歸根第十六
제16장, (일부러 일삼고자 하는 바나 일부러 일삼는 바가 없는) 근원으로 되돌아가야 함에 대해 논한다.
致虛極,
(이른바, 사람이 도道를 얻으면, 오장이 일부러 일삼고자 하는 바나 일부러 일삼는 바가 있음이) 텅 빔의 끝점에 다다르게 되고,
得道之人, 損情去欲, 五內淸靜, 至於虛極.
(이른바, 도(道; 自然)를 얻은 사람은 (일부러 일삼는 바가 있는) 마음을 덜어내고, (마음이) 일부러 일삼고자 하는 바를 떠나보내는데, (따라서 간·심장·폐·콩팥·쓸개의) 오장(五臟; 五)이 안으로 (일부러 일삼고자 하는 바나 일부러 일삼는 바가 있음으로부터) 맑아지게 되고, “고요하게 되며”, (일부러 일삼고자 하는 바나 일부러 일삼는 바가 있음이) “텅 빔의 끝점에 다다르게 된다.”
守靜篤,
(오장이 일부러 일삼고자 하는 바나 일부러 일삼는 바가 있음으로부터) 고요하게 됨을 지키게 되고, (일삼음이 일부러 일삼고자 하는 바나 일부러 일삼는 바가 없음으로부터) 도탑게 됨을 지키게 되며,
守淸靜, 行篤厚.
(이른바, 오장이 일부러 일삼고자 하는 바나 일부러 일삼는 바가 있음으로부터) 맑아지게 됨과 “고요하게 됨을 지키게 되고”, 일삼음이 (일부러 일삼고자 하는 바나 일부러 일삼는 바가 없음으로부터) “도탑게 됨”과 두텁게 됨을 “지키게 된다.”
萬物並作,
(이른바, 만물이 도道를 얻으면) 만물이 각자 (저절로 그러하게) 살아가게 되는데,
作, 生也. 萬物並生也.
“작作”은 (저절로 그러하게) 살아가게 된다는 말이다. (이른바, 이 문장은 “만물”이 도道를 얻으면) “만물이 각자 (저절로 그렇게) 살아가게 된다”는 뜻이다.
吾以觀復.
나는 이로써 (만물은 일부러 일삼고자 하는 바나 일부러 일삼는 바가 없는 근원을) 되돌이켜야 함을 살핀다.
言吾以觀見萬物無不皆歸其本也. 人當念重其本也.
이른바, “나는 이로써” “만물”은 모두 그 (일부러 일삼고자 하는 바나 일부러 일삼는 바가 없는) 근원(本; 道)로 되돌아가지 않음이 없어야 함을 “살피고”, (그것을 “되돌이키지” 않음이 없어야 함을) 알아차린다는 것이다. (따라서) 세상 사람들은 마땅히 그 근원(本; 自然)을 중요하게 생각해야 하는 것이다.
夫物芸芸,
이른바, 만물은 꽃과 잎이 무성해지면,
芸芸者, 華葉盛也.
“운운芸芸”은 꽃과 잎이 무성한 모습이다.
各復歸其根,
각자 그 근원을 되돌이키고, (그것으로) 되돌아가는데,
言萬物無不枯落, 各復反其根而更生也.
이른바, “만물”은 (“각자” 그 “무성해진”) 잎을 말리거나 꽃을 떨구지 않음이 없는데, “각자” “그 근원(根; 道·自然)을 되돌이키고”, (그것으로) “되돌아감”으로써, (“각자” 그 저절로 그러한 본래의 명命대로) 살아가기 위해서이다.
歸根曰靜,
(만물이) 되돌아가는 고요한 바, (이것을) 일컬어 (만물의) 근원이라 하고,
靜曰根也. 根安靜柔弱, 謙卑處下, 故不復死也.
“고요한 바靜”는 “이른바” “근원(根; 道·自然)”이다. “근원”은 (일부러 일삼는 바가 있음有爲에 대해) 평안하고 “고요하며”, 부드럽고 연한데, (따라서 스스로) 겸손한 채 (자신을) 비천하게 여기고, (따라서 스스로 낮춘 채 자신을) 아래에 머물게 하며, 따라서 (본래 저절로 그러한 자신의 명命을 스스로 벗어나거나 그것에 스스로 어긋난 채, 일부러 일삼아) 죽는 바를 “되돌이키지” 않게 되는 것이다.
是謂復命.
(만물의 근원) 이것이 이른바 (만물이) 되돌이키는 명命이다.
言安靜者是爲復還性命, 使不死也.
이른바, (일부러 일삼는 바가 있음有爲에 대해) 평안하고 “고요한” 사람은 (저절로 그러한 자신의) 본성을 “되돌이키고”, (본래 저절로 그러한 자신의) “명命”으로 되돌아감을 일삼는 사람인데, (따라서 그는 자신으로 하여금 저절로 그러한 자신의 본성을 벗어나지 않게 하고, 따라서 본래 저절로 그러한 자신의 “명命”에 어긋나지 않게 하며, 따라서 일부러 일삼아) 죽지 않게 하는 것이다.
復命曰常.
(만물이) 되돌이키는 명命, (이것을) 일컬어 (도道가 일삼는) 늘 그러한 바라고 한다.
復命使不死, 乃道之所常行也.
“명命”을 “되돌이키는 일”이 (일부러 일삼는 바가 있음有爲에 대해) 평안하고 “고요한” 사람으로 하여금 일부러 일삼아) 죽지 않게 하는 것은 (그가 “되돌이키는” “명命”이) 이른바 도道가 “늘 그러하게” 일삼는 바(所; 自然)이기 때문이다.
知常曰明 ;
(도道가 일삼는) 늘 그러한 바를 알아차림, (이것을) 일컬어 (일부러 일삼는 바가 없음에 대한) 밝음이라 하는데,
能知道之所常行, 則爲明.
(이른바) 도道가 “늘 그러하게” 일삼는 바(所; 自然)를 “알아차리면”, (일부러 일삼는 바가 없음無爲이) 밝은 바(明; 自然)를 일삼을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不知常, 妄作凶.
(도道가 일삼는) 늘 그러한 바를 알아차리지 못하기 때문에, 망령되게 흉한 바를 일으키게 된다.
不知道之所常行, 妄作巧詐, 則失神明, 故凶也.
(이른바) 도道가 “늘 그러하게” 일삼는 바(所; 自然)를 “알아차리지 못하면”, (따라서 마음이) “망령되게” (일부러 일삼아) 꾸미는 바와 속이는 바를 일으키게 되고, 따라서 (일부러 일삼는 바가 없음無爲이) 신령스러운 바(神; 自然·性)와 밝은 바(明; 自然·命)를 망가뜨리게 되며, 따라서 (일삼는 바가) “흉하게 되는 것”이다.
知常容,
(도道가 일삼는) 늘 그러한 바를 알아차릴 수 있으면, (마음과 일삼음이 일부러 일삼는 바가 없음을 품어) 안게 되고,
能知道之所常行, 去情忘欲, 無所不包容也.
(이른바) 도道가 “늘 그러하게” 일삼는 바(所; 自然)를 “알아차릴” 수 있으면, (일부러 일삼는 바가 있는) 마음을 떠나보내게 되고, (마음이) 일부러 일삼고자 하는 바欲를 잊어버리게 되며, (따라서 일삼음이 일부러 일삼음이 없음無爲에 대해) 품어 “안지” 못하는 바를 없애게 된다는 것이다.
容乃公
(마음과 일삼음이 일부러 일삼는 바가 없음을 품어) 안을 수 있으면, (그것이 참된 바를 세상에 남김없이) 드러내게 되며,
無所不包容, 則公正無私, 衆邪莫當.
(이른바, 마음과 일삼음이 일부러 일삼는 바가 없음無爲을) 품어 “안지” 못하는 바를 없애면, (일부러 일삼는 바가 없음無爲이) 참된 바(正; 自然)를 (세상에 남김없이) “드러내게 되고”, (따라서 일부러 일삼는 바가 없음無爲에 대한 세상의) 사사로운 바(私; 有爲)를 없애게 되며, (따라서 일부러 일삼는 바가 없음無爲에 대한) 세상의 (벗어나는 바나) 어긋나는 바(邪; 有爲)가 마땅하지 못하게 된다.
公乃王,
(마음과 일삼음이 일부러 일삼는 바가 없음이 참된 바를 세상에 남김없이) 드러내면, (천하의) 임금이 되는 바를 일삼을 수 있게 되고,
公正無邪, 可以爲天下王.
(이른바, 마음과 일삼음이 일부러 일삼는 바가 없음無爲이) 참된 바(正; 自然)를 (세상에 남김없이) 드러내고, (일부러 일삼는 바가 없음無爲에 대한 세상의 벗어나는 바나) 어긋나는 바(邪; 有爲)를 없애면, 천하의 “임금이 되는 바”를 일삼을 수 있게 된다.
王乃天,
(천하의) 임금이 되는 바를 일삼을 수 있으면, 이내 (덕스러움德이) 하늘과 더불어 아우러지게 되며,
能王, 德合神明, 乃與天通. 治身正則形一, 神明千萬, 共湊其躬也.
(이른바, 천하의) “임금이 되는 바”를 일삼을 수 있으면, 덕스러움德이 (일부러 일삼는 바가 없음無爲이) 신령스러운 바(神; 自然)와 밝은 바(明; 自然)와 어우러지게 되고, “이내” (일부러 일삼는 바가 없는) “하늘”과 더불어 아우러지게 된다. (따라서 천하의 “임금이 되는 바”를 일삼는 사람은 일부러 일삼는 바가 있는 자신의) 몸(身; 心·行)을 다스림으로써, (자신의 몸이 일부러 일삼는 바가 없음無爲에 대해) 참된 바(正; 自然)가 되게 해야 하는데, 따라서 (일부러 일삼는 바가 없는) 하나(一; 自然·道)의 형상(形; 德·天), 천 가지(天; 天下)의 (일부러 일삼는 바가 없음無爲이) 신령스러운 바(神; 自然·性), 만가지(萬; 天下)의 (일부러 일삼는 바가 없음無爲이) 밝은 바(明; 自然·命)가 그(러한) 몸과 더불어 하게 되고, (그러한 몸으로) 모여들게 되는 것이다.
天乃道,
(덕스러움德이) 하늘과 더불어 아우러지면, 도道와 더불어 어우러지게 되고, 같아지게 되며,
德與天通, 則與道合同也.
(이른바) 덕스러움德이 (일부러 일삼는 바가 없는) “하늘”과 더불어 아우러지면, 도(道; 自然)와 더불어 어우러지게 되고, 같아지게 된다는 것이다.
道乃久.
(덕스러움德이) 도道와 더불어 같아지면, 이내 (몸이) 오래 보여질 수 있게 된다.
與道合同, 乃能長久.
(이른바, 덕스러움德이) 도(道; 自然)와 더불어 어우러지고, 같아지면, “이내” (몸이 본래 저절로 그러한 자신의 명命대로) 오래 갈 수 있게 되고, “오래 보여질” 수 있게 된다.
沒身不殆.
(따라서 하늘과 땅이 함께) 무너지고 꺼지더라도 몸이 위태롭지 않게 된다.
能公能王, 通天合道, 四者純備, 道德弘遠, 無殃無咎, 乃與天地俱沒, 不危殆也.
(이른바, 일부러 일삼는 바가 없음無爲이) 참된 바(正; 自然)를 (세상에 남김없이) 드러낼 수 있음, (천하의) “임금이 되는 바”를 일삼을 수 있음, (일부러 일삼는 바가 없는) “하늘”과 더불어 함, “도(道; 自然)”와 어우러짐, (이) 네 가지가 모두 갖춰지면, “도(道; 自然)”와 덕스러움(德; 自然)이 넓어지고 깊어지게 되며, (따라서) 재앙이 되는 바가 없어지게 되고, 허물이 되는 바가 없어지게 되며, (따라서 비유컨대) “이내” “하늘”과 땅이 함께 무너지고 꺼지더라도 위급하거나 “위태롭지 않게 되는 것”이다.
첫댓글 잘못된 부분이 있다면, 모두 저의 부족함 탓입니다.
평안하고, 행복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