동안 하다가 내가 목포에서 판사 시보로 일할 때, 드디어 우리는 결혼을 했다. 목포에서 치른 결혼식 가운데 가장 많은 하객이 모였다는 소문이 날 만큼 많은 사람들이 우리의 결혼을 지켜 보았다.
나는 곁에 서 있는 아내를 곁눈질로 바라보며, 내 생의 가장 커다란 꿈 가운데 하나를 이루었다고 생각했다. 그 생각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제2부 멋진 꽁지머리> 신혼일기
우리는 신혼 살림을 목포에 있는 우리 집에서 시작했다. 손에 물 한번 안 묻히고 식구들의 귀여움을 독차지하며 자란 아내는 서툰 살림 솜씨 때문에 무척이나 애를 먹었다.
시집오기 전에 연탄을 갈아 본 일이 없는 아내는 연탄 가는 일을 가장 고역스러워 했다. 그런 아내가 안쓰러워 나는 식구들이 안 보는 사이에 연탄을 대신 갈아주기도 했다. 그러다가 연탄을 깨뜨려 들통이 나는 바람에 곱지 않은 눈길을 받기도 했다.
돌이켜보면 아내의 시집살이가 그리 혹독한 것은 아니었다. 아내에게 주어진 집안일도 그리 많지 않았다. 그런데도 아내는 하루 종일 허둥거렸다. 지금 같으면 눈 깜짝할 새 해치울 일들이었다.
서툴기는 나도 마찬가지여서 나름대로 돕는다고 도왔지만 실은 큰 도움도 주지 못했다. 그래도 성심껏 도우려는 내 마음만은 아내에게 전달이 되었으니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면 충분한 일이었다.
요즘 젊은 부부들은 가사 부담을 자연스레 행하지만, 그 시절만 해도 "남존여비" 관습이 오롯이 남아 있었다. 그래도 나는 아이 기저귀를 흠질하거나, 방을 훔치거나, 설거지를 하면서 닥치는 대로 가사를 도왔다. 그것만으로도 성에 차지 않아서 동생들을 불러 앉히고 훈계를 하기까지 했다.
"새언니 혼자 집안일을 다 하려면 너무 힘드니까 밥상 차리는 일은 네가 맡고, 집안 청소는 막내가 맡아라."
집안 일에 통 무관심하던 오라비가 난데없이 그런 주문까지 하면서 새언니를 감싸고 돌았으니, 동생들은 속으로 배신감을 느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가사를 분담해서 맡은 것은 한 식구로서의 당연한 도리이고, 나나 동생들이나 예외일 수 없다는 것이 내 생각이었다. 나의 일방적인 아내 편들기에도 불구하고 다행히 여동생들은 잘 따라주었다. 그런 동생들이 지금 생각해도 기특하다.
새로 시집살이를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렇듯이 아내는 우리 집안 분위기에 익숙해지는 데 한참 걸렸다. 우리 집과 처가는 먹는 습관이 조금 다르다. 우리는 세끼 식사 말고 달리 별식을 마련하는 일이 명절 때 말고는 거의 없다. 그런데 처가에서 먹을거리가 늘 있었던 모양이다.
그런 집에서 줄곧 자라난 아내는 간식을 먹을 수가 없는 것이 꽤나 힘들었던 모양이다. 가끔 친정에 빵이나 과자를 보내달라는 전화를 걸기까지 했으니 말이다. 그러면 친정에서는 사람 편에 간식거리를 보내주고는 했다. 하지만 번거롭게 자주 그런 전화를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어서 대개는 배를 곯고 지냈다.
어느 날인가는 목욕탕에 다녀온 아내가 이렇게 말했다.
"목욕탕에서 요구르트를 열 개 먹고 호빵도 여러 개 먹었어요. 얼마나 맛있었는지 사람들이 이상한 눈으로 보는 것도 몰랐다니까요."
그 말을 듣고 한참이나 웃었다.
"그렇게 먹고 싶으면 만들어도 되고, 사다 먹을 수도 있잖아?"
"주식 만들기도 바쁜데, 언제 간식을 만들어요. 그리고 나 혼자 먹자고 간식을 만들기도 우습잖아요."
듣고 보니 그도 그렇다. 간식을 먹을 만한 다른 식구가 있다면 핑계김에 만들거나 사다 놓을 수도 있지만, 간식을 먹을 사람이 아무도 없으니 얌체짓하는 것 같아 선뜻 내키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아내의 시집살이는 오래가지 않았다. 내가 수원에 있는 전투비행단의 군법무관으로 근무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가파른 언덕길을 15분 남짓 걸어 올라가야 하는 13평 아파트에 새 보금자리를 마련했다. 이미 큰애가 태어나서 기어다닐 무렵이었는데, 욕실이 없어 부엌에서 샤워를 해야 했다. 하지만 거기서 살던 때가 우리 부부에게는 가장 한가롭고 아름다운 시절이었다.
수원으로 이사한 뒤에도 아내의 연탄 가는 기술은 도무지 늘지 않았다. 게다가 워낙 낡은 아파트여서 아궁이에 문제가 있었던지, 거의 매일 연탄불이 꺼져 애를 먹였다. 우리는 한밤중이건 아침이건 가리지 않고 연탄불을 피워대느라 번개탄깨나 축내야 했다.
그런 어려움이 있었지만 아내는 처음으로 자기 살림을 하는 게 좋았던지, 집안 일을 지칠 줄 모르고 아주 열심히 했다. 어찌나 쓸고 닦아대는지 가끔 들르던 처남이 "일 솜씨가 없으니까 누나네 집만 밤늦게까지 불이 켜져 있다."며 놀리고는 했다.
아내에게 일 솜씨가 없는 것은 사실이었다. 김치를 한번 담을 양이면 나는 일찍 퇴근해서 아이를 돌봐야 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김치를 담는 것은 아예 불가능했다. 그렇게 해서 몇 시간 동안 난리 법석을 피워댔지만 김치는 작은 통 두 개도 채우지 못했다.
하지만 우리는 더없이 행복했다. 그때 내 월급이 8만원쯤이었는데, 세들어 살던 아파트의 관리비를 내고 이것저것 생활비를 제하고 나면 손에 남는 돈이 거의 없었다. 그러니 우리는 먹는 것만 겨우 해결했을 뿐, 어디를 놀러 가거나 옷 한벌 사입을 엄두 내지도 못했다. 그래도 마음만은 큰 부자였다.
지금도 우리 부부는 가끔 그 시절을 그리워하곤 한다.
<제2부 멋진 꽁지머리> 아내의 비자금
결혼하고 나서 얼마쯤 지나 나는 아내에게 공부를 더하고 싶다는 뜻을 비쳤다. 나는 아내가 반대할 것을 염려해서 아주 조심스레 말했는데, 의외로 아내는 선뜻 내 뜻을 받아들였다.
아내의 지지를 받고 기운이 난 나는 목포에서 변호사 개업을 할 계획을 세웠다. 열심히 일해서 돈을 마련하면 곧바로 유학을 갈 작정이었다. 그러나 장인은 목포에서의 변호사 개업은 큰 뜻을 펼치는 데 적당치 않다며 반대했다. 게다가 개업비용을 감당할 수 있는 처지도 아니어서 목포에서의 변호사 개업 계획은 철회되었다.
그러던 차에 내노라하는 <김&장 법률사무소>에서 일하자는 제의가 들어왔다. 나는 그다지 망설일 것도 없이 선뜻 수락했다. <김&장 법률사무소>에 다니는 동안 나는 제법 괜찮은 남편이었다. 워낙 일에 쫓기다 보니 아내와 보내는 시간이 많지는 않았지만, 제법 많은 봉급을 받았고 변호사로서의 능력도 인정받았다.
<김&장 법률사무소>에서 그렇게 4년쯤 보낸 다음에는 조영래 변호사와 <남대문 합동법률사무소>를 차렸는데, 이 때부터는 가족의 생활을 책임져야 하는 가장으로서 아내에게 큰소리를 칠 입장이 못되었다. 큰아이가 8살, 작은아이가 6살이었는데 유치원 비용만도 만만치 않았다. 그런데 수입은 도리어 4분의 1로 줄어들었으니 아내는 살림 꾸리기가 고역이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아내는 불평 한 마디 하지 않았다. 다만 <김&장 법률사무소>에서 보내주는 유학 기회를 잃은 것을 안타까워 할 뿐이었다. <김&장 법률사무소>에서는 그곳에서 일할 경력이 4년쯤 된 변호사들에게 유학을 보내주는 관례가 있었는데, 그 기회를 코앞에 두고 그만 두었으니, 유독 공부를 하고 싶어하는 내 마음을 아는 아내로서는 안타까울만도 했다.
돌이켜 보면 <김&장 법률사무소>를 나온 이후로 나는 돈벌이와는 거리가 먼 쪽으로만 달려왔다. "돈 안되는" 인권변호사 노릇에, 민변 상임간사를 맡기까지 했다. 월급을 받기는 했지만 차비 정도밖에 안 되는 돈이었다. 하지만 나는 민변 상임간사를 맡은 것은 내 인생에 큰 발전을 가져왔다고 여긴다.
민변 상임간사를 그만두고 다시 변호사 활동을 시작하면서도 형편은 별로 나아지지 않았다. 시국 사건 말고도 언제나 많은 사건을 맡았지만 돈이 될만한 사건을 고르는 재주가 내겐 없었다. 더구나 브로커를 고용해서 수익을 올린다는것은 내 주제에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돈을 잘 버는 변호사들은 대개 풍부한 인맥을 지니고 있다. 그 인맥이란 보통 학연이나 지연을 중심으로 형성되는데, 암태도에서 초등학교를 나오고 목포에서 중고등학교를 나온 나의 인맥은 보잘것이 없다. 좁쌀을 백번 굴리는 것보다 호박 한번 굴리는 게 낫다는 속담처럼 나는 돈으로 치면 좁쌀 알갱이만한 사건들만 맡았던 것이다. 게다가 시국 사건을 맡으면서 인권변호사로 알려지게 되었고, 그만큼 비즈니스 변호사로 성공할 기회는 줄어들었다.
변호사 일 말고도 사회단체 일을 맡은 일도 종종 있었는데, 활동비가 나오는것도 아니고 달리 보상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돈은 돈대로 쓰고 시간은 시간대로 쓰게 된다. 돈깨나 버는 변호사들이 인맥을 넓히기 위해 사교 골프를 치는 동안 나는 아무 보상도 없는 일에 매달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돈 잘 버는 변호사란 나에겐 애당초 남의 나라 일이나 마찬가지였다.
사정이 이런데도 사무실 운영비용은 어김없이 지출해야 한다. 게다가 한 집안의 장남이니 집안 대소사를 책임져야 한다. 또 우리 네 식구 먹고사는 것 말고도 동생들 등록금에다 아버지가 퇴직한 뒤로는 부모님의 생활비도 내 몫이 되었다. 좁쌀 알갱이만한 내 수입으로 이 많은 분야를 감당하기란 어려운 노릇이었다. 그런데도 나는 집안에서 죽이 끓는지 모르고 살았다.
비로소 얼마 전에야 나는 그 동안 아내가 어떻게 그 모든 것을 원만하게 처리하고, 또 집까지 장만했는지 궁금하게 여기기 시작했다. 그래서 넌지시 아내에게 물어보았다.
"내가 벌어다 주는 돈으로 그동안 어떻게 살았어? 내 머리로는 영 계산이 안나오는데…"
아내는 이제서야 그것을 물어보는 내가 조금 어이없다는 듯 웃음을 띄며 대답했다.
"당신은 언제 어떻게 변할지 종잡을 수 없는 사람이잖아요. 그래서 최소한의 생활비를 정해놓고 살았어요. 조금 여유가 생기면 빚도 갚고 저축도 했죠. 그러다 또 쪼들리게 되면 쪼들리는 대로 살았어요. 이래뵈도 내가 허리띠 졸라매는 데는 선수예요."
아내의 말을 듣고 나서야 나는 그 동안 우리가 어떻게 살림을 꾸려왔는지 어림짐작할 수 있었다.
나는 아내의 손을 꼭 쥐었다.
"고마워."
"고맙긴요. 오히려 내가 고맙죠."
"고생만 시켰는데, 나한테 고마울 게 뭐가 있어."
도리어 내게 고맙다고 하는 아내가 이상스러웠다.
"다른 변호사들은 접대비나 의례적인 인사 치례로 돈을 아주 많이 쓴대요.
당신은 그런 거 없으니까 고맙다는 거예요."
그리고 보니 아내의 말이 맞다. 나는 그런 불법적인(?) 지출을 해본 적이 한번도 없었다.
언젠가 사법연수원 8기 부인 모임에 다녀온 아내가 기분좋아하며 했던 말이 기억난다. 판검사를 지내던 동기들의 부인이 저마다 "변호사 부인치고 참 당당하다."고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아내도 가끔 유혹에 빠질 때가 있다. 재판에서 지고 돌아와 내가 "왜 그런 판결이 났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며 허탈해할 때면 "혹시 인사를 안해서 그런 것 아니냐"며 슬그머니 말꼬리를 흐리고 나서는 안되겠는지 자신의 말을 철회한다.
"하지만 원칙을 지키며 살았어도 밥을 굶은 적은 없어요. 무엇보다 소중한 것은 하늘을 떳떳하게 우러를 수 있는 자신감이에요."
그리고 내친김에 참 변호사의 길을 내게 역설한다. 대부분의 판사들은 명예를 소중하게 여기기 때문에 접대와 판결은 아무 상관이 없다는 둥, 혹시 있다해도 소수에 불과한데, 지금까지 깨끗하게 살아온 것을 더럽혀서는 안된다는 둥, 당자인 나보다도 더 열을 올린다.
그럴 때마다 문득,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선택 세 가지를 꼽으라면 직업, 인생관, 배우자이며, 이 세 가지를 잘 선택한 인생은 절대로 실패하지 않는다는 누군가의 말이 떠오른다.
그리고 나는 생각한다. 다른 두 가지는 몰라도 최소한 배우자는 잘 선택했으니 인생의 3분의 1은 성공한 것이나 다름없다고.
<제2부 멋진 꽁지머리> 딸만 둘이라구요?
우리 부부는 올해 고등학교 3학년인 지성이와 고등학교 1학년인 미성이 이렇게 두 딸을 두고 있다. 요즘 젊은 아버지들은 아들보다 딸을 더 반가워한다지만, 말만 그럴뿐 실제로는 "그래도 아들 하나는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더 많다.
전처럼 아들 낳을 때까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아들을 낳아야 한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이 적어지기는 했지만 여전리 불법 여아 낙태가 기승을 부리고, 아들 낳는 방법을 가르쳐준다는 광고가 버젓이 여기저기 눈에 띈다. 이를 보면 남아 선호 경향은 아직도 그 뿌리가 매우 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딸만 둘이세요? 그럼 더 늦기 전에 아들 하나 봐야겠네요."
말하는 모습이 인권변호사로 활동하는 당신도 아들을 선호하는 헐거운 구석이 있다는 것을 밝히고야 말겠다는 태세다. 그러나 단언하건대 나는 딸만 둘이어도 충분히 행복하다. 물론 우리 부모님은 조금 서운했을 것이다. 내가 장손이니 더욱 아들을 바라는 마음이 크다는 것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그래도 원체 자식들에게 무엇이든 강권한 적이 없는 양반들이라 당신들의 속내를 내비친 적이 없다.
부모님보다 아내가 오히려 아들을 바라는 눈치였다. 둘째를 낳기 전에는 "손자를 낳으면 부모님도 기뻐하실텐데…." 라며 은근히 아들이었으면 했다. 아내가 특별히 아들을 선호해서가 아니라, 며느리로서 부모님의 바람을 지레짐작하고 해본 말이었을 뿐이다.
어쨌든 우리는 2년 터울로 두 딸을 낳아 기르게 됐고, 행여나 아내가 아들 못 낳은 것엔 마음을 쓸까봐 오히려 내가 주의를 시키곤 했다.
"손자를 바라기는 하시겠지만, 아들 못 낳았다고 구박하지는 않을 테니 아무 걱정마."
그러고 나서는 이 문제에 관해서 우리는 완전히 벗어났다. 남은 것은 아이들을 잘 가르칠 걱정 뿐이었다.
우리 두 딸의 이름에는 "성"자가 들어간다. 항상 성실하게 살라는 뜻에서 넣은 글자였다. 흔해빠진 말이기는 하지만 "성실은 우리 부부가 아이들을 가르치는 첫 번째 원칙이다. 그래서 나와 아내는 아이들이 아주 어릴 때부터 자기 일에 최선을 다하지 않는 것을 부도덕하다고 가르쳤다.
애들이 막 말을 알아듣기 시작할 무렵부터 "인류를 위해 무엇을 할 것인지는 조금 더 커서 결정하더라도 그 전까지는 모든 일에 최선을 다하라."는 교과서같은 이야기를 되풀이했다.
그래서인지 우리 큰딸은 국민학교 때 장래 희망이 4대성인이었다. 학급에서 장래 희망을 발표하는 시간에 "지금은 공자, 석가, 예수 3대 성인만 있지만, 나중에 제가 크면 성인이 될 것이기 때문에 4대 성인으로 바뀔 겁니다"라며 큰소리를 쳤다는 것이다.
꿈이 커서 마치 꼬마 철학자처럼 굴었던 지성이는 국민학교 때 자기 손으로 『까라마조프 형제들』을 각색해 무대에 올리기도 했다. 나는 공부를 잘 하는것보다 지성이의 이런 면이 훨씬 자랑스러웠다. 아이에게 폭넓은 경험을 쌓게하고 사물을 풍부하고 정확하게 바라보는 눈을 길러주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우리 아이들은 아주 일찍부터 수학을 공부했다. 문제풀이를 한 것이 아니라 내가 일부러 짬을 내서 수학의 원리를 가르쳤다. 요즘 유행인 논리 학습과 비슷한 내용이었다.
중학교에 들어갔을 때에는 학교 공부와는 거의 무관한 경제학원론이나 철학 입문서를 보고 공부하게 했다. 중학교 때까지 과외 공부는커녕 학원 근처에도 보내지 않았다.
대신 다른 집안 일에는 소홀하더라도 아이들 교육 만큼은 아내보다 내가 더 극성을 부렸다. <김&장 법률사무소>에서 일할 때에나, 민변 일로 정신없이 뛰어다닐 때나 짬을 내어 직접 아이들을 가르쳤다. 정 짬을 내기가 어려울 때에는 아내에게 아이들 가르치는 방법을 자세히 일러주고 내 대신 아이들을 가르치게 했다. 아이들한테 책을 골라주는 일도 내 몫이었다.
첫 단추를 잘못 끼우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듯이 아이들의 공부도 어릴 때 바른 태도를 갖추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공부를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고 즐겁게 해야만 어려움을 겪지 않는다. 그것은 어려서부터 부모가 바로 잡아 줘야할 몫이다.
이런 의미에서 본다면 나는 조기교육론자에 가깝다. 그러나 내가 말하는 조기 교육은 어릴 때부터 온갖 지식을 주입하는 조기교육과는 다르다. 사물의 핵심을 파악하는 능력, 논리적인 사고의 습득, 세상을 폭넓게 보는 눈은 일찍 키우도록 더 크고 넓게 자란다는 것이 내 조기교육론의 핵심이다. 논술시험이 생긴 뒤로는 이러한 교육의 중요성을 많은 부모들이 인식하기 시작했다. 뒤늦은 일이지만 아이들을 위해 천만 다행한 일이다.
내가 일찍부터 그렇게 생각하고 실천했던 터라 우리 아이들은 비교적 논리적인 사고에 익숙한 편이다. 그 덕분인지 우리 아이들은 사람들과 잘 어울리고, 노는 데도 빠지지 않으면서, 공부도 썩 잘 하는 편이다.
나는 아이들에게 되도록이면 책을 원서로 읽게 하고 소설이나 교양서적을 많이 읽게 하려고 애를 쓰는데, 때때로 아내는 그것을 불만스러워 한다. 아무래도 학교 공부에는 그다지 큰 도움이 되지 않을 뿐더러 시간만 잡아먹는다는 생각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학교 공부에 얽매이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학교 공부에 아이를 옭아 매는 것은 창의성과 자발성이라는 싱싱한 싹을 잘라내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아이들이 숙제로 수학문제를 잔뜩 지고 오면 언짢아진다.
"아이들을 큰사람으로 키워야지, 이렇게 비슷비슷한 수학 문제를 잔뜩 풀어서 뭐해. 차라리 집합론을 더 공부해라."
여러 차례 반복해서 베껴대는 숙제를 하느라 낑낑거리는 모습이 눈에 띄면 못 하게 말리기 일쑤였다. 나의 기본적인 교육방법에 찬성하면서도 이럴 때에는 아내도 원망을 한다.
"당신 때문에 숙제를 안 해가서 우리 애들은 매 꽤나 맞았을 거예요. 당신 뜻을 잘 알지만, 현실도 무시할 수 없어요."
아내가 내게 타협해 주기를 바라는 것이다.
큰딸이 국민학교 2학년 다닐 무렵이던가, 아이들 교육문제를 놓고 크게 싸운 적이 있다. 집에 들어와 보니, 아내가 큰딸에게 공부를 가르치고 있었다.
다음날이 시험이기 때문에 문제지를 펼쳐놓고 한 문제 한 문제 풀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 꼴을 보고 나는 대뜸 "국민학교 2학년 아이한테 무슨 문제지를 풀게 하는 거야. 시험은 학교에서 들은 대로 풀면 된다구. 이렇게 키우면 아이가 자꾸 작아지기만 할 뿐이야"라며 화를 냈다.
아내도 단단히 화가 났는지 휑하니 집을 나가 버렸다. 아내는 내 교육관에 동조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아이가 받아올 성적에 신경이 쓰이고, 자기 자식이 공부 잘 한다는 소리를 듣고 싶었던 모양이다. 그런 아내에게 버럭 화부터 냈으니 속이 상할 만도 했다.
아내가 나간 뒤, 아무렇지도 않은 듯 점잔을 빼고 있는데, 한참 만에 아내가 무언가 한꾸러미를 싸들고 돌아왔다. 화해를 하고 나서 아내에게 물어보았다.
"당신 어디갔다 왔어?"
"용감하게 집을 나가긴 했는데, 갈 데가 있어야지요. 겨우 동대문 시장에 가서 아이들 양말만 실컷 사왔어요. 홧김에 충동 구매할까봐 마침 부족한 양말만 실컷 샀죠, 뭐."
그제서야 나는 한발짝 물러섰다.
"알았어, 당신이 그토록 원한다면 하고 싶은 대로 해. 그렇지만 도가 지나치면 언제든 내가 저지하겠어."
이 날의 부부 싸움도 끝내는 내가 지고만 꼴이었지만 지금도 나는 아이들이 주어진 조건이나 제도에 순응하는 사람이기보다는 그 조건과 제도에 맞설 수 있는 진취적인 사람으로 자라기를 바란다.
이렇듯 교육관이 투철한 나이지만 요즘 들어 자식 키우기가 쉽지 않다는 것을 절감한다. 아이들이 진로를 선택해야 할 때가 가까워 오면서 딸들과 신경전을 펼치기도 했다.
언제나 명랑한 둘째는 아빠 말을 잘 따른다. 그 애는 유치원에 다닐 때에는 경제학자가 되겠다고 했다. 내가 한참 경제학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던 터라 뭔지도 모르고 한 말이었다. 요즘은 종교를 연구해 보겠노라고 나서는데, 그것도 다 아버지 들으라고 하는 소리다. 솔직한 마음을 알고 싶어서 "미성아, 너는 왜 공부하니?"하고 물으면 대답은 아주 간단하다.
"여지껏 나더러 다들 공부 잘 한다고 했는데, 이제와서 못하면 쪽팔리잖아요."
그것 참, 이럴 때엔 뭐라고 말을 해줘야 하나.
큰애는 생각이 깊어서 선뜻 자기 속마음을 비치지 않는다. 크고 넓은 공부를 해야 한다고 강조하는 아버지가 부담스러운지 때로는 "아빠, 난 평범하게 살고 싶어"라고 말할 때도 있다. 다만 성실하기를 바랄 뿐이다.
나는 우리 아이들을 믿는다. 자기 몸을 풀어 온 세상에 나누어 주는 태양처럼 만인을 위해 일하는 사람이 되리라는 꿈을 꾼다.
그리고 나는 조용히 그 꿈이 실현되는 과정을 지켜볼 것이다.
<제2부 멋진 꽁지머리> 절반의 하늘
아내는 큰애가 초등학교 5학년 때 <참교육 학부모회>활동을 시작했다. 그때 나는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의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었는데, 그 전부터 집안 살림에만 매달려 온 아내에게 적잖이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기회만 닿는다면 아내도 자신과 사회를 위해 얼마든지 뜻있는 일을 할 수 있을 텐데, 내가 너무 아내를 집울타리 안에 옭아매 둔 것이 아닌가 하는 반성도 뒤따랐다.
때마침 전교조가 활발하게 활동을 벌이기 시작했는데, 그에 발맞추어 참교육 학부모회를 창립하려는 움직임이 싹트고 있었다. 나는 구로구청사건의 변론을 맡으며 가까워진 김희선씨와 김병곤씨 부인에게 부탁을 했다.
"우리 안사람이 집에서 유한마담처럼 놀고 있는데, 한번 기회를 주십시오. 아주 잘 할 겁니다."
아내도 사회활동을 해보고 싶었다며 선뜻 학부모회 활동에 참여했다. 참교육 학부모회가 창립되기 직전에 참여한 아내는 출세가도(?)를 달려 그 모임의 부회장직을 맡았다. 어떤 단체든 부회장이란 게 기실은 이름 석 자 올려놓는 자리에 불과한데, 아내는 집안에만 들어앉아 있었던 세월을 보상받기라도 하려는 듯 열심이었다.
"돈봉투없애기운동"을 벌일 때는 발바닥이 닳도록 열성을 다했다. 아내도 아이를 학교에 보내는 입장이다 보니, 늘 돈봉투에 얽힌 감정이 많았던 모양이다. 혹시 내 아이가 불이익을 당하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 때문에 아내도 몇 차례 돈봉투를 건넨 적이 있었는데, 돈봉투를 건네고 나면 왠지 선생님에 대한 존경과 믿음이 사라지고, 아이들 보기도 떳떳하지 못했다고 한다.
이런 전력이 있어서인지 아내는 자청으로 돈봉투에 관한 설문 조사팀의 팀장을 맡았다. 그리고 나서는 <한국갤럽>에 찾아가 통계학 전문가에게 설문 조사에 관해 개인교습까지 받았다. 설문지를 받아내는 일에도 지나치리만큼 열성을 부렸다. 다리 품을 팔아가며 설문지를 받아내느라 밤 12시 1시에 들어오기 일쑤였다.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아이들을 돌보는 일이 내 몫으로 떨어졌다. 여성도 일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 내 지론이지만, 막상 그런 일이 내 코앞에 닥치자 생각만큼 내키지 않았다. 아무리 그렇더라고 내가 아내에게 직접 한 말이 있으니, 불평을 할 처지도 못 되었다. 정신없이 일하는 아내의 활동을 그저 묵묵히 외조할밖에.
그 후에도 아내는 참교육 학부모회 일로 눈코뜰새없이 바쁘게 지냈다. 그러다가 휴일이 되면 밀린 집안일을 하느라 잠시 앉아 있을 틈도 없이 지냈다.
그럼 모습을 보고 있는 나도 가시방석에 앉아 있는 기분이었다.
신세대 남편들은 가사를 분담할 능력과 태세가 고루 잘 갖추어져 있다고들 하는데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고작 "일 그만하고 쉬어"하고 말하는 것 뿐이었다.
그렇다고 내가 하겠다는 것은 아니었다. 말하자면 나도 하기 싫고, 아내가 일하는 모습도 보기 싫었던 것이다. 이렇게 이중적인 마음이 드는 것을보면 나는 아직도 봉건적 습성을 완전히 떨쳐 버리지 못한 모양이다.
생각다 못해 아내에게 파출부 아주머니를 부르자는 제안을 했다. 처음에는 망설이는듯 했지만 그 상태로는 도저히 집안 살림을 꾸릴 수가 없었다. 그 뒤부터 지금까지 아내는 1주일에 두어 차례 파출부 아주머니를 부른다. 지금은 아이들이 많이 커서 따로 일손이 필요하지 않은데도 아내는 파출부 아주머니를 계속 부른다. 아주머니와 정이 들어 어쩔 수가 없다는 것이다.
참교육 학부모회 활동을 하면서 아내는 많은 변화를 겪었다. 내가 운동가요 테이프를 가지고 와서 듣고 있으면 "왠지 노래들이 모두 섬뜩해요. 운동권 노래는 다 저래야 하나? 아름답고 서정적인 선율도 얼마든지 있을 텐데…."라며 불만스러워하더니 이제는 나보다 더 많은 노래를 알고 있다.
그 당시 군사정권은 참교육 학부모회 행사조차도 불법집회로 간주하고 전경들을 배치했다. 그런 행사에서 최루탄 깨나 마시고 돌아온 아내는 운동권 가요에 대해 이전과는 다른 견해로 무장하고 있었다.
"어느 순간에 끌려갈지 모르니까 너무 무서웠어요. 그때 다 함께 노래를 부르니까 무서움이 가라앉았어요.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그런 두려움을 떨치고, 신념을 끝까지 밀고 가기 위해서 운동 가요를 그렇게 비장하게 만들었나 봐요."
아내는 운동 가요의 필요성을 서서히 인정한 것이다. 안이하게 사는 사람에게는 그 노래가 섬뜩하게 들릴 지도 모르지만, 언제 끌려갈지 모르는 상황에서 용기를 주는 데에 노래만큼 큰 역할을 하는 것도 없다. 아내는 지금도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로 시작하는 "님을 위한 행진곡"을 들으면 눈물을 펑펑 쏟는다. 비로소 비장미를 알게 된 것이다.
요즘 아내는 안산 지역의 주부 모임을 만들고 있다. 참교육 학부모회에서 활동한 경험을 살려 지역의 교육 문제를 함께 풀어가고, 문화 활동을 하는 모임인데, 예나 지금이나 열성에서는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 그녀는 이제 당당한 여성주의자로서 절반의 하늘과 절반의 땅을 찾는 발걸음을 서슴없이 내딛고 있는 것이다.
아내의 변신을 지켜보면서 내 의식에도 많은 변화가 생겼다. 솔직히 말해 나는 여성운동이나 교육운동을 좀 한가로운 운동이라고 치부하기도 했다. 생존권 확보를 위한 투쟁이나 독재 권력의 폭압을 물리치는 투쟁에 비하면 그것은 언제나 뒷전이었다.
교육문제나 여성문제는 정치 운동이 발전하면 저절로 해결될 것이라는 안이한 생각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아내가 활동하는 모습을 보면서 자신과 가장 가까운 문제에 관심을 갖는다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를 깨닫게 되었다. 이는 내 인생에서 참말로 커다란 깨우침이었다.
<제2부 멋진 꽁지머리> 운동권 가족
시국사건과 노동사건 변론을 맡으면서, 나는 우리 사회 곳곳에 드리워 있는 비민주성의 실체를 구체적이고도 정확하게 볼 수 있었다. 그에 따라 사회를 보는 비판적인 눈이 더 예리해지고, 그 비판의 강도도 높아갔다.
TV 뉴스를 볼 때나 신물을 볼 때, 나도 모르게 흥분해서 언성을 높이는 일도 잦았다. 처음에는 아내와 아이들이 흥분하는 나를 뜨악하게 바라보았지만, 차츰차츰 내 의견에 동조하는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그러던 차에 아내까지 참교육학부모회 활동을 시작하자, 우리 집안에는 반정부적인 분위기마저 감돌았다.
어느새 휴일에 열리는 사회단체의 집회는 우리 가족의 나들이 코스가 되었고, 가족 애창곡은 운동권 노래로 바뀌었다. 가족 전체가 "운동권"이 된 것이다.
아이들은 어린 나이였지만 정의의 편에 서야 한다는 나의 단순한 논리에 쉽게 동조했다. 그렇지만 아이들이라고 해서 당시의 그릇된 현실을 보지 못했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아이들이 어른보다 더 민감하게 반응할 때도 많았다.
하지만 한창 예쁘게 자라는 아이들에게 딸들에게 세상에 대한 증오감부터 가르친 게 아닐까 생각하면서 바늘을 삼킨 듯한 느낌에 빠지기도 했다. 그렇지만 우리처럼 생각하는 사람이 소수라는 것을 눈치채고도 아이들은 언제나 정의의 편에 서 있다는 믿음을 잃지 않았다.
이 때문에 아이들은 학교 생활에서 곤란을 겪기도 했다. 선생님이나 다른 아이들과 생각이 전혀 달랐으나 때때로 소외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큰 아이는 학교에서는 자기 생각을 드러내지 않고 지냈다고 한다. 그러다가 간혹 동조자라도 나타나면 집에 와서 무용담이라도 되는 듯 수다를 떨어댔다.
아내가 참교육 학부모회 활동을 하면서부터 아이들의 학교 생활은 더 불편해졌다. 아내가 학교에 찾아가자, 교장 선생님은 아내 들으라고 일부러 전교죠 선생님들 욕까지 했다고 한다. 그 말을 듣고 속이 상해서 아내에게 물었다.
"그래서 어떻게 했어?"
"그냥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 버렸어요."
아무렇지 않다는 듯 말하면서도 아내는 자신의 믿음과 자식 때문에 어쩌지 못하는 현실 사이에서 오랫동안 우울해 했다.
작은 녀석은 제법 당돌해서 선생님이 묻지 않아도 "우리 엄마는 참교육 학부모회에서 활동하세요."하고 말하기도 하고, 아무 선생님한테나 "선생님, 혹시 전교조 선생님 아니세요?"하고 묻기도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큰애는 상처도 받았다. 지성이는 국민학교 때나 중학교 때 학급 간부를 맡았는데, 아내는 학부모회 활동때문에 학교 출입을 거의 하지 않았다. 간부 엄마들은 뻔질나게 학교에 드나들며 챙겨야 할 일이 많은데, 도무지 코빼기도 비치지 않았으니, 딸아이 혼자 그 눈총을 다 받았던 것이다.
한번은 학기 초에 학부모 면담이 있어서 아내가 학교에 찾아간 일이 있었다. 그런데 담임 선생님이 말문을 열기를 "솔직히 말해서 지성이가 부담스럽습니다. 어머님도 그렇구요." 하더란다.
아내는 자기가 하는 일이 학교에 대해 적대 감정을 갖자는 것이 아니라 단지 아이들을 바르게 가르치기 위해 부모가 할 일을 하는 것 뿐이라고 한참이나 설명을 하고 돌아왔다. 그 후로 아내는 선생님과 여러 차례 전화 통화를 하면서 서로에 대한 불신을 말끔히 씻어냈다.
큰애는 사춘기에 접어들면서 집안의 분위기와 학교에서 배우는 것이 다르다는 점 때문에 고민하는 눈치였다. 특히 도덕 시험을 치를 때에는 늘 벽에 부딪쳤다. 특히 임수경 방북 사건이 일어나고 나서는 북한에 관한 문제가 나오면 답을 찾지 못해 애를 먹었다.
사회주의나 북한 사회가 옳다고 여기기 때문이 아니라 그 개념에 대해 비교적 정확히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극우적인 통일론이나 체제론에 선뜻 정답이라고 동그라미 칠 수가 없었던 것이다.
학교에서 가르치는 내용과 집에서 가르치는 내용 사이에서 갈등을 겪었을 딸을 생각하면 측은하기까지 하다. 하지만 그런 과정 없이 어떻게 아직도 척박하기만 한 이 땅에 튼튼한 뿌리를 내릴 수 있으랴.
<제2부 멋진 꽁지머리> 멋진 꽁지머리
큰딸 지성이는 중학교에 다닐 때까지 만화 주인공이 그려진 내복을 입었다. 이맘 때면 민감하기 마련인 겉치레 꾸미는 일에도 별반 관심이 없었고 그저 책이나 공부에 관심을 기울일 뿐이었다. 때때로 깊은 사색에 잠긴 아름다운 모습을 내게 보여주기도 했다.
그러던 아이가 고등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는 마치 다른 아이가 된 것 같았다. 갑자기 멋을 부리는 데에 온 신경을 쓰는 아이가 된 것이다. 머리 모양이며, 옷차림은 더 이상 엄마의 차지가 아니었다. 제 마음에 들지 않는 옷은 절대로 입지 않았고, 가방이며 구두, 악세사리에 이르기까지 보통 까탈스러워진 것이 아니었다.
한창 유행하던 배꼽티에 힙합 바지를 입고 다니지는 않았지만, 학교에서 복장 검사를 할 때마다 바지가 길다는 둥 구두굽이 높다는 둥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었다. 예기치 못한 큰딸의 변화에 나와 아내는 적잖이 당황했다.
달라져도 너무 달라져서 친구들조차 어리둥절했다고 한다.
"지성아, 너 참 많이 달라졌다. 그전에는 문학이며, 예술 영화며, 갖가지 학문에 관심이 있는 지성파였는데, 이제는 그런 거 다 때려치우고 즐거움을 만끽하기로 작정을 한 것 같애."
멋부리는 일 뿐만 아니라, 노는 데에도 얼마나 정신을 파는지 여간해서는 잔소리를 하지 않는 아내의 입에서 "지성아, 너 요즘 너무 많이 노는 것 같다. 이젠 공부에도 신경좀 써야지"하는 소리가 나올 정도였다.
아내와 나는 아이들에게 크게 공부 욕심을 부리지 않았다. 공부보다는 친구들과 잘 어울리는 것을 더 바랐고, 그렇게 할 수 있도록 곁에서 도와주기도 했다. 좋은 친구가 없는 인생은 삭막하기 이를 데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와 아내는 언제나 "친구가 먼저 공부는 그 다음"이라고 되뇌어 왔다.
그런데 지성이가 멋을 부리기 시작하면서 그 말이 슬그머니 자취를 감추더니 이제는 "공부도 좀 하라"는 말이 그 자리를 대신 차지했다. 멋을 부리는 지성이도 지성이지만 학년이 올라갈수록 눈앞에 닥치는 대학입시에서 초연하기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아내는 놀기만 하는 지성이를 두고 요즘에는 불안해하기까지 한다.
아닌게 아니라 우리 큰딸은 너무 잘 논다. 친구도 많고, 모인 아이들을 보면 너나없이 왕수다꾼들이다. 이 왕수다꾼들은 그 입심만큼이나 먹성도 대단하고 노래방으로 볼링장으로, 영화관으로 쉴 틈없이 싸돌아 다닌다. 큰애는 그것도 성에 차지 않아 컴퓨터 통신으로도 친구를 여럿 더 사귀는 모양이다.
언니가 그러니 둘째는 덩달아 멋을 내느라 여념이 없고, 노는 데에서는 둘째가라면 서러울 만큼 열정적이다. 게다가 "듀스"의 열렬한 오빠부대이기도 하다. 어찌나 성화를 부리는지 아내가 새벽 5시에 듀스 콘서트장에 데려다 준 적도 있다. 그래야 앞자리에서 좋아하는 오빠 얼굴을 자세히 볼 수 있다나 어떻다나.
아내는 절대 안 보내준다고 펄쩍 뛰며 야단이었지만, 그렇게 좋아하는 것을 무턱대고 말리기부터 하는 것은 오히려 아이에게 좋지 않을 것 같아 내가 나서서 보내주어야 한다고 주장했고, 아내도 마지못해 내 말에 따랐다.
나는 원래 봉건적인 사고에 익숙한 사람이었다. 지금도 봉건성에서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해서 딸들이 멋을 내거나, 놀러다니는 것 보다는 더 의미 있는 데에 몰두하기를 바란다. 더 의미 있는 것이란 순전히 내 기준인데, 이를테면 책을 보거나 사색에 잠기는 따위의 일들이다. 하지만 이것은 내 바람일 뿐이지 굳이 아이들에게 강요하지는 않는다.
가능한 한 아이들을 자유롭게 풀어주고, 의견도 존중한다. 아내는 내가 이러니까 아이들이 자제할 줄을 모른다고 쏘아부치기도 한다. 하지만 놀고 싶을 때 억지로 공부하면 아이들 마음씨만 나빠진다는 게 내 생각이다. 그래서 억지 공부시키는 일에는 끝까지 반대를 고수한다.
내가 이렇듯 민주적이고 너그러운 아버지가 된 데에는 계기가 있었다. 몇 년 전만 해도 나는 유행에 민감한 사람을 절반쯤은 정신이 나간 사람이라고 여겼다. 특히 꽁지 머리를 하거나 귀걸이를 달고 다는 남자를 보면 밥맛이 달아날 지경이었다.
그런데 세계인권회의에서 한 외국 대표가 긴 꽁지머리에 귀걸이까지 달고 나와서는 인류의 인권에 대해 열변을 토하는 게 아닌가. 밥맛이 달아날 만큼 꼴불견이라고 생각했던 차림의 사내가 진지하고 사려깊게 자신의 의견을 정연하게 개진하다니! 그의 꽁지머리를 보고 나서 나는 밥맛이 달아나기는커녕 머릿속이 개운한 느낌이었다.
그리고 내가 얼마나 편견이 심한 사람인지 깨닫게 되었다. 내가 좋아하지 않는다고 잘못된 것은 아니라는 평범한 진리를 얻은 것이다. 기실 꽁지머리를 하고 다니는 남자라고 해서 그의 인격을 폄하해야할 아무 이유도 없다. 머리가 길든 짧든, 묶었든 풀어헤쳤든 머리는 머리일 뿐이다. 그 속에 든 정신이 무엇일지는 섣불리 판단할 수 없는 일이다.
멋진 꽁지머리를 본 뒤로 우리 딸들은 멋부릴 자유와 좋아하는 것을 마음놓고 좋아할 권리를 마음껏 누리게 되었다. 나도 때때로 딸들과 함께 서태지의 노래를 들으며 "쉰세대"가 되는 즐거움을 기꺼이 맛보는 여유를 덩달아 누린다.
<제2부 멋진 꽁지머리> 내 어깨에 짊어져야 할 무거움
두 딸의 갑작스런 멋내기는 나에게 "인권"을 새로운 각도에서 바라볼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그것은 생활 속에서의 인권 문제를 더 넓게 해석해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인권 침해는 "카메라 출동"에 가끔씩 오르내리는 일이라고만 생각해서는 안 된다. 정치적인 이유로 부당하게 감옥에 갇혀 있는 양심수나 박해받는 계층에게만 해당되는 말도 아니다.
인권에 대해서 이야기를 시작하려면 우리는 먼저 가장 가까운 곳을 둘러보아야 한다. 남편은 아내의 인권을, 부모는 자식의 인권을, 선생은 제자의 인권을 해치지 않았는지 심각하게 따져 보아야 하는 것이다.
인권이란 다양성에 대한 포용의 다른 표현이다. 생활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인권 의식이 매우 뒤떨어져 있다.
"사람을 뭘로 보고 하는 짓이야."라는 말을 듣게 되는 때가 가끔 있다. 이는 자신이 인권을 침해당했다고 느낄 때 쓰는 말이다. 하지만 이런 말을 해야할 때가 오면 흥분부터 하지 말고 정말 제대로 따져 보아야 한다. 자기 주장만 내세워서도 안 된다. 자신의 생각과 상대방의 주장을 놓고 물건을 저울질하듯이 객관적으로 따져 보아야 한다. 그리고 어느 쪽으로 저울이 기우는지 정확히 밝혀 그 형평을 맞춰야 한다. 그러려면 무엇보다도 나의 인권과 상대방의 인권을 존중하는 태도가 필요하다.
운전하다가 접촉사고가 벌어지게 되면 대개 고함부터 치고 나온다 고함은 곧 욕지거리로 바뀌고, 욕지거리는 드잡이로까지 발전한다. 이런 현상은 서로 인권을 존중하지 않기 때문에 벌어진다.
인권변호사로 오랜 기간을 활동했지만 나도 일상 생활에서는 인권에 관해 깊이 생각지 않았던 것 같다. 돌이켜 보면 아내와 아이들의 인권을 침해한 적도 있었다.
그때 입 밖에 내지는 않았지만, 나는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도 내가 변호사인데 마누라를 밖으로 돌려서야 되겠어. 결혼한 여자는 자식이나 낳아 잘 기르면 돼."
인권변호사로 활동하면서 여성의 인권 문제를 접할 기회가 자주 있었는데, 그럴 때마다 나는 그때의 일이 마음에 걸렸다. 그리고 뒤늦게나마 아내를 하나의 온전한 인격체로 대하지 않은 것을 반성했다.
이러한 반성이 없었다면 아내가 <참교육 학부모회>활동을 비롯한 사회활동에 나서는 일은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
인권을 폭넓게 이해하기 시작하면서 나는 가수 가운데 인순이를 가장 좋아하게 되었다. 나뿐만 아니라 식구들 사이에서도 인순이의 인기는 하늘을 찌른다. 인권에 대해 좁게 생각하고 있을 때만 해도 나는 인순이와 그의 노래에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그런데 어느 날인가 그녀가 텔레비젼에서 "국민학교 때 선생님이 "우리나라는 단일 민족국가"라고 가르쳤어요. 그때 정말 곤란했어요."라고 말하는 게 아닌가.
그제 서야 나는 우리 질곡의 현대사가 만들어낸 아픔을 그녀의 삶이 대변하고 있다는 것을 바로 보았다. 그녀는 바늘을 삼킨 듯한 삶의 통증을 감내하면서 꿋꿋하게 살아온 아름다운 인간성을 발견한 것이다.
생각이 여기에 이르자 그녀의 뛰어난 가창력과 관객을 압도하는 몸짓이 나를 사로잡았다. 그리고 노상 그녀의 노래를 들으면서 살아오는 동안 무수히 받았을 상처를 떠올려 본다.
그러면서 인권변호사로서 내가 두 어깨에 짊어져야 할 무게를 가늠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