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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상의 마지막 낙원을 찾아-북인도 여행.
대장정이었다. 인도의 델리에서 출발하여 히말라야 산맥을 따라 아슬아슬하게 걸쳐진 외길을 지프 사파리로 달린 산길은 1855km. 일상의 길이 아닌 자연의 적나라한 모습을 보여 준 장대하고, 웅장하고, 위엄과 경외로운 길이었다. 그 길위에 있었음이 실감나지 않는다.
황토 먼지가 섞인 바람과, 진흙 색으로 탕탕히 흐르는 강물과, 흰눈을 머리에 인 설산들의 봉우리들과, 햇빛에 빛나는 다양한 색들의 바위들, 푸른 풀밭,탐스런 야생 사과와 산비탈, 저 높은 곳에서 굳이 살아가야 하는 이유가 뭘까? 의문을 던져 준 히말라야의 먼지 묻은 사람들의 삶이 현실감으로 남아 있을 뿐. 히말라야 산맥을 넘는것도 어려웠지만 수많은 검문소 통과도 어려웠다.
우리 일행은 29명, 한국을 출발 시 18명인 숫자는 캐나다, 미국, 인도,네팔을 합쳐 다국적 모임이 되었다. 5명의 드라이버들은 인도 펀잡인들로 사교적이며 친절하고 가난하지만 즐겁게 사는 삶을 우리에게 보여 주었다. 이 길은 한국의 여행사들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았고, 가끔 배낭족들이 있을 뿐 단체여행으론 우리가 두 번째 팀이었다.
인도 정부는 인도 최북단 히말라야 산맥 넘어 산악나라 라다크로 가는 길을 1975년에 개방하였지만 인도 파키스탄 분쟁지역인 카시미르를 거쳐 가야되어 방문이 어려웠지만 인도 정부의 관광정책에 의해 히마찰주의 마날리나 심라로 부터의 안전한 새 접근로를 닦아 놓았다. 그러나 해발고도 4-5천 미터가 넘는 눈에 쌓인 수많은 히말라야의 언덕들을 넘어야 하는 관계로 여행시기가 7-8월간으로 제한되어 있다. 이곳은 자연 경관이 매우 수려하고 감쳐 줘 있던 기간이 길어 보존된 문화 유산의 가치가 높고, 소수 민족들의 생활풍습이 특이하며 세계의 여행 매니아나 불교 미술학자들로부터 대단한 호평을 받고 있어 여행객의 숫자가 점차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
작은 영국 심라-2205m
2008.7.25일 인도 항공을 타고, 저녁 8시 10분 홍콩 도착,9시 35분 출발, 인도 시간 12시 40분 델리에 도착했다. 아니 오늘 새벽 1시경에 도착한 호텔, 좁고 어두운 작은 골목에 위치한 호텔은 낡고 닳고 초라했다. 목욕탕 욕조엔 바케스와 작은 물컵 달랑 하나, 갑자기 ‘아웃 오브 아프리카’란 영화가 생각나 하하..., 2시가 넘어 오지않은 잠을 청했다. 한국보다 2시간 느리다.
아침 5시에 기상, 거리에 나섰다. 소가 어슬렁 거리고, 어디나 소똥과 쓰레기 천지다. 인도의 3대 자유스러움은 천지가 화장실, 천지가 쓰레기통, 천지가 재떨이라고, 누가 우스개 소리를 했다, 이번 여행에서 하나 더 보탠다면 천지가 먼지다. 지저분한 간판들도 인도의 아침 풍경이다. 아침 9시 지극히 간단한 식사를 마치고, 출발을 준비할 때 아기 안은 여자 몇과 아이들이 나타나 구걸을 한다. 이들에게 구걸은 부끄러운 게 아니다, 자선을 베풀 기회를 주어서 고맙게 여기라는 거다. 그래서 받는 게 당연하다. 4천년이나 내려온 풍습과 카스트 계급, 잠시 지나며 인도를 이해할 수는 없다. 10루피 한 장을 소녀에게 주었다. 차에 오르며 뒤돌아 본 호텔은 이렇게 낡은 호텔에서 밤을 보낸 게 처음이란 생각을 갖게 했다. 후덥지근한 공기와 더위가 온 몸을 칙칙 감고, 앞자리에 앉으면 온몸으로 햇살을 받아 어찌나 따가운지, 이게 인도의 여름이다.
델리에서 심라까진 370km이다. 더위 탈출이다. 점심은 뙤약볕이 내리 쬐이는 고풍스런 호텔에서 란과 샐러드, 인도음식이 푸짐하게 나와 배를 채웠다. 번개가 치고 소나기가 내렸다. 기사들은 비닐시트를 사와 차 지붕위의 짐들을 단단히 묶지만 이미 짐은 다 젖었다. 12시간을 달려 저녁 무렵에야 히마찰 입구에 도착했다. 에어컨을 꺼도 산을 오르는 길이라 시원하다. 아, 그 산길 80km정도는 내내 꼬불되는 지그재그의 오르막길이다. 우리차가 얼마나 빨리 달리는지 금방 속이 미쓱거리고 멀미가 인다. 이렇게 멀미가 시작되면 히말라야 높은 고개를 어찌 다 넘을까 걱정이 앞선다. 시크 교도인 멋쟁이 기사 씽에게 슬로우를 외쳐 되지만 그 속도가 아니면 목적지 도착이 어렵단다. 밤 10시 지옥 같은 산길을 달려 산꼭대기 심라에 도착했다. 산 하나가득 보석으로 수놓은 심라의 밤풍경, 반짝이는 밤하늘을 바라보듯 심라의 밤을 바라보았다, 호텔 정원에는 붉게 핀 장미와 시클라멘, 제라늄이 긴 길의 고달픔을 잊게 했다. 모두가 지친 얼굴들, 하지만 나무가 많은 탓인지 산 속 마을은 서늘하다. 호텔은 아주 깨끗하고 쾌적해서 여행을 온 편안함을 느끼게 한다.
심라는 파괴의 여신 깔리의 다른 이름인 shamala에서 비롯 되었으며, 1864년 영국 지배 시 하계 수도가 되었다. 당시 영국 관리들의 무더운 여름철 이동을 돕기 위해 좁은 폭의 철로를 건설하고 작은 하차를 놓아 움직였고, 그 유산이 아직도 남아 세계적으로 유명한 미니 기차노선이 승객을 실어 나른다. 시원한 이곳을 아름답게 꾸미기 시작하여 스캔들 포인트 근방의 튜더풍의 시청 건물이나 주립 박물관, 총독관저및 크라이스트 건물들은 아직도 심라를 19세기의 영국을 보는 듯 느끼게 한다.
능선위에 우뚝 올라앉은 심라는 여름철 피서뿐만 아니라 겨울철 스키나 각종 실내운동이 꽃을 피우고 능선 넘어 보이는 히말라야의 연봉들은 그림같이 아름답다. 이렇게 고도에 자리 잡은 덕에 일찍부터 영국 식민정부의 여름 별장으로 자리 잡았고, 영국풍이 강한 ‘꼴까따’ 나 ‘뭄바이’ 조차도 심라에 비하면 우중충한 런던 수준이라고 하니 그 깔끔함이 짐작되어 진다.
특히 심라의 심장 역활을 맡고 있는 The Mall지역은 사람이 많이 몰리는데도 불구하고 공기가 무척 쾌적해 인상적이다. 영국 식민지 시절에는 이 신선한 공기를 지키기 위해 바퀴달린 모든 교통수단을 금지 시켰고, 인도인 조차도 출입을 엄격히 금지시켰다고 한다. 그런 관계로 물가도 비싸고 인도 내에서도 부유층의 별장지역이기 때문에 배낭 여행자라면 4-6월은 피하는 게 좋지만 휴양지 분위기를 만끽하려면 이때가 최고라고 한다.
우리가 묵은 호텔은 뷰호텔, 커피보트까지 세심한 배려가 엿보이는 일류급 호텔이다. 아침 일찍 6시에 마을로 나갔다. 큰 전나무 숲길을 따라 가니 작은 광장이 나왔고, 이른 아침 가게 문을 여느라 바삐 움직인다. 안개에 쌓인 시야에는 계곡을 따라 수많은 집들이 바위위의 따개비 처럼 빼곡히 들어 차 있다, 키 견주기라도 하는 듯 거대하게 똑바로 자란 전나무는 10층 건물보다 더 높다, 잘 닦여진 산책로, 시원한 나무 그늘 밑에서 요가를 즐기는 사람들이 눈에 띈다. 신선한 공기와 색색의 예쁜 집들, 그리고 안개에 덮힌 연봉들이 갑자기 우릴 산속에 감금시킨 기분이 든다. 하지만 아늑하고 지극히 평화롭다. 아침 8시 토스트, 달걀, 씨리얼로 아침식사를 하고 된장고추로 입가심을 한 다음 우리 4호차 기사인 씽과 4명의 샘. 맨 앞자리의 기자님, 기념촬영을 마친 후 사라한으로 출발 했다. 높은 고도라 에어컨을 켜지 않아 문을 열자 흙먼지와 매연이 고스란히 콧속으로 돌진한다. 무슨 트럭은 그리도 많은지 추월을 해도 끝이 없이 밀려온다.
천상의 마을 -사라한 2165m
심라에서 179km를 달렸다. 천길 낭떠러지 길을 달리고 달리며 먼지를 수없이 뒤 집어 썼고, 외길에서 앞차와 교차 시엔 뒤나 옆을 보기가 두렵다. 자칫 아차하면 ‘이 세상이여 안녕’을 고해야 한다. 오후 4시 40분 해발 2708m의 아름다운 마을 나르칸다를 거쳐 옛날 티벳으로 가는 대상로에 위치한 강변마을 람푸르를 지나 목적지인 사라한에 도착했다. 푸른 숲이 울창한 계곡은 눈부시다. 사라한으로 오르는 언덕길은 뒤틀리며 꼬불거리는 좁은 산길이다. 길가에는 가지가 휘청이도록 열린 사과와 작은 집과 별장과 이랑밭들이 이어진다. 호텔(서리칸드르)은 녹색 지붕에 아늑한 시골 별장 같은 느낌, 텐진과 치링 (네팔인쿡)은 마당에 짐을 풀고, 우리는 방에 들어 가자 마자, 와!하고 탄성을 지른다. 우리가 올라온 저 아래 골짜기와 맞은편 산비탈과, 구름이 걸쳐진 봉우리들이 구름사이에서 파노라마처럼 쫙 펼쳐진다. 지상에 이렇게 멋진 베란다의 풍경이 또 있을까, 건너편 산자락에는 흰색 천을 걸쳐 놓은 듯 세찬 물줄기를 내 뿜으며 수많은 폭포들이 흐른다. 해발 3천미터의 산은 여기선 동산에 불과하다는 사장님의 말씀이 실감난다.
저녁식사 전까지의 시간이 여유로워 마을 산책을 하기로 했다. 마을 공터에서 동네 사람들과 얘기도 나누고, 양고기집, 슈퍼, 과자파는 집도 보고 사진도 찍고 만나는 이마다 예쁜 미소로 반기는 모습이 우리네 시골 같다. 또 아이들의 눈망울은 왜 그리도 초롱한 지, 5시20분 목조 힌두사원인 비마깔리 사원으로 갔다. 힌두 사원이지만 안에는 부처를 모신 사원이다. 지붕들은 얇은 돌로 덮어 강원도의 너와지붕 같다. 인도 대평원의 거대한 석조 힌두사원에 비하면 그 규모에 있어 약간 초라한 듯 하나 산 속의 또 다른 형식의 힌두사원을 보는 재미가 특이하다. 문은 꽃과 물고기로 장식되어 있고 금빛칠을 한 사원은 녹색의 배경 속에서 우뚝 솟아 당당함을 보여준다. 나이와 상관없이 머리를 길게 땋아 늘인 여자들의 머리숱이 탐스럽다. 문명사회에서 기를 쓰며 살아가느라 머리카락을 잃어버린 우리들은 그 머리를 부러워한다. 사원 안에 들어가려면 남자는 힌두모자 여자는 스카프를 쓰고, 신발을 벗는다. 아름답고 고풍스런 지붕과 나무와 돌로 된 지붕은 정겹다.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우리와 마찬가지로 울고, 웃고, 먹고 걱정하고 죽는다는 사실이 이곳에선 느리게 흐른다. 적게 먹고 단순하게 정을 나누며 사는 삶을 신은 원했으리라. 진정한 삶의 모습을 이곳에서 만난다. 해가 진다. 구름 사이로 보이는 석양이 곱다. 인도식 저녁에다 한국식 반찬이 곁들여진 푸짐한 저녁을 먹으며, 그제야 서로가 인사를 나눈다.
아침, 개울물 소리처럼 쏴쏴 거리며 비가 내렸다. 공기가 싸늘하다. 높은 산봉우리엔 흰 구름이 걸쳐있고, 진녹색 계곡엔 흰 구름이 드문드문 막을 드리운다. 깊은 풍경을 담고 다시 길을 나선다.
삭막한 히말라야의 능선을 따라-(레콩페오-칼파)
사라한에서 칼파까지107km의 여정은 한가롭게 시작된다.8시 10분 골짜기를 흐르는 강물을 따라서 절벽은 이어지고 그 길을 위태위태하게 차는 달린다.비에 젖은 땅은 질퍽하게 울퉁 거리고 마주 오는 차들과 아슬하게 비껴날 땐 외마디 소리가 절로 난다. 강변 마을은 그림같이 아름답지만 쳐다보면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만 같은 바위동굴과 수 천리 절벽도로가 끝없이 펼쳐진다. 골짜기 위에 걸쳐진 다리는 차가 지나면 기차소리 처럼 덜컹거린다. 한 번에 한대만 지나가라는 경고가 적혀있다. 다리 하나 지나면 길이 갈라지고 갔다 되돌아오기를 몇 번 도로 표지판은 전혀 없다. 따가운 햇살을 받으며 도착한 칼파 산 아래 마을 레콩페오2290m 에서 모두 내렸다. 내일부터는 민간인 통제구역으로 들어서기에 서류 수속이 까다롭다. 층층이 돌계단으로 이루어진 마을의 시장 앞엔 관광객과 현지인으로 북새통을 이룬다. 싹 닦아놓은 푸른 하늘엔 무심한 흰 구름만 두둥실, 왜 그리 높은 곳에 집을 짓고 사는지, 척박한 자연 속에서 푸른 하늘을 이고 신을 향한 염원으로 나날을 지탱하리라, 인도에선 땅은 거져고, 철저한 공동생활을 운영하므로 거리가 멀다 해서 낙오되거나 왕따 되지 않는다고 한다. 2시 반에 점심을 먹고 통행증 발급을 위해 다시 사무실로 내려갔다. 정전에다 프린트기 고장으로 엄청 기다려야 한단다. 열 서너 명의 건장한 독일 청년들은 오전 10시부터 기다렸다며 기타를 치며 느긋하다. 아무도 서두르지 않는다. 장기자님께 헬레나 호지 여사의 ‘오래된 미래’라는 책을 빌려 읽는다. ‘라다크’ 그 곳엔 분이 필요 없는 곳, 이 거대한 자연의 흐름 속에 영원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그들은 안다. 5시 반이 넘어서야 우리 차례가 되었다. 한사람씩 열악한 사진기로 사진을 찍고, 개인 카드에 싸인을 하고 무사히 수속을 마치고, 어두운 저녁 앞이 안 보이지만 비포장 도로에 물건처럼 나뒹굴면서 칼파로 향했다.급경사의 길을 차는 용케도 잘 올라가 7시 5분 롯지에 도착한다. 큰나무들이 호텔을 외워 싸고 있고 길 양편엔 사과나무가 아이 주먹 만한 사과를 주렁주렁 달고 있다. 저녁은 현지에서 산 닭으로 백숙을 해 준단다. 하지만 호텔 내에서 취사가 어렵기에 바람 부는 밖에서 닭죽을 끓이느라 치링은 렌턴을 비추고 텐진은 불을 지피면서 엄청 고생을 하는데 둘의 입가엔 미소가 떠나지 않는다, 칼파(2960m)는 힌두교의 가장 강력한 신인 시바의 겨울궁전이 있어 시바신이 이곳에서 하사시를 피우며 느긋하게 한 겨울을 지냈다고 한다. 마을 맞은편엔 해발 6050m의 킨너 카일라시라는 거대한 히말라야 암설봉이 버티고 서 있어 경치가 매우 아름다울 뿐 아니라 주변에는 포도원이 산재해 있어 갓 따낸 싱싱한 사과, 자두등을 먹을 수 있다. 아침 9시 구름에 가려진 설산을 뒤로 하며131km의 타보로 향한다. 우리는 다시 레콩페오 골짜기로 내려간다, 굳이 높은 곳에서 묵는 것은 경관도 좋고 고도 적응을 위해서다. 오늘은 장기와 양탕(3662m),숨도(3230m)를 거쳐 타보(3050m)에서 묵는다,3천에서 숙박은 처음이다 점점 고도가 높아진다. 저 산을 다시 볼 수 있을지, 신의 뜻에 맡기리라.
히말라야의 아잔타-타보(3050m)
고도에서는 금방 배가 고프다, 이곳의 산들은 잿빛 바위 벼랑들이다. 가도가도 마을은 없고 진흙탕 강물이 빠르게 흐르는 다리를 지나자 가게와 몇채가 나온다 오후 1시, 차를 세우고 점심을 주문했다. 여기가 아니면 먹을 데가 없단다, 파리는 날고, 부엌이 무척이나 불결하여 넘어가지 않아 먹지 못했다. 양고기 만두다, 질기고, 피는 두껍고, 아침에 먹다 남은 고추장에 싸온 밥을 비벼 몇 숟갈씩 나눠 먹었다. 양탕고개를 넘기 전 유실된 길이 나왔다, 만년설이 녹아 밤사이 길이 사라진거다, 우리는 차에서 내려 물을 건너고, 돌들이 튀어나온 길을 차들이 차례로 건넜다. 타보라고 하여 제법 크리라 생각했건만 마을이라고도 하기엔 무색할 정도로 작은 마을이었다. 산아래 작은 토굴들은 기도 도량이고, 마른 풀로 덮흰 네모난 집은 변소가 아니라 집이었다. 산자락에는 밤엔 얼고 낮엔 녹아를 반복 느슨했던 바위들이 흘러내려 모래썰매장이 되었다. 그래도 빙하가 녹아내린 물은 사막에 나무를 키우고, 보리나 밀을 키운다. 파릇파릇해진 목초지엔 염소 떼들이 풀을 뜯는다. 신의 축복이다. 먼 산 밑엔 밀밭이 있고 지붕위엔 따가운 햇볕을 막기위해 건초를 얹었다. 건초는 겨울철 당나귀의 먹이이다. 사람들은 작은 키에 갈색피부이다. 뜨겁고, 메마른 땅에서 오랜 세월 살아온 그들의 손은 주름이 졌고, 얼굴은 햇볕에 그을렸지만 미소만은 수줍고 해맑았다. 우리 방은 4명이 사용하는 가족실이라 배샘, 심샘이 같이 쓰고, 난 노샘하고 같이 쓴다. 레콩페오에서 장시간 기다리며 먹은 닭다리가 체했는지, 고산증인지, 두통과 구토가 겹쳐 난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도랑에다 실례를 하는데 머리 위로 별들이 찬란하다. 북두칠성, 유성도 흐르고, 은하수도 소복하다. 타보의 아침, 3050m라 숨이 차다. 티벳 불교의 독특한 색채를 지닌 타보의 jal ma사원, 서기 996년 티벳 불교의 중흥을 가져다 준 위대한 번역가이자 고승인 린첸창포에 의해 세워져 1996년에 건립, 현 달라이 라마에 의해 칼라 챠크라 법회가 베풀어졌다. 타보 절은 반 지하에 진흙으로 조성된 석굴의 형태를 하고 있어 히말라야의 아잔타로 불리 우리만치 감격스러운 볼 것을 제공하는 곳이다. 더구나 천년이상 보존 되어온 프레스코 양식의 만다라 벽화는 값어치를 논하기 이전에 보는 이의 마음을 움직이리만치 고색창연하고 아름다웠다. 천년의 세월 속에서도 빛바래지 않은 선명함으로 반기는 벽화들, 천불전은 불상 뒤에 있고, 불단은 독특하다. 나무로 된 불상들도 표정과 손짓이 모두 다르다. 근엄하고 장난스런 웃음과 진지하고 무섭고 해탈한 미래불의 모습이다. 진흙으로 빚어지고 채색된 불상의 모양 또한 기품 있고 독특하여 세계 각국의 불교미술학자들을 불러 모은다. 23개의 불탑(쵸르텐)과 황금사원, 만다라, 본존불, 각성사원 바이랍사원, 미륵사원 drompton사원 백색 사원등 9개의 작은 사원으로 이루어져있으며,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어 있다. 타보 사원은 위치상 두개의 고대불교 전래 도로상에 놓여있다. 라사를 출발한 고대 티벳 불교가 창탕고원을 지나고 구개왕국을 경유하여 중앙아시아 누브라 계곡의 훈더르와 라닥의 레 왕국을 거쳐 히말라야를 넘고 라하울 계곡을 지나 이곳 스피티 계곡의 타보에 이른 길이고, 다른 하나는 라사를 거쳐 히말라야를 넘어 서틀레즈 강을 따라 내려오다가 서북쪽으로 거슬러 올라온 길 이란다. 아침에 부처를 만날 때는 사원 입구를 비로 쓸고, 생수를 뿌리고, 꽃을 바치고, 돈을 놓고, 향을 피우며 부처님 중심으로 오른쪽으로 돈다. ‘옴마니 반메흠’은 옴은 하늘을 열다, 홈은 하늘을 닫다‘란 의미이다. 만다라는
극락과 만사형통을 뜻한다.
카자로 가는 길(3600m) 타보-아타르고-카자
오후 3시 15분전 타보를 출발하여 스피티 계곡을 따라 천천히 달렸다. 카자 까지는 47km, 내일은 4551m의 쿤줌라를 넘어야 하기 때문에 고산 적응을 위해 쉬는 곳이다. 스피티 계곡은 흘러내린 모래 속에서 융기된 진흙층의 모습이 기이하다, 요정들이 사는 스머프 집 같기도 하고, 손가락을 죽죽 펼치고 있는 듯 이어지다 사라지고, 땅콩을 바른 소보르 빵모양(아! 배고파)같기도 하다. 빠르게 흐르던 서틀레즈 강은 강폭이 무지 넓어졌다. KAZA는 스피티 계곡의 행정 중심지이며 주변경치가 수려하고, 주변에 산재해 있는 키사원, 키마사원, 당카르 사원등 고대 티벳 사원 방문의 중심지로 더욱 유명하다. 5년 전에는 반자라 캠프촌이었는데 그동안 집을 지었다고 해서 롯지에 묵게 되었다,(다행) 도시락은 샌드위치와 사과와 과자등 대충 그렇다. 날자도 셀 필요가 없고, 시간을 재지 않아도 되고 흘러가는 대로 가는 히말라야 여행이다. 시간을 버릴 때 얼마나 자유로울 수 있는지, 이 특별한 여유가 홀가분하고 넉넉해서 좋다. 방은 2층, 창밖 유도화 나무가 세차게 흔들린다. 참새 한 마리 앉았다 날아간다. 물이 마른 돌투성이 너른 계곡, 황토 빛, 붉은 빛, 재색, 연한 녹빛, 갈색 ,검은색의 산 빛과, 부드러운 모래언덕 같은 급경사의 산자락들, 성벽처럼 바위들이 절리를 이루며 기묘하게 솟아 마을을 겹겹이 싸고돌아 나간다. 산엔 나무 하나 보이지 않는다. 철따라 나무들이 빛을 내는 우리와, 벗은 모습으로 여러 빛깔을 내보이는 산을 그려 담는다. 고도가 높으면 가만있어도 에너지가 소모된다. 여기 사람들은 살찐 사람 하나 없다. 마을 중앙엔 바자르(시장)가 있었다. 우리 팀도 오이(키라)를 사러 야채가게에 들렀다. 오이는 갈증을 없애주고, 즙이 많아 더운 날씨 달리는 차속에선 딱이다. 여긴 바람이 많고 추워서 여자들은 스카프를 쓴다. 바람이 어찌나 불어대는지 창문을 열어두면 모래와 흙먼지가 소복이 쌓인다. 아이의 옷, 양말 모자등 겨울 준비로 여자들은 손에서 뜨개질을 멈추지 않는다
행운의 네잎 클로버-지스파 (3142m)카자-쿤줌라-곤들라-킬롬-지스파 .
8시10분 출발 4551m의 쿤줌라와 201km의 험로가 기대되는 아침이다. 좁은 비포장 길은 도로 보수에 수없는 덩치 큰 오일 차가 마주 오면 먼지와 울림으로 미칠 지경이다. 과자 봉지는 기압으로 복어배 처럼 탕탕불어 볼록하다. 만년설과 빙원이 보이는 아스라한 협곡에 깊이 패인 바위 벼랑길이 아찔하다. 12시가 다 되어 쿤줌라에 도착했다. 팔랑거리는 색색의 천조각 파르초들과 녹색 불탑이 보인다. 4551m의 고개에서 사람들은 기원을 드리고 산을 내려간다. 소망을 담은 파르초를 매달 때마다 기원도 하늘에 매달린다. 신에게 기대지 않으면 히말라야의 삶은 이어질 수 없으리라. 천막 두어 채가 있는 시냇가 골짜기에서 먹는 김치 비빔밥, 누가 이보다 더 맛있는 밥을 준비할 수 있을까, 스피티 계곡 137km시작의 안내표지판을 지난다. 웅장하고 험준한 계곡을 빠져 나오면 포장길이 잠시 나타난다. 반대편은 델리로 가는 길이고 다른 쪽은 마날리로 가는 길이다. 레,360km 표시가 있는 마지막 주유소에서 기름을 넣기 위해 줄을 섰다. 두 길이 합쳐진 이 길엔 유조차, 오토바이족, 트럭등 차들이 많다. 중간 휴게실에서 짚여행을 하는 가족이 있어 그들의 여유가 부러웠다. 가장 멋있는 건 자전거나 오토바이 하이킹을 하는 연인들이다. 11명의 벨기에 할아버지들 팀 속엔 금발의 할머니도 한분 끼었는데 아름다운 노년을 보내는 것 같아 눈낄이 갔다. 매연과 먼지를 뒤집어 쓰며 7시에 지스파에 도착했다. 강변에 위치한 호텔은 크로바로 덮혀 있고, 창문 너머 밭엔 분홍빛 감자 꽃이 만발했다. 길가엔 세월의 풍파에 지친 늙은 가로수가 구부정한 모습으로 길을 지킨다. 함석을 입힌 삼각형 모양의 지붕은 햇빛에 반짝거린다. 3층 방까지 계단을 올라가려니 머리가 흔들거린다. 빵구떼우고 어두운 길을 해매 오느라 저녁 9시가 넘어서 5번차가 도착했다. 2시간이나 밤길을 해맸으니 난리가 날 수 밖에, 식사도 하지 않고 삐져서 침대에 널부러졌다. 텐진과 치링이 누룽지를 갖다 바쳐도 황언니와 이언니도 화가 안풀렸다. 하지만 우린 좀 후지지만 침대는 최고로 푹신해서 모처럼 잘 잤다.
별들의 축제-사르츄 4253m
지스파에서 사르츄까진 88km, 다르차와 바바라차 라(4650m고개)를 넘어간다. 텐진과 치링은 뜨거운 차를 끓여 방으로 배달했다. 짐을 싣는 동안 잔디밭에서 노샘이 네잎 클로버를 찾아 나에게 주었다. 오늘은 분명 행운이 있으리라, 나도 하나 찾고, 하나는 혜진이 한테 빌려서 어제 고난을 겪은 두언니들에게 드렸다, 책갈피에 곱게 펴서 넣었다. 9시 10분 출발이다. 5번 기사 ‘디바’가 감기에 걸려 아침도 못 먹고 고통스러워 한다. 가는 도중 접촉사고까지 생겼다. 다르차 검문소 앞강을 가로 지른 강철 다리판이 망가져서 모든 차들이 거의 2시간이나 기다려 도강을 마쳤다. 산골짜기엔 녹다만 눈들이 하트 모양처럼 얹혀져있는가 하면 폭설에 씻겨 진 모습들이 갖가지 형태로 속내를 이야기하듯 옹기종기 모여 있다. 고개 못 미쳐 휴게소에서 북어국으로 점심을 먹고, 바바라차 고개에서 병풍처럼 펼쳐진 히말라야의 품에 안겨 사진을 찍었다. 고개를 넘어가는 곳에서 작은 호수를 만난 우라들은 탄성을 지른다. 물에 잠긴 산들은 묘한 신비감을 준다. 하늘도 바람도 산도 모두다 낮게 웅크리고 누워 숨을 죽인다. 지스파에서 사루츄까진 비포장도로다 먼지를 열 댓박을 뒤집어쓰고, 한 댓박을 마신것 같다. 옆으로 차가 비낄 땐 유리창에 흘러내리는 먼지가 콩가루를 빻는 방앗간을 연상시킨다. 콩가루 먼지를 보면 고향의 음식들이 머리를 가득 스친다. 한국 도착하면 먹어야 할 음식 목록을 열까지 정도 작성하여 서로 보여주며 깔깔 거렸다.(오죽 먹고 싶으면...,) 히말라야는 가는 곳마다 매순간 다른 모습으로 우리를 맞는다. 레는 점점 가까워지고 해발 4천고지의 초원으로 내려왔다. 맑고 푸른 하늘 아래 풀밭 위에 줄지어 선 캠프들은 바람에 펄럭이고, 이 여름의 하루를 아쉬어 하며 꽃들은 풀숲에 숨어 핀다. 2인 1실 텐트를 배정 받아 우리는 7호 천막, 침대 둘, 뒷쪽엔 양변기, 수도꼭지에선 설산의 물에 손이 시리고, 바케스는 흙바닥 위에 놓여있다. 산소가 부족하다는 것이 이 맑은 대기 안에서는 이해하기 힘들다. 서두르지 않는 공기 속에서 이 산들의 얘기를 들어보자.
식당 천막에는 우리 일행과 독일 노부부가 앉았다. 밥과 라면이 나오고 떠들썩한 식사 후 여흥의 불이 붙어 노래가 나온다 ‘인도이 향불’ 김사장님의 ‘하이 눈’ 독일인은 ‘들장미’ 로 무르익었다. 천막으로 돌아와 겨울옷에 장갑까지 꼈다. 바람이 세차다. 하지만 춥지 않다. 후레시로 대충 정리하고 별을 보기위해 나갔다. 하늘 중간을 은하수는 강으로 흐른다. 그 둘레에 무수히 반짝이는 별들, 얼마만인가 이 별들의 잔치를 보는 게, 아프리카의 ‘룽고르고루’의 별이 떠오른다. 난 별들의 축제에 초대된 사람이야. 하늘을 가득 메운 별빛에 누구의 입이랄 것도 없이 노래가 합창으로 이어지고 노래는 메아리가 되기도 전에 유성처럼 사라진다. 저 많은 별처럼 나에게도 많은 시간이 지나갔고 또 다가오리라, 어떤 건 퇴색되고 빛을 잃었지, 그러나 반짝이는 게 더 많다. 별 속의 별을 새기며 희망을 심는다. 우리가 떠난 후에도 별들은 또 그렇게 빛날 것이다. 사랑이란 인간이 누릴 수 있는 가장 큰 사치라고 했던가. 하지만 여행이야 말로 그렇지 않은가, 이 여행의 순간순간들을 밀도 높은 농축액으로 꼭꼭 눌러 담아 빛나는 별빛으로 남길 것이다.
달의 나라를 찾아-라다크(레)3523m
사루츄를 출발하면 곧 20km 길이의 지그재그 형태의Gatorloops 도로를 지나 여정 중 처음으로 5천m가 넘는 라충라(5960m)를 지난다. 라충라에서 급경사를 내려가 간이음식점과 천막숙소가 있는 Pang Camp에서 국수로 점심을 먹었다. 텐진이 만든 오이무침과 단무지는 최고의 별미, 팡캠프를 출발하여 멀지않은 곳에 히말라야 산맥 사이에 있는 해발 4703m의 모래 평원에 도달, 우리의 짚이 45km속력으로 75분을 달려야 하는 총연장70km의 거대한 히말라야 대 평원이다. 평원에는 가끔씩 ‘카리부란’이라는 회오리바람이 일어났다 사라지곤 했다. 대 평원을 지나면 세계에서 두 번째로 높은 자동차 도로 타그랑 라(5360m)를 지나게 된다. 녹색 지붕의 힌두 사원은 수많은 파르초 깃발에 안겨 지는 해를 바라보며 서 있었다. 우리는 사진 촬영과 세계에서 두번째로 높은 화장실에서 잠깐의 고독을 만끽하고 계속 내리막길을 내려 도중 700년 정도 이어지며 조성된 하얀 불탑(쵸르텐)과 어울려 경치가 수려한 미루마을, 수 억년 지각변동으로 조성된 Ratto마을의 지층 Folding을 눈에 담았다. 폴딩은‘ 반지의 제왕‘에 나오는 호빗족의 집 같기도 하고 동화속의 요정의 집 같기도 한데 쳐다보면 상상속의 요정들이 나올 것 같은 착각이 들곤 했다. 겹겹이 쌓인 바위들의 휘어진 모양과 색깔의 조화가 신의 솜씨임을 말해 준다. 앞이 안보이게 부는 모래 바람과 모래 평원을 지나고 끊어진 길 때문에 로데오를 하는 것처럼 뛰는 차를 11시간 넘게 달려(254km) 어둑어둑한 시간 저녁 8시 자잘한 분쟁이 끊이지 않는다는 잠무 카시미르주에 도착했다. 내가 생각한 Lth'는 시원한 물이 넘쳐나고 푸른 나무들의 가지가 늘어진 푸른 풀밭에 하얀 집들이 정답게 얘기하고, 이국적인 냄새가 넘쳐나리라 여겼다. 따뜻한 눈빛에 싱그러운 미소, 늙지도 않고 병들지 않는 아름다운 설산속의 샹그릴라를 꿈꾸웠던 나, 하지만 레 입구는 거대한 군부대 지역으로 가도가도 철조망에 총을 든 군인들의 검문으로 살벌 그 자체였다. 창탕지역에서 발원한 인더스의 강물은 빠르게 도시 앞을 내달린다. 먼지이는 좁은 골목길, 다닥다닥 붙은 상가와 개, 당나귀, 양들이 어슬렁거리고 그 사이로 호텔을 찾느라 한참을 헤맸다. 라다크의 리모 호텔에 여장을 풀었다, 호텔은 입구 안쪽에 사각형의 정원이 있고 그 둘레로 객실과 식당이 있었다. 중국풍 같기도 하고 티벳풍 같기도 한데 오래되어서 종가집 곳간 열쇠같은 26호실 열쇠를 받아들고 들어가니 낡고 오래 되어 삐그덕거린다. 라다크는 티벳어로 ‘산넘어’라는 뜻이다. 1년에 8개월이 겨울이고 영하 20도가 넘는 기온 때문에 일할시간이 딱 4개월 뿐이다. 야크를 몰아 밭을 갈며 흙과 물의 신령들께 ‘하나의 씨앗에서 백개의 씨앗이 나오고 모든 곡물이 쌍둥이가 되게 하소서’란 노래를 바치며 티없이 살아간다. 또 달의 표면을 닮아 ‘달의 나라’라고도 불리우며 평지의 절반은 사람이 살 수 있는 생존의 극한 지역에 해당한다. 마을인들은 4-5대가 한집에서 살며 마을의 구석구석은 티벳 불교의 산물로 가득하다. 집들은 황량한 산비탈에 요새처럼 붙어 있다. 이들의 생활에서 라마승은 없어서는 안되는 끈끈한 존재로 추수할 때나, 집터를 잡을 때, 조상의 영혼을 기릴 때, 결혼식과 같이 중요한 행사때마다 그들이 있다. 2층 창에서 내다본 정원엔 보랏빛, 빨강, 노란 꽃들이 수줍게 피어 있고, 키 큰 미루나무는 멀리 병풍처럼 마을을 에워싼 설산과 키 견주기라도 하는 듯 하늘을 향해 수문장처럼 버티고 서있다. 주위는 온통 앨로우 모래빛이다.
(잃어버린 왕국-레(3523m)
레는 작은 도시이다. 언덕에는 사원들이 있고 하얀 불탑들이 공동묘지처럼 모여 있다. 레는 카시미르 왕국과 중앙아시아 발타스탄의 지배를 받았고, 16세기경 라닥의 싱게남걀 왕조가 탈환, 17세기 영국령이 되었으나 풍습과 종교 문화는 티벳 그대로다. 1962년 인도와 중국 간 국경분쟁으로 일어난 라다크 전쟁, 그로부터 해발 6천m가 넘는 시아첸 빙하위에는 양국전초기지가 주둔하고 있으며 일주일에 150만 달러 국방비를 지출 한다. 계곡 주변에는 수많은 불교 사원과 인도 북부군 사령부기 있으며 남서쪽엔 히말라야, 동북에는 카라코름 산맥이 버티고 있다. 스스로를 라닥키라고 부르는 대부분의 주민들은 몽골로이드 티벳계 혈통이며 아리안계몬족과 다르드족이다. 인사말 ‘쥴레쥴레’는 라사어로 ‘타시딜레’다. 서부 티벳의 구게왕조와 라닥왕조는 형제왕국이었지만 당나라와 어깨를 마주하며 중앙아시아의 패자로 군림하던 토번왕조는 9세기에 후계자를 놓고 당다르마 왕이 암살되면서 파국을 맞게 된다. 손자 니마콘은 수하를 데리고 서부 티벳으로 달아나 지방호족과 연합하여 다시 왕국을 세웠고 말년에 큰아들에게는 라닥지방을, 둘째에게는 왕국의 근거지인 포랑지방을, 셋째에게는 싸파랑 지방을 주었다. 그 중 막내 데죽콘의 후예들은 싸파랑을 중심으로 구게왕국을 세워 인도에서 고승 아티사를 초청하여 찬란한 불교문화를 이룩하였고, 암흑기에 들어 있었던 서역고원에 불교사의 ‘후흥기’를 이룩하였다. 큰아들 페지콘은 히말라야를 넘어가 인더스 중류의 레에 도읍을 정하고 원주민과 연합하여 불교를 통치이념으로 한 라닥왕조 리마콘을 시조로 구게왕국과 라닥왕조는 형제관계를 이어 내려왔지만 17세기에 두나라는 원수지간으로 변한다.
구게 왕조는 왕족과 승단간의 알력으로 분열되고, 라닥왕조는 유명한 셍게 남걀(1590-1620)사자왕은 쟘양남걀과 레를 점령한뒤 이슬람화된 발률국의 공주 카툰과의 사이에서 극적인 로맨스에 이은 사자꿈의 태몽으로 태어나서 후에 불세출의 영웅으로 전설화된 인물이다. 그는 등극후 국력을 길러 구게왕국을 함락시키고 레의 초원을 덮을 만큼 많은 야크, 양, 염소, 말등을 데리고 라닥으로 개선한다. 라닥은 남걀왕조라는 이름으로 게룩파의 티벳 불교를 받아들여 크게 번성하면서 근대까지 몽골 이슬람 중앙티벳과 전쟁을 벌이며 독립을 유지하다가 신생 인도에 편입되었다. 현재 남걀왕조의 후예는 비록 통치권은 현 인도 정부에 이양하였지만은 여전히 주민들에게는 상징적인 국왕으로 대접받으며 레 인근의 Stock궁전에 거주하고 있다.
레에서 첫날 달린 길은 100km, 우리 기사 부초 아저씨는 멕시코 모자에 체격이 건장하고 배우처럼 인물이 빼어난 신사였다. 영어는 거의 통하지 않는다. 차가 출발하여 시장거리에 서자 일행들이 쪼르르 내려 채소를 사고 흥정한다 우리도 양배추와 당근을 샀다. 원나라의 쿠빌라이는 레점령에 실패하자 마르코폴로를 앞세워 협상에 나서고 레의 종교를 받아들인다. 레는 비로자나불을 모신다. 비로자나불은 빛으로 형상이 없다. 불교의 서역은 인도가 아니라 이집트 나일강이다. 나일은 빛으신 라를 모신다. 라마불교 비로자나불은 대적광전에 모신다. 고려말에 우리나라도 티벳불교가 들어온다. 해인사도 대적광전이다. 몽골도 원의 침략으로 라마교를 믿게 됬다. 레는 히말라야 북부 인도 골짜기 그리고 중국의 청해성과 운남성까지 세력을 넓힌다.
틱세이 곰파(사원)는 점심시간 1-2시까지는 입장할 수가 없어서 호텔에서 준비해온 도시락을 먹으며 입장을 기다렸다. 사원은 산기슭을 타고 흰 집들이 한 채씩 지어져 올라간다. 아래쪽은 넓고 위로 갈수록 좁다. 포탈라 궁전같이 생겨 라닥의 포탈라라 불린다. 붉은 지붕과 갖가지 색으로 채색 된 처마는 푸른 하늘을 머리에 이고 인더스강에 발을 담그고 꿋꿋하게 서 있다. 신발을 벗고 사원 안으로 들어가니 3층 높이의 미래불이 있다. 손바닥 안이 내 침대 크기이다. 사방에는 히말라야가 버티고 있어 시야가 가히없이 넓게 펼쳐진다. 남자들의 장업한 불경소리가 음악처럼 낮고 굵게 퍼진다.
인더스 강을 건너 골짜기로 들어서니 헤미스 사원이 나온다. 보리밭 사이로 난 길가에 군데군데 불탑이 종종 서 있다. 거대한 붉은 바위산자락에 헤미스가 앉아있다. 이사원은 라닥 불교의 총본산이고 2천년 넘는 역사를 지닌다. 3650m의 좁은 골짜기에 세운 사원은 서양인 이사가 공부한 곳으로도 유명하다. 19세기에 러시아 박물학자 니콜라이 로에리치가 대원 60명을 이끌고 탐험을 떠나 이곳에 도착할 때 생존자는 6명 그는 헤미스 사원에서 서양인이사 이야기를 듣고 그를 예수로 서방에 알리자 지금까지 끊임없이 세인들의 관심을 끌어 모으고 있다. 헤미스 목조사원은 800년전 못을 전혀 사용하지 않고 건축하였다. 회랑 벽화는 색채가 그대로 남아있지만, 이 귀중한 보물들이 헤손되는 게 아쉬웠다. 사원마당은 고전의 풍경을 연출한다. 연한 코발트빛 하늘은 고개가 아프도록 쳐다보게 한다. 헤미스 곰파를 서둘러 살펴보고 3시 반쯤 호텔로 돌아왔다. 오후엔 레 왕궁을 살펴볼 예정이었으나 수리중이라 취소하고 그대신 전통의상을 입은 라닥 여인의 스케치 시간을 갖기로 했다. 호텔위쪽은 쇼핑로여서 간단한 캐시미어 스카프와 액세서리등을 구입하고 5시에 스케치시간을 가졌다. 원래는 호텔안마당에서 하기로 하였으나 모델이 많은 사람들이 통행하여 부끄럽다고 실내에서 하였다. 모자는 헤라크라고 하는데 라닥 여자들의 부를 상징한다. 모자에서 허리까지 구슬장식인데 무게가 5kg에 달하고 고가이며 결혼식이나 중요한 행사 때 입는데, 원래는 귀족들만 입는 옷이란다. 얼마나 수줍어하는지 1시간동안 사진과 스케치를 하고 한 장을 선물했는데 이름은 ‘링 디스켓’이라고 영어로 싸인을 해 주었다. 다음날 오후 4시 햇빛이 아주 강렬하다. 우리는 옆방 배샘과 심샘 넷이서 레왕궁을 보러 갔다. 왕궁은 아까울 정도로 불에 타 페허가 되었다. 입당료 100루피 500루피를 건네니 100루피를 깍아 준다. 안내받은 곳은 절, 오래된 책들이 서가에 꽂혀 있고 승려 한분이 부처를 지키고 앉아 계셨다. 역사책이냐고 물으니 부다 히스토리라고 하신다. 계단을 오르는데 보수중이라고 하지만 아무것도 없고 불탄 서까래와 흙벽만 앙상하다. 하지만 왕궁의 창문으로 내다본 레 시가지는 눈에 확트일 정도로 모든 집들이 엎드려있다. 한눈에 들어오는 레 시가지는 선명하고 아름다웠다. 예전의 화려함은 사진 속에서만 잠들어 있을 뿐 돌아보는 발길이 애잔해진다. 세상에 어떤 궁전이 이토록 피폐한 모습으로 공개되고 있을까, 또한 가슴 아픈 감동이다. 새 건물 안쪽에 예전의 모습을 담은 사진 전시실을 마련해 두었다.
알치와 달의 나라-라마유르
11세기에 티벳의 대 번역가인 린첸 창포에 의해 세워진 알치사원은 프레스코 벽화와 탱화로 유명하다. 8/4일 월요일 8시 40분 알치를 향해 출발했다.
티벳 본토가 홍위병들에 의해 모든 종교적 예술품이 사라진 이후에도 인도령내에 있는 문화유적들은 인도 정부의 문화유산 보호정책에 의해 다소 훼손되거나 사라지긴 했어도 제작 당시의 모양과 색깔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어 일본의 사진화집에 실린 만다라는 타보와 알치 사원 것이 80%를 차지한단다. 차는 산위로 올라가 넓은 고원지대를 달려간다. 128km 이동거리이다. 비가 조금씩 내린다. 가파른 고개를 내려가는데 차가 미끌린다. 경관은 갈수록 장관이다. 레의 삭막함을 벗어나 시원스런 미루나무가 하늘을 찌를 듯 푸르고, 눈부신 설산과 히말라야와 도도히 흐르는 인더스 강이 어우러진 알치는 레에서 스리나가르 방향으로 70km떨어진 곳에 위치한 작은 마을이다. 알치사원의 역사는 900년 정도, 1,2,3층 구조로 이루워졌고, 임장권을 끊고 입구가 낮아 고개를 숙이고 들어가면, 중앙엔 불교심볼, 오른쪽 문수보살(지혜), 왼쪽 관세음보살, 중앙뒤엔 미륵보살의 조각상이 모셔져 있고, 삼면의 벽엔 아이 주먹 크기만한 원안에 부처가 지금 막 그린 듯 선명한 색깔로 그려져 있는데 천불이란다. 세련되면서도 그 정교함이 아잔타와 비교될 정도, 2층엔 만다라가 7개, 3층 4개, 자연 채광의 건축법을 썼다. 카시미르와 간다라 미술의 적절한 배합을 통해 각각의 독특한 아름다움을 살렸다는 평을 받는다. 주변은 살구나무가 많아 노랗게 익은 살구가 주렁주렁 달려 우리의 입맛을 달래주고, 계곡엔 맑은 물이 넘친다. 라다크의 오지 마을 중에서도 알치는 아름다운 경관을 자랑하는데다 다른 도시들의 곰파가 높은 언덕에 있는 것과는 달리, 평지에 세워져 눈낄을 끈다. 평지에 있는 관계로 눈에 띄지않아 파괴되지 않고 잘 보존 됬다는 것이다. 사원은 여러 채의 집으로 비좁게 이어진다. 외벽은 흰색이라 밖에서 보면 보통 집처럼 보였다.
라마유르 사원은 중앙아시아나 티벳으로부터 서쪽 카시미르나 남쪽 마날리를 거쳐 인도 펀잡으로 향하는 고대 실크로드 선상에 위치하고 있어 사원 바로 앞으로 지나는 실크로드의 옛길을 직접 볼수 있고 걸을 수 있다. 라다크가 달의나라 라고 하는 증거가 남아 있는 곳이다. 레에서 서쪽으로 125km 떨어져 있다. 맑은물이 콸콸 흘러 폭포를 연상시키는 휴게소에서 점심도시락을 까먹고 라마유르로 향했다. 고개를 오르는 찻길은 점점 가파르고 거대한 진흙더미 같은 둥근 골짜기가 나온다. 나무 한그루 없고 폭포처럼 흐르던 물 한방울도 없는 척박한 산등성이 위에 그림처럼 서있는 라마유르 곰파는 왜 이런 오지에서 그토록 신을 염원했는지, 깊이 생각하게 했다, 그래서 더 신비하고 아름다웠다. Moon Land라는 애칭으로 불리는데 밑에서 고개가 떨어져라 쳐다보면 거대한 성벽을 쌓은 것처럼 보이다가 위에 올라가 내려다보면 유난히도 그 부분은 밝고, 달의 모양처럼 움푹 패여 달이 떨어진것 같이 보여서란다. 사원은 인도 비하르주에 있는 날란다 대학의 마지막 학장 나로빠가 10세기 말경에 방문해 토굴 수행을 통해 도를 이루었다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면서 신비롭고 인상적인 곳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라마유르는 레와 스리나가르 사이에 있기 때문에 레에서의 이동은 편리한 편이다. 저녁 미국 뉴저지에서 온 행자언니의 생일이다. 외국인 단체들과 같이 한 식당에서 생일축하연을 베푼다. 맥주가 전부다. 자꾸 정전이 되었지만 그것마저도 깜짝쇼가 되어 우리와 외국인들이 번갈아 가며 노래를 불렀다. 노래는 10시까지 밖에서도 이어져 다른 투숙객들에게 미안한 감도 있어 아쉬운 흥을 접었다.
나의 샹그릴라-훈더르 (3048m)
8월 5일 레에서 카르둥 라 (5602m) 가장 높은 고개를 넘어서 칼사르 (3018m)를 지나 디스켓(3080m)에서 훈더르로 오늘 일정은 125km이다.
아침에 일어나니 하늘엔 구름이 낮게 드리워져 있다. 레에 비가 오면 카르둥 고갯길엔 얼음이 언다는데 자동차가 미끄러지지 않을까 걱정스러웠다. 아침을 먹고 나자 햇볕이 쨍쨍, 큰 짐은 호텔에 맡기고 가벼운 짐만 챙겨 차에 올랐다. 사르츄처럼 높고 추울지 몰라 두꺼운 옷을 가방에 넣으며 오늘밤도 찬란한 별빛 속에서 잠들 수 있을까 가슴이 설렌다.
세계에서 가장 높은 차도-카르둥라(5602m)
지그재그 긴 길 벼랑들은, 삐죽한 바위 덩어리들이 천지를 이루고, 떨어진 차들은 해골처럼 앙상하게 뼈대만 남았다. 여기서 사고는 곧 죽음이다. 견인도 할 수 없다. 그 와중에도 바위틈에 탐스럽게 핀 보랏빛 꽃들은 감탄을 자아내게 한다. south pullu라는 검문소가 나오고 이때부터 고도가 급상승하기 시작 해발 5천m를 넘어가면 한여름인데도 불구하고 도로에 진눈깨비가 쏟아졌다. 2시간 남짓 달려오자 세계에서 가장 높은 자동차 도로라는 타이틀이 붙은 카르둥라에 도착 했다. 우리는 8월의 화이트 크리스마스라는 낭만적인 감상에 빠져 흥미진진하기만 했다. 차와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루고 바람은 너무 세차 날려 버릴 듯이 분다. 목도리 장갑에도 짧은 순간 셧더를 누르는데도 손이 시리다. 군부대, 찻집, 간이주유소, 화장실 ,세계에서 가장 높은 고개임을 알리는 표지판 앞에서, 한 컷씩, 우리말고도 줄을 서서 기다리는 사람이 너무 밀리고 한발만 때도 뒷 골이 패고 숨이 가프다. 산정상은 안개에 쌓여 보이지 않는다. 끝없이 이어지는 설산과 봉우리들이 눈과 마음을 붙잡고 그 세찬 바람에 신이 난 파르쵸들만 기쁨의 춤을 춘다. 차들이 밀려 서둘러 길을 재촉했다. 누브라 밸리를 향해 내리막길을 달린다. 살포시 얼음이 깔린 도로들, 내려다보면 천길 낭떠러지, 자칫 바퀴가 미끄러지지 않을까 가슴이 조마조마한다.
히말라야 설산에서 흘러내린 모래는 잘 닦여진 스키장 같기도 하고, 헐훨 타오르는 불꽃같기도 하고, 저 높은 하늘을 향해 끝없이 기어오르는 용의 꿈틀거림 같기도 하고, 계곡물에 머리를 담근 나무의 모양이다. 조금 더 내려가자 병풍처럼 산으로 둘러 처진 계곡 사이에 시야가 확 트이면서 탄성이 터지는 곳이 나왔다. Yak, 캐시미어 염소, 야생당나귀들이 한가로히 풀을 뜯고 있는 아늑하고 평화로운 계곡이다. 눈부신 흰 모래밭과 굽이굽이 흐르는 강줄기를 따라 녹색 평원이 펼쳐지고, 키 큰 미루나무 사이로 보일 듯 말듯 예쁜 집들이 나란히 서있다. 계곡 아래엔 nascar 모양의 기하학적 신비로운 숲이 펼쳐진다.
이 누브라 계곡은 칼사르를 중심으로 오른쪽엔 수모르,파나믹, 왼쪽은 디스켓, 훈더르로 나누어진다. 왼쪽 계곡 첫 번째 마을 언덕위에 우뚝 솟은 디스켓 곰파의 그림 같은 모습이 인상적이다. 디스켓이란 표지판 앞에서 Jolay'라는 인사말과 따스한 미소를 받았다. 디스켓 곰파는 건설 자체가 불가사의할 정도로 높고 험한 언덕에 자리 잡고 있어 걸어서 올라가는 자체가 곧 고행이다. 곰파 내에는 600년 된 벽화와 소상들 문서와 경전보관소인 Kang-yu lang, Tsang-yu lang이 있다. 이곳엔 세계에서 단 1본밖에 없는 불경도 있다고 한다.(보물이라고 안 보여줘)누브라 벨리를 흐르는 작은 강들은 그 해 녹은 빙하의 양과 강수량에 따라 강폭이 급변하는데, 최근에는 강수량이 점점 줄어들어 강폭이 좁아지고 있단다. 즉 강변에 쌓이는 모래의 양이 점점 늘어나 사막과도 같은 경관을 연출한다. Jaisalmer나 Sam sand에 비하면 약 4km에 걸친 사구와 모래밭이 길게 뻗어있어 그 흰 빛깔에 매료되고 만다.
디스켓에서 계곡으로 7km를 더 들어가면 아담한 마을 훈더르가 나온다. 오후 3시, 높은 산이 에워싸고 있어 느낌부터가 아늑하고 평안하다. 옥빛으로 하얗게 부서지며 흐르는 맑은 물길이 도랑물을 이뤄 마을 안을 돌아 흐르고, 개울 건너쪽 비탈에는 하얀 초르텐이 벌통모양 줄지어 서있다. 햇살은 따가워도 바람이 시원하다. 여긴 샹그릴라이다. 저 부서지며 흐르는 맑은 물에 세상 잡다한 것들을 떠내려 보낸다. 아직도 버리지 못한 것들 여기선 다 버리고 가자. 저녁식사 전 마을을 한 바퀴 도는데 이슬람의 상징인 달과 별이 새겨진 대문을 보았다. 여기가 실크로드의 마지막 귀착지 였단 증거다. 돌담 안엔 우리네 고향집처럼 상치,감자,파, 도마도가 파릇파릇 자라고 있다. 길 위엔 가끔 쇠똥이 널부러져 있었지만 귀품 있는 노인들, 정겨운 얼굴들, 까만 피부에도 순박함이 저절로 묻어난다. 혹여 우리가 이들을 오염시키는 건 아닐지, 발걸음이 저절로 조심스럽다. 개울가에 느긋이 앉아 저물어가는 산과 하늘과 냇물을 본다. 히말라야 여정은 내일이면 끝이다. 저녁 들기 전 쌍봉낙타를 타러 갔다. 30분에 300루피(한화7천오백원) 히말라야 산맥에서 낙타사파리를 하다니? 믿을 수 없지만 외국인들과 섞여 낙타를 탔다. 예전 라자스탄에서 탄 단봉낙타는 키가 크고 사나워서 무서웠는데 이놈은 발도 역도 선수처럼 튼튼하고 굵고 키도 알맞아서 영 순한 게 마음에 들었다. 낙타 등에 앉아 하늘로 고개를 돌리면 히밀리야의 설산이 한눈에 들어오고 지구상의 모습이라곤 상상하기 어려운 너무나도 아름다운 풍경 속, 천국에 서있는 감동이다. 아! 나의 샹그릴라여. 살구나무 아래에서 먹은 저녁밥은 미역국이다. 사막속의 오아시스, 이상향, 마지막 남은 지상의 낙원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18호의 천막에서 빗방울 떨어지는 소리와 개울물 흐르는 소리와 모터소리를 들으며 잠자리에 든다. 초저녁 비에 씻긴 하늘에 보석을 뿌린 듯 별들이 돋아난다. 5시반 천막위에 떨어지는 빗소리에 잠이 깨었다. 하늘은 잿빛구름이 가득하고 강과 산들은 어제의 그 빛이 아니다. 자연의 웅장함과 아기자기함과 오순도순 정다운 모습과 아름다운 경외감을 뒤로 한 채 훈더르를 떠난다. 내 인생에서 그렇게 굉장한 자연을 만난 시간도 경이였다.
리모호텔에 12시쯤 도착하여 점심을 먹었다 오후는 일정이 없어서 방에서 쉬고 저녁 돌아갈 짐을 챙기며 이런저런 옷가지를 챙겨 치링에게 주었다. 옆방 샘들도 아까워 하지 않고 챙겨 준다. 어찌나 고맙게 받는지 오히려 우리가 미안하다. 성실하고 착하게 사는 그들이 때묻지 않고 행복하게 살기를 빌어본다. 보름동안 히말라야를 넘나든 시간들이 너무 짧다. 어떻게 그 험난한 봉우리를 다 넘을까 겁도 났는데 서로 마음을 주고 염려한 길이라 즐거운 여정이었고, 행복한 히말라야의 시간이 되었다.
아침, 새벽4시 문 두드리는 소리에 잠이 깨었다. 5시에 아침을 먹는데 눈이 떠지지 않는다. 6시에 떠난다 공항까진 10분 거리, 연착한 비행기는 레공항을 7시10분에 이륙, 1시간 20분만에 델리에 도착했다. 델리의 아침은 부산스럽고 덥고 습기 차다. 더위 속으로 들어왔다. 갑자기 지옥으로 떨어진 기분이다. 훈더르가 그립다. 밤 11시 15분 비행기라 시간이 넉넉하여 사원과 국영 백화점 그리고 시장을 들르기로 했다. 델리 중심가 호텔에서 잘 구운 란과 현옥씨가 집에서 담가온 김치와 도마도를 먹었다. 맛있고 푸짐했다. 텐진과 치링은 여기서 작별한다. 큰 베낭을 등에 달고 나가는 그들의 모습에 가슴이 저린다. 텐진과 치링은 네팔인으로 우리의 여행을 도운 주방장과 보조다. 텐진은(29세)쿡이고, 치링은(37세)한국음식을 배우러다니는 보조다.(25세로 보임)텐진의 집은 네팔의 서울 카두만두에서 2일을 버스타고 2일을 걸어서 가야하는 산골에서 태어나 7명(부모님,부인 아이, 누이동생2)의 가장이요, 치링은 카두만두에서 16시간 버스를 타고 3일을 걸어야 사는 곳이 나오는 8남매(부모는 안계시고, 형4인데 1명은 가시고, 형수, 여동생2,부인)의 신혼가장이다. 아침마다 뜨거운 짜오를 끓여 모닝콜을 해주고 온갖 궂은일을 하면서도 뭐가 그리 좋은 지 입가에 싱그러운 미소를 달고 다녀서 대학초년생같이 어려 보였다. 텐진은 쿡이어서 보름에 우리돈 3만 5천원 정도를 받지만 치링은 배우는 과정이라 월급이 없고 텐진은 이 일이 끝나도 한국인 가게에서 네팔 술, 창을 만들어서 직접 서빙하며 팔아 돈을 벌지만, 치링은 이 일이 없으면 백수로 지낸단다. 그의 면티가 너무 낡아 하나 사주기로 마음먹었다 9일째 달릴 때까진 가게가 없어서 레에 도착하여 오후 면티를 사러 간 댔더니 옆방 샘들이 자기들도 돕겠다고 해서 각각 100루피씩을 모았다 면티는 우리돈 5천원. 각각 하나씩 사서 선물했는데 어찌나 고마워 하는지 우리가 민망할 정도 였다. 하지만 다음날도 입지않고 곱게싸서 방으로 가져가며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우린 선물할 사람이 있구나”하고 그의 예기를 훈더르에서 일행들께 알렸다. 우리가 도와준 것보다 그가 우리에게 준게 훨씬 더 맣음을 그는 모를 것이다. 난 물론 우리 일행 모두는 히말라야의 신비한 자연보다 더 큰 감명을 이들에게서 받았다. 항상 작은 것에 감사하는 그들의 태도와 남에게 배푸는 마음가짐, 우리도 그들에게 배운 미소로 그가 한국의 쿡으로서 성공하기를 가슴깊이 염원했다. 또 한사람 인도 사장 디루가 있다. 키가 커서 ‘꺽다리’란 별명으로 불린다. 여행사도하고 호텔도 가지고 있단다. 유머가 풍부하고 특히 일어를 잘하는데 혼자 책보고 6개월 공부했다는데 유창하다. 배가 불러서 빨리 아기를 낳으라고 우리가 보채면 웃으며 “노 프라브룸”으로 응수한다. 남인도 여행에서 처음 만나 두번째이다. 그는 우리의 고마운 마음을 자기의 가슴속 금고 속에 꼭꼭 넣어두고 있다고 말한다. 말이 없고 지적이며 갈수록 정이가고 믿음직한 사람이다. 시장 구경을 끝내고 공항으로 이동할 때 일정표를 보니 도착하는 날이 8월 8일 베이징 올림픽 개막일이다. 서울은 더위에 허덕이고 올림픽 열기까지 더해져 더욱 뜨거울 것이다. 한국을 떠나 있는 것이 ,세상일을 모두 잊고 있는 것이 얼마나 좋았는지 푸른 하늘을 바라보며 그들처럼 신이 주는 모든것으로 받아들여 은총의 시간으로 만들고 싶다. 신이 또 허락한다면 히말라야를 다시 걷고 싶고, 텐진과 치링을 다시 만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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