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깻잎 투쟁기: 캄보디아 이주노동자들과 함께한 1500일
우춘희 지음, 교양인 2022
‘불법적 자유’의 역설
이주노동자가 ‘도망’가는 이유
란 페이치아 국립대만대학 사회학과 교수는 대만의 단기 이주 노동 정책을 분석하면서, 이주노동자가 노동력만 제공하고 장기적으로 거주하지 못하도록 하는 법과 제도가 이들을 보호하기보다는 오히려 ‘노예와 같은 상태’로 만든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런 현상을 ‘합법적 노예 상태와 자유로운 불법성’이라고 명명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이주 노동 정책의 각종 규제가 이주노동자를 법과 제도에 얽매이게 만들고, 불법의 영역을 형성하도록 유인하는 장치가 된다. 이주노동자는 노동 시장에서 자유롭게 직업을 선택할 권리를 빼앗겨 종속적인 계약 관계에 묶이게 되고, 고용주로부터 불합리한 대우를 당하더라도 참아야 한다. 정부의 규제 장치로 인해 고용주와 노동자의 불평등한 관계가 형성되는 것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 노동자가 계약 기간을 넘겨 초과 체류(‘불법 체류’)를 선택할 경우 추방의 위험은 있지만 노동 시장에서 일종의 ‘자유’를 누릴 수 있게 된다. 계약에 묶인 상태에서 벗어나면 더 나은 노동 조건과 주거 환경을 고용주와 협상할 수 있는 가능성이 생기기 때문이다. 이런 협상 가능성은 ‘합법 체류’노동자에게는 주어지지 않는 것이다.
란 페이치아 교수의 분석은 이주노동자가 ‘도망’가는 이유를 개인이 아닌 사회제도적 측면에서 바라보게 한다. 특히 대만과 비슷한 단기 이주 노동 정책을 실시하고 있는 한국 사회에서 그의 분석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한국의 합법 체류 자격의 이주노동자는 임금 협상의 여지가 거의 없다. 사업주가 제시한 노동 조건에 동의하지 않아도 되지만 그러면 고용되지 못한다.
반면 체류 기간이 지난 미등록 이주노동자는 자신이 ‘합법적’ 체류 기간(보통 4년 10개월)에 쌓은 전문성과 사업장을 이동할 수 있는 약간의 자유를(그들은 정식 계약을 맺은 상태가 아니라서 상대적으로 쉽게 그만둘 수 있었다) 토대로 삼아 일손이 부족한 사업주의 노동 조건과 주거 조건을 협상할 수 있다. 란 페이치아 교수의 말대로, ‘합법적’으로 체류하는 노동자는 온갖 제도와 법이 구속하는 노예 상태에 놓이지만 ‘불법적’으로 체류하는 노동자는 이런 구속에서 벗어나서 협상력을 갖는 역설적 상황이 발생하는 것이다. 특히 코로나19로 일손 부족이 심해지자 이런 모순은 한국 사회 곳곳에서 더 극명하게 드러났다.
‘불법’이면 조건이 더 좋다고?
경기도 이천에 상추 농사를 짓는 홍선주(가명, 40대) 씨는 2020년 2월 고용 센터에 미얀마 노동자 여성 명을 신청했지만 코로나19 유행으로 인해 이들의 입국이 계속 미루어져 1년이 넘도록 소식을 듣지 못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2021년 2월 미얀마의 군부 쿠데타가 발생해 미얀마 내 정치 상황이 어지럽게 돌아가자, 홍선주 씨는 예비 노동자들을 기다리는 것을 포기하고 미등록 노동자들을 고용했다. 그들은 고용허가제로 한국에 입국해 4년 10개월을 보낸 후 본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초과 체류하고 있는 상태였다.
그러나 미등록 노동자들은 홍선주 씨네 농장에서 오래 일하려 하지 않았다. 대체로 농장 일이 너무 힘들고 월급도 적어 공장으로 간다고 했다. 당장 일손이 필요한 홍선주 씨는 이들을 붙잡기 위해 더 높은 월급을 제시해 협상하기도 했다. 그렇게 해서 남는 노동자도 있었고 떠나는 노동자도 있었다. 그러다 마지막까지 남은 노동자들마저 몸이 아프다고 그만두고 떠났다.
8월 중순, 가을 상추를 위해 비닐하우스 멀칭 작업을 앞두고 있던 때라 홍선주 씨는 애가 탔다.
“봄 상추하고 가을 상추가 달라요. 봄 상추는 날씨가 쭉 좋아지니까 조금 늦게 심어도 상관없어요. 그런데 가을에는 아침저녁으로 추워지기 때문에 하루 늦게 심으면 하루 늦게 수확하는 것이 아니라 열흘 뒤에나 수확할 수 있어요. 그렇게 차이가 나요. 딸기도 그래요. 8월 말에 심으면 11월에 딸기가 나오는데, 9월 초에 심으면 11월 말에 딸기가 나와요. 작물이 그래요. 가을 상추를 제때 심지 못해서 상추 안이 배추처럼 속이 안 차면 못 팔잖아요. 그래서 우리가 속이 타는 거예요.”
그는 인력사무소(직업소개소)에 전화를 했지만 인력난으로 모든 예약이 꽉 찼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멀칭 작업이 열흘 정도 늦어졌다. 그로 인해 미리 사다 놓은 상추 모판이 망가져 어마어마한 양을 버려야 했다. 뒤늦게 한국인 아주머니 열 명을 어렵게 모셔와 상추를 심기는 했지만 이래저래 미루어진 작업 때문에 손해 본 게 많았다. 그런데 이게 끝이 아니었다. 이제 상추를 관리할 노동자들을 구해야 했다.
“사람을 구하려고 외국인 식당도 갔다 왔어요. 거기 가면 사람을 구할 수 있다고 하더라고요. 그런데 코로나 때문에 사람이 없대요. 또 다들 공장에서 일한대요. 공장에서 일하는 애들은 월급이 너무 세서 데려올 수가 없어요. 농장에서 일하는 어떤 애가 우리 집에 오고 싶어 하긴 했는데, 웬걸 우리가 아는 집에서 일하는 애인 거예요. 아는 사람들끼리 어떻게 사람을 빼 와요. 여러 농장을 돌아다니면서 캄보디아 친구들한테 부탁을 했어요. 월급 2백만 원에 기숙사비도 없다고 하니까 세 명이 오겠다고 했어요. 좋은 조건이니까 구해지긴 하더라고요. 열흘만 먼저 구했으면 모판 손해 보는 일은 없었을 텐데 너무 속상해요.……
불법이라서 월급을 더 조금 준다? 요즘은 그런 거 안 통해요. 코로나 때문에 (사람 구하기 힘들어져서) 기숙사비 안 받고 월급 160만 원을 줬어요. 그런데 이제 여자는 기본이 180만 원이고 남자는 200만 원이에요. 우리는 기숙사비도 전혀 안 받고 오히려 쌀도 사줘요, 좋은 쌀로. 그런데 지금 사람이 없어서 알아보니까 다른 농가는 우리보다 더 준다는 거예요. 여자는 200만 원, 남자 230만 원에서 최고 250만 원까지 준대요. 부부가 오면 합해서 450만 원에 맞춰준다고 하더라고요.”
‘불법’ 체류는 노동자에게 노동 조건의 협상력만 높이는 것이 아니었다. 가족과 함께 살 수 있는 인간의 기본 권리도 ‘합법’보다는 ‘불법’이 쉽게 얻을 수 있었다. 김미자 씨가 고용한 쿤티에 씨가 그랬다. 그는 김미자 씨 깻잎밭에서 1년 넘게 일했지만 남편 직장에 일자리가 나자 함께 살기 위해 일을 그만두기로 결정했다.
1990년생인 쿤티에 씨는 2015년 고용허가제로 들어와 경기도의 한 비닐하우스에서 일을 시작했다. 이후 사업장을 바꿔 깻잎 농장으로 오게 되었고, 그곳에서 한 시간 정도 떨어진 대도시 공장에서 일하는 캄보디아 남성을 만났다. 둘은 농한기 일이 없는 때에 고향으로 가서 결혼식을 올리고 다시 한국으로 와 일을 계속했다. 그러다 2019년 한국에서 아이를 출산했다.
“내가 산후조리원에서 2주 있었어요. 80만원을 냈어요. 80만원. 아이를 한국에서 키우고 싶었어요. 그런데 내가 일해요. 누가 아이를 돌봐줘요? 태어난 지 한 달 된 아이를 데리고 남편이랑 같이 다시 캄보디아 갔어요. 캄보디아 고향에서 한 달 반 있다가 다시 한국 왔어요. 지금 아이는 캄보디아에서 엄마가 돌봐줘요.”
2020년 3월 쿤티에 씨는 고용허가제가 보장한 4년 10개월의 체류 기간이 끝나가자 출국을 위해 비행기 표를 샀다. 남편과 논의 끝에 그는 다시 한국어시험을 보고 한국에 오기로 했다.
그런데 코로나19가 발생해 전 세계적으로 확산되기 시작했다. 쿤티에 씨가 결혼식과 양육을 위해 넘었던 국경은 코로나로 인해 잠정 폐쇄되었다. 쿤티에 씨의 캄보디아로 가는 비행기 편도 취소되었다. 캄보디아로 돌아간 뒤에 재취업 제도를 통해 한국에 돌아오려 했지만 그 시험 일정마저 취소되었다. 언제 다시 한국에 올 수 있을지 모든 것이 불확실해졌다. 불확실성이 극대화된 상황에서 그에게 가장 확실한 방법은 한국에서 초과 체류 상태로 3~4년 정도 일을 한 뒤 캄보디아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결국 쿤티에 씨는 한국에 남기로 결정했다.
쿤티에 씨는 남편 공장에서 일하며 함께 살고 싶었지만 자리가 없었다. 일단 친구를 통해 농장 일을 구했다. 쿤티에 씨는 깻잎 밭에서 쌓은 전문성을 가지고 사업주인 김미자 씨와 협상을 하여 합법 체류의 이주노동자와 같은 월급을 받고 일을 시작했다. 단속되어 추방될지 모른다는 공포감이 있지만 고립된 농촌 사회에서는 외출을 특히 하지 않으면 괜찮을 것이라고 불안감을 떨치려 애썼다. 퇴근 후에는 집에서 SNS로 영상 통화를 하며 친정어머니가 아이를 밥 먹이고 씻기는 모습을 봤다. 쿤티에 씨는 이따금씩 화면 속 아이에게 ‘엄마’라르 말을 가르쳐보곤 했다. 그렇게 1년이 지나 공장에 자리가 났다는 소식을 들었고 김미자 씨에게 그만두겠다고 말했다.
김미자 씨는 쿤티에 씨가 그만두겠다는 말이 청천벽력과 같았다고 말했다.
“큰 애(쿤티에 씨)가 그러는거야. ‘사모님과 사장님을 사랑하지만 나는 남편하고 같이 일하고 싶어요.’ 이렇게 말하는데 어떻게 못 가게 해. 그리고 가지 못하게 해서 될 일도 아니고. 자기도 남편이랑 같이 살면서 일하고 싶겠지. 젊은 부부가 왜 안 그러겠어. 근데 깻잎은 계속 자라니까 따줘야 하고, 사람은 구하기 정말 어려운데 앞이 캄캄하더라고. 그래서 큰 애한테 그랬지. 그럼 친구 좀 구해놓고 가 달라고.”
쿤티에 씨와 남편은 둘 다 고용허가제로 들어왔지만, 그는 농촌의 밭에서 일하고 남편은 도시 공장에서 일했기에 같이 살지 못했다. 고용허가제는 기본적으로 노동자의 업종 간 이동을 금지하는데, 노동자의 질병으로 인해 기존 업종에서 계속 일하기 어려운 불가피한 경우에도 ‘농·축산업’으로 변경하는 것만 허용한다. 쿤티에 씨는 초과 체류자가 되고 나서야 남편이 일하는 공장으로 옮길 수 있었다. ‘합법’적으로 일할 때는 가족과 같이 살지 못했지만 ‘불법’적으로 일하게 되자 남편과 같이 살 수 있게 된 것이다.
유엔의 세계인권선언(Universal Declaration of Human Rights, 1948)을 비롯한 국제 인권 규범은 가족이 함께 살면서 사회의 기본 단위로서 존경과 보호, 지원과 지지를 받을 권리인 ‘가족결합권(right to family unity)’을 보장한다. 가족결합권은 “자국의 영토 내에 있으며, 그 관할권 하에 있는 모든 개인에 대하여 적용되는 것으로서, 국적과 상관없이 외국인에게 마찬가지로 적용”되는 것이다. 따라서 국제 인권 규범을 존중하는 우리 사회는 이주노동자에게도 가족결합권을 보장해야 하지만 제한적이다. 대학, 대사관, 공공 기관 등에 종사하는 전문직 이주노동자는 가족과 함께 살 권리를 인정받지만 제조업, 농·축산·어업 등에 종사하는 비전문직 이주노동자는 인정받지 못한다. 단기 순환 노동 정책인 고용허가제는 이주노동자가 일정 기간 노동력을 제공하고 본국으로 돌아가기를 기대하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나라가 그렇다. 이주노동자를 ‘노동력’으로만 보는 것이 아니라 인도주의적 차원에서 가족결합권을 당연히 누구나 누릴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농장에서 공장으로
홍선주 씨네 농장에서 일하던 쓰콤(가명, 20대) 씨는 내게 왜 자신이 농장을 ‘도망’쳤는지를 솔직하게 말해주었다.
“농장에서 일하는 거 정말 힘들어요. 한 달에 두 번 쉬고 하루에 9~10시간씩 일해야 해요. 여름에는 비닐하우스 안이 너무 더워요. 겨울에는 너무 추워요. 그래서 힘들어요. 월급도 180만 원이에요. 그런데 제 친구가 공장에서 일해요. 거기서 일하면 한 달에 네 번 쉬고 월급을 250만 원 준다고 했어요. 거기로 가려고 농장 일을 그만뒀어요. 만약 사장님한테 미리 말하면 공장에 못 가게 할까 봐 몰래 나왔어요.”
농업 노동자는 근로기준법 제63조에 의해 근로 시간과 휴식에 관한 규정들(근로기준법 제4장과 제5장)의 적용을 받지 않는다. ‘예외근로자’로 분류되어 장시간 노동에도 제대로 된 보호를 받지 못하는 것이다. 고용주는 법적으로 한 달 내내 쉬지 않고 하루 24시간 노동자에게 일을 시켜도 되고 이때 연장 근로 수당, 야간 근로 수당, 휴일 수당을 주지 않아도 된다. 제63조는 1953년에 근로기준법이 처음 제정되었을 당시 규정되었고, 70년 넘게 변함없이 유지되었으니 현실에 맞게 개정될 필요가 있다고 인권단체에서는 주장한다. 이 제도로 인해 똑같이 오래 일해도 농장보다 공장에서 일하면 돈을 더 받으니, ‘공장’ 선호도가 더 클 수밖에 없다. 게다가 공장은 보통 농촌이 아닌 도시에 있기에 생활하기에도 편했다.
쿤티에 씨가 공장으로 떠난 뒤 김미자 씨네 깻잎밭에는 또 다른 미등록 노동자 나리(가명, 20대) 씨가 왔지만, 그 역시 일을 시작한 지 4개월 만에 공장으로 가겠다고 말했다.
“사모님, 나 내일 공장에 가요. 오늘 일 그만둬요.”
김미자 씨는 하는 수 없다고 말했지만 얼굴에는 서운한 표정이 역력했다. 김미자 씨는 그날 저녁 노동자들과 다 같이 먹을 식사 자리를 준비하려고 하는데, 내게 그 자리에서 자기 말을 통역해 달라고 부탁했다.
“얘네가 장어구이를 먹을 줄 아나 모르겠어. 장어를 좋아할까? 같이 저녁 먹으면서 설득해보고 싶어. 월급을 올려주고 기숙사비도 안 받겠다고 하려고. 설득이 됐으면 좋겠는데, 안 되면 오늘 저녁이 환송회가 되겠지. 어유. 요즘 코로나 때문에 사람도 없는데 어디 가서 사람을 또 구하나. 머리가 복잡하네.”
일을 끝낸 뒤 나, 아룬니 씨, 나리 씨, 부산에서 일을 하는 나리 씨의 남편, 김미자 씨가 한 자리에 모였다. 돌판 한쪽에는 초벌구이가 된 장어를 굽고 다른 쪽에는 삼겹살을 구웠다. 고기 연기가 집 안 가득했고 젓가락들이 바쁘게 움직였다. 어느 정도 배가 부르자 김미자 씨가 나리 씨에게 말을 시작했다.
“사모님이 알아. 나리가 몸이 약해서 일하기 힘들어하는 거. 공장으로 가겠다고 하면 사모님이 막자 못해. 그런데 공장에 가도 일이 힘들어. 여기 깻잎 따는 건 너희가 익숙한 일이잖아. 너희는 기술자니까 월급을 230만 원으로 올려줄게. 기숙사비도 안 받을게. 그러니까 내년 3월까지만 일해주면 안 될까? 여기 언니(아룬니 씨)도 같이 월급 올려줄 거야.”
다음 날 아침, 나리 씨는 김미자 씨에게 계속 남아서 일을 하겠다고 말했고, 김미자 씨는 두 손으로 박수를 쳤다. 몇몇 고용주들은 더 나은 노동 환경과 주거 환경을 약속하며 농업 노동자들을 잡으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농장과 공장에서 모두 일해본 노동자들에게 어느 일이 더 좋은지 물어보면 대답은 한결같았다. 그들은 망설임 없이 말했다.
“공장이 더 좋아요.”
여권 압수, 고의적 임금 체불이라는 편법
“다른 농가를 알아보니까, 다 여권 갖고 있거나 월급 몇 달 치를 잡고 있대요. 한 나이 드신 분이 저희(홍선주 씨네)보고 여권을 갖고 있으라고 하더라고요, 그럼 도망 곳 간다고. 그러면서 우리보고 바보래요. 여권도 안 뺏고, 월급도 제 날짜에 주니까 도망간다는 거예요.”
일부 고용주들은 노동자들이 도망가지 못하게 악랄한 방법을 썼다. 여권 압수가 대표적인데, 이는 우리나라 출입국관리법상 형사 처벌의 대상이며(3년 이하의 징역 또는 3천만 원 이하의 벌금) 국제 인권 규범에도 어긋난다. 우리나라가 아직 비준하지는 않았지만 30년도 전에 제정된 유엔의 ‘모든 이주노동자와 그 가족들의 보호를 위한 국제협약(International Convention on the Protection of the Rights of All Migrant Workers and Members of Their Family, 1990)’의 제21조는 다음과 같이 규정하고 있다. “법률에 의하여 정식으로 권한을 부여받은 공무원 이외의 자가 신분증명서, 입국, 체류, 거주 또는 정착을 허가하는 서류 또는 취업허가증을 압수, 파기 또는 파기하려 함은 위법이다. 그 같은 서류의 합법적 압수 시에는 상세한 수령증 교부가 있어야 한다. 어떠한 경우에도 이주노동자나 그 가족의 여권 또는 그에 상응하는 서류를 파기하는 것은 허용되지 아니한다.”
여권뿐만 아니라 월급 통장을 빼앗기도 했다. 경기도 이천엣서 농장을 운영하는 한 사업주는 최근까지도 이주노동자의 월급 통장을 빼앗아서 도망가지 못하게 했다면서 내게 자랑스럽게 말했다.어떤 이주노동자는 사업주가 자신의 월급 통장 내역을 보고 어디에 돈을 썼는지 추궁했다면 불만을 토로했다. 다른 이주노동자는 이주인권단체에 매달 1만 원씩 후원했는데 사업주가 통장을 보고 후원을 당장 끊으라고 강요해서 어쩔 수 없이 끊었다고 했다.
또 다른 사악한 방법으로는 몇 달 치 월급을 일부러 주지 않는 것이다. 노동자들이 밀린 월급이 아까워 사업장에 남는다는 것을 노린 것이었다. 더구나 미등록 노동자는 불안정한 체류자격 때문에 임금 체불을 신고하지 못한다는 약점을 이용하는 사업주도 있었다. 한 사업주는 ‘불법’ 체류 노동자들만 골라 고용한 후 고의적으로 임금을 떼먹기를 반복하다 구속되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일부 미등록 노동자들은 고용주가 임금을 조금만 늦게 주어도 짐을 쌌는데, 다른 사업장으로 가는 것이 못 받는 돈이 쌓이는 것보다 더 낫다는 경험 때문이었다.
‘합법’ 체류 노동자의 열악한 조건
홍선주 씨가 사람을 구하려고 애쓰던 시기에, 공교롭게도 충남 부여에서 일하는 캄보디아 여성 노동자 따비(가명, 20대) 씨에게 연락을 받았다. 그는 2018년 5월 고용허가제로 들어와 한 농장에서 3년 넘게 일하던 중이었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따비씨는 ‘성실근로자’로 인정받아 오래오래 한국에서 일하고 싶다고 말해 왔다. 그런 그가 사업장을 바꾸고 싶다고 도와 달라고 했다. 사업장을 중간에 바꾸면 재입국이 어려울 것이라고 이야기했지만 따비 씨는 상관없다고 했다.
“언니, 사장님에게 말해줘요. 저는 사업장을 바꾸고 싶어요. 사장님이 월급을 155만 원, 1660만 원을 줘요. 비닐하우스 기숙사비 25만 원을 내요. 월급이 너무 적고, 기숙사비는 너무 많아요. 여기서 더 이상 일하고 싶지 않아요. 사장님에게 (사업장 변경에) 사인해 달라고 언니가 말해줘요.”
합법 체류 노동자인 따비 씨는 비닐하우스 안 샌드위치패널로 지은 집에 살고 있었다. 각종 세금을 더해 기숙사비로 한 달에 25만 원이 임금에서 공제되었다. 따비 씨가 하루 9~10시간 일하고 한 달에 두 번 쉬고 실제로 받는 임금은 약 160만 원 정도였다. 겨울에는 해가 짧아져서 일을 늦게까지 하지 못해 130만~135만 원을 받았다. 코로나19로 일손이 부족해 미등록 노동자의 임금은 높아져 갔지만 ‘합법’ 체류 노동자의 열악한 상황은 그대로였다.
내가 따비 씨의 사업주에게 전화해 상황을 전하자 그는 내게 하소연했다.
“나하고 따비하고 다 의사소통이 돼요. 걔가 한국 말 다 알아듣는다고. 걔가 사인해 달라고 해서 내가 지금은 안 된다고 했어요. 사람이 안 들어오는데 어떻게 사인을 해줘. 사람이 들어오면 사인해준다고 다 얘기했고, 얘가 알아들었단 말이에요.”
“사장님의 말씀은 알겠지만 본인은 거기서 일하고 싶지 않다고 해요. 그래서 제게 전화를 한 것이고요.”
“여기 애들이 왔다 갔다 하면서 서로 정보를 공유해요. 그러더니 세 집이나 사인해 달라는 이야기를 들었다는 거예요. 내가 따비한테 그랬어요. (코로나19) 백신 다 맞은 다음에 가라고. 사인해줄 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네. 따비 씨가 그 얘기도 했어요. 그런데 백신은 거기서 안 맞고 다른 지역에 가서 맞아도 되잖아요. 사장님이 하루에 9~10시간씩 일을 시키고 월급은 8시간만 준 것을 따비 씨가 문제 삼을 수도 있고, 각종 세금이나 기숙사비 명목으로 너무 많이 공제한 것도 문제 삼을 수도 있어요. 그런데 그렇게 일을 크게 하고 싶지 않아서 이렇게 전화드린 거예요.”
따비 씨의 고용주는 언성을 높였다.
“당신, 한국 사람 아니야? 한국 사람이면 한국 사람 편들어야지! 일손이 없어서 작물 수확 못하면 우리는 다 포기해야해. 1년 농사 망치는 거라고!”
나는 월급을 조금 인상해주면 따비 씨가 남을 여지가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완강히 거절하며 말했다.
“난 10원 하나 더 줄 수 없어요.”
며칠 뒤 걱정이 되어 따비 씨에게 전화를 걸었다.
“사장님이 월급 10만 원 더 준다고 했어요. 그래서 일단 일을 하기로 했어요. 그래도 일자리 바꾸고 싶어요.”
사업주의 답답함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작물은 심어놓았는데 관리하고 수확해야 할 노동자가 갑작스럽게 그만둔다고 하면 당장 일손을 구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당혹스럽고 화가 날 것이다. 그런데 사업주도 근로계약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에 온전히 노동자만 탓하기는 어려웠다. 따비 씨의 근로계약서에는 하루 8시간 근로, 한 달 4~5일 휴일이 명시되어 있었지만 전혀 지켜지지 않았다. 따비 씨의 집 정도면 각종 세금을 더해도 기숙사비는 보통 20만 원이었기에 25만 원은 비싼 편이었다.
비슷한 시기 ‘합법’ 체류인 따비 씨보다 ‘불법’ 체류인 쏘콤 씨가 더 좋은 대우을 받았다는 사실은 고용허가제의 실상을 잘 드러낸다. 단기간의 노동력만 제공하게끔 만든 촘촘한 장치는 오히려 노동자들을 옭아매고 있다. 미등록 노동자는 법적 보호를 받을 수 없지만 고용허가제를 지킬 의무가 없어 어떤 면에서는 더 자유롭다. 제도가 불법을 만들어낸 것은 아닌지 우리 사회는 고민할 필요가 있다.(153~16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