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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경제용어
수조안(收租案)
정의
해마다 각 도 감사가 그해에 중앙정부에 납부해야 할 세액을 기록하여 보고한 문서.
개설
조선시대에는 토지대장인 양안(量案) 등을 통해 과세 대상이 되는 토지를 파악하였다. 하지만 양안 상의 토지 결수가 모두 수세 대상이 되는 토지는 아니었다. 양안 상의 결수와 중앙정부의 수세액은 차이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실제 중앙정부로 납입될 세액을 따로 기록하여 보고하였는데 이것이 수조안이었다. 수조안은 그해 연말까지 중앙정부에 보고되었고, 국가에서는 이를 기준으로 수세 업무를 진행하였다.
제정 경위 및 목적
조(租)는 토지의 결수를 기준으로 부과되었으므로 국가에서는 정기적으로 양전을 시행하여 각 고을별로 토지의 결수를 파악한 양안을 작성하였다. 그러나 양안은 모든 토지를 대상으로 파악한 장부였기에, 실제 수세와는 괴리가 있었다. 토지세가 면제되는 면세결이나 대동미가 면제되는 면부결, 혹은 각 궁방이나 아문에 소속된 토지 등이 광범위하게 존재하였기 때문이다. 한편으로는 세를 내는 토지의 경우에도 풍흉 정도에 따라 세액이 조정되거나 결당 부과 액수가 달라졌다. 이러한 사정으로 인하여 각 지역의 해당 연도의 수세액은 매번 달라질 수 있었다. 이에 따라 해마다 중앙정부로 들어오는 실제 수입을 파악하기 위한 장부가 작성되었는데, 이것이 수조안이었다.
내용
『조선왕조실록』 상에 확인되는 가장 이른 수조안은 중종대의 것이었다[『중종실록』 19년 8월 7일]. 다만 당시의 수조안이 현존하지 않아 그 내용을 확인할 수는 없다. 현존하는 조선후기 수조안에는 양안 상의 총 토지 결수에 해당하는 원장부결총(元帳簿結總)과 수세 대상에서 제외되는 각종 면세결과 유래진잡탈(流來陳雜頉), 그리고 시기결총(時起結總)을 기재해 놓았다. 여기에 중앙정부가 감면해 주는 급재(給災)를 제한 당년도 수세 총액을 기록해 놓았다. 아울러 정조대부터는 해당 연도에 개간한 토지도 수조안 끝에 기록하여 보고하도록 하였다[『정조실록』 20년 10월 14일].
수조안에는 중앙정부로 상납할 세금만을 기록해 놓았기 때문에, 각 군현에서 자체적으로 거두던 잡세 항목은 기록되어 있지 않았다. 또 개별 토지 및 납세자에 대한 사항도 일일이 기재해 두지 않은 것이 특징이었다. 이러한 수조안은 중앙정부의 재정 업무를 원활히 수행하기 위하여 해당 연말까지 감사가 중앙으로 올려 보내도록 규정해 놓았다.
변천
수조안은 갑오개혁(1894)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작성되었다. 현존하는 수조안의 많은 수가 1894년 이후의 것들이다. 갑오개혁으로 인하여 조세금납화가 가속화되었고, 이에 따라 수조안의 기재 양식도 상당 부분 변화하였다. 또 이전까지 면세전이나 면부전으로 파악되었던 토지들 역시 모두 시기결총에 포함되어 국가 수조지로 편입되었다.
참고문헌
『대전회통(大典會通)』
왕현종, 「갑오개혁기 <수조안>의 분석방법」, 『역사와 현실』 2, 한국역사연구회, 1989.
실록연계
『중종실록』 19년 8월 7일
『정조실록』 20년 10월 14일
실결(實結)
정의
재해를 입지 않고 실질적인 경작이 이루어져 전세를 수취할 수 있는 경작지.
개설
조선전기에는 모든 토지에서 풍흉의 정도에 따라 세액을 조정하여 전세를 수취하였다. 그러나 16세기 내내 전세가 점차 하향 고정화되어 갔고,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에는 정부의 토지 파악력이 크게 악화되었다. 이에 따라 기존의 전세 수취 방식을 대신하여 영정법을 실시하게 되었다. 영정법은 세액을 결당 4두(斗) 내지 6두로 고정하고, 재해를 입지 않은 토지에 한해서만 전세를 내도록 한 제도였다. 이때 재해를 입지 않아 정상적인 세금을 부담할 수 있는 토지를 출세실결, 즉 실결이라 불렀다. 이후 전세 부과에서는 토지대장인 양안(量案)에 기재된 원장부 결수 외에 실제 세를 부담할 수 있는 실결을 파악하는 것이 중요해졌다. 자연재해로 인하여 피해를 입은 재상전(災傷田)은 실결에서 제외되었으며 세가 면제된 면세전 역시 실결에서 제외되었다. 1730년경부터는 그해 풍흉(풍년과 흉년) 정도와 비슷했던 해의 출세실결 수에 따라 세액의 총액을 일괄 부과하는 비총제(比總制)가 시행되었다.
내용 및 특징
영조대에 편찬된 『속대전』상의 전세 부과 과정을 살펴보면, 먼저 경차관을 파견하여 각 지역의 풍흉 정도를 파악한 후에, 작황에 따라 국가에서 각 군현별로 재상전의 액수를 하달하는 방식을 거쳤다. 즉, 각 지역에서 세를 거둘 수 있는 토지, 즉 실결수를 중앙에서 결정하여 지역에 하달하면, 이에 근거하여 각 지역에서는 실결에 따른 전세 액수를 중앙에 상납하는 방식이었다[『영조실록』 즉위년 12월 13일].
『탁지전부고(度支田賦考)』에는 18~19세기 동안 전국에 걸쳐 양안에 기재된 원장부 결수와 실결수가 나열되어 있었다. 이를 자세히 살펴보면, 실결 수의 비중이 지역에 따라 큰 차이를 보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삼남(三南) 지역인 충청도·전라도·경상도의 경우 50~60% 이상이 실결인 반면, 강원도와 같은 경우는 30% 미만에 그치기도 하였다. 한편 19세기에 이르면 전체 실결수의 비중이 줄어들었다.
변천
1730년경부터는 경차관을 파견하여 매년 실결수를 산정하는 것이 폐지되고, 그해의 풍흉과 비슷했던 해의 세액을 각 군현별로 일괄 부과하는 비총제가 시행되었다. 이에 따라 지역의 실결수도 점차 고정화되어 가는 경향을 보였다.
참고문헌
『속대전(續大典)』
『대전회통(大典會通)』
『만기요람(萬機要覽)』
이철성, 『17·18세기 전정 운영론과 전세 제도 연구』, 선인, 2003.
십일제(什一制)
정의
토지 수확물의 1/10을 국가가 수취하는 제도.
개설
십일제는 수확물의 1/10을 거두어들인다는 뜻으로, 중국 고대국가인 하·은·주의 토지제도였던 정전제(井田制)에 근거한 과세 방식을 말하였다. 조선에서는 건국 직후부터 세금 과세의 이념으로 십일제가 통용되었다. 그러나 세종 26년(1444) 공법의 성립으로 종래와 달리 수확량의 1/20을 세금으로 거두게 되자 십일제의 원칙에서 벗어난 세금 운영이 도입되었다[『세종실록』 26년 8월 24일]. 이후 조선후기 영정법의 도입, 대동법의 성립 등 다양한 세금제도에 대한 개혁이 실시되었는데, 이러한 세제개혁 와중에도 백성에게 1/10의 부담시키는 십일제의 이념은 준수해야 할 가치로 천명되었다. 비록 한 세목(稅目) 안에서 1/10의 세율이 고수되지는 못하였으나 실제 국가에서 거두는 수취량은 백성의 총 수입의 1/10에 준하게 설정되도록 노력하였다.
내용 및 특징
『맹자』 등의 유교 경전에 따르면, 중국 고대 하·은·주 시대에는 경작지를 우물 정(井) 자(字)로 나누고 가운데 토지는 공전(公田)으로, 그 외 8칸의 토지는 각 민가에 귀속되도록 하는 정전법이 통용되었다. 정전법에서는 민가에 귀속된 8칸 토지의 수확물은 각 민가가 차지하고, 가운데 공전에 대해서는 8칸의 민가가 힘을 합쳐 경작하여 그 수확물을 세금으로 바치게 되어 있었다. 따라서 이를 경작 면적으로 계산해 보면, 각 민가가 경작하는 전체 토지의 약 1/10에서 나오는 토지 수확물이 국가의 세금이 되는 것이었다. 또한 지정된 토지의 수확물을 세금으로 납입하기 때문에 그해 농사의 풍년과 흉년에 따라 세액이 자연스럽게 조정되는 것이기도 하였다. 이러한 정전법에 근거한 세금 운영 방식을 유교 이념에서는 십일제라 칭하여 이상적인 과세 방식으로 인식하였다.
조선은 건국 직후 토지제도를 정비하고 수조권(收租權)을 나누어 주면서 십일제를 적극 도입하였다. 국가 소속의 공전은 물론 개인에게 수조권이 귀속되는 과전(科田), 그 외 다른 사전(私田)에서도 수확물의 1/10에 해당하는 양만을 조(租)로 수취하게 하였다. 조선건국 당시에는 토지 1결(結)당 최대 300두(斗)를 수확하는 것으로 간주하였으므로, 그에 대한 전조(田租)는 그 1/10인 30두를 넘지 못하도록 하였다.
변천
세금 운영, 특히 일관된 십일세를 적용하던 세목인 전세 수취에서 십일제를 처음으로 적용하지 않은 것은 세종대였다. 세종은 즉위 이후 공법의 도입을 구상하였다. 공법은 정전법과 달리 수확량에 상관없이 일정하게 고정된 세액을 수취하는 세법으로 유학자들이 이상적으로 생각한 세법은 아니었다. 세종은 일정한 세액 수취를 도입하여 국가 재정을 안정시키려 기획하였으나 당시 신료들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쳐 본래 기획했던 방침을 철회하였다. 대신 토지의 품질을 6등분으로 세분화하고 풍흉을 9단계로 조정하였으며, 토지 1결당 최대 생산량을 400두로 책정하였다. 공법에서는 생산량의 1/20을 수취하는 것으로 결정하였는데, 이에 따라 최대 20두에서 최소 4두를 납부하게 되었다.
십일제는 유교 이념상 이상적 세금 부과 방식이었다. 때문에 조선후기 대동법과 균역법의 시행 등으로 다양한 세목이 토지 생산물에 대한 부과로 전환되었지만 십일제의 이념은 관철되었다. 즉, 다양한 세목으로 부과하더라도 그 세액의 총량은 토지 생산의 1/10에 해당하도록 세액을 설정한 것이었다. 비록 각 군현에서 부과하는 잡세 등으로 인하여 이러한 원칙이 항상적으로 적용되지는 못하였으나, 적어도 중앙정부는 1/10 과세 원칙을 지키려 노력했던 것으로 보인다.
국가의 재정제도에 대한 개혁론을 제기하는 여러 학자도 십일제를 개혁의 요체로 간주하였다. 일례로 『반계수록』의 저자인 유형원은 여러 세목을 전세로 통합하고, 수확물의 1/10만 거두어도 충분히 국가 운영이 가능하다는 개혁론을 제시하였다.
참고문헌
『경국대전(經國大典)』
『대전회통(大典會通)』
『반계수록(磻溪隧錄)』
『맹자집주(孟子集註)』
이정철, 『대동법: 조선 최고의 개혁: 백성은 먹는 것을 하늘로 삼는다』, 역사비평사, 2010.
실록연계
『세종실록』 26년 8월 24일
아록전(衙祿田)
정의
지방관청 운영 경비 등에 사용하도록 국가에서 수조권(收租權)을 분급해 준 토지.
개설
조선시대에는 관원에게 녹봉을 주거나 일정 영역의 토지에서 세금을 거둘 수 있는 수조권을 분급해 주어 관원의 생활 기반을 마련해 주었다. 각 관청에도 위전(位田)을 설정해 주고 그 위전에 대한 수조권을 지급하여 재원을 마련하게 하거나, 혹은 호조(戶曹)에서 직접 경비를 지급해 주었다. 이에 반해 지방의 관원들은 녹봉을 직접 수령할 수 없었다. 이에 따라 마련된 것 중 하나가 아록전이었다. 아록전은 과전법 도입 당시에는 외관직전(外官職田)·늠급전(廩給田)이라고 불렀다[『태종실록』 7년 9월 2일]. 외관직전과 늠급전은 이후 아록전·공해전(公廨田)·공수전(公須田) 등으로도 불렀고 각 지방관아와 역참 등의 규모에 따라 분급되었다.
제정 경위 및 목적
운송 수단이 발달하지 않았던 전통 사회에서는 재원의 조달 방식으로 각사위전제(各司位田制)가 실시되었다. 각사위전제란 각 관청에 위전이란 토지를 내려 주고 해당 토지에서 나오는 조세로 관청을 운영하는 것이었다. 이 방식은 관원에 대한 물적 보상 방식에도 적용되었다. 고려시대의 전시과(田柴科)나 조선의 과전(科田)·직전(職田)이 그 예이다.
이러한 방식은 지방관아에서 경비를 마련하거나 지방관원에게 녹봉을 지급할 때에도 적용되었다. 이러한 토지를 과전법 도입 당시에는 외관직전·늠급전 등으로 불렀다. 각 지방에서 필요한 재정을 해당 지역에서 해결할 수 있도록 토지를 설정해 주는 것이었다. 특히 녹봉의 경우, 지방관원은 서울의 관원과 같이 수령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이러한 토지 설정이 반드시 필요하였다. 또 각 지방관아 운영에 필요한 경비도 마찬가지 방식으로 조달하도록 하였다.
내용
고려말 전제개혁 당시, 일정 토지를 외관직전이나 늠급전으로 설정하여 지방관아와 관원의 경비를 충당하도록 하였다. 조선초기에도 외관직전이나 늠급전이 아록전·공수전·공해전 등의 명칭으로 분급되었다. 세종대에는 약 20,000결(結)의 토지가 아록전의 명칭으로 분급되었다. 아록전은 그 명칭으로 보아 본래 지방관원에게 녹봉을 지급하는 용도로 사용되었으나, 경우에 따라 지방관청의 경비로도 사용되었다.
아록전의 지급 규모는 세종 27년 국용전제(國用田制) 시행 당시에는 유수부(留守府) 60결, 목(牧)이나 대도호부(大都護府) 55결, 도호부(都護府) 50결, 지관(知官)이나 목의 판관[牧判官]은 45결, 현의 관원(縣官)은 40결로 결정되었다[『세종실록』 27년 7월 13일]. 이후 『경국대전』에서는 그 지급 규모가 조금씩 줄어들었다. 이는 과전법 이후 도입된 직전법에서 토지 지급 규모가 줄어든 것과 연관이 있었다. 『경국대전』의 아록전 규모는 부·대도호부·도호부·목의 경우에는 50결, 군현은 40결을 지급하고 목 이상의 판관이 있는 곳은 40결이었다. 또 수령이 가족을 데리고 가지 않는 임지의 경우에는 아록전을 절반으로 감하도록 하였다.
한편 지방군현 외에도 참(站)이나 나루 등에도 관원이 파견되어 있었다. 이들에게도 아록전이 지급되었다. 참의 경우에는 5결, 도(渡)에는 8결씩 지급되었다. 또 수참(水站)을 관리하고 조운을 운영하는 수운판관(水運判官)과 해운판관(海運判官)에 대해서도 아록전 5결씩을 지급하는 것이 성종대에 정해져 『경국대전』에 수록되었다[『성종실록』 7년 4월 29일].
변천
아록전은 과전이나 직전과 달리 한 번 고을에 분급되면 지급 대상이 바뀌지 않는 토지였다. 따라서 직전법 등이 사실상 운영되지 않던 조선후기에도 『속대전』·『대전회통』과 같은 법전에 그 규정이 바뀌지 않고 수록되어 있었다. 그러나 조선후기 대동법 시행 이후에는 국가에서 정식으로 지방 경비를 지급하는 것이 마련되었고, 이에 따라 아록전 등에서 나오는 수입은 큰 비중을 차지하지 못했을 것으로 보인다.
참고문헌
『경국대전(經國大典)』
『속대전(續大典)』
『대전회통(大典會通)』
강제훈, 『조선전기 전세제도 연구: 답험법에서 공법 세제로의 전환』, 고려대학교민족문화연구원, 2002
김태영, 『조선 전기 토지 제도사 연구: 과전법 체제』, 지식산업사, 1983.
이경식, 『조선 전기 토지 제도 연구: 토지분급제와 농민 지배』, 일조각, 1986.
이재룡, 『조선 전기 경제 구조 연구』, 숭실대학교 출판부, 1999.
양안(量案)
정의
전근대 정부가 군현 단위로 토지를 필지별로 조사하여 작성한 토지대장.
개설
양안은 왕조 국가에서 왕이 토지에 대하여 행사하는 권력의 상징물로 인식되었다. 조선시대에는 각 군현마다 양안을 3부씩 작성하여 군현·감영·호조에 각각 1부씩 비치하였다. 각 군현은 전세를 수취하기 위해 매년 양안을 베껴서 기재 사항의 변화를 조사하였는데 이를 행심책(行審冊)이라 하였다. 행심책에 등록된 전체 필지는 다시 양안상의 소유주인 기주(起主)별로 종합되어 조세대장으로 사용되었는데 이를 깃기[衿記]라 하였다. 따라서 양안은 가장 체계적이며 근원적인 전근대사회의 토지대장으로서 전세 행정과 토지소유권 확정을 위한 원천적 근거로 기능하였다.
제정 경위 및 목적
전근대사회에서 정부가 양안을 작성한 일차적인 목적은 전세를 수취하기 위한 것이었다. 전세 거두어들이기 위해서는 우선 어디에 위치한 토지에서 얼마의 세금을 누구에게 받느냐를 기재한 토지대장이 필요하였다. 즉, 수취 대상의 위치, 수취 전세액, 전세 부담자가 기재된 토지대장이 필요한 것이었다. 문제는 토지대장에 기재할 토지의 위치·세액·부담자를 어떻게 파악할 것인가 하는 점인데, 이를 결정하는 것은 당시 사회의 구체적인 기술 수준과 사회문화적인 성향이었다.
어떤 형태로든 일단 작성된 토지대장은 반드시 모든 실재의 토지 형태를 반영하고 있었다. 이 점에서 양안의 토지소유권 확인 기능이 파생되었다. 즉, 양안은 실재 필지의 점유 여부를 확인해 주는 근거가 되었다.
각 군현의 양안이 작성되는 과정은 (1)실제의 측량 과정, (2)측량 결과를 초안으로 작성하는 과정, (3)작성된 초안을 검토하는 과정, (4)검토 결과에 따라 정안(正案)을 작성하는 과정으로 나뉘었다. (1)의 과정은 실무자들이 야외에서, (2)의 과정은 수령의 감독 아래 아전들이 관청에서, (3)의 과정은 양전사 혹은 균전사가 감영에서, (4)는 군현에서 각각 행하며, 완성된 정안은 거두어서 양전사 혹은 균전사가 최종적인 검토를 한 후에 군현·감영·호조에 각각 1부씩 보내었다.
내용
현재 남아 있는 양안은 조선시대 이전에도 존재하였을 것으로 보이나, 현재 확인 가능한 것은 조선시대 자료뿐이다. 군현양안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은 1720년 조선 숙종대의 경자양안이었다. 이를 통하여 전형적인 전근대 양안의 기재 양식을 엿볼 수 있다. 양안에는 각 필지의 위치, 면적, 진기(陳起) 여부, 소유주의 4개 영역 정보가 수록되어 있었다. 4개 영역의 정보는 다양한 항목으로 구체화되어 등록되었다. 위치에 관한 정보는 자호·지번·양전 방향·사표(四標) 등이었다. 면적에 관한 정보는 전품·전형·장광척수·결부수 등이었다. 진기 여부는 진(陳)·기(起)로 구분하였고, 소유주 난에는 해당 인물의 성명을 기록하였다. 필지의 위치에 관한 정보는 각 필지의 이웃 필지를 순차적으로 파악하는 방식이므로 상대적인 위치 파악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실제의 필지를 양안에서 확인하거나 양안에 등록된 필지를 실제 필지로서 확인하기 어려운 방식이었다. 따라서 특정 필지가 누락되거나 잘못 기록되더라도 감독자가 확인하기 어려우므로 전세 행정의 중간 농간을 용이하게 하였다. 또 토지소유권 분쟁이 일어났을 경우, 필지의 위치를 정확히 입증하는 데도 상당한 어려움이 따르는 방식이었다. 각 군현은 이러한 양안을 토대로 행심책과 깃기를 작성하여 조세 행정 장부로 사용하였다. 각 개인은 양안에 등록된 각 필지의 기재 사항을 등사한 문서나, 그것을 근거로 작성한 각종 토지문서를 통하여 토지소유권을 입증하였다.
변천
조선시대 양안으로서 온전한 형태로 남아 있는 것은 경자양안뿐이어서 양안의 변천과정을 정확히 파악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단편적인 기록을 토대로 간략한 변화상을 추정하는 것은 가능하다.
조선전기부터 후기까지 양안의 기본적인 기재 양식에는 큰 변화가 없었다. 즉, 6등전품제에 입각하여 상이한 면적에서 동일한 전세액을 나타내는 결부제(結負制), 5결마다 천자문 1자씩을 부여하는 자호제(字號制), 점유자를 기주(起主)로 표기하는 방식 등이었다. 임진왜란 이후의 양안에는 얼마간의 변화가 있었다. 1601년(선조 34)의 계묘양안은 경작지만 등록하고 진황지를 등록하지 않았다. 1634년(인조 12)의 갑술양안은 경작지와 진황지 모두를 등록하였지만 기주의 등록에서 양반지주층은 노비 이름을 자기 이름 대신 쓰는 경우가 일반적이었다. 1720년(숙종 46)의 경자양안에서는 노비 이름을 대신 쓰는 경우가 급격히 줄어들었다. 전체적으로 경자양안은 토지대장으로서 가장 완성도가 높았다.
참고문헌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한국사연구회 토지대장연구반, 『조선후기 경자양전 연구』, 혜안, 2008.
이영훈,「양안의 성격에 관한 재검토-경상도 예천군 경자양안의 사례분석」, 『역사학보』 102, 1984.
이재룡,「16세기의 양전과 진전수세」, 『손보기박사정년기념 한국사학논총』, 1988.
양전(量田)
정의
세금 부과 기준을 설정하기 위하여 토지를 측량하고 이를 양안에 기록하는 사업.
개설
농업 중심의 전통 시대 국가에서는 토지가 세금 부과의 중요한 기준이 되었다. 양전은 세금을 부과하기 위하여 토지를 측량하고 이를 토지대장인 양안(量案)에 기록하는 작업으로서, 국가의 재정 운영에서 가장 중요한 사업 중 하나였다. 조선에서는 동일한 수확량이 나오는 토지를 동일한 결부 단위로 판정하는 결부법을 시행하였다. 따라서 양전 결과 같은 결로 판정된 토지에는 같은 세액을 부과하였다.
본래 양전은 20년마다 한 번씩 실시하도록 법제화되어 있었으나[『성종실록』 2년 7월 14일], 비용과 행정력이 많이 투입되는 작업이었기 때문에 실제로는 이러한 규칙이 준수되지 못하였다. 조선건국 직전에 시행되었던 1391년의 기사양전(己巳量田)을 포함하여 조선초에는 모두 3번에 걸친 전국적인 양전이 실시되었고, 도(道) 단위의 양전도 여러 차례 시행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 이후에는 전쟁으로 인하여 황폐해진 토지를 측량하기 위하여 선조대와 인조대 각각 양전이 실시되었고, 숙종대에는 조선의 마지막 전국 규모의 양전인 경자양전(庚子量田)이 시행되었다. 그러나 18세기 중엽부터 전세 수취 방식이 비총제(比總制)로 전환되면서 과세의 기준을 정비하려는 목적의 양전 사업은 그 의미를 잃어 갔다.
내용 및 특징
조선에서는 토지의 절대 면적이 아닌, 수확량을 기준으로 토지의 등급을 나누고 이에 따라 면적을 측량하였다[『세종실록』 26년 6월 6일]. 이를 결부법(結負法)이라 하였다. 조선초에는 토지의 등급을 상·중·하의 3등급으로 나누었는데, 등급이 높을수록 절대 면적은 작고 토지 생산성은 높았다. 이렇게 측량된 토지는 각각 절대 면적을 달리하더라도 수확량에서는 동일하게 판정되어 1결당 국가에서 부과하는 세액은 같았다. 조선초에는 1결마다 수확량이 300두(斗)로 설정되었으며 세액은 그 1/10인 30두였다.
양전 사업을 위하여 중앙에서는 양전경차관(量田敬差官)을 파견하여 그 지역의 수령·서리들과 함께 사업을 진행하고, 또 사업 과정을 관리·감독하게 하였다[『세종실록』 11년 10월 10일]. 각 토지마다 양전 절차는 우선 해당 토지의 토질·입지 조건 등을 고려하여 전품(田品)을 책정하고, 전품마다 기준을 달리하여 면적을 측정하였다. 국초에는 이러한 기준을 손가락의 길이인 지(指)를 사용하였는데, 이후에는 척(尺)을 사용하였다.
해당 토지의 모양이 불규칙할 경우 삼각형 내지는 사각형으로 분할하여 측정하였으며, 그 측정 결과는 양안에 기록하였다. 양안에는 토지 면적과 함께 경작자인 기주(起主), 해당 토지의 동서남북에 위치한 지형지물을 기록한 사표(四標) 등의 정보를 함께 기록하였다. 아울러 기록된 토지는 5결을 기준으로 자호(字號)를 부과하여 정(丁)으로 편성하였다. 자호는 천자문의 순서로 기록되었다. 5결 단위의 자호는 국가에서 각사(各司)의 위전(位田)이나 관원에 대한 과전(科田)으로 수조권(收租權)을 분급할 때 기준 단위가 되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완성된 양안은 해당 읍과 도, 그리고 중앙의 호조(戶曹)에 각각 1부씩 보관되었다.
조선의 최초 양전은 태종대에 이루어졌으나, 조선건국 1년 전 이루어진 기사양전 역시 대단히 중요하였다. 그것은 조선의 건국 세력에 의하여 이루어졌고 이후 과전법의 토대가 된 양전이므로 어떤 면에서 기사양전을 조선 최초의 양전으로 파악할 수 있다. 이후 1405년(태종 5) 평안도와 함길도를 제외한 6도에서 을유양전(乙酉量田)을 실시하였으며[『태종실록』 5년 9월 5일], 1428년(세종 10)부터 1432년(세종 14)에도 전국적인 양전이 실시되었다[『세종실록』 11년 10월 10일]. 특히 세종대의 양전은 『세종실록』 「지리지」에서 그 구체적인 수치를 확인할 수 있는데, 전체 전결수가 1,600,000결을 상회하였다. 이는 조선 전 기간 동안 가장 많은 수였다.
변천
조선의 양전법에서 가장 중대한 변화는 1444년(세종 26) 공법(貢法) 도입과 함께 나타났다[『세종실록』 26년 11월 13일]. 우선 이전까지 3등으로 판정하던 전품을 6등으로 재편성하고, 그에 따라 기준 척 역시 6등급으로 세분화하였다. 또한 면적을 판정할 때 주척(周尺)에 의거한 기준 척을 도입하고 각 전품별로 기준이 되는 자[尺]를 제작하여 활용하였다. 이때 1등급 토지와 6등급 토지의 절대 면적은 약 4배 차이로 설정되었다. 1결당 수확량 역시 400두로 상향 조정되었는데, 그에 대한 수취량은 그 1/20인 20두로 결정되었다. 또한 경작을 지속할 수 있는 토지는 정전(正田)으로, 경작이 간헐적으로 이루어지는 토지는 속전(續田)으로 편성하여 각각 따로 양안을 작성하였다.
공법 도입 이후의 양전은 세종 생전에는 실시되지 못하였고, 15세기 후반 세조대부터 도 단위로 시행되어 16세기 초에 완결되었다. 이후에도 양전은 몇 차례 도 단위로 시행되었으나 그 양전 결과는 자세하게 기록되지 않았다.
임진왜란으로 전국의 경작지가 황폐해지고 국가 재정이 궁핍해지자 양전이 시급한 과제로 떠오르게 되었다. 이에 1603년(선조 36)부터 1604년까지 계묘양전(癸卯量田)이[『선조실록』 36년 12월 20일] 1634년(인조 12)에는 갑술양전(甲戌量田)이 시행되었다. 특히 갑술양전은 임진왜란 이전의 전결수에 거의 상응하는 전결의 수를 확보하게 되었다. 이후 1719년(숙종 45)에서 1720년까지 다시 한 차례의 전국 규모의 양전인 경자양전(庚子量田)이 시행되었는데, 본래 의도한 전결수는 거의 확보되지 못하였다.
18세기 비총제(比總制)에 의한 전세 수취가 일반화되면서, 양전은 과세 기준에 대한 조사의 의미를 갖지 못하게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경자양전 이후 조선에서는 더 이상 전국적인 규모의 양전이 실시되지 못하였다. 이후 대한제국시기 광무양전(光武量田) 때 한 번의 전국적 양전이 이루어졌다.
참고문헌
『고려사(高麗史)』
『경국대전(經國大典)』
『속대전(續大典)』
강제훈, 『조선 초기 전세 제도 연구: 답험법에서 공법 세제로의 전환』,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2002.
이철성, 『17·18세기 전정 운영론과 전세 제도 연구』, 선인, 2003.
실록연계
『성종실록』 2년 7월 14일
『세종실록』 26년 6월 6일
『세종실록』 11년 10월 10일
『태종실록』 5년 9월 5일
『세종실록』 11년 10월 10일
『세종실록』 26년 11월 13일
『선조실록』 36년 12월 20일
역공수전(驛公須田)
정의
역에 지급한 공수전.
내용
역공수전은 왕명을 받아 중국이나 지방을 왕래하는 봉명사신(奉命使臣)들의 지대(支待), 역(驛) 관사의 수리, 찰방·역승의 공무 수행을 위한 판공비, 역의 공무 수행을 위한 종이 구입 등의 비용을 충당하기 위하여 설정된 전지(田地)였다. 역공수전으로 지정된 민전(民田)은 그 전세를 해당 역에 납부하였다. 『경국대전』에 의하면, 원칙적으로 대로(大路)·중로(中路)·소로역(小路驛)에 각각 20·15·5결씩 차등 있게 지급하였다. 다만 황해도의 경우 대로역에 45결을, 평안·함경도의 경우 대로역 40결·중로역 22결·소로역 8결을 지급하였다.
용례
京畿右道江原道察訪副使楊秩啓自綠楊至銀溪驛興利除害事件 下議政府六曹 擬議以啓
一 松林縣之桃源長湍縣之白嶺漣川縣之玉溪鐵原府之龍潭豐川金化縣之都昌等六驛 幽僻斜路 使客稀少 竝準直路例 各立馬十五匹 公須田十五結 苦歇不同 其豐泉驛合於田原驛 稱豐田 都昌驛合於生安驛 稱生昌 其餘桃源白嶺玉溪龍潭等四驛田地 各依小路例 只給大馬二匹小馬二匹位田六結公須田六結 其餘田竝於直路各驛 以軍資田換給 (중략) 命依議得[『세종실록』 6년 3월 25일]
참고문헌
김옥근, 「조선시대 역전논고」, 『경제사학』 1, 1980.
이경식, 「조선전기 역전의 경영 변동」, 『변태섭박사화갑기념 사학논총』, 삼영사, 1985.
이장우, 「조선초기의 아록전과 공수전」, 『이기백선생고희기념 한국사학논총』, 1994, 일조각.
이장우, 「조선초기의 역전」, 『역사학보』 142, 1994.
有井智德, 「李朝初期における公的土地所有としての公田」, 『조선학보』 74, 1975.
역리위전(驛吏位田)
정의
역리가 공무 수행의 대가로 절급받은 전지.
내용
역리의 입역(立役)에 대한 반대급부로 절급된 전지(田地)가 역리위전(驛吏位田)이었는데, 고려시대 이래로 2결을 절급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만 역리 1명당 무조건 2결씩 절급한 것이 아니라 3명의 정(丁)을 하나의 호(戶)로 편제하여[三丁一戶] 그 호수(戶首)에게 2결을 절급하는 방식을 취하였다.
1445(세종 27) 전제개혁(田制改革)을 거치면서 많은 유역인(有役人)들의 전지가 혁파되거나 축소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역리위전을 비롯한 역 소속 유역인들의 전지는 그대로 존속되었다. 뿐만 아니라 여러 세대에 걸쳐 내려온 경작지라도 역리위전으로 설정되면 관례에 따라 강제로 수용하여 역리에게 지급하는 대신 해당 민전의 소유주에게는 다른 지역의 전지로 보상해 주었다. 그만큼 역이 중앙정부의 지방에 대한 지배력을 유지하고 강화시켜 나가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기능을 수행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특혜를 인정해 주었던 것이다.
용례
舊例 雖累代耕作之田 若屬各驛位田 則驛吏例奪而耕之 以驛吏艱於備馬故也 然平民全賴仰食之田 一朝見奪 因而失業 亦爲可憐 故至丁巳年 禁驛吏之非因備馬濫奪民田者 其菜麻兩麥之田 則不許奪耕 驛吏欲依前例奪耕 訟之不已 (중략) 右議政許稠等議曰 平民雖或失業 各有依歸 可遂生業 若使各驛彫弊 則軍國傳命重事 難以平民代之 宜令驛吏任意區處 左贊成申槪等議 各驛位田 驛吏任意區處 初無成法 (중략) 從許稠等議 [『세종실록』 20년 10월 26일]
참고문헌
김옥근, 「조선시대 역전논고」, 『경제사학』 1 , 1980.
이경식, 「조선전기 역전의 경영 변동」, 『변태섭박사화갑기념 사학논총』, 삼영사, 1985.
이장우, 「조선초기의 역전」, 『역사학보』 142, 1994.
有井智德, 「李朝初期における公的土地所有としての公田」, 『조선학보』 74, 1975.
역전(驛田)
정의
조선시대 역을 유지하고 운영하는 데 필요한 비용을 조달하기 위하여 설정된 전지.
내용
1. 역전의 설치와 정비
1388년 위화도회군 이후 정치적 실권을 장악한 이성계(李成桂) 등은 지방에 대한 지배력을 좀더 확실하게 하기 위하여 역제(驛制)의 정비를 서두르는 동시에 역(驛)의 원활한 운영을 위한 경제적 토대를 서둘러 마련하였다. 그 결과 고려 후기의 역전(驛田) 분급 규정을 토대로 한 새로운 규정을 제정하였다. 그렇지만 고려말 당시에는 양전(量田)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였으므로 역전이 규정대로 절급되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조선건국 이후 역제의 정비와 병행하여 역전을 정비하는 작업도 꾸준히 추진되었다.
특히 1445년(세종 27) 7월의 전제개혁(田制改革)을 거치면서 여러 국가기관의 절속지(折屬地)와 유역인(有役人)들의 구분전(口分田)이 대부분 혁파되면서 국가 수세지(國歌收稅地)로 전환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역전은 그대로 유지되었으며, 마침내 『경국대전』에서는 역공수전(驛公須田)·장전(長田)·부장전(副長田)·급주전(急走田)·마전(馬田)·역관둔전(驛官屯田)으로 정비되었다. 조선초기의 정권 담당자들이 역을 중앙집권적인 통치 체제를 유지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제도로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처럼 역의 원활한 유지와 운영을 위하여 경제적 토대를 마련하는 작업에도 적극적이었던 것이다.
2. 역전의 내용
역에 분급된 전지(田地) 가운데 역의 공무 수행 경비를 조달하기 위한 공수전은 고려말 전제개혁 이후 조선초기를 거치면서 몇 차례에 걸쳐 축소·절급되었다. 국가 재원의 분산을 막으면서 인민과 전지에 대한 국가의 직접 지배력을 강화시키고자 그렇게 한 것이었다. 대신 부족해진 역의 운영 재원을 보충하기 위하여 세조 때부터 일반 군현과 마찬가지로 역에도 관둔전을 절급하기 시작했다.
역리(驛吏)·관부(館夫)·전운노비(轉運奴婢)·급주노비(急走奴婢) 등 역에 소속된 유역인들의 경우 3명의 정(丁)을 하나의 호(戶)로 편제하여[三丁一戶] 그 호수(戶首)에게 구분전(口分田)을 지급하였다. 뿐만 아니라 관부·전운노비·급주노비와 조역노비(助役奴婢)에게는 수세권(收稅權)을 매개로 하는 구분전 외에 소경전(所耕田)을 별도로 절급하였다. 마전[馬位田]의 절급 대상자는 원칙적으로 역리였으나, 역리의 사망이나 유망 등으로 입마(立馬) 대상자가 부족하게 되면 역 부근에 거주하는 평민, 역리·역녀와 공천(公賤) 사이에서 태어난 사람, 역리와 함께 거주하는 매부나 사위 등을 입마 대상자로 선정하여 마전을 절급하기도 하였다.
3. 역전의 소유와 경영
역에 절급된 공수전과 역 소속 유역인들에게 절급된 구분전, 그리고 마위전은 모두 민전(民田) 위에 설정된 수세지(收稅地)였다. 동시에 역공수전·구분전·마위전으로 설정된 전지의 소유·경작자는 원칙적으로 역리를 포함한 역 소속 유역인들이었다. 그러므로 역전은 역 소속 유역인들의 소경전 위에 설정되었던 것이다.
역리는 역공수전과 역리구분전(驛吏口分田)으로 설정된 전지의 소유·경작자로서 역공수전세의 납세자인 동시에 역리구분전의 수세자(收稅者)였으며, 관부와 전운노비·급주노비는 자신들의 구분전이나 역공수전으로 설정된 전지를 소유·경작하면서 동시에 역공수전세의 납세자와 구분전세(口分田稅)의 수세자였다. 그리고 조역노비는 역공수전이나 역 소속 유역인들의 구분전으로 설정된 전지를 소유·경작하면서 역공수전세나 구분전세의 납세자로 존재하였다. 한편, 입마 대상자는 마위전을 소유·경작하면서 역마를 사육하는 동시에 마위전세(馬位田稅)를 역에 납부하였다.
4. 역전의 경영 변화
역전은 원칙적으로 역 근처의 전지를 절급하는 것이 원칙이었으며 역 근처에 마땅한 전지가 없을 경우에는 역 근처의 민전을 강제로 수용하여 역전으로 절급하였다. 또한 양전(量田)으로 원래 절급받은 전지의 자호(字號)가 바뀌어도 다른 기관이나 사람들에게 절급된 전지들과는 달리 원래의 자호에 따라 이동하지 않고, 자호를 바꾸어서 본래의 위치를 그대로 절급받았다.
국가의 이러한 역전정책은 당연히 인민들의 심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거기에다가 시간이 흐르면서 역 소속의 유역인들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국가의 통제력이 강력하게 미치지 못했던 일반민들까지 입마인(立馬人)으로 차정(差定)되고 있어서 국가에서는 입마인과 마위전 관리가 한층 어려워지고 있었다. 때문에 국가는 역의 안정적인 운영을 위해서 입마인과 마위전에 대한 관리를 강화시켜야만 하였다.
그리하여 국가는 역공수전과 유역인들이 절급받았던 전지를 소유·경작과는 분리된 각자수세(各自收稅)의 민전(民田)으로 전환하여 인민들의 불만을 무마시키는 한편, 마위전을 자경무세(自耕無稅)의 공전(公田)으로 규정하여 국가의 관리를 보다 강화시킴으로써 국가의 역 운영 체제를 안정적으로 유지하고자 하였다.
5. 전세 수취 체계와 재정 운영
역전으로부터의 전세(田稅) 수취는 역리가 실무를 담당하였으며, 역승(驛丞)이나 찰방(察訪)이 이들을 감독하였다. 그리고 관찰사는 다시 이들을 통제하였다. 동시에 중앙정부는 경차관(敬差官)을 파견하여 관찰사-역승·찰방-역리로 이어지는 역전의 전세 수취 체계를 감독하고 관리하도록 하였다. 그렇게 함으로써 국가는 역 운영 체제를 좀더 안정적으로 유지해 나가고자 하였다.
역 재정의 실무 담당자는 역에 거주하고 있는 역리들이지만, 1차 책임자는 역승이나 찰방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이들의 자의적인 판단에 따라 출납 운영이 이루어졌던 것이 아니라 관찰사의 통제 아래 운영되고 있었다. 그리고 전세 수취뿐만 아니라 지출도 정해진 규정에 따라 이루어졌으며, 출납에 관한 내역은 중기(重記)에 기록하여 중앙정부의 감찰을 받았다.
역공수전세와 역관둔전으로부터의 소출은 무엇보다도 조선과 중국을 왕래하는 양국 사신들과 각 지방으로 파견되는 봉명사신(奉命使臣)들의 지대(支待) 비용으로 가장 많이 지출되었다. 그 밖에도 역 관사(館舍)의 유지·관리 비용이나 찰방·역승의 판공비, 그리고 종이 구입 등과 같은 역의 공무 수행을 위한 비용 등으로 지출되었다. 구분전세는 역 소속 유역인들의 출장비 등과 같은 공무를 수행하는 비용으로 지출되었으며, 마위전세는 평상시의 역마 사육비, 공무를 수행중인 역마의 초료(草料)나 새로운 역마의 구입 비용 등으로 지출되었다.
그런데 역의 재정 지출 규모는 매년 일정하거나 더욱 증가하였음에 불구하고 역전으로 부처의 수입이 항상 부족한 형편이었다. 무엇보다도 당시는 자연재해 등을 극복할 수 있는 농업기술이 발달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매년 일정한 생산력을 유지할 수 없었다. 거기에다가 조선초기에는 지나칠 정도로 빈번하게 지방으로 각종 봉명사신들을 파견하였다. 뿐만 아니라 찰방·역승 등의 작폐와 세력가들의 역전 침탈도 역 재정을 악화시켰다.
그 결과 과중한 부담을 견디지 못한 역 소속 유역인들이 유망하는 사태가 끊임없이 발생하였다. 국가는 이를 막아 보고자 여러 가지 조치를 취하였지만, 모두 근본적인 개혁책이 아닌 임시 미봉책에 불과하여 역의 재정 문제는 끊임없는 악순환을 되풀이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전으로부터의 수입이 지방 재정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가장 컸다. 말하자면 역전으로부터의 수입은 국가의 지방 통치에서 가장 중요한 재원으로 기능했던 것이다.
용례
議政府據戶曹呈申 今田制改詳定事及可革條件 磨勘後錄 (중략) 一 今試貢法 考其各驛位田盈縮之數 淸安縣之時和驛田 本一百結 今盈二結八十八卜 咸安郡春谷巴水二驛田 本一百六十結 今縮五結四十六卜 盈縮如此各異 盈者移屬國用田 縮者待八道地品改量後 當更續議 姑從元定卜結之數 推移準給 (중략) 從之 [『세종실록』 27년 7월 13일]
참고문헌
『고려사(高麗史)』
『경국대전(經國大典)』
『삼봉집(三峰集)』
김옥근, 「조선시대 역전논고」, 『경제사학』 1, 1980.
이경식, 「조선전기 역전의 경영 변동」, 『변태섭박사화갑기념 사학논총』, 삼영사, 1985.
이장우, 「조선초기의 역전」, 『역사학보』 142 , 1994.
有井智德, 「李朝初期における公的土地所有としての公田」, 『조선학보 』74, 197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