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왕후인 명성황후의 총애를 받은 시위상궁(侍衛尙宮이란 私家로 말하면 몸종)인 엄상궁.
그런 시위상궁이 어느 날 갑자기 高宗의 승은(承恩)을 입었다. 몸종 주제에 주인마님과 통정을 한거다. 사진에서 보는 것처럼 못생기고 뚱뚱한 외모였으며, 또한 그녀의 나이 32살 이었고 고종보다도 7살이 많은 나이였다. 당시의 평균수명이 50살 정도, 그리고 조혼 풍습 이었음을 고려하면 그녀는 늙은 축에 들었던 여인 이었다.그런 宮女가 어느 날 아침에 갑자기 高宗의 침소에서 치마를 뒤집어 입고 나왔으니, 대궐 안 모든 사람들이 깜짝 놀랄 수 밖에 없었다. 그 당시 宮女가 王의 승은을 입게 되면, 그 사실을 대궐에 널리 알리기 위하여 치마를 뒤집어 입고 나오는 것이 관행이었다. 처음에는 궁궐 안의 모든 사람들이 그 사실을 믿지 않았다고 한다.
1854년 음력 11월 5일(양력 12월 26일)에 증찬정 엄진삼(嚴鎭三)의 딸로 서울에서 출생하였다. 5세에 궁녀로 입궁하여 최고 지위인 상궁(尙宮)이 되었기 때문에 ‘엄상궁’으로 더 잘 알려졌다. 명성황후를 가까이에서 모시다가 고종의 승은을 입으니 질투심이 매우강한 1885년 궁 밖으로 쫓겨 났다가 민비 살해후 고종의 부름으로 다시 입궁한다.
왕후가 질투심이 강하게 됀건 고종임금이 워낙 밝혀서 미추를 안가리고 치마만 입으면 찝적거려서 궁녀 여러명을 내쫒았다고 야사에는 기록 돼어있다.
엄상궁은 1896년에 고종과 세자를 러시아 공사관으로 도피시킨, 이른바 아관파천을 성공으로 이끄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아관파천이란 명성황후가 시해된 을미사변 이후 일본군에 의해 신변의 위협을 느끼고 있던 고종이 왕세자와 함께 1896년 2월 11일부터 약 1년간 조선의 왕궁을 떠나 러시아 공사관으로 옮겨 거처한 사건이다. 이는 한 나라의 왕인 고종에게나, 그 왕이 통치하는 국가를 믿고 또 국가에게서 보호를 받아야 하는 국민 들에게 그야말로 쪽팔리는 일이었다.
조선의 국왕이 조선 땅 안에서 일본의 위협이 두려워 러시아의 공사관 안으로 피신하여 생활을 했으니, 어찌 부끄럽지 않으며 가슴 아프지 않을 수 있을까? 이러한 가슴 아픈 역사적 사건의 중심에는 ‘엄상궁’이라는 여인이 있었다. 사실 아관파천은 엄상궁이라는 여인의 작품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후궁인 그녀는 실로 대담한 담력과 연출력, 그리고 놀라운 배짱과 지략을 가진 여인이었다. 때문에 임금 부자의 왕궁 탈출 기도가 오직 단 한 번의 실행으로 그처럼 완벽하고 뛰어난 성공을 거둔 덕 역시 오로지 엄상궁에게 돌아간다.당시 고종은 명성황후가 시해된 을미사변 이후 불안한 나날들을 보내고 있었다. 한 나라의 황후며 황제의 아내인 명성황후를 살해한 일본인들이었다. 고종에게도 언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몰랐다.그 와중에 엄상궁은 고종 곁에서 고종을 러시아공사관으로의 피신을 권했다. 그녀는 친일파 들이자 궁을 지키는 자들이 자신에 대해서는 완전히 마음을 놓도록 천연덕 스럽게 연기 해냈다.뿐만 아니라 이범진 등 외부에 있는 친러파 인물들과 물 샐 틈 없이 완벽하게 연락을 유지하여 탈출 방색을 모의하여 도출 해냈다.또한 도피 당사자인 고종이 그녀의 계획에 전적으로 동조하여 몸을 던져 따르게 할 만큼 신임을 끌어냈다. 한낱 궁녀인 여인이 감당 하기에는 실로 엄청난 일이었다.그녀는 고종과 왕세자가 탄 가마를 러시아 공사관까지 메고 갈 가마꾼들까지도 완벽하게 자기 사람으로 장악 해냈고,출입할 궁문의 수비병 들에게도 일주일에 걸친 공작을 펼친 결과 눈뜬 허수아비로 만들어냈다.그리고 마침내 그녀는 고도의 심리적 전술과 뛰어난 담력과 배포를 통해 만들어낸 연출을 통해 아관파천을 완벽하게 성공시켰다. 사전 준비 단계 중 단 한 군데에서만 어긋나도 일은 실패로 돌아가고 엄청난 파문과 역작용이 발생했을 것이다.
엄상궁은 러시아 공사관에서 고종을 보필하며 43세에 아들을 잉태하였고, 1897년 덕수궁으로 환궁후 낳으니 이 아이가 영친왕 이은(李垠)이다.이로 인해 고종의 후궁으로 귀인(貴人)에 책봉되었고, 선영(善英)이란 이름도 받았다. 1900년에 순빈(淳嬪)에, 1901년에 순비(淳妃)에, 1903년에는 황귀비(皇貴妃)에 책봉되었다. 궁호를 경선(慶善)이라 하여 ‘경선궁 마마’로도 불렸다.엄 황귀비를 황후로 승격 시키고자 하는 운동이 1897년부터 1906년까지 지속적으로 일어났으나, 한편에서는 반대하는 의견도 많아 결국 황후에 책봉 되지는 못 하였다. 그녀는 후궁 이었지만 왕비가 없는 상황에서 왕비와 같은 역할을 하였으며, 황귀비라는 독특한 지위에 있었다.그러나 엄황귀비는 1907년 헤이그 밀사 사건으로 인해 고종이 강제로 퇴위 당하고 영친왕이 유학의 명목으로 일본에 끌려가는 인간적인 시련을 겪으며, 한일합방 이듬해인 1911년 7월 20일에 덕수궁 즉조당에서 58세에 갑자기 사망 하였다. 일본에 있는 14살의 영친왕이 고된 군사 훈련을 받으며 주먹밥을 먹는 활동 사진을 보다가 감정이 북받쳐 숨을 거두었다고 한다.
우리보다 꼭 100살 더 많은 그분의 인생이 책속으로 들어간 순간이다.
그렇게 예쁘지도 않은 추한 얼굴로 대한제국의 황제를 쥐고 흔든 엄상궁,
비록 얼굴은 넙데데 하고 못 생겼지만 지략이 뛰어나 고종의 총애를 받았다는 엄상궁.
이완용등의 나라 팔아 먹은 남자들이 살던 나라에서 여자의 몸으로 엄황귀비는 구한말의 시대적인 요구를 잘 파악하여 여성 인재 양성에 뜻을 두고 사재(私財)를 들여 1906년에 진명여학교와 숙명여학교의 전신인 명신여학교(明新女學校)를 창설하고, 1907년에는 경영난에 부딪혀 있던 양정의숙(養正義塾)을 도와주었다. 이외에도 궁녀들도 학교에 입학하여 교육을 받도록 했고, 수시로 교원들과 학생들 에게 필요한 경비와 학용품을 지원해 주었다. 또 종로의 걸인들에게 자선을 베풀었고, 불탄 종로상점 재건축 비용이 모자라자 건축비를 대 주었으며, 진명부인회(進明婦人會)에 돈과 건물을 하사하였다. 또 대한부인회(大韓婦人會)의 모범 잠업장 건립에 기금을 하사하는 등 사회 활동과 자선사업을 많이 하셨다.
진정 이 나라 여성 선구자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