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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풍(屛風)의 시(詩)를 읽으며
해담 조남승
장마 끝이라 습도가 높아서인지 날씨가 매우 후터분하여 절로 짜증이 난다. 그동안 전국의 저수지들이 바닥을 들어낸 채 거북이등처럼 쩍쩍 갈라질 정도로 봄 가뭄이 오래되어 농민들의 가슴이 다 타들어만 갔었다. 망종(芒種)을 지나 하지(夏至)를 넘기도록 비가 오질 않았으니 오죽했겠는가? 뒤늦게나마 애타게 기다리던 비가 내리기 시작하자 한편으론 만시지탄(晩時之歎)의 한숨을 내쉬면서도 모든 국민들이 뛸 듯이 기뻐하면서 단비를 맞이했다. 그러나 오랜 가뭄 끝에 내린 단비의 기쁨도 잠시, 폭우와 장마가 지속되면서 가뭄 근심이 장마걱정으로 이어지고 말았다. 속담에 ‘가뭄 끝은 있어도 장마 끝은 없다.’는 말처럼 여기저기서 기록적인 폭우에 의한 피해가 속출하여 더위를 무릅쓰고 수해복구에 안간힘을 다하고 있다는 TV뉴스가 나왔다. 참혹한 수해현장의 복구가 하루속히 이루어지기를 기도하는 사이에 TV에서는 계속 갖가지 뉴스가 이어지고 있었다. 북한의 핵무기개발 완성단계의 실상과 아동학대, 폭행, 살인사건 등 차마 보고듣기에 달갑지 않은 뉴스내용에 ‘에잇! 뭐, 기분 좋은 뉴스가 하나나 있어야지?’ 라고 중얼거리며 TV스위치를 꺼버렸다. 아내가 ‘아니, 뉴스가 보기 싫으면 다른 프로라도 보지 그래요?’ 라는 말을 남기며 문화센터에 가서 요가운동을 하기위해 집을 나섰다.
난 답답한 마음에 거실 창문을 열고 잠시 허공을 바라보았다. 좀 다습하긴 하지만 고층이라서인지 바람결이 제법 시원스레 안겨왔다. 장마가 여러 날 지속되면서 집안이 눅눅하고 퀴퀴한 느낌이 들어 여기저기의 창문을 모두 다 열어놓았다. 그리고 장롱 위를 비롯한 평소에 손길이 닿지 않았던 곳들의 묵은 먼지를 털어내고자 대청소를 시작했다. 방안 구석구석에 꼭꼭 숨겨져 있던 먼지들을 말끔히 청소하다보니 마음까지 홀가분하고 상쾌해졌다. 하지만 청소를 하면서 농 옆의 좁은 공간에 틈 하나 없이 보관해두었던 여덟 폭짜리 동양화병풍에 문제가 생겨있음을 발견했다. 여러 해 겨울을 넘기면서 온도차에 의한 습기로 인하여 병풍의 테두리부분에 곰팡이가 생겨 검게 부패되어 있었다. 나무만 좀 부패된 것이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이었다. 우선 병풍에 씌워진 보관포를 벗긴 후 마른걸레로 곰팡이를 말끔히 닦아냈다. 그리고는 농 위에 올려놓아야 되겠다는 생각으로 농 위에 있는 금강경 병풍을 한쪽으로 밀어내어 공간을 확보해 놓았다. 병풍을 갈무리하기 전에 다시 한 번 펼쳐보았다. 앞면은 사계절의 동양화가 한 계절에 두 폭씩 그에 어울리는 한시와 함께 그려져 있고, 뒷면에는 신사임당(申師任堂)이 지은 두 편의 시가 초서체(草書體)로 물 흐르듯이 아주 잘 쓰여 있다. 부모님을 모시고 살 때 장만해두었던 병풍인데 초서를 읽을 줄 몰라 끙끙대던 나에게 아버님께서 자세히 설명해 주시던 생각이 눈에 선하였다.
병풍에 쓰여 있는 시는 신사임당(申師任堂)이 어머님과 눈물로 이별하고 대관령을 넘으며 친정을 바라본다는 ‘읍별자모(泣別慈母) 유대관령 망친정(踰大關嶺 望親庭)’과 어머님이 그리워 라는 ‘사친시(思親詩)’ 두 편인데 시의 내용을 음미하면서 잠시 사임당의 가계(家系)를 더듬어보았다. 조선 전기의 문신이며 강릉12향현(江陵 十二鄕賢)중의 한 사람으로 이조참판을 지냈으며 오죽헌(烏竹軒)을 창건한 강릉최씨(江陵崔氏) 최치운(崔致雲)의 아들로서 대사헌을 지낸 최응현(崔應賢)의 여식(女息)인 최씨(崔氏)와 강릉의 부호인 용인이씨(龍仁李氏) 생원(生員) 이사온(李思溫)사이에 무남독녀 외동딸인 이씨(李氏)가 태어났다. 이 이씨(李氏)가 평산신씨(平山申氏)인 신명화(申命和)와 결혼하여 따님만 다섯을 낳았는데 그중 둘째로 태어나신분이 바로 신사임당(申師任堂)이신 것이다. 사임당의 모친이신 용인이씨(李氏)는 외동딸로서 한양 본가에 있는 진사 신명화 부군과 무려 16년이나 떨어져, 외조부 최응현이 물려준 강릉 오죽헌에 살면서 친가의 부모님을 극진히 모시었다. 또 율곡선생이 쓴 이씨감천기(李氏感天記)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실려 있다. 내용인즉, 사임당의 나이 18세 되던 해에 이씨(李氏)의 모친인 최씨(崔氏)가 별세하였는데, 부음을 받고 부군(夫君)인 신명화공이 한양에서 강릉으로 급히 내려오던 중 병을 얻어 거의 절망상태에 이르게 되었다. 이때 이씨(李氏)가 온갖 정성을 다해 간호를 하였지만 별 효험이 없자, 마지막으로 외증조부인 최치운의 산소를 찾아가 손가락을 잘라 하늘에 고하며 피눈물로 간절히 기도하였다. 이때 아버지의 병석을 지키던 신사임당이 이튿날 새벽에 피곤한 나머지 잠깐 졸게 되었는데, 그 잠깐사이에 꾼 꿈속에서 신인(神人)이 하늘로부터 내려와 대추알만한 환약을 환자인 신공(申公)에게 먹이는 것을 보고 깼다. 꿈을 꾸고 난 그날 바로 신공의 병환이 씻은 듯이 나았다. 이러한 사실이 세상에 알려져 조정에서 열녀정각을 세우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내용에 비추어볼 때 사임당의 모친인 이씨(李氏)는 출천지효녀(出天之孝女)요, 열녀(烈女)로서 사임당 같은 분을 길러냈으니 한마디로 ‘그 어머니에 그 딸’이란 말이 절로 나오게 된다. 어찌 따님뿐이랴! 율곡선생 역시 여섯 살 때까지 외조모의 애틋하고 자상한 사랑의 훈육을 받으며 정서적으로 안정적이고 성현(聖賢)다운 인성이 자리 잡게 되었으니 율곡의 외조모 이씨(李氏)야말로 마땅히 추앙받아야할 훌륭한 인물이 아닐 수 없다.
그러하니 효성이 지극한 율곡선생께서 외조모에 대한 공경심이 특별하였던 것은 당연하다고 할 것이다. 율곡선생의 나이 33세 때 사헌부 지평에서 이조좌랑에 임명되었지만, 외조모 이씨(李氏)의 병환이 급하다는 소식에 율곡은 벼슬을 버리고 강릉으로 내려가 외조모님의 병간호와 시봉(侍奉)에 정성을 다하였다. 이때 간원(諫院)에서 법전에 외조모에 대한 근친사항이 없으니 직무를 함부로 버린 것은 용서할 수 없음으로 파직해야 한다고 청하였다. 그러나 선조는 비록 외조모일지라도 정이 간절하면 가볼 수 있는 것이며, 효행에 관한일로 파직시킬 수는 없다며 파직의 청을 듣지 않았다. 율곡은 다음해 6월 조정으로 부터 홍문관 교리에 임명되어 강릉에서 서울로 올라왔으나, 외조모의 병세가 다시 위중하여 10월에 특별휴가를 받아 강릉으로 돌아가는 중에 외조모님께서는 자식 같은 외손자를 기다려주지 못하고 90세의 일기로 천수를 다하여 작고(作故)하시고 말았다. 율곡은 다음해 봄까지 외조모의 산소를 모시다가 교리에 재임명되어 서울에 올라왔다. 율곡선생이 외할머니를 진실로 얼마나 공경하였는가는 율곡선생이 지은 외조모(外祖母) 용인이씨의 제문(祭文)중에 다음의 구절에서도 엿볼 수 있다. “풍수포애(風樹抱哀)-어버이 못 모신 슬픔을 안고/ 유일조모(唯一祖母)-오직 한 분 할머님을 받들었기에/ 오매재회(寤寐在懷)-자나 깨나 가슴 속에 계시었거늘/ 금우기아(今又棄我)-이제 할머니마저 또 나를 버리시니/ 호천하혹(昊天何酷)-하늘은 어찌하여 그리 혹독하시나이까?”
요즘도 관광객들이 많이 찾고 있는 강릉의 오죽헌은 창건자 최치운(崔致雲)공의 아드님이신 최응현(崔應賢)이 따님 최씨(崔氏)에게로, 최씨(崔氏)는 다시 자신의 외동따님이신 이씨(李氏)에게로 물려주었다. 또한 이씨(李氏)는 딸 중에서 가장 영특했던 둘째따님이신 신사임당을 출가시키고도 한동안 함께 살았다. 이로 인하여 사임당에 이어 율곡선생도 이곳 오죽헌에서 탄생을 하게 된 것이다. 이곳에서 부모님의 정성스러운 훈육은 물론, 무엇보다도 외조부모인 이사온(李思溫)과 최씨(崔氏)의 따뜻한 보살핌 속에서 도의예(道義禮)와 시서화(詩書畵)를 익힌 사임당(師任堂) 신씨(申氏)는 19세에 이르러 덕수이씨(德水李氏) 이원수(李元秀)공과 혼인을 하였다. 그러나 부친의 간절한 마음을 헤아려 친정에 머무르며 시가를 종종 오가시다가 38세 때 시어머님인 홍씨(洪氏)가 연로하심에 따라 시가의 살림을 인계받아 주관할 수밖에 없었음으로 강릉친정을 완전히 하직하고 서울로 올라오게 되었다. 이때 눈물로 어머님 슬하를 배퇴(拜退)하옵고 대관령을 넘으며 잠시 친정집을 내려다보면서지은 읍별자모(泣別慈母) 유대관령 망친정(踰大關嶺 望親庭)이란 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자친학발재임영(慈親鶴髮在臨瀛)-늙으신 어머님을 고향에 두고
신향장안독거정(身向長安獨去情)-이 몸 홀로 서울로 떠나는 심정이여!
회수북촌시일망(回首北村時一望)-어머니 계신 곳을 잠시 돌아다보니
백운비하모산청(白雲飛下暮山靑)-흰 구름만 저물어가는 산에 날아 내리네.“
또, 한양에 올라온 후로는 연로하신 어머님이 심히 걱정되고 사모(思慕)하는 마음이 간절하여 밤만 되면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로 베개가 다 젖어들었다. 이러한 수심(愁心)의 나날을 보내면서 지은 칠언율시로 된 ‘사친시(思親詩)’의 내용은 이러하다.
천리가산만첩봉(千里家山萬疊峰)-첩첩산속 내 고향 천리건마는
귀심장재몽혼중(歸心長在夢魂中)-자나 깨나 꿈속에라도 돌아가고파
한송정반고윤월(寒松亭畔孤輪月)-한송정 물가에 둥근달은 외로이 떠있고
경포대전일진풍(鏡浦臺前一陣風)-경포대 앞에는 한 줄기 바람이 일며
사상백구항취산(沙上白鷗恒聚散)-갈매기 모래톱에 늘 흩어지다 모이고
해문어정임서동(海門漁艇任西東)-고깃배들은 바다위로 오고가리니
하시중답임영로(何時重踏臨瀛路)-언제나 강릉(임영)길 다시 밟아가
갱착반의슬하봉(更着斑衣膝下縫)-색동옷 입고 어머니 앞에 앉아 바느질 해볼꼬.
난 한참이나 병풍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사임당의 시를 가슴으로 읽고 또 읽었다. 어머님을 사모하는 사임당의 애절한 마음이 이입되고 나의 돌아가신 부모님이 그리워 가슴이 미어져왔다. 아른거리는 글씨를 더 이상 볼 수 없었기에 병풍을 접어 농 위에 올려놓았다. 생전의 아버님께서 ‘병풍 참 좋은걸 장만 하였구나. 그림도 아주 잘 그렸고, 사임당의 시도 정말 잘 썼구먼!’ 하시면서 사임당의 시에 대한 내용과 생애에 대하여 마치 한 동네에 살던 사람의 이야기처럼 구수하게 말씀해주시던 아버님의 모습이 눈물 속에 아롱져왔다. 난 그때 ‘어떻게 사임당에 대하여 그렇게 잘 아세요?’ 라고 여쭈었더니 아버님께서는 ‘전에 너의 할아버님께서도 말씀해주셨고, 노산 이은상 씨가 쓴「사임당의 생애와 예술」이란 책에서도 보고... 사임당의 친정어머니가 훌륭하였으니 만고에 추앙받는 사임당 같은 딸이 그 어머니에게서 나오게 되고, 사임당이 있었기에 과거시험에서 아홉 번이나 장원을 한 구도장원(九度壯元公)의 율곡선생 같을 아들이 이 세상에 나오게 된 게야. 너도 그 책 한번 읽어보아라. 느끼는 게 참 많을 게다.’ 라고 말씀을 하셔셔 그 당시 아버님께서 보셨던 세로로 인쇄된 아주 오래된 책을 한번 읽어 본적이 있었다.
오늘 사임당의 생애를 더듬어보면서 옛날에 느끼지 못했던 새로운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나 역시 사임당의 외조부처럼 무남독녀 외동딸만을 두었기에 나의 가족에 대한 역사는 나의 대에서 끊긴다고 생각하여 왔었다. 따라서 삶의 무상함과 허망함이 늘 가슴 한 구석에 자리 잡고 있었다. 그러나 절대 그렇게 생각할 일이 아니란 것을 새로이 인식하게 된 것이다. 바로 사임당과 그의 아드님이신 율곡선생이 훌륭하였기에 율곡의 외조부모는 물론, 사임당의 외가 집 조상님들에게까지 빛을 내고 있는 게 아닌가? 그러니 성공하여 출세하고, 올바른 도(道)를 지키는 훌륭한 사람이 되어 후세에 이름을 날림으로서 자신의 부모를 빛나게 드러내는 것이 효(孝)의 마침이라는 “입신행도(立身行道)하고, 양명어후세(揚名於後世)하여, 이현부모(以顯父母)함이 효지종야(孝之終也)”라는 공자의 말씀이 새롭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난 부모님 생전에 효도하지 못함은 물론 후세에 이름을 날릴만한 인물 또한 되지 못했다고 생각하니 부모님과 조상님에 대한 죄스러움으로 긴 한숨이 절로 나왔다. 부모님에 대한 사무치는 그리움을 가슴에 안고 서재(書齋)로 돌아와 고이 간직된 부모님의 앨범을 꺼내들고 한 장 한 장 넘기면서 부모님과의 추억을 더듬어보았다. 그리고 생전의 부모님을 그리며 앨범 첫 장에 내가 써놓은 사부곡과 사모곡을 가슴으로 읽기 시작했다.
‘사부곡(思父曲)-떵떵거리던 반가(班家)에서 태어나/ 소시 적엔 집안에 차려진 글방에서/ 인(仁)과 의(義)와 도(道)와 예(禮)를 배우고 익히시며/ 경세치용(經世致用)과 지행합일(知行合一)을 중히 여기시어/ 터 밭이며 과실나무는 물론/ 문전옥답과 재 넘어 논밭으로/ 또 안산과 뒷산에 이르기까지/ 치산(治山)과 감농(監農)을 도맡고자 자처하시었고/ 양친의 봉양과 제례에 지극정성을 다하셨으며/ 형우제공(兄友弟恭)으로 형제간에 우애를 돈독히 하사/ 동기간을 돕는데 주저하지 않으시었으니/ 효제(孝悌)가 출천하여 멀리까지 칭송이 자자하시었다./ 우리들에겐 의(義)와 신(信)을 중히 여기라고 가르치시며/ 예의염치(禮義廉恥)를 기본으로 학업에 전념하도록 뒷받침해주셨고/ 만년에는 거동이 불편하여 병고의 세월로 애쓰시다가/ 추운겨울 새벽 모친에 앞서 홀연히 영면(永眠)의 길에 드셨으니/ 생전의 불효가 막심한 나머지 호천통곡(呼天痛哭)을 하며/ 어머님께나 정성을 다해 불효의 죄를 덜고자 하였으나/ 설상가상일 뿐 효(孝)를 다하지 못한 채 회한의 한숨으로/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생전의 아버님 사진을 우러러/ 가 이 없이 용서를 빌고 또 비올뿐이옵나이다.’ 와
‘사모곡(思母曲)-양갓집 규수로서 총명자효(聰明慈孝)한 천성에/ 겸양과 지고지순한 부덕(婦德)을 가꾸시었고/ 인륜의 시초인 백년가약을 맺으신 이래/ 시부모님을 공경과 정성으로 봉양하심은 물론/ 상봉하솔(上奉下率)의 많은 가족들과 손아래 부리는 사람들/ 또 시어른의 빈객(賓客)과 행랑채에 머문 손들로/ 매 조석마다 북적대는 대가의 큰 살림살이를/ 여필종부(女必從夫)의 정신으로 기꺼이 감당해내시었으며/ 음식조리와 바느질솜씨가 뛰어나시어/ 근동의 대소사까지 앞장서 주도하시었고/ 어린 시동생들을 거두며 동기간에 우애를 지키셨으니/ 그 누가 여성에 최고의 미덕인 현모양처라 아니 하리요?/ 자식들을 지독지정(舐犢之情)의 자애(慈愛)로 키워내시며/ 무거운 곡식을 머리에 이고 먼 시장에 내다 팔아/ 학비를 대시느라 머리 윗면이 납작해지시고 말았으니/ 울 어머님의 은혜가 바로 호천망극(昊天罔極)이 아니고 무엇일고!/ 새댁 땐 다 키운 첫아들을 잃고/ 중간엔 장성한 둘째 아들마저 혼전(婚前)에 잃은/ 애통함을 가슴에 묻으신 채/ 삼종지도(三從之道)를 위해 아픔을 애써 삭이시며 사시었던 어머님께/ 생전에 지은 불효막심함을 어찌 다 빌 수 있으오리까?/ 아! 어머님 사진을 우러르며 하염없이 눈물만 흘리옵나이다.’라는 글을 읽으면서 왜 부모님 생전엔 수욕정이 풍부지(樹欲靜而 風不止)요, 자욕양이 친부대(子欲養而 親不待)란 말을 잊고 살았을까? 라는 회한의 뜨거운 한숨을 길게 토해내며 정신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부모님의 사진을 우러르며 ‘아~ 그리운 아버님 어머님!/ 이승의 무거운 짐 훌훌 벗어놓으셨으니/ 이제, 칠갑산 꾀꼬리봉의 영원한 안식처에서/ 고이고이 잠드시옵소서!’라고 기원하면서 합장(合掌)을 하였다.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감히 말하노니 나처럼 후회와 한스러운 삶을 살지 않으려면 누구나 "세유천만경전 효의위선(世有千萬經典 孝義爲先:세상에 천만가지경전이 있어도 효도와 정의가 먼저이다)"이라는 옛 성현의 말씀을 되새기며 정성을 다하여 효도하시길 권(勸)하는 바이다
조남승: 충남 부여 출생, 아호-해담(海淡), 동국대학교 경영학과 졸업,서울 성북소방서장 등 역임, <국제문예>수필부문 신인상 수상 등단, [국제문단문인협회]자문위원
시집:『매화 향에 취해서』, 수필집:『만남 뒤엔 헤어짐이 올 수밖에』外 다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