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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문요약>
효는 인간사회의 기본윤리이며, 부모를 잘 섬기는 일이다.
우리나라는 상고시대인 환단조선때부터 민족경전인 천부경, 삼일신고, 참전계경에 기초한 전통도맥인 신선도 5상에 효가 포함되고 생활의 바탕으로 삼았다.
환국5훈, 환웅7훈, 단군8조교 등이 이를 잘 뒷받침한다.
우리국민 정서에 깊이 뿌리박은 효사상의 상징은 만고효녀 심청전이다.
그런데 심청은 백제시대 전기, 전라남도 곡성출신의 역사적 실존인물이다.
본명은 원홍장이고, 맹인 아버지는 원량이었다.
원홍장(심청)은 아버지와 성공대사의 약속 즉 공양미 3백석을 보시하고 눈을 뜨게 한다는 내용에 따라 자기를 헌신한다.
그녀는 쌀 3백석 값을 받고 중국 절강성 주산시 보타도 심가문진(심청마을)에 사는 국제 귀족 상인 심국공 일행을 따라 중국으로 간다.
원홍장은 심국공의 양녀가 되니 이름을 심청으로 바꾸고, 이어서 진나라 혜제의 문명황후가 된다. 진서에는 원희(元姬)로 기록돼 있다.
문명황후는 당시의 관음불교에 심취하여 백제 곡성 관음사에 5백나한, 관음보살상, 소조 금니상 등을 보내고, 심청의 아버지는 눈을 뜨게 된다.
효를 비롯한 신선도 5상의 기본윤리가 복잡다단한 현대사회에도 필요하다.
주제어 : 신선도5상, 환국5훈, 환웅7훈, 단군8조교, 효녀심청, 원홍장, 원량, 심국공, 진혜제, 관음불교
역사적 실존 효녀「심청」소고
歷史的 實存 孝女 沈淸 小考
고 준 환
(경기대 명예교수, 본각선교원장)
1. 서론
2. 효사상과 한국역사
3. 역사적 실존인물 효녀 심청의 본명은 원홍장(元洪莊)
4. 한․중 문화교류
5. 심청 관련 사항
6. 결론
1. 서론
사람이 살아가는 데는 길(道)이 있고, 길이 있어야 한다. 이것이 인간의 윤리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예로부터 인간의 윤리 가운데, 효를 그 기본으로 삼아 왔다. 효는 백행지원(百行之源) 즉 모든 행동의 근원이라고 일러왔다.
효(孝, 파자하면 孝<생각할 고>와 子<아들자>여서, 자녀가 마땅히 생각할 것을 뜻함)는 사전적 의미로는 “부모를 잘 섬기는 일”이라고 한다.
나무의 뿌리와 같은 것이 사람에게 있어서 부모 조상이므로, 사람에게 효도가 없으면 가정과 사회가 무너지게 된다. 현재 우리사회가 그런 위험속에 노출돼 있다.
우리나라 역사를 통하여 흐르는 전통 도맥은 홍익인간(弘益人間 : 인간을 크게 돕는 인간) 광화세계(光化世界 : 빛되게 하는 세계)를 이념으로 하는 신선도(神仙道)라 하겠다.
신선도는 우리나라 상고시대인 환단조선(桓檀朝鮮 : 환국, 밝달국=배달국, 조선)시대로부터 전해 내려오는데, 이는 삼성(환인천제, 환웅천황, 왕검단군)을 공경하고, 3경(천부경, 삼일신고, 참전계경)을 배우며, 3공(심공, 기공, 신공 = 心功, 氣功, 身功)을 수행하여 성통공완, 접화군생(홍익인간 광화세계)하는 길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신선도의 기본윤리를 항상 지녀야 할 5가지로서 5상(常)이라 하는 데, 이는 충(忠, 나라등에 있어 중심이 있는 것) 효(孝, 자녀가 부모를 잘 섬김) 용(勇, 용기) 신(信 : 사회생활에 있어 믿음) 인(仁, 어진 사랑)이다.
이 가운데서 중시 되었던 것이 효사상이다.
이 효사상은 공자의 유교에서는 효경의 오륜에 부자유친(父子有親)으로 나타나고, 석가모니의 불교에서는 부모은중경(父母恩重經 : 부모의 은혜가 귀중하다는 경)으로 잘 표현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효사상은 환국시대 환국오훈으로 표현되고, 환웅칠훈, 단군8조교로 전승된다.
우리나라 역사에서 효자, 효녀 이야기는 부지기수이지만, 첫 이야기는 환단고기의 부루단군때 소련, 대련의 삼년상 효행, 삼국유사의 빈녀양모, 삼국사기의 효녀 지은 설화 등이 있다.
외국에서 유명한 효연기설화로는 인도의 전동자 묘법동자설화, 지옥에 있는 어머니를 구해낸 목건련존자설화, 일본의 소야희 설화, 그리고 우리나라의 관음사 연기설화도 있는 데, 이는 만고효녀 심청과 연계된다.
그런데 한민족에게 모두 친근한 민족의 효녀는 심청전의 심청이다.
한민족에게 청소년기부터 매우 친근하게 정서를 심어준 고전소설은 심청전, 춘향전, 홍길동전 등이다.
심청전은 효녀 심청이 소경인 아버지 심학규를 위하여 공양미 3백석을 받고 상인들에게 몸을 팔아 인당수 깊은 물에 몸을 던졌으나, 부처의 구함으로 바다에서 다시 환생하여 왕후가 되고, 심봉사가 오랜만에 심청을 만나는 반가움에 멀었던 눈이 번쩍 뜨였다는 해피 엔딩의 줄거리로 되어 있다.
2. 효사상과 한국역사
우리나라의 효사상과 교육문화는 상고시대인 환단 조선시대로부터 형성되고, 신선도의 5상이 포함돼 있어, 인간생활의 기초가 되어 있었으며,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효사상의 진원지였다고 말할 수 있다.
환국(桓國, 한국, 한사상의 첫 국가 하느님나라) 제1세 안파견 환인천제는 천부경을 기본으로 현묘지도인 신선도를 창조하고 전해서 밝은 세상을 만들었다.
하느님을 표시한 이름이 환인(桓因)이고 하느님을 한문으로 풀어 쓴말이 “천제(天帝)”이다. 이 환인을 한문으로 ‘안파견(安波堅)’이라고 적었다. 이렇게 적기 전의 우리말로는 ‘아버지’를 뜻한다고 하였다.
하느님은 일찍이 천손인 상고시대의 우리 조상들에게 사람답게 살아갈 교육철학과 큰 가르침으로 방향을 제시하였다. 이른바 “환국오훈 또는 환인오훈(桓因五訓)”이다.
그런데 환인(桓因)의 가르침 에서 중심이 된 핵심이 효이다. 이것이 우리나라의 효사상의 뿌리이다. 그리고 이 세상에 처음으로 알려진 이것이 효를 통한 아름다운 인간미덕과 뿌리정신의 원천이다. 그럼에도 환국에 대한 기록은『삼국유사』에 단편의 기록이 있고, 신라의 승려 안함로(安含老)가 쓴『삼성기』와 고려 때 학자인 원동중(元董仲)이 쓴『삼성기』, 조선조 중종 때의 이맥(李陌)의『태백일사』에 기사가 있을 뿐이며 그 문헌이 희귀하다.
첫째로 하느님을 공경하고 다음으로는 우리 후손을 이어 가게 한 조상을 받들고 나를 낳은 부모님께 효도하라는 것이다. 나머지 3가지 가르침도 모두 효 사상의 반경 안에 들어간다. 그러면 세상의 가르침 중에 가장 큰 환국오훈 즉 환인오훈(桓因五訓)의 내용을 여기에 적어본다.
1) 하느님을 공경하고 뜻을 행함에 게으르지 말아야 한다.(敬動不怠)
2) 조상과 부모에 효도하고 순종하여 거스르지 말아야 한다.(孝順不違)
3) 형제간에 겸손하고 화목하여 다툼이 없어야 한다.(謙和不鬪)
4) 이웃에 성실하고 신의가 있어 속이지 말아야 한다.(誠信不僞)
5) 염치가 있고 의를 행하여 음란하지 않아야 한다.(廉義不淫)
이와 같이 우리의 순수하고도 고유한 효사상은 아무런 외래의 사상과 종교가 들어오기 전에 아주 순수하고 원시적인 우리의 효 교육문화가 세계에서 제일 먼저 비롯되어 백성들에게 교육하기 시작하였다. 이 일이 환국보다도 1단계 발전된 배달국의 거발환(巨發桓) 환웅에게로 계승되어 더욱 발전되어졌다.
환웅천왕이 처음으로 도읍을 세운 곳을 “신불(神市)”이라 하고 나라 이름을 밝달(桓國) 또는 “배달(倍達)”이라 하였으니 이때가 B.C. 3,898년이다. 그리고 배달국의 역년(歷年)은 다음과 같다. B.C. 3,898년에 단국하여 B.C. 2,334년에 멸망했으니 역년은 1,565년간(18대)이다.
제1세 환웅 거발환은 풍백, 우사, 운사인 3대신(三大臣)과 함께 농사를 주관하고 형벌을 집행하고 질병과 선악과 그 외의 인간의 366사(事)를 두루 다스렀다. 인간사와 만물을 순리로 다스려 크게 유익하게 다스리고 교육하였다.
배달국 초기에 고시(高矢)가 최초로 농법을 연구하고 청동기를 제작했음을 알 수 있다. 즉 청동기가 제작되었다는 것은 농기구가 개량되어 농업이 발달되고 전쟁에 사용할 무기의 제작으로 승리로 이끌 수 있는 힘이 된다는 것이다. 여하튼 청동기로 무기를 제작했던 치우천황은 헌원의 대항을 쉽게 물리치고 항복한 그를 제후로 봉했던 것이다. 14대 환웅 치우천왕 때에 상당한 세력을 갖추었던 황제헌원(黃帝軒轅)의 반란을 진압하는 전투에서 쇠로 만든 청동기 무기로 제압하게 된 것이다. 고조선의 옛터전인 4,400년 전의 청동기가 의외로 발굴된 것은 그 시대에 이미 상당한 광역국가가 건국되어 바른 정치가 전개되고 있었음을 입증하는 바라 하겠다.
제1세 환웅 거발환천황은 새로운 문명전환을 위하여 문자발명의 필요성을 느끼고 신지혁덕(神誌赫德)에게 명하여 문자를 만들도록 하였던 바, 그는 눈 오는 날의 사슴발자국에서 암시를 받아 이른바 “녹도문(鹿圖文)”을 창제해 내는데 성공하였다. 그 잔재가 현재 우리나라와 만주에 남아 있다.
녹도문이 나온 지 1,200여 년이 흐른 뒤에 치우천황때에 황제 헌원(軒轅)의 사관(史官)이었던 창힐(蒼頡)이가 배달국에서 명성이 높은 자부(紫府)선생에게서 녹도문을 배워다가 여기에서 암시를 얻어 한자(漢字)를 만들었다. 동이인(東夷人)에 의하여 만든 한자가 밑거름이 되어 세계적인 유학(儒學)형성이 한국과 중국에서 촉진되었다.
또한, 한편으로는 배달국의 녹도문(鹿圖文)이 전승되어 오다가 고조선시대의 3세 가륵단군 2년에 을보륵(乙普勒)박사에게 국문정음(國文正音)을 창제토록 하였다. 창제된 가림토(加臨土)문자, 또는 가림다(加臨多)문자 38자로 발전하였다.
요컨대 배달국의 환웅천황의 학술진흥으로 창제된 녹도문에서 표의문자(表意文字)인 한자와 표음문자인 가림토문자가 나와서 동아시아의 문명을 크게 일으켰다. 가림토문자는 다시 우리 조선조에 와서 세종대와의 학술진흥으로 훈민정음을 창제케 되었는데 역시 가림토 모체가 되었다.
조선왕조실록 25년 12월조에 보면 자방고전(字倣古篆)을 하였다고 적어 놓고 있는 것을 보면 가림토와 녹도문을 참고하였음이 충분히 입증이 된다. 거발한 환웅천왕은 백성들에게 다음과 같은 이른바 “환웅칠훈(桓雄七訓)”을 내렸다. 여기서 보면, 천손민족인 우리 겨레의 당초의 부모는 하느님이요. 하늘과 땅이다.
하느님은 태초에 우리 인간을 낳으시고 만물의 영장이 되게 하고 자손만대 영원히 살아갈 강토를 주셨으니 이를 수호해야 함은 당연한 천명이다. 여기에서 국가를 위한 충이 나오게 마련이다. 부모는 자식을 사랑하고 자식은 부모에게 효도하며 형제를 사랑하고 어른을 공경하며 어린이와 약한 무리에게 은혜를 베푸는 통치원리와 모든 백성들에게 믿음을 주어야 한다고 하였으니 “인류의 보전(寶典)”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 하느님께서 우리 사람들을 사랑하고 효를 통한 큰 가르침을 주셨으니 첫 번째로 하늘을 공경하고 둘째는 부모에게 효도를 해야 한다. 즉 제천(祭天) 보본(報本)해야 한다. 여기에 환웅천왕의 교육철학이 담긴 이른바 “환웅칠훈”을 밝힌다.
이 환웅천황의 큰 가르침은 “환인오훈(桓因五訓)”을 계승한 것이지만 만고의 진리이다. 후세에 유학이 대체로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고 계승한 느낌을 준다.
그러면 환웅천황이 백성들에게 내린 큰 가르침으로 환웅칠훈을 보자.
첫째, 하느님 자손인 모든 백성들은 하느님을 지성으로 섬겨야 한다.
둘째, 부모에게 지극히 효도하여야 한다.
셋째, 아내와 자식은 잘 보호해야 한다.
넷째, 형제는 서로 지극히 사랑해야 한다.
다섯째, 늙은이와 어른은 높이 받들어야 한다.
여섯째, 어린이와 약한 자에게는 은혜를 베풀어야 한다.
일곱째, 모든 무리는 서로 믿을 수 있어야 한다.
거발한 환웅천황은 이 세상에 홍익인간의 이념을 처음에 펴시고 모든 백성들에게 “일곱가지 교훈”을 서약시킨 후에 착한 일을 하는 자에게는 상을 주고 악한 일을 한 자는 벌을 주는 법을 만들었다.
이어서 고조선의 1세인 왕검 단군은 무진년(B.C.E 2,233)에 등극하였는데, 다음과 같은 조서(詔書)를 내렸다. 그 중에 충효교육에 관한 내용으로는 다음과 같다.
너희들은 어버이로부터 태어났으며 어버이는 하늘에서 왔으므로 너희는 어버이를 공경하여야 하늘을 공경하는 것이 되어 나라에 미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곧 충효(忠孝)이다. 너희가 이 도를 잘 본받으면 하늘이 무너지는 일이 있어도 반드시 벗어나 화를 면할 것이다.
배달족 본래의 조상인 하느님을 숭앙하여 경배를 하고 조상신에게 제사하기 위하여 수도인 아사달에 신단인 천제단을 세웠다. 그런데 각 지방마다 소도(蘇塗)를 두어 경당(扃堂)을 설치하였으니 하느님과 민족의 조상신들께서 강토를 주어 우리 후손들이 사랑하고 효도하며 살게 했던 은덕을 보답하기 위하여 효성을 다하여 제사를 지내기 위하여서이다.
이때에 이미 절대적인 존재로서 하느님을 존경하는 종교의식이 신선도가 있었던 만큼 충효가 중시되고 절대적으로 강조되었다.
단군조선의 제1세 왕검단군은 영험하고 큰 덕과 자비로운 성품을 타고나서 하늘의 도가 널리 전개되었다.
뿐만 아니라 사람들을 유익하게 하려고 했던 환웅의 홍익인간 광화세계사상을 보다 확충하여 펴니 자연히 홍익인간이 건국이념이요. 교육이념이 되기 마련이었다. 자연히 천도를 따라 충효 등 정교(政敎)를 펴려고 하니 옛 배달제국의 제도와 교육이 계승되었다.
제1세 왕검단군은 하느님의 큰 가르침과 자신의 철학과 백성들의 의견을 존중하여 형법으로서의 범금 8조와 따로 8조 공법(公法)를 만들어 모든 백성들이 지키게 하였다.
왕검단군은 교시를 내려 “8조의 공법(公法)을 만들어 ‘천부(天府)’라 이르고 이 공법이야말로 자손만대에 영원히 이어갈 수 있는 강전(綱典)으로 삼아 아무도 어겨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단군왕검은 즉위 하던 날(B.C. 2,333무진년)에 조서(調書)를 내려 이른바 “단군 8조교(八條敎)”를 만백성에게 내렸다.
제1조 하느님(하나님, 환인(桓因)의 법칙은 하나일 뿐이니 그 문은 둘이 아니다. 너희들은 오로지 순수한 정성으로 다져진 일심을 가질 때에 통일하면 하나님(上帝)을 뵙게 되는 것이다. 불이문(不二門)이다.
제2조 하느님의 법은 언제 어디서나 하나이듯이 사람의 마음도 언제 어디서나 하나이어야 한다. 이러한 이치로 스스로 살펴보아 자기의 마음을 알면 다른 사람의 마음도 알 수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다른 사람의 마음을 안 후에 그 사람의 마음을 교화하여 하느님의 뜻에 따라서 살게 한다면 이 세상에 어느 곳에서도 잘 쓰이고 이 세상 어느 곳도 잘 다스릴 수 있다.
제3조 너희는 오직 너희 부모로부터 태어났으며 너희 부모조상은 하느님으로부터 생명을 받아 이 세상에 태어났다. 그러므로 너희 부모를 옳게 받들어 모시어 효도하는 것이 바로 하느님을 받들어 모시는 것이 되는 것이다.
부모에 효도하는 것이 나라에 미치게 되니 이것이 바로 충효이다. 너희 중에 하느님을 경배하고 부모에 효도하고 나라에 충성하는 도를 잘 따라 행하는 자는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세상의 종말이 온다 하여도 반드시 하느님의 구원을 받아서 먼저 화를 면할 것이다.
제4조 새나 짐승이나 세상의 모든 온갖 미물도 다 짝이 있고 헤어진 신발도 짝이 있다. 너희 남자와 여자는 원망하지 말고 질투하지 말며 음란하지 아니하고 서로 화합하여 잘 살아야 한다.
제5조 너희들의 열 손가락을 깨물어 보아라. 아프지 않은 손가락이 있는가? 너희 형제는 서로 사랑하여 헐뜯지 말라. 서로 다투지 아니하고 서로 돕는다면 집안이나 나라가 다 크게 흥할 것이다.
제6조 너희는 소나 말을 보아라. 소나 말조차도 서로 먹이를 나누어 먹지 않느냐, 너희도 서로 양보하여 남의 것을 빼앗는 일이 없어야 한다. 함께 일하여도 서로 속이고 도둑질하는 일이 없어야만 나라와 집안이 혼란하지 아니하고 번성할 것이다.
제7조 너희는 호랑이 부족의 무리를 보아라. 사납고 난폭하여 사람다운 성품을 갖추지 못하니 결국 비천하게 몰락하지 않았느냐 너희가 사람다운 성품을 잃고 사납고 교만하여 사람을 다치게 하는 일이 없어야 한다.
항상 하느님의 뜻을 받들어 모든 것을 사랑하라. 너희는 남이 위태로운 것을 보면 도와주고 불쌍히 여겨야만 하며 절대로 약한 사람을 깔보거나 천한 사람을 업신여겨서는 아니 된다. 너희가 이러한 하느님의 뜻을 어기면 오래도록 하느님의 도움을 받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네 한 몸은 물론 네 집안까지도 전부다 멸망할 것이다.
제8조 너희가 만일에 서로 충돌하여 논과 밭에 불을 질러 곡식을 다 태워 없앤다면 하느님과 사람들이 이를 벌한 것이다.
너희가 오물을 아무리 두텁게 감싼다고 하여도 그 냄새는 반드시 새어 나올 수밖에 없다. 너희는 항상 올바른 성품을 경건히 가지며, 사악한 마음을 품지 마라. 나쁜 일을 숨기지 말 것이다. 화가 될 마음을 감추지도 말아야 할 것이다. 너희는 정성 들여 하느님을 경배하고 만 백성이 서로 친하게 지내면 끝없는 행복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너희 모든 무리들은 이 8조의 공법인 천부의 경전을 잘 지켜 행하여야만 한다.
왕검단군은 『천부경』과 『삼일신고』는 한사상으로 이미 굳히고『참전계경』은 홍익인간사상으로 366사를 예절교훈으로 삼아 매일매일의 생활 속에 뿌리를 박았다. 그런데 366사의 여섯째 바탕이 지극한 효다. 왕검단군께서는 한얼(한알․한울)숭배와 조상공경과 사람사랑의 3가지를 자기의 뿌리사상으로 삼는 동시에 배달겨례의 그것으로 가르쳐 주었다.
단군조선의 제도 가운데 화백제도와 신선도 오상은 신라에 이어졌고 (신라 원광법사의 화랑에게 내린 지침 세속5계는 신선도 5상을 변용한 것임) 고구려의 경당에도 신선도 5상이 이어져 교육했으며, 백제에도 5상이 전해지고 그 가운데 효를 상징적으로 실천한 것이 역사적 실존 인물 효녀 심청인 것이다.
3. 역사적 실존인물 효녀심청의 본명은 원홍장
한민족 효도의 상징인 심청전의 주인공 심청은 단순히 소설의 주인공인가? 현재 학계에 보고된 심청전의 이본은 목판본, 활자본, 사서본 등 모두 200여종에 달한다.
그런데 우리나라에 심청과 관련이 있는 곳으로 알려진 곳은 전남 곡성, 옹진군 백령도, 예산군 대흥면, 황해도 황주, 경기도 화성시 서신면 홍법사 등이다.
그 가운데서도 전남 곡성군 소재 관음사 창건의 사적을 적은「관음사 사적기」는 장님 아버지 원량(元良)의 딸 효녀 원홍장(元洪莊)의 아름다운 이야기를 적고 있다. 이는 AD 3백년경 백제시대의 일이며 조선왕조 영조 5년(AD1729) 백매선사가 역사기록을 판각하였으나, 6․25때 소실되었고, 활자본이 남아 그 기록이 20세기에 들어서서 국학계에 알려졌다.
김태준 선생의「조선소설사」이래로 「원홍장」이 심청전의 근원설화로 알려져 왔는데, 화엄사 고경스님등이 관음사 연기설화에 대한 최초의 학술연구 논문을 발표하였다.
AD 2000. 2. 26일 연세대 사회발전연구소는「곡성출신 실존인물 효녀 심청의 역사적․국문학적 고증」이라는 학술용역 보고서를 내었다.
또 한국방송공사(KBS 1TV)의 2000. 4. 1. 역사스페셜「역사추적. 심청의 바닷길」은 그야말로 역사적으로 곡성출신 실존인물 심청을 잘 그려내었다.
예부터 한․중 해상교류가 많았던 만큼 물길이 닿는 서남 해안가에는 여러 지역에 심청 같은 이가 존재했을 것이라고 추정된다. 여러 가지 학설이 있으나, 심청이 곡성출신 실존인물이라는 것은 충남대 사재동 교수가 “관음사 사적기가 심청의 원형”이라고 말한 바, 관음사 사적기(白梅子 지음, 본문 10장 146행). 중국 정사인 진서(晋書, 심청은 元姬로 표현), 주국 주산해국의 영파시지 등 역사기록들과 심청(원홍장)의 탄생 마을로 알려진 전남 곡성군 오곡면 송정리 도화촌 유적, 곡성군 옥과면 선세리 성덕산 관음사 유적, 곤방산 야철지, 심청의 양부이었던 주산해국(일명 회계국) 심국공의 주산시 보타구 심가문진(沈家門鎭), 보제선사, 불긍거 관음원, 심청 성비궁터, 심청공원, 심청이 생애를 마친 보타락가산 수정궁 등의 유물, 유적들이 입증한다.
대흥이라는 고을에 원홍장이라는 장님의 딸이 있었다. 그녀의 아버지 원량은 소년시절에 그만 눈이 멀었다. 비록 눈이 멀었으나 양반의 후예로써 행실이 청렴 강직하고 기개가 고상하여 언어범절이 조금도 경솔하지 아니하니 인근의 사람들이 모두 칭송하였으나 불행은 겹치는 것 이라고 한다더니 성품이 현숙하고 민첩하여 바느질과 품팔이로 앞 못보는 자신을 보양하던 부인이 그만 산고 끝에 먼저 세상을 뜨고 말았다. 앞도 못 보는 장님의 처지로 어린 딸을 등에 업고 이집 저집 젖동냥으로 키운 딸이 바로 홍장이었다. 홍장 또한 성장하면서 성품이 현숙하고 민첩하여 아버지 곁을 떠나지 않고 부축해드렸으며 그의 봉양이 극진하여 모든 범절에 있어 비범한 데가 있었다. 홍장의 효성이 이러하였으니 고을 사람들은 입을 모아 대효(大孝)라 칭송해 마지 않았으며 나라안에는 소문이 자자했고 멀리 중국 땅에까지 알려졌다고 한다.
어느날 장님 원량은 밖에 나갔다가 마침 홍법사(弘法寺) 화주승 성공대사(性空大師)를 만나게 되었는데, 성공스님이 원 봉사를 보더니 “당신과 함께 금강불사(金剛佛事)를 이루었으면 합니다. 부디 큰 시주가 되어 주시오”라고 말하였다. 원봉사는 갑작스런 말을 듣고 어리둥절 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생각해보니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으므로 조용히 대답하기를 “나는 보시다시피 앞을 못 보며 더구나 가난한 처지인데 어떻게 부처님을 위하는 시주가 될 수 있겠습니까?” 라고 하였다.
화주승 성공대사는 다시 절을 하면서 말하기를 “소승이 금강불사의 원을 세워 지성으로 백일기도를 봉행하였는데, 마지막 회향하는 어젯밤 꿈에 부처님께서 현몽하시기를 내일 기도
를 마치고 길을 나서면 반드시 장님을 만날 것이다. 그는 이번 불사에 대단월(大壇越 큰시주)가 될 것이니라 하셨으므로 이렇게 간청하는 것입니다.” 원봉사는 말을 잊고 한참 동안 생각에 잠겨있다가 겨우 입을 열어 “집에는 곡식 한 줌 없고 밖에 나와 봐야 내 땅 한뼘없는 처지인데 무슨 수로 시주를 할 것입니까? 다만 나에게 딸린 것이 있다면 딸자식 하나 뿐인데 이 아이로 금강 같은 불법에 선근 인연이 되고 혹시 대작불사에 도움이 될 수 있다면 데리고 가서 좋은 도리를 생각해 보시오…”라고 하였다.
홍장의 나이 이때 불과 열여섯이었다. 이리하여 화주승 성공대사는 무한 감사의 예를 올리고 원봉사를 따라 그의 오두막으로 갔으며 아버지 원량은 성공대사와 언약한 사연을 말해 주었다. 홍장은 일생 아버지를 봉양할 생각이었으나, 아버지와 자신의 앞날이 걱정되어 애통하게 울었으며 원량 역시 기막힌 심정이 되었다.
실로 산천초목도 울고 일월도 빚을 잃은 듯 하였으며 나는 새와 달리는 짐승 또한 슬피 울부짖는 듯 하였다. 그러나 그녀의 지극한 효심은 곧 불심으로 나타났음인지 비장한 표정을 지으며 급기야는 아버지를 하직하고 화주스님을 따라 나섰다. 아버지인 장님과 딸 홍장의 작별을 가엾고 측은하게 여겨서 마을 사람들도 길을 메우며 옷깃을 적시었다. 원홍장은 화주스님과 길을 나서며 뒤돌아 보이는 고향마을과 평생 모시려하던 아버지도 이제는 영영 이별이라고 생각하니 아득하기만 하였다. 난생 처음 산을 넘고 강을 건너 너무나 오래 걸은 탓으로 피로에 지쳐 바다가 보이는 소랑포(蘇浪浦)에 이르러 잠시 쉬어 가기로 하였다.
홍장과 성공스님은 서쪽 바다를 바라보고 쉬고 있었는데 바다 저 멀리 수평선 위에서 붉은 배 두척이 나타나는가 하더니 질풍같이 이쪽으로 다가오는 것이었다. 나는 화살처럼 순식간에 나루에 다다른 배는 모두 진(晋)나라의 배였고 배에는 금관옥패와 수의를 입은 사자들이 타고 있었다. 그들은 언덕에 앉아 홍장을 뚫어지게 바라보더니 배에서 내려 홍장이 쉬고 있는 곳으로 다가와서 홍장에게 공손히 예를 갖추어 절을 하며 “참으로 우리 황후(皇后) 마마이십니다”. 라고 하는 것이었다. 홍장은 물론 화주스님도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홍장은 얼굴빛을 고치고 “여러분들은 어디서 오신 어른이신데 그런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까?” 하고 물었다. “저희는 진나라 사람들입니다. 영강 정해년(永康 丁亥年 五月 辛酉日) 황후께서 붕어하셨는데 이로부터 성상께서 늘 슬픔을 가누지 못하시더니 하루는 꿈에 신인이 나타나서 말하기를 ‘성상의 새 황후 되실 분은 이미 동국 백제에 탄생하여 장성하였고, 단정하기로는 전 황후보다 더 하시니 이미 가신이 때문에 슬퍼하지 마시오’하고 현몽하시었습니다. 성상께서는 꿈에서 깨어 날이 밝자 곧 폐백 4만단과 금은진보 등을 갖추어 이 두 배에싣게 한 다음 상을 잘 보는 상사를 선발하여 사자로 삼아 조칙을 내리시되, 동국으로 달려가서 황후를 맞이하라 하시었으므로, 소신 등이 외람되이 상명을 받자와 본국을 떠나온 이래 숙야(이른 아침부터 밤늦게까지)로 근심하옵더니, 이제 다행히 성의를 여기서 뵈옵게 되었나이다.
사자의 긴 사연을 듣고 난 홍장은 길게 한숨을 쉬며 탄식하면서 말하기를 “내 한몸 가는 것이야 무엇이 어렵겠소. 그런데 갖고 오신 폐백이 얼마나 되옵니까?” “예, 저기 두 배에 가득 실은 것이 모두 값진 보물이옵니다.” 홍장이 미소를 띄며 말하였다.
“내 몸은 내 몸이 아니옵고, 아버님을 위하여 선근종자(善根種子)를 심어 드리기 위하여 부처님께 바쳐진 몸입니다. 그러하오니 저 두배에 싣고 오신 폐백을 소녀 대신이 이 화주스님께 드리시면 기꺼이 따라 가오리다”하였다.
“예 분부대로 거행하겠나이다” 이때 화주승 성공대사는 참으로 부처님의 가호라고 기뻐하면서 “홍장 아가씨! 아버님의 일은 염려 마시고 가십시오. 소승이 잘 보살펴 드리겠습니다.”
이렇게 해서 싣고 온 보물은 홍법사로 가져가게 하고 홍장은 중국 진나라 사신을 따라 진나라로 가게 되었다.
홍장이 진나라에 당도하여 주산군도 보타도에 머물다가 심국공의 양녀로 심청이 된후 궁안으로 들어가 진나라 황제를 배알하니, 그녀는 둥근 달 같은 얼굴 모습에 별빛 같은 두 눈이 반짝였으며 덕과 지혜를 갖춘 모습이 진실로 황후의 기상이었다.
바다 한 모퉁이에 잇는 동국 백제에 이렇게 아름다운 여인이 있었더란 말인가. 진나라황제는 찬탄해 마지 않았다. 궁중에서는 새 문명황후를 모시는 큰 잔치가 베풀어지고 황후가 된 심청은 품성이 단아하고 자애로운 위의를 갖추었으므로 황제의 총애가 날로 더해갔으며 황후는 항상 장업(淨業)을 닦고 행하기에 힘쓰니, 나라가 편안하며 가난한 자와 병든 자가 줄어들어 온 나라 백성의 칭송이 자자하였다.
“내 비록 타국의 황후에 오른 몸이지만 어찌 조국을 잊을 수가 있으리오…” 그리하여 그는 오십이불(五十二佛)과 오백성중 십육나한을 조성하도록 한 다음 세 척의 돛배에 실어본국에 보내니 그 배는 감로사(甘露寺) 앞 포구에 닿았으며 이를 감로사에 봉안하였다. 이와 같이 그녀의 불교에 대한 신심도 너무나 훌륭하였다.
그 뒤 오랜 세월이 지난 다음 황태자로 하여금 탑을 조성하게 하여 금강사(金剛寺)에 모셨으며 또 풍덕현(豊德縣 현재 경기도 개풍군) 경천사(敬天寺)에도 모셨다.
그 당시 중국 서진 혜제 시대에는 관음불교가 성하였다.
이렇게 본국을 위하여 공덕을 쌓는 한편 황후 자신의 원불로서 관음성상을 조성하여 조석으로 발원하여 모시다가 고향 백제를 그리는 사무친 마음으로 석선에 실어 동국 백제로 띄워 보내면서 서원하기를 “관세음보살님이여 ! 인연따라 제 고향 백제로 가셔서 그들에게 자비와 지혜를 주시고 정업을 닦아 소원을 성취케 하여 주소서…”하는 원력을 세웠다.
그 배는 바다에 표류하기를 한 달 만에 홀연히 바람을 따라 낙안(樂安) 땅 단교(斷橋) 곁에 정박하게 되었다. 얼마 안 되어 이 땅을 지키던 수비병들이 수상한 배로 의심하여 추격하여 붙잡으려 하였으나 관음성상을 실은 석선이 스스로 움직여 바다 멀리 가버렸다. 이 때 옥과(玉果 현 곡성군 옥과면)에 사는 성덕(聖德)이라는 아가씨가 우연히 집에서 나와 해변에 이르렀는데, 저 멀리 해운 중에서 한 척의 석선이 다가오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마치 이쪽에서 끌어 당기는 것처럼 점점 가까워지고 있는 배를 바라보고 있던 성덕은 깜짝 놀랐다. 그 돌배안에는 관음 금상이 번쩍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성덕은 문득 공경스러운 마음이 일어나고 어디든 좋은 자리를 찾아 모셔야 할 것 같아서 먼저 몸을 단정히 하여 예배를 드리고서 관음상을 등에 업으니 가볍기가 홍모(鴻毛 아주 가벼운 것, 기러기의 털)와도 같았다. 성덕은 관음상을 업고 낙안을 출발하여 고향인 옥과땅 관음사로 향하는데 도중에 열두개의 정자를 만나 쉬어갔다.
그런데 산봉우리에 이르렀을 때 관음상이 태산같이 무거워져서 움직일 수 없기에 그곳에 관음상을 안치하여 대가람을 세우고 성덕산 관음사로 하였다.
원홍장과 성덕은 모두 관음의 화신인데, 승려 성공은 홍법사를 중수하였다.
맹인 원량은 딸과의 이별의 아픔으로 눈물을 흘리던중 원홍장이 진나라 황후가 됐다는 소식을 전재주자 갑자기 눈이 밝아져 복락을 누리며 95세까지 살았다.
4. 한․중 문화교류
역사적 실존 인물 성녀 심청(원홍장=원희)은 AD 286년 백제 고이왕때 전남 곡성군 오곡면 송정리 도화촌에서 출생한 것으로 알려졌으며(성출봉 지역설도 있음) 눈먼 아버지를 돌보았다. 곡성 지방에는 출생지로 알려진 대흥이라는 지명이 세 군데가있다. AD 300년 미인 심청은 완도 금일도의 소랑포(부안 내소사 석포)에서 회계국 심국공의 상인들을 만나게 되고 동북아 해로를 거쳐(고려도경을 쓴 서긍․대각국사의천․장보고 등이 왕래한 해로) 심청이 처음 도착한 곳은 중국 절강성 주산군도 정해현이었다. 중국 회계국(중국 주산군도 보타도 일원) 오흥(吳興)의 가족 국제상인 심국공의 양녀로서, 성비(聖妃)로 추천하기 위해 모셔갔다. 원홍장은 이름을 심청으로 바꿨으며, 심청의 심씨는 양부의 성을 따른 것이다.
심청(원희)은 이어 심국공에 의해 진나라 황후로 천거돼 혜제(惠帝)의 후비인 문명황후가 되었는데, 동이족 소호 금천씨가 세운 동해담인(東海郯人)이라 하였다(25史 晋史列傳), 이는 산동성에 있는 담국처럼 중국 동해에 있는 백제 담로인 출신이라는 것이다. 아버지는 위장군 난릉후(蘭陵侯)라 하였다.
AD 312년 중국 회계국 심청은 고국에 관음성상을 단교(지금의 벌교 승주 낙안)로 보내왔다. 심황후는 3남 2녀를 낳았다. 심청은 분쟁이 많은 가운데 혜제가 서거하자, 동북아시아 국제교역의 중심지인 보타도의 심가문진 심가촌에서 생활하다가, 관음성지인 보타락가산 수정궁에 들어가 보살생활을 하다가 생애를 마쳤다.
효녀 심청 이야기를 직접 기록한 국내문헌으로는 관음사 사적기(6종), 심청전(233종), 조선사찰사료, 한국민간전설집, 해동의 불교, 불교설화전집, 국사대사전, 한국민족문화백과사전, 내고장전통가꾸기, 한구관음신앙 등이 있다. 중국 문헌으로는 진서, 태평광기, 한중불교 문화교류사, 영파시지, 보타현지, 보타락가산지, 정혜청지, 변증론 등이 있고, 일본문헌으로는 성덕산 관음사 연기설화의 형성과 변용, 관음사 연혁과 현황보고서 등이 있다.
심청과 관련된 유적과 유물은 곡성군의 관음사, 가곡리 5층 원홍장탑, 오곡면 송정리 심청생가터, 심청우물, 도화천, 심청목욕 옥녀탕(대대로 구전됨), 심청마을 설아살(대장간), 곡성군 곡나야철지(백제7지도제작), 어람관음불상(관음사 소장)과 소량포(금일도), 단교(벌교), 등이고 중국의 심청공원 심가문진, 심가촌, 심수로, 연화양, 성비궁, 영파시, 신라초, 불긍거관, 음원 도화도(도교사원 중심지), 보타도 보제사에 봉안된 어음관음불상 등이 있다. 주산시 심씨 마을엔 아직도 심씨들이 살고 있다.
5. 심청 관련사항
곡성골 출신 심청과 고전소설 심청전 사이에는 몇 가지 차이점이 있는데 그 중에서는 불교전래시기 문제와 인당수에 빠지는 사실이 없다는 것등이 큰 것이다.
삼국사기 등은 우리나라 불교 공전은 AD 372년인 고구려 소수림왕 2년때라고 하나, 심청은 AD 300년 백제 분서왕(서진 혜제 영강년)에 관음상을 보내오고 관음사가 창건되게 했다고 한다.
삼국사기 기록은 불교를 국가에서 공인한 공전일 뿐이다. 실제로 불교는 AD48년 가야 시조 김수로왕의 부인인 허황옥 왕후가 장유화상과 함께 불경․파사석탑 등을 가져온 「가야 1세기 남방 불교 전래」가 있고 더욱이 제주도에는 석가 세존 당시 그 제자인 발타라 존자가 와서 포교했다는 존자암이 있으며 중국 불교 전래가 AD2년이므로 심청 관련 불교 기록에는 문제가 없다고 생각된다.
관음사 연기설화에는 심청전에 나오는 인당수에 빠져 죽는 장면이 없는데, 이는 후대에 심청전을 쓴 사람이 송나라 때 이전의 소설을 모은 창고라 할 수 있는 중국야사 태평광기(太平廣記)에 있는 인신공회 설화를 일부분 가미하고 윤색한 것으로 보인다.
백매자 선사는 또 심청을 충청도 대흥출신으로 기재했으나, 이는 1700년 전 백제국 대방군 대흥현으로 그 당시 이름은 충청도 대흥현이라 할 수 있으니, 지금 전라남도 곡성의 옛 이름이다.
실존인물 심청의 탐구 과정에는 곡성출신 심청 외에, 화성 출신 심청과 황주 출신 옹진 심청 등도 등장한다.
화성 심청은 경기도 화성시 서신면 흥법 마을의 홍랑에 관한 설화로 마을을 구하고 중국에 끌려가 왕후가 되고 자결하고 돌배와 무쇠자수를 보내왔다는 것인데, 심청 얘기와는 다른 후세의 이야기이며, 지금 조계종 용주사 말사인 서신면 흥법사에서는 홍랑각을 세워 이를 추모하고 있다.
황주 출신 심청이 옹진군 백령도 장산곶 인당수에 빠졌다는 것은 종교적․문화적인 요소가 강하다고 할 수 있으며 실증적 자료는 나오지 않고 있다.
옹진군 백령도에는 공양미 3백석에 몸을 던졌다는 인당수와 그녀가 환생했다는 연봉바위등이 있으며, 백령도 진촌리 남산 기슭에는 심청각이 건립되어 있다. 일부에서는 인당수를 변산바다 앞 위도의 임수도와 위도 수성당으로 보고 당제를 지내 안전항해를 기원하기도 한다.
역사적으로 보면, 한국 역사에 있어서 곡성 출신 심청과 비슷한 사례가 있을 수 있고, 그에 관련한 많은 설화를 탄생시킬 가능성이 있다 하겠다.
왜냐하면 우리나라 영산강(나주중심)과 섬진강․보성강(곡성 중심) 줄기를 따라 중국 주산군도(보타도 중심)를 연계하여 동북아 해상무역이 활발하게 이뤄진 것은 비류백제 초기부터이기 때문이다. 중국 영파시 하무도에서 신석기 유적이 발견됐는데 한․중․일 교류는 고대로부터 시작된 것 같다. 2천여개 섬으로 이루어진 주산군도의 주산 해민을 중심으로 백제 담로국인 주산해국이 존재하여 백제에 조공하였으며 특히 백제 근초고왕 27년 정월에 동진이 조공한 이후 모든 지나 남조 정권과 밀접히 교역하였다 한다.
주서(周書) 권 49 백제전에 의하면 “백제는 진․송․제․량때 강좌(江左)에 웅거하였으며(오․월․산동백제)후위가 중원을 차지한 후에는 양측에 모두 사신을 보내어 번(蕃)을 칭하면서 벼슬을 받았다”한다.
심청을 낳은 곡성군은 우리나라 신선도(도교포함) 5상의 하나인 효, 유교 3강5륜의 중심인 효, 불교 부모은중경의 효와 윤회사상을 전파하기 위하여 심청사업을 군 역점사업으로 해 오고 있다.
심청골 곡성군은 학술비를 지원하여 ‘곡성출신 실존인물 효녀 심청의 역사적, 국문학적 고증’이라는 보고서를 내게 했으며, 효운동본부는 2001년부터 해마다 ‘효문화 전국축제’와 ‘심청국제학술 심포지엄’을 열고 있으며 국․도비를 지원받아 심청문화센터와 심청테마마을을 조성하고 단군전 조성사업, 광복유공자 기념공원도 조성하고 있다.
곡성군은 또 심청이 양녀로 간 회계국이었던 중국 절강성 보타구와 우호교류 협약을 체결하여 매년 문화교류를 하고 있고 보타국에 심청 우호공원, 심청사당과 전시관을 조성했다.
농민운동가요 효자로 알려진 고현석 곡성군수는 “심청축제, 심청문화센터, 심청마을의 3개사업으로 출발하여, 효라는 인류의 보편적가치를 추구하는 중심으로 세차례 국제학술대회를 개최하고 중국 보타구와 상호 문화교류를 실행함으로 어느 정도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고 전제하고, 건강하고 풍성한 심청문화가 창조되어 인류문화에 기여하게 될 날을 꿈꾼다고 하였다.
소설 심청전은 조선왕조 때(AD 1544) 옥과 현감을 지낸 김인후의 작품으로 알려졌다.
역사적으로 심청을 기리는 작품은 소설 심청전 뿐만 아니라 동화책, 판소리 심청가, 드라마 심청전, 영화 심청전 등 많이 있으나 심청의 원이름 “원홍장 찬가” 가 그 중에서도 두드러진다. 시인 허연씨가 쓰고 인간 문화재 5호인 국창 성창순씨가 작창하여 심청가 판소리를 CD로 제작하였다. 이를 보면 다음과 같다.
(1) 자색이 예쁜 홍장 그 나이 열여섯에 앞 못 보는 아비 위해 큰 시주되었것다. 화주승 따라가는 길 피눈물로 적시고
(2) 부녀간의 슬픈 이별 고향을 등진 설움 달래며 산을 넘고 고개 또한 넘고 넘어 소량포 언덕에 쉬며 먼바다를 봤거든.
(3) 붉은 빛 배 두척이 나루에 다다르자 금관 옥패 눈부시게 사자들이 내려와서 엎드려 황후마마라 하니 꿈인 듯이 놀랐겠다.
(4) 진나라 임금께서 꿈에서 들은 대로 금은 보화 가득 싣고 동국으로 보낸 이들 한눈에 알아봤다 부처님의 조활세.
(5) 아버님 위한 그 몸 착한 씨앗 되어야지 폐백과 보물들은 홍법사에 시주하고 기쁘게 입궐을 하던 홍장규수 그 얼굴
(6) 둥근달로 보신 임금 별빛으로 뵈던 두눈 귀엽고 아름답고 하늘보다 자애로운 마노탑 삼천이라도 사랑 다 바쳤으니
(7) 황후의 크신 원불 관음상을 지으시고 보내신 그 인연이 낙안포에 닿았으니 어쩌다 성덕아가씨 마중을 받았을따.
(8) 홍모같이 가벼운 듯 등에 업고 돌아오다 대취정에 쉬었다가 새암정에 쉬었다가 구일정(九日亭)에 쉬었다 머무는 동안 모실 곳을 찾았것다.
(9) 백아산도 추월산도 설산도 생각다가 하누제 겨우 넘어 관음사 터를 잡아 그렇게 모셨다더니 크신 공덕 어쩔꼬.
(10) 부처님 높은 은혜 원봉사는 눈을 뜨고 아흔 다섯 장수누려 행복하게 살았다네 홍장도 고국을 위해 목탁치며 사셨다네.
6. 결론
우리는 위에서 우리나라 효사상의 기원과 흐름 그리고 국민의 정서가 깊이 뿌리 내린 만고 효녀 심청이 백제전기 전남 곡성 출신의 역사적 실존인물 원홍장이라는 사실을 살펴 보았다.
한국과 중국사이에 있는 황해를 비롯한 동아시아해를 두고 국제교류가 빈번한 가운데 비류백제이후 국제무역을 할 때 무사항해 기원 등 종교적 의식의 중심지는 주산군도 보타도 보타낙가산 불긍거관음원(관세음보살 주처)이었다.
원홍장은 성공대사와 봉사부친의 약속으로 공양미 3백석을 갈구 하던중, 중국보타도의 귀족이자 무역상인 심국공을 만나 그를 따라 보타도에 가고 심국공의 양녀로서 마음청정(心淸淨)의 의미로 이름을 바꿔 심청이가 된다.
심청(원홍장 元姬는 晋書의 표현)은 진나라 혜제(첫번째 황후 붕어이후)의 문명황후가 된다.
불교를 신봉했던 심청은 고향인 곡성군 관음사등에 5백나한 관세음보살상과 소조금니불상 및 불경등을 보내온다.
필자는 전남 곡성군 옥과면 도화촌의 심청출생가와 우물 및 곡성군 관음사 등지를 답사하였다.
필자는 또 2011년 8월 17일부터 20일까지 중국 절강성 주산군도 주산시 보타구에 있는 심청이 마을(심가문진)과 심청공원인 심원등지를 답사하고 심청공원안에 있는 심청상(전남 곡성군이 자매 단체인 보타구에 기증)에 예배하였다.
필자는 한국교수불자연합회 성지순례단 10명과 함께 상해 옥불사, 영파 아육왕사, 보타도의 불긍거관음원, 보제선사, 법우사 등도 함께 참배하였다.
우리나라는 대한민국 건국 후 홍익인간을 교육이념으로 하였고 기적적으로 민주산업화를 이뤘으나 지금은 서세동점과 천민 자본주의 팽배로 사기횡행 불신사회에 가치질서가 붕괴 된 아노미(anomie) 사회가 됐으며, 윤리적으로도 천하대란이라고 할 수 있다.
앞으로 우리나라가 통일이 되고 세계의 지도국(PAX UN KOREANA) 이 되려면 국학위에 자주성을 높이고, 21세기 최첨단 산업인 BINEESS를 일으키고(BINEESS=BT. IT. NT. Education. Environment. Space. Sea의 약어임) 확실한 윤리위에 각(覺) 인류문명을 창출해야 한다.
동방예의지국으로 공자님도 가기를 원했던 우리나라가 자주적이고 평화스럽게 번영하려면 , 윤리적인면과 법적측면에서 새 가치질서를 확립해야 한다.
윤리적인면에서는 삼강오륜이 파손됐으므로 국가 차원에서 민주적 국민 윤리를 확립하고 그 위에 새로운 교육문화를 창조해야 한다.
그것은 상고시대 이래로 우리전통 도맥인 신선도 5상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하고 특히 만고 효녀 심청의 역사를 알려 바람직한 인간상과 함께 가족사회붕괴를 막아야 한다.
“충(忠)”은 국가나 사회에는 중심이 있고 그 존속 발전을 위해 서로 다름을 전제로 화합 단결를 하면서 힘을 합치는 것이다.
“효(孝)”은 심청이처럼, 문명황후처럼 자기 뿌리인 부모나 조상을 잘 섬기고 다른 사람 인격을 평등하게 존중하며 예(禮)로서 대우하는 것이다.
“용(勇)”은 참되게 살되, 진실을 추구하면서 불편한 진실도 용기 있게 말하여 사회정의가 확립되게 해야한다.
“신(信)”은 사회에 믿음이 없으면 붕괴되므로, 약속은 반드시 지키고 책임을 져야 한다. 하늘이 무너져도 신의는 지켜야 한다.
“인(仁)”은 어진 사랑으로 서로 사랑하여 어릴적부터 남에게 피해주는 일을 절대적으로 하지말고, 아집적인 자기한계를 넘어서서 다른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는 인내심을 키워 가는 것이다.
적어도 나라의 백년대계를 위하여 유치원 시절부터 남에게 피해 안주기, 타인에게 인격적 대우하기, 약속 꼭지키기 운동이 이루어져야 한다.
법적측면에서는 현재 우리 가족사회가 서세 동정과 천민자본주의 팽배등으로 미풍양속이 사라지고 붕괴 되어가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사람이 행복을 추구하고 그 행복은 대부분 사랑의 보금자리인 가정에서 나오므로 건강하고 정겨운 가정형성에 노력해야 한다.
그런데 한국의 가족법인 친족상속법을 보면, 상속관계만 보더라고 부모가 설자리가 없게 되어 있다.
한 예로 전에는 부모를 모시는 자녀는 그에 상당한 상속분을 더 주어 어려워도 편안하게 부모를 모실 수 있게 되어 있으나, 지금 민법은 그렇지 못하다.
지금 친족상속법은 남․녀, 결혼여부에 관계없이 부모재산을 똑같이 나누게 되어 있어 평등성을 전제로 하고 있으며(법정상속), 가업을 일으키거나 부모를 모신 자녀는 기여분을 주게는 되어 있다.
그러나 실제에 있어서 부모가 돌아가시고 난 후 형제 자매사이에 다른이의 기여분을 흔쾌히 인정하는 예를 보기가 어려운게 사실이다. 부모모실 사람이 실종되게 되는 내용이다. 그러므로 이런 규정 등은 효를 중심으로 화목하게 행복한 가족이 되게 민법을 개정해야 한다.
급변하는 세계속에서 발전하는 코리아가 되려면 국민들이 자주성을 가지고 효사상 등 상대적으로 높은 윤리를 가지면서 민족통일과 하나의 평화세계로 나아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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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학술 심포지엄 심청. 곡성군 2001
제2회 심청학술대회 자료집. 곡성군 2002
제3회 효문화학술심포지엄 곡성군 2003
제4회 효문화학술심포지엄 곡성군 2004
제5회 심청문화학술심포지엄 곡성군 2005
<Abstract>
A study on the filial daughter Simchung as a historical person.
The filial piety is the basic ethics that is devotion to the parents. Our country had used the Seen-Sun-Do 5 sang containing the filial piety to the bottom of life from the earliest ancient Hwan-Dan-Chosun.
The traditonal TAO is based on the national bible, namely, Chunbukyung, Samilsingo, Chamjungekyung.
There are Hwankuk-ohun, Hwanwung-chilhun, Dangun-paljokyo.
The thought-symbol of our country's filial piety is the biography of Simchung rooted in Koreans pathos.
However Simchung is the historical person of Julanamdo-Goksung at Baekje Dynasty.
Her original name is One-Hongjang and her blind father is One-Ryang.
One-Hongjang namely Simchung decided her mind devoting for her father's eye to be open for the purpose of sending 300 rice bag to Buddha through Sungkong monk.
After receiving 300 rice bags, she had gone to the China Julgangsung-Jusan City, Bota island following the international trader Simkukgong group.
She became the daughter-in-law of Simkukgong, and next her name is changed to Simchung.
After that, she became the Queen of Emperor Heje in Chin dynasty and so called the Moonmyung Empress.
That was recorded One-Hee in the history of Chin dynasty.
Moonmyung Empress had sent to Goksung Kwanin Temple statues of 500 Arhat, Avalokitasdesvara and the golden Buddha.
At that time, her blind father saw the light thourgh opening eyes.
Seensun-do 5 Sang containing the filial piety is necessary as the basic ethics now here.
Key words : Seensun-do 5 Sang, Hwankuk-ohun, Hwanwung-chilhun, Dangun-paljokyo, Filial piety, daughter Simchung, One-Hongjang, One-Ryang, Simkukgong, Chin-Heje, Avalokitasdesvara Buddh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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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심청은 백제시대 전기, 전라남도 곡성출신의 역사적 실존인물이다.
본명은 원홍장이고, 맹인 아버지는 원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