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권자 중에는 쉽게 권력을 움켜잡거나 통치권이 손바닥으로 굴러 떨어지는 것처럼 정상에 오르는 경우도 있지만 갖은 고초를 다 겪은 뒤에야 간신히 세도를 잡는 예도 적지 않다. 그러나 역사는 거의 예외 없이 험난한 시련을 겪은 집권자에 의해 일대 변혁이 이뤄져 왔다. 러시아의 표토르 대제Pyotr Alekseyevich(1672~1725)도 그렇다.
어렸을 때는 장난꾸러기로 나랏일을 맡길 재목이 못 되는 인물로 여겨졌던 그는 열 살에 등위했으나 누나에게 짓눌려 지내야만 했다. 마치 낙백시절의 대원군을 연상케 하는 이 기괴한 미래의 독재자는 용의주도하게 정세를 판단하면서 누나와의 권력투쟁에서 승리를 쟁취한 뒤 러시아의 영토 확장에 큰 공로를 세웠다. 국력강화를 위해 유럽으로 사절단을 파견한 그는 하사관으로 위장하고 동행해 뉴턴을 비롯한 학자도 만났고, 조선소·공장 등 구석구석을 뒤지면 문명을 습득한 기인이자 모험가로 부각되고 있다(알렉세이 톨스토이 전3권, 미완 <표트르 1세>).
러시아 역사는 그를 대제라고 부른다. 스웨덴을 물리치고는 그 벌판에 페트로그라드를 건설한 장본인으로, 이 기구한 숙명적인 도시는 처음에 스웨덴식으로 페테르부르크Saint Petersburg(1703)라 이름 했으나 이내 독일식으로 페트로그라드Petrograd(1914), 이어 레닌이 죽은 뒤 그를 기려 레닌그라드Leningrad(1924)로 바뀌기도 했다. 그후 1991년 사회주의 개혁의 와중에 시민들의 요구에 따라 본래 이름인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되찾았다. 이 도시는 러시아 1917년 2월 혁명과 10월 혁명의 현장으로,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독일군의 극심한 포위공격을 끝까지 버텨낸 곳으로 유명하며, 건축적인 면에서 유럽에서 가장 아름답고 조화로운 도시의 하나로 명성이 높다.
어느 나라 역사에나 꼭 대왕은 있게 마련이다. 그런 명칭을 가진 집권자는 대개 위압적인 독재자였는데 표트르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그는 러시아 정규군을 청설했고, 서구로의 창을 열게 만들어 아시아적인 러시아를 유럽적 러시아로 바꿨다.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모든 분야에 걸쳐 서구화를 지향했던 그는 심지어 전통적인 러시아식 수염을 깎기를 거역하는 사람에게 수염세를 물릴 지경이었다. 귀족들에게 독일풍 양복을 입혀 프랑스식 연회를 하도록 만든 것도 표트르였고, 기독교를 철저히 국가기관화한 것도 그였다.
비판적인 관점에서 조명 받아 왔던 표트르 대제에게 휘황찬란한 스포트가 쏟아진 것은 이른바 스탈린의 영향이었으리라. 자신을 새 역사의 창조자로 평가하도록 유도하는 방법으로 스탈린은 표트르를 거론했는데, 마치 마오쩌둥이 진시황을 재평가한 사실과도 같은 선상에 있다. 알렉세이 톨스토이의 대작 <표트르 1세>는 이런 시대적인 배경을 염두에 두고 읽을 필요가 있다. 실제로 이 시기에 표트르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는 절정에 이르렀다. 프로코포비치 대주교는 기독교에 대한 표트르의 억압정책에도 불구하고 그 진보성을 찬양한 문인으로 유명하다. 이 성직자 문인은 표트르를 가리켜 삼손, 모세, 솔로몬이라고 칭했으나, 만년에는 도리어 집권층 내의 많은 적대세력에 둘러싸여 그리 행복하지는 못했다고 전한다.
푸시킨은 서사시 <청동의 기사>에서 대홍수가 난 페테르부르크 시가지에서 절망에 싸인 한 소시민적인 관리가 표트르의 동상을 보는 순간 그 비겁을 질타하는 환청을 듣고 발광해 죽음에로 내몰리는 이야기를 한다. 푸시킨은 이밖에도 표트르 이후의 이야기인 <보리스 고두노프>란 희곡을 섰는데, 둘 다 표트르 대제에 대해 긍정적인 입장을 나타낸다. 자유사상과 진보의 개념으로 표트르를 본 것이다.
그러나 메레주코프스키는 3부작 <반그리스도, 표트르와 알렉세이>에서 꼭 긍정적이지만은 않다. 제1부 ‘배교자 유리아노스, 또는 신들의 죽음’, 제2부 ‘레오나르도 다빈치, 또는 신들의 부활’, 제3부 ‘반그리스도, 표트르와 알렉세이’는 그 제목처럼 역사는 기독교와 비기독교가 교체한다는 관점을 취한다. 여기서 메레주코프스키는 표트르를 러시아 근대화의 아버지라는 어마어마한 공적에도 불구하고 아들을 죽인 반기독자로 평가하고, 그 대신 희생당한 알렉세이를 기독의 부활로 파악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