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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중심의 섬김
2013. 4. 21(주일낮예배) 사무엘상 16:6-13
맹구 아버지가 맹구에게 술의 해악을 가르쳐 주려하였다. 그래서 벌레를 잡아 한 마리는 물잔에 넣고, 다른 한 마리는 위스키 잔에 넣었다. 시간이 조금 지난 후에 물속에 있던 벌레와 위스키 속에 있던 벌레를 꺼내었다. 그랬더니 물 속에 있던 벌레는 정신을 차리고 살아났지만, 위스키에 들어 있던 벌레는 비틀거리더니 결국 죽고 말았다. 이 실험을 보여 준 후 맹구아버지는 맹구야 이게 무슨 의미인지 알겠니? 하고 물었다. 그때 맹구는 아버지가 생각하지 못한 대답을 이렇게 했다.
그렇군요. 술을 마시면 배 속의 벌레가 다 없어진다는 거죠?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내 뜻대로 되는 일이 얼마나 있는가? 사실 우리의 삶 속에서 내 뜻대로 되는 일은 거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얼마 전에 JYP 박진영씨가 힐링캠프에서 있었던 인터뷰 동영상을 보았다. 박진영씨는 자신의 삶에서 가장 소중히 여기는 가치는 자유였다. 그래서 그는 자유에 대하여 갈망을 하다가 자유를 위하여 돈을 벌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박진영씨는 26살의 나이에 20억을 벌게 되었다. 너무 짧은 시간에 쉽게 20억을 벌게 된 박진영씨는 사람이 참된 자유를 가지려면 돈만 가지고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목표를 잘못 세웠다고 생각한 박진영씨는 새로운 도전을 하였다. 그것이 명예였다. 그래서 자신의 삶에서 가장 어려운 것이 뭘까? 고민을 한 박진영씨는 미국진출을 계획하였다. 그런데 놀랍게도 미국진출 11개월 만에 아시아 작곡가 최초로 빌보트 챠트 10위권에 진입을 하게 되었다. 박진영씨는 자신이 생각한 그 자리에 올랐을 때 이것도 아니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되었다. 자신이 이루고 싶은 것을 모두 이루었을 때 박진영씨가 무릎을 치면서 깨달은 것이 하나있었다. 그것은 내 역량에 비하여 결과가 너무 컸다는 것이다. 박진영씨 표현그대로 하면 나한테 지독한 운이 따랐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자신에게 따랐던 운을 기록하기 시작했다.
1. 1972년 한국에서 우리 부모님의 자식으로 태어난 것
2. 엄마가 억지로 피아노를 치게 한 것
3. 7살 때 미국에서 2년반을 억지로 살게 된 것
4. 그때 마이클 잭슨을 만난 것
5. 2년 반동안 영어를 배운 것
6. 공부를 할 수 있는 영리한 머리와 집중력을 주신 것
7. 아날로그와 디지털 경계에 태어난 것
8. 김형석 작곡가를 만난 것
9. 방시혁 작곡가를 만난 것
10. 수 많은 가수들을 만난 것
11. 16년간 계속 악상이 떠오른 것
12. 각종 사고와 질병에도 아직까지 안 죽은 것
박진영씨는 이러한 감사의 내용을 기록한 후 지금도 늘 가지고 다닌다고 한다.
그런데 이러한 것들 중에 만약 하나라도 없었다면 현재의 박진영으로 존재할 수 없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 순간 박진영은 내가 뭘 잘했다고 떠들지 하는 겸손을 가지게 되었다. 그때부터 박진영씨는 감사의 삶을 살게 되었다. 그냥 감사할 수가 없어서 밤이면 창문을 열고 하늘을 보면서 감사합니다 하고 고백을 했다고 한다. 그리고 말로만 감사할 수 없어서 어려운 분을 도울께요 하고 하늘을 보며 약속을 한 것이다. 박진영씨는 명예를 추구하는 삶에서 이웃을 돕고 섬기는 삶으로 삶을 바꾼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하니 정말 자신이 원하는 자유가 왔다. 삶이란 열심히 살고 그것을 나누며 사는 것이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그런데 어느날 찾아올 것같은 목소리가 있다고 한다. 그 목소리가 뭐겠는가?
고맙다면서 나 안 찾아와? 이 부분을 동영상으로 다시 한번 보시기 바란다.
박진영씨의 종교는 기독교가 아니다. 그러한 박진영씨는 참된 자유를 가지기 위하여 돈도 벌어보고, 또 명예도 가져보았지만 거기에서 자유를 얻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오히려 박진영씨가 자기의 실력이 아니라, 내가 운이 좋은 사람이었구나! 하고 겸손해 질 때에 참된 인생이 뭔지도 알고, 또 참된 자유의 삶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사람이 겸손해 지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저는 결혼 20년차 남편이다. 결혼을 한 후 신혼여행을 가기 전에 주례를 하신 담임목사님을 찾아뵈었다. 그때 목사님은 신혼여행가면 반드시 예배를 드리라고 당부를 하셨다. 담임목사님이 전도사에게 하신 말씀이므로 저는 순종을 하였다. 그래서 첫날 호텔에서 저녁식사를 하고 아내와 함께 예배를 드렸다. 아내는 지금도 생각하는지 모르겠지만, 첫째날 아내가 기도하고 저는 에베소서로 말씀을 전하였다. 그날 설교 제목은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것이었다. 당시 능력이 없어 아버지와 함께 살아야했는데, 힘들고 생각이 달라도 내 주장피우지 말고 부모님을 공경하라는 설교를 하였다. 그리고 둘째날에는 교회가 주를 섬기듯이 아내는 남편을 잘 섬겨야 건강한 가정이 된다고 설교를 하였다.
제가 신혼여행을 3발 4일을 다녀왔다. 그러므로 분명히 셋째날에도 설교를 했을 것이다. 그런데 정말 놀라운 것은 무슨 설교를 했는지 도무지 기억이 나지를 않는 것이다.
이것이 저의 모습이다. 저는 신혼여행가서 설교를 해도 제가 유익한 말씀을 먼저 전하고, 기억을 하는 것이다.
그러면 여러분은 어떠한가? 예수님이 변화산에 올라가셨을 때 베드로는 예수님께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겠다고 말하였다. 베드로는 변화산에서 본 예수님의 영광에 감격하며 자신을 위함이 아니라, 주를 위해서는 뭐든지 다 할 수 있겠다는 결단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베드로의 이 헌신을 받아주지 않았다.
왜 베드로의 헌신이 예수님께 받아드려지지 않았겠는가? 그것은 베드로가 망각한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 변화산 아래에는 벙어리귀신들린 아버지가 아들을 살리기 위하여 예수님을 찾아와 있었다. 신음과 고통 가운데 아버지는 그 아들을 살리기 위하여 예수님을 찾아왔는데, 지금 베드로의 눈에는 산아래서 고통하는 사람들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베드로가 망각한 더 심각한 내용이 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사명이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16장에서 대제사장에게 잡혀 고난을 받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실 것을 말씀하여 주었다. 그때 베드로는 주여 그리마옵소서 하고 예수님을 붙잡았다가 사단아 물러가라는 야단을 맞았다. 왜냐하면 베드로는 예수님이 걸어가야 할 십자가의 길을 막아서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늘 베드로는 영광의 산에서 영원토록 머물러 있기를 간청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면 지금 베드로가 하는 이 헌신은 하나님을 위한 일인가? 사단을 위한 일인가? 저는 지금 영적전쟁에 대한 내용으로 설교를 하기 위하여 준비하고 있다. 그런데 이렇게 준비를 하는 가운데 발견한 한가지가 있다. 그것은 하나님은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기 위하여 사역을 하고 있다. 그래서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시고 예수님으로 인하여 우리를 구원하셔서 우리를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하시는 것이다. 그런데 성경을 아무리 찾아봐도 사단이 자신의 나라를 세운다는 표현이 없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나갈 때 사단의 목적은 자신의 나라가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무너뜨리는 것이 목적인 것이다. 사단은 하나님의 나라를 무너뜨리기 위하여 집중해서 하는 사역이 개인화이다. 그래서 사단은 에덴동산에 있는 하와를 유혹할 때 하는 말이 네 눈이 밝아져서 하나님과 같이 되겠다는 것이다. 사단은 하나님의 나라를 무너뜨리기 위하여 하와가 하나님의 자리에 설 수 있다는 말로 하와를 무너뜨렸던 것이다.
그런데 사단은 베드로를 통하여 예수님께도 똑같은 방법으로 유혹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사단은 예수님에게 십자가의 고난의 길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이 충만한 여기에 머물러 있으라는 것이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사단의 도구가 되어 예수님의 길을 막아서는 사람이 베드로라는 것이다. 예수님의 영광을 보고 감격하여 헌신한다는 모습이 영적전쟁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무너뜨리는 편에 서 있었다는 것이다.
베드로가 하나님의 나라를 무너뜨리는 사단의 편에 서게 된 이유가 무엇인가? 마태복음 16장에서 예수님은 ➀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을 생각한다고 지적해 주었다. 그런데 베드로가 무너질 수 밖에 없었던 또 다른 이유가 있다. 그것은 베드로의 선택은 ➁자기중심적이었다는 것이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제자이다. 제자는 스승의 말씀에 순종해야 하는 존재이다. 그런데 지금 베드로는 예수님을 이끌려고 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의 신앙의 모습이 아닌가? 지난 주 분당우리교회 이찬수 목사님은 설교 중에 최근에 있었던 한 사건을 말씀해 주었다. 얼마 전 한 청년이 목사님의 이메일에 자살하고 싶다는 내용으로 장문의 메일을 보내었다. 청년은 서울에 올라와서 자영업을 시작했는데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빚더미에 올라섰고, 빚을 갚지 못하여 카드를 사용하고, 그것도 어려워져서 청주에 있는 부모님에게까지 누를 끼치게 된 것이다. 그래서 자살을 하고 싶다는 이메일을 보낸 것이다. 목사님이 그 청년을 만났다. 그런데 목사님의 마음을 아프게 한 것은 청년의 가방에 노끈이 들어있었다는 것이다. 그 청년을 만나 위로를 해 주었는데, 성령께서 여기서 청년만 위로하지 말고 청년의 고향인 청주를 내려가라는 것이었다. 그때가 고난주간이라 강사대접도 해야 하고, 또 금요일에는 설교도 해야 하는데 청주까지 다녀오는 것은 목사님께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런데 성령께서 청주를 다녀오라고하니 어쩔 수 없이 내려가게 되었다. 내려가 보니 그 청년의 아버지는 신앙생활을 하지 않고, 어머니는 처녀 때 교회를 다니다가 너무 어려워서 교회를 다시 출석하고 있었다. 그런데 교회가 문제가 있어서 너무 시끄러워 마음을 둘 곳이 없어 고통하고 있었다. 그러한 어머니를 붙잡고 말씀으로 위로를 해 주었다. 그리고 서울로 올라오는데 그 기쁨이 얼마나 크던지 설교를 잘했다고 교인들이 칭찬하는 그 칭찬보다 훨씬 더 컸다고 간증을 하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목사님은 왜 우리의 신앙이 밋밋한지 아는가? 하고 질문했다. 우리의 신앙이 밋밋한 이유는 순종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는데 그 말씀에 순종하기 보다 내가 하나님보다 더 똑똑해서 하나님이 이렇게 하셔야 합니다고 하면서 자기 중심적으로 모든 것을 해석해 버리는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오늘 본문도 이러한 차원에서 한번 생각해 보기 바란다. 오늘 본문은 사무엘이 이스라엘의 2대왕을 세우기 위하여 베들레헴 이새의 집으로 갔다. 그리고 사무엘은 이새의 첫 번째 아들 엘리압을 보게 되었다. 엘리압이 얼마나 외모가 아름다웠던지 사무엘은 여호와의 기름부으실 자가 과연 여기 있도다 하며 좋아하였다. 그때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을 하셨다.
(삼상 16:7)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의 용모와 키를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하시더라
사무엘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베들레헴에 왔다. 그리고 그 곳에서 엘리압을 보는 순간 바로 이 사람이구나! 하면서 기뻐하고 있는데, 하나님은 아니다고 말씀을 하는 것이다.
그때 사무엘의 반응이 무엇인가? 사무엘은 이제 다 이루어놓았다고 생각하는 그 순간에 하나님이 아니다고 말씀하므로 짜증이 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사무엘은 그냥 엘리압을 돌려보내는 것이다. 그 후에 둘째 아들 아비나답, 셋째아들 삼마를 사무엘 앞으로 지나가게 하였다. 그런데 사무엘은 그들에게도 머리에 기름을 붓지 않았다. 그런데 사무엘이 그들의 머리에 기름을 붓지 않은 이유를 성경은 반복해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삼상 16:8) 이도 여호와께서 택하지 아니하셨느니라
(삼상 16:9) 이도 여호와께서 택하지 아니하셨느니라
사무엘은 자기의 생각이 아니라, 하나님이 택한 자가 누구인지를 살피며 아비나답과 삼마 그리고 이새의 7번째 모든 아들들을 그냥 지나가게 한 것이다. 사무엘이 이렇게 이새의 7명의 아들을 모두 지나가게 한 이유는 여호와께서 이들을 택하지 아니하셨느니라(10)였다. 사무엘은 철저히 하나님이 세우시는 사람의 머리에 기름을 부으려 하였던 것이다. 그렇게 사무엘이 철저히 순종하여 세운 이스라엘의 2대왕이 바로 다윗인 것이다.
만약 사무엘이 다윗이 아니라, 자기의 생각대로 엘리압을 왕으로 세웠다면 이스라엘 역사가 어떻게 되었겠는가? 엘리압과 아비나답 그리고 삼마는 블레셋 전투에 참전을 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골리앗이 두려워 벌벌 떠는 이스라엘 병사들과 함께 두려워만 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다윗이 진영으로 왔을 때에 엘리압은 화를 내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삼상 17:28) 큰형 엘리압이 다윗이 사람들에게 하는 말을 들은지라 그가 다윗에게 노를 발하여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이리로 내려왔느냐 들에 있는 양들을 누구에게 맡겼느냐 나는 네 교만과 네 마음의 완악함을 아노니 네가 전쟁을 구경하러 왔도다
이것이 엘리압이다. 엘리압은 외적으로 큰 사람 앞에서는 두려움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외적으로 자기보다 약한 사람은 무시하고 조롱하는 사람이었다. 이러한 엘리압이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다면 그는 아마 이스라엘의 모든 백성을 조롱하는 왕이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사무엘은 자기의 생각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생각을 찾고 순종하였기에 이스라엘에 가장 선한 왕을 세울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사무엘은 자기의 뜻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뜻을 찾고 구하며 머리에 기름을 부으므로 말미암아 이스라엘에는 다윗왕가라는 하나님이 기뻐하는 나라를 세우는 터를 닦을 수가 있었던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하나님의 나라는 나의 생각과 뜻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온전한 뜻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 대표적인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이다. 예수님은 공생애를 시작할 때 40일 금식 후 마귀에게 3가지 시험을 받았다. 그 중에 하나가 높은 산에 올라가서 천하만국과 영광을 보여주고 나에게 절하라 그러면 천하만국과 영광을 주리라고 하였다. 그때 예수님은 절을 한번만 하면 쉽게 천하만국을 통치할 수 있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마귀에게 절을 하지 않고 십자가의 길을 걸으셨다. 십자가는 고난이요 고통인데 예수님은 그 길을 걸으신 것이다.
왜 예수님은 마귀에게 절하는 길이 아니라, 십자가의 길을 걸었겠는가? 주위 모든 사람으로부터 칭찬받는 전도사님 한 분이 있었다. 그런데 그 전도사님에게는 남들에게 말하지 못할 죄책감이 있었다. 전도사님은 신학교를 졸업하고 장교로 군에 입대를 하였다. 그리고 군생활중에 분위기에 휩쓸려서 타락한 생활을 한 것이다. 그 후 제대를 한 전도사님은 술과 담배 그리고 온갖 세상적인 향락에 빠진 자신은 결단코 목회를 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선배 목사님이 전도사로 교회를 섬겨 달라고 부탁을 하는 것이었다. 전도사님은 선배목사님의 간곡한 부탁에 사역을 할 수 없는 이유를 설명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주저하다가 전도사 사역을 시작하였다. 교회사역을 하면서 전도사님의 마음에는 갈등과 죄책감을 떨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기도 할 때마다 하나님, 너무 힘듭니다. 저 어떻게 해야 하나요? 하나님이 하지 말라 하시면 깨끗이 그만 두겠습니다! 늘 이렇게 기도를 하였다. 그러던 어느날 전도사님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되었다.
나 없이 지내는 삶이 얼마나 비참한 것인지 이제는 알겠느냐? 깨달았으면 되었다.
전도사님은 하나님의 그 음성을 듣고 펑펑 울었다. 그 후 전도사님은 하나님이 자신의 모든 죄를 씻어주심에 감사하며 자기 사역에 분명한 답을 찾게 되었다.
하나님, 저는 이제 다른 소원이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과 동행하기만 한다면 어떤 길이든 상관없습니다. 큰 교회에서 사역하든지 작은 교회에서 사역하든지, 어떤 어려운 길이라도 주님과 동행하기만 한다면 저는 너무 기쁩니다.
전도사님이 사역을 기쁨으로 잘 감당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능력이 아니었다. 자신의 죄를 용서하시고 사역자로 삼아주신 그 은혜를 알았기 때문이다. 그 이후 전도사님은 자신의 생각이 아니라, 예수님과 동행만 한다면 자신은 언제나 순복하는 모습을 가질 수가 있었던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은 지식이나 노력이 아니라, 은혜와 사랑인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에 순복하므로 그 은혜와 사랑을 우리에게 나타내어 주신 것이다. 그리고 그 은혜를 통하여 하나님 나라의 일군을 세워가고 있는 것이다.
지금 저와 여러분은 그 은혜 안에 있는가? 이제 은혜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일군으로 일어나는 저와 여러분이 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