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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6_33_236p The widening horizon
In Namier's thought it represents the voice of the eighteenth century, of England at the accession of George III, protesting against the impending onset of Acton's revolution and reign of ideas. But the same familiar expression of out-and-out conservatism in the form of out-and-out empiricism is highly popular in our day. It may be found in the most popular form in Professor Trevor-Roper's remark that 'when radials scream that victory is indubitably theirs, sensible conservatives knock them on the nose'." 네이미어의 생각은 18세기 영국의 목소리를 나타낸다. 조지 3세 즉위기 때, 다가오기 시작하는 액튼의 혁명과 이념 통치에 대한 항의로서. 철저한 경험주의 형태로 철저한 보수주의의 익숙한 표현인 이것은 오늘날 낯익은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가장 인기 있는 형태로 발견된다. 트레보 로퍼 교수의 언급에서 ‘급진주의자들이 승리가 의심의 여지없이 우리 것이라고 외칠 때 현명한 보수주의자들은 정확하게 그들은 무너뜨린다.
Professor Oakeshott offers us a more sophisticated version of this fashionable empiricism: in our political concerns, he tells us, we 'sail a boundless and bottomless sea' where there is 'neither starting- point nor appointed destination', and where our sole aim can be 'to keep afloat on an even keel'.' I need not pursue the catalogue of recent writers who have denounced political 'utopianism' and 'messianism'; these have become the current terms of opprobrium for far-reaching radical ideas on the future of society. 오크쇼 교수가 더 세련된 버젼의 인기 있는 경험주의의 형태로 우리에게 제공한다. 우리의 정치적인 관심사에서, ‘우리는 끝이 없고 바닥이 없는 바다를 항해한다. 출발점도 정해진 지점도 없다. 그리고 우리의 유일한 목적은 가라앉지 않고 평안히 떠 있는 것이다.’ 라고 오크쇼 교수가 말했다. 나는 최근 저술가들의 카탈로그를 만들 생각이 없다. 유토피아니즘이나 메시아니즘을 비난한 사람들의 카탈로그. 이것들은 최근의 유행어가 되어 왔다. 사회의 미래에 대한 원대한 사상들을 모욕하는 유행어가 되어 왔다.
Nor shall I attempt to discuss recent trends in the United States, where historians and political theorists have had less inhibitions than their colleagues in this country in openly proclaiming their allegiance to conservatism. I will quote only a remark by one of the most distinguished and most moderate of American conservative historians, 또한 나는 미국에서의 최근 논의들에 대해서도 말하지 않을 것이다. 미국에서는 역사가들과 정치적인 이론가들은 덜 참는다. 영국에 있는 그들의 동료들보다. 보수주의에 대한 그들의 동맹을 공개적으로 표현하는 데 있어서. 즉 미국에 있는 학자들이 영국의 동료 학자들 보다 더 열심히 보수주의에 대한 공개적인 지지를 하고 있다. 나는 오직 가장 유명하고 가장 moderate한 미국의 보수 역사가들 중의 한 사람만 인용하기로 한다.
Chapter 6_34_237p The widening horizon
Professor Samuel Morison of Harvard, who in his presidential address to the American Historical Association in December 1950 thought that the time had come for a reaction against what he called 'the Jefferson - Jackson - F, D. Roosevelt line' and pleaded for a history of the United States 'written from a sanely conservative point of view'. But it is Professor Popper who, at any rate in Great Britain, has once more expressed this cautious conservative outlook in its clearest and most uncompromising form. 모리슨 교수는 그의 미국 역사학회 회장 취임 연설에서, 1950년에, 말했다. ‘때가 온 것이라고 그가 제퍼슨 잭슨 루즈벨트 노선이라고 불렀던 것에 대한 반작용을 할 때가 온 것이라고. 그리고 그는 호소했다. 미국의 역사가는 sanely 한 보수적 시각으로 씌어 져야 한다고’ 그러나 포퍼 교수이다. 영국에서는 한 번 더 이와 같은 보수적 시각을 조심스럽게 그러나 최고로 분명하게 타협없는 형태로 말한 사람은 포퍼 교수이다.
Echoing Namier's rejection of 'programmes and ideals', he attacks policies which allegedly aim at 're-modelling the " whole of society " in accordance with a definite plan', commends what he calls 'piecemeal social engineering', and does not apparently shrink from the imputation of 'piecemeal tinkering' and 'muddling through'." On one point, indeed, I should pay tribute to Professor Popper. He remains a stout defender of reason, and will have no truck with past or present excursions into irrationalism. But, if we look into his prescription of 'piecemeal social engineering', we shall see how limited is the role which he assigns to reason. Though his definition of ‘piecemeal engineering' is not very precise, we are specifically told that criticism of ‘ends' is excluded; and the cautious examples which he gives of its legitimate activities - 'constitutional reform' and 'a tendency towards greater equalization of incomes'-show plainly that it is intended to operate within the assumptions of our existing society. 그는 네이미어의 강령과 이념에 대한 거부를 찬성하면서, 그는 정책들을 공격한다. 그 정책들은 사회 전체를 재개조 목표로 한다. 분명한 계획을 가지고. 포퍼는 이러한 것들을 반대한다. 그리고 포퍼는 칭찬한다. 소위 그가 부르는 ‘단편 사회 공학’, 그는 뒤로 물러서지 앟는다. ‘단편사회공학’이 ‘미봉책’이라든가 ‘우물쭈물’한 측면이 있다는 비난에 대해 뒤로 물러서지 않는다. 한 가지 측면에서는 포퍼 교수에게 감사를 표하고 싶다. 그는 굳건한 이성의 지지자이다. 그리고 과거와 현재의 비이성주의에로의 탈선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그러나 우리가 ‘단편사회공학’에 관한 그의 처방을 들여다보면 우리는 보게 된다. 이성이라는 것이 얼마나 제한된 역할을 하는지를. 단편공학이라는 것을 포퍼는 정확히 서술하지 않았지만 우리는 특별히 듣는다. ‘목적’에 대한 비난은 제외된다고. 그리고 그가 정당한 활동이라고 조심스럽게 드는 예들은 - 입헌적 개혁 그리고 소득의 더 큰 평등화를 향한 경향 - 단순하게 보여준다. 그것은 작동한다. 우리 현존 기존 사회의 틀 안에서 작동하기로 의도된 것이라고.
Chapter 6_35_238p The widening horizon
The status of reason in Professor Popper's scheme of things is, in fact, rather like that of a British civil servant, qualified to administer the policies of the government in power and even to suggest practical improvements to make them work better, but not to question their fundamental presuppositions or ultimate purposes. This is useful work: I, too, have been a civil servant in my day. But this subordination of reason to the assumptions of the existing order seems to me in the long run wholly unacceptable. This is not how Acton thought of reason when he propounded his equation revolution=liberalism=reign of ideas. 포퍼 교수에게 일을 설계할 때 이성의 역할은 사실 영국 공무원과 비슷하다. 공무원은 정부 정책을 실행할 자격이 주어져 있고 심지어 실제적인 개선을 제안할 수까지 있다. 그들을 좀 더 잘 수행하기 위해서. 그러나 그들의 근본적인 전제나 궁극적인 목적에 대해서 질문을 던지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것은 유용한 작업이다. 나도 한 때는 공무원이었다. 그러나 이 같은 이성이 현존질서에 종속되는 것은 결국은 완전히 받아들이기 어려운 듯하다. 나에게는 이것은 액튼이 생각했던 이성이 아니다. 그는 그의 방정식에서 혁명=자유주의=이념의 지배 라는 등식을 역설했다.
Progress in human affairs, whether in science or in history or in society, has come mainly through the bold readiness of human beings not to confine themselves to seeking piecemeal improvements in the way things are done, but to present fundamental challenges in the name of reason to the current way of doing things and to the avowed or hidden assumptions on which it rests. I look forward to a time when the historians and sociologists and political thinkers of the English-speaking world will regain their courage for that task. It is, however, not the waning of faith in reason among the intellectuals and the political thinkers of the English-speaking world which perturbs me most, but the loss of the pervading sense of a world in perpetual motion. 인간의 일이라는 게 과학이건 역사이건 또는 사회건 진보는 주로 과감한 도전에 의해 와 왔다. 일이 되어가는 가운데 단편적 개선을 찾는 데 자신을 제한하기보다 근본적인 도전들을 하는 가운데 진보가 진행되어 왔다. 이성의 이름으로 현재의 일에 도전하고 근본적인 도전을 하고 또는 공언된 또는 숨겨진 가정들에 도전을 통해서 진보가 진행된다. 나는 영어권 세계의 정치 사상가들과 사회학자들과 역사가들이 그러한 일에 대한 용기를 되찾기를 기대하고 있다. 하지만 난 이성의 믿음에 대한 쇠퇴에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영어권 국가의 정치 사상가들과 지성인들 사이에서 나를 가장 초조하게 만드는 것은 믿음에 대한 쇠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영원히 운동하는 세계에 대한 널리 퍼져 있는 보편적인 정서에 대한 상실이라고 생각한다.
Chapter 6_36_239p The widening horizon
This seems at first sight paradoxical; for rarely has so much superficial talk been heard changes going on around us. But the significant thing is that change is no longer thought of as achievement, as opportunity, as progress, but as an object of fear. When our political and economic pundits prescribe, they have nothing to offer us but the warning to mistrust radical and far-reaching ideas, to shun anything that savours of revolution, and to advance - if advance we must - as slowly and cautiously as we can. At a moment when the world is changing its shape more rapidly and more radically than at any time in the last 400 years, this seems to me a singular blindness, which gives ground for apprehension not that the world-wide movement will be stayed, but that this country - and perhaps other English-speaking countries - may lag behind the general advance, and relapse helplessly and uncomplainingly into some nostalgic backwater. 이것은 언뜻 보기에는 역설적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변화에 대한 피상적인 얘기들이 요즘같이 많이 들려온 적인 없었기 때문이다. 변화에 대해서. 그러나 중요한 것은 변화가 더 이상 성취, 기회, 진보로 생각되지 않고 공포의 대상으로 생각된다는 것이다. 정치나 경제의 전문가들이 처방전을 내릴 때, 그들은 경고외에는 아무 것도 제공하지 않는다. 급진적이고 광범위한 이념들은 불신하라고, 그리고 혁명의 냄새가 나는 것도 피하라고, 그리고 앞으로 나가가라고, 만약 우리가 나아 가야한다면 가능한 한 천천히 그리고 조심스럽게 나아가라고. 세계가 더 없이 급하게 그리고 근본적으로 변하고 있는 이 때, 지난 400년간의 어떤 시기 보다고. 이것은 기이할 정도로 맹목적이다. 그리고 이것은 불안감을 제공하고 있다. 그 불안감은 세계의 움직임이 정지해 있기 때문이 아니라 이 나라, 그리고 영어권 국가들이 일반적인 진전에 뒤쳐져 무기력하게 그리고 조용히 향수어린 침체 속으로 빠져들지 않을까 걱정이 된다.
Chapter 6_37_240p The widening horizon
For myself, I remain an optimist; 나로서는 여전히 낙관주의자로 남아 있다.
and when
1. Sir Lewis Namier warns me to eschew programmes and ideals, and 네이미어 경이 강령과 이념들을 피하라고 나에게 경고할 때
2. Professor Oakeshott tells me that we are going nowhere in particular and that all that matters is to see that nobody rocks the boat, and 오크쇼 교수가 나에게 말하기를 특별히 아무 곳으로 가지 말고 가장 중요한 것은 아무도 보트를 흔들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다 라고 말할 때.
3. Professor Popper wants to keep that dear old T-model on the road by dint of a little piecemeal engineering, and 포퍼교수가 오래된 아끼는 T-모델을 길거리에서 대충 단편공학으로 수리해서 소중히 간직하기를 원할 때.
4. Professor Trevor-Roper knocks screaming radicals on the nose, and
트레보 로프 교수가 급진주의자들의 콧등을 정면으로 때릴 때
5. Professor Morison pleads for history written in a sane conservative spirit, 모리슨 교수가 역사는 보수적인 정숙한 시각으로 씌어져야 한다고 할 때
I shall look out on a world in tumult and a world in travail, and shall answer in the well worn words of a great scientist: 'And yet - it moves.' 나는 격동의 세계, 고통으로 가득 찬 세계를 내다 볼 것이다. 그리고 위대한 과학자가 말한 오래된 진부한 말로 답변할 것이다. ‘그래도 (태양이 아니라) 지구가 돈다’ 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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