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풍제월정(光風霽月亭) 경상남도 진주시 사봉면 마성리 남마성 지소 진주의 동쪽 월아산의 북쪽에 남강이 흘러 구비치다가 쏘를 이룬곳에 제월대(霽月臺)가 있고 대(臺)의 서쪽에 광풍정(光風亭)이 있었다고 하나 처음에 누가 그 정자를 지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조선 선조조때 성재선생 휘 예훈(禮勛)은 임오년(1582년)에 생원시에 합격하였으나 그 이듬해 계미년의 3대간의 사건이 있으니 과거를 포기하고 두 아들을 거느리고 그 옆에 살면서 학문으로 일생을 마쳤다.성재선생이 돌아가신지 200년이 지난후에 이곳에 다시 정자를 지어 광제정(光霽亭)이라 이름 붙였다. 성재선생은 문집이 십수권이나 있었다고 하나 많은 전화로 전하지 않는다. 선생의 학문이 주역의 태극본지(太極本旨)에 통하였으므로 주자는 성(誠)을 태극이라 하였기 때문에 호를 스스로 성재(誠齋)라 하였다. 선생의 자(字)는 화백(和伯)이며, 참봉공(휘 喜連)의 셋째 아들로 태어나시어 통정공파 동산공(휘 喜直)의 사자(嗣子)가 되었으며, 배위는 진양인 진사 강원(姜元)의 따님으로 판서 강혼(姜渾)의 증손이며, 슬하에 3남 1녀를 두었다. 장자의 휘는 잠(土+岑)이며 후손은 진성의 동산에 살고 다음은 휘가 강(堈, 호 道山)으로 후손은 대곡의 마진에 살았고 다음은 휘 규(圭)인데 후손이 없으며 따님은 여양인 진익국(陳翊國)에게 시집을 갔다. 광제정기와 선생의 묘갈명은 회봉 하겸진이 지었다. 원래 송정 하수일이 묘갈명을 지었다고 송정문집에 기록되어 있으나 원문의 내용이 실전되었다고 한다. < 참고> 계미삼찬(癸未三竄) : 1583년 선조 계미년에 병조판서 이이의 횡포가 심하여 대간이 연달아 상소를 올렸으나 임금(선조)은 오히려 차례로 大司諫 송응개, 承旨 박근원, 典翰 허봉을 장흥부사 창원부사등 외직으로 좌천시키고 곧 함경도 회령과 갑산 및 평북 강계 등으로 유배를 시킨 사건을 말한다. 율곡 이이가 죽을 때까지 대간 세사람은 유배에서 풀러나지 못했으며 그 중 허봉은 허균의 중형이며 허난실헌의 오빠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