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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7.1.(화) 즉사(卽事)
교사(校舍) 후면에 위치한 교사식당에서 점심을 먹고는 종종걸음으로 본관 3층 상담실에 들어섰다. 여느 때처럼 양치질을 하고는 습관처럼 스마트폰을 열어보았다. 스마트폰 화면 전화란에 1번이란 숫자가 눈에 들어왔다. 부재중 전화가 왔었다는 표시다. 전화란을 눌러 최신기록을 살펴보니 아내한테 걸려온 전화다. 뭔 일인가 싶어 답신 전화를 걸었다. 송신 신호가 울리자마자, 수화기 너머서 달뜬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늘 들어 귀에 익은 음색이다.
“여보오~ 나에요. 호호호, 하하하... 나아~ 좀 전 롯데에서 이00교육감 만났어요. 희연이하고 같이 사진도 찍고 했어요. 희연이가 이00교육감한테 당신 얘기 많이 했어요.”
희연씨는 아내보다 예닐곱 살 아랜데, 죽이 맞는 동생 겸 친구로 지내는 사이다.
“희연씨가 뭐라 했는데?”
“당신이 학교 선생님이고, 당신 소개로 이00 찍었다고 자랑했어요. 하하하, 호호호... 희연이 목소리 좀 크우? 사람 많은 백화점에서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떠들어댔다니까요. 우리 모두 이00팬이라고 소리치니, 교육감 비서실장이 방긋 벙긋 어쩔 줄 모르더라고요.”
여기서 짚고 넘어갈 일이 있다. 저마다 제 잘난 맛에 사는 세상인데, 누가 누구의 권유를 받아 표를 찍겠는가? 요즘처럼 약을 대로 약아빠진 사람들이 남의 말을 곧이곧대로 듣기는 하는가? 희연씨가 진보후보를 찍었다면, 희연이라는 사람의 성품 자체가 보수의 안일함을 견디지 못하는데다, 세상이 잘못되어 가는데 대한 정의감이 강한 까닭일 것이다. 난 희연이란 사람과 한 마디 대화를 나눈 적도 없다. 얼굴도 모른다. 희연씨는 아내의 지인일 뿐이다.
아내는 저녁상을 마주할 때 가끔씩 이렇게 말하곤 했다.
"여보오~ 글쎄에~ 희연이 있잖우. 무지무지 기가 세요. 아마 희연이가 지금 대학에 다닌다면 운동권 투사가 됐을 거예요. 어찌나 강골이고 세상에 대한 비판의식이 강한지... 하하하, 하하하하..."
전화기를 잡으면 좀처럼 내려놓을 줄 모르는 아내 입에서 폭포수 같은 수다가 쏟아진다.
“호호호... 이00교육감이 싱글벙글하며 당신에 대해 물었어요. 내가 당신 이름을 말하지 않으니까, 자꾸 당신이 있는 학교를 물었어요. 할 수 없어 상인천여중에 있다고만 했어요. 성00선생님하고 이00선생님은 저희 남편 술친구라고 하니까, 이00 교육감이 자기도 잘 안다면서 아주 좋아하던데요. 호호호, 호호호...”
아낸 지나치게 소심하다. 내 이름을 말해도 별 관계없는데 너무 조심스럽다. 성00선생과 이00선생은 나의 지기(知己)로, 이00교육감과는 전교조 활동 동지들이다. 전교조라는 말이 나왔으니 한 마디 아니 할 수가 없다. 아직도 우리사회엔 전교조라는 단어만 들어도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키는 사람들이 많다. 그 이유가 각 개인에 따라 천차만별이겠으나, 우선 우리사회의 유교 전통과 관련이 있는 것 같다. 군사부일체(君師父一體)라는 유교 인습에 젖은 사람 입장에선 교사 스스로 노동자라고 여기고 노동조합을 만든 것이 그들 정서로는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 것이다. 사람을 가르치는 선생을, 물건 만드는 공장 노동자로 받아들이기가 어려운 것이다. 서구사회의 노동이란 개념이 우리사회에 뿌리내리기엔 우리 문화와 역사의 저항의 너무도 크기 때문이다.
사실, 전교조로 인해 우리 교직사회의 부패가 상당히 정화되었고, 교육환경과 학사행정이 개선되었다. 물론 그 과정에서 정치적 사회적 갈등과 진통도 많이 겪었다. 학교내부에서도 학교행정이나 학생교육 문제를 놓고 전교조교사와 학교행정책임자를 위시한 비전교조교사간의 불화와 반목이 있었다. 허나 삼십년이 지난 지금은 전교조도 청춘은 거의 없고 노장만 득실거리는 노인정으로 변해버렸다. 초창기 참교육을 기치로 내건 전교조운동도 시간이 흐름에 따라 체제 순응적이고 현실 추수적으로 바뀐 것이다. 오늘날 전교조의 문제는 과격한 좌파 이념에 있지 않다. 전교조의 문제는 이념을 넘어서서 우리 사회가 나아가야할 미래에 대한 대안부재에 있다.
우리사회는 전교조에 대해 다음과 같이 물어야 한다.
“전교조 교사, 그대들은 국가백년대계인 학생 교육을 위해 할 일을 찾아 제대로 하고 있는가?”
내가 교직에 발을 들여놓은 이듬해, 그러니까 1986년이다. 그핸 반짝반짝 빛나는 두상을 가진 전00대통령 집권시절이었다. 나는 그 때, 텔레비전 뉴스에서 그의 얼굴을 바라보기만 해도 무섭고 소름끼쳤다. 그렇게 끔직하고 엄혹한 시절이던 1986년 5월 10일, 일부 교사들이 ‘교육민주화 선언’이라는 촛불을 들었다. 이어 동년 9월 27일 서울 한신대학교에서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의 전신인 '민주교육추진전국교사협의회(전교협)' 창립식을 열었다. 당시 전교협은 '민족 · 민주 · 인간화 교육'을 교육이념으로 내세웠다. 나는 같은 학교 동료 몇몇과 전교협 사무실을 드나들었다. 별다른 일을 한 것은 아니고 그저 얼굴만 삐죽 내밀었다 귀가하곤 했다. 물론 지금 교육감인 이00은 교사로서 전교협활동에 매우 열성적이었다.
1989년 5월 28일은 전교협 교사들에게 운명의 날이었다. 서울 연세대학교 도서관 앞에서 전교조 결성 선언문을 선포한 것이다. 그날 창립식에 참석하러 갔다가, 장소가 급히 변경되는 바람에 식장엔 가지도 못한 채, 경찰 그물망에 걸려들어 닭장차에 올라 타야했다. 서울 모(某)경찰서 유치장에 갇혀 있다가, 경위서 한 장을 쓰고서야 자정이 넘어 풀려났다. 참으로 씁쓸하고 참담한 기억이다. 그 일이 있고나서 얼마 후, 젊음의 투지를 삭일 수 없던 나는, 같은 학교 동료의 권유로 전교조 가입원서에 서명했다.
문제는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당국의 회유와 협박이 해일이 몰려오듯 끊임없이 밀어닥쳤다. 전교조에서 탈퇴할 것인가, 그대로 밀고 나갈 것인가. 그것은 개인의 신념을 시험하는 걸로 끝나는 게 아니라, 한 인간의 삶 전체를 좌우하는 중대사였다. 해직이라는 비극을 맞을 것인가, 탈퇴라는 치욕을 견딜 것인가. 당시 나는 이미 결혼해서 네 살짜리 딸을 두고 있었고, 혼자 돈을 버는 한 집안의 가장이었다. 나는 여름방학이 시작되자마자 춘천 소재 강원대(江原大)로 한문교과 1정연수를 떠났고, 나와 의기투합했던 몇몇 동료교사들은 교장과의 지루하기 짝이 없는 줄다리기가 시작되었다. 내 몸은 춘천 고향집에 머물고 있었으나, 내 마음은 인천에 매여 있었다. 결국 아내는 내 대신 전교조 사무실에 탈퇴 의사를 전했고, 열렬한 동료들도 하나둘 교장의 집요한 설득에 고개를 숙였을 것이다.
당시 문교당국은 1차 탈퇴시한을 7월 15일, 2차 탈퇴시한을 8월 1일로 정했다. 9월초 문교당국은 1,519명의 미탈퇴 교사를 파면 또는 해임했고, 그중 교사 42명을 구속했다. 교육감인 이00도 그때 교직에서 쫓겨났다. 그는 결사항전을 몸소 실천한 전사(戰士)였다. 그는 그만큼 순수했고 뜨거웠다. 이00이 용감하게 해직의 길을 선택한 후, 전교조의 진로를 놓고 동료교사와 격렬하게 논쟁하던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게 떠오른다. 그때로부터 어언 한 세대의 세월이 흘렀다. 그 동안 그는 전교조인천지부장과 인천시교육위원을 거쳐 오늘의 시교육감이 되었다. 인생의 영욕은 정처가 없고 세사의 기복은 정도가 없다.
그때 같은 학교에 근무했던 동료 몇몇은 친목모임인 ‘무명회(無名會)’ 멤버로 남았다. 이 중엔 승진에 눈을 뜨고 착실히 준비한 결과, 교감이 된 사람이 두 명이나 된다. 나는 교사가 좋아 교사의 길을 걷기로 스스로 맹세했고, 이 순간까지 그 약속을 지켰다. 교육행정이든 수업이든 자기가 하고 싶고, 잘할 수 있는 길을 가면 된다. 길은 하나가 아니다. 저마다 자기 길을 가는 것으로 족하다. 나는 오늘까지 내가 걸어온 길에 만족하고 행복하다.
“근데 교육감이 백화점엔 왜 왔대?”
“넥타이 사러 왔나 봐요. 비서하고 같이 왔는데 키가 좀 작던데요.”
“그래에? 이00교육감, 하도 오래 전에 만나 가물가물하네. 그 때가 언제던가... 연수동 막걸리 집에서 본 적이 있지.”
지금까지 점심시간 아내와 나눈 대화를 횡으로, 그 대화로 촉발된 나의 과거 회상을 종으로 엮었다.
나는 집에 가면 학교얘기, 학교사건을 일절 입에 담지 않는다. 집에 들어서는 순간, 학교에서 있었던 일은 심연으로 가라앉는다. 그 바람에 마누란 나의 학교생활을 알지도 못하고, 물으려 하지도 않았다. 이것이 오늘까지 30년 교사로서 지낸 나의 가정생활이다. 헌데 큰애는 요 몇 년 새 기간제 교사를 한답시고 집에만 오면 온통 학교얘기, 학생얘기를 주절거린다. 즐거운 얘기보다는 주로 힘들다는 하소연과 투정이다. 큰애 덕분에 나의 무념무상의 위대성이 드러났고, 나의 진가가 빛을 발하게 되었다.
“여보오~ 난 당신이 지금까지 학교 얘길 전혀 하지 않아, 학교생활이 쉬운 줄만 알았어요. 딸애가 입만 열면 힘들다고 해서, 학교생활도 여느 직장처럼 어렵다는 걸 알게 되었어요. 여보오~ 내 친구 숙희가 올 봄, 원주에서 초등학교 명퇴한 거, 당신도 알죠? 같은 학교 선생 중, 한 사람이 그렇게 꼴 보기 싫었대요. 그래서 아무한테도 얘기 안하고 조용히 그만뒀대요. 요즘 생활이 너무너무 좋대요. 지금 돌아보니 원수가 도리어 은인이 되었다고 하네요. 당신두 학교생활 힘들지 않수?”
“그래? 인생이란 게 새옹지마(塞翁之馬) 아니겠소. 난 학교생활이 별로 힘들지 않아요. 이젠 나이가 드니 담임에서도 빠지고 학교업무도 헐렁헐렁해서, 큰 스트레스가 없소.”
사실 난 젊어서도 학교생활이 크게 힘들지 않았다. 업무에 밝고 일에 능숙해야 맡아서 할일이 많은 법인데, 일처리도 미숙하고 천성이 느려터지니, 나한테 맡기는 일이 많지 않았던 것이다. 덕분에 교실에서 학생들과 만나는 시간 말고는 크게 신경쓸 일이 없었다. 교사의 권위의식을 내려놓고 동심에 다가가고자 노력했다. 세상사와 무관하게 어린 학생들과 즐겁게 지내는 게 전부였다. 어쩌면 자발적인 왕따라고 볼 수 있겠으나, 이런 나를 굳이 변호하자면 허무주의자라 칭하는 게 합당하지 않을까?
난 허무주의자다.
내가 생각하는 허무주의의 본질은 ‘인간은 특별한 그 무엇이 아니다’라는 깨달음이다. 허무주의란 인간 생명이 초목과 별 차이 없다는 것을 담담히 받아들이는 경지이다. 인생이 특별한 그 무엇이 아니요, 세상이 특별한 그 무엇이 아님을 깨닫는다면 살아가면서 집착할 일이 그다지 없다. 예수도 석가도 공자도 특별한 그 무엇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을 때, 우리는 종교로부터 벗어난다. 버트런드 러셀도 비트겐쉬타인도 화이트헤드도 특별한 그 무엇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을 때, 우리는 문자의 감옥을 탈출한다. 세종대왕도 노무현도 박정희도 특별한 그 무엇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을 때, 우리는 정치적 예속을 털어버린다.
난 아무 것도 아니다.
내가 아무 것도 아니라는 이 한 마디를 깨달을 때, 인간은 비로소 권위주의로부터 해방된다. 권위주의가 사라져야 남의 말에 귀를 열게 된다. 남에게 귀를 열 때 비로소 쌍방토론과 쌍방소통이 가능해지는 법이다. 쌍방토론과 쌍방소통은 자기를 버릴 줄 아는 자에게 주어지는 선물이다. 자기를 버린다는 것은 자기를 비운다는 말이며, 자기를 비운다는 말은 자기 집착과 고집을 놓아버리는 것이다. 자기를 놓아버린다는 것은 자기부정이요, 자기부정은 자기무화(自己無化)의 다른 이름이다. 결국 인간은 자기무화를 이룰 때 무소유를 실천하게 되고, 무소유를 실천할 때만이 무한한 자기 확장을 이룬다.
헌데 인간은 높은 자리에 앉게 되면 부지불식간에 자기 지위를 의식한다. 권좌를 의식하는 순간, 초심에 품었던 여민동락(與民同樂)의 정신을 저버리고, 이 세계를 개조하겠다는 오만과 독선에 빠진다. 자기가 대단한 존재란 착각 속에 자멸의 길을 걷는 것이다. 그리되면 자신만 불행해 지는 것이 아니라, 주변 사람들한테까지 크나큰 해악을 끼친다. 이러한 사례가 인류 역사에 수없이 명멸한 반면교사(反面敎師)다.
세상의 모든 長이 된 자들이여, 그리고 앞으로 장(長)이 되려는 자들이여! 항상 자기를 무(無)로 놓고 타인을 진정으로 포용하는 위대한 인격을 가질지라.
오늘 아내가 우연히 이00교육감을 만났다는 소식을 전해왔기에, 옛 감회가 있어 몇 자 적었다.
2014. 7. 1(화) 17:35 상담실에서 산목 쓰고, 7.2(수) 16:25 첨서.
#전교조 활동 동지들이다#전교협활동에 매우 열성적이었다#전교조에서 탈퇴할 것인가, 그대로 밀고 나갈 것인가.#허무주의란 내 생명이 초목과 별 차이 없다는 것을 담담히 받아들이는 경지이다.#내가 아무 것도 아니라는 이 한 마디를 깨달을 때, 인간은 비로소 권위주의로부터 해방된다. #
항상 자기를 무(無)로 놓고 타인을 진정으로 포용하는 위대한 인격을 가질지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