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녕부원군(豊寧府院君) 홍보(洪靌1585~1643)
풍산홍 씨 11世 홍보(洪靌1585~1643) 호는 월봉(月峰) 부친은 형조좌랑 습지공 홍난상(洪鸞祥)이며, 조부는 贈左贊成 홍수(洪脩)이다.
1627년 이인거 등이 대북파의 유효립등과 은밀히 교통해 광해군의 복위를 꾀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그들은 조정이 오랑캐와 화해함은 마땅하지 않으니 화의(和議)를 주장하는 죄인들의 목을 베어야 한다면서 반란을 일으켰다.
이인거 등이 횡성 등지의 군기(軍器)를 탈취한다는 보고를 받고, 원주에서 이인거를 기습하여 체포함으로써 난을 진압하였다. 그 공으로 부호군이 되고, 이어 소무공신(昭武功臣) 등에 녹훈되어 풍녕군(豊寧君)에 봉해졌다. 벼슬은 좌참찬에까지 이르렀고 ,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풍산홍 씨 시조님부터 11세에 이르기까지 증직을 제외한 현직으론 최고위직에 올랐다.
세종시 관내에 산재되어 있는 금석문을 전수조사하여 탁본 작업 후 금석문집을 발행하기 위한 일환으로 풍녕부원군 홍보(洪靌) 신도비 탁본 작업 전 종중 관련자의 협조를 얻기 위해 내가 소환이 되었다. 탁본 작업을 진두 지휘하신 교원대학교 박희두교수님께 정익공유물 관련 도록을 증정하였다.
신도비 위치 : 세종시 연동면 명학리 산 56-10
찬(撰) :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
서(書) : 오준(吳駿)
전(篆) : 여이징(呂爾徵)
비신 : 240*100*32cm 퇴적변성암(대리석)
비개 : 170*105*70cm
비대 : 175*145*90cm 앞면 : 모란문, 옆면 : 노송문+안상문
1654년(甲午年)에 신도비를 세우다.
갑술년(甲戌年) 移立 내용을 손자 홍만종(洪萬宗)께서 신도비에 기록.
첫댓글 무관심은 용서가 안됩니다.
누군가는 나서야할 일이지만 관심있는 자만이 할수 있지요.
대종회 차원에서 펼쳐나가야 하는데 관심이 없으니 소문중에서 나서서라도 보존하고 관리해야겠어요.
행동하는 양심으로 뚜벅이처럼 앞서서 나가니
따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