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7년 현 춘천 발산리서 태어나18세에 문과 급제 한림원에 등용정1품직 삼중대광 자리까지 올라효성 지극하고 매사에 공명정대“문장에 능하고 행정을 잘하며성질이 관후하고 사람 접대 잘해”고려사절요에 기록 남아 전해져몽고 춘주성(현재의 춘천) 침략 때수많은 사람들 죽임당하자부모의 시신을 찾아 헤매던 박항비슷한 모습 모조리 수습하고 매장원나라 세조가 파견한 감독관 횡포에왕에게 바로잡아달라 진언하기도몽고 침략 잦던 혼란기 극복 큰 공성품 강직해 인사 청탁 폐단도 없애1281년에 55세의 나이로 별세문장가로서의 재능도 뛰어났지만안타깝게 전해져 오는 문집 없고단지 시 3수만이 남아 있어충렬왕은 그를 `춘성부원군'에 봉해작고한 지 100년 가까이 지난 1369년정몽주가 공민왕에게 상소하여마침내 조정에서 `문의공' 시호 내려강원도 춘천시 신북읍 발산리, 어느 기운 상서롭고 볕바른 자리에 왼쪽에는 마적산, 오른쪽에는 수리봉을 두고 멀리 봉의산과 삼악산까지 건너다볼 수 있는 명당이 있다. 그 자리에 영면한 이가 누구인고 하니 바로 고려 충신 문의공(文懿公) 박항(朴恒)이다. 그는 춘천 박씨의 시조 박혁거세의 29세손이자 신라의 제54대 왕인 경명왕의 일곱 번째 왕자 강남대군의 11세손으로서, 춘천 박씨의 중시조가 되었다. 박항은 고려 고종 14년(1227)에 춘성군 장본리(지금의 춘천시 신북읍 발산리)에서 태어났다. 아호는 동보(東甫)요, 자는 혁지(革之)로, 18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한림원에 등용되었다. 이후 공적을 인정받아 충주 목사, 경상도 및 전라도안찰사, 우정언, 국자감 관리, 중추원 승선 등 주요 벼슬을 두루 거치며 승진하였고 정2품직인 중서문하성평장사에 이어 정1품직 삼중대광자리에까지 올랐다.`고려사절요'에 “항은 문장에 능하고 행정을 잘하며, 성질이 관후하고 사람 접대를 잘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듯 후대에도 칭송받는 인물이지만 그는 살아생전에도 이미 덕망이 높았다. 효성이 지극하고 매사에 공명정대하며 문장이 뛰어난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었는데 특히 효성과 관련하여 유명한 일화가 있다.몽고족이 원나라를 세우고 고려를 침입하기 시작한 것이 고종 18년 때다. 몽고족은 고려를 무려 일곱 차례나 침입하였는데, 지금의 춘천시인 춘주성을 초토화시킨 것은 고종 40년 때였다. 원나라 황제는 `내가 태양이 뜨는 곳에서 태양이 지는 곳에 이르기까지 모든 인민을 다 편안하게 하는데 너희들이 나의 명령을 거역하기 때문에 야굴을 명하여 정벌토록 한다' 운운하는 글로 고려 조정을 협박한 후 야굴군을 보내 춘주성을 침략했다. 백성들은 봉의산성으로 피신했지만 얼마 못 가 성이 함락되고 마을이 불타고 결국 수많은 사람들이 몽고군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당시 박항은 서울 개경(지금의 개성)에 있다가 부모의 사망 소식을 전해 들었다. 황급히 춘주성으로 돌아온 그는 성 아래 쌓인 시체 더미에서 부모의 시신을 찾아 헤맸다. 부모를 찾을 수가 없자 부모와 비슷한 모습의 시체가 발견되면 모조리 수습하여 매장했는데 그 수가 300여명에 이르렀다. 한편 뒷날 그의 모친이 몽고군의 포로가 되어 원나라의 수도 연경으로 끌려갔다는 소문이 돌았다. 박항은 연경에 세 차례나 사신으로 왕래하며 모친을 찾았지만 끝내 찾지 못했다고 한다. 박항의 강직한 품성을 보여주는 일화도 있다. 충렬왕 때 박항은 중추원 승선으로서 벼슬 자리에 알맞은 관리를 선발하는 행정을 담당했다. 그 이전에는 궁궐의 정방(政房)에서 그 일을 맡았던 자들이 가끔 외출하여 자신들의 집에서 자고 오고는 했다. 그래서 그들의 집 앞이 항상 벼슬 자리를 청탁하고자 하는 사람들로 들끓었다. 박항은 이를 옳지 않다고 여겼고, 처음으로 정방에서 인사 행정을 모두 마친 후에 궁궐을 나왔다. 그 이후 뒷사람들이 박항을 본보기로 삼게 되었고 마침내 인사 청탁과 관련한 폐단이 없어졌다. 그것 뿐 아니다. 박항은 참문학사(參文學事)를 거쳐 찬성사(贊成事) 자리에까지 올랐는데, 당시 왕이 과거 급제자들을 불러 자신이 보는 앞에서 다시 시험을 치르게 하는 행사인 전시(殿試)를 하고자 했다. 그런데 왕의 총애를 받던 승려 조영(祖英)이 자신의 조카를 포함한 친척들에게 이익을 주기 위해 급제 연도의 제한 없이 시험에 모두 응시할 수 있도록 제도를 바꾸려 했다.대신 이지저와 곽예 등이 전시를 반대했고 박항도 옛 제도를 따라야 한다고 건의했으나, 조영이 왕을 부추겨 결국 전시가 이루어졌다. 조영은 풀로 봉해져 있던 응시자들의 답안지를 먼저 뜯어보고 그중 열다섯 명을 급제자로 뽑아 그 명단을 왕에게 올렸다. 그런데 수석을 한 자가 조영의 조카고 나머지 급제자도 전부 그의 친척들이었다. 왕은 박항에게 석차를 매기는 일을 조영과 함께 하도록 명했다. 조영은 일이 제 뜻대로 되지 않을까봐 박항에게 왕이 이미 급제자를 정했으니 석차를 매길 필요가 없다고 했다. 그러나 그의 속셈을 알아차린 박항은 왕에게 다른 대신들과 함께 석차를 결정하겠다고 보고했고, 결국 수석을 비롯하여 급제자들이 대거 바뀌었다. 또한 박항은 대몽외교에 앞장서 몽고의 침략이 빈발하던 고려의 혼란기를 극복하는 데에도 큰 공을 세웠다. 그는 충렬왕 4년(1278)에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가 되어 왕과 공주를 수행하고 원나라 조정에 들어갔다. 이듬해 봄에 귀국한 후 왕을 무사히 호종한 공으로 좌명공신(佐命功臣)이 되었고, 다시 필도치(必 赤)가 되었으며 그해에 또 왕을 모시고 원나라에 갔다. 조국에 대한 충심과 약소국 사신으로서 원나라에 갈 수밖에 없는 상황에 대한 비애는 그의 시 `북경노상'에 잘 나타나 있다.“한결 같은 허허벌판 끝도 없는데 사시사철 광풍은 불어 예누나/잔산에 해 나는 날도 비가 내리니 옛 성채에 황사가 날아 홀연 무지개 서누나/ 고국 땅을 떠나 사천리길 머나먼데 이정표는 하나 둘씩 끝도 없누나/ 중국이 아름다워 우리 땅과 비길바 아니지만 밤마다 꿈마다 고국산천으로 돌아가누나.//”박항은 왕에게 직언을 망설이지 않는 충신이면서 백성에게는 늘 그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어진 목민관이고자 했다. 원나라가 일본을 정벌하기 위해 전쟁에 필요한 군량이며, 무기와 군자금 등을 모두 고려에서 징발하려고 했을 때였다. 원나라 세조가 감독관으로 보낸 흔도(熊都)와 홍다구(洪茶丘) 등이 우리 백성들에게 횡포를 부려도 왕과 조정 대신들은 원나라의 명령을 좇기만 할 뿐 아무 이의도 제기하지 못했다. 이에 백성들의 고충을 보다 못한 박항이 충렬왕에게 이 문제를 바로 잡아달라고 진언하여 원나라 세조에게 국서를 보내게 했고 이후 원나라 감독관들은 더 이상 횡포를 부릴 수 없게 되었다. 이와 같이 나라를 위하고 임금을 위하며 백성을 위해 나라 안팎에서 적지 않은 공을 세운 박항은 충렬왕 7년(1281)에 55세의 나이로 별세했다.문장가로서의 재능도 뛰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안타깝게도 현재 전해져 오는 문집은 없고, 단지 시 3수만이 남아있을 뿐이다. 충렬왕은 박항의 치적과 노고에 답하고자 그를 `춘성부원군'에 봉했다. 그리고 그가 작고한 지 100여년이 지난 후인 공민왕 18년(1369)에 정몽주가 “고(故) 찬성사 박항은 충효문학이 특출하고 국난에 임하여 위대한 치적과 공을 세운 명현이신데 아직 그 충절에 대한 나라의 은택을 받지 못함은 심히 유감되고 한탄스러운 일”이라고 왕에게 상소하여 마침내 조정에서 박항에게 `문의공(文懿公)'이라는 시호를 내렸다.박항의 큰아들 박원굉은 금부(金符)를 하사받고 부만호(副萬戶)까지 지냈다. 제 아버지처럼 평장사를 역임했으므로 평장사공계라 불린다. 박항의 둘째 아들 박원비는 예조판사를 지냈으므로 판사공계라 한다. 평장사공계는 13개 계파로, 판사공계는 14개 계파로 나뉘어 현재 춘천 박씨는 모두 27계파로 자손이 크게 번창했다. 춘천에 전설처럼 내려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박항의 묘역이 위치한 자리가 자손들이 대대로 부유하고 번창할 백대천손지지(百代千孫之地)라 한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 박항의 후손이 어디 춘천 박씨뿐만이겠는가. 약 800년 세월을 거슬러 21세기 대한민국 이 땅의 국민 모두가 박항과 같은 훌륭한 선조들의 은덕을 입고 오늘을 살고 있는 것이니, 박항은 우리 모두의 선조요, 우리 모두는 그의 자손들이라 해야 할 것이다.
<관련기사1>
<3> 춘천 박씨(春川 朴氏)
先代, 외교능력 탁월 국난타개
"세종실록지리지"를 보면 춘천을 관향으로 하는 성씨로서 박, 신, 최, 허를 들고 있다. 그러나 춘천 박씨를 제외하고는 오늘날 춘천 신씨, 춘천 최씨, 춘천 허씨를 만나보지 못했다. 풍수학을 하는 사람들은 춘천시 신북읍 발산리에 위치한 춘천 박씨 중시조 박항의 묘소가 명당이기 때문에 27개파까지 나뉠 정도로 가문이 번성했다고 말한다. 춘천 박씨 중시조의 묘소를 답사해 보면 가문의 계승과 흥망성쇠가 풍수와 무관하지 않음을 짐작할 수 있다. 오음리로 넘어가는 배후령을 사이에 두고 마적산을 좌청룡, 수리봉을 우백호로 삼아 유택을 마련했다. 묘소에서 바라보면 넉넉하게 펼쳐진 우두벌 건너 춘천의 진산인 봉의산과 수문장격인 삼악산이 박항의 묘역을 에워싸고 있다. 강원대 옥한석 교수는 박항의 묘소는 우두벌을 향한 연소형(燕巢形), 봉의산에서 제비가 먹이를 물고 둥지로 날아오르는 형세라고 지적했다. 그러나 문제는 좌향이라고 했다. 혈처를 봉의산 쪽으로 더 틀었어야 된다는 분석일 것이다. 이 때문에 귀한 인물이 나기 어렵다고 한다. 실제로 춘천 박씨는 중시조 이후 자손은 무수히 번창했지만 특출한 인물이 드물다고 했다. "박항 할아버지는 고려 공신이었습니다.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고 이신벌군(以臣伐君)하지 않는다는 어른의 유훈을 받아들여 세손들이 조선왕조에 들어와서는 과장에 나가지 않았던 때문에 일세를 풍미할 만한 인물이 나지 않았던 것이죠." "그러고 보니 춘천 박씨네는 절개가 뛰어난 집안이네요. 선조께서 평소 자손이 번창하기를 원했지 귀한 인물이 나기를 원치는 않았기 때문에 지관이 그런 자리를 점지해주었다는 설도 있던데..." 춘천 박씨 종친회 사무실에서 자주 만났던 박양민 총무가 고개를 끄덕이며 우두벌을 가리켰다. "소양강과 북한강이 만나는 두물머리가 한눈에 들어오니 자손이 어찌 번창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럴 듯한 대답이었다. 춘천 박씨의 시조는 신라를 처음 연 박혁거세라고 박 총무는 어깨에 힘을 준다. 혁거세의 29세손인 경명왕(景明王;신라 54대 왕)의 아홉 왕자 중 일곱째 왕자인 강남대군 언지(彦智)의 11세손인 박항이 춘천을 본관지로 하는 춘천 박씨의 중시조가 되었다. 박항은 고려 고종14년(1227)에 춘성군 장본, 맥국의 도성이었던 신북읍 발산리에서 태어났다. 18세 때 문과에 급제하여 한림원(翰林院;조정의 문서를 작성 보관하던 관청)에 등용되면서 벼슬생활을 시작했다. "스물일곱에 충주목사, 스물아홉에 경상전라 안찰사, 설흔둘이든가 지금의 중앙부처에 해당하는 문하성 우언정을 역임할 정도로 관운이 좋았지요." 종친회 박양민 총무는 국민교육헌장 암기하듯 문중 내력을 줄줄이 꾀고 있었다. 그는 단단한 외모처럼 중시조의 행장도 또박또박 짚어나갔다. 국자감 관리, 중추원 승선(정3품직) 등 두루 요직을 거쳐서 박항의 나이 쉰둘인 충렬왕 4년(1278)에 동지밀직사(왕명 출납 관장하며 군사기밀 담당 종2품직)로 왕을 호종하여 원나라에 갔다가 이듬해 2월에 환국했다. 왕을 무사히 호종한 공으로 좌명공신(佐命功臣;반역자를 물리친 공신)이 되었고 중서문하성 평장사(平章事;국무총리격인 문하시중 바로 아래 정2품직)를 거쳐 삼중대광(정1품직)에 올랐다. 충렬왕은 그간의 노고에 답하고자 박항을 춘성부원군에 봉했다. 작고한지 백여 년이 지난 공민왕 때 박항의 충효와 애국치적을 포은 정몽주가 상소하여 마침내 조정에서 문의공(文懿公)이란 시호를 내렸다. 원나라가 일본을 정벌하려고 고려에 처들어와 군기와 군량을 징발할 때였다. 전쟁포로 다루듯 원나라 감독관 혼도와 홍다구 등의 횡포가 심했다. 이를 보다못한 박항이 원나라 임금에게 글을 올려 감독관의 횡포를 막았다. 많은 백성들이 그의 덕망과 지혜에 감복했다. "춘천이 마침내 몽고의 침입으로 고립되자 백성들은 봉의산성으로 숨어들었습니다. 중과부적이었죠. 여러 날 버티다가 성은 함락되고 수많은 사람들이 몽고군에게 유린당했습니다." 삼백여 구의 시체가 나뒹굴었다. 그때 박항의 부모도 놈들에게 죽임을 당했다. 개경에 있던 박항이 비보를 듣고 급히 고향 춘천으로 달려왔다. "이 부분이 좀 과장된 느낌도 들지만, 부모님의 시신도 찾을 겸 춘천에 당도한 중시조 어른께서 삼백여 구나 되는 수많은 시신을 모두 수습하여 장례를 지내주었다고 합니다." 박 총무의 이야기를 듣다보니 유포리까지 내려와 있었다. 막국수집이 보였다. 춘천 박씨 중시조 박항의 큰아들 원굉은 아버지처럼 평장사를 역임했으므로 평장사공계라 불리고 둘째아들 원비는 예조판사를 지냈으므로 판사공계라 한다. 평장사공계는 13개 계파로, 판사공계는 14개 계파로 분파되어 모두 27계파로 자손이 번창했다. "소풍 여러 번 왔었는데, 만천리 청목집 뒤편에 있는 박씨 묘 말입니다. 그 묘소도 춘천 박씨," "아닙니다. 청일 박씨 묘소입니다. 맏이, 평장사공계 원굉 어른의 묘소는 원래 3군단 본부 국기게양대 자리에 있던 것을 부대가 들어오는 바람에 기린면사무소 뒷산으로 이장했죠. 동네 사람들이 박 대감 묘라고 부르구요. 둘째, 판사공계 원비 어른의 묘소는 육로로 청평사 가는 북산면 청평리에 있습니다." 고려말의 학자 익제 이제현은 말년에 청평산(지금은 오봉산이라 부름)에 들어와 문수사를 열고 학문연구에 몰두했다. 김시습도 그랬고 춘천부사를 지냈던 상촌 신음, 어우당 유몽인, 다산 정약용도 소양강을 따라 춘천에 오면 익제는 없지만 그가 살았던 청평산을 찾았다는 기록이 여러 군데 전해진다. 그 익제 이제현이 바로 박항의 손자사위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드물지 않나 싶다. 어디 그뿐인가. 영남학파의 대두 퇴계 이황의 어머니가 춘천 박씨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들도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이황은 중시조 박항의 5대손인 사정공 치(治)의 외손자다. 좌찬성 이식(李埴)은 부인과 사별했다. 평소 청렴한 생활을 해온 터에 어미 없는 자식들만 남게 되어 집안은 더욱 썰렁했다. 그때 이황의 어머니, 춘천 박씨가 후실로 들어왔다. 아들 다섯만 있는 집안에 들어와 먼저 딸을 낳고 마지막으로 이황을 낳으니 이황은 7남1녀 중 막내가 된다. 전해지는 바에 의하면 후실로 들어온 춘천댁은 안동지방에서 알아주는 자모요 현부였다고 한다. 이황이 태어난 지 7개월만에 남편 이식을 잃는 비운을 맞이했다. "요즘 같으면 내가 낳은 자식만 몰래 빼가지고 도망가서 팔자고쳤을 텐데....옛날 어르신들생각하면 절로 머리 숙여지지요." 필자가 다소 흥분된 어조로 말하자 종친회 박 총무가 막국수집에 들어가서 얘기 나누자고 재촉했다. "요즘처럼 교통이 편리한 시대가 아니어서 퇴계나 어머니 모두 춘천에 자주 들를 기회가 없었을 것입니다. 문중에 전해지는 말로는 퇴계가 여덟 살 때던가, 열한 살 때던가, 어머니 따라 외가에 두어 번 들른 적이 있었고 관직에 있으면서 청평산 답사 길에 또 한번 춘천 외가를 다녀갔다고 합니다." 퇴계의 외가는 지금 퇴계동 한주와 금호 아파트 부근이었다고 한다. 춘천 외가에 들르면 앞개울(윗무릉계)로 낚시를 나갔다. 한번은 하인들과 함께 개울로 갔다. 장난삼아 소여물을 개울에 뿌렸더니 물고기들이 먹이를 주는 줄 알고 모여들었다. 그 물고기를 춘천 사람들은 공지천과 열결시켜 '공지어(孔之魚)'라고 부르는데 잘못 전해진 것 같다. "춘천민물고기사랑회"에서는 그 물고기를 "두우쟁이", 멸종된 어종이라고 한다. 퇴계 이황의 학문적 경지가 높아지자 그의 호 퇴계를 따서 금병산에서 발원해서 곰진내에 이르는 개울을 퇴계천, 외가동네를 퇴계동이라 부르게 되었다. 이승만 초대 대통령과 함께 독립운동을 했던 박동진을 비롯해서 민요연구로 이름난 강원대 박민일 교수, 춘천교대 총장을 지낸 박민수 시인, 강원도 자치행정국장을 지낸 박영환 등 우리 주위에서 가장 가깝게 만날 수 있는 춘천 박씨네 사람들은 많다. ◇도움말 주신 분 :종친회 박양민 총무, 글/소설가 崔鍾南, 사진/徐 英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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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 恒 (1227~1281)
고려말 不事二君 실천한 충신
젊은 선비들이 찾아오는 것만도 고마운데눈길에 술을 들고 싸리문을 들어서는구나이것은 글자그대로 마음에 이어짐이라석잔술을 마시고나니 어느덧 취하는구나춘천은 옛부터 살기좋은 곳이라 하였는데지신령도 이를 따라 영재들을 모으시니후배들은 노력하여 높은 벼슬에 올라고향선배 박찬성의 뒤를 이어주기 바라네- 박항 詩 '춘천유생' 中 에서<*주:이 기사 중 '춘천유생에게 드리는 글'은 박항이 지은 詩가 아니므로 착오없으시길 바라며, 자세한 글은 아래의 댓글을 참조하세요.> 춘천시 신북읍 윗샘밭을 지나 오음리로 넘어가는 배후령을 사이에 두고 위치한 朴恒선생의 묘소는 춘천의 진산인 봉의산과 삼악산이 에워싸며 생전의 국·내외적으로 눈부신 활약만큼이나 장중한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춘천 신북읍 발산리에서 태어난 고려시대 인물 朴 恒선생(1227~1281)은 춘천박씨(春川朴氏)의 중시조로 자는 혁지(草之), 초명은 동보(東甫)이며 시호는 문의(文懿)다. 나이 18세에 문과에 급제한 선생은 한림원에 등용된 후 충주목사, 경상·전라 안찰사, 우언정, 국자감 관리, 중추원 승선 등 요직을 두루 거쳐 중서문하성 평장사(정2품)에 이어 삼중대광(정1품)에 올랐다. 선생은 평소 모든 처사가 공명정대했으며 성품이 관대하고 문장에도 뛰어났으며 효심이 지극했던 인물로 칭찬이 자자했다. 원나라가 2차 일본 정벌을 위해 고려에 1만명의 군사와 군자금, 군수품을 강요할 때 원나라 황제와 직접 교섭해 출병 출자를 최소화했다. 또 원나라의 감독관으로 온 원수(元帥) 흔도(熊都)와 우승(右丞) 홍다구(洪茶丘)의 행패가 심하자 충렬왕에 진언해 원나라 세조에게 국서를 보내 충렬왕을 좌승상(左丞相)·행중서성사(行中書省事)에, 金方慶을 정동도원수(征東都元帥)에 임명하게 해 흔도·홍다구의 횡포를 견제하게 했다. 국내정치에서도 과거제도를 통한 인재 발탁 등 인사행정제도를 공정하게 개혁했으며,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는 불사이군(不事二君)을 실천했다. 이처럼 선생은 대내적으로 무인정권기를 거쳐 왕정복고가 이뤄지는 혼란한 시기를 현명하게 대처했으며, 대외적으로 몽고의 침략과 이후 영향력이 나타나기 시작하는 시련기를 외교적인 역량으로 극복한 인물로 후대에서는 평하고 있다. 한편 선생의 효심을 엿볼 수 있는 일화가 전해온다. 고종 40년(1253년) 몽고군이 춘천 봉의산성까지 침입했을 당시 춘천지역민들은 끝까지 항전했지만 끝내 패하고 말았다. 때문에 지역민들의 막대한 인명피해가 발생했고 선생의 부모 또한 전사했다. 이 소식을 들은 선생은 춘천으로 급히 와 부모의 시신을 거두려 했지만 찾지못하자 전사한 시신 300여구 모두를 장사지내주었다는 일화는 750년이 지난 지금도 우리에게 효의 의미를 다시금 떠올리게 하고있다. 하지만 선생은 안타깝게도 충렬왕 7년(1281년) 55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문장에도 뛰어난 것으로 전해오나 현전하는 문집은 없으며 시 3수만 남아있다. 고려 공민왕 21년(1372년) 정몽주의 상소로 선생의 충효와 애국치적이 높이 평가돼 문의공(文懿公)이란 시호가 내려졌다. 조선 순조21년(1821년)에는 춘천 유림 120인의 발의로 춘천시 동면 감정리에 구봉서원(九峯書院)이 세워져 배향됐으나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인해 건축물은 철거되고 기와조각 등 흔적만 남아 아쉬움을 주고 있다. 춘천문화원은 최근 발간한 2002년 춘주문화 제17호에서 '신증동국여지승람을 통해 본 춘천의 인물'로 소개하고 있다. 향토사학계에서는 춘천문화원과 연계해 강직한 성품과 효심이 돋보이는 선생의 얼을 후세에 본받게 하기위한 세미나 강연회 등을 열 계획이다. 춘천박씨 종중에서는 신북읍 유포리 선생의 묘소에 구신도비, 신신도비, 신도비명 등을 새롭게 단장했다. 최근엔 박항선생을 비롯한 춘천박씨 조상들의 위업을 남기기 위해 朴敏壽 前춘천교대 총장을 위원장으로 종중사편찬위원회를 구성했다. 올해부터는 묘소 주변을 공원묘역으로 조성하고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없어진 구봉서원 복원사업을 본격적으로 추진할 계획이다. 한편 일부 향토사학자를 중심으로 춘천인의 향토애와 호국정신을 기리기 위해 선생의 묘역을 문화재로 지정하고 당시 봉의산성 전투에서 희생된 춘천지역민의 넋을 위로하는 충렬사를 건립해야한다는 의견을 내놓고있다. 朴賢哲 lawtopia@kado.net | | |
첫댓글 「춘천 유생들에게 준 시」는 박항의 시가 아니라 천전리에 계시던 이정형의 시입니다. 이정형의 『지퇴당집(知退堂集)』에 실려 있죠. 강원한문고전연구소 박항전에 관련 글이 있습니다. 춘천박씨는 위시를 새로 만든 신도비에 새겨놯는데, 이 사실을 알릴려고 해도 방법이 없네요.
권소장님의 박항 선생 관련 글을 찬찬히 읽고 보니
춘천의 대표적인 충효의 상징으로 박항 선생을 꼽지 않을 수 없네요.
충과 효를 두루 갖추었을 뿐만 아니라 국.내외를 두루 섭렵하는 청백리로서도
그만한 인물이 없는 듯 싶네요.
이정형 선생이 춘천의 대표적인 인맥의 큰 기둥으로 박항 선생을 꼽은 이유가 있군요.
묘역의 문화재 지정추진을 서둘러야 할 듯 싶네요.
"춘천 박씨를 제외하고는 오늘날 춘천 신씨, 춘천 최씨, 춘천 허씨를 만나보지 못했다."
라는 부분에 관하여
춘천은 강원도 춘천에도 있지만, 중국에도 있을수 있습니다..
아마도 중국에 있는 춘천에서는 춘천 신씨, 춘천 최씨, 춘천 허씨가 있을수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