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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8장
27 그후 예수께서 제자들과 카이사랴 빌립보의 여러 고을로 가시면서 도중에 제자들에게 물어 말씀하시기를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말하느냐?”고 하시니
28 그들이 대답하기를 “침례인 요한이라고 하며, 또 어떤 사람들은 엘리야라고 하며, 또 어떤 사람들은 선지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라고도 하나이다.”라고 하더라.
29 주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 말하느냐?”고 하시니, 베드로가 대답하여 주께 말씀드리기를 “주님은 그리스도시니이다.”라고 하더라.
30 그러자 주께서는 자기에 관하여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당부하시니라.
31 또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아야만 된다는 것과 장로들과 선임 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배척을 받고 죽임을 당하게 되며, 삼 일 후에 다시 살아나실 것을 그들에게 가르치기 시작하시니라.
32 그 말씀을 드러나게 하시니, 베드로가 주를 붙들고 말리기 시작하더라.
33 그러나 주께서 돌아서서 제자들을 보시고 베드로를 꾸짖어 말씀하시기를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하나님의 일들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일들을 생각하는도다.”라고 하시니라.
카이사랴 빌립보는 이스라엘 최북단의 헤르몬산 기슭에 있는 성읍이었다. 카이사랴 빌립보라는 이름은 티베리우스 카이사와 트라코니티 지방의 영주 빌립의 이름을 따서 붙여졌다(눅 3:1을 보라). "27절의 "여러 고을들"은 여호수아서 15, 19장에서처럼 그 성읍 바깥의 촌락들일 것이다. 마 16:13에서는 그 지역을 "카이사랴 빌립보 지경"이라 언급한다. 오늘날 지경에 해당하는 단어는 "교외"이다.
27절은 이렇게 말씀한다. "도중에 제자들에게 물어 말씀하시기를." 달리 말하면 일행이 잠시 도로에서 벗어나 있던 중이었다. 마가는 왜 그들이 길에서 떠나 있었는지 기술하지 않는데 누가는 그 이유를 설명한다: "주께서 혼자 기도하고 계실 때"(눅 9:18).
어떤 면에서 보면, 예수께서 갑자기 기도회 자리를 마련하신 것은 제자들에게 이 질문을 하시고자 함이었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말하느냐?" 제자들이 주를 바라보는 관점과 대중들이 주를 보는 관점이 달랐기 때문에 이 질문은 새삼 어떤 정보를 확인하기 위함은 아니었다(29절을 보라).
그 질문에 대한 제자들의 대답은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자유주의자들과 현대 근본주의자들의 관점과 완전히 달랐는데 나는 6:14-15 주석에서 그 대답에 대한 주석을 했었다. 여기서 내가 지적하고 싶은 것은 주의 사역에 동참했던 증인들이 예수를 바라보는 관점은 온실 속의 화초나 인큐베이터 속의 미숙아 같은 오늘날의 크리스찬 대학과 신학교 교수들의 관점과 확실히 달랐으리라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직접 본 사람들에게 각인시키신 이미지는 결코 부드럽고 나약하며 온화하고 소심한 모습이 아니었다. 주께서는 교황이나 성공회 감독과 같이 행동하지 않으셨다. 주께서는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대학교"의 교수들처럼 그들의 "경건한 학교"에 혼란을 줄 말이나 행동은 절대 하지 않는 위선자가 아니셨다. 주께서는 표를 얻기 위해 유세하는 정치인들처럼 행동하지도 않으셨다.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설교를 직접 접한 사람들은 그분이 성경에 나온 선지자들 가운데 가장 투박한 스타일이라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여러분이 스튜어트 커스터,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조엘 오스틴, 릭 워렌, 노만 빈센트 필, 그리고 로버트 슐러 같은 사람이라면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닮지" 않은 것이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신앙인의 모범으로 제시하신 그 사도의(딤전 1:16; 고전 11:1) 말은 사람들에게 "서툴고"(고후 11:6) "하찮다"(고후 10:10)고 여겨졌다. 여러분이 따라야 하는 "그리스도의 온유한 영"은 이런 것이다.
6:14-15로 돌아가서 보면 거기에 나온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관점들은 모두 대중이 바라보는 입장이었다. 본문에서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외통수에 몰아넣고 그들의 의견을 물어보신다. 거진 3년 동안 주를 따랐던 그들이 주님을 누구라고 있었던가? 베드로가 제자들을 대표하여 대답했다: "주님은 그리스도시니이다"(29절). "그리스도"는 메시아의 헬라어 단어로서(요 1:41) 메시아는 이스라엘의 구주와 왕으로 기름부음 받으신 분을 뜻한다. 베드로가 요 1:41에서 처음 예수님과 대면할 때 그분에 대해 소개받았던 말이 이것이었고 3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음에도 베드로의 그 관점은 한 치도 바뀌지 않았다.
누가복음에는 베드로의 고백이 좀더 정확히 기술되어 있다. "하나님의 그리스도시니이다"(눅 9:20). 왜 그것이 중요한가? 예수 그리스도 자신에 의하면 세상에는 하나님의 그리스도가 아닌 많은 "그리스도들"(마 24:5, 24)이 있기 때문이다. 사탄의 거짓 그리스도가 적그리스도이다. 사도 요한에 따르면 적그리스도의 "선두주자들"은 "지금도" 여기에 많이 있다(요일 2:18). A.D. 300년 이후 생겨난 단일 교회 안에만 233명의 적그리스도들이 있었다(교황들).
마 16:16은 베드로의 고백에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어구를 추가한다. 이 고백은 예수께서 자신이 생명의 빵이라는 강론을 하심으로써 많은 제자들이 주를 떠난(요 6:66-69) 후에 베드로가 했던 고백과 같다.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은 예수께서 "그리스도, 곧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단지 "믿을" 뿐 아니라 "확신"했다. 때로 완고한 마음 때문에 그들의 믿음이 퇴색되기도 했지만 제자들은 예수께만 "생명의 말씀들"이 있음을 잘 알고 있었다.
주 예수 그리스도에 따르면 이 고백은 성부 하나님으로부터 계시받아야만 할 수 있는 것이었다(마 16:17). 바울은 이와 동잉ㄹ한 계시를 하나님께로부터 직접 받았다(갈 1:15-16 참고. 행 9:19-20). 이 계시는 베드로와 바울에게만 주어진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영생을 얻는 어떤 죄인에게나 주어지는 것이다(요일 4:2, 13-15, 5:1, 9-13).
"그러자 주께서는 자기에 관하여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당부하시니라"(30절). 즉, 주께서 그 그리스도, 곧 메시아라는 사실을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하신 것이다(마 16:20; 눅 9:21). 왜 그러신 것인가? 그 가르침이 로마에 대한 반역으로 간주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라는 칭호는 정치적인 것이다. 예루살렘에 도착한 현자들의 질문이 무엇이었는가? "유대인의 왕으로 태어나신 분이 어디 계신가?"(마 2:2). 헤롯이 예수를 죽이려 했던 이유가 그것이었다. 유대인들이 예수를 붙잡아 빌라도 앞에 데려가서 고소했던 죄목은 주께서 자칭 "그리스도 왕"(눅 23:2)이라 했다는 것이었고 폰티오 빌라도가 예수께 한 질문도 "네가 유대인의왕이냐?"(요 18:33)는 것이었다. 빌라도가 예수를 풀어주려 하자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그를 이런 말로 협박했다: "당신이 이 사람을 놓아주면 당신은 카이사의 친구가 아니니이다. 자신을 왕이라고 하는 자는 누구나 카이사를 대적하여 말하는 것이니이다"(요 19:12).
따라서 예수께서는 제자들이 주의 메시아와 그리스도라는 칭호를 공공연히 선포하고 다님으로써 그 말이 로마 점령군의 귀에 들어가고, 주님께서 로마 점령에 대한 거부 운동을 확산시키려 한다는 오해를 주지 않으려 하셨다(행 5:36-37을 보라). 군중들의 의견보다는 예수님 자신이 주의 메시지를 전파하도록 임명하신 사도들의 증거가 더 권위 있는 증언으로 간주되어야 맞다.
"...그들에게 가르치기 시작하시니라"(31절). 그리스도의 공사역 기간 중 처음으로 주께서는 소위 그리스도의"고난"(행 1:3), 즉 그 분의 죽으심, 장사되심, 그리고 부활하심에 대한 구체적인 이야기를 하신다. 인간적 관점에서 볼때 이것은 깜짝 놀랄 일이다. 주께서는 자신의 죽음에 대한 여섯 가지 세부 사항들을 말씀하셨고 그것들 모두는 정확히 성취되었다. 본문에 생략된 다섯 가지의 세부 사항이 눅 18:32에 나온다. 여러분은 그렇게 할 수 있는가? 여러분이 자살을 계획하고 있다면 자기 죽음의 형태에 대해 예고할 수 있겠으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추측이지 반드시 그렇게 이뤄진다는 뜻은 아니다. 많은 남녀들이 자살을 시도하다가 미수로 그친다. 어떤 사람이 총으로 자기 머리를 쏴서 총알이 두개골을 관통했는데도 이례적으로 살아남을 경우가 있다. 또한 여러분이 자살 예고를 하고 자살한다면 그것은 자기가 예언하고 자기 예언을 스스로 성취한 것이므로 "자기 충족 예언"(self-fulfilling prophecy) 밖에는 안될 것이다.
예수께서는 인간적 관점으로 봤을 때 전혀 자신이 환경적 변수를 통제하실 수 없는 열한 가지의 세부 사항으로 자기 지상 삶의 마지막 사건들을 말씀하셨다. 주께서는 자신의 미래를 정확히 예언하셨는데 이것이 참 선지자의 징표이다(참고. 신 18:22).
마호메트는 자신의 미래를 전혀 예언하지 못했다. 마호메트에 의해 남편과 가족이 몰살당한 한 유대인 여인에 의해 마호메트는 독에 중독되어 있었다. 그는 자신에게 죽음이 언제 찾아오는지 전혀 감을 잡지 못했다. 그는 치유를 위해 기도했고, "가브리엘"에게 부탁하여 알라께서 그를 치유해 주시도록 해 달라고 했으며, 그가 알고 있던 최고의 처방약인 자신의 "치유의 손"을 자기에게 얹었지만 어쨌건 그는 대책없이 죽었다.
마호메트는 선지자라 할 수 없는 자였다. 그는 한 여인이 자신에게 독을 주입하리라는 사실과 그 독이 약 2년에 걸쳐서 그의 건강을 앗아갈 것이라는 사실, 어떤 약도 그에게 듣지 않으리라는 것, 또는 알라가 그의 치유의 기도를 듣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전혀 예언하지 못했다. 그는 자신의 개인적 미래에 관한 지식에 관하여 완전한 어둠 속에 있었다. 모세는 자기가 언제 죽을지 알았고(신 31:14) 여호수아도 알았다(수 23:14). 엘리야는 자기가 언제 하늘로 떠날 것이고 어떻게 옮겨질 것인지 알았다(왕하 2장). 바울은 자신이 언제 죽을지 알았고(딤후 4:6) 베드로는 자기가 언제, 어떻게 죽을지 알았다(벧후 1:14). 명백히 모세, 여호수아, 엘리야, 바울, 베드로,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는 마호메트보다는 수만 배 더 확실히 예언자였다고 하겠다.
여러분, 나는 누군가의 종교나 "믿음"을 추종하기 때문에 성경을 믿는 게 아니다. 나는 과학적, 수학적 사실을 근거로 성경을 믿는다. 나는 이 이야기를 자주 반복해 왔지만 이것은 복기할 가치가 있는 주제이다. 성경은 확률적 개연성에 근거한 수학의 법칙을 통해 진리임이 입증된 책이다. 휘튼 대학의 수학 교수인 피터 스토너가 자신의 강의를 듣는 학생들에게 이런 과제를 냈다. 그는 한 사람의 생애에 성취될 48개의 예언들이 그 사람이 태어나기 400-1,500년 전에 기록되고 그 예언들 전부가 정확히 성취되는 확률적 개연성이 얼마나 되는지 계산해 보라고 했다. 피터 스토너와 그의 제자들은 구약에 기록된 48개의 예수 그리스도 초림 예언들이 정확히 성취될 확률이 얼마나 되는지 계산해 보았다. 그 확률은 10의 157승분의 1이었다. 그것은 10의 뒤에 157개의 0이 붙는다는 말이다.
이것은 자연적으로 성취될 확률이 전혀 없다는 뜻이다. 10의 50승분의 1만 되어도 어떤 사건은 우연히 일어날 수 없다. 사실 우리가 살고 있는 우주의 3배가 되는 공간에도 10의 157승의 전자를 담을 수 없다. 성경의 성취된 예언들을 자연적으로 설명할 방법은 전혀 없는데, 코란과 같은 종교 경전들에서는 이런 현상이 일어난 적 없으며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우리는 역사 속에서 성취된 성경 예언들을 말하고 있는 것이며 초역사적 미래에 위치한 최후의 심판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31절로 돌아와서: "삼 일 후에 다시 살아나실 것." 여러분이 이 사실을 믿는 크리스찬인가의 여부가 여러분의 "종교"를 세상 다른 종교들과 구별해 준다. 마호메트는 죽은 시체로 남아 있지만 모슬렘들은 그 사실에 영향받지 않는다: 모슬렘은 마호메트가 죽은 자들로부터 부활하는가와 상관없이 훌륭한 모슬렘이 될 수 있다. 불교도도 마찬가지로 선한 불교도가 될 수 있다. 어떤 카톨릭 교도도 그들의 마리아가 죽어 있다는 사실 때문에 갈등하지 않는다(나는 피오 12세가 마리아 "몽소승천"을 선언하기 이전 1,400년 동안 카톨릭 교도들이 그 교리를 믿지 않았음에도 그들의 종교에는 아무 문제도 없었다는 사실을 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무덤에 남아 계시다면 여러분은 선한 크리스찬이 될 수가 없다.
"그러므로 우리가 죽음 안으로 침례를 받아 그와 함께 장사되었으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인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들로부터 일으켜지심과 같이 우리도 또한 생명의 새로움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롬 6:4).
부활이 없다면 "생명의 새로움"도 없다. 부활이 없다면 여러분은 여전히 지옥을 향해 가고 있는 것이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일으켜지지 못하셨다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너희 죄들 가운데 있는 것이라"(고전 15:17).
크리스찬의 종교는 그것의 창시자이신 분이 살아 계시다는 사실에 근거하기 때문에 크리스찬의 상황은 유별나다.
예수께서 자신에게 일어날 일에 대해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후에 "베드로가 주를 붙들고 말리기 시작하더라"(32절). 마가는 베드로가 한 말을 인용하지는 않지만 마태는 그것을 기록했다: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 이런 일이 결코 주께 있어서는 아니되옵니다"(마 16:22).
베드로의 말은 그의 입장에서 최상의 선한 의도로 한 것이다. 그는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을 저지하려는 목적으로 이 말을 한 것이 아니라 단지 그의 주님이 잘 되시기를 원한 것이다. 그는 예수님을 사랑했기에 그 분이 고통당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러나 그가 "하나님은 사랑이시라"고 떠벌리는 여느 은사주의자나 현대 성경 역본 번역자들처럼 말하는 순간 그것은 사탄에게 영감받은 말이 되었다.
베드로는 자신의 감정과 성경이 상치될 때 성경을 부정하려고 하는 나쁜 습관이 있었다. 최후의 만찬 자리에서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는 모두 오늘 밤 나로 인하여 실족하게 될 것이라. 기록되기를..." 라고 하시면서 그들에게 슼 13:7을 인용하셨다(14:27). 베드로는 주님의 그 말씀에 대해 이렇게 반응했다: "주여, 저는 성경에서 그렇게 말씀하는 줄 알지만 원문의 뜻은 저를 제외한 모두가 그렇다는 것입니다"("비록 모두 다 실족할지라도 나는 그렇지 아니하겠나이다" - 14:29). 본문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주여, 저는 당신이 고난당하실 것과 죽으시고 부활하실 줄 알지만, 그럼에도 그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이것이 무엇인가? 성경을 모순된 책인 것처럼 만드는 사탄의 수법이다 - "참으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창 3:1).
33절의 의미는 로마 카톨릭에게 매우 충격적인데 만일 로마 카톨릭 교회가 시몬 베드로라는 반석 위에(카톨릭이 마 16:18을 해석하는 방식대로) 세워졌다면 카톨릭 교회는 사탄 위에 세워진 것이기 때문이다. 마 16:18의 문맥상(마 16:23) 그것이 맞다. 만일 시몬 베드로가 첫번째 교황이라면 교황 무류성의 가르침은 웃음거리인 것이다. 시몬 베드로는 교리적으로 틀릴 수 있었고, 그는 한 번 이상 실수했다(갈 2:11-14을 보라).
그렇다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크리스찬이 틈을 보이면 사탄이 그를 이용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고후 2:11). 성령께서 성도 안에 충만하시듯이(엡 5:18) 사탄도 크리스찬을 가득 채울 수 있다(행 5:3). 크리스찬은 "마귀에게 틈을"(엡 4:27) 줄 수 있다. 크리스찬은 "마귀의 정죄함에로 빠질"(딤전 3:6) 수 있으며 "비방과 마귀의 올무에"(딤전 3:7) 빠질 수 있다. 여러분 크리스찬들이 "성령 안에서 행하"(갈 5:16)고 있지 않고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지 않는다면(롬 6:13), 또 "마귀를 대적"(약 4:7)하지 않는다면 단지 여러분 안에 성령이 계시다는 사실만 가지고는 아무 의미가 없다.
"너는 하나님의 일들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일들을 생각하는도다"(33절). 사탄은 "이 세상의 신"(고후 4:4)이기에 그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요일 2:16)에 개입한다. 어떤 일들을 말하는가?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생의 자랑"(요일 2:16)이다. 그 일들은 "아버지께 속한 것이 아니라 세상에 속한 것"(요일 2:16)이다. 그 세 가지는 "사람들의 일들"이지 하나님의 일들이 아니다.
34 주께서 무리를 제자들과 함께 불러 말씀하시기를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35 누구든지 자기 생명을 구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생명을 잃으면 구하리라.
36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자신의 혼을 잃는다면 무슨 유익이 있겠느냐?
37 또 사람이 자기 혼을 무엇과 바꾸겠느냐?
38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나와 내 말들을 부끄럽게 여기면, 인자도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자기 아버지의 영광으로 올 때 그 사람을 부끄럽게 여길 것이라.”고 하시더라.
31-33절에 따라오는 본문이 어떤 것인지 살펴보라. 예수께서는 자신이 죽임당하실 것을 말씀하신 후, 또 베드로가 자기 우려 때문에 주의 말씀을 거부하려 했던 그 다음에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34절). 이 말씀은 일차적으로 주의 제자들에게 향하고 있지만 또한 갈보리 사건 이편에서 그리스도를 따르고자 하는 어떤 사람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이 말씀의 표현에 유의하라: 나를 따르려거든(follow after me)이 아닌 "나를 따라오려거든"(COME after me)이다. 이 말씀은 주의 죽으심과 부활 이후에 그리스도를 따르고자 하는 어떤 사람에게도 적용된다. "십자가"가 주께서 죽으실 방식을 가리키는 것임에 유의하라.
34절에서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지켜야 할 세 가지 원칙을 제시하고 있음을 보라.
1. "자기를 부인하고." 예수께서 "내 뜻대로 하지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눅 22:42)라고 하셨던 것처럼 성도도 하라는 것이다. 세상 철학 가운데는 이런 가르침이 없다. 여기 인간성의 붕괴를 보여주는 네 가지 사례가 있다:
A. 동성애에 탐닉하여 어린 청년들을 성적으로 탐닉했던 고대 아테네 철학자 중 한 명인 소크라테스는 이런 말을 남겼다: "너 자신을 알라."
B. 마귀들렸고 간질병 걸린 군사 독재자로서 아홉살 짜리 소녀와 동침을 즐겼던 마호메트는 이런 말을 했다: "(인간이) 자기를 아는 것은 곧 하나님을 아는 것이다."
C. 윌리엄 세익스피어는 그의 작품 햄릿에 이런 대사를 남겼다: "너 자신에게 진실하라."
D. 교회 협의회에 속한 현대식 자유주의자 중 한 명인 랄프 소크만은 이렇게 말했다: "모든 크리스찬은 자신의 진정한 자아를 찾아야만 한다."
이 모든 말들 뒤에 여러분은 "돼지먹이!"라고 쓰면 된다. 여러분이 "자신을 알고" "진정한 자아를 찾고" "자신에게 진실"하면 결국 어떤 사실을 "발견하게" 되는지 아는가? 그것은 이런 것이다:
"내 안에 (곧 내 육신 안에는,) 선한 것이 거하지 않는 줄을 내가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한 것을 어떻게 행하는 것인지는 알지 못하노라"(롬 7:18).
여러분이 자기를 안다 해도 하나님은 결코 알 수 없는데 이는 여러분이 아는 것은 옛 사람 아담이기 때문이다. 육신적인 생각은 사망이며(롬 8:6) 육신적 생각은 하나님의 원수가 되는데(롬 8:7) 육신적 생각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롬 8:8). 여러분에게는 새 사람이 필요한데(고후 5:17) 그 새 사람은 중생을 통해 여러분 안에 창조된다(요 3:6-7; 롬 8:9-11).
크리스찬은 "자기를 부인"해야 한다. 그는 "불경건과 세상 정욕들"(딛 2:12)을 거부해야 한다. 그는 자기를 기쁘게 해서는 안 된다(롬 15:1). 현대 기독교식 자기애와 자존감으로의 부름은 예수께서 우리를 부르시는 자기 부정의 삶과 정반대이다(딤후 3:2; 빌 2:3).
2. "자기 십자가를 지고." 이것은 주께서 여러분 각자에게 어떤 "짐"을 지우신다는 뜻이 아니라 여러분이 자아와 육신의 정욕에 대해 죽는 것을 의미한다. "십자가"는 사형 도구이다. 여러분은 "몸의 행실을 죽이"(롬 8:13 참고. 골 3:5)고 여러분 "자신을 정녕 죄에게는 죽은 자"로 여겨야 한다(롬 6:11). 여러분이 그 일을 할 수 있는 것은 위치상 여러분의 옛 죄의 본성이 그리스도와 함께 "못박힌"(롬 6:6 참고. 갈 2:20) 상태이기 때문이며 예수께서 본문 막 8:34에서 십자가를 언급하신 것도 그 이유 때문이다. 여러분은 십자가를 여러분의 삶에 적용함으로써 죄에 대해 승리할 수 있어야 하며(갈 5:24) 매일 그렇게 해야 한다. 누가가 본문과 쌍을 이루는 눅 9:23에서 그리스도의 말씀에 "날마다"를 넣은 것은 그것이 일회성으로 할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바울은 "나는 매일 죽노라"(고전 15:31)고 말했다. (나는 개인적 경험을 통해 추가하기를 때로 여러분은 매시간, 또는 매분 죽어야 할 경우가 있다고 말하겠다.) 이것은 여러분이 자신의 성도로서의 위상(교리적으로 여러분이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사실)과 여러분의 상태(여러분 각자의 크리스찬 삶에서 어디에 위치해 있는가)와의 괴리를 없애기 위해서 반드시 실행해야 할 의무이다.
3. "나를 따르라." 이것은 이전까지 주어졌던 것보다 더 심오한 명령이다. 10:28에 보면 베드로가 이렇게 말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우리는 모든 것을 버려 두고 주님을 따랐나이다." 그는 자기들이 생계 수단(1:17), 집, 가족, 그리고 땅을 버리고(10:29) 주를 따랐음을 말하고 있다. 그것들은 다 물리적인 것들이다. 그런데 본문에서는 여러분 자신의 뜻과 꿈을 버리고 그리스도를 따르라고 말씀하고 있다. 여러분 자신의 삶보다 그리스도를 더 사랑하라는 말씀인 것이다(눅 14:26-27).
알다시피, 이 시점까지 제자들은 그리스도께서 세상을 정복하는 왕이 되실 것으로 믿고 따랐던 것이다. 그들이 그렇게 생각할 명분은 충분했는데 이는 구약 성경에서 오실 메시아가 그런 분이라고 예언하고 있기 때문이다(1:15에서 물리적 왕국인 천국에 대해 다룬 주석을 보라). 그러나 이 시점까지 제자들은 사 53장의 고난받는 종으로서의 메시아에 대해 잊고 있었는데, 그래서 베드로는 주께서 자신의 고난과 "선임 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살해당하실 것을(31-32절) 말씀하셨을 때 거부 반응을 보인 것이다. 그러나 이제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자신이 죽으실 것을 말씀하시고 제자들 또한 주와 같은 운명에 처할 것이니 마음의 대비를 하라고 말씀하신다. 주께서는 요 15:20에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종이 자기 주인보다 더 위대하지 못하다...만일 사람들이 나를 박해하였다면 너희도 박해하리라." 이는 제자들이 어떤 식으로 주의 길을 따르게 될지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도 그의 수치를 짊어지고 진영 밖에 있는 그에게로 나아가자"(히 13:13).
막 8장으로 돌아와서: "누구든지 자기 생명을 구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35절). 여러분이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그리스도를 따라 모욕과 박해를 감수하며 살지 않으면 이렇게 된다는 말이다. 여러분이 세상에서 으뜸이 되기 위해 산다면 모든 일들이 산산히 깨어질 것이다. 여러분이 자기 삶을 황폐하게 만들려면 자아와 육신을 위해 살면 된다. 여러분이 모든 사람과 잘 지내며 누구에게도 예수 그리스도와 성경을 말해서 화나게 만들지 않는다면 여러분의 크리스찬 삶은 확실히 "파산"으로 갈 것이다.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생명을 잃으면 구하리라." 이것은 위대한 역설인데, 분명 모순임에도 이것은 진리이다. 여러분이 근육을 키우려면 운동을 통해 근육을 소진해야 한다. 돈을 벌려면 현명한 투자에 그 돈을 써야 한다. 바울이 말했듯이 여러분이 "영원한 생명을 붙잡"(딤전 6:12, 19)고자 하면 - 그 뜻은 여러분이 내생에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보상을 받는다는 것이다(빌 3:14) - 여러분은 자기 지상 삶을 스스로 통제하려 하지 말고 고삐를 주께 넘겨드려야 한다. 여러분은 생명을 얻기 위해 생명을 잃어야 한다.
구원받은지 9개월 후 나는 헌신의 선택 앞에 직면했다. 나는 당시 밥 존스 대학에 다니고 있었다. 나는 아내와 어린 딸, 갓난 아들과 함께 이동 주택에서 살면서 1학년 과정을 다니고 있었다.
어느 날 밤, 캠퍼스 저녁 예배를 마치고 이동 주택 주차장으로 돌아왔을 때 나는 무릎을 꿇고 기도하도록 주께서 강권하심을 느꼈다. 주께서 내게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았다. "내가 너를 설교자로 부른다면 너는 그 일을 하겠느냐?"
나는 "오 그럼요. 저는 주를 위해 뭔가 하고 싶습니다. 저는 27년 동안 마귀처럼 살았습니다. 저는 아무도 구원시키지 못한 채 빈 몸으로 죽어서 하늘 본향으로 가고 싶지 않습니다. 저는 구령의 열매를 갖고 주께 가고 싶습니다."
그러자 주께서 내게 이렇게 물어보셨다: "너는 해외로 나가서 나를 위해 설교하겠느냐?"
나는 망설이면서 이렇게 여쭈었다. "그게 어떤 뜻입니까?"
"내가 너를 일본으로 보낸다면 가겠느냐?"
내가 말했다. "주여, 저는 그 곳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습니다. 저는 태평양을 네 번 횡단했고 다시 거기로 가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래도 너는 나를 위해 그렇게 하지 않겠느냐?"
내가 말했다. "좋습니다, 주님을 위해서라면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 다음 말씀은 이러했다: "내가 너를 혼자 거기로 가라고 하면 그렇게 하겠느냐?"
내가 말했다. "하지만 주여, 제게는 가족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내가 너를 혼자 가라고 하면 너는 하겠느냐?"
다시 내가 말씀드렸다. "좋습니다." 나는 말씀이 끝난 줄 알고 자리에서 일어서려 했는데 주께서는 아직 끝내지 않으셨다.
"내가 너를 거기로 보냈는데 네가 한 명도 구령하지 못한다면 어떻겠느냐?"
당시 나는 아직 윌리엄 캐리나 아도니람 저드슨의 경우처럼 7년 간 사역했음에도 한 명의 개심자도 얻지 못했던 선교사의 이야기를 아직 읽지 않았었다. 나는 주께 말씀드렸다. "저는 그렇게는 못합니다. 저는 이제까지 너무 많은 시간을 낭비했습니다. 저는 사람들을 구령하기 원합니다."
알다시피 당시 나는 죄인들을 그리스도께 인도하지 못하고 죽는 것이 두려웠다. 나는 군대 훈련 교관과 댄스 밴드 연주자를 했던 저주받은 청년이었다. 나는 그런 저주받은 삶을 그리스도 안에서 만회하지 못하고 죽는 것이 싫었다.
"하지만 너는 나를 위해 그 일을 하지 않겠느냐?"
"네, 주여, 좋습니다" 그리고 나서 나는 일어나기 시작했다. 나는 이것으로 헌신의 고백이 충분하다고 생각했지만 주께서는 아직 끝나신 게 아니었다.
"내가 너를 거기서 죽으라고 한다면 너는 그렇게 하겠느냐?"
여러분은 우리 구원받은 죄인들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 것이다. 나는 대답했다. "네, 하지만 될수 있는대로 깨끗하게 빨리 죽게 해 주십시오." 나는 죽음에 이르는 많은 끔찍한 방법이 있음을 알고 있었고 그것들 중 하나도 몸소 경험하고 싶지는 않았다.
"만일 네가 신속하게 죽지 못한다면 어떻겠느냐?"
나는 주님과 작은 약속을 하면서 그 대화를 마쳤다. 물론 인간적 관점에서 볼때 주께서 살라고 하신 그 삶에 후회가 따를 수 있겠지만 나는 옛날로 돌아가고 싶지는 않았다. 나는 주께서 내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이든, 얼마나 소름끼치게 하기 싫은 일이든 하기로 했다. 그 기도를 끝내고 일어섰을 때 내 마음은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 주께서 빨리 돌아오시게 기도하는 것을 내가 강조한다면 그 말은 솔직히 내 이기적인 입장이 완전히 배제된 말이 아님을 인정한다: 나는 자신의 곤경에서 벗어나고자 그렇게 하는 것이다. 주께서 여전히 내 상황에 개입하지 않으시고 생각할 수 있는 최악의 처지에서 주를 따라야 한다면 그래도 나는 그것을 감내해야 한다. 두말할 것 없이 그렇다.
이제 여러분의 생명을 잃는 것에 관해 중요한 점은 왜 여러분이 그것을 잃어야 하는 것인가이다. 만일 여러분이 조국을 위해 생명을 내놓는다면 그것은 고귀한 행동으로 여겨지겠지만 여러분이 그때문에 내생에서 좋은 것을 얻지는 못한다. 여러분이 "자유"를 위해서 생명을 내놓는다면, 그것은 오늘날 어떤 의미든 될 수 있는데,자유를 위한 여러분의 희생은 누군가가 심판에 대한 공포 없이 음행하도록 돕는 것이 될 수도 있다. 여러분이 누군가를 구하기 위해 죽는다면 그것은 고상하고 훌륭한 일이지만 그것이 올바른 동기에 의한 행동이 아니라면 무의미한 행위이다(고전 13:3). 여러분이 하는 일의 동기가 여러분의 구주와 주의 복음을 위한 것이어야 의미가 있다. 물론 우리는 여기 본문의 "복음"이 오늘날 우리가 전파하는 복음과 꼭 일치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알고 있지만(1:15 주석을 보라) 바울 서신서에 근거해서 여러분은 이것을 영적으로 우리에게 적용할 수 있다.
이제 36-37절에서는 이 말씀의 적용 대상이 제자들로부터(34절) 모든 사람으로 전환되고 있다. 그 대상이 제자들이 아니라 "사람"으로 지칭되고 있음을 보라. 여기 언급된 "사람"은 자신의 혼을 잃어버릴 수 있는(36절) 처지이기 때문에 그 "사람"의 범주는 잃어버린 죄인들에게까지 확장 적용되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하신 두 가지 질문은 이렇다:
1)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자신의 혼을 잃는다면 무슨 유익이 있겠느냐?"(36절).
2) "또 사람이 자기 혼을 무엇과 바꾸겠느냐?"(37절).
이것들에 대한 대답은 명백히 "아니오"가 될 수 밖에 없으므로 이 질문들은 수사적 질문이라 할 수 있다. 공포소설의 전형적 스토리는 등장하는 남녀가 뭔가 간절한 소원을 이루기 위해 자기 혼을 악마에게 팔아넘기는 것이다. 그 줄거리는 성경에서 가져온 것인데 본문과 눅 4:5-7에 근거한 것이다. 내가 여러분에게 알려줄 것이 있는데 그것은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지 않으면 마귀가 여러분의 혼을 매매할 필요 없이 이미 소유하고 있다는 사실이다(엡 2:1-3). 그러나 마귀는 여러분이 "잠시 동안 죄의 낙을 누리는 것"(히 11:25)에 빠져 살면서 그리스도께 가지 못하도록 붙잡고 있다.
온 세상을 얻는 것과 관련하여 생각할 중요한 점은 마귀가 누구에게도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온 세상을 얻고자" 힘썼던 모든 영웅들도 실제 그렇게 하지는 못했다. 알렉산더 대왕은 거의 그렇게 할 뻔 했지만 성공하지는 못했다. 그는 더이상 정복할 만한 땅이 없다고 슬퍼하면서 주정뱅이로 살다 죽었다. 징기스칸은 세계 정복에 성공할 뻔 했지만 결국 실패했다. 나폴레옹 역시 그 목표에 근접했지만 그가 이집트의 대피라미드 근처를 홀로 거닌 후 얼마 지나서 그는 러시아 침공으로 인해 자신의 모든 것을 잃었다. 히틀러는 "오늘은 독일, 내일은 전세계"를 부르짖었다. 그가 프랑스를 침공, 정복하고 나서 나폴레옹이 앉던 의자에 자기도 앉아 거들먹거려 보았다. 그러나 그후 히틀러는 나폴레옹처럼 러시아를 침공했고 그 전쟁의 수렁에 빠져서 나폴레옹처럼 몰락하고 말았다.
여러분, 마귀는 자신의 약속을 결코 지킨 적이 없다. 마귀는 여러분이 그리스도를 영접하지만 않는다면 모든 것을 주겠노라 약속하지만 그 약속을 절대 완전하게 지키지 않는다. 마귀는 여러분이 저주받기에 충분할 만큼만 약속을 지킨다. 마귀는 여러분이 원하는 모든 마약, 모든 여인들, 모든 좋은 음식들, 모든 돈, 모든 명성을 주겠다고 약속하지만 그는 여러분을 배신하고 50살 이전에 여러분이 죽게 만들 것이다. 엘비스 프레슬리, 존 벨루시, 존 레논, 커트 코베인, 존 캔디 등이 그런 최후를 맞았다.
여러분이 세상과 여러분의 혼을 맞바꾼다면 여러분은 자신을 너무 값싸게 넘긴 것이다. 그것은 곧 철거되어 없어질 주택을 사기 위해 전재산을 투자하는 것과 같은 어리석은 행동이다(벧후 3:10).
"세상도, 세상의 정욕도 사라지지만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요일 2:17).
나는 여기 미국에서나 다른 나라에서나 어떤 성경 교사도 혼에 대해 정확하게 설명하는 것을 본 적이 없다. 인간의 혼은 육신과 영과는 또다른 것이다(살전 5:23). 진정 여러분의 혼이 온세상보다 귀한 것이라면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한다는 사람들이 앞장서서 혼의 실체를 규명해 냈어야 맞겠지만 그 부분에서 성공했다는 사람이 없다.
"혼"이 대체 무엇인가? 헬라인들은 혼이 조그만 공 같은 것이라 말했다. 어떤 사람은 혼이 심장의 좌심실에 들어 있다고 말하고 또 어떤 이들은 두개골 밑면에 있다고 말한다. 암흑 시대에 외과의사들은 혼의 무게를 알기 위해 사람이 죽을 때 체중 변화가 있는지 재 보곤 했었다. 혼에 무게가 있다면 사람이 죽을 때 체중이 변해야 한다고 그들은 생각했던 것이다(참고. 창 35:18).
성경에서 보면 - 또한 성경을 사실로 믿는 학자들에 따르면 - 혼은 여러분의 살과 뼈로 된 육체 안에 들어 있는 보이지 않는 영적 몸이다. 눅 16장에서 지옥에 간 부자는 볼 수 있는 눈이 있고(눅 16:23) 감각을 느끼는 혀가 있다(눅 16:24). 낙원으로 가 보면 아브라함에게는 품(가슴)이 있어서 나사로가 거기 누울 수 있었으며(눅 16:23) 나사로는 물을 떨굴 수 있는 손가락이 있었다(눅 16:24). 물론 언급된 그 지체들은 물리적 몸의 지체를 말하는 게 아니다. 그들의 실제적 몸은 무덤에서 썩고 있었으니 말이다.
계 6:11을 보자. 거기에 보면 "혼들"이 "제단 아래" 있는데 그들에게는 "긴 흰 옷"(계 6:11)이 주어진다. 혼이 단지 어떤 에테르 성분의 영이라면 어떻게 혼이 옷을 입겠는가? 하지만 혼이 사람의 형상을 하고 있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여러분은 "꼬마 유령 캐스퍼"에 나오는 것처럼 망토 속의 유령을 보게 되는 것이다. 여러분이 아무리 벗어나려 애써도 성경으로부터 벗어날 방법은 없다.
여러분은 바울이 자신의 "셋째 하늘로 끌려 올라갔"(고후 12:2)던 체험에 대해 어떻게 썼는지 아는가? 그는 이렇게 말했다.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말할 수 없지만"(고후 12:3). 이게 무슨 뜻인가? 바울의 물리적 몸은 돌에 맞아 쓰러진 채 루스트라 성읍 외곽의 땅에 있었으나(행 14:19) 그는 자신이 보지 못하는 어떤 몸을 입고 하늘나라에 가 있었다. 바울은 고후 5:1에서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아는 것은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우리의 물리적 몸 - 벧후 1:13-14]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큰 집, 즉 손으로 짓지 아니한 하늘들에 있는 영원한 집[부활 때 갖게 될 영광스러운 영적인 몸 - 빌 3:21]이 있다는 것이라."
여러분이 혼에 대해 정확히 알고 싶다면 하나님을 보라. 하나님께는 가시적인 몸이 있는데 그것은 초림 때 땅에 계셨던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다.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느니라"(요 14:9). 그와 동시에 하나님께서는 볼 수 없는 자신의 혼을 갖고 계시다. 성경은 이렇게 말씀한다. "아무도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지만"(요 1:18). 즉 어떤 사람도 삼위 하나님의 본체인 혼, 곧 성부 하나님을 보지는 못했다는 것이다.
더 쉽게 말하자면 이렇다. "만일 여러분이 나를 보았다면 여러분은 피터 럭크만을 본 것이다. 그러나 누구도 진짜 피터 럭크만을 본 적은 없다." 내가 무슨 말을 하는 것 같은가? 여러분이 내 외양을 보았다면 그것은 나의 일부만을 본 것이며 그것이 "진정한 나"는 아니라는 것이다. 진짜 피터 럭크만은 내 몸 안에 감춰진 채 내 육체의 눈을 통해 여러분을 응시하고 있다(마 6:22; 눅 11:34).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의 관계도 그와 같다. 초림 때 지상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았던 사람들은(그리고 우리들 크리스찬은 휴거 때 주를 뵙게 될 것이다) 그들이 볼 수 있는 하나님의 전부를 본 것이다. "아버지의 품 안에 계신 독생자, 그가 하나님을 분명히 밝히셨느니라"(요 1:18).
혼이라는 것이 여러분의 물리적 몸 안에 들어있는 비가시적 몸이라면 혼을 잃는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가? 먼저 주께서 시 22:6에서 다윗을 통해 예언적으로 말씀하신 것을 보라.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 이것은 십자가상의 예수 그리스도를 묘사한 예언적 구절이다.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자신의 모습을 무엇에다 비유하셨는지 보이는가?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올린 것같이 인자도 그렇게 들려올려져야만 하리니"(요 3:14).
이 구절에서 "뱀"은 "마귀"(계 12:9)이다. 말하자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사탄과 같이 뱀의 형상이 되어 벌받으셨다는 것이다. 즉 예수께서는 여러분을 위해 죄가 되셨다(고후 5:21).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딤전 2:5)의 혼이 사람의 형상을 잃어버리고 지옥에 있는 죄인의 모습처럼(사 53:10 참고. 마 26:38) 되셨다는 것이다. 막 9:44, 46, 그리고 48절을 보라.
"그곳에는 그들의 벌레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
이 진술은 너무나 중요하기에 예수께서는 여섯 구절 사이에서 세 번이나 반복해 말씀하셨다. 불못에 들어간 죄인의 혼은 사람의 형상에서 바뀌어 그의 아비인 마귀의 형상이 되는데(요 8:44) 그 형상은 뱀처럼 생긴 붉은 구더기이다. 지옥은 다윈의 이론과는 반대로 역진화가 일어나는 곳이다. 그곳의 죄인들은 인간의 외형에서 "본성이 잔인한 짐승"(벧후 2:12 참고. 계 9:7-8)의 모양으로 바뀌는데, 즉 그들은 자기들의 초기 상태로 돌아가는 것이다. 사람의 정자를 현미경으로 보면 어떤 모습인지 아는가? 그것은 벌레처럼 생겼다. 그러므로 죄인이 불못에 떨어지면 그는 사람의 형상을 잃어버리고 팔, 다리, 눈, 귀가 없는 채로 몸을 뒤틀고 꿈틀거리면서 고통만을 느끼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여러분은 그런 모습이 되어 영원히 살기를 원하는가? 아니라면 지금 예수 그리스도께 나아와 그분을 믿으라(고후 6:2). 그러면 여러분은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있고(요 1:12) 여러분의 구주와 같은 몸을 갖게 될 것이다(롬 8:29; 빌 3:21; 요일 3:1-2).
38절: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나와 내 말들을 부끄럽게 여기면, 인자도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자기 아버지의 영광으로 올 때 그 사람을 부끄럽게 여길 것이라.”고 하시더라." 이제 우리는 제자도에 관한 주제로 다시 돌아왔다. 본문과 상호 관주를 이루는 마 10:32-33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사람들 앞에서 주로 고백하는 것을 너무나 부끄러워하는 사람들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여기에 회색 지대는 존재하지 않는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지 않으면 여러분은 그 분을 부인한 것이다. 어떤 크리스찬이 세상의 위협으로 인해 움츠러든 나머지 자신의 구주를 부인할 수 있고, 그것은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14장에서 베드로가 66-72절에서 드러낸 행태를 보라. 그러나 성도가 그렇게 했다고 해서 그것의 그 사람의 구원 상실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딤후 2:12-13을 보라.
"우리가 참으면 우리도 그와 함께 다스릴 것이요 우리가 그를 부인하면 그도 우리를 부인할 것이라." 어떻게 우리를 부인하신다는 것인가? 자녀된 자격을 부인하시겠다는 말씀인가? 물론 아니다! 계속 읽어가 보라. "우리가 믿지 아니하여도 그는 항상 신실하시니, 그는 스스로를 부인하실 수 없음이라." 여러분이 주 안에 있고 주께서 여러분 안에 있는 이상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여러분에게서 아들의 자격을 빼앗지 않으신다. 그러나 주께서는 딤후 2:12에서 언급된 "다스림"에 관해 여러분을 부인하실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큰 백보좌 심판 때가 아닌 재림 시에 여러분을 부끄럽게 여기신다고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주께서는 주를 부끄럽게 여기는 성도를 지옥에 보내시지 않지만 대신 주의 왕국에서 통치에 참여할 수 없게 하신다. 크리스찬으로서 우리가 "그가 오실 때 그의 앞에서 수치를 당하지" 않으려면 교제의 의미에서(요일 1:6-7) "그분 안에"(요일 2:28) 거하면 된다. 주 안에 거한다는 의미는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적대적인 세상 앞에서 주를 부끄러워하지 않고 담대하게 전하는 행위도 포함된다.
이번 장을 마치기에 앞서 강조할 것은 여러분이 부끄러워하지 말아야 하는 것에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성호 뿐 아니라 주의 "말씀들"도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오늘날 미국의 현실에 잘 들어맞는 권면이다. 여러분이 모슬렘, 카톨릭, 몰몬교도들, 동성애자들, 마약, TV, 록음악, 술, 포르노, 낙태 문제, "복장 도착자들" 앞에서 성경이 그것들을 어떻게 책망하는지 선포하면 악한 세상으로부터 여러분에게 비난의 포화가 쏟아지게 되어 있다. 이미 연방 대법원은 한 쌍의 여자 동성애자들과 남자 동성애자들이 합법적인 부부 행세를 할 수 있다고 판결을 내렸고(그들이 뭐라고 주장하건 그것은 결혼이 아니다 - 10:6-9) 그런 광대극을 인정하거나 동참하기를 거부하는 크리스찬들은 투옥되거나 수십만 달러의 벌금을 무는 일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그 크리스찬들이 업무 중에 동성애의 죄악들을 비판한 것이 아니고 사석에서 발언했는데도 그들은 회사에서 해고당하는 불이익을 당하곤 한다.
오바마, 힐러리, 그리고 민주당은 미국을 새롭게 바꾸고 있는데 그들은 종교의 자유(국민이 어디서건 자신의 신앙을 표현, 실행할 수 있는 자유)를 "경배"의 자유(교회 건물 안에서만 그들의 믿음을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다)로 전환시키려 한다. 여러분, 마귀는 여러분이 입을 꾹 다물고 있는 한 여러분의 믿음이 어떻든지 신경쓰지 않는다. 복음을 전하지 않고, 전도지를 나눠주지 않으며, 거리에서 설교하지 않고, 성경을 인용해서 다른 사람들을 화나게 만들지만 않으면 여러분은 마귀와 그의 백성들과 꽤 무난하게 지낼 수 있다.
성경 말씀을 절대 부끄러워하지 말라. 이 책만이 여러분의 혼을 구원해주고 여러분을 성경과 함께 영원히 살게 할 수 있다(벧전 1:23-25).
(피터 럭크만의 마가복음 주석서 - 아마존 킨들북 버전 - 에 보면, 9장 부분 전체가 완전 누락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출판사의 치명적인 실수라고 볼 수 있겠는데, 실물 종이책의 경우 아마 정상적으로 되어 있을 것으로 봅니다. 저는 전자책 버전으로 본 번역을 진행하는 것이므로 불가피하게 9장 주석은 건너뛸 수 밖에 없음을 양해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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