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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6강 다섯 번째 증명, 우정(Friendship)과 연대(Solidarity) (갈4:12-20)
1. 처음 만났을 때 (4;12-14)
“형제자매 여러분, 내가 여러분과 같이 되었으니, 여러분도 나와 같이 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이 내게 해를 입힌 일은 없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아시는 바와 같이, 내가 여러분에게 처음으로 복음을 전하게 된 것은, 내 육체가 병든 것이 그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내 몸에는 여러분에게 시험이 될 만한 것이 있는데도, 여러분은 나를 멸시하지도 않고, 외면하지도 않았습니다. 여러분은 나를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그리스도 예수와 같이 영접해 주었습니다.”
바울이 갈라디아 교회를 처음 세웠을 때에 바울에게는 큰 역경이 있었습니다. “내 육체가 병든 것”이라고 바울이 말한 내용입니다. 바울의 질병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려져 있지 않지만, 고대 사회를 염두에 둔다면, 고쳐지지 않은 몹쓸 질병 가진 사람이 하는 말을 신뢰하려고 하지 않았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갈라디아 사람들은 바울을 배척하지 않았습니다.
사실 갈라디아에 바울이 머무르게 된 이유가 바로 질병 때문이었습니다. 질병 때문에 다른 지역으로 가지 못하고 1년 이상 갈라디아에 머물게 되어서, 이 질병이 복음전파와 교회설립의 계기가 된 것입니다. 이럴 때 우리는 이렇게 말합니다. “뜻하지 않은 일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일하신다.”고 말입니다. 고린도전서 1장 25절에서 “하나님의 약함이 사람의 강함보다 더 강합니다.”라고 한 바울의 말을 생각해 보십시오. 이것은 신앙의 신비(mystery)입니다.
큰 질병을 가진 사람은 신의 저주를 받은 사람으로 간주되던 시대였습니다. 그런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고 하면 믿어줄 사람이 있을까요? 물론 갈라디아 사람들의 마음속에 그런 유혹이 일어난 것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바울을 멸시하지도 배척하지도 않았고 오히려 바울을 천사처럼 또 예수처럼 맞아들였습니다. 어떻게 그런 시험을 이겨냈을까요? 이것 역시 신앙의 신비(mystery)입니다. 바울의 말 속에서 진리를 발견하고 감동을 받은 것이 분명합니다.
여기까지는 참 좋았습니다. 이렇게 좋은 관계가 된 것을 바울은 12절에서 미리 말했습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내가 여러분과 같이 되었으니, 여러분도 나와 같이 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이 내게 해를 입힌 일은 없습니다.” 바울은 유대인이면서 유대인처럼 살기를 버리고 이방사람들의 사도로 살았습니다. 그러니 갈라디아 사람들도 신앙에 있어서 바울을 본받으라는 요청을 하는 것입니다. 그 뒤에 나오는 “여러분이 내게 해를 입힌 일이 없다”는 말은, 그 때는 바울을 본받으며 제대로 살았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왜 지금은 달라졌냐?”는 책망이 담긴 것입니다.
“나는 너와 같이 되고 너는 나와 같이 된다.”는 것은 우정(Friendship)의 극치입니다. 참된 친구들은 그들의 모든 운명을 함께 나누기 때문입니다. 신앙의 우정은 같은 신앙적 가치에 연대(Solidarity)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려면 가치판단을 할 줄 아는 성숙한 신앙의 단계에 올라가야 가능합니다. 그리고 신앙의 우정행동이 사회 속에 거부감을 주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도움과 모범이 되어야 합니다.
젊은 시절 같은 가치관을 가지고 우정을 나누고 서로 연대했던 사람들이 나이가 들고 삶의 환경이 달라지면서 서로 다른 가치관을 소유하게 되는 경우를 종종 봅니다. 그런데 신앙이 그런 경우에는 문제가 됩니다. 사제가 될 때 땅 바닥에 엎드려 “나는 주님의 종입니다.”하고 서약했던 마음은 공허한 목소리만 남고, 개신교 종교개혁으로 인하여 한 명이었던 교황이 도처에 셀 수 없을 정도로 불어났다는 비난이 가슴을 찌릅니다. 그때는 엎드린 주님의 종이었는데, 교인 수가 불어나고, 교회 재정이 많아지고, 교계의 높은 자리를 차지하다가, 이제는 스스로 주님 노릇을 하려한다면 그 우정은 심하게 변질된 것입니다. 하나님도, 예수님도 그리고 바울도 똑같이 그대로인데, 갈라디아 교인들과 우리가 그 우정을 버리고 변질된다면, 그 연대(Solidarity)는 유지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수구초심(首丘初心)이 생각납니다.
2. 원수가 되었다?(4:15-16)
“그런데 여러분의 그 감격이 지금은 어디에 있습니까? 나는 여러분에게 증언합니다. 여러분은 할 수만 있었다면, 여러분의 눈이라도 빼어서 내게 주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여러분에게 진실을 말하기 때문에 여러분의 원수가 되었습니까?”
과거 갈라디아 교인들의 우정을 따르면, 그들은 바울에게 눈이라고 빼어 줄 정도였다고 합니다. 신체 가운데 눈이 가장 소중한 것이라고 여겨지던 시대의 표현입니다. 가장 소중한 것을 내어줄 수 있을 정도의 우정이 사라진 것입니다. 앞부분에 “그 감격이 지금 어디 있는가?”라는 질문이 좀 생경스럽습니다. “감격”이란 단어(μακαρισμὸς, makarismos)는 영어로 blessedness입니다. 어떤 주석에서는 “칭찬”으로 번역하기도 하고, 아주 의역을 해서 “의기양양한 기분”이라고 번역하기도 합니다. 한글 개역 성경에서는 “복”이라고 번역하였습니다. 8복에 나오는 그 복과 어원이 같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맥락이 전혀 다르기 때문에 설명이 필요한 대목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느꼈던 그 <마카리오스모스>는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라는 말은 처음 복음을 듣고 감동을 받아 환희에 찼던 그 때 그 “행복한 심정”의 실종을 표현한 것입니다. 너무나 황홀해서 어쩔 줄 몰랐던 심정입니다. 어떤 주석에서는 마치 올림픽 우승을 한 경기자가 높은 시상대에 올라서 머리에 월계관을 쓸 때 바로 심정이라고 표현한 것을 보았습니다.
그 뒤에 왜 이제 와서는 바울을 “원수” 취급을 하느냐는 항변이 뒤이어 나옵니다. 우정이 변하여 적대감이 된 것이지요. 친구인줄 믿었는데, 이제는 적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참된 친구”와 “아첨꾼”을 구별할 수 있을까요? 유일한 방법은 “말의 솔직함”(παρρησίᾳ, parresia)에 달려 있다고 봅니다. 이 단어는 마가복음 8장 32절에 나오는데,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당신이 받게 될 고난에 대하여 “드러내 놓고”(παρρησίᾳ, parresia, openly) 말하였더니, 베드로가 스승 예수를 바싹 잡아당기며 꾸짖었다는 내용이 등장합니다.
“드러내 놓고” 말한다는 것은 모든 사람으로부터 검증을 받는다는 것이기 때문에 진위여부 즉, 진실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바울이 항변합니다. “내가 여러분에게 진실을 말하기 때문에 여러분과 원수가 되었습니까?”라고 말입니다. 원수라는 번역도 조금 과하기는 합니다. 영어로 하면 enemy 정도입니다. 참된 친구는 진실을 말하면서 서로 공감합니다. 하지만 아첨꾼은 겉으로는 친구인척 위장하지만, 진실을 말하는 것을 싫어합니다. 그 아첨꾼이 만일에 권력을 가졌다면, 싫어하는 정도가 아니라 박해를 가할 것을 뻔한 일입니다.
예수가 진실을 드러내 놓고 말하니, 가장 가까이 있던 베드로가 예수를 바짝 당기며 꾸짖습니다. 그것이 현실이었습니다. 주님의 길을 베드로는 결코 원하지 않았던 것이지요. 상대방을 가까이 하는 이유가 자기의 이익을 따내려는 것인데, 도무지 이익이 안 될 것 같은 말을 드러내 놓고 하니 꾸짖기까지 한 것입니다. 가롯 유다는 한 걸음 더 나가서 예수를 팔아 치웠습니다. 결국 주님은 십자가에 달리기도 전에 베드로에게 야단맞고 가롯 유다에게 배신을 당했습니다.
그래서 어쩌면 바울이 지금 갈라디아 사람들에게 원수 취급을 당하는 것은 “당연한 결과”인지 모릅니다. 진리가 드러나면 분쟁이 생기는 것입니다. 만일 진리 앞에 모두가 동의하고 순종하는 날이 온다면, 그것은 더 이상 인간세상이 아닐 것이기 때문입니다.
3. 한결같아야 합니다.(4:17-18)
“위에서 내가 말한 사람들이 여러분에게 열심을 내는 것은 좋은 뜻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을 내게서 떼어놓아서, 여러분으로 하여금 자기네들을 열심히 따르게 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좋은 뜻으로 여러분에게 열심을 낸다면, 그것은, 내가 여러분과 함께 있을 때뿐만 아니라, 언제든지 좋은 일입니다.”
갈라디아 교회에 들어온 교사들은 바울이 구원의 핵심을 일부러 감추었다고 거짓 소문을 내었을 것입니다. 그 <핵심>이란 바로 <율법>을 의미합니다. 거짓 교사들이 너무도 열심을 내어 설득을 하니 그 열정에 감격한 사람들이 많이 나오기 시작하였습니다. “좋은 뜻”(καλῶς, kalos)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은 “옳은” 것이 아니라는 뜻도 있고, “완벽한” 것이 아니라는 뜻도 됩니다. 때로는 “선한”이라는 의미로도 사용됩니다. 그러니까 누군가 찾아와서 우리를 엄청나게 위하는 척 열정을 다하는데, 올바른 방향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들이 그렇게 열정을 내는 이유는, 우리의 방향을 돌려서 결국에는 자기들을 따르게 만들려는 의도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런 것에 잘 속습니다. 무지하기 때문입니다.
열심을 낸다는 것은 무엇엔가 관심이 있고, 목표가 있기 때문에 애를 쓰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그 목적이 무엇인지가 중요합니다. 만일 어떤 사람으로부터 우정을 보여주는 우호적인 선대를 받았다고 합시다. 그러면 사람들은 그 순간 착각하기 시작합니다. 그런 선대를 나에게 베푼 사람은 선한 사람이라고 말입니다. 혹시라도 그 뒤에 감추어져있을지 모르는 “속셈”은 생각하지 못합니다. 이해관계에 따른 주고받기에 불과한 일을 우정이라고 착각하면 안 되는데, 갈라디아 교인들이 그것을 모르고 넘어간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대중들의 “천박한 사심”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나름대로의 지위를 가진 두 사람이 만나 대화를 할 때에, 정말 순수한 우정의 대화를 하는 경우와, 반대로 상대방의 지위를 이용해서 이득을 취하려는 천박한 사심으로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만일에 한 편이라도 순수한 우정의 대화를 한다면, 그 만남은 거기서 정리가 될 것입니다.
갈라디아 교회에 들어온 거짓 교사들의 잘못된 교훈을 분별하는 유일한 방법은 그들이 그리스도를 위하여 일하는지, 아니면 자신들의 당파를 위하여 일하는지 구분하면 되는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갈라디아 교인들이 바울과 함께 있을 때 복음을 듣고 마음에 감동을 받아 행복을 느꼈다면, 교사들이 와서 전하는 말도 그 행복한 감격을 증진시켜야 “좋은 뜻”이 유지되는 것입니다. 만일 그렇게 되었다면, 갈라디아 교인들 곁에 바울이 있던지, 아니면 바울이 떠났던지 그들이 느낀 행복한 감격이 살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되었습니까? 갈라디아 교회에 혼란이 찾아오고 말았습니다.
솔직한 것 그리고 진실을 말하는 것을 이길 대적은 없습니다. 저는 그렇게 믿고 싶습니다. 비록 세상이 거짓에 더 마음을 쓴다고 하더라도 말입니다. 사람은 자기 마음에 드는 말을 들으면, 거짓이라고 생각하지도 않고 그대로 믿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리고 검증도 하지 않은 채 들은 말을 또 다른 사람에게 전달합니다. 그것이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이고, 신앙의 영역 안에서도 똑같이 행해지는 일입니다.
우리 속에 자리 잡고 있는 천박한 사심만 내려놓아도 쉽게 판별할 수 있는데, 그렇게 하는 일이 쉽지 않은 모양입니다. 그래서 신앙인은 이익 앞에서 부끄럽지 않아야하고, 진실 앞에서 한결 같아야 합니다. 정말 진리가 무엇인지 판단하기 어려울 때는 침묵하고 기다려야합니다. 바울이 지금 속상해하는 것이 바로 그 문제 때문입니다.
4. 다시 시작합시다(4:19-20)
“나의 자녀 여러분, 나는 여러분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어지기까지 다시 해산의 고통을 겪습니다. 이제라도 내가 여러분을 만나 어조를 부드럽게 바꾸어서 말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나는 여러분의 일을 어떻게 하면 좋을지 당황하고 있습니다.”
“해산의 고통”을 언급한 것은 어머니의 역할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다시 해산의 고통을 겪는다는 말 속에서 “거듭남”에 대한 바울의 생각이 드러납니다. 그렇게 해야 “그리스도의 형상”이 그리스도인 가운데에 회복이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탄생한다? 멋지지 않습니까? 사실 이 개념은 초대교회의 영지주의 전통이 받아들였고, 중세에는 신비주의 전통이 소중하게 발전시킨 원 개념입니다. 우리의 <영혼 안에 그리스도의 탄생>이라고 말합니다.
한동안 유행했던 말 가운데, <예수 닮기>라는 표어가 있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그의 삶이 예수를 닮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약간 변경한 것이 <예수 담기>입니다. 마음속에 예수를 담고 살라는 것입니다. 그것만 되어도 우리의 삶이 많이 달라질 것이 분명합니다. 그렇게 되려면, 복음서를 깊이 이해해야 할 것이고, 예수의 가르침과 행적에 우리의 삶을 비추어보고 항상 반성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표어는 간결한데, 실상 우리 삶에 적용하기는 너무나 어려운 일입니다.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말합니다. 더 이상 강하게 말하지 않고 부드럽게 권면하고 싶은데, 지금 갈라디아 교인들의 상황이 그렇지 못하니 어쩔 줄을 모르겠다고 말입니다. 갈라디아 교회도 문제였지만, 오늘날 우리가 더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그리스도의 형상이 교회 안에 형성되고 있는지 깊이 생각하고 또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누구든지, 또 어떤 교회이든지 자신들이 행해온 지금까지의 신앙행위들이 문제가 있다고 생각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주관적이 아닌 객관적인 관찰자들의 눈에는 이상하게 보이는 것이 현실입니다. 비록 그 외부인들의 관찰과 비난이 다소 일방적이고 편파적일 수 있지만, 그 원인제공을 한 책임만큼은 교회가 져야합니다. 어떤 한 교회가 한 잘못이라도 한국교회 전체가 감당해야하고, 스스로 그런 비난에서 자유롭다고 생각하는 교회가 더 큰 책임감을 느끼고 행동해야 합니다. 바울이 지금 권면하고 싶은 것이 바로 그런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2024년 8월 11일
홍지훈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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