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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행일/집결지 : 2013. 07. 25~30일 (5박6일) / 인천 제1국제여객터미널 (7. 25일 15시)
▣ 여행코스 : 인천항-대련-여순-단동-집안-송강하-백두산 서파-천지-통화-심양-대련-인천
▣ 참석자 : 34명 < 회원 15 / 비회원 10분(서울 6 , 지방 4) / 마나님 9분(회원 6, 비회원 3) >
<※회원 : 종화, 양주, 기인, 형채, 원우, 삼환, 용복, 재웅, 전작, 정한, 해황, 문형, 영훈, 광일, 양기>
▣ 동반시 : "장자의 나비" 외 5편 / 김정남 외 5
▣ 뒷풀이 : 발맛사지(道足) 및 현지식, 한식에 중국술과 맥주 / 고구려휴게소 및 통화시
백두산 천지를 가 볼 수 있는 뜻 깊은 기회가 왔다.
시산회 집행부에서는 년 초에 산행계획을 수립할 때 산우들의 신청을 적극 수렴하였다. 작년의 중국 태항산 산행에서와 같이 백두산 천지 트래킹을 위해 5박6일(7. 25~7. 30)의 일정을 잡았다. 좋은 기회를 얻은 참석 인원은 34분(시산회회원 15, 비회원 10, 마나님 9)이었다. 영산인 백두산과 옛 선조들의 삶터(요녕성)와 묘(길림성) 등을 볼 수 있게 되어 집행부에 진심으로 감사를 드린다.
중국의 왕복 이동은 국제여객선 ‘대인 훼리호’(인천=대련)로 이동 하였으며, 중국 요녕성과 길림성내의 이동은 55인승의 관광버스를 이용하였다. 주요 여행은 대련시의 러시아 거리, 여순의 감옥소 및 단동시의 전신마맛사지, 압록강대교 및 단교, 압록강유람선 여행과 집안시의 장군총, 광개토대왕비, 광개토대왕릉 등을 둘러보고 송강하의 백두산 서파 천지 트래킹, 통화시에서 천지 트래킹 후 발맛사지, 통화시에서 심양시와 심양시에서 대련시까지의 이동은 고속도로로 이동하였다.
이번 여행의 만찬은 ‘대인 훼리호’에서 선내식당과 백두산(서파) 천지 트래킹 후 뒷풀이로 통화시에서 저녁 식사(장선식 사장님의 맛있는 음식 제공)를 맛있게 하면서 백두산 천지에서 낭송 할 계획이었던 동반시는 전작 회장님이 낭송하였다. 또한 ‘대인 훼리호’에서 3편과 백두산 천지 트래킹 전후에 2편의 동반시 등 5편을 낭송하였다. 산행후기의 기자는 집행부의 지시에 의거 부부가 동참한 둘(김종화, 박형채)이 절반씩 나누어서 공동으로 작성하였다.
7월 25일(목),
학수고대(鶴首苦待) 하던 백두산(長白山) 천지 산행을 하기 위한 첫 번째 날이다. 오늘은 일행 34명이 오후 3시 전후 인천항 제1국제여객터미널(연안부두 옆)로 집결하였다. 사전에 협의차 여객터미널 건물 4층으로 이동하였다. 금년에도 (주)인천항여객터미널 사장님으로 계시는 이준용 광고20회 동창께서 다과류와 음료수, 과일 등을 제공하며 우리 일행을 반겨 주었다. 집행부에서 찬조를 받은 우의와 조끼 및 가그린을 나누어 주신다. 특별히 선물한 친구들에게 감사드린다. ‘대인 훼리호’의 귀빈실(3실) 배정 방법 등은 많이 고민하였던 것 같다. 부부가 동참한 산우들 중에서 마나님들께 사다리를 타게 하여 배정을 하였다. ‘산악투어’ 백 과장님의 여행 중 주의사항과 출입국 수속 등 간단한 설명을 듣은 후 오후 4시경엔 “대인 훼리호”에 승선을 하였다.
인천항에서 중국 대련항까지 가는데 사다리 타기에 당첨된 3쌍(형채, 삼환, 천석)은 귀빈실에 짐을 풀고, 나머지 친구들은 111~117호까지 1등석에 나뉘어 입실하였다. 조문형 총장님은 중국에 가서 이동시 호텔방은 2인 1실이라 하면서 부부를 제외한 동창들은 짝꿍을 매일 달리 하는 게 좋을 것 같다고 하며 배정한다. 잠시 후 우리 일행은 전작 회장님의 해양대학 후배이며 수석 사무장의 안내로 선장실의 내부활동과 갑문을 통과하는 모습 등과 훼리호의 제반 특성과 구입 등등을 설명하였다. 전작 시산회 회장님의 도움이 아니었다면 아마 이런 학습은 없었을 것이다.
잠자는 선실이며 식사 등 많은 혜택을 받는 우리는 행복한 시간이었다. 저녁 7시30분 쯤 여행객들의 식사가 끝나고 우리 일행만이 별도로 저녁식사를 하게 되었다. 저녁 9시까지 푸짐한 음식과 하이트맥주를 들며 조문형 총장님의 사회로 만찬이 진행되었다. 전작 회장님의 건배사로 분위기는 한층 고조되었다. 전작 회장님은 5대양 6대주를 돌아다니며 세계인의 삶을 경험하고 해양인으로서 우리의 중국여행에 많은 공로를 베풀고 있다.
인사말로 ‘빨리 갈려면 혼자서 가고, 멀리 갈려면 여럿이 동행해야 한다’는 아프리카 속담을 들면서 시산회 회원들과 함께한 이 여행의 중요성을 설명해 주었다. 고교에 입학한지 벌써 45년의 세월을 보내고 오늘 광주, 목포 동창들과 함께 백두산 산행을 하게 되어 감회가 깊다고 하며, 또한 이번 산행 시 꼭 필요한 선물을 협찬한 기세환 전 회장님(우천대비 우의 선물)과 김동주 사장님(산행조끼 선물)에게는 모두 우레와 같은 박수로 감사를 표하였다.
이준용 사장님은 저녁 만찬에도 맥주 2박스를 제공해주어 저녁 9시까지 화기에 찬 분위기를 만들어 주었다. 아무튼 감사의 말씀을 다시 전합니다. 이번 백두산 천지의 트래킹(산행)은 작년 중국(태항산 등) 산행에 이어 동참한 임경택, 서윤복, 이종진 친구들과 금년에 참석하는 목포의 박천석(부부), 광주의 김종렬, 박종채, 서울의 장선식, 안웅순, 윤제천, 김종윤 친구 등이 시산회 회원들과 함께 전국적인 광고20회의 중국(백두산 등) 여행이 되는 셈이 되었다.
만찬 후 숙소로 돌아와 한 방에서는 간단히 소맥주를 또 하였다. 나양주 산우는 집에서 주말농사로 키운 싱싱한 풋고추 등을 시골 된장에다 찍어 먹을 수 있도록 안주를 준비하였고, 윤재천 친구는 맛있는 육포를, 다른 친구는 과자류 등을 준비하였다. 졸업 후 오래간만에 만난 종렬, 천석, 종채 등과 그동안의 과거사와 지금까지의 산행 등의 이야기가 대부분이었다. 바로 옆방에서는 카드놀이를 하는지 새벽까지 친구들의 목소리가 들려왔고, 훼리호가 꽤 오래된 선박인지 기관실 음이 조금 심하게 진동한다. 한동안 잠을 이룰 수가 없었는데 새벽엔 겨우 잠에 들었나 보다.
7월 26일(금),
아침 일찍 일어나 유리창을 보니 벌써 해가 떠 있는지 밝아 상쾌한 느낌이다. 제대로 숙면을 하지 못해 잠시 뒤척이다 일어나 여객선의 갑판 위로 나갔다. 바다 위에 떠 있는 햇님의 전경이 구름이 조금 끼어있지만 아름답기만 하다. 7시30분, 아침식사를 한 후 여객선의 갑판 위로 모두 모여 선상의 기념사진을 촬영하고, 백두산 산행(시산회 214회) 첫 번째의 시(김정남 산우의 ‘장자의 나비’)를 낭송(박형채 낭송)하였다. 김정남 산우의 세 번째 자작시이다. 본인의 신청으로 맨 처음 ‘대인 훼리호’에서 낭송하였다. 축하할 일이나 함께 동행하였으면 더 좋지 않았을까.
장자의 나비는 장자가 지은 '장자'에 나오는 우화로써 무위자연과 느리고 비우며 살으라고 주장한 장자는 기원전 4세기경에 활동한 사람이다. 정확한 생몰년대는 잘 모르나 기파랑은 신라 향가 ‘찬기파랑가’에 나오는 화랑의 이름이며, ‘즈문’은 천(千)의 고어이고, ‘진흙소’란 불가에서는 깨달음의 의미로 자주 인용하였단다. ‘앞 이빨에 털이 나 있다’는 판치생모(板齒生毛)의 풀이로서 120살까지 살아 이가 다 빠진 조주 스님께 한 제자가 "달마 조사가 서쪽에서 온 까닭은 무엇입니까?"라고 묻자 대답한 말로 불가에서는 유명한 화두이다.
아침 9시경, 대련항에 도착하여 하선 및 입국 수속을 마친 후 10시반경, 대련항에 내리니 중국 현지의 가이드(이상철)가 우리를 반겨주었다. 1902년경 청나라가 망하고 이곳을 러시아가 점령하였으며 다음으로 일본이 점령하였던 역사가 이곳에 남아있기에 관광객들은 러시아거리를 꼭 구경한다고 하였다. 은행 건물하며 몇몇 건물들이 러시아풍으로 건축되어 있었다.
간단한 여행을 끝내고 점심식사를 한 후 우리는 여순 감옥소를 관람하였다. 중국인들의 항일 투쟁과 일본인 감방장이 10명이나 교체되는 동안에 신채호 선생, 이희영 선생의 소개, 항일투쟁사와 투옥된 감방을 소개하고 있었으며 건물이 방사선 모양으로 구성되어 있고 복도 중앙에 철 창살을 깔아 1층과 2층을 감시가 용이하도록 만들어져 있었다.
8인 1실에 소변기와 대변기를 따로 두었으며 좁게 보였다. 아무리 둘러보아도 안중근 의사의 모습을 볼 수가 없었다. 약간 오르막에 교수형장이 있었는데, 2층 구조로 되어 있어 위층에서 교수형이 끝나면 시신을 부검 후 아래층 동그란 나무물통에 넣어 바로 옆 담장 밖 무덤에 일렬로 매장했던 모양이다.
그 건물을 내려오니 마지막 건물에 안중근 의사 안내관이 설치되어 있었으나 몇 친구들만 관람이 허가 되었다. 영화 촬영을 위해 따로 설치한 안내관인 듯 보였다. 시간이 지났다고 관람을 불허하여 우리는 기분이 아주 불쾌하였다. 친구들 몇 명이 안중근 의사의 옥중에서의 붓글씨 등을 삼벽에 전시하고 있었으며 얼굴부위 동상과 함께 후의금 통과 사화로 앞이 내장되어 있었다. 가이드란 작자는 밖에서만 왔다갔다하고 중국 가이드처럼 함께 동행해서 설명을 하지 않으니 중국에서의 조선족의 삶이 불행스럽기 짝이 없는 일이다.
조 총장님이 과일(자두, 포도)을 구입하여 나누어 주었고, 전 회장님은 과자를 나눠 줘 먹으며 기분 전환을 하였다. 이제 단동으로 향해 달려야만 했다. 큰길가에 심어져 있는 옥수수 밭과 플라타나스 숲을 구경하며 약 300km의 거리를 5시간 정도 걸렸다. 휴게소를 지난 후 무료했던지 조 총장님이 각자 5천 원빵 가위, 바위, 보 게임을 하여 마지막으로 한양기 산우가 박천석 동창에게 5전3승으로 이겨서 12만5천원을 획득하는 복된 일이 있었다.
저녁 8시경, 단동에 도착, ‘우전 대하호텔’에 여장을 풀고 깨끗이 샤워를 한 후 가까이 있는 신라반점으로 가 한식으로 저녁식사를 하였다. 저녁식사를 하면서 김종렬 친구의 동반시(햇빛사냥/장석주) 낭송이 있었으며, 최광일 재경회장님의 격려의 말도 있었다. 식사 후 사전에 협의가 있었던 전신 맛사지를 받으러 갔다.
3만원짜리 전신 맛사지는 34명을 수용할 정도로 공간이 넓고 잘 해 주었다. 여자는 남자 맛사지사가, 남자는 여자 맛사지사가 하였다. 그런데 옆에 있는 정구 선수였던 박천석 친구는 남자 맛사지사에게 몸을 맡겼다. 기분이 좋은 혈자리를 주무르면 통! 통! 하며 소리를 지르곤 하였다. 나중에 물으니 그곳이 뭉쳐서 풀어야 할 자리라는 것 이었단다. 아무튼 모두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팁을 1~3천원씩 주고선 호텔에 돌아와 꿈나라로 들어갔다.
7월 27일(토),
아침 06시에 기상, 06시40분에 호텔 내에서 뷔페식으로 아침식사를 한 후 07시20분에 단동을 출발하였다. 압록강 하류쯤의 단동-신의주로 연결되어 있는 철교가 단절되어 있는 곳에 왔을 때 잠시 구경하고 가기로 하였다. 한양기 산우(여행용 가방)와 나양주 산우(색안경)가 호텔에다 귀중품을 놓고 와서 예정에 없었던 휴식이 되었다. 다행히 호텔에서 귀중품을 찾아 온 후 우리가 탄 버스는 약 1시간 반을 달려서 압록강 중류쯤의 선착장에 도착하였다. 유람선을 기다리는 동안 블루베리와 포도, 해바라기씨 등을 사서 맛을 보았다. 오늘이 주말이라 중국의 관광객들이 대부분인 것 같았다.
유람선에 승선하여 하류 쪽으로 뱃머리 가까이를 가보니 오른쪽 섬에 북한기가 보였고 농부, 아이들, 총을 메고 모자를 쓴 북한 병사도 보였다. 강가에서 쉬고 있었던 주민이 손을 흔들어 답을 하고 하얀 염소떼가 이동하고 있었다. 압록강은 양국이 자유롭게 이용하는 모양이다. 건너편 여군 막사에는 아무런 인기척이 없고 간간이 주민들만 보였다.
압록강을 따라 중국은 도시화 되었는데 북한쪽은 한가로운 농촌뿐이다. 그 섬에 사는 이들은 당 간부급으로 사상이 투철한 주민들만 산단다. 20분쯤 내려가니 작은 배에 1명씩 순서를 기다리는지 접안해 있다가 맨 앞쪽 배가 유람선에 붙어 장뇌삼 장사를 시작한다. 화교가 속칭 국경무역을 하는 모양이다. 불쌍했던지 임경택 교수는 1만원을 적선하였단다.
우리는 유람선 이층에서 전북 군산에서 교편에 적을 두고 있는 역사탐방 선생님과 중국지역 고대사 연구를 하는 모임의 근황을 들으며 고향인 고창의 선배인 임용복 산우는 중국의 동북공정으로 유물 발굴에 한국 학자들을 배제하는 중국의 행태 등 여러 가지 담론을 나누고 헤어졌다. 유람선 선상에서 목포에서 교직의 정년을 마치고 전남 정구협회 사무국장을 역임하고 있는 박천석 동창이 세 번째의 동반시(농무/신경림)를 낭송하였다. 곁에 있던 꼬마가 신기했던지 시 낭송이 끝날 때 까지 유심히 경청하고 있었다.
하선을 한 후, 집안지역에 고구려 유적들이 많이 잔존해 있는 역사 탐방을 위해 또 달려야 한다. 쉬었다 가다를 반복하면서 편도 1차선 좁은 길을 천천히 달리고 있었다. 옥수수는 물론 복숭아밭이 산을 따라 계속 이어져 있었고 강가에 북한 접경시가 보였다. 2시간 반을 달려 집안시 가까이에 도착하였고, 국내성이란 곳을 소개한다. 집안시는 고구려의 옛 수도였던 국내성의 현재 지명으로 길림성의 동남쪽에 위치한다.
AD 3년경 고구려 제2대왕인 유리왕이 졸본성에서 국내성으로 천도 하였는데, 427년까지 가장 오랜 기간(424년) 수도로서 찬찬했던 번성기를 누렸던 만큼 1만 여개의 고분과 그 외 수 많은 유적지가 남아 있단다. 집안은 흔히들 ‘고요한 무덤의 도시’라고 했다. 통화에서 벗어나면서 시작된 산길이 끝나고 접안시로 들어가는 내리막길로 들어섰다. 약 1m 정도 높이의 담장에 잔디가 심어져 있고, 전란 때에는 산성으로 피신하고 평상시에는 이곳에서 농사며 일상생활을 하였단다.
조선불고기집에서 맛있는 소고기 구이로 배를 채웠다. 깨끗하게 단장한 새집으로 이사를 해서 잘 가꿔진 음식점이었다. 옛날 음식점은 길가에 있었는데 허름해 보였다. 아무튼 한국 관광객들이 중국 동포들을 부자로 만들어 주었나 보여 대견하기도 하였다. 식사 후 밖에서 인삼(장뇌삼)을 팔고 있는 한 상인을 만났는데, 사진을 촬영하자 조그마한 홍보물을 제시하였다. 그 내용은 전신맛사지 요금이나 쇼핑요금, 뽀드 승선요금이 모두 중국의 가이드가 사기로 안내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사실인지는 모르겠으나 중국의 여행 전문랜드에서 현재 운영하는 내용이 현지의 가격과 많은 차이가 있음을 말하는 것만 같다.
오후 3시경, 고구려 20대 장수왕릉으로 추정되는 장군총에 도착했다. 큰 화강암으로 22개단 1,100개의 돌로 쌓아 기단의 한 변 길이가 33m, 높이가 13m나 되는 거대한 건축물이다. 동양의 피라미드로 불리고 있는 장군총은 위엄이 있었다. 장방형이며 네 귀가 동서남북을 가리키며 위에 위치한 석실은 백두산 천지를 향해 있단다. 많은 산우들이 단체로 증명사진을 한 컷씩 촬영하고 인근 돌무덤 쪽으로 갔다.
이런 돌무덤 양식을 고구려 적석묘라고 한다. 장군총 뒤에는 ‘배층’이 고인돌 모양으로 세워져 있었는데, 장수왕의 첩의 묘로 추정하고 있단다. 장군총(장수왕릉), 광개토대왕릉의 경우, 확실히 누구의 묘인지, 밝혀진 상태는 아니다. 다만 장군총이 무덤이 아니라 제사를 지내던 신전이라든지 이 능들이 고구려시대 이전의 고대 한국의 유물이든지 많은 학설이 제기되고 있는 현실이다.
다만 우리의 가슴을 뜨겁게 하는 선조들의 옛 자취라는 것은 확실한 것 같다. 이러한 역사 공부만이 우리의 근원을 알 수 있게 해주는 지름길이라는 생각이 든다. 집안고구려 민속문화 연구발전센터(2012년 6월28일)에서 ‘고구려 28대왕 박람관’을 소개하면서 모든 관광객들은 역사를 이해하고 파악하여 전승하기를 바라며 고구려 세계문화 유산이 영원히 빛나게 만들기를 바라고 있었다. 이어서 광개토대왕릉비각으로 향했다.
조용한 농촌 마을 가운데 넓게 자리하고 있었다. 광개토대왕릉비각은 고구려 제20대 장수왕이 부친인 광개토대왕의 업적을 기리기 위하여 서기 414년 장수왕 2년에 당시 도읍이었던 집안에서 4.5km 떨어진 지점 태왕총(太王村)에 건립한 기념비로 소개되어 있다. 원래는 광개토대왕비석만 있었는데 1928년 집안현(集安俔) 지사 유현성이 소형 보호비각을 만들었고, 이후 1982년 중국 정부에서 단층형 대형 비각을 세워 광개토대왕릉비를 보호하게 되었다고 한다.
비석은 눈으로는 확인이 안 되고 사진 촬영도 허락하지 않았다. 강력응회암 사면석인데 웅장한 천연바위 모습이다. 높이 6.39미터, 무게 37톤이며 한 글자가 12cm, 44행으로서 비의 네 면에 1,775개의 한자로 구성된 비석 이란다. 비문각 앞쪽에서 친구들과 단체사진을 촬영하고 왕릉으로 향하였다.
현지에서는 호태왕이라 칭하고 있었으며 왕릉은 허물어져 있었다. 위에 올라가 석실만 확인하고 내려 왔다. 우리 역사책에서 배운 고구려 유물들이 중국에 있어 마치 소수민족의 한 부분으로 인식시키는 안내판을 볼 때 마음이 먹먹했다. 일본에 업신여김을 당하고 중국에 이런 취급을 당하는 것을 엿보니 하루 빨리 통일이 되어 보다 반듯한 나라를 일궈 나아가야겠다는 다짐을 해 본다. 저녁 식사를 통화에서 하기로 되어 있어 8시까지는 또 달려야 했다. 중식당에 도착해 맛있는 저녁 식사를 하였다. 이과도주에 청도 맥주를 곁들여 마시니 기분도 좋았다.
이제 내일 백두산 천지의 트래킹을 위해 숙소인 송강하로 5시간을 달려야 한다. 조 총장님이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노래자랑을 진행하였다. 짝궁들이 좀 넓게 쉬려고 뒤쪽으로 간 것을 기회로 마나님들을 동원했는데, 아! 그만 박형채 짝궁인 김순단 마나님과 한양기 짝꿍인 강순덕 마나님을 지명하는 게 아닌가. 노래하면 울타리를 뛰어 넘는데 분위기 깨게 생겼던지 조 총장님은 부르러 뒤로 왔었다.
형채는 누워 있는데 맨발로 끌려가 최백호의 ‘낭만에 대하여’를 서윤복 마나님의 폰을 보며 한 곡조를 불렀다. 곧이어 한양기 산우는 ‘희망가’와 ‘열두고개’ 앙콜송까지 그리고 나서 흥미를 느끼기 위해 신원우 친구 마나님이 자진하여 재미있는 ‘탕(?)’ 노래를 멋있게 하신다. 재미있는 탕의 노래에 힘을 얻었는지 이젠 부부동반한 친구들을 우선적으로 지명한다.
박천석 동창은 때를 기다리 듯 ‘잊혀진 계절’과 앙콜쏭 ‘비목’을 불러 중후한 솜씨를 보였고, 김종화 산우와 최행복 님은 함께 불러주길 바랐는데 ‘봄날은 간다’와 앙콜쏭 ‘이별의 인천항’을 김종화 산우 목소리만 들려서 행복씨와 순단씨는 가사를 잘 모른다고 하면서 계속 빼고만 있어 서윤복 동창의 마나님 폰을 이용하려고 해도 손쉽게 잘 안된다.
중국의 관광버스에는 노래방 기계도 없이 생음악으로 노래를 한다는 게 영 쉽지가 않다. 어려움을 모두 인식한 1시간 반의 긴 시간을 보내고 어두컴컴한 밤에 휴게소 옆에서 ‘서서 쏴’를 하며 10분간의 휴식을 가졌다. 송강하의 숙소인 ‘장백산가일 호텔’에 어렵게 길을 찾아 새벽 2시경에 도착하여 내일 아침에는 06시에 기상하기로 하고 단잠을 이루었다.
7월 28일(일),
백두산 천지를 트래킹하는 대망의 날이다. 새벽 2시부터 아침 6시까지 단잠을 이루다 모닝콜에 잠을 깨 곧장 창문을 열고 날씨를 확인하였다. 비는 오지는 않아도 구름이 잔뜩 낀 날씨라 불안하다. 녹물이 나오는 듯한 기분 나쁜 물로 간단히 세면을 한 후 우의와 긴 옷 등을 챙기는 등 배낭을 간단히 꾸렸다. 아침식사를 하는 식당은 제법 떨어진 곳에 있어 서둘러 걸어서 이동하였다. 식사 메뉴는 간단하게 다시마국물에다 두부무침, 야채볶음, 콩나물무침, 멸치볶음 등과 큰 그릇에 담은 밥이 우리나라 함바식당과 비슷하다.
아침식사를 재빠르게 마치고 곧장 백두산(장백산) 서파를 향하였다. 07시50경에 백두산 서파산문 버스정류장에서 도착하여 현지 가이드가 입산표를 구입하였다. 백두산 등정이 시작되었다. 산문게이트(출입구)를 빠져나와 145m를 도보로 걸어가니 백두산 전용 셔틀버스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셔틀버스는 손님이 오는 순서대로, 좌석 수만큼만 승차를 원칙으로 하기 때문에 우리 일행은 두 개조로 나눠지고 말았다. 여기에서 부터 셔틀버스(좌석: 30명)로 약 1시간 동안을 오르면 천지 주차장이 있고, 약 30여분 정도의 계단을 오르면 천지가 보인다고 한다. 여기에서부터 이슬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셔틀버스는 일정한 간격으로 천지 주차장을 향하여 줄지어 올라간다. 구름 낀 하늘에선 연방 비가 내릴 것 같은 분위기다. 달리는 차창 밖을 보니 도로 주변에 인가는 보이지 않고 백두산 주변에 특징적으로 자생하는 자작나무 군락이 끊임없이 서 있다. 포장된 완만한 능선로를 돌아서 한참을 가다보니 전나무, 가문비나무 등의 침엽수도 간혹 보인다. 8부능선 쯤 올랐을 때부터 안개가 끼어 산봉우리가 보이지 않는다.
줄지어 올라가던 차들이 안개 속에서 시야를 확인하기가 어려워 주춤거리면서 속도를 내지 못한다. 산도 구릉도, 초원도, 꽃들도 안개 속에 숨어버렸다. 참 예측하기 어려운 백두산의 일기에 산 아래와 위가 판이하게 다르다. 점차 숲은 사라지고 민둥산 초원 구릉이 나타난걸 보니 벌써 해발 2천m(백두산의 수목 한계선은 2천m) 즈음인가 보다. 구릉에는 짧게 자란 온갖 풀들이 녹색 비단을 두른 듯 펼쳐 있는데, 이름 모를 풀들이 제각기 온갖 색의 꽃을 피우며 백두산의 짧은 여름을 만끽하는 것 같다.
천지 주차장에 도착하니 많은 트래킹 손님들이 비옷을 입고 준비하거나 오르고 있다. 앞에 간 선두팀은 이미 출발하였는지 보이지가 않는다. 우리 팀도 계단을 오르기 시작하였다. 산 위를 바라보니 오른쪽에 나무계단과 왼쪽엔 돌계단이 나란히 설치되어 있다. 입구의 오른편의 이정표에는 계단이 1,442개, 정상까지의 거리가 900m 라고 적혀 있다. 노약자를 태우기 위한 가마도 준비되어 있고, 벌써 내려오는 사람들도 있다.
오르면서 옆의 계곡을 보니 큰 물줄기는 아니나 제법 많은 량의 개울물이 보인다. 많은 관광객들이 비를 맞으며 백두산(장백산) 천지를 보러 가고 있는 중이다. 산마루엔 운무가 하늘에 맞닿아 산 정상이 어딘지도 보이질 않고, 계단의 끝머리는 구름 속으로 들어가 있어 사람들이 계단을 타고 오르는 모양이 마치 천국으로 올라가는 행렬인가 싶기도 하다. 얕은 이슬비가 내리는 날씨라 다들 마음이 가라앉아 있다. 하지만, 얼마나 큰마음을 먹고 힘들게 여기까지 왔는가.
나무계단은 올라가기에 넓고 편하다. 올라가는 모든 사람들은 이렇게 구름이 끼여 비 오고 짙은 안개 속에서 과연 천지의 물을 볼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불안과 의심이 너나없이 똑같으리라. 중간 중간 계단 귀퉁이에는 가마꾼들이 가마를 대어놓고 호객을 하고 있는 광경이 특이하게 보인다. 그러나 오늘은 걷기에는 좋은 날씨라 그런지 타고 오는 사람들이 보이질 않는다. 하늘에서 드리워진 안개의 장막은 바람의 세기와 방향에 따라 시시각각 이동하고, 계단 옆으로 펼쳐져 있는 산록의 풀꽃은 아침 안개로 이슬을 흠뻑 머금은 채 피어있고, 오르는 작은 골짜기마다 개울물들이 하얗게 흘러내리고 있다.
산우들이 오르는 모습을 촬영해 주기 위해 몇 번을 빨리 오르고 사진기와 폰의 스냅을 눌렀는데 비가 많이 내리는 통에 사진촬영이 잘 안된다. 혹시 고장인가 싶어 배낭에서 수건을 끄집어내어 닦아서 촬영을 했으나 마찬가지다. 전체 계단의 1/3 및 2/3의 계단을 오른 후 잠시 쉬며 사진촬영에 노력하였고, 거의 정상의 근처에서 하산을 하고 있는 장선식 친구를 만났다. 정상(2,470m) 마지막 앞 계단에 1,441 숫자가 적혀진 계단이 보여 근처에서 사진 촬영을 위해 산우들을 한참 찾아봐도 보이질 않는다.
‘천지’ 안내판이 세워져 있는 곳에서 사진기를 계속 닦았다. 북한과 중국과의 경계를 나타내는 ‘5호경계비’를 찾아 봤다. 계단의 정상 우측에 세워진 작은 비석으로 한쪽엔 ‘중국 37’로 되어 있고, 반대쪽에는 ‘조선 37’이라고 쓰여 있다. 이것이 바로 중국과 북한의 국경을 구분하기 위한 경계비임을 알 수가 있었다. 그곳에서 김종윤 친구를 만나게 되어 모델로 인증사진 한 판을 촬영하고 친구들을 물었더니 천지의 안내판 쪽에 있다고 한다.
아직 정상에 남아있는 친구들의 기념사진 촬영을 해 주기 위해 좌측 정상으로 갔더니 행복 마나님을 비롯하여 약 10여명의 친구들이 있었다. 잠시 기념사진 촬영을 몇 분 하였으나 비바람이 계속되었다. 백두산의 날씨가 워낙 변덕스럽다고 해서 천지의 구경과 사진 촬영을 위해 잠시라도 맑아 주기를 눈을 감고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지만 기어이 열리지 않는 ‘천지’였다. 하지만 산우들은 모두들 하산을 서둘렀고, 나만 좀 더 있기로 하였다.
그렇게나 보고 싶었던 백두산 천지. 애국가에 나오는 우리 민족의 시원인 백두산! 친구들의 말에 따르면 10여 차례 이곳을 찾아 왔지만, 한 번도 천지를 조망하지 못한 사람들도 있다고 한다. 어떤 친구는 세 번이나 황홀한 백두산 천지를 가까이 가서 실컷 볼 수가 있었으니 하나님과 산신령님, 천지신명에게 머리 숙이고 고맙다고 하였단다. 오늘 처음 이곳에 와서 못 보는 우리 일행들은 모두가 기원을 해야 되지 않을까!
약 10여분을 더 기다렸지만, 백두산 산신령님이나 하나님께서 노(No!) 하셨나 보다. 우리의 소원은 통일을 읊조리고 내 가족과 나를 아는 이들의 건강과 만사형통을 기원하는 기도를 남기고 하산을 해야 했다. 발걸음이 이곳을 다시 한 번 더 오게 하는 시험성적인 듯 무거웠다. 비바람이 나를 괴롭게 만들었고 빗물은 이미 신발과 바지의 아래쪽을 적셔 얄궂은 기분이다.
조금 빨리 갈려고 해도 내려가는 중국 관광객들이 너무 많아 길을 막고 있다. 하산 길도 피난민들같이 천천히 가고 있어서 마치 전쟁터와 같았다. 가마꾼이 손님을 태우고 힘을 맞추는 구호인 듯, 비켜 달라는 소리인 듯 “여이! 여이!” 하면서 재빠르게 내려간다. 나도 그 뒤를 곧장 따라가니 하산 길이 막히지 않고 손쉽게 내려 갈 수가 있었다.
먼저 내려와서 기다리고 있는 일행들을 찾기 위해 주차장 주변을 둘러보았다. 줄을 서서 셔틀버스를 기다리는 곳으로 가서 확인을 해 보니 앞서 간 선식, 종윤 등 4~5명밖에 보이지 않는다. 그곳의 친구들에게 내가 찾아서 오는 일행들은 이쪽으로 안내를 하겠다고 한 후 오르는 계단의 앞으로 갔다. 약 30여분을 기다리며 7~8명을 만나 안내를 해 주었으나 몸이 불편한 친구나 마나님들이 걱정되어 초조한 마음이었다. 조금 후에 휴게실에서 쉬고 있었던 6~7명의 한 일행도 만날 수 있었다.
이젠 더 이상 기다릴 수가 없어 일행들이 기다리는 곳으로 가 봤으나 전체 인원이 오질 않는 것 같았으나 수많은 관광객들이 서로 먼저 가겠다는 욕심으로 질서가 없는 세계에 온 느낌이 들었다. 하산이나 다른 곳의 관광도 줄을 서서 차를 기다리는데 여기는 전쟁터 같았다. 우리는 정상적으로 줄을 서 오는데 옆에서 끼어드는 시스템이 되어 두 번 몸싸움을 하였고 우리 팀은 뿔뿔이 흩어져 버스에 올랐다. 내려와서 ‘금강대협곡(錦江大峽谷)’을 구경해야 하는데 가이드는 그냥 내려가려는 수작이었다. 착실한 시산회원들은 이에 동의했고, 우린 비에 젖었고 빨리 점심을 먹기 위해 또 승차를 해야만 했다.
가이드의 심정이 난감한 느낌인지 ‘금강대협곡’으로 가야만 하는데, 이번에도 한 버스에 함께 탈 수가 없는 것을 알고는 먼저 탄 대부분의 일행들은 다른 젊은 가이드에게 맡기고 나머지 몇 명의 일행들은 뒤에 가이드와 함께 올 계획인가 보다. 버스 내에는 중국 사람 특유의 된소리 소음과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중국어 백두산 홍보 방송으로 시종 왁자지껄, 시장판을 방불케 하였다.
비에 젖은 몸이 불편하였고 짙은 안개로 구경을 할 수가 없어 산림욕을 즐길 수 있다는 동양의 그랜드캐년이라고 불린다는 ‘금강대협곡’ 구경도 결국 포기를 하고 말았다. ‘제자하(梯子河)’란 지각변동으로 인하여 지각이 양측으로 갈라져 이루어진 깊은 협곡을 말하는데, 처음에 간 일행들은 이것 또한 관람을 포기하고 그냥 백두산(장백산) 서파 주차장으로 가는 버스를 타고 먼저 갔다. 이때에도 화장실을 다녀온 일행이 있어 조금 늦은 친구 일부는 떨어지고 말았다. 백두산(장백산) 서파 주차장에 도착하여 인원을 파악해 보니 일행 5명이 보이질 않는다. 조금 후에 영리한 산우들은 잘 찾아 와 합류하였다.
결국 가이드(이상철)의 큰 잘못이 있었지만, 백두산 천지에 오르기 전부터 우리 일행을 약속된 시간과 장소에 모이도록 하여야 함에도 내 기억엔 그런 사실이 없었고, 본인이 함께 수행을 하여야 하고, 뒤에 남았던 일행을 챙겨서 꼭 안내 하였어야 가이드의 올바른 자세이다. 산행을 마치고 책임 회피를 하는 행동에 여러 친구들의 화를 돋게 만들었는데 중국의 관광사업은 아직 미흡한 게 사실인 것 같다. 뒤에 알았던 사실이지만, 우리 일행은 잘못한 행동은 없었다. 단지, 늦게 도착을 하여 죄송한 마음에서 맛있게 삶은 옥수수를 선물해 주는 너그럽고 아름다운 마음이 있는 친구가 있어 맛있게 잘 먹었네. 그 양반이 누구 시당가?
형채는 백두산 정상에서 나눠 먹고자 했던 쵸코렛을 버스 안에서 한 개씩 나누어 준다. 작년 태항산 왕망령 트레킹은 고생이 많았다고 하지만 날씨가 적절히 좋아 즐거웠다고 하는데, 오늘은 우리에게 기회를 주지 않는다. 덕을 더 쌓고 오라는 신호라고 생각하며 우리 민족의 영산, 백두산의 산행은 빗속에서 모두 끝났다. 내려오는 버스는 올라 올 때 보다 시간이 오래 걸린 듯 하였다. 지루함은 우리들의 마음이 시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리라.
13시경에 고구려식당에 도착하여 점심 식사도 정신없이 하였다. 우리 일행들보다 우리 말을 잘 하는 고구려 매점 아짐씨에게 옥수수며 건도라지 등을 구입하여 챙긴 후 다시 저녁 식사 장소인 통화시로 이동하였다. 장선식 사장님의 제공으로 가이드에게 미리 전화를 부탁하여 예약한 식당이란다. 식당은 어제 소고기를 구워 먹었던 조선족 식당보다는 못 하지만 그런대로 깔끔한 식단이었다.
식당에 자리를 잡은 후 백두산에 올라 낭송할 동반시(백두산 천지에 올라/김윤호)를 전작 회장님이 이곳에서 낭송하였다. 1990년 8월 11일 오후 7시 19분, 백두산 천지에 올라 조국통일 기원제를 올릴 때 낭송했던 시라고 한다. 모두가 맑은 날씨를 기대했는데도 나빴던 날씨를 탓하며 깔끔한 음식을 적당한 음주와 함께 배를 채웠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나오는데 마나님들께서 벌써 삶은 옥수수를 많이 사 오신다. 배가 부른 상태이며 저녁에는 먹기가 곤란하고 내일 대련까지 이동할 때 먹으면 되겠는데, 더운 날씨라 오늘 저녁엔 냉장고에 넣지 않으면 맛이 변할까(쉴까) 봐서 걱정이 앞선다.
이젠 심양으로 가야만 한다. 모두들 얼큰하게 술도 한 잔 하여서 인지 거의 잠을 자는 것 같다. 하지만 생리현상을 해결하기 위해 휴게소에서 잠시 휴식을 취한 후 심양 ‘위니크호텔’에 24시 반경 도착, 무거운 여장을 풀고 호텔 프론트에서 구한 심양시에 대한 자료를 정리하였다.
심양에 있는 요령성 박물관에는 선사시대의 유물들이 많이 있어 우리 고조선, 부여, 고구려, 발해의 유물도 많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중국의 입장에서 우리 문화를 말살하려는 동북아 공정의 일환으로 정리하고 있지 않을까 하는 안타까움이 있다.
요녕성의 성도인 심양은 동북3성의 경제, 물류 중심도시로 지형적으로 백두산에서 뻗은 용상의 산맥이 흘러 용의 꼬리 부분에 속하는 곳으로써 승천을 하는 용문 터로 혼화강(삼수강)이 휘돌아 흐르는 양지바른 땅에 위치하고 있다.
옛 후금(청나라)의 시조 누루하치가 태어난 곳이며, 1625년 청태조 누루하치가 수도를 요양에서 심양으로 옮겼으며, 제2대 혼타이지는 동 명칭을 성경으로 개명하였다. 심양은 요녕성의 성도이면서 중국 동북지방의 최대도시이다. 1625년 누르하치가 세운 금나라부터 마주제국에 이어 청 왕조가 북경으로 천도하기 전까지 수도로서 번성하였으며, 북경으로 수도가 이전된 후에도 중국의 두 번째 수도로 동북 무역의 중심지로서 중요성을 인정받은 곳이다.
심양은 옛 고구려 영토로서, 심양주변에 고구려 산성 유적중의 하나인 석대자산성이 존재 한단다. 조선 인조14년(1636년)에 발생한 병자호란으로 청나라는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을 인질로 붙잡아 가서 심양 고궁 주변의 조선관이란 곳에 기거토록 하였으며, 당시 척화론을 부르짖던 홍익한, 윤집, 오달제 등 3학사를 처형하였다.
일제의 조선침략 및 만주 점령으로 대한독립 투사들이 이곳을 근거지로 독립운동을 전개하던 곳이다. 1931년 9. 18 만주사변 후 일본에 의해 봉천시로 개명되었다가 신 중극 설립(1949년)이후 다시 심양으로 개명하였다. 인구는 약 800만명(실제는 1,000만명) 이중에서 한족이 90%, 만주족, 조선족(약 10만명), 회족, 몽고족 등 38개 소수민족이 10% 정도로 분포 한단다.
7월 29일(월),
7시에 기상, 7시 30분에 식사를 하기 위해 호텔 로비로 내려가는데 한 한국 사람이 “임경택 교수님과 함께 왔느냐?“고 하면서 경택 친구를 찾는다. 저와 함께 식당으로 내려가면 만날 수 있다고 하였는데, 나중 식사 후 경택 친구에게 이야기하였더니 만났다고 한다. 알고 보니 포스코(심양 지사)에 부사장으로 근무하고 있는 임 교수의 제자인데, 함께 동행한 친구들의 간식용 빵류와 과일(배, 사과, 바나나 등)을 선물하셨다. 참으로 고마운 일이다.
8시 반경에 심양에서 대련으로 고속도로를 이용하는 출발이다. 고속도로의 거리는 350km로써 도중 2번의 휴게소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였다. 휴게소 큰 간판에는 대련항에서 연태항으로 BH훼리호가 운행하고 있단다. 연태에 있는 한천옥 산우가 처음에는 이번 여행을 함께 하겠다고 하였는데, 갑자기 급한 일이 생겨 우리와 함께 가는 것을 포기하였다. 그리운 친구여! 보고 싶었는데, 다음 기회땐 꼭 한번 같이 산행하세나. 고속도로를 따라 고속 철길이 시설되어 있고, 전철이 달려가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대련에서 하얼빈까지 완공되어 있는데, 심양에서 대련까지 2시간이 소요되므로 우리의 KTX나 일본의 신간센처럼 고속 전철임에는 틀림이 없는 것 같다.
14시 반경에 대련항 근처의 ‘고향식당’에서 마지막 점심을 먹었다. 식당이름이 한글로 된 곳이 제법 있어서 근처에는 조선족 사람들이 많이 사는 것 같다. 그곳에서 우리와 같이 승선한 일행이 토요일에 백두산 남파로 직행해서 천지의 사진을 촬영한 걸 보여주니 부러웠다. 여자 가이드가 자랑스러운 듯 밝은 미소로 즐거워한다. 몇 컷을 더 구경하고 시간이 되어 우린 버스에 승차 후 대련 국제항으로 이동하였다.
대련항에 도착하여 이번에 함께 맞춘 조끼를 입고서 마지막 증명사진을 남기고 콩, 땅콩 등 반찬용 상품을 구입하고서 선박에 승선하였다. 오후 5시, 인천항으로 출항하는 훼리호는 500여명의 관광객을 싣고 떠났다. 7월 30일 오전 11시 반경 하선할 때까지 친구들과 즐겁게 보내야 한다. 하루 숙박 20여만원을 받는 귀빈실, 인천항으로 갈 때의 귀빈실 당첨엔 소인(김종화)과 신원우, 임용복 산우의 마나님들이 사다리를 잘 탔는지 결정되었다. 즐거운 추억과 함께 오붓한 밤을 보내게 되었다. 샤워 후 갑판으로 올라 가 셋은 행복한 모습으로 기념사진을 남겼다.
저녁 8시에 진수성찬에 하이트 맥주, 중국 고량주가 준비되어 있다. 조문형 총장님의 사회로 경과 보고와 전작 회장님이 인사말을 남기고 저녁을 먹기 전에 동반시를 낭송하잔다. 먼저 마나님께서 낭낭한 목소리로 읊은 게 좋았는데 마나님들이 협의를 봤는지? 임경택 마나님께서 자진하여 동반시(이 순간/피천득 시인) 한 편을 낭송하신다. 역시나 시 낭송은 부드럽고 낭낭한 목소리가 참 좋기만 하다. 특히 현재 시 낭송은 여자분들이 시 낭송을 전문적으로 많이 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어서 광주에서 참석한 박종채 동창이 며칠 전부터 연습한 도종환 시인의 ‘가지 않을 수 없던 길’을 낭송하였다. 벌써 치매기가 오고, 눈이 나빠졌는지? 깜박 잊고 안경을 침실에 두고 와 할 수 없이 돋보기까지 빌려 쓰고 열심히 낭송하였다. 이 시는 한양기 산우가 추천한 시로서 가야만 할 우리 인생의 길을 시로 길게 표현하였나 보다. 우리 인생의 길은 저마다 모두 가지 않을 수 없는 길이 아니겠는가.
만찬을 즐겁게 하고 마지막으로 조문형 총장님은 부탁의 말을 한다. 시산회 총장으로서 가능하면 사업(부동산중개) 동업자인 이영숙 님에게 자동차보험을 적극적으로 가입하시면 시산회에 도움이 될 수 있다고 한다. 이번에 우리 일행에게 선물한 ‘송염’(가그린)도 7월 25일 출발 시 국제터미널 4층에 까지 왔었는데, 시간이 늦어서 인사를 드리지 못 하였다고 한다. 이점 충분히 이해하시고 많은 협조가 되면 시산회의 운영도 좋아지게 될 것 같다.
얼큰한 기분으로 각자 숙소로 들어갔다. 나는 귀중한 마나님들을 초빙하여 차나 한잔 대접해 드리고, 샤워를 하실 분들은 그 방에서 샤워까지 하시도록 행복 씨에게 권한 후 친구들에게 갔다. 각 실마다 취향이 정해져 있는 것 같다. 술을 즐기는 친구들(7~8명)은 남은 술들을 침실로 가지고 와 못 다한 재미있는 삶의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다른 방을 갔더니 금연을 아직 못한 친구들이 열심히 카드놀이를 하면서 담배를 피우고 있다. 작년 4월까지 피웠던 담배냄새가 왠지 맵고, 기침이 나온다.
4인실인 방에서는 회장님, 총장님을 비롯한 몇 산우들이 앉아 시산회의 발전적인 협의를 하는 것 같다. 지난 산행 중에 추억에 남는 산행들이 주마등처럼 떠오른다. 지리산 종주산행(3박4일), 금강산 산행(2박3일), 설악산 공룡능선 산행(1박2일), 한라산 산행(1박2일) 등이 원거리의 산행으로 그 당시에는 내가 총책을 담당하여 실시하였던 산행이다. 그때 기세환 전 회장님이 넘어져 다리에 부상을 입어 조금 괴로웠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추억에 남는 멋진 산행이었다. 다음 해엔 더 멋진 산행 등을 설계해 보자고 집행부를 격려하고 저녁 늦게까지 많은 이야기를 나누다가 ‘대인 훼리호’에서의 마지막 밤을 편하게 보냈다.
7월 30일(화),
스마트 폰의 시간을 바꾸어 놓은 걸 보니 인천에 가까이 왔나보다. 즉시 일어나 깨끗이 씻고 짐들을 챙긴 후 갑판 위를 돌아보니 용복, 양주, 천석 등 부지런한 친구들 몇 명이 보인다. 훼리호 선내의 식당에서 마지막 아침식사를 한 후 스마트 폰의 데이트 네트워크를 재설정을 하여 친구들에게 중국에서 촬영한 대표 사진들과 안부 인사를 전하였다.
이번 중국 여행을 주관하신 전작 회장님, 조문형 총장님! 그리고 협찬을 해 주신 기세환 전 회장님, 김동주 사장님, 장선식 사장님과 이영숙 님에게 거듭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시산회가 더욱 더 알찬 모임이 될 수 있도록 우리 모두가 적극적으로 노력합시다.
오전 11시 반, 인천항(제1국제부두)에 도착, 관세청에 근무하였던 염재홍 산우의 도움으로 빠른 수속을 받고 입국했다. 바쁜 시간에도 도움을 준 염재홍 산우! 고마우이. 5박6일간 즐겁게 보낸 여행이었으며 고교 수학여행 이후 최대 인원의 동창여행이었다고 한다. 이런 여행을 꿈꾸며 건강하게 보내시고 또 다시 만나세나. 산을 사랑하고파 시를 사랑하는 산사람들의 모임인 시산회! 시산회 회원들이여 영원하라!
기약할 수는 없지만, 다음 기회에 백두산을 찾았을 땐 시인이 누구인지를 몰라도 시 하나를 꼭 읊고 오자꾸나(아래의 시를 한 번 읊어 보시길...).
백두여! 천지여! 하늘이여!
浩浩한 三江의 물줄기로
蕩蕩하게 이 동방에 옥토를 열었다
단군왕검을 낳고,
神市를 열어
弘益人間을 기치로 걸고
배달의 백성들 살길 주시니
수많은 영웅호걸 뒤를 이어서
이 땅에,
부여, 고구려, 발해, 요, 금, 청
億兆蒼生 國泰民安 기약했지만
幾百年에 이슬 같이 사라져 갔네
근세에 조선 왕국도 국운이 기울어
이 땅 이 백성 지키지 못하고
옥토의 만주땅 남의 땅이 되어
배달 백성이 딴 나라 사람으로 산다
남은 반도 땅도 양분된 지 60년
간웅의 탐욕에
국경도 아닌 철조망으로
백성의 발길조차 막아버렸다
백두여! 천지여! 하늘이여!
다시 한 번 이땅에
천지의 청정수를 들어부어
화합의 열기가 샘솟게 하소서
백두의 기운을 불어넣어
만주 벌판에 다시 신시를 열고
배달의 백성이 태평가 높이 높이
부르게 하소서 하여
저희들이 우리의 땅으로 걸어올라
당신의 품에 안기도록 하소서!
마지막으로 백두산에 대해 종합하여 요약해 본다. 우린 오로지 백두산 천지만을 보기 위해 중국에 간 것이 아니다. 우리가 갔었던 백두산은 중국 지역 내이다. 그래서 백두산을 중국에서는 ‘장백산(長白山)’이라고 한다. 세계적으로 제일 큰 '칼데라호'(천지)를 가진 산이다. 우리의 옛 땅이고 우리의 조상인 ‘장수왕, 광개토대왕’의 숨결이 살아 숨 쉬는 국내성(집안시) 일대를 돌아보니 우리나라 역사를 되돌아보는 계기가 되었다.
우리 민족의 영산인 백두산은 길림성 연변 조선족 자치주에 자리 잡고 있는 중국 동부 최고의 산이다. 백두산이라는 이름은 화산활동으로 부식토가 산 정상에 하얗게 쌓여 붙여진 이름으로, 한자 말 그대로 ‘흰 머리 산(白頭山)’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중국에서는 청나라 때 백두산을 장백산신으로 봉한 이후에 ‘장백산(長白山)’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원래는 화산활동을 하는 산이었으나 이미 250년 전에 활동을 멈춘 사화산(死火山)에 속한다. 백두산은 경치가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그 자체가 천연식물원으로서 동북호랑이를 비롯한 희귀한 야생동물과 야생식물들이 자라고 있어 국가급 보호구에 속한단다.
전체 면적 중 중국의 영토로 45.5%, 북한의 영토 54.5%에 속한다. 백두산 연평균 기온은 -8도로 연중 눈, 비가 내리는 날이 200여일에 달한다고 한다. 백두산 풍경 중 최고로 뽑히는 천지는 화산의 분화구에 생성된 것으로 해발 2,200m 높이에 위치해 있으며, 백두산의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해 있다는 데에서 ‘천지’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천지는 원형을 띠고 있으며 전체 면적은 10㎢, 호수 둘레 길이가 14.4㎞, 평균수심이 204m 이다. 천지는 옛부터 안개가 많고 1년 중 맑은 날이 거의 없다. 천지를 둘러싸고 백두산의 16개 봉우리가 솟아 있으며 천지의 물이 흘러 장백폭포와 온천을 형성한다. 또 장백폭포에서 내려오는 길에는 천지를 닮은 작은 호수가 있어 '소천지' 라고 불린다.
천지의 수심 중 가장 깊은 곳은 370m나 된다. 그래서 중국에서는 가장 깊은 화구호(칼데라호)로 알려져 있다. 이곳의 연평균기온은 -7.3 ℃, 평균수온은 0.7~11 ℃이며, 11월에 얼어붙었다가 6월이 되어서야 녹는데 얼음의 두께가 1.2 m나 된다(산행에 참고 바람).
천지의 수질이 매우 깨끗하여 먹을 수도 있으며, 주로 지하에서 끊임없이 솟아나는 용천수와 강수량으로 채워진다. 이곳에는 잉어를 비롯한 몇 종류의 어종이 서식하고 있으며, 중국과 북한의 국경 호수로서 압록강과 두만강, 송화강의 발원지이다.
하지만 이곳의 기후가 불규칙하고 거센 바람과 폭풍우가 자주 발생해서 여행객들이 맑은 날에 천지의 아름다운 광경을 볼 수 있기란 쉽지 않다. 천지는 또 국경선이 통과해 중국과 북한의 경계에 놓여있는 곳이라는 점에서 우리에게 더 큰 의미를 지닌다. 예전엔 천지 바로 앞에서 맑고 투명한 천지를 감상할 수 있었지만 요즘은 경계훼손으로 출입을 통제하고 있단다.
백두산은 봉우리마다 얼마나 많은 물을 머금고 있기에 천지를 이루고도 다시 흘러 보낸 물이 남아 있는지? 실로 신비로운 산이다. 2,300m 고지에 거대한 호수를 만든 백두산은 신비롭기만 하다. 백두산에는 2,400m 이상의 큰 봉우리가 모두 16개가 있는데, 북한 쪽에 6개, 중국 쪽에 7개, 경계지점에 3개가 천지를 에워싸고 있다.
최고 높은 봉우리는 북한 쪽 장군봉 2,749m, 해발봉과, 망천후봉이 똑같은 높이 2,719m로 좌우에 시립하고 서서 중국 쪽을 노려보고 있단다. 여기서 볼 때 마치 섬같이 천지로 돌출해 있는 산이 2,580m의 비류봉이라 한다.
이쪽 언덕이 가장 보기 좋은 전망대란다. 천지에서부터 달문을 거쳐 내려오다 떨어지는 장백폭포는 백두산 트레킹의 대미를 장식하기에 충분한 경관이다. 천문봉과 용문봉의 깎아지른 협곡 아래로 용트림하며 떨어지는 폭포수, 멀리서 보지만 천하제일의 경관이란다.
이 장백폭포에서 흘러내린 물은 이도백하, 삼도백하로 이어져 송화강으로 흘러들고, 다시 중국과 소련의 국경을 이루는 흑룡강(아무르강)에 합류된다고 한다. 또한 이 물길이 우리 백성에게는 한이 많은 토문강의 원류란 말을 들으니 또 다시 억울한 심정이다. 백두산정계비에 따라 이 토문강이 국경으로 정해졌다면 북만주 벌판은 우리 땅인데...
백두산은 만주땅과 우리땅의 중심이되는 곳이기도 하며, 압록, 두만, 송화, 3강이 바로 이곳에서 발원하여 서쪽과 동쪽, 북쪽 만주 벌판을 흘러가면서 우리나라와 중국과의 경계를 만들고 나아가 흑룡강으로 소련까지도 백두산이 영역을 정해 준 것이다.
박형채(7.25~27일), 김종화(7.28~30일) 씀.
< 동반시 >
"장자의 나비" / 김정남 ----- < 박형채 낭송 >
당신도 꿈속에서 꿈을 꾼 적이 있습니까
봄날 꿈속의 나비처럼
등에 투명한 날개가 돋고
배에는 천 개의 주름이 무겁게 무늬 지니
천 년이면 꿈속에서나 흐를 시간인데
천축사 졸참나무에
곤줄박이와 동고비 둥지를 틀고
서산에 보름달 뜰 때
가린 먹구름 손을 뻗어 열어제치는
기파랑의 기개는 어디로 가고
한 마리 나비만 월계수에 앉아
흔들리며 날갯짓하네
즈믄 해를 살았다고
달에 비친 나비를 보며
나비가 나인가
내가 나비런가
진흙소가 물을 건너듯
봄밤의 꿈을 떠돌다 깨어보니
앞 이빨에 털이 나있다
꿈과 꿈 사이 이천오백 년이 흘렀는가
"햇빛사냥" / 장석주 ----- < 김종렬 낭송 >
애인은 겨울벌판을 헤매이고
지쳐서 바다보다 깊은 잠을 허락했다.
어두운 삼십 주야를 폭설이 내리고
하늘은 비극적으로 기울어 졌다.
다시 일어나다오, 뿌리 깊은 눈썹의
어지러운 꿈을 버리고, 폭설에 덮여
오, 전신을 하얗게 지우며 사라지는 길 위로
돌아와다오, 밤눈 내리는 세상은
너무나도 오래 되어서 무너질 것 같다.
우리가 어둠 속에 집을 세우고
심장으로 그 집을 밝힌다 해도
무섭게 우는 피는 달랠 수 없다.
가자 애인이여, 햇빛사냥을
일어나 보이지 않는 덫들을 찢으며
죽음보다 깊은 강을 건너서 가자.
모든 싸움의 끝인 벌판으로.
"농무(農舞)" / 신경림 ----- < 박찬석 낭송 >
징이 울린다 막이 내렸다
오동나무에 전등이 매어달린 가설무대
구경꾼이 돌아가고 난 텅 빈 운동장
우리는 분이 얼룩진 얼굴로
학교 앞 소줏집에 몰려 술을 마신다
답답하고 고달프게 사는 것이 원통하다
꽹과리를 앞장세워 장거리로 나서
따라붙어 악을 쓰는 건 쪼무래기들뿐
처녀애들은 기름집 담벽에 붙어 서서
철없이 킬킬대는구나
보름달은 밝아 어떤 녀석은
꺽정이처럼 울부짖고 또 어떤 녀석은
서림이처럼 해해대지만 이까짓
산구석에 처박혀 발버둥친들 무엇하랴
비료값도 안나오는 농사 따위야
아예 여편네에게나 맡겨 두고
쇠전을 거쳐 도수장 앞에 와 돌 때
우리는 점점 신명이 난다
한 다리를 들고 날나리를 불꺼나
고갯짓을 하고 어깨를 흔들꺼나
"백두산 천지에 올라" / 김윤호 ----- < 전작 낭송 >
하늘의 영봉
하늘과 만나는 영봉에 올라
조국통일 기원제를 올리니
생명의 기원
살아 숨쉬는 검푸른 물위에
살포시 떠도는 안개
눈보라 치는 광활한 만주벌판
말 달리던 용맹한 선인들의 함성과
말발굽 소리 실어오는 바람
아직도 연변 조선족 자치주에서
길림성 요녕성 흑룡강성에서
조선족의 말과 피와 숨결을
간직해 온 강인한 민족
모든 강과 산의 뿌리-천지
장백폭포로 떨어져
두만강 압록강 송화강으로 흐르고
장백산맥 태백산맥으로 뻗어 내려
민족의 골격 핏줄로 생동하고 있구나
눈물겹구나
하늘이 점지한 배달겨레
반만년 역사 속에
상처받고 분열된 우리 마음
구름 걷히듯 사라지고
어깨동무 덩실 춤
마침내 찾아올
남북통일 대동평화
참 자유와 해방의 새 세상이여
그대, 어서 오라
우리 민족의 영원한 어머니
천지에 잔잔히 이는
바람과 안개, 그 영기를 머금고
진취적 발걸음 웅혼한 기상으로
생기있게 찾아 오시라
"이 순간" / 피천득 ----- < 임경택 마나님 낭송 >
이 순간 내가
별들을 쳐다본다는 것은
그 얼마나 화려한 사실인가
머지않아
내 귀가 흙이 된다 하더라도
이 순간 내가
제 9교향곡을 듣는다는 것은
그 얼마나 찬란한 사실인가
그들이 나를 잊고
내 기억 속에서 그들이 없어진다 하더라도
이 순간 내가
친구들과 웃고 이야기한다는 것은
그 얼마나 즐거운 사실인가
두뇌가 기능을 멈추고
내 손이 썩어가는 때가 오더라도
이 순간 내가 마음 내키는 대로 글을 쓰고 있다는 것은
허무도 어찌하지 못할 사실이다.
"가지 않을 수 없던 길" / 도종환 ----- < 박종채 낭송 >
가지 않을 수 있는 고난의 길은 없었다
몇몇 길은 거쳐오지 않았어야 했고
또 어떤 길은 정말 발 디디고 싶지 않았지만
돌이켜보면 그 모든 길을 지나 지금 여기까지 온 것이다
한번쯤은 꼭 다시 걸어보고픈 길도 있고
아직도 해거름마다 따라와
나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는 길도 있다
그 길 때문에 눈시울 젖을 때 많으면서도
내가 걷는 이 길 나서는 새벽이면 남 모르게 외롭고
돌아오는 길마다 말하지 않은 쓸쓸한 그늘 짙게 있지만
내가 가지 않을 수 있는 길은 없었다
그 어떤 쓰라린 길도
내게 물어오지 않고 같이 온 길은 없었다
그 길이 내 앞에 운명처럼 파여 있는 길이라면
더욱 가슴 아리고
그것이 내 발길이 데려온 것이라면
발등을 찍고 싶을 때 있지만
내 앞에 있던 모든 길들이
나를 지나 지금 내 속에서 나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오늘 아침엔 안개 무더기로 내려 길을 뭉텅 자르더니
저녁엔 헤쳐온 길 가득 나를 혼자 버려둔다
오늘 또 가지 않을 수 없던 길
오늘 또 가지 않을 수 없던 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