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늘은 일본의 전국시대(센코쿠 지다이)의 유명한 세명의 호걸을 소개해보자 합니다. 이 세명은 일본에서 아직까지도 막대한 영향력 그리고 방대한 역사적인기록이 있기 때문에 이 곳에 다 적진 못하고 간단하게 추려서 그 쇼군의 성품이나 역사적인 사건을 정리 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1. 오다 노부나가
서양의 선교사가 그린 오다 노부나가의 초상화
혼란스러웠던 전란시대 속에서 나타난 지방 세력이 있었는데 이를 센코쿠 다이묘라고 합니다. 이들 세력 가운데 ‘전 일본 통일’ 이라는 야망을 가진 한 사나이가 있었는데 그가 바로 오다 노부나가입니다. 1998년 기무라타쿠야가 야심차게 연기했던 캐릭터 ‘오다 노부나가’ 풍운아, 다혈질, 불같은 성격 등의 주로 그가 가진 이미지는 날카롭고 야망이 높으며 성격이 급한 그야말로 일본 통일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인물입니다..
그는 1573년 무로마치 막부를 멸망시키고 당시 쇼군을 교토에서 쫓아냄으로서 권력을 잡았어요. 그 후 오다는 당시 '다이묘' 중 최대 세력중 하나였던 이미가와와 대립하는 관계에 있었고, 도쿠가와 이에야스 등은 그가 살해되기 전인 20년간 그와 동맹을 맺기도 했어요. 도요토미 히데요시도 오다의 가신으로 있었구요. 물론 아사쿠라 가문등의 반 노부나가 파가 그를 공격했지만, 아네가와강 전투, 나가시노 전투 등에서 대승을 거둬 통일 기반을 다졌습니다.
1582년 라이벌이었던 다케다 가문을 멸망시킴으로써 일본 통일을 눈앞에 두었을 시점, 그는 혼노지라는 절에 머무르게 됐는데 같은 해 6월 가신 아케치 미쓰히데(明智光秀)가 오다를 배신해 기습을 하게 되었어요. 그 수를 당해낼 수 없었기에 자결함으로써 오다의 불같은 삶은 그렇게 막을 내렸습니다. 이런 말이 있죠. ‘적은 밖이 아닌 내부에 있다’ 이 말이 사실은 ‘적은 바로 혼노지(내부)에 있다’에서 유래한 말이라고 한답니다~
2. 도요토미 히데요시
풍신수길! 많이 들어본 위풍당당한 이 이름이 도요토미 히데요시라는 건 아십니까? 오다 노부나가 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그의 가신이었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새로운 권력자로 떠오르게 됩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오다 노부나가 의 가신이었지만, 농민의 아들으로 태어나 출신 신분은 매우 낮았습니다. 출신신분이 너무 낮아 원숭이라고 불렸다는 일화나 추운 겨울에 얼어버린 오다 노부나가 의 신발을 품에 안아 녹였던 일화는 유명하지요~ 그러나 그는 원래 있던 하시바 히데요시 에서 도요토미의 성을 하사받고 능력을 발휘하기 시작합니다.
그의 주군이었던 오다 노부나가 가 혼노지의 변으로 죽어 주군의 복수를 위해 도요토미는 대군을 이끌고 교토에서 야마자키 전투를 일으켰습니다. 여기서 배반자 아케치 미쓰히데를 죽이고 오다 노부나가 의 반대세력을 차례로 격파시킴으로서 오다 노부나가의 뒤를 이어받게 됩니다.
그는 서로 다른 계급이 섞이는 것을 금지하는 히토바라이령을 내려 특권 지배층이었던 부시계급을 보호했고, 농민이 장사하는 것도 금해 농업생산량을 유지시켰습니다. 물론 군인-농민도 철저히 구분해 권력의 기반을 다졌고. 오사카의 명물이 된 오사카성은 당시 도요토미가 그의 커진 권력을 과시하고자 건축한 성 입니다.~
그의 업적에서 오류가 있다면 바로 우리 조선과의 관계입니다. ‘임진왜란’을 일으킨 주범이기 때문이지요. 명나라를 치기 위해 조선을 꼬득이던 도요토미는 조선이 말을 듣지 않자 그대로 임진왜란을 일으켜 버렸어요. 일본 통일을 이룩해 자신감이 넘치던 그가 아예 조선까지 차지해 다이묘 들 에게 나눠줄 심산이었지요. 1592년 시작한 임진왜란은 조선의 명장 이순신 장군의 공으로 일본에게 큰 타격을 입혔고, 도요토미가 98년 병으로 죽자 7년간 전쟁은 막을 내리게 됩니다. 도요토미가 죽기 전 경쟁자였지만, 가장 높은 신하(다이로)였기도 한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그의 늦둥이 히데요리를 맡기게 됩니다. 도쿠가와는 임진왜란에 보내지 않은 군대를 가지고 있었고, 250만 석 이상의 다이묘를 소유한 2인자였기 때문에 도요토미가 죽고 난 후 그의 시대를 맞이하게 됩니다.
오다 노부나가 의 시대 때 부터 도요토미의 시대까지 기나긴 시간동안 세력을 축적했던 도쿠가와 이에야스. 그는 도요토미처럼 서둘러 내부의 적, 외부의 적들을 처치하기 보다는 ‘천천히’의 방법을 택했습니다. 당시 도요토미가 죽고 그의 아들 히데요리를 추대하려는 이시다 미쓰나리 주축의 친 도요토미 파와 그의 반대 파 새로운 시대를 개척하자는 반 도요토미파가 대립구도를 형성했습니다. 친도요토미 파의 이시다는 도쿠가와에게 도움을 청하지만 지방으로 쫓겨나자, 도쿠가와 에게 대항하는 서군(西軍)을 만들어 대결하려 했습니다. 도쿠가와는 이에 대항해 동군(東君)을 만들었습니다.
세키가하라 전투의 치열했던 모습
이들의 대결은 1600년 10월 21일 일본 역사상 최대규모의 세키가하라(関ヶ原の戦い) 전투로 이어졌습니다. 전투는 하루만에 도쿠가와의 승리로 끝이 났고, 도쿠가와는 사실상 패자(覇者)의 자리에 올랐습니다. 도쿠가와는 도요토미 세력을 몰아내 일본 천하를 통일했지만 히데요리를 해치지 않았으므로 명분, 실리까지 유지했습니다. 나름의 이미지 관리라고 할 수 있지요^^;; 세키가하라 전투가 끝나고 1603년 도쿠가와는 에도에 부시정부(막부)를 세우고 스스로 쇼군이 되어 에도시대를 개창했습니다.
도요토미 가문을 멸망으로 이끈 호고지 재건 문제, 그 호고지
그러던 사이 오사카성의 다이묘로 지내던 도요토미의 아들 히데요리는 성인으로 성장해 도쿠가와에 위협이 되기 시작했습니다. 도요토미의 가문의 상징이었던 호고지((方廣寺) 재건을 빌미로 도쿠가와는 히데요리를 몰아낼 구실을 만들었고, 히데요리는 1614∼1615년 두 차례에 걸쳐 오사카[大阪]전투를 일으켰습니다. 그러나 히데요리[秀賴]를 중심으로 한 도요토미 세력은 도쿠가와에게 완전히 멸망했고, 도쿠가와는 천하통일을 완성하게 됐습니다.
자신의 반대세력을 누르기 위한 철저한 다이묘 등급제를 실시했고, 덴노가 아닌 쇼군의 위엄을 강조하여 덴노를 은둔시켜 버리는 등 자신에 대한 충성을 강요했습니다. 센킨고다이(인질제도), 쇄국 정책, 병농분리 등으로 자신의 세력에 위협이 되는 것들을 애초에 차단시켰으나, 새로운 문물을 받기 위해 조선통신사를 운영하기도 했습니다.
‘손 안의 새가 울지 않는 다면 이들은 새를 어떻게 했을까?’ 라는 질문에 불같은 성격의 오다 노부나가는 ‘울지 않는 새는 가치가 없다’며 바로 죽여버리고,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꾀를 부려서라도 새를 울게 만들며,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손 안의 새는 도망가게 할 수 없으니 울 때 까지 기다린다는 일화입니다. 이들의 성격을 잘 나타내주는 글귀였죠. (출처 : 먼나라이웃나라 일본2 편)
우리나라에서 전쟁에 큰 공을 한 위대한 장군이 누구냐고 물어본다면 단연 “이순신 장군”이란 답이 나옵니다. 그러나 일본에서는 싸움이 일어날 정도로^^; 난감한 질문이라고 합니다. 그만큼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일본 통일에 막대한 영향력을 준 인물이라고 볼수 있겠습니다.?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스, 일본 통일, 일본 전국 시대, 일본 역사
|
첫댓글 러시아로 가는 철도를 빠른시일내에
구축해야합니다.
구축만된다면 일본에겐 치명타가 될 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