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이흥장군(南以興將軍)묘역과 사당 충장사 및 양세충신정려>
남이흥은 당진을 대표하는 역사적 인물이다. 당진에서는 남이흥장군문화제를 30년 넘게 개최하면서 장군을 추모하고, 정신을 기리고 있다. 이괄의 난을 평정하는 공을 세웠고, 정묘호란 때 청병(淸兵)의 침입을 막다가 순절하였다. 부친 남유(南瑜)도 정유재란 때 전사하여 부자가 나라를 위해 순절한 공신 집안이다. 부자의 신도비가 나란히 동네 어귀에 있다.
평안남도 안주목사를 거쳐 평안도병마절도사로 있던 중 안주 싸움에서 순국하였으므로 최근 2021년 6월 북한과의 교류에서 당진 시장은 북한쪽에 공동학술조사를 제안하기도 하였다.
곳곳에 이렇게 왜란, 호란 관련 순절지사들이 있어서 이 나라 현재의 번영이 우연이 아님을 말해준다. 나라와 백성, 대의명분을 위해서는 죽음도 불사했던 결단이 개개인의 삶의 방향 설정에서도 귀감이 되어준다. 우리는 선조에게 아름다운 빚을 지은 채로 살고 있다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한다.
소재지 : 충청남도 당진시 대호지면 충장1길 73-58(도이리 374-2)
방문일 : 2021.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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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묘역 소개
충청남도 기념물 제52호. 남이흥(1540∼1627)은 조선 중기 무인으로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 포도대장, 충청도· 경상도 병마절도사, 구성·안주목사를 지냈다. 1623년 인조반정에 연루되었으나 장만(張晩의 변호로 무사했다.
이괄(李适)의 난 때는 도원수 장만의 휘하에서 공을 세워 연안부사가 되고 진무공신 일등에 책록되어 의춘군(宜春君)에 봉해졌다. 정묘호란 때 안주에 나가 후금과 싸웠으나 승산이 없자 성에 불을 지르고 뛰어들어 자결하였다.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원래 경기도 성남에 있었으나 광주대단지 조성 때인 1971년 7월에 현 위치로 이전하게 되었다. 주변에 장군과 아버지 남유의 위패를 모신 사당(忠壯祠)과 정려, 재실이 있다.
묘소 일원은 2개의 단으로 구성되어 있다. 하단에는 부실(副室)인 연안 김씨와 후손들의 묘가 위치하고 있다. 상단에는 왼쪽에 아버지인 남유 장군, 오른쪽에 남이흥 장군의 묘가 있다.
남이흥 장군의 묘는 하동 정씨와 합장묘로 하부에 호석을 설치하였다. 봉분 앞에는 묘비와 상석, 망주석, 문인석, 장명등을 갖추었다. 묘비는 화려한 반룡(蟠龍)이 새겨진 이수를 가지고 있다. 남유 장군의 묘도 남이흥 장군 묘와 상설이 유사하다. 하지만 묘비에 간결한 형태의 가첨석을 설치한 차이가 있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전재)
2)남이흥(南以興, 1576~1627)장군 생애
1598년(선조 31) 정유재란 때 노량해전에서 아버지가 적탄에 맞아 전사한 데 충격을 받아 글 공부를 포기하고, 활쏘기·말타기에 전념해 1602년 무과에 급제했다.
이어서 선전관을 거쳐 부총관, 포도대장, 충청·경상도병마절도사, 구성부사, 안주목사, 평안도병마절도사 등을 역임했다. 1623년 인조반정 뒤 서도(西道)의 수령직을 자청해 구성부사가 되었다가, 시기하는 자의 무고로 하옥되기 직전 도원수 장만(張晩)의 변호로 무사했으며, 도원수 휘하의 중군(中軍)이 되었다.
이때 장만의 휘하에 부원수 겸 평안병사로 좌천되어 영변에 머무르고 있던 이괄(李适)이 난을 일으키자 장만의 지휘 아래 중군을 이끌고 많은 무공을 세웠다. 특히 이괄의 부하 유순무(柳舜懋)·이신(李愼)·이윤서(李胤緖)를 회유해 많은 반군을 귀순하게 했다.
서울 근교의 작전 회의에서 장만은 도성을 포위하여 이괄의 군대를 곤경에 빠뜨린 뒤 공격하자고 주장했다. 그러나 남이흥은 지리적으로 유리한 길마재[鞍峴]에 진을 치고 위에서 적을 내려다보며 공격하자는 정충신(鄭忠臣)의 주장에 동조해 대승했다.
이 공으로 연안부사가 되었고, 진무공신(振武功臣) 1등에 책록되었으며 의춘군(宜春君)에 봉해졌다. 이어 평안도병마절도사로서 영변부사를 겸해 국경 방어의 임무를 맡고 있던 중, 1627년 정월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안주성에 나가 후금군을 막았다.
이때 후금의 주력 부대 3만여 명이 의주를 돌파하고 능한산성(凌漢山城)을 함락한 뒤 안주성에 이르렀다. 이에 목사 김준(金浚), 우후(虞候) 박명룡(朴命龍), 강계부사 이상안(李尙安) 등을 독려해 용전했다.
그러나 무기가 떨어져 성이 함락되자, 남이흥은 “조정에서 나로 하여금 마음대로 군사를 훈련하고 기를 수 없게 했는데, 강한 적을 대적하게 되었으니 죽는 것은 내 직책이나, 다만 그것이 한이로다.”라고 하며 성에 불을 지르고 뛰어들어 죽었다.
뒤에 영의정에 추증되고, 의춘부원군에 추봉되었다. 안주의 충민사(忠愍祠)에 제향되었으며, 시호는 충장(忠壯)이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전재)
*모충관
3)모충관
‘남이흥장군일가유품(南以興將軍一家遺品)’이 전시되어 있다. 이 날은 코로나로 전시관 문을 열지 않았다.
유품은 2차에 걸쳐 지정되었는데, 1차로 지정된 유물은 총8점으로 녹피방령포와 녹피바지, 답호 1점 그리고 상아·나무·녹각 등으로 만든 호패 6점이다. 추가 지정된 유물은 전적류 13점과 영정 1점, 생활용구 6점, 출토복식류 6점 등으로, 총26점이다. 추가 지정된 복식류는 답호 2점, 철릭 3점, 장옷 1점인데 남이흥 장군과 그의 아버지 남유(南瑜)의 묘를 광주에서 이장할 당시에 수습된 것으로, 옷의 형태가 임진왜란 이전의 특징을 보이므로 남유의 유물로 추정된다.
의령남씨 충장공파 대종중에서 소장하여 온 다양한 유품을 통하여 조선후기의 생활상을 확인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특히 남이흥 장군의 관복본 초상화는 후대에 이모된 것으로 추정되지만 그래도 17세기 관복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고 무관(武官)의 사자흉배를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그 외에 녹피 복식류라든가 활과 관련된 시복과 궁대 등은 무관의 생활상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인용)
남씨양세정려
*인근 송파헌과 그 주변
*충장사
*남씨양세충신정려.
2대에 걸친 충신을 위한 정려이다. 정려는 충신, 효자, 열녀 등을 기리기 위해 그 동네에 정문(旌門)을 세워 표창한 것이다. 유교적 풍속 장려를 위하여 효·충·열의 행적을 기려 표창하였는데, 임진왜란, 병자호란 전쟁 중에 특히 대상자가 많았다.
남이흥장군 사당 충장사
충장사 내부
*남이흥 장군의 부실(副室)인 연안 김씨의 묘
남이흥장군 부친 남유와 정경부인 전주 유씨 합장묘
남이흥 장군과 부인 정경부인 하동 장씨의 합장묘
*고택
활쏘기에 출중했던 충장공 남이흥장군을 기리고 궁도인들의 기량을 연마한다는 취지로 1995년 건립되었다.
다음은 위 기념비에 새겨진 글이다.
"충장공 남이흥 장군의 살신위국충절을 기리고자 1994년 3월에 송의 불천지위 사당인 충장사 경내에 도비 1억원, 군비 1억원을 지원받아 건립한 한국의 전통 국궁장으로 매년 남이흥장군 문화제 행사 때에 도지사배 궁도 대회를 실시한다. 충장정의 건물구조는 대한제국 고종황제가 초대 사두로 이승만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이 2대 사두로 알려진 황학정을 본 따서 축조한 건물이다. 2013년 9월 10일"
황학정은 광무 2년(1898) 고종의 어명으로 경희궁(慶熙宮) 회상전(會祥殿) 가까이 세웠던 궁술 연습을 위한 사정(射亭)이었다. 1922년 사직공원 북쪽인 등과정(登科亭) 옛터인 현 위치에 이건하였다. 이름 있는 활터는 일제 때에 전통 무술을 금지하면서 점점 사라져 갔다.
충장정의 건립은 양궁의 나라에서 단절된 역사 재흥을 위해서도 또 다른 의미가 있다.
충장정
충장정 내부
과녁에 꽂힌 화살을 아래로 가져오는 도르레.
활을 쏘는 곳이다. 아래에 궁사가 늘어서서 활을 쏘는 위치가 표기되어 있다.
*충장정 이곳저곳
아래쪽에 간단하게 연습할 수 있는 활터를 따로 조성하여 놓았다. 이곳에서 축제 때면 일반인들도 활을 쏘며 장군의 정신을 기린다.
양세충신 사적비
2. 사적비 내용
兩世忠信(父子)의 史蹟
아버지 南瑜(남유)장군은 임진왜란 7년 전쟁에 임금과 신하들은 의주로 피난하고 국토수호가 위급한 상황에서 모친 상중임에도 불구하고 나주목사 겸 좌영장으로 마지막 전장인 남해 노량에 출전하여 통제사 이순신장군과 함께 왜적을 섬멸하던 중 승전을 눈앞에 두고 적탄에 순국하였다. 좌의정 서명선이 장군의 공적을 칭송하는 비문을 지어 노량 전적지에 유허비를 세웠으나 일제가 파괴한 것을 광복 후 1987년에 이곳에 복원하였다. 후손과 많은 방문 인사들이 유허비를 보며 충혼을 기리고 470년 전의 왜란을 상기하며 애국의 정신을 가다듬는다.
아들 南以興(남이흥) 장군은 왜란 30년 후 또 다시 북방에서 후금(청)군 3만 5천명이 침입한 정묘호란에 평안도 병마수군절도사 겸 양서 순변사(부원수)로 평안도 안주성에서 3천명의 군사로 대적하다가 중과부적으로 성이 함락 당하게 되자 성문을 열어 많은 적병을 유인한 후 화약고에 점화하여 적과 함께 장렬히 자폭 순국하였으니 목숨을 바쳐 살신 위국한 희세의 충신이다. 영의정 허목이 그 충절을 기리는 비문을 지어 경기도 광주 음촌에 세웠던 신도비를 1971년 이곳에 옮겨 세웠다. 장례 때에 인조 임금은 어의(곤룡포)를 벗어 관 위에 덮어 주며 애도하였고, 그 어의는 문화재로 지정되어 모충관에 보존되고 있다.
또한 이곳에는 충장 시호를 받은 남이흥 장군의 불천지위 사당인 충장사와 2대에 걸친 충신 남유 장군과 남이흥 장군 부자에게 내려진 <충신의 문> 양세충신정려가 있어 두 분 장군의 애국충절을 되새겨보게 한다.
2015년 9월 2일 의령남씨 충장공파 종회 근서
충장사사역화추진위원회 봉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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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잘 보고 갑니다.
일부 건물이 문을 닫아 안을 잘 볼 수 없어서 구경도 서운했고, 글도 미흡한 거 같은데, 들러 주시고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국궁장 충장정 현판 글씨는 진품명품에 서예 해설가로 나오셨던 김선원 선생의 글씨 랍니다.
그리고 모충관은 진귀한 유물이 많아 당진시 문화관광과에 10인이상 해설 요청시 해설사 동승투어 단체 예약
가능하며, 또는 불천위 제향시, 남이흥장군 문화제 행사시는 개방되고 해설사도 배치 된답니다.
아직은 유물 보존 관계로, 평상시 경찰이 순회만 할 뿐 개방이 되지 않고 있답니다.
앞으로 곳 개방될 예정 이랍니다.
귀한 유품이 많이 있는 건 알고 있었지만, 운영관련 세부적인 사안은 몰랐습니다. 개방 후에 다시 한번 가서 유품을 볼 기회가 있으면 좋겠습니다. 모쪼록 잘 보존하셔서 역사이해와 그곳을 찾는 많은 분들의 지역 이해에 도움이 되길 바랍니다. 도움 말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