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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단기준 - 나답게 사는 것
2015. 4. 12(주일낮예배) 사사기 1:19-21
옛날 아라비아의 한 왕은 자신이 탈 명마를 구해오라는 명령을 하였다. 그러자 각 지역에 명마라고 하는 말들이 조련사에게 왔고, 조련사는 그 말들을 훈련시키기 시작했다. 조련사는 여러 가지로 말들을 훈련시켰는데, 그 중에 하나가 우리에 있는 말들에게 피리소리를 들려줄 때 말이 멈추어 서도록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제 조련사들은 왕이 타야할 명마를 선별하기 위하여 말들을 모두 우리에 가두어 두고 3일동안 마실 물을 주지 않았다. 말들은 우리에서 물을 구할 수 없게 되자 불안한 증세를 보이면서 안절부절하지 못하였다. 그때 조련사들이 우리의 문을 열어서 말들에게 자유를 주었다. 말들은 모두 미친 듯이 개울가의 물을 찾아 달리기 시작했다. 그래서 개울가의 물이 보이는 지점에서 조련사는 피를 부는 것이었다. 목이 말라 안절부절하지 못하던 말들은 모두 피리소리를 듣고도 개울가의 물을 향하여 뛰었다. 그런데 4마리의 말은 그 자리에 멈추어 선 것이다.
여러분은 개울가로 뛰어간 말과 멈추어 선 말 중에 어느 말을 왕의 말로 세우겠는가? 4마리의 말 중에서 3마리는 종마로 길러지던 말이었는데, 한 마리는 아주 좋은 종자의 말이 아니었다. 그래서 조련사는 이 말을 왕을 위한 말로 세웠다고 한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이것이 아라비바의 말이 명마로 유명한 이유이다. 아라비아 조련사들은 말들에게 훈련을 시킬 때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얼마나 빨리 달리는가? 얼마나 힘이 있느냐?가 아니라, 훈련받은 것을 얼마나 잘 지키는가? 하는 것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며 훈련을 시킨 것이다.
그러면 저와 여러분은 훈련되어진 것을 잘 지키는 신앙인인가? 지난 주 대심방 중에 박명우성도의 가정을 가게 되었다. 올 해 박명우성도님 가정에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은 룻기 2:12이었다. 그래서 설교를 준비하면서 룻기를 전반적으로 묵상을 해 보았다. 룻기는 떡집이라는 불리는 베들레헴에 흉년이 들어 먹을 것이 없었다는 것으로 시작한다. 잘아시는 것처럼 옛날 제가 어릴 때만 해도 떡은 귀한 음식이었다. 그래서 잔치가 있을 때나 명절에만 먹는 것이 떡이었다. 왜냐하면 먹을 것이 귀한 시대에 곡식이 많이 들어가는 떡을 만들어 먹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베들레헴은 풍요함 속에 떡을 해서 먹고 누리는 그러한 삶을 살았던 것이다. 그렇게 부요의 상징이었던 베들레헴에 기근이 들어서 먹을 것이 없는 고통이 다가왔다.
왜 베들레헴이 이러한 고통이 찾아왔는가? 룻기는 사사들이 치리하던 때에 있었던 사건이다. 자기 소견에 옳은대로 행하던 그 시대에 베들레헴에 흉년이 들었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자기 생각에 옳은대로 행하면 행복이 오는 줄 알았다. 그래서 모두 자기의 생각과 고집을 꺾지 않고 자기의 주장을 펼쳤다. 그랬더니 결국 찾아오는 것은 행복이 아니라, 흉년으로 떡집에 먹을 것이 없는 빈궁의 상태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면 흉년의 아픔에서 사람들은 어떤 길을 택해야 하는가? 그러한 때에 엘리멜렉이라는 사람은 자신의 아내 나오미와 2명의 아들을 데리고 모압으로 내려가는 것이다. 엘리멜렉은 더 이상 떡집으로서의 풍성함을 잃어버린 베들레헴에서 사는 것보다 먹을 것이 있는 모압으로 가는 것이 훨씬 살기에 좋겠다는 생각을 한 것이다. 이렇게 자기의 소견에 옳은대로 행하였던 엘리멜렉은 결국 죽고, 그의 두아들도 모압여인과 결혼하였지만, 곧 죽었다. 그래서 엘리멜렉의 집안은 더 이상 소망이 없는 가정이 되고 말았다는 것을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왜 엘리멜렉은 자기 소견에 옳은대로 행하여서 망하여 버린 베들레헴에서 하나님을 찾지 않고 계속하여 자기 소견에 옳은대로 행동하였겠는가? 강남세브란스 병원 내분비내과 안철우교수님이 아! 이게 다 호르몬 때문이었어?라는 책을 내었다. 이 책을 보면 사람의 몸에는 3천가지의 호르몬이 존재하고 있는데, 그 중에 우리가 알고 있는 호르몬은 고작 80가지 정도에 불과하다. 그런데 그 호르몬을 잘 조절하면 회춘도 할 수 있고, 또 숙면도 취할 수 있고, 먹어도 허전한 느낌이 드는 문제도 해결할 수 있다고 한다. 그러니 불면증이나 비만의 문제를 호르몬으로 조절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부부관계도 호르몬으로 조절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아는가? 젊은 남녀가 연애를 하면 도파민, 세로토닌과 같은 감정을 조절하는 좋은 호르몬이 나온다고 한다. 그래서 이 호르몬이 나오면 남자는 여자를 향하여 극도의 사랑과 희생과 헌신을 하면서도 굉장히 행복해 한다. 쉽게 설명하면 남자들이 연애할 때 회사가 너무 바빠서 밤에 잠잘 시간이 없을 정도로 바쁘게 일을 한다. 그렇게 일을 하고 저녁에 피곤해서 집으로 들어왔는데, 여자친구가 밤에 만나자고 전화가 온다. 그러면 너무 피곤해서 다음에 만나자고 하는 것이 정상인데, 싱글벙글 웃으면서 여자친구를 만나러 간다. 그리고 여자 친구와 있으면서 하품한번 하지 않고 여자친구와 이야기를 한다. 여자는 이렇게 헌신적이고, 다정다감했던 남자가 너무 좋아서 결혼을 했다. 그리고 몇 달이 지난 후 남자가 달라지기 시작하는 것이다. 무슨 말만 하면 피곤하다고 하고, 아무리 재미난 이야기를 해도 웃지도 않고 여자에게 냉랭하게 대하는 것이다. 그러면 여자는 남자가 변했다는 말을 하는데, 그것은 남자가 변한 것이 아니라, 그 호르몬이 나오는 기간이 18-36개월 정도이기 때문에 남자가 원래의 상태로 돌아가 버렸다는 것이다. 그래서 남자는 여자를 위하여 헌신하는 상태에서 자신이 가장 편안해 하는 상태로 돌아가 버리는 것이다.
이것이 사람의 모습이다. 한 순간 호르몬의 과다분비로 인하여 자상하고 헌신적이었던 사람이 정상적인 상태로 돌아가면 자신이 제일 편안한 상태로 돌아가 버린다는 것이다.
엘리멜렉이 모압으로 내려간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엘리멜렉은 자기 생각대로 하는 것이 편안하였다. 늘 자신이 살아왔던 그 방식이 옳은 것처럼 느껴지고, 또 그렇게 살아야 마음에 불안함이 없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살았던 엘리멜렉의 가문은 먹을 것이 없어 힘든 삶이 아니라, 더 이상 가문의 대가 이어지지 못하는 소망없는 가문이 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룻기서에는 대반전의 역사가 나타난다. 하나님께서 베들레헴을 돌아보셨다는 소문을 들은 나오미는 이제 자신의 고향을 향하여 올라가는 것이었다. 그때 두명의 자부 중에 룻은 어머니의 백성이 내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내 하나님이 되실 것입니다는 믿음의 고백을 하고 결단코 어머니를 떠나지 않겠다고 하는 것이다. 그리고 룻은 시어머니 나오미를 따라 베들레헴으로 왔다.
그 곳에 룻의 생활은 어떠했겠는가?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모압은 여호와의 총회에 들이지 말라고 명령하였다. 이 말의 의미는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모압백성과 상종하는 것을 싫어하신다는 말이다. 그런데 룻이 베들레헴으로 올라가면 누가 그녀를 반겨 맞이해 주겠는가? 특히 나오미가 모압에 와서 성공하여 베들레헴으로 돌아가는 것도 아니고, 완전히 망하여 부끄러운 귀향을 하는데 그 시어머니와 함께가는 룻을 좋아할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이다.
그런데 룻은 자신의 생각과 편안함을 좇지 않고, 하나님을 향한 믿음의 고백을 가지고 베들레헴으로 올라간 것이다. 제가 소설을 좀 쓰면, 아마 룻은 베들레헴에서 어머니를 위하여 밭에 나가서 일자리를 찾았을 것이다. 그러나 룻을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래서 저녁이 될 때에 룻은 밭 가장자리에 떨어져 있는 나락을 주워서 그것으로 어머니와 함께 저녁을 먹으려 했을 것이다. 그런데 일군들은 다른 사람들은 그 나락을 주워가는 것을 허락하였는데, 룻이 가져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고 구박을 주었을 것이다. 그래서 룻은 눈치를 보면서 나락 한움큼 쥐고 집을 향하여 도망치듯이 달려왔을 것이다. 그리고 다음날은 다른 밭으로, 또 그 다음날은 다른 밭으로 그렇게 먹을 구하여 다녔을 것이다.
이렇게 힘들고 어려운 시간을 보낸 룻은 결국 보아스의 밭으로 가게 되었다. 그리고 그 밭에서 눈치를 보면서 나락을 주우려고 하는데, 보아스가 감동적인 말을 하는 것이다. 그 부분을 읽어보기 바란다.
(룻 2:12) 여호와께서 네가 행한 일에 보답하시기를 원하며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의 날개 아래에 보호를 받으러 온 네게 온전한 상주시기를 원하노라 하는지라
지금 보아스가 룻에게 하는 말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룻이 하나님을 향하여 가진 신앙고백과 그 고백을 지키기 위하여 고통의 삶을 산 것에 대하여 하나님이 다 보상해 주시기를 소원한다는 것이다.
그 이후의 이야기는 여러분들이 다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룻은 결국 보아스와 결혼하여서 오벳을 낳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이새는 통일이스라엘의 2대 왕인 다윗은 낳은 것이다. 그리고 그 다윗왕가에서 인류를 구원하시는 메시야가 탄생하시므로 인류구원의 역사를 이루는 그 계보를 이루게 되었다. 무슨 말인가? 대를 이을 수 없는 소망이 없는 집안의 룻이었는데, 그 룻이 하나님의 구원역사에 정말 중요한 집안을 이루는 여인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이 룻기이다. 하나님은 룻기를 통하여서 사람들은 행복과 편안함을 찾기 위하여 자기 소견에 옳은대로 행하지만, 그것은 어리석은 삶이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다. 그리고 정말 행복을 원한다면 하나님을 향한 바른 신앙고백을 가지고, 신앙고백적 삶을 살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아니 하나님은 이렇게 신앙고백적인 삶을 사는 사람을 통하여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펼쳐가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저와 여러분은 신앙고백적인 삶을 살고 있는가? 2000년대 유행했던 사오정시리즈에 나오는 유머가 있다. 손오공과 사오정이 대학을 졸업하고 입사면접을 보게 되었다. 먼저 면접실에 들어간 손오공은 15번 손오공입니다 하고 자기를 소개하였다. 그러자 면접관은 자네 축구 선수 중에 누굴 가장 좋아하는가? 하고 물었다. 손오공은 옛날에는 박지성이었는데 지금은 기성용입니다 하고 대답했다. 면접관은 산업혁명은 언제 일어났는가? 하고 두 번째 질문을 하자 18세기입니다라고 대답을 하였다. 만족해하던 면접관은 자네는 UFO는 있다고 생각하는가?를 물었다. 그러자 손오공은 자신있게 과학적으로는 입증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하고 대답하여서 면접을 잘 마쳤다.
입사면접을 마치고 나온 손오공은 벌벌벌 떠는 사오정에게 정답을 알려주었다. 그래서 정답을 외우고 들어간 사오정은 면접관에게 17번입니다 하고 자기를 소개하였다. 면접관은 사오정이 이름을 말하지 않아서 자네 이름은 뭔가?하고 물었다. 그랬더니 사오정은 옛날에는 박지성이었는데, 지금은 기성용입니다 하고 대답했다. 그 말에 놀란 면접관은 자네 언제부터 그렇게 되었나? 하고 묻자 사오정은 18세기입니다고 대답했다. 그 말에 화가난 면접관은 자네 바보 아닌가? 하고 묻자 사오정은 과학적으로 입증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라고 대답하였다고 한다.
왜 사오정이 이런 실수를 했는가? 사오정은 자기답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기답만을 말할 때 면접관을 황당하게 만들고, 또 우리들에게는 웃음꺼리가 된 것이다.
그런데 혹시 우리가 자기 답을 가지고 세상을 살아가고 있지는 않는가? 이제 오늘 본문을 보시기 바란다. 오늘 본문은 가나안 정착 초기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 하나님은 유다지파가 먼저 올라가라고 하였고, 유다지파는 그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나가서 승승장구하였다. 그때 일어난 사건 중에 하나가 아도니베섹이다. 유다가 베섹에서 1만명의 사람을 죽였을 때 베섹의 왕 아도니베섹은 두려움에 도망을 하게 되었다. 그러한 아도니베섹을 잡은 유다는 그의 손가락과 발가락을 잘라버렸다. 그렇게 손가락과 발가락이 잘린 아도니베섹은 옛적에 내가 70인의 왕을 잡아 손가락과 발가락을 잘라 내 상아래서 주워먹게 하였더니 하나님께서 내가 행한 대로 갚으시는도다 고 하면서 탄식하는 것이었다.
무슨 말인가? 70명의 왕을 잡아서 손가락 발가락을 잘라 자기상에서 먹게 할 만큼 아도니베섹은 힘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유다에게 가나안족속과 브리스족속을 맡기셨기 때문에 유다는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19절인 본문부터 상황이 달라졌다. 19절을 읽어보기 바란다.
(삿 1:19) 여호와께서 유다와 함께 계셨으므로 그가 산지 주민을 쫓아내었으나 골짜기의 주민들은 철 병거가 있으므로 그들을 쫓아내지 못하였으며
유다는 베섹과 예루살렘과 헤브론 전투에서 승승장구하였다. 그러한 전쟁을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나가면 반드시 승리한다는 사실을 배우게 된 것이다. 그런데 철병거를 가지고 있는 골짜기주민을 볼 때 유다는 더 이상 하나님을 믿고 순종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왜 유다가 산지주민들을 쫓아내지 못하였는가? 지금까지 유다는 저들의 군사가 몇 명이 있고, 또 어떤 군사력을 가지고 있는지를 생각하지 않았다. 오직 나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면서 그들은 싸움터로 나갔던 것이다. 그런데 19절에서는 비교하기 시작하였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있고, 골짜기에 사는 사람은 철병거가 있는데, 하나님과 철병거 중에 누가 더 센가? 그들은 생각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이제 하나님의 말씀이 삶의 기준이 아니라, 자기의 판단이 삶의 기준이 되어져 버린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사람의 판단이 기준이 된 유다는 더 이상 전쟁에서 승리하지 못한다. 그래서 19절 이후에는 쫓아내지 못하였다는 말이 계속 반복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자기판단으로 자기 답을 가지고 있었던 유다는 더 이상 싸울 수도 없었고, 또 승리할 수도 없는 자가 되고 말았던 것이다.
그러면 지금 저와 여러분은 무엇을 기준으로 행동하고 있는가? 살아있는 뜨거움의 저자 김미경씨의 딸이 미대에 입학을 하였다. 그런데 김미경씨와 의논도 하지 않고 자퇴를 한 것이다. 너무 놀란 김미경씨가 왜 자퇴를 했는지 물었더니 자기는 미술을 좋아하는 것같지 않는 것같다는 말에서부터 사실은 중학교 때 성적으로 대학갈 자신이 없어서 미술공부를 했는데, 20대 초반에 내가 비겁하게 살 수가 없기 때문에 재수를 해야 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재수를 허락하였다. 수능시험을 치루고 학교에서 나오는데 김미경씨는 자기 딸이 수능만점 받은 줄 알았다고 한다. 환하게 웃으며 나오는 딸을 부둥켜 안고 수고했다고 시험은 잘쳤느냐?고 물었더니 딸은 수능채질이다고 하면서 한번만 더 기회를 달라고 해서 삼수를 시켰다. 그런데 삼수도 실패하고 결국 처음에 갔던 그 학교에 다시 미술전공으로 들어갔다.
사람들은 김미경씨의 딸이 시간만 허비했다고 하지만, 김미경씨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왜냐하면 삼수를 하는 동안에 자기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고민도 하였고, 또 자신의 삶을 돌아보는 기회도 가졌기 때문에 절대로 헛된 시간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김미경씨가 설명하는 것이 사회적 알람이다.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다 알람을 가지고 태어난다. 그래서 8살이 되면 이제 초등학교 입학해야지 하면서 알람이 운다. 그리고 3년이 지나면 중학교 가라고 알람이 울고, 또 3년이 지나면 고등학교 가라고 알람이 운다. 알람이 이정도에서 그치면 좋겠는데, 알람은 또 3년이 지나면 대학가라고 울고, 대학을 졸업하면 취업하라고 운다. 그리고 취업을 하면 결혼하라고 울고, 결혼을 하고 나면 아이를 낳으라고 우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은 태어나서 자기 자신의 때가 아니라, 사회적 알람 시간에 맞추어서 살기 때문에 나답게 살 수 없다고 이야기 하는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여러분은 김미경씨의 사회적 알람 이론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틀린 말은 아니다. 사실 우리가 사회적 알람에 따라 대학에 가고, 또 취업하고, 결혼하면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인다. 그런데 만약 대학에 가지 못하면 사람들도 나를 이상한 눈으로 보는 것같고, 자신감이 떨어진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회적 알람에 매여서 사는데, 문제는 그렇게 살다보니 나다운 삶이 무엇인지를 모르고 그냥 살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사회적 알람을 통하여 김미경씨는 나다운 것이 무엇인지 설명해 주지 못하고 있다. 남들이 대학갈 때 나는 취직하고, 남들이 시집갈 때 나는 공부하는 것이 나답게 사는 것은 아니다.
그러면 나답게 사는 것이 무엇인가? 지금부터 고민해 보기 바란다. 나답게 사는 것은 ❶편안하게 사는 것이 아니다. 또 나답게 사는 것은 남들이 하는 것과 ❷무조건 다르게 사는 것도 아니다. 또 나답게 사는 것은 ❸내 판단에 제한되어서 사는 것도 아니다.
정말 나답게 살고 싶으면 성경을 펼쳐들기 바란다. 그리고 나를 지으신 하나님이 왜 나를 구원하였고, 또 왜 나에게 자여교회에 다니도록 했는지를 찾으시기 바란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나가면 정말 나다운 삶을 살 수 있게 될 것이다. 판단기준이 나가 아니라, 함께하시는 하나님이 될 때 우리는 나다운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이다. 저와 여러분이 이제 판단기준이 변하므로 나 다운 삶을 살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첫댓글 나답게사는것이뭔지명확한답을주셔서감사합니다~~우리의일상이그저그런삶이되는것이아니라말씀으로도전받고은혜로나아가는삶이되길간절히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