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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4-21 주일설교
나 같은 죄인도 살리셨습니다
마태복음 9:9~13
이 세상에는 별의별 사람이 다 있습니다. 또 그런 사람이 교회에 들어오기 때문에 교회에 다니는 신자 가운데도 별별 사람이 다 있습니다. 교회는 자격시험도 없고 면접 심사도 없습니다. 그래서 때로는 교회에 유력한 사람이 들어오고, 때로는 세상에서 손가락질받는 사람도 들어옵니다. 그런 사람을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교회의 머리이신 예수님은 그런 사람을 어떻게 생각하실까요?
정답은 다 알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든지 사랑으로 받아들이고 그가 성숙한 신자가 되도록 기도해주는 것이죠. 그런데 문제는 우리 머릿속의 정답과 가슴속의 정답이 같지 않은 것입니다. 우리의 머리에서 가슴까지의 거리는 참 멀어요.
그러면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본문에서 하나님은 우리가 이 문제를 해결할 비결을 가르쳐 주십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이 본문에서 예수님이 주시는 말씀을 통해 반갑지 않은 교인을 대하는 비결을 배워봅시다.
본문의 사건은 이 성경을 기록한 마태가 처음 예수님께 부름을 받던 날에 있었던 일입니다. 예수님이 지나가시다가 가버나움 세관에 앉아 있는 마태를 보시고 “나를 따르라”라고 하시자 마태가 일어나서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그런데 이상하지 않습니까? 마태는 계산에 밝은 사람이고 돈밖에 모르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마태가 “나를 따르라”라는 한 마디에 바로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것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여기에는 생략된 많은 말이 있습니다.
마태는 원래 세리였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100년 동안 로마의 식민지였습니다. 당시의 세리는 단순한 세무공무원이 아닙니다. 세리는 일정 지역의 세금 징수권을 경매로 따내었습니다. 그리고는 국민의 혈세를 짜내어 경매로 제시한 세금을 로마에 바치고 남는 것은 세리의 수입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당시 세리는 돈밖에 모르는 인간, 매국노, 도둑놈이었습니다. 일제 강점기의 일본인 앞잡이보다 더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렇게 살던 세리가 “나를 따르라”라는 한 마디에 일어나 예수님을 따랐다는 것은 이상하지요. 누가복음 5장에서는 “그가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고 하는데 나라도 민족도 팔아먹던 세리 마태에게 무슨 일이 있었을까요?
도대체 마태는 예수님에게서 무엇을 보았고 무엇을 들었기에 그런 결단을 했는지 궁금합니다. 그런데 마태는 아무런 설명을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같은 사건이 기록되어 있는 마가복음 2장과 누가복음 5장의 기록을 비교해보았습니다.
마가복음에서는 1) 마태의 본명이 알패오의 아들 레위라는 것, 2) 그날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예수님을 따랐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누가복음에서는 1) 레위라 하는 세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는 것, 2) 그가 예수님을 위해 자기 집에서 큰 잔치를 했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하지만 마가도 누가도 레위가 왜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는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마가나 누가도 그 사연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마가는 베드로에게 들은 이야기를 정리해서 마가복음을 기록했습니다. 누가는 바울에게 들은 이야기를 정리해서 누가복음을 기록했습니다. 그렇다면 베드로도, 바울도 그날 마태의 심경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른다는 뜻입니다. 마태는 자기가 회심한 사건에 대해, 하고 싶은 말이 엄청나게 많았을 텐데도 그런 것을 떠벌리지 않았습니다.
마태는 자기가 모든 재산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는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마태의 집에서 음식을 잡수셨다고만 했을 뿐 그가 예수님을 위해 큰 잔치를 베풀었다는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마태는 왜 자기의 회심 사건에 대해 아무런 설명을 하지 않았을까요? 갈수록 더 궁금하지 않습니까?
여기서 우리는 간증의 원리를 배울 수 있습니다. 간증이란 예수님을 자랑하는 것이지 자기를 자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어떤 사람은 간증한답시고 자기가 과거에 행한 못된 짓을 영웅담처럼 떠벌립니다. 말로는, 이렇게 악했던 내가 예수님을 만나 변화되었다는 것인데 마치 자기의 부끄러운 과거를 자랑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 사람을 강단에 세우는 것은 강단을 모독하는 것이고 청중을 모욕하는 것입니다.
마태는 그런 방식으로 자기 간증을 하지 않았습니다. 사도 바울도 자기의 부끄러운 과거를 떠벌리지 않았습니다. 마태는 자기 이야기 때문에 예수님의 귀한 교훈이 묻히지 않게 하려고 자기 이야기를 감추었습니다. 그렇다면 마태가 전하려는 예수님의 교훈은 무엇인지 10~13절에서 확인해 봅시다.
마태는 예수님을 만나 자기 인생을 뒤집어 놓을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마태는 평생 악착같이 긁어모았던 재산을 정리해서 나눠주어 버리고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그날 마태는 큰 잔치를 열어 예수님과 제자들을 대접하고 또 지금까지 함께 했던 동료들과 작별 인사도 나누었습니다.
그런데 그 모습을 지켜보던 바리새인들은 제자들에게 예수님을 비난했습니다. “너희 선생을 어찌하여 민족의 피를 빨아먹는 매국노이고 도둑놈인 세리들과 함께 식사하느냐? 저 죄인들과 친구가 되어 웃으며 즐긴단 말이냐?”
바로 그때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마태는 평생 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자기가 예수님을 영접한 사건을 생각만 하면 즉시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그래서 자기가 회심한 이야기보다 더 중요한 예수님의 말씀이 묻히지 않도록 하려고 자기 간증은 생략했습니다. “마태 사도님을 어떻게 해서 예수님의 제자가 되셨나요?”하고 누가 물으면 마태는 항상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제가 회심한 것보다 중요한 것은 그냘 식사 자리에서 예수님이 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다음의 세 마디를 말씀하셨습니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필요 없고 병자에게만 필요하다.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워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라.
여기서 예수님이 인용하신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는 호세아 6:6인데 하나님께 예배는 열심히 드리면서도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사람들은 전혀 사랑하지 않는 유대인 신자들에게 주신 경고입니다. 오죽하면 하나님이 제사를 원하지 않는다고 하셨을까요? 호세아와 같은 시대에 살던 미가의 고백도 같은 의미를 담았는데 미가 6:6은 노래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내가 무엇을 가지고 여호와 앞에 나아가며
높으신 하나님께 경배할까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을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공의를 행하고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라
하나님이 제사를 원하지 않고 긍휼을 원한다는 말은 사람을 사랑하고 긍휼히 여기는 것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영생을 얻는 신자에게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긍휼(헤세드)를 닮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이 땅에 오셔서 죄인을 위해 죽어주셨는데 예배당이 좀 더러워지는 것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교회에 죄인이 들어와서 교회 이미지가 흐려지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도둑놈이고 매국노인 세리들과 놀아난다고 바리새인들은 빈정거릴 때 예수님은 분명하게 선포하셨습니다.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실 때 마태는 바로 자기를 위한 말씀으로 들었습니다. “저 바리새인들은 비난하고 조롱하고 멸시하지만 예수님을 나를 받아주시는구나.”라고 생각할 때 마태는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리기 시작했습니다. 이내 어깨를 들썩이며 울기 시작했고 끝내 엉엉 소리를 내며 울음을 멈출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 경험을 한 후에 마태는 자기가 예수님을 영접한 그 날을 생각하면, 모든 사람이 비난하고 욕하던 자기를 받아 주신 예수님의 사랑 때문에 또다시 눈물을 흘러내렸습니다. 모두가 죄인이라고 손가락질하던 세리를 용서하여 구원해 주신 것도 감사한 데 제자로 받아 주셔서 예수님의 사도로 사용해 주신 은혜는 말로 다 표현할 수가 없었습니다.
마태가 복음을 전하고 다니던 1세기의 신자들 가운데 종종 어떤 신자를 못마땅히 여기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저런 사람이 교회에 들어오니 교회의 이미지가 나빠진다. 교회가 사람을 좀 골라서 받으면 좋겠다.” 그렇게 생각하는 성도에게 마태는 꼭 이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나 같은 죄인도 불러주신 예수님이 여러분도 받아 주신 것이 감사하지 않습니까? 예수님은 여러분 주변에 출신이 더럽고 교회 이미지 버릴 것 같은 못 난 사람, 바로 그런 사람을 부르려고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존 뉴턴은 아프리카에서 사로잡은 흑인을 미국으로 실어나르는 노예선의 선장이었습니다. 그는 흑인이 말썽을 일으키면 총으로 쏘아 죽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다 어느 날 풍랑을 만났을 때 어머니 생각이 났습니다. 어머니는 존이 7살에 죽었는데 어린 존을 위해 늘 기도해주었습니다. 존은 풍랑 속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했고 그 후에 선장을 그만두고 신학을 공부해서 목회자가 되었습니다. 존 뉴턴은 자격 없는 자기를 구원해 주시고 목회자로 삼으신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며 노래를 지었습니다. 그 노래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노래입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워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제가 스무 살에 총신대학교에 갔는데 한번은 교수님이 기도를 시켰습니다. 그때 저는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저 같은 죄인은 구원해 주신 것도 감사한 데 목사로 만들어 쓰시려고 신학대학교에 불러주신 것을 생각할 때 무한히 감사드립니다.”
저는 사실 목사가 될 자격이 없는 사람입니다. 제가 얼마나 악한 사람인지 다 말하면 여러분은 제 설교를 듣지 않으려 할 것입니다. 이런 저를 신자로 불러주신 하나님께서 목사로 만드시고 개혁주의 신학을 가르치도록 신학박사까지 만들어 주신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말로 다 할 수 없습니다.
교회는 아무나 와도 되는 곳일까요? 교회는 사람을 골라서 받아야 할까요? 교회에는 누구나 와도 되지만 교만한 사람은 예수님이 기뻐하지 않습니다. 교인들이 자기를 대우해줄 것을 기대하고 오는 사람은 예수님께 합당하지 않습니다.
아무 자격 없는 나 같은 죄인도 살려주신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나 커서 할 말이 없는 그런 사람이 예수님께 합당합니다. 그런 은혜를 받은 사람은 교회에 어떤 사람이 들어오더라도 사랑하고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예수님 앞에서 자신의 부족함과 부끄러움을 발견하고 예수님의 크신 은혜를 고백하며 감사하는 신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어떤 부족한 신자도 사랑할 수 있는 그런 신자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첫댓글 https://youtu.be/uspD_P23BK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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