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 땅 경치 좋은 곳에 집을 지은 체육 선생님
김00(64세) 2020.4.23.
책방마을의 토박이 김00(64세) 씨는 고등학교 체육 선생님이었다. 묵호항이 잘 보이는 언덕에 집을 짓고 산다. 고향에 대한 향수일까. 학교 발령을 받아 이곳저곳 많이 다녔지만 다시 고향에 정착했다. 할아버지 때부터 이곳에 살았으니 이 동네의 변화상은 모르는 것이 없다.
동해시가 승격되고, 해군부대가 들어온 날짜까지 기억하고 있었다. 아버지는 철도국에 근무 하셨고 어머니는 하숙을 쳤다. 아버지는 나중에 철도국에서 나와 국수며 쌀가게를 하였다. 김00 씨는 책방마을을 표현하기를 덕장마을이었다고 했다. 집집이 마당에 건조대를 설치하고 오징어를 말려서 팔았다. 산을 둘러싸고 있는 마을이라 덕장을 설치하기에 좋았다. 그 때문에 마을에는 언제나 짭조롬한 바다 냄새가 있었다.
덕장마을이 형성된 것은 물론 고기가 잘 잡혔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인구가 많았다. 1980년 4월 1일 동해시가 개청하기 전 묵호에만 인구가 6만이었다. 주민등록에 올리지 않은 사람까지 무려 13만 명이 상주하고 있었다니 실상을 알만하다. 북평읍까지 합해 주민등록상 인구가 12만으로 동해시가
시작했다. 이 중에 대부분이 어업에 종사하는 사람이었다. 어떤 사람은 불오징어를 했다. 불오징어는 연탄불을 피워 오징어를 빨리 말리는 것이다.
오징어, 명태, 가자미 등의 식혜를 많이 했다. 냉장고가 흔하지 않던 시절이라 고기를 소금에 절이고 좁쌀을 넣어 만든 식혜를 해 먹었다. 묵호역 광장은 꽤나 컸다. 그래서 대통령 선거 있을 때는 묵호역광장에서 유세를 했다. 그리고 논산훈련소로 떠나는 병력들이 이곳에서 출발을 했다. 까까머리 병사 2천명이 이곳에서 한 번에 기차를 타고 떠났다. 그 때문에 이곳에 여인숙과 여관이 많았다. 또 입대 장병들에게 돈을 갈취하는 깡패들도 많았다.
그 때문일까. 술집도 많았다. 골목을 따라 죽 늘어선 자리가 모두 술집이었다. 하다못해 막걸리 집들도 아가씨를 데려다놓고 장사를 했다. 밤이면 집집마다 상다리 두드리며 젓가락 장단에 노랫소리가 들렸다. 일종의 유행이었다. 김00 씨는 동네의 이곳저곳을 모르는 곳이 없을 정도로 해박했다.
묵호항은 연탄을 집적하여 각 도시로 실어 나르던 곳이다. 태백에서 캔 연탄을 기차로 날라 묵호항에 하적을 했다. 그리고 다시 배로 실어 이 도시 저 도시로 옮겼다. 인천으로 향하는 배도 묵호항에서 출발했다. 학교 다닐 때 흰 운동화는 신을 수 없을 정도로 연탄 가루가 날렸다. 항만이 발달한 원인이다. 이때가 동해시를 기반으로 유명한 동부그룹이 성장하게 되었다.
김00 씨가 체육 선생을 한 것은 탁구를 잘 쳤기 때문이다. “여기 중학교 다니다가 스카웃 돼서 춘천으로 갔어요.” 처음 탁구를 시작한 것은 성당 앞을 지나가다가 신부님이 탁구를 쳐 보라고 해서 친 것이 계기가 되었다. 그때가 13살 때였다. 그러다가 전국대회에 나가서 우승을 하게 되었고, 고등학교 때는 전국에서 전승을 하고 친구들은 국가대표 선수까지 되었다. 그래서 대학을 특기생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탁구 얘기가 나오자 김00 씨는 아주 신나 했다.
김00 씨는 얘기가 끝도 없이 이어졌다. 기억력도 좋았지만 이야기도 참 잘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고향에 대한 사랑이 대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