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의 대금
조선초 편찬된 ‘고려사(1451년)의 ’악지‘에서 삼국과 고려의 음악인 향악을 ’속악‘이라는 제목으로 소개하고 있는데, 그중 ’고려속악‘에 ”대금(大琴), 구멍 열셋“이라는 기록이 있고, 여기서 나오는 大琴은 명백히 大笒을 잘못 쓴 것이었다. 이는 한국에서 오래전부터 ”笒“을 원음 ”함“이 아닌 ”금“으로 읽었다는 증거가 되는데, 대금과 중금은 모두 작은 글씨로 ”구멍 열 셋“이라 딸려 적었고 이는 고려의 대금과 중금에 취구 하나, 청공 하나, 지공 여섯 개 외에 칠성공(대금,중금,소금 등 가로로 부는 젓대 아래 끝)이 다섯 개 있다는 뜻이었다. 고려 속요 중 문인들의 풍류생활을 노래한 ’한림별곡‘에 ’적‘이라는 악기가 등장하는데, 같은 노래안에 중금이 따로 있는 것으로 보아, ’적‘은 대금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출처: 저자미상 대금의 기원과 발전)
참고: 한림별곡이란,
고려 고종 때 한림의 여러 유자(儒者)들이 지은 경기체가. 모두 8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작품은 연대가 가장 오래인 작품으로, 제작 연대는 13∼14세기 주장도 있으나 믿기 어렵고, 학계 논의를 폭넓게 수용할 때 1216년(고종 3)∼1230년 사이로 추정된다. 경기체가는 <한림별곡>으로부터 발생했다고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출처: 한민족문화 대백과사전)
고려말 이제현의 문집인 ’익재난고‘에도 ’적‘과 ’중금‘이 함께 등장하는 대목이 있는데, 이때의 ’적‘은 대금일 수도 혹은 젓대류의 총칭일 수도 있으며, 어느것인지 확실하지 않다.
조선의 대금
조선 세종때 우의정을 지낸 맹사성(1360-1438), 역시 세종때 음악개혁실무를 총괄한 박연(1378-1458), 성종때 ’악학궤범‘을 편찬한 성현(1439-1504) 등은 모두 젓대를 잘 불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훗날 세조로 등극하는 수양대군 이유(1419-1468)도 수양대군으로 봉해지기 전인 진평대군 시절 부왕(세종) 앞에서 가야금과 함께 젓대를 연주하여 부왕의 칭찬을 받기도 했다 한다.
조선초 궁중음악 백과사전인 ’악학궤범‘중 향악기를 다룬 ’향부악기도설‘에서 당시 사용된 대금의 모습을 그림 및 상세한 치수와 함께 설명하고 있는데, ’악학궤범‘의 대금은 칠성공이 다섯 개로 고려시대와 같고 지금(2개)보다는 세 개 더 많았다고 하였고, 재질은 오늘날의 쌍골죽이 아니라 황죽을 주로 사용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 전체 길이와 취구의 크기 등이 오늘날의 정악대금보다 조금 작았는데, 대금의 치수는 조선 전기부터 후기를 지나 현대로 이어지는 과정에서 점차 커진 것으로 보인다.
이어서 ’악학궤범‘에서는 중금과 소금 항목을 따로 두지 않고, 대금항목에 ”중금과 소금의 규격 및 악보도 대금과 같다라고 하였는데, 대금,중금,소금은 규격이 엄밀하게 규정된 것 이라기 보다는 대략의 크기에 따라 편의적으로 나눈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조선 궁중음악의 대금 사용은 실록,예서,의궤 등에 실린 궁중악공 오디션, 궁중제사 및 의식과 잔치, 일본 통신사에 딸린 음악인들과 관련된 기록을 통해 살펴 볼 수 있는데, 국왕의 도성 밖 행차나 우리나라 사신 전송, 외국 사신 영법 등에는 행진하는 군악대가 따랐고, 그 중 선율악기 연주자들을 ’세악수‘라 불렀으며, 세악수는 삼현육각 계열로 편성되었다.
궁궐과 중앙관청외에 지방의 관아에도 소속 악공들이 있었는데, 이들의 주로 하는 음악도 삼현육각 편성이었고 대금이 빠짐없이 들어갔다. 또 관아 악공들과 민간의 악공들 사이의 구분이 언제나 명확하지 않아, 관청행사에 민간 악공들이 차출되거나 일반 가정집의 잔치나 심지어 무속행사에 관청소속 악공이 파견되는 일도 있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관아와 민간, 중앙과 지방의 음악이 서로 영향을 주고 받고 악곡을 공유하게 되었는데, 관아와 민각 악공들의 음악은 여러 가지 형태의 대풍류와 춤 반주음악, 굿판의 음악인 시나위, 독주 기악곡인 산조 등에 자취가 남아있는데 당시 대부분의 전통악기들이 지배층과 귀족들의 전유물이어서 많은 발전이 이루어지지 못했었는데 대금은 조선시대에라도 귀족음악과 서민음악이 서로 영향을 주고 받으면서 발전할 수 있어서 다행이라 생각된다.
구전이나 기록을 통해 이름이 남은 조선시대 대금 연주자로 허억봉, 정약대, 최학봉 등이 있는데, 허억봉은 선조때의 대금 연주자이며 궁중 음악기관인 장악원의 악사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거문고 악보집인 ’금합자보‘중 적보 즉 대금악보 편집을 도운 인물이다. 정약대는 19세기 중후반 왕의 호위부대인 어영청 소속 세악수였는데, 날마다 서울 옥인동(인왕산 동쪽 기슭)의 너럭바위위에 올라라 나막신에 모래알을 가득채우고 ’도드리‘라는 곡을 한 번 불때마다 모래알 하나씩 버려 나막신이 텅 비면 그제서야 산을 내려왔다는 이야기가 전설처럼 전해지고 있다. 최학봉도 당대에 정약대와 더불어 쌍벽을 이루었던 실력파 대금 연주자였지만 기록이 거의 남아있지 않다.
1897년 대한제국 성립전까지 조선 궁중의 대금 연주는 예조산하 장악원의 악사와 악공들을 통해 명맥이 어어져 왔는데, 조선후기 궁중 잔치들을 기록한 의궤에는 당시 궁중연주에 동원된 장악원 소속 대금 연주자들의 이름과 급료 등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1897년 대한제국 선포로 장악원은 교방사에서 장악과로 또 아악대 등으로 개칭을 거듭하다가, 일제강점기 시대에는 ’이왕직 아악부‘로 격하되었고 광복후에는 ’구왕궁 아악부‘가 되었는데, 조선 장악원부터 이어져오던 궁중음악의 명맥은 1951년 국립국악원으로 이어졌고, 그밖에 민간의 풍류방들과 민속음악 현장에서도 대금연주자들이 활동하였다. (출처: 저자미상 대금의 기원과 발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