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설서>
신증동국여지승람 제31권 / 경상도(慶尙道)
삼가현(三嘉縣)
동쪽으로 의령현(宜寧縣) 경계까지 13리이고, 남쪽으로 진주 경계까지 14리이며, 서쪽으로 단성현 경계까지 13리이고, 북쪽으로 합천군 경계까지 25리인데, 서울과 거리는 7백 83리이다.
【건치연혁】 삼기현(三岐縣)은, 본래 신라 삼지현(三支縣)인데 마장(麻杖)이라 하기도 한다. 경덕왕이 삼기라 고쳐서 강양군 속현으로 만들었다. 고려 현종은 그대로 합주에 이속시켰고, 공민왕이 감무를 설치하였다. 본조 태조 때에 군으로 승격시켰으나 태종이 다시 현으로 강등하였다. 가수현(嘉壽縣)은 본래 신라 가주화현(加主火縣)이다. 경덕왕이 가수(嘉壽) 수(壽)가 수(樹)로 된 곳도 있다. 라 고쳐서 강주(康州) 속현으로 만들었던 것인데, 고려 현종이 합주에 이속시켰다. 본조 태종조에 두 현을 합쳐서 지금 명칭으로 고치고, 감무를 두었다가 뒤에 현감으로 고쳤으며, 관아를 가수로 옮겼다.
【관원】 현감ㆍ훈도 각 1인.
【군명】 삼지(三支)ㆍ삼기(三岐)ㆍ기산(岐山)ㆍ마장(麻杖)ㆍ가주화(加主火)ㆍ가수(嘉樹)ㆍ가수(嘉壽)ㆍ봉성(鳳城).
【성씨】 삼기(三岐) 염(廉)ㆍ박ㆍ오ㆍ조(曺)ㆍ공(公). 가수(嘉壽) 노(魯) 오(吳)로 된 곳도 있다. 박ㆍ이ㆍ삼(森).
【풍속】 습속이 굳세고 사나움을 숭상한다 관풍안에 있다.
【산천】 황산(黃山) 현 서쪽 47리 지점에 있다. 자굴산(闍崛山) 현 동쪽 17리 지점에 있는데 의령현 편에 보라. 감악산(紺岳山) 현 북쪽 75리 지점에 있는데 거창군 경계이다. 악견산(嶽堅山) 현 동쪽 40리 지점에 있다. 비봉산(飛鳳山) 현 동쪽 2리 지점에 있다. 마장산( 馬莊山) 현 북쪽 6리 지점에 있다. 금성산(金城山) 삼기현에 있다. 심천(深川) 객관 남쪽에 있다. 물 근원이 화지현(花旨峴)에서 나오며 관수루(觀水樓) 앞을 지나서 단성현(丹城縣) 단계천(丹溪川)에 들어간다. 소을비포(所乙非浦) 현 서쪽 47리 지점에 있다. 도두지(都豆池) 현 남쪽 10리 지점에 있으며, 둘레가 2백 보이다. 점연(砧淵) 현 서북쪽 46리 지점에 있다. 물 근원이 조산(鳥山)에서 나와서 합천 부자연(父子淵)을 지나고, 현 경계에 들어와서 이 못이 된다. 율연(栗淵) 현 동쪽 2리 지점에 있다. 늙은이가 전하는 말에, “합포 장수 김광부(金光富)가 패전한 곳이라 하며, 이 못에 목욕하는 자가 가끔 칼을 건져 낸다.” 하였다.
【토산】 철 황산에서 난다. 은어[銀口魚]ㆍ꿀[蜂蜜]ㆍ감ㆍ지황. 『신증』 사향ㆍ오미자ㆍ당귀ㆍ쏘가리.
【봉수】 금성산 봉수 남쪽으로 단성현 입암산(笠巖山)에 응하고, 북쪽으로 합천군 소현(所峴)에 응한다.
『신증』 【궁실】 쌍명헌(雙明軒) 곧 객관 동헌이다.
【누정】 관수루(觀水樓) 객관 남쪽 7보쯤에 있다. 성화(成化) 경인년 여름 현감 정자숙(鄭自淑)이 건립하였다. 절도사 이극균(李克均)이 기문하였다.『신증』 정금당(淨襟堂) 관수루 서편에 있다.
【학교】 향교 현 남쪽 8리 지점에 있다.
【역원】 유린역(有麟驛) 현 동쪽 3리 지점에 있다. 오동원(梧桐院) 현 남쪽 1리 지점에 있다. 도두원(都豆院) 현 남쪽 11리 지점에 있다. 입석원(立石院) 현 동쪽 16리 지점에 있다. 내선원(內禪院) 현 서북쪽 46리 지점에 있다. 율원(栗院) 현 서북쪽 70리 지점에 있다. 망현원(網峴院) 현 서쪽 19리 지점에 있다. 항여원(項餘院) 현 서쪽 8리 지점에 있다.
【불우】 봉두사(鳳頭寺)ㆍ금곡사(金谷寺) 모두 자굴산에 있다. 감악사(紺岳寺) 감악산에 있다. 몽계사(夢溪寺) 황산에 있다.
【사묘】 사직단 현 서쪽에 있다. 문묘 향교에 있다. 성황사 현 북쪽 1리 지점에 있다. 여단 현 북쪽에 있다.
【고적】 고삼기현(古三岐縣) 지금 관아에서 북쪽으로 47리 거리인데 군창(軍倉)이 있다. 면현소(緜峴所)ㆍ토촌소(吐村所)ㆍ유린서정(有麟西亭) 현 동쪽 7리 지점에 있다. 신우(辛禑) 5년 9월에 왜적이 단계ㆍ거창ㆍ야로(冶爐) 등 현을 침략하고 가수현에 이르렀는데, 도순문사 김광부(金光富)가 여기에서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 이숭인(李崇仁)의 시에, “오호라, 노래한다. 남주(南州)의 소식이 지금은 어떠한가. 섬 오랑캐 방자하게 이 땅에 들어오니, 농부는 쟁기를 놓고 부녀는 북을 버렸다. 진양(晉陽)은 옛부터 큰 진(鎭)이어서, 인물이 호걸스럽고 사납기 예락하(曳落河) 같다. 합천도 지척으로 흥안(興安)과 닿았는데, 천부(天府)라 할 만하게 산이 높다랗다. 수백 년 내려오며 제대로 태평하여서, 여염집이 땅에 가득하고, 적은 병도 없었네, 요망한 왜구가 일조에 난을 일으켜, 빠르게 치달리는 것이 바람 같았다. 공공연하게 대낮에 노략질하니, 숨을 겨를도 없거늘 누가 감히 꾸짖으리. 합포 김공은 간담이 매우 커서, 내 한몸 보기를 티끌처럼 여겼다. 수염을 흩날리며 크게 호통치면 천지도 움직였다. 천 길 언덕 같은 왜적에 곧장 돌격하였건만, 말이 넘어지며 그대로 상해를 입었다. 그래도 왜적을 꾸짖으며 여전히 창을 잡았다. 여러 장수 옆에서 볼 때 낯빛이 변했고, 사졸은 물결처럼 무너져 갔다. 드디어 좋은 백성의 피를 들에 뿌리게 되니, 원통한 기운 치솟아서 큰 화기(和氣)를 건드렸다. 내가 이 말을 들으니 매우 슬퍼서, 갑자기 눈물이 쌍으로 흐르네. 남파(南坡) 선생은 어른 항렬이시다. 귀밑머리 하얗게 쉰 나이에 세상을 염려하네, 어찌하면 가서 뵙고 이 회포 말할 건가. 우선 한 곡조 오호가(嗚呼歌)를 붙여 본다.” 하였다.
안견산성(岳堅山城) 석축이며, 둘레가 2천 2백 8척이다.
『신증』 【명환】 본조 정자청(鄭自淸).
【효자】 본조 이온(李榲)ㆍ정원저(鄭原渚) 함께 효자로써 정문하였다. 정옥량(鄭玉良) 벼슬은 하양 현감(河陽縣監)이었는데 성품이 지극히 효성스러웠다. 벼슬에서 물러나와 본현 유린리(有麟里)에 살면서 어미를 봉양하였다. 어미가 죽자 장사와 제사를 예로 하고, 3년 뒤에도 죽을 때까지 돌아가신 부모의 신위에 아침저녁으로 음식을 올렸다. 사당 옆에서 갑자기 흰 대추나무 일곱 가지가 나서, 두어 자쯤이나 되더니 6년 만에 말라 죽었다.
【열녀】 본조 정씨(鄭氏) 곽숭의(郭崇義)의 아내이다. 지아비가 20살 때에 서울에 있다가 병들어 죽었는데, 정씨는 고향으로 운구하여 정사지내고 시묘하며 나물밥으로 3년을 마쳤다. 시부모를 정성으로 섬기고, 10년 동안을 고기를 먹지 않았다. 일이 알려져서 정려되었다.
『신증』 소사(召史) 수군 박춘산(朴春山)의 아내이다. 지아비가 물에 빠져 죽었다. 소사는 시체를 찾다가 얻지 못하자 언덕에서 통곡하다가, 그대로 물에 몸을 던져 죽었다. 일이 알려져서 정려되었다.
【제영】 일도소가나대수(一道疎柯羅代樹) 이방한(李邦翰)의 시에, “한 줄기 성긴 가지는 신라 때 나무요, 사방 창에 푸른 빛 띤 것은 사공(謝公)의 산이다. 남북으로 보내고 맞이하노라 겨를 없는데, 시냇가 백로만이 한가하구나.” 하였다. 일말계류통북포(一抹溪流通北浦) 이구(李懼)의 시에, “한 줄기 시냇물은 북포(北浦)에 통하고, 두어 마을 뽕나무는 서쪽 밭둑에 그늘졌네.” 하였다. 남거계성급(南去溪聲急) 윤자영(尹子濚)의 시에, “남쪽으로 가는 시냇물소리 급하고 북쪽으로 오는 산 형세가 높다.” 하였다.
『신증』 백판쌍비영죽리(白板雙扉暎竹籬) 강혼(姜渾)의 시에, “옆 고을에 까마귀 울어 해가 지는데, 눈 갠 강변 길이 꼬불꼬불하다. 곳곳에 인가는 숲을 의지했는데, 흰 널판, 쌍 사립문이 대 울타리에 비친다.” 하였다. 이화조옥두견제(梨花照屋杜鵑啼) 먼저 사람의 시에, “연기는 막막하고 달은 쓸쓸한데, 은하수 비꼈고 북두칠성 나지막하네. 지난 해 따뜻하던 봄밤 생각나누나. 배꽃 피어 집을 비추고 두견이 울었지.” 하였다.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연혁】 고종 32년에 군으로 고쳤다.
《대동지지(大東地志)》
【연혁】 본래는 신라의 가주화(加主火)다.
【방면】 상곡(上谷) 동으로 처음이 5리, 끝이 15리이다. 아곡(阿谷) 남으로 처음이 5리, 끝이 10리이다. 문송(文松) 남으로 처음이 10리, 끝이 20리이다. 백동(柏洞) 북으로 처음이 10리, 끝이 20리이다. 가회(佳會) 북으로 처음이 10리, 끝이 30리이다. 고현(古縣) 서북으로 처음이 40리, 끝이 50리이다. 태평(太平) 서북으로 처음이 30리, 끝이 40리이다. 병수모대(並水毛臺)ㆍ계산(界山) 모두 서북으로 처음이 60리, 끝이 70리이다. 지옥(知玉) 서북으로 처음이 70리, 끝이 80리이다. 신지(新旨) 서북으로 처음이 70리, 끝이 1백리이다. 이상 7면과 삼기고현(三岐古縣)은 위치가 동북으로는 합천에 접하고, 서남으로는 산청에 접하며 북으로는 거창이다.
【성지】 읍성(邑城) 둘레가 3천 2백 59척, 샘이 둘이다. 악견산성(嶽堅山城) 둘레가 2천 2백 8척, 가운데에는 개울이 있는데, 천연적으로 험한 곳이다. 금성(金城) 서북으로 50리에 있는데 삼기고현에 옛 터가 있다.
【창고】 읍창(邑倉)ㆍ삼기창(三岐倉) 고현(古縣)에 있다. 외창(外倉) 서북으로 70리에 있다.
【토산】 대[竹]ㆍ닥종이[楮].
【사원】 용암서원(龍巖書院) 선조 계묘년에 세웠고, 광해주 기유년에 사액하였다. 조식(曺植) 진주 편에 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