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우리 집 어려운 형편을 알게 된 것은 초등학교 1학년 일 때다.
울릉도 한겨울에는 때에 따라 문밖출입을 못 할 정도로 눈이 내렸다.
한겨울 눈은 나지막한 집을 덮어 버릴 정도였다. 그래서 우리는 봄부터 가을까지 겨울 식량을 준비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우리 집만 그런 것이 아니고 울릉 섬 자체가 하얀 백설로 뒤덮여 있다.
밤에는 호롱불도 없었고 눈빛으로 환하게 밝을 때도 있었다. 눈 덮인 울릉도에 약간 녹은 눈 사이로 동백꽃은 빨갛게 눈 속에서 피어 있었고 그런 걸 보면 정말 신기하기도 했다. 그때는 그저 그런가 보다 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너무나 아름다운 내 고향 산천이었다. 멋진 고향 울릉도 생활을 오래 하지는 않았지만 뼈저린 아픔을 내 가슴에 남겨놓았고 서러움에 싸여 어린 소녀의 꿈을 모질게 깨트리게 한 고향이었다.
마음속에는 항상 가난과 저주, 뼈저린 아픔, 서러움 아등바등 살아온 우리 부모님들의 한 맺힌 고향이기도 하다. 지금 같은 살기 좋은 시절이 올 줄은 몰랐다. 61년 전 이같은 때가 올 것이라고 생각을 했더라면 눈 속에 묻혀 살지도 않았을 것이며 `뱃사공의 아버지와 딸이 아닐 수도 있었을 것이다. 세상은 돌고 돌아 아름다운 내 고향 울릉도를 관광지로 만들어 놓았다. 이까(오징어) 한 마리 들고 가면 갓난아기 머리통만 한 찐빵을 두세 개씩 주던 그 시절은 찾아보려야 볼 수가 없다. 언제 어디에서 누가 그 옛날에 풍경과 그 시절에 다복했던 울릉도를 알고 계실지요. 울릉도 남면 도동 우산 초등학교 때의 까마득한 옛날 추억들
나는 엄마한테 미운 딸이기도 하지만 제일 부려먹기 좋은 딸이었다. 부모 말이라며 순종하는 자식이었기에
추운 겨울에 책가방은 없고 시커먼 사각 보자기에 책을 뚤뚤 옆으로 말아 허리에 매고 우산 초등학교에 다녔다. 도동 부두까지는 어린애들 걸음으로는 꾀 시간이 걸렸다. 시커먼 광목 치마저고리에다 아버지가 겨울에 입고 다니시던 누른 잠바를 춥다고 입고가라고 하시면서 “애보다 잠바가 더 크네.” 하시면서 입혀서 보내 주시던 아버지. 자식 걱정을 그렇게 하면서 우산이란 역사도 알게 되었고 우리 집이 얼마나 어려웠는지 생각한다. 그렇지만 지금보다 그때가 오히려 내겐 제일 행복했던 시절이었다. 부모님의 따뜻했던 자식 사랑, 8남매를 위해 돌아가시는 며칠 전까지 바다에서 고생하셨다는 우리 아버지 정을 어찌 잊을 것이며 이 둘째 딸 서지가 이 땅 위에 있는 한은 살아생전 못해 드린 것 죄스러운 마음 사하면서 열심히 살겠습니다
그렇게 가난했어도 극복하면서 어려운 그 옛날 고생하시면서 키운 자식들 아직도 8남매 모두 제 앞가림과 제 삶의 터전 닦아 가면서 열심히 살고 있습니다.
아버지 고맙습니다. 호랑이 같았던 우리 어무이 감사합니다. 억척같이 살아오셨기에 이 자식들의 오늘이 있지 않나 싶습니다
밉던 둘째 딸 서지도 그런대로 밥 먹고 잘살고 있습니다. 두 분이 살아 계셨더라면 한 밥상에 둘러앉아 밥 한번 먹어봤으면 원도 한도 없겠는데. 안 계시니 마음만 아려옵니다.
가족도 그렇지만 두 분 부모님과 한 밥상에 앉지 못했던 것이 이 딸은 마음 한구석에 깊게 깊게 서러움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래도 아버지와는 대구에서, 부산 외삼촌 집에서 두 주일 동안 함께 보낼 때 아버지 얼굴 쳐다보면 “야야 고기 먹어라.” 하시면서 밥술에 올려 주실 때도 있었지요. 하지만 엄마하고는 어린아이 때도 어른이 되었을 때도 만나면 혼만 내니 한 밥상에 앉아 밥 먹는 날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세상천지에 이런 슬픈 엄마와 딸이 있었을까요. 이 딸은 오늘 이 시간도 외로운 남의 나라에서 고향 울릉도를 그려 보면서 서러움에 복 바쳐 울고만 싶습니다.
아버지요, 엄마요, 그곳 저승에서 아버지 어머니 잘 계시리라 믿습니다. 이 딸 녀석도 평생토록 아버지 어머니를 가슴속에 품고 사랑하며 살겠습니다.
2020년 12월 2일
일본 동경
첫댓글 도동 약수터 가파른 골목길에 서서 마주보는 바위산 벼랑끝에 살고 있는 石香이가 몹씨 그립네요.
지천 선생님 뎃글을 보내 주셧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