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업 광고는 어떤 상품을 세상에 널리 알린다는 의미이지만 지금은 그 영향력을 누구도 함부로 무시할 수 없는 강력한 문화 현상이 되었다. 신문이든 라디오든 TV든 인터넷이든 모든 언론 매체는 광고를 먹이로 하여 생존하고 번성한다. 도시 상업지구의 모든 거리는 광고의 전쟁터이고 홍수이다. 소비자는 방사선 같은 광고에 계속해서 쪼이고 관통당하며 의식화되고 세뇌 당한다. 광고 때문에 몸이 죽지는 않지만 의식은 방향감각을 잃고 흐릿해지며 몽롱해지고 결국은 그것의 노예가 된다. 광고가 우리의 생각과 감정과 판단과 결정을 지배한다.
TV의 CF(commercial film)는 정확하게 15초 동안에 압축된 자극적인 영상과 눈과 귀를 찌르는 듯한 광고 문구로 비디오 오디오 아트를 상업적으로 승화시킨 예술의 절정을 보여준다. 인터넷 포털 기사 목록의 밑단에 AD라고 슬쩍 표시된, 기사 제목으로 헷갈리게 하는 광고가 있다. 드라마나 스포츠 중계 중간 중간에 갑자기 방송 내용이 잘리고 불쑥 광고가 나오는가 하면 진행 도중에도 화면 하단에 조그맣게 구분된 별도의 화면에 광고가 계속해서 흐르기도 하고, 어떤 스포츠 중계방송은 시작하기 전과 끝난 후에 10분 가까이 계속해서 광고를 내보내기도 한다. 또한 TV에서의 정치 토론 프로그램에서 끝 무렵에 진행자가 “60초 후에 다시 돌아오겠습니다”라고 코멘트한 다음 60초 동안 광고 4편을 보내고 나서 그가 다시 돌아오긴 하는데 돌아와서 한다는 말이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좋은 하루 보내세요.”라는 작별 인사뿐이다. 그리고 다시 광고가 이어진다. 뭔가 더 이상의 내용을 기대했던 시청자들이 낚인 것이다. 오락성 토크쇼에서는 결정적인 장면이나 내용에서 갑자기 진행을 끊고 중간 광고를 내보낸다. 어떤 TV 주말 드라마는 그 자체가 상업 광고인지 TV 드라마인지 헷갈릴 정도로 거의 노골적으로 ‘직접’ 간접광고를 한다. 드라마의 주인공이 특정 치킨 업계나 죽이나 비빔밥, 김밥 등의 식품업계의 회장 아들이면서 경영수업을 받고 있는 젊고 매력적인 개발 본부장이며, 그는 특정 외제 자동차를 타고 다닌다. 그 회사 제품의 상표가 드라마가 진행되는 도중에 수시로 화면에 직접 노출된다.
그런 현상이 처음 벌어졌을 때는 짜증이 나더니 시간이 흐르면서 그 상황에 점점 익숙해지고 무감각해져서 그게 당연한 것으로 여겨진다. 이젠 별로 짜증나지 않는다. 우리는 광고에 끌려가고 광고는 상업의 신에 끌려가고 상업은 물질적 욕망과 테크놀로지에 의해서 끌려간다. 돈에 대한 욕망과 과학기술이 우리의 눈과 귀와 의식을 갈고리로 걸어 우리를 끌고 간다.
사실상 오늘날 광고가 없다면 우리의 삶은 방향감각을 잃고 말 것이다. 어떤 상품을 어디서 어떻게 구입해야 하는지, 어떤 약이나 건강보조제를 먹어야 하는지, 어떤 곳으로 여행 가야 하는지 등등. 우리는 모든 것을 광고를 보아야만 판단하고 구입할 수 있다. 휴지에서부터 자동차와 집까지 우리는 광고에 의존해서 구매한다. 대학교도 광고를 보고 지원한다. 요새는 지방자치단체들도 광고한다. 장례식장도 광고하고 납골당도 광고한다. 광고가 우리의 일상과 일생 나아가서 죽음까지도 지배한다. 거리의 간판과 전광판, 아파트의 벽면 글자나 상징, 옷이나 신발의 로고에서부터 TV나 스마트폰, 컴퓨터 특히 유튜브에서 시도 때도 없이 쏟아져 나오는 광고, 버스 터미널이나 기차역이나 엘리베이터의 벽면에 제시된 광고, 그리고 아침에 출근하려고 다가간 자동차의 문틈에 낀 광고지, 퇴근길 길바닥에 뿌려진 야릇한 불법 전단지, 아파트 현관문에 붙은 학원 전단지 등과 우리는 아침에 깨어서부터 밤에 잠들기 전까지 하루 종일 계속해서 맞닥뜨리게 된다. 그 결과 심지어 잠자면서 잠꼬대도 광고 문구를 뇌까린다고 한다. 그처럼 광고는 우리 일상의 가장 작은 틈새는 물론 우리의 의식 깊은 곳까지도 파고 들어와 있다.
내 생각에는 가장 노골적이고 환상적이며 활력 넘치는 광고가 홈쇼핑이다. 과거에 사람들은 마음이 무기력해질 땐 시장이나 마트를 찾아간다고들 했다. 그러나 그건 옛말이다. 요즘 시장은 물론 대형마트조차도 그다지 활력이 넘치지 않는다. 요즘 우리는 TV의 홈쇼핑 채널에서 삶의 활력을 느낀다. 지진이나 전쟁이 일어나도 팬데믹 전염병이 세상을 휩쓸어도 주7일 일년 365일 하루 24시간 홈쇼핑의 채널은 한 순간도 쉼 없이 활기차게 맥박 친다. 쇼호스트 여자는 자신의 찰랑거리는 머릿결을 양 손등으로 수시로 귀 뒤로 젖혀가며 잔뜩 업된 어조로 옷이나 신발을 팔고 그릇을 팔고 여행을 팔고 보험을 팔고 온갖 맛있는 식품을 판다. 그녀는 매끈한 손톱이 돋보이는 길고 고운 손가락을 블라우스 앞섶이나 스커트 자락이나 바지의 허릿단에 슬쩍슬쩍 넣었다 뺐다 하기도 하고, 또는 가끔씩 자신의 엉덩이나 허리 라인을 애무하듯 쓰다듬기도 한다. 주말 아침엔 최유라나 왕영은, 강주은 등 스타급 쇼호스트들이 주요 홈쇼핑 채널을 장악하고 박터지게 시청률과 완판 경쟁을 벌인다. “너무너무” 들떠 있는 그들은 “엄청나게” 긴박한 어조로 ‘지름신’을 “요기요기로” 강림하게 만든다. 홈쇼핑 세계엔 가난이나 돈 걱정, 질병이나 고통, 죽음불안이나 좌절이 없다. 거기엔 오직 즐거움과 최고의 만족과 행복만 있다. 그곳이 낙원이 아니라면 달리 어디에 낙원이라는 곳이 따로 있겠는가?
우리나라 최초의 CM송은 가수 김상희가 20대 때 부른 “보오고는 몰라요 들어서도 몰라요 맛을 보고 맛을 아는 샘표간장”(1961)이라고 한다. 나와 내 또래 아이들은 그 노래를 무척이나 즐겨 불렀고, 그 이후 “닭이 운다 꼬끼오 집집마다 꼬끼오 맛을 낼 때는 닭표 만나니 꼭 낀다고 꼬기오”(1963) 노래도 엄청 불렀었다. 다시 그 이후 70년대에는 “좋은 사람 만나면 나눠주고 싶어요 껌이라면 역시 롯데껌,”이나 “열두 시에 만나요 브라보콘 둘이서 만나요 브라보콘 살짝쿵 데이트 해태 브라보콘” 등도 인구에 회자되었다. 그밖에도 “하늘에서 별을 따다 하늘에서 달을 따다 두손에 담아드려요. 아름다운 눈동자여 아름다운 날들이여 오오오오 오란씨”나 “야야야 야야야 차차차 야야야야야야야 차차차 진로 진로 진로 진로” 등도 귀에 못이 박히게 들었다. 사실 대부분 우리가 그렇게도 그리워하는 엄마 손맛은 “우리엄마 뽐내는 요리솜씨도 알고 보니 미원미원이지요 우리 집은 언제나 미원 가족”에서 나왔다고 한다. 그러다가 IMF구제금융 시대에는 “아빠~힘내세요~ 우리가 있잖아요~아빠~힘내세요~ 우리가 있어요~”라는 눈물겨운 BC카드 CM송이 우리의 마음을 흔들었다.
광고는 음악이면서 문학이기도 하다. 광고 카피 문구는 최대로 압축된, 마치 송곳으로 찌르는듯한 임팩트를 전달하는 언어예술이다. 다음과 같은 광고 카피들은 우리의 뇌리에 깊이 박혀 있다: “순간의 선택이 평생을 좌우합니다” “니들이 게맛을 알아” “남자는 여자 하기 나름이에요” “침대는 과학입니다” 등.
광고는 또한 시각예술이다. 시각 디자인이고 그림이고 영상 예술이며 비디오 아트다. 나이키의 ‘스위시’(swish, 휙 소리를 시각적으로 표현한 기호) 디자인은 단번에 소비자의 눈길과 의식을 사로잡는다. 그밖에도 고가의 의류나 가방, 자동차나 아파트에 이르기까지 명품 브랜드의 비싼 가격의 대부분은 그 로고나 엠블럼 값이 아니고 무엇인가?
오늘날 스타 연예인이나 스타 스포츠 선수에게는 광고 모델료가 실질적으로 가장 큰 수입원이라고 한다. 피겨 여왕 김연아도 삼성전자 모델이고, 축구선수 박지성도 면도기에서 잇몸약까지 광고하는 모델이며, 우리 광주 출신 걸그룹 가수였던 수지는 스포츠 의류 광고 모델이며, 요즘 뜨겁게 타오르는 가수 임영웅은 업종 불문 여러 회사들이 광고 모델로 모시려고 경쟁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 현상을 대하노라면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저 희한한 인기와 광고라는 거품은 대체 어떤 원인에서 무엇 때문에 어디에서 생겨나는 것인지 궁금하기도 하고, 그로 인해 느껴지는 상대적 박탈감이나 불공정에 화가 나기도한다.
본래 상업 광고는 될수록 얕고 넓게 최대로 많은 사람들에게 어떤 상품의 가치를 각인시키는 것이 목적인데, 아이러니컬하게도 그게 우리의 뇌리에 깊이 새겨져 오래 남기도 한다. 소비자인 우리의 일상과 감성의 한 주요 요소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것은 음악, 미술, 문학, 사진, 영상, 비디오, 연기의 요소를 종합적으로 포괄하는 상업적 예술 창조의 최고봉이다. 그런데 그것과 베토벤의 음악이나 고흐의 그림, 밀턴의 문학이나 백남준의 비디오 아트 등과는 어떤 근본적인 차이가 있을까?
첫댓글 글쎄요. 수단이냐 목적이냐 그런 차이일까요?
글쎄요. 순수예술이든 광고든 어떤 표현 수단(글을 쓰거나 상을 표현하거나 음악적인 소리를 재현하거나)을 통해서 어떤 의도나 목적을 실현하려 한다는 점에서는 같은 것 같아요. 그런데 그 목적이나 의도가 광고의 경우에는 단순히 돈을 버는 것이고 순수예술은 돈을 직접적이고 궁극적이며 유일한 목적으로 삼는 것 같지는 않아요. 예술의 경우에는 그 목적이 다양하고 깊고 복잡한 것 같아요. 하지만 순수예술도 결국 돈과 완전히 무관한 것 같지는 않고요. 고흐의 그림도 지금 값으로 매겨지고, 쇼팽의 피아노 협주곡에도 엄청난 액수의 돈과 명성이 개입하니까요. 그리고 한강의 소설도 명성과 돈으로 평가받으니까요. 밀턴의 문학은 좀 다른 목적을 갖긴 해요. 또 어떤 경우에는 구체적인 목적을 갖지 않은 예술 행위도 있는 것 같고요. 어쨌든 돈을 목적으로 하는 행위가 그 자체로서 나쁘거나 좋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 같아요. 하지만 돈이 유일하고 궁극적인 목적이 되는 것은 얕고 넓고 덧없는 것 같긴 해요. 김도향이나 윤형주가 CM송을 많이 만들고 불러서 인기를 얻었고 돈을 벌었겠지만 그건 너무 얕고 넓어서 금방 증발해버리는 천수답의 논물 같아요. 태평양처럼 넓고 깊은 건 없을까요?
@호미 그런데 아이러니컬한 것은 순수예술이 추구하는 목적이 물질적 욕구나 신체적 욕구와는 관련되지 않는, 정신적인 가치라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별로 직접 쓸모가 없는 것이고, 다른 동물들은 가질 수 없는 것이며, 오로지 인간만이 가질 수 있는 목적이라는 것입니다. 제가 묻고 대답하고, 북 치고 장구 치고 꾕가리까지 쳐서 쑥스럽습니다.
ㅎ일리 있으신 말씀입니다. 정신적 가치. 스토리를 만들어 내는 상상력은 인간만이 누리는 가치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마르셸 뒤샹이후 개념미술이나 POP ART. OP ART. 재현주의 미술 에서는 상업적 재료가 예술표현의 중요 수단이 되기도 하더라구요. 현대에서는 순수냐 상업이냐 경계가 모호해지면서 예술의 일상화를 추구하는 경향이 보이고 있는 것 같습니다. 고전주의 이후 예술이 민중을 향한 덕분이라 생각됩니다. 여전히 루브르박물관에가서 모나리자를 감상하겠다는 인파가 어마어마하지만요. ^^
통찰력있고 재미있는 글이네요.
홈쇼핑 본 적이 없었는데 오빠 집에 다니러갔을때 켜져 있던 TV의 홈쇼핑 광고 잠시 보고 그 자리에서 구매한 경험이 ㅋㅋ 현재 제 집에 TV가 없고, 혹 있더라도 홈쇼핑 보는 일은 없어서 그렇지, 안그러면 저는 보는 것마다 살 것 같아요^^
아, 호미 님도 <한판 승부>를 보시는군요. 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