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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
망궐례(望闕禮)
정의
국왕이 새해 첫날 아침(正朝), 동지(冬至), 그리고 성절(聖節)에 왕세자와 문무백관을 거느리고 북경명나라 황제의 궁궐을 바라보면서 경하(慶賀)를 올리는 예식.
개설
조선왕조는 중국명나라와의 관계에서 사대자소(事大字小)의 관계를 현실로 받아들였다. 사대자소란 큰 나라는 작은 나라를 보호하고, 작은 나라는 큰나라를 섬긴다는 논리인데, 조선은 국왕의 즉위시 명 황실로부터 책봉을 받는 절차를 거치고, 또 정기적인 조공을 실시함으로써 명과 사대자소의 관계를 맺었다. 아울러 새해 첫날 아침, 동짓날, 황제의 생일 등의 특정일에 왕이 궁궐에서 왕세자와 문무백관을 거느리고 명 황제에게 경하를 올리는 예식을 정식화하였다. 이는 조선이 명나라 중심의 동아시아 질서를 인정하며 그 속에서 자국의 국제적 위상을 규정한다는 인식의 가시적인 기제였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의례는 원 간섭기 고려 국왕이 정동행성이나 궁궐에서 원 황제를 향하여 절을 하던 향궐배하(向闕拜賀) 의례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다.
연원 및 변천
원 간섭기 이전의 고려 조정에서 거행되던 정지조하의(正至朝賀儀)는 국왕이 신하들에게 경하받는 수조하(受朝賀)로만 이루어졌는데, 원 간섭기 이후 원 황제에 대한 고려 국왕의 원격지 조하, 즉 요하의(遙賀儀) 절차가 추가되었다. 이는 원나라의 외로아문(外路衙門)에서 시행되던 배하행례(拜賀行禮)를 바탕으로 한 것이었다. 원나라를 대신한 명나라는 건국 후 자신을 중심으로 한 동아시아질서를 의례적으로 구축, 강화하려고 노력하면서 빈례(賓禮)로서의 망궐례라는 명칭을 처음 창안하였고 이를 예법을 정리한 『명집례(明集禮)』 속에 포함시켰는데 이것이 명나라와의 사대자소 관계를 확립하는 과정에서 조선에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따라서 조선의 정지조하의는 원 간섭기 이후의 고려와 마찬가지로 망궐례와 수조하의 조합으로 구성되었다.[『태조실록』 2년 1월 1일; 『세종실록』 18년 1월 1일 1번째기사] 다만 명나라에서와는 달리 빈례가 아니라 가례(嘉禮)에 편성되어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경국대전(經國大典)』 등에 수록되었다. 빈례나 가례는 모두 오례 중 하나로, 빈례가 외국 사신과 관련된 의례를 규정한 것이라면, 가례는 왕실 관례나 혼례뿐 아니라 각종 하례 등에 관해 규정하고 있었다.
망궐례의 시행에는 그것을 통해 표상되는 종속성이 조선의 주체성과 충돌될 수 있었기 때문에 세조대와 같이 상황에 따라서 시행에 제한이 발생한 경우도 있었지만[『세조실록』 8년 12월 29일] 16세기 이후로는 별 무리 없이 시행되었다. 그러나 명나라가 멸망하고 청나라가 중국을 장악한 17세기 중엽 이후 조선은 명나라가 사라진 세상 속에서 자신을 중화의 자리에 올려놓는 자존의식을 강화시켜 나갔고, 이 과정에서 망궐례는 청나라의 칙사가 내방하는 시기가 절일과 겹치게 되면 행하는 시연용 의례로 퇴색하는 경향을 띄었다.[『영조실록』 1년 11월 18일] 반면에 대명의리의 차원에서 영조와 같은 경우는 명나라 태조, 신종(神宗), 의종(毅宗)의 기일이나 즉위일을 맞으면 망배례(望拜禮)를 빈번하게 시행하는 모습을 보였다.[『영조실록』27년 3월 19일]
이와 같이 조선후기에는 망궐례가 극히 형식적인 모습으로만 잔존하거나 이미 멸망한 명나라 황제에 대한 추념적인 차원의 망배례로 전환되고 있었던 한편으로, 지방관들이나 통신사행들이 왕의 상징인 전(殿) 자를 새긴 나무패인 전패(殿牌)를 대상으로 한 원격지 요하를 망궐례로 지칭하는 분위기가 나타나기도 하였다.[『정조실록』 10년 6월 10일] 그리고 마침내 대한제국이 설립되기 한 해 전인 1896년 고종은 칙령을 반포하여 지방에 설치된 전패를 궐(闕) 자를 새긴 궐패(闕牌)로 고치도록 하였다.[『고종실록』 33년 8월 15일]
절차 및 내용
『국조오례의』에 따르면 망궐례는 의식 이틀 전 예조가 내외의 관원들에게 직무를 다할 것을 선섭(宣攝)하는 것으로 시작하는데 하루 전날에는 경복궁 근정전에 궐정(闕庭)을 설치하고 동시에 궐정 앞에는 향안(香案)을 둔다. 왕세자의 막차는 근정문 밖에 설치한다. 의식 당일에는 국왕의 배위(拜位), 왕세자 위(位), 종친 및 문무백관의 위를 설치하고 의식을 행할 시간을 기다린다.
북소리가 초엄(初嚴)을 알리면 궐정 앞에 황의장(黃儀仗)을 진열하고 근정문 밖에는 노부 대장(鹵簿大仗)을 동쪽과 서쪽에 진열한다. 엄(嚴)은 나라의 큰 의식이나 행사에 왕이 행차할 때 이에 참여하는 여러 관원에서 준비를 하도록 알리기 위해 세 차례 치던 북소리를 말하는데, 초엄·이엄·삼엄이 있었다. 또 황의장은 조선에서 중국 황제와 관련된 의례행사를 할 때 사용하던 의장이며, 노부 대장은 왕의 행차 때 따르는 의장이었다. 종친과 문무백관들이 모두 조당(朝堂)에 모여서 각기 조복(朝服)을 갖추어 입는다.
북소리가 이엄(二嚴)을 알리면 종친과 문무백관들은 모두 근정문 밖의 자리에 나아간다. 왕세자도 필선(弼善)의 인도로 근정문 밖의 막차에 도착하고 국왕은 면복(冕服)을 입고서는 사정전(思政殿)에 임어한다.
북소리가 삼엄(三嚴)을 알리면 인의(引儀)가 종친과 문무백관들을 인도하여 동, 서쪽의 편문(偏門)을 경유하여서 자리로 나아가고, 봉례(奉禮)가 왕세자를 인도하여 동문을 경유해 자리로 나아간다. 국왕은 승여(乘輿)를 타고 나아오다가 근정전 서쪽에서 내려서는 좌·우통례(左·右通禮)의 인도를 받아서 배위로 나아간다. 이렇게 되면 망궐례를 행할 모든 준비가 끝난 것이다. 이후의 절차는 다음과 같다.
-의식을 진행하는 전의(典儀)가 네 번 절하라고 외침
-좌통례가 국왕에게 “국궁(鞠躬)하여 네 번 절하고 일어나서 몸을 바로 하시라.”고 아뢰면 국왕이 국궁하고 음악이 시작됨. 국왕은 네 번 절하고 일어나서 몸을 바로 하고 왕세자와 종친, 문무백관들도 동일하게 함
-음악이 그치면 좌통례가 전하에게 꿇어앉기를 아룀. 국왕은 꿇어앉고 왕세자와 종친, 문무백관들도 동일하게 함
-의례에서 향을 담당하는 사향(司香) 2인이 향안 앞에 나아가서 꿇어앉아 향을 세 번 올리고, 부복하였다가 일어나서 뒤로 물러남
-의식을 총괄하는 좌통례가 국왕에게 “부복하였다가 일어나서 몸을 바로 하시라.”고 아뢰면, 국왕이 그와 같이 하고, 왕세자와 종친, 문무백관들도 동일하게 함
-좌통례가 국왕에게 “국궁하여 네 번 절하고 일어나서 몸을 바로 하시라.”고 하면, 왕이 그에 따라 하고 음악이 시작됨. 왕세자와 종친, 문무백관들도 동일하게 함
-음악이 그치면 좌통례가 국왕에게 “규(圭)를 꽂고 몸을 굽혀 손을 흔들고 발을 구르는 무도(舞蹈)를 세 번 하고 꿇어앉아 머리가 땅에 닿도록 세 차례에 걸쳐 절을 하는 삼고두(三叩頭)를 하시라고 함. 국왕이 그 말대로 따르고, 왕세자와 종친, 문무백관들도 동일하게 함
-좌통례가 국왕에게 산호(山呼)를 부르기를 계청하면, 국왕이 두 손을 마주잡아 이마에 얹고서 “만세(萬歲)” 하고, 좌통례가 산호를 계청하면 다시 “만세” 하며, 재산호를 계청하면 “만만세”라고 함. 왕세자와 종친, 문무백관들도 동일하게 함. 산호는 황제의 만수무강을 비는 뜻을 담아 손을 치켜들고, ‘만세’ 또는 ‘천세’를 크게 외치는 의식이었음
-좌통례가 국왕에게 “규를 내어 쥐고 부복하였다가 일어나서, 네 번 절하고 몸을 바로 하시라.”고 하면, 국왕이 그에 따라 행하고 음악이 시작됨. 왕세자와 종친, 문무백관들도 동일하게 함
-음악이 그치면 좌통례가 의식이 끝났음을 아룀
명나라 황제의 생일인 성절에는 망궐례만을 거행하였으나 새해 첫날과 동지에는 망궐례와 수조하가 함께 거행되었는데 순서상으로 명 황제에 대한 망궐례를 먼저하고 나서 국왕에 대한 수조하가 거행되었다. 특히 조선 국왕의 입장에서 본다면 망궐례와 수조하의 단계마다 신하와 군주의 변화된 위상으로 의례에 참여하게 되었다. 이 점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국왕의 복장이 바뀐다는 사실이다. 망궐례를 행할 때 국왕은 황제를 조근(朝覲)하고 조서를 받을 때 착용하는 면복을 착용함으로써 자신을 황제에 대한 신하로서 상정하였지만 수조하를 행할 때는 원유관(遠游冠)과 강사포(絳紗袍)를 착용함으로써 자신의 신하들로부터 조현(朝見)을 받는 군주로서의 위상을 과시하게 된다.[『세종실록』 1년 11월 27일]
생활·민속적 관련 사항
참고문헌
『國朝五禮儀』
『銀臺條例』
『通文館志』
강제훈, 「조선초기의 朝會 의식」, 『조선시대사학보』28, 조선시대사학회, 2004.
윤석호, 「조선조 望闕禮의 중층적 의례구조와 성격」, 『한국사상사학』43, 조선사상사학회, 2013.
임민혁, 「조선 초기 遙賀儀와 군신질서」, 『조선 왕실의 嘉禮 2』, 한국학중앙연구원출판부, 2010.
정은영, 「조선통신사와 망궐례」, 『조선통신사연구』5, 조선통신사학회, 2007.
최종석, 「고려시대 朝賀儀 의례 구조의 변동과 국가 위상」, 『한국문화』51, 규장각한국학연구소, 2010.
한형주, 「조선초기 朝賀儀禮에 대한 고찰」, 『명지사론』13, 명지사학회, 2002.
보양청(輔養廳)
정의
조선시대 원자(元子)나 원손(元孫)의 보호와 양육을 위하여 특별히 설치한 관서.
개설
보양청은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이나 세손강서원(世孫講書院)의 부설 기구로 왕의 적장자인 원자나 왕세자의 적장자인 원손의 출산과 동시에 설치되었다. 1688년(숙종 14) 후궁 장씨(張氏)에게서 왕자가 출생하면서 처음 설치되었다. 보양청은 원자나 원손이 어릴 때 그 보호와 양육에 관한 책임을 맡기기 위해 설치되었지만 실제의 양육은 궁중의 내명부(內命婦)에 의하여 이루어졌다. 원자·원손이 글을 배울 때(3~4세)가 되면 보양청을 강학청(講學廳)으로 개편하고 보양관은 강학관(講學官)으로 개칭하여 본격적인 교육 활동을 하였다.
설립 경위 및 목적
세자시강원 이전의 원자 교육은 현종대의 강학청 설치로 어느 정도 그 규례가 완성되었는데, 숙종 대에 그보다 더 어린 원자의 보양을 위한 기관으로 보양청을 설치하였다. 숙종이 늦은 나이에 후궁에게서 왕자를 얻고 다음 해에 생후 2개월밖에 안 되는 왕자를 원자(元子)로 정하자, 이를 비판하는 송시열(宋時烈)과 서인(西人)을 대대적으로 숙청하고 남인(南人)을 기용하는 기사환국(己巳換局)이 일어났다.
환국이 종료되고 숙종은 보양관(輔養官)을 차출하였는데, 이를 위한 별도의 관청 설치에 대한 요구가 일어나자 보양청을 새로 설치하였다[『숙종실록』15년 8월 5일]. 운영은 강학청에 준거하여 보양청 절목을 마련하였고, 그에 따라 가장 먼저 상견례(相見禮)에 대한 규정이 정해졌다. 실제로는 보양청에 속한 보양관의 활동이 그다지 드러나지 않는데도 보양관을 위해 보양청을 신설하고 운영을 위하여 강학청과 동일하게 인원을 선발하였다. 이는 당시의 원자가 정치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음을 보여 준다.
조직 및 역할
보양청은 강학청의 예를 따랐으므로 관원의 수는 강학청과 동일하다. 원자보양관은 종2품 이상의 고관 3명으로 임명하였으나, 왕의 특명이 있으면 추가로 임명하기도 하였다. 한편 원손보양관은 정3품 당상관 이상의 관원 중에서 2명을 선임하였다. 보양청에는 또 책색서리(冊色書吏) 2명, 수청서리(守廳書吏) 4명, 서사(書寫) 1명, 사령(使令) 4명, 수공(水工) 1명이 배정되어 있었다.
변천
1735년(영조 11)과 1754년(영조 30)에 보양청이 설치되었으며, 1784년(정조 8)에는 국조(國朝)의 전례(典禮)에 따라 보양청에 초야의 인물을 등용하도록 하였다. 이후 1874년(고종 11)에도 설치되었으며, 1894년(고종 31) 군국기무처(軍國機務處)에서는 시강원(侍講院)에 부속기관으로 보양청(輔養廳)을 두고 보양관 1명을 둔다고 하였다[『고종실록』31년 7월 22일]. 보양청은 1895년에 그 관아와 기능이 왕태자궁에 이관되면서 폐지되었다.
참고문헌
김문식·김정호, 『조선의 왕세자 교육』, 김영사, 2003.
김은정, 「시강원 부설 기관을 통해 본 조선 후기 왕실 교육」, 『한국문화』47, 2009.
봉선(封禪)
정의
중국 고대에 제왕이 태산(泰山)에 나아가 하늘과 땅에 제사지내던 의식.
개설
봉(封)은 땅을 돋우어 제단을 만들고 천신(天神)에 제사지내는 것을 의미한다. 반면 선(禪)은 땅을 쓸고 정결하게 한 후 지신(地神)에 제사지내는 것을 가리킨다. 고대 초기 봉선은 태산에서 거행하였는데 하늘에 대한 제사는 태산의 정상에서 거행하였고, 땅에 대한 것은 태산 아래 양보(梁甫)라는 낮은 산에서 거행하였다.
연원 및 변천
봉선에 관한 신앙은 전국시대 말기부터 진나라 초엽에 형성되었다. 전국시대 제(齊), 노(魯)의 나라에서는 태산을 숭상하는 신앙이 널리 퍼져 있었다. 그러나 역사적 기록상 봉선을 처음으로 거행한 것은 진시황(秦始皇)이다. 천하를 통일한 진시황은 기원전 219년에 제나라와 노나라 유생들을 거느리고 태산에 나아가 봉선의 예식을 거행하였다. 그 다음으로 한(漢) 무제(武帝)가 기원전 110년에 거행하였다. 한 무제는 먼저 양보산에 도착하여 땅에 제사를 지냈다. 그리고 태산 아래에 도착하여 동방에 제단을 쌓고 1차로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옥첩서(玉牒書)를 땅에 묻었다. 이어서 무제는 시중봉거(侍中奉車)인 자후(子侯) 곽선(霍嬗)만을 데리고 태산의 정상에 올라 두 번째 제천 의식을 거행하였다.
이후 수나라 문제(文帝), 당나라 고종(高宗)과 현종(玄宗), 송나라 진종(眞宗) 등이 봉선을 거행하였다. 그러나 송대 이후 봉선은 거행되지 않았다. 봉선은 태산에 대한 산악신앙과 권력은 하늘로부터 나온다는 천명사상, 그리고 도교의 신선사상 등이 결합되어 생성되고 전개되었다. 봉선은 새로운 왕조를 개창한 제왕이 태산에 나아가 하늘에 보답하며, 천하의 태평을 아뢰는 의식이었다. 그리하여 황제들은 봉선을 행하고 하늘로부터 상서(祥瑞)를 구하였다. 그리나 제천의례는 당대 이후 교사(郊祀)와 원구제(圜丘祭)로 정착되면서 봉선은 후대로 이어지지 못하였다.
조선에서는 봉선을 고대 천자의 의식으로 간주하였기 때문에 그 시행을 논의하지 않았다. 다만 존호를 올리는 예를 천명을 받은 황제가 하늘에 보답하고 그 공로를 옥책에 적어 봉하는 봉선의 예식에 비유할 때가 있었다[『정조실록』 17년 11월 19일]. 그리고 정조대에 정언(正言) 신약추(申若樞)가 봉선을 거행할 것을 청하여 물의를 일으킨 적이 있었다[『정조실록』 22년 8월 8일].
부조지묘(不祧之廟)
정의
종묘에서 조묘(祧廟)로 옮기지 않는 세실의 사당.
개설
종묘에 봉안된 선왕은 영구적으로 제사를 받는 것이 아니라 일정한 대수가 지나면 그 제사를 폐지하고 신주를 다른 곳으로 옮기는 천묘(遷廟) 혹은 조천(祧遷)을 하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하였다. 이때 제사의 대수가 지난 신주를 옮겨 모시는 사당을 조묘(祧廟)라고 불렀다. 조선시대에는 영녕전(永寧殿)이 조묘의 기능을 수행하였다. 반면 부조지묘(不祧之廟)는 제사 대수가 끝나는데도 조묘로 옮기지 않는 선왕의 사당을 가리킨다[『숙종실록』 37년 12월 30일]. 그러므로 부조지묘는 불천위(不遷位) 또는 세실(世室)과 동일한 말이다.
내용 및 특징
변천
조선후기에는 왕들이 자신의 생모와 생부를 추숭하면서 그들의 사당을 별도로 만드는 일이 많았다. 이때의 사당들은 불천위였다. 영조가 생모인 숙빈최씨(淑嬪崔氏)를 위해 마련한 육상궁(毓祥宮),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思悼世子)를 위해 조성한 경모궁(景慕宮), 순조가 생모인 수빈박씨(綏嬪朴氏)를 위해 건립한 경우궁(景祐宮)이 대표적이다.
참고문헌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분축연(分軸宴)
정의
두루마리에 쓴 공신교서(功臣敎書)를 나누어 받은 공신들이 이를 기념하기 위해 여는 잔치.
개설
시나 그림, 그리고 교서 등을 축(軸)으로 만들어 여러 사람들이 나누어 가지거나 같이 받는 것을 분축(分軸)이라 하고, 이를 기념하여 개최하는 연회를 분축연(分軸宴)이라 하였다. 『조선왕조실록』에 등장하는 분축연은 공신교서를 받은 공신들이 이를 기념하기 위해 여는 잔치가 대부분이다. 공신교서는 비단에 적어 두루마리 형식으로 장황을 하여 공신들에게 나누어주었기 때문에 분축이라 하였다. 공신 책봉은 녹훈이 정해지면 회맹제(會盟祭)를 지내고 분축을 하였다. 회맹제는 왕과 공신들이 모여 천지신명께 제사를 지내고 희생의 피를 마시며 단결을 맹세하는 의식이다. 회맹제와 분축은 별도의 의식이지만 조선후기로 갈수록 같은 날에 주로 거행하였다. 회맹제 때는 이전 공신들도 같이 참여하였기 때문에 이를 마치고 거행하는 회맹연도 신구 공신들이 같이하는 연회였다. 반면 분축은 새로 교서를 받는 사람들에게만 해당하는 의식이었다. 그에 따라 분축연에는 새로운 공신들만 참여하였다. 즉, 같은 날에 공신으로 책봉된 것을 기념하고 그들의 단결을 위한 연회였다.
연원 및 변천
분축연은 조선초기부터 공신 책봉이 있을 때마다 거행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중중대와 명종대에 회맹 후 열린 분축연은 왕이 공신들을 위해 나라에서 베풀어주는 연회로 묘사되어 있다[『중종실록』 2년 11월 1일][『명종실록』 2년 윤9월 19일]. 그러나 인조대에 이르러 분축연은 그 유래를 알 수 없는 사적인 연회라며 사간원(司諫院)에서 폐지를 주장하기도 하였다[『인조실록』 3년 4월 19일]. 조선후기 분축연은 왕의 공식적인 행사는 아니었지만 그 설행을 막지 않았을 뿐 아니라 왕이 이를 위해 풍악을 하사하고 술을 내리는 것이 관례였다.
절차 및 내용
생활·민속적 관련 사항
분축연은 교서축(敎書軸) 외에도 시축(詩軸), 계축(契軸) 등을 받거나 나누어 가질 때 여는 잔치였다. 일종의 계회와 같이 행사에 참여한 것을 기념하면서 상호 단결력을 과시하는 행사였기 때문에 사대부들 사이에 널리 행하였던 풍속이다. 대부분 연회나 행사 등의 모임을 기념하는 그림을 남겼으며[『명종실록』 15년 7월 22일] 시나 가요(謌謠)를 지어 축으로 남기기도 하였다[『광해군일기』 10년 2월 24일].
참고문헌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조선의 공신』, 한국학중앙연구원출판부, 2012.
사독(四瀆)
정의
대한제국기에 환구단에서 제천례(祭天禮)를 하면서 제사지낸 방위신의 하나로 네 군데의 큰 강.
개설
대한제국기에는 제천례를 제정하여 하늘에 제사를 지냄으로써 국가와 황제의 위상을 높이고자 하였다. 이때 환구단에 황천상제(皇天上帝), 황지지(皇地祗), 일(日), 월(月), 풍운뇌우(風雲雷雨)와 북두칠성(北斗七星) 등 성신과 더불어 산천의 신인 오악(五岳), 오진(五鎭), 사해(四海), 사독(四瀆)의 신에게도 제사를 지냈다.
내용 및 특징
신성한 산과 바다에 천지제사를 지내는 것은 황제의 고유 권한으로, 대한제국기에는 제천단인 환구단을 짓고 오악을 비롯하여, 오진, 사해, 사독에 제사를 지냈다. 사독은 시대에 따라 달랐는데, 조선시대의 경우는 동독(東瀆)인 낙동강(洛東江), 남독(南瀆)인 한강(漢江), 서독(西瀆)인 대동강(大同江), 북독(北瀆)인 용흥강(龍興江)의 네 강에서 제사를 지냈다.
환구단에서는 1층에 모신 황천상제와 황지지, 2층에 모신 야명(夜明)과 대명(大明), 3층에 모신 운사(雲師), 우사(雨師), 풍백(風伯), 뇌백(雷伯), 북두칠성, 오성(五星), 이십팔숙(二十八宿), 주천성진(周天星辰)과 같은 자연신과 함께, 땅과 바다, 천을 관장하는 신인 오악, 오진, 사해, 사독을 배향하였다.
이는 풍운뢰우와 산천의 신을 종향위로 삼은 갑오개혁기보다 더 많은 신들을 섬긴 것이다. 대명과 야명 외에도 성신으로 북두칠성, 오성, 이십팔수, 주천성신을 모셨으며, 오악, 오진, 사독, 사해와 함께 명산, 대천, 성황도 모셔 대상 신이 훨씬 세분화된 것이었다. 이 가운데 풍운뇌우와 성황은 조선시대의 제천단이던 남단(南壇)에서 제향하던 것이었다.
사독을 포함해 오악, 오진, 사해를 모신 것은 달라진 공간 개념을 의미한다. 조선시대에는 악, 진, 해, 독 가운데에서 진이 빠져 있었고 고려 개성을 중심으로 하여 방위에 따라 균일하게 선택한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환구단에서 악, 진, 해, 독을 오방에 맞추어 체계화함으로써 오방 개념이 확실하게 적용되었다.
변천
환구제를 거행하였던 대한제국 초기에는 오악을 비롯하여 오진, 사해, 사독의 신위가 명목으로만 존재하고 있었을 뿐 각각에 해당하는 산천을 정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다 1903년(광무 7)에 이르러 각 지역의 해당 산천을 정하게 되었다. 이때 정해진 사독은 조선시대의 사독을 이어 동독은 상주의 낙동강, 남독은 서울의 한강, 서독은 평양의 패강(浿江), 북독은 영흥의 용흥강의 네 강을 그대로 채택하였다.
참고문헌
『환구단의궤(圜丘壇儀軌)』
『매천야록(梅泉野錄)』
김문식 외, 『왕실의 천지제사』, 돌베개, 2011.
이욱, 「대한제국기 환구제에 관한 연구」, 『종교연구』Vol.30, 2003.
사친(私親)
정의
조선 시대에 입후(立後)하여 즉위하거나 후궁 소생으로 즉위한 왕의 친부모 또는 왕비와 후궁의 친부모.
개설
주자학은 부계위주(父系爲主)의 친족조직에 바탕을 둔 정치·사회사상이었다. 따라서 중국 이외의 지역에서 주자학의 윤리가 명실상부하게 시행되기 위해서는 부계위주의 친족조직이 확립되어야 했다. 주자학에서 강조하는 이성혼(異姓婚)도 부계위주의 친족조직을 전제로 하는 것이었다. 한국사에서 명실상부한 부계위주의 친족조직은 조선 건국 이후에나 가능했다. 삼국 시대와 통일신라 시대 및 고려 시대에는 부계와 모계가 다 같이 중시되는 양측적(兩側的) 친속제도가 온존하였으며, 동성(同姓) 친족 간의 족내혼도 빈번하였다. 고려 시대의 경우 대부분의 친족집단은 거주지와 본관이 일치하였으며, 각 지역의 토성(土姓)들은 동성동본(同姓同本) 간의 혼인이나 딸자식을 주고받는 교환혼(交換婚)의 경우도 적지 않았다. 또한 혼인의 경우 사위가 장인의 집에서 처가살이 하는 솔서제(率壻制)가 흔하였고, 여성들의 재혼도 관념상이나 제도상으로도 금기시되지 않았다. 이 같은 친족제도에서는 적서(嫡庶)의 차별이나 처첩(妻妾)의 차별이 별로 없었으며 가문을 계승하기 위한 양자제도나 입후제도 역시 없었다.
조선왕실의 경우 나라의 모범이 되어야 한다는 면에서 주자학에 입각한 친족제도와 친족윤리를 솔선하여 실천하게 되었다. 조선이 건국된 이후 왕실에서의 족내혼은 물론 왕실 이외에서의 동성혼도 더 이상 용납되지 않았다. 조선 건국 후 부계혈연 가족제도가 확립되는 과정에서 가문을 계승하기 위한 양자제도 또는 입후제도가 확산되었고, 그 결과 입후된 사람과 그 사람의 친생 부모 즉 사친에 관한 의례문제가 중요시되었다. 아울러 혼인한 여성의 사친에 관한 의례문제 역시 중요시되었다. 이 같은 사회적 현상이 왕의 사친에게까지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내용 및 특징
조선 시대에 사친에 관련된 핵심 개념 및 의례는 『주자가례』상례(喪禮)의 “남의 후사가 된 남자나 시집 간 여자는 그 사친을 위해 모두 상복을 한 등급 내리고, 사친도 역시 그렇게 한다.”는 규정이었다. 이 규정에 의하면 사친은 입후되어 남의 후사가 된 사람의 친부모 또는 시집 간 여자의 친부모를 지칭한다. 양자가 된 남자는 양부모를 위해서는 정복(正服)의 상복을 입지만, 정작 친부모를 위해서는 상복을 한 등급 내려 입는데, 이는 자신의 친부모보다는 자신을 양자로 들인 부모를 우선시한 결과라 할 수 있다. 시집 간 여자 역시 시부모를 위해서는 정복의 상복을 입지만, 친정 부모를 위해서는 상복을 한 등급 내려 입는데, 이 역시 자신의 친부모보다는 시부모를 우선시한 결과라 할 수 있다.
조선건국 이후 유교문화의 확산으로 부계 혈연가족이 더욱 확대되고, 조선 중기까지도 유지되던 자녀간 균분(均分) 상속과 윤회 봉사(輪回奉祀)가 17세기에 이르러서는 장자(長子) 위주의 재산상속과 종가(宗家) 위주의 제사상속 문화로 변화하였다. 이러한 변화는 대체로 봉사조(奉祀條)전민(田民)의 장자에의 계승과 관련하여 나타나는데, 이 결과 봉사조 전민은 종가의 세거지로부터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 집중적으로 분포하게 되었고, 또 덧붙여 세거지 주변의 전민을 종가에서 대대로 물려받음으로써, 종가 일대의 전민 대부분을 종가가 차지하게 되었다. 18세기 이후 종가를 중심으로 지차(支次) 자손들이 모여 취락을 형성하는 동족부락 역시 이런 과정에서 생겨났다. 이런 맥락에서 조선 후기 족계나 동계 등의 결사 역시 한 동리에 거주하면서, 봉사하는 선조가 동일한 사족의 후예를 중심으로 결성되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입후(立後)하여 즉위하거나 후궁 소생으로 즉위한 왕에게 사친 문제는 왕권의 정통성을 결정짓는 중요한 문제가 되었다. 이에 따라 조선 후기의 왕들은 의례 추숭을 통해 사친을 왕이나 왕비 또는 그에 버금가는 존재로 만들곤 했다.
물론 왕의 사친 추숭은 조선 전기에도 있었다. 예컨대 성종의 사친인 의경세자, 선조의 사친인 덕흥군 등에 대한 추숭을 들 수 있다. 하지만 의경세자의 추숭이나 덕흥군의 추숭은 왕권의 정통성을 결정짓는 핵심적인 요소는 아니었다.
그에 비해 조선 후기에는 부계위주의 친족조직 확립과 주자학의 보급에 따라 왕의 사친 추숭이 곧 왕권의 정통성을 결정짓는 핵심적인 사안으로 간주되었다. 그 같은 사례를 잘 보여주는 것이 인조의 사친 추숭이었다.
인조는 선조의 손자이자 정원군의 장자였는데, 반정을 통해 왕위에 올랐다. 따라서 인조는 왕의 아들이 아니라 왕의 손자로서 왕이 되었다. 이에 인조는 생부인 정원군을 원종으로 추숭하였는데, 원종 추숭에는 인조반정 직후의 여러 정치적 동기와 정파의 대립이 함께 개재해 있었다. 반정으로 즉위한 인조의 입장에서는 추숭을 통해 종법적(宗法的) 정통성을 확립하면서 왕실의 권위를 높이고 왕권의 강화를 이룩해 나가고자 하는 의도가 깔려 있었다. 반면 신료들의 입장에서는 유교적 명분과 원리를 강조함으로써 왕권을 견제하려는 전통이 강하게 작용하고 있었다. 일부 훈척들을 중심으로 하는 집단은 왕권에 기생하여 왕권을 높임으로써 자신들의 특권을 지속시키려는 의도가 있었고, 대다수 사림계의 관료들과 학자들은 선명성을 강조하는 도학정치의 여러 원칙들을 들고 공론을 무기로 하여 정치의 주도권을 장악하고자 하였다. 이에 따라 원종이 추숭되기까지 12년 간의 논쟁을 겪어야 했다. 원종이 추숭됨으로써 예학적으로 『주자가례』 중심의 보편주의 예론이 전통적 분별주의 예론을 압도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정치적으로는 인조의 왕실권위와 왕권의 강화가 이루어지고 사림 세력에 대한 훈척 세력의 우세, 조정의 공론에 대한 국왕의 독단이 우세해져 갔다. 인조의 사친 추숭 이후로 왕의 적자가 아닌 처지에서 즉위한 왕들 역시 인조의 사례를 따라 사친을 추숭하였다.
변천
18세기 들어서면서 조선왕실에서는 후궁의 아들이 왕위에 오르는 경우가 많아졌다. 이런 경우 왕은 자신의 생모 즉 사친을 추숭함으로써 종통(宗統)을 확립하고자 하였는데, 그 대표적인 사례가 영조의 생모인 숙빈최씨(淑嬪崔氏)의 추숭이었다.
영조는 즉위 초에 숙빈최씨(淑嬪崔氏)가 왕비가 아니라서 종묘에 모실 수 없었다. 영조는 1724년 즉위하자마자 사당의 부지를 선정하게 해서 이듬해인 1725년에 경복궁 서북쪽 북악산 아래에 숙빈의 사당인 숙빈묘(淑嬪廟)를 완성하였다.
그런데 영조는 1753년(영조 29) 기왕의 숙빈묘를 육상궁(毓祥宮)이라 하였으며 숙빈 무덤이었던 소령묘(昭寧墓)는 소령원(昭寧園)으로 하였다. 본래 조선 시대에 세자, 세자빈 또는 왕을 낳은 후궁의 사당은 묘(廟)로, 무덤은 묘(墓)로 불렸는데, 이 같은 묘묘(廟墓) 제도를 영조가 궁원(宮園) 제도로 바꾼 것이었다.
유교 예법에서는 천자의 무덤을 능이라고도 하고 원(園)이라고도 하며, 제후왕의 무덤 역시 원이라고 하였다. 따라서 무덤의 명칭을 묘(墓)에서 원(園)으로 바꾼 것은 의례상 크나큰 격상이었다. 영조는 자신의 생모인 숙빈최씨(淑嬪崔氏)를 위해 이 같은 궁원 제도를 도입하였던 것이다. 영조 이후 후궁의 아들로 즉위한 순조도 자신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사친을 추숭하였다. 이 결과 영조의 사친을 모신 육상궁(毓祥宮)을 위시하여 추존왕 원종의 사친을 모신 저경궁(儲慶宮), 경종의 생모인 희빈장씨를 모신 대빈궁(大嬪宮), 추존왕 덕종의 사친을 모신 연우궁(延祐宮), 사도세자의 사친을 모신 선희궁(宣禧宮), 순조의 사친을 모신 경우궁(景祐宮), 영친왕의 사친을 모신 덕안궁(德安宮) 등 7궁이 출현하였다.
참고문헌
『朱子家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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