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금대>
가야와 신라의 우륵은 이곳 탄금대에서 가야금을 연주하면서 백성의 화합을 꾀하고, 나라의 품격을 세웠다. 그렇게 다져온 나라를 지키며 살다가 임진왜란을 당해 신립 장군이 이곳에서 왜군을 맞아 싸우다 전사하였다. 탄금대 명칭은 우륵이 가야금을 연주하는 곳이라는 데서 붙여진 이름이다. 아름다운 달천과 남한강이 합쳐지는 합수 두물머리가 한눈에 내려다 보인다. 여행객에는 유적과 명승 탐방이, 근처 주민에게는 휴식이 가능한 공간이다.
1. 방문지 대강
명칭 : 탄금대
위치 : 충북 충주시 칠금동 산 1-1
관람일 : 2023.10.3일
입장료 : 무료
2. 둘러보기
탄금대가 소재한 곳은 대문산이다. 주민들은 대문산을 탄금대라 부른다.
1) 소개
충청북도 기념물 제4호. 대문산(大門山)을 중심으로 남한강 상류와 달천(達川)이 합류하는 지점에 있으며, 수려한 경관과 유서깊은 고적지이다. 가야국의 악성 우륵(于勒)이 신라에 귀화하여 진흥왕에게 명성이 알려져 하림궁(河臨宮)에서 새 곡을 지어 연주하니, 왕이 감동하여 충주에 살도록 하였다.
우륵은 그를 보호하던 계고(階古)에게는 가야금을, 법지(法知)에게는 노래를, 만덕(萬德)에게는 춤을 가르치며 여가있을 때 바위에 앉아 가야금을 타며 살았다. 탄금대라는 명칭도 우륵이 가야금을 타던 곳이라는 데에서 유래한다.
또한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도순변사 신립(申砬)이 적은 병력으로 출전하여 이곳에 배수진을 치고 왜군과 대결하였으나 중과부적으로 패전하고, 부장(副將) 김여물(金如岉)과 함께 전사한 전적지이기도 하다.
탄금대에는 1953년에 세운 탄금대비를 비롯하여 1977년에 세운 악성 우륵선생추모비, 1978년에 세운 신립장군전적비, 1968년에 건립된 권태응(權泰應)의 감자꽃노래비, 1970년에 세운 탄금정과 그 밖에 충혼탑·충주문화관·야외음악당 등이 있다.
그리고 충주댐이 준공되어 호반의 관광지로 각광을 받고 있으며, 또한 탄금대 부근에 중원탑평리 칠층석탑(국보 제6호)을 비롯하여 중원 고구려비(국보 제205호) 등 귀중한 문화재가 집중되어 있는 곳이기도 하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전재)
2) 소개2
신라 진흥왕 때인 552년 악성(樂聖)으로 불린 우륵(于勒)은 가야국의 멸망을 예견하고 신라에 귀화했다. 진흥왕은 우륵을 반기며 국원(충주)에 거주하게 했다. 그리고 신라의 청년인 법지, 계곡, 만덕을 선발해 악(樂)을 배우게 하고 우륵을 보좌하도록 했다. 이런 연유로 우륵은 만년에 멸망한 가야국을 떠나 충주에 우거했다.
남한강과 달천이 합류하는 지점에 자리한 나지막한 산은 풍광이 매우 아름답다. 우륵은 이곳의 풍치를 탐미하여 산 정상에 있는 너럭바위에 앉아 가야금을 탔다. 이곳이 바로 우륵이 금(琴)을 탄 곳이라고 해서 붙여진 ‘탄금대(彈琴臺)’다. 우륵이 연주하는 가야금의 미묘한 소리는 사람들을 불러모으기 시작했고 곧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한다. 탄금대 주변에는 지금도 가야금과 관련된 지명이 남아 있다. 칠곡리(칠금동), 금뇌리(금능리), 청금리(청금정) 등의 마을 명칭은 모두 가야금과 관련된 것이다.
탄금대는 충주시 근처에 있는 대문산(108m)의 정상을 지칭한다. 산 아래로 남한강이 흐르는데 강변에 기암절벽이 형성되어 있고 울창한 숲으로 덮여 있어 경치가 매우 아름답다. 절벽을 따라 강물이 휘감아도는 탄금대는 남한강과 너른 들이 한눈에 보이는 곳에 자리하고 있다. 강줄기의 모습은 강물이 내려다보이는 벼랑에 위치한 열두대에서 가장 잘 보인다. 정상부에는 사방을 조망할 수 있는 탄금정이 있고, 동쪽으로는 계명산과 남산이 솟아 있으며 아래로는 충주 시가지와 넓은 평야지대가 펼쳐져 있다.
(김학범, 우리 명승 기행)
악성우륵선생 추모비
탄금대 노래비
탄금대 입구. 지역 시인들의 시화전이 열리고 있다.
강아지도 같이 산책
팔천고혼 위령탑
소나무길. 국민나무 소나무 길이 신립과 팔천 병사의 의기를 기리는 듯하다.
탄금대비
탄금대탑에 새겨진 탄금대기. 최남선이 지었다. 나라의 중심이고 우륵, 강수, 김생, 신립, 임경업 등을 배출한 곳으로, 문화의 원천이 되고 인재가 모이는 고장임을 밝히고 있다.
탄금정
3) 소개3 : 우륵
우륵은 가야국 성열현(省熱縣)에서 살았다고 한다. 성열현의 위치에 대해서는 지금의 경남 의령군 부림면 근처라는 설과 신반해국(散半奚國)이라는 설이 엇갈린다. 결국 그가 어떤 가야에서 태어났는지, 그에게 12현금을 만들도록 한 가실왕이 몇 대 임금인지도 분명치 않다. 다만 가실왕이 우륵에게 “모든 나라의 방언도 각각 서로 다른데, 성음(聲音)이 어찌 하나일 수 있겠는가.”라며 12곡의 악곡을 지으라고 했다는 이야기만 전한다. 이는 가실왕이 음악을 통해 가야의 여러 나라를 하나로 통일하려 했을 것이라는 해석이 가능하다.
그러다 가야국의 정세가 복잡해지자 우륵은 제자 이문(尼文 혹은 泥文)과 함께 낭성에 숨어 살며 노래와 춤을 닦았다. 그러다 그 이름이 신라 진흥왕에게 알려져 우륵과 이문은 궁에서 새 노래를 지어 연주했고, 이에 감동한 진흥왕의 배려로 국원(國原, 지금의 충주)에서 새 삶을 시작하게 되었다. 우륵은 552년 진흥왕이 보낸 대내마(大奈麻) 계고(階古)와 법지(法知), 대사(大舍) 만덕(萬德) 세 사람에게 각각 음악적 재능을 전수하였다. 이때 우륵은 세 사람의 제자를 받아 각각의 재주를 따져 계고에게는 가야금을, 법지에게는 노래를, 만덕에게는 춤을 가르쳤다.
하지만 이 세 제자는 우륵이 만든 12곡을 가리켜 “번거롭기만 하고 바르지 못하다.”라며 5곡으로 줄여 버렸다. 이를 전해들은 우륵은 처음에는 매우 화를 냈지만 곧이어 제자들이 줄인 5곡을 모두 듣고 난 뒤 눈물을 흘리며 “즐거우면서 음란하지 않고, 슬프면서도 비통하지 않으니 가히 바르다 하겠다.”라고 감탄했다고 한다. 시간이 흐른 뒤 진흥왕이 가야금 곡을 궁중음악으로 선포하고 〈하림조(河臨調)〉, 〈눈죽조(嫩竹調)〉의 2조가 생겨 가야금 곡 185곡이 남게 되었다.
우륵이 집대성한 가야 음악은 신라의 대악(아악, 궁정음악)으로 발전했다. 신라에는 전통 음악인 향악이 있었지만 가야의 음악이 훨씬 더 선진적이었기 때문이라고 하는 견해도 있다.
한편으로는 진흥왕이 멸망한 나라의 음악이라며 귀족들이 반대하는 가야의 음악을 대악으로 수용한 것은 왕권 강화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보기도 한다. 삼국 통일을 완수할 때까지 민심을 하나로 모아야 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통일 후 신라가 안정된 다음부터는 더 이상 가야 음악과 신라 음악을 구분할 필요가 없어졌다. 그 옛날 우륵이 전한 가야의 음악이 이미 신라의 음악 안에 완전히 녹아 있었기 때문이다.
우륵이 가야에서 지었던 12곡은 〈상가라도(上加羅都)〉, 〈하가라도(下加羅都)〉, 〈보기(寶伎)〉, 〈달기(達己)〉, 〈사물(思勿)〉, 〈물혜(勿慧)〉, 〈상기물(上奇物)〉, 〈하기물(下奇物)〉, 〈사자기(師子伎)〉, 〈거열(居烈)〉, 〈사팔혜(沙八兮)〉, 〈이사(爾赦)〉이다. 이 가운데 〈보기〉, 〈사자기〉, 〈이사〉의 3곡을 제외한 나머지 9곡은 당시 군현의 이름에서 따온 것으로 추정된다. 충주의 금휴포와 탄금대의 이름은 모두 우륵이 지은 12곡 가운데에서 유래되었다. (한국사를 움직인 100인)
탄금정.
지은 지 오래지 않은 정자다. 정자 이름을 적은 편액만 하나 걸려 있고, 시를 적은 현판이 하나도 없다. 우륵 아니어도 오래 전부터 있었음직한 정자인데 의아하고 안타깝다.
그래도 이 정자가 있어 탄금대를 훨씬 더 아름답게 하며, 우륵과 신립을 기릴 공간과 더불어 남한강과 달천이 합쳐지는 장관을 감상하고 휴식을 취할 공간을 제공하니 참으로 다행스럽다.
신립장군 순절지지. 신립장군은 전투에서 패하고 이곳에서 남한강에 몸을 던져 자결하였다.
열두대. 신립장군이 화살의 열기를 식히기 위해 열두번이나 올랐다는 곳이다.
탄금교, 탄금대교, 우륵대교가 차례로 보인다.
우륵 기념비
신립장군순절비각. 아래로 대흥사가 보인다.
충장공 신립장군 순절비
비문 박재륜 작성. 1981년 충주시에서 세운 것이다. 만시지탄의 감이 있지만 다행스럽다.
대웅전
궁터
야외음악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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