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 친절하지만 강재씨가 가장 친절합니다.
잊어버리지 않도록 보고 있는 사이에 강재 씨를 좋아하게 됐습니다.
당신의 아내로 죽는다는 것 괜찮습니까?
당신의아내였기에살곳을가질수있었습니다. 고마웠습니다.
강재의 아내로 죽어도 되는지 물어보는, 부치지 못한 파이란의 편지를 뒤늦게 받은 강재는 눈물을 흘립니다.
강재는 늘 이름 앞에 한숨, 조롱이 함께 하는 삼류 건달입니다. 그는 삼류입니다, 건달로서.
비디오를 빌리러 오는 아이들에게 살갑게 대하는 그는, 불법 비디오를 유통하다 걸려서 구류를 살아야 했습니다. 구류를 살고 돌아온 그가 알게 된 건 그가 맡아오던 비디오 가게를 후배 조직원이 맡게 되었다는 것, 그 소식을 전하며 하나 미안해하지 않는 후배조직원에게 손 한번 대지 못하고 뽑기 상품이나 던지며, 욕이나 걸지게하며 물려나는 물렁한 삼류 건달입니다. 이잣돈을 받으러 갔으나 차마 예전 세월의 고마움에 모질어지지 못했던 그는 가게 아주머니에게도, 그리고 후배 조직원들에게도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고 그저 조롱이나 당하고, 매나 맞는 그런 인물입니다. 강재와 함께 조직생활을 시작한 용수는 이제 강재가 속한 조직의 보스입니다. 그런 용식에게조차 “강재야, 강재야, 시발 강재야!”라고 불리는 강재는 조직 안 누구에게도 인정받지 못하는 그런 사람입니다. 그 조직 안에 그의 자리는 없습니다.
모질지 못하고, 순딩순딩하니, 그러나 배운 건 허세요, 허풍인 강재가 가장 강재답게 웃는 순간은 룸메이트인 경수와 있을 때입니다. 경수는 궁시렁거리면서도 라면을 끓여주고, 구류를 살고 있는 강재를 위해 옷을 집어넣어줍니다. 위장결혼을 알선해서 강재에게 돈을 마련해주고, 그 상대편인 파이란을 비디오로 찍어 영상을 남겨줍니다. 파이란의 장례를 위해 강재와 함께 해줍니다. 경수는 그렇게 강재의 자리를 마련해 주는 인물입니다. 강재가 언제든지 들어가 쑥스러워하지 않고, 눈치 보지 않고 엉덩이 붙일 수 있는 장소를 경수를 늘 마련해줍니다.
하나뿐인 혈육이던 엄마를 잃고 한국으로 넘어온 파이란에게 친척이 떠난 한국은 그녀가 머물 수 있는 곳이 없습니다. 그런 그녀가 한국에서 머물 곳을 가질 수 있게 된 것은 강재와 결혼했기 때문이였습니다. 그녀에게 강재는 그렇게 살 장소를 가지게 해 준 고마운 사람입니다. 그녀에게 삶은 너무나 암울합니다. 술집에서 일할 위기를 넘기고, 어느 외진 바닷가 마을, 세탁소 주인 할매가 제공해 준 집에서 튼 수도꼭지에서 나오던 까만 수돗물처럼 그렇게 그녀에게 삶은 앞날이 어찌 될지 모르는 깜깜한 것이였습니다. 힘들 때마다 쳐다보게 되는 강재의 사진에서 그녀는 힘을 받습니다. 그의 미소에 그녀는 위안을 받습니다. 그녀는 그에게 감사 편지를 보냅니다. “결혼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강재 씨가 결혼해 주셨기 때문에 계속 일할 수 있습니다. 여기 사람들은 모두 친절합니다. 계속 여기서 일하고 싶습니다. 감사합니다. 모두 친절하지만 강재 씨가 제일 친절합니다. 저와 결혼해 주셨으니까요.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그럼, 안녕히 주무세요."
김현경씨는 <사람, 장소, 환대>에서 사람의 장소를 인정해 주는 것, 그 사람이 설 자리를 마련해 주는 것이 환대이며, 이 환대를 통해서 사람이 사람으로서 존재하게 되는 것이라고 합니다. 강재에게 경수는 장소를 마련해줍니다. 조직 안에서 누구에게도 존중 받지도, 환대받지도 못하는 강재에게 경수는 그가 구류에서 돌아올 장소를, 피곤한 몸을 뉘일 수 있는 집을 내어주며, 그와 이야기를 나누고, 술을 마시고, 밥을 먹습니다.
파이란에게 강재는 한국에서 머물 장소를 줍니다. 비록 강재는 용돈이나 벌 요량으로 아무 생각 없이 내어준 이름이였으나, 그것으로 인해 파이란은 한국에서 살 곳을 마련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파이란은 강재에게 감사함을 전합니다. 그녀의 이 감사가, 당신이 제일 친절하다는 말이 강재를 사람으로서의 자기 존재를 깨닫게 해줍니다. 용식이 저지른 살인을 뒤집어쓰겠다 결심했던 그 순간의 강재는 자신의 존재가치를 믿지 못했기에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어렸을 때 배 한척 살 돈 마련하면 돌아가겠다 결심하고 고향을 떠났으나 아무리 아둥바둥해봐도 결코 그 돈을 마련 할 수 없을 거란 생각을, 점점 조직에서 밀려나고 있는 자신의 위치를 매순간마다 느끼는 강재에게 스스로에 대한 존엄함 따위는 없었을 겁니다. 그러니 용식의 이야기에 술을 마시고 못 이기는 척, 술기운에 결정한 것처럼 스스로의 존재 없음을 받아들입니다. 그래서 허락의 말을 내뱉는 강재도, 그 순간의 골목도 그저 어둡고 차갑습니다.
파이란의 편지는 강재에게 스스로를 돌아보게 합니다. ‘친절함’은 몹쓸 것, 일 하나 제대로 못하게 하는 것, 그래서 조롱 받아 마땅할 것으로 취급되는 조직 안에서 친절하고 잘 웃는 강재는 자신의 장소가 없었습니다. 존재를 부정당해왔습니다. 그녀의 당신의 친절이 제일이며, 결혼해 주어 고맙다는 이야기가 강재에게는 자신을 인정해주고, 고마움을 받아도 되는 존재로 만들어주었음을. 그래서 파이란의 뒤늦은 편지가 그에게 그런 오열을 자아냅니다. 인천으로 돌아온 강재는 고향으로 돌아가겠다 합니다. 자기 존재의 존엄함을 깨달은 자로서 할 수 있는 결정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스스로의 존엄함을 믿는 자가 남의 죄를 뒤집어 쓰고 감옥에 가는, 자신의 인생을 내버리는 그런 결정은 내릴 수 없는 것이니깐요.
파이란에게 강재는, 강재에게 파이란은 그렇게 서로를 사람으로 느끼게/살아갈 수 있게 해주는 장소를 내어준, 환대를 보여준 사람들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보기엔 서로의 착각이라 한들, 파이란과 강재,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그것을 환대라 느끼고, 그 장난같은 우연을 자신의 삶에 고정시키고, 그 고정시킨 우연을 길게, 끈질기게 끌고 나가겠다고 (알랭 바디우의 <사랑예찬>중에서 ) 결심했다면 그것은 사랑인 것입니다. 서로에게 살아도 될 사람이라고 생각하게 만들어 준 그들은 서로에게 ‘사랑’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멀리 떨어져서, 그러나 여전히 서로가 서로에게 기대면서, 우리의 영혼은 변화를 맞이하는가?” -알랭 바디우 <사랑 예찬> 중 [정오의 공분]인용문
첫댓글 이름을 빌려주어 새 삶을 살게 된 파이란은 다시 이름을 빌려준 강재에게 새 삶을 보여준 것 같아 마음이 짠 했습니다. 발제문 잘 읽었습니다.
그러게요.. 선순환의 고리라고나 할까요.. 파이란의 마음이 전달될 수 있어서 기뻤습니다.
정성을 다해서 올려주신 발제문 감사히 읽었습니다.
호구 같은 강재, 천성이 건달에 맞질 않으니 고향에나 내려가라는 소릴 듣는 강재에게, '친절'하다는 말로 존재를 알려주었다는 문장이 좋았습니다.
제대로 만난 적 한번 없는 이들이, 사진이든 죽은 모습이든 서로를 만나서 다른 세상을 살게 되는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사랑 참 희한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뭐가 친절하다는 거야. 친절하기는커녕 야쿠자, 경찰, 손님 할 것 없이 모두 함게 너를 괴롭혔는데. 그 중에서 제일 지독한 놈이 나야. 오십만에 호적 팔아먹고, 그 돈 어쨌는 줄 아니? 사흘 만에 다 써버렸어. 당신 몸으로 갚아야 하는 그 돈을 말야. 피를 토하며 갚아야 하는 그 돈을 말야. 우린 전부 거머리들이야, 찰거머리들이야. 당신을 뼈만 남도록 빨아먹은 귀신들이야. 어째서 이 찰거머리 귀신들에게 자꾸만 친절하다고, 고맙다고 그런 말을 하니?"
영화 <파이란>의 원작, 아사다 지로의 단편소설 <러브 레터> 중에서 가져온 문장입니다. 영화 파이란 속 강재에 해당하는 남주 다카노 고로가 파이란의 러브 레터를 읽고 한 말입니다. 호적 팔아먹은 돈으로 말밥 주러 간다던(경마한다는 말 맞죠?) 강재의 대사도 생각이 났습니다. 하...
저는 감독이 디테일하다고 느낀게.. 요 감정들을 강재가 경찰서에서 터트렸다고 생각했어요. "사람이 죽었는데 어찌 이리 간단하냐고.. 마누라라니.." 이런 대사들이요. 그리고 세탁소 할머니께 아무런 변명없이 그 원망을 들어주는것으로 그리고 그녀의 방을 둘러보던 강재의 시선에서..
이번엔 선생님이 말씀하신 "왜 그들이 한것이 사랑인가"에 초점을 맞추느라 이런것을 뒤로 보냈는데요. 영화 자체만으로도, 사회적 이슈들, 배우들의 연기에 대해서도 할 말이 무궁무진한 영화로 다가왔어요.
원작이 있다는 말을 들어서 궁금했었는데.. 공유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영주님 발제문 읽으면서 영화에서 읽지 못하던 것을 몇가지 알게 되었네요.
영화 보면서 초라한 강재와 파이란 삶이 서글프면서도 그 안에서 작은 보금자리가 되어주는
과정이 또한 귀하게 느껴졌습니다. 강재에게 친구 경수가 그런 것처럼 강재도 알지 못하는 사이
파이란에게 그런 존재였고 그것을 깨닫는 순간 함부로 한 자신의 삶을 추스리는 모습~~
드러내는 봉사가 아니더라도 절박한 누군가에게 내가 그에게 내어줄 것이 있다는 것이 고맙고
그것에 깊은 감사로 보답하는 마음때문에 내내 먹먹했습니다.
좋은 영화, 그리고 더 좋은 발제문 모두 감사합니다.
앗. 좋게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뭐라그럴까요.. 강재와 파이란이 사는 집들의 상태가.. 어찌나 심란하고, 어찌나 딱 그들의 상태를 드러내주던지..
마지막엔 강재와 함께 울고싶었어요. 파이란과도 함께 웃고싶기도 했구요.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영화를 전에 봤는데, 그때 못봤던 부분을 발제때문에 돌아보게 됩니다.감사합니다.
오늘 발제하시느라 애쓰셨어요.. 저도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