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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낫고자 하느냐? / 사 45:9-13, 요 5:1-18
오늘 읽은 말씀에 보면 ‘나를 못에 넣어줄 사람이 없어’라는 말씀이 나온다. ‘사람이 없다’는 헬라 원문으로 ‘안드로폰 우크 에코’이다. 영어로 ‘I have not a man’ 곧 ‘사람이 없다’가 아니라 ‘사람을 가지지 못했다’라는 뜻이다. 베데스자 연못가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다. 병자, 맹인, 다리 저는 사람, 혈기 마른 사람들이 누워있었다. 그러나 38년된 병자에게는 사람이 없다. 원문의 뜻대로 하면 ‘단 한사람’이 없어서 고독해 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본문은 예수님께서 이 병자를 고치신 사건을 가록하고 있다. 이 사건은 예수님의 인간적인 면을 잘 나타내고 있다. 예수님의 인도주의, 예수님 사랑하심, 예수님의 생활 자체가 드러나 있다. ‘사람이 없어’라고 하는 이 사람에게 예수님은 그 한사람이 되어 그를 만나주신다. 그가 사람이 없다고 했을 때에 말씀은 없었지만 ‘내가 여기 있지 않느냐? 네가 필요로 하는 사람이 여기 있느니라’ 하시고 그를 대해 주신 것이다.
한 사람 - 참 귀한 사람이다. 이 사건의 배경을 생각해 보자. 이때는 명절이다. 유대인들에게는 명절이 많지만 큰 명절은 셋이다. 유월절, 오순절, 장막절이 그것들이다. 유대의 명절은 우리나라의 명절들과는 다른 점이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명절만 되면 고향으로 내려가느라고 야단이지만, 유대인들은 그 반대이다. 시골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예루살렘으로 올라와서 명절을 지낸다. 철저하게 하나님 중심이요 율법 중심이다. 하나님의 성전을 중심으로 신앙생활을 한다. 곧 교회 중심이라는 말이다. 중요한 일이 있을 때마다 예루살렘에 모이고 성전에 모였다. 성전 중심의 생활철학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이기에 명절은 당연히 예루살렘 성전에서 지키게끔 되어 있었다. 명절만 되면 인구가 많지 않던 당시에도 5만명 이상이 예루살렘에 모였다고 한다. 어떤 기록에는 15만명 이상이 모였다고도 나온다. 너무 옛날 일이기에 확실하게 알 수는 없지만 한 장소에 15만명이 모였다면 참으로 굉장한 일이다. 엄청난 숫자이다. 유월절, 오순절, 장막절의 세 절기마다 모였는데, 그중 가장 큰 절기가 유월절이다. 오늘 몬문의 절기도 유월절이라고 주장하는 분들이 많다. 이때는 12세 이상의 남자들은 특별한 사정이 있을 때를 제외하고는 의무적으로 모여야 했다. 이렇게 하여 예루살렘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모이게 된 것이다. 심지어 60만명이 모였다는 기록도 있다 아무튼 작은 도시가 시골에서 명절을 지내러 올라온 사람들로 꽉 찼다. 예루살렘에 올라오니 볼 것도 많고 만날 사람도 많다. 모두가 구경거리이다. 다른 성서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 모습이다. 유월절에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위하여 예루살렘에 올라가시지 않는가? 이때 제자들이 성전을 보고 감탄의 말을 예수님께 한다. 이같이 시골사람들이 도시에 올라오면 볼 것도 많고 만날 사람도 많다.
본문 말씀을 살펴보면 제자들이 예수님의 곁을 떠나 있는 것 같다. 무슨 모임에 참석한다든지, 구경한다든지 하면서 모두 흩어졌을 것이다. 예수님만 홀로 남았다. 이제 예수님이 이 명절을 어떻게 지내시는가 보자. 이 점이 중요하다. 아무도 찾는 이 없는 그 사람은 누구일까? 바로 그 사람을 예수님은 찾아가셨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인간성이다. 여기 유월절에 모인 사람들은 각기 반가운 사람들을 만나서 이야기 꽃을 피우는 등 정신없이 나다닌다. 오직 예수님만이 제자도 동반하지 않으시고 홀로 조용히 행동하신다. ‘이 예루살렘에서 가장 외로운 사람은 누구일까? 가장 불쌍한 사람은 누구일까?’를 생각하신 끝에 찾아가신 곳에 바로 베데스다 연못이다. 가장 외로운 자를 찾으시는 예수님을 한번 상상해 보자. 여기에 계시적인 의미가 있다. 멀리서 팔장이나 끼고 우리 인간을 기다리시는 하나님이 아니다. 기다리고만 계시다가 찾아가면 만나주시는 하나님이 아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비유 가운데 탕자의 비유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찾아가시는 하나님으로 설명되어 있다. ‘기다리는 하나님’이 아니라 ‘찾으시는 ’하나님‘ 곧 찾아가시는 하나님이시다. 적극적인 사랑을 나타낸 말이기도 하다.
여러분은 어떤 종류의 사랑을 하고 있는가? 기다리고 있는가? ‘나를 사랑해 주는 것만큼 나도 사랑할 것이다.’ ‘주면 받고 받으면 준다’는 식으로 ‘give and take’로 앉아서 기다리기만 하면 안된다. 예수님은 그렇게 하시지 않으셨다. 찾아가시는 하나님, 먼저 사랑을 베푸시는 하나님이셨다. 우리는 본문에서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사람을 일부러 찾아가시는 모습을 본다. 적극적이고도 주도적으로 가장 외로운 사람을 찾아가신다. 외롭다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가? 질병이 무서운 것이 아니라 실상은 고독이 무서운 것이다. 죽음보다도 더 무서운 것이 고독이라고 한다. 죄송한 말씀입니다만 다같이 함께 죽는 것이라면 그런대로 괜찮다. 혼자 죽어야만 한다는 사실이 무섭고 억울한 것이다. 매도 다같이 맞으면 괜찮은 것과 같은 이치이다. 다같이 불행하면 견딜 수가 있다. 나 혼자만 고독하고 나 혼자만 불행하다는 것만큼 견디기 힘든 것도 없다. 세상에서 제일 어려운 고통은 고독이다. 우리는 욥의 고난을 잘 알고 있다. 가난해지고 병들기도 했지만 끝까지 그를 괴롭힌 것은 바로 고독이었다. 아내가 떠나고 친구도 그를 떠난다.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다. 혼자이다. 욥을 도와줄 사람은 아무도 없다. 도와줄 사람이 없다는 것은 소망이 없다는 것이요, 소망이 없다는 것은 살아야 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욥의 고통이었다. 예수님은 이 즐거운 명절에 가장 외로운 사람을 찾아가 만나시려고 하셨다. 이런 인간성을 여러분들도 갖기를 바란다.
예수님이 찾아가신 곳은 베데스다 연못이다. ‘벧’은 집을 뜻한다. 베들레헴의 벧은 집을 말하고 레헴은 떡을 말한다. 그래서 베들레헴은 떡집을 의미한다. 벧엘에서 ‘엘’은 하나님을 말하므로 벧엘은 ‘하나님의 집’을 뜻한다. 베데스다에서도 ‘에스다’가 자비라는 말이다. 곧 베데스다는 자비의 집이 되는 것이다. 예수님이 찾아가신 곳은 바로 ‘자비의 집’이라는 이름을 가진 연못이었다. 이 연못가에 있다가 물이 움직일 때에 먼저 들어가면 기적적으로 병이 낫는 수가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사람들이 몰려들었고 이름도 베데스다라고 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 베데스다 연못에 자비가 없었다. 다분히 미신적이지만 병자마다 서로 먼저 들어가려고 야단이었다. 낫든 낫지 않든 소원이나 이루어보라고 오래 앓고 있는 병자부터 넣어주면 오죽이나 좋겠나? 여기 38년된 병자가 있지만 도와줄 사람이 아무도 없다. 도와주는 사람이 있는, 또 힘있는 사람이 먼저 물에 들어가는 것이다. 38년된 이 사람, 뒷전으로 밀려나 있다. 38년 동안 누워있었는데도 한번도 연못에 먼저 들어가본 적이 없다. 꼭 낫겠다는 것이 아니다. 마지막 소원인데도 한번도 들어가보지 못한 사람이다. 이 사람을 예수님께서 만나주신다. 이 병자의 모습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보라. 무려 38년 동안 앓아온 병자이다. 흔한 말로 간병에는 효자가 없다.
지금은 돌아가셨지만 박 목사란 분이 계셨다. 그 목사님 부인은 8년동안 자리에 누워있었다고 한다. 자궁암으로 세 번이나 수술을 받았는데 살아날 가망이 없었다. 몸에서는 썩은 냄새가 난다. 돈도 없어서 목사님이 친히 간호를 한다. 자리보전하고 일어나지 못하니 대소변을 다 받아내야 하고, 약도 손수 달여서 먹게 해야 한다. 이렇게 정성으로 간호해도 낫는다는 보장이 없다. 서서히 죽어가고 있을 뿐이다. 하루는 한약을 달여 들고는 문지방을 넘아서려는데 문득 ‘빨리 죽든지 할 것이지 저렇게 살아서 나까지 괴롭히노’ 하는 원망이 들더란다. 바로 그날 부인이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고 한다. 박 목사는 그 때문에 괴로워했다. 8년동안 잘 해오다가 마지막에 왜 그랬느냐는 것이다. 그일만 생각하면 자기 때문에 부인이 빨리 죽은 것 같아서 괴롭다는 것이다. 간병에는 효자가 없다.
병 앓기를 38년, 누가 이 사람을 돕겠나? 소망이 없기에 돕는 사람도 없다. 절망하고 나면 돕는 사람도 없다. 도울 필요가 있어야 돕는 것이다. 아무 쓸모도 없는 쓰레기 같은 사람을 돕겠다고 옆에 앉아서 그 많은 시간을 보낼 사람이 누가 있겠나? 38년, 이제는 친척도 친구도 없다. 어떤 학자들은 이 38년을 상징적으로 말하기도 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하여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기까지 겪은 광야생활은 나온 해와 들어간 해를 빼면 38년이다. 이렇게 생각해 보아도 많은 은혜가 될 것이다. 이 사람이 또한 비참한 것은 미신에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하나님 앞에 기도도 해보았고 이사도 찾아가 보았다. 이것저것 다 해보고 이제 남은 것이라곤 확실한 것도 없는 미신뿐이다. 이 베데스다 연못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연구를 하고 있다. 지진이 많았던 지역이라 온천이 있었던 것 같다. 가끔씩 바람이 불지 않는데도 물이 빙글빙글 돈다. 3하-4절 ‘물의 움직임을 기다리니, 이는 천사가 가끔 못에 내려와 물을 움직이게 하는데, 움직인 후에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됨이러라.’ 이 미신적인 것에 한가닥 소망을 걸고 연못가에 와 있는 것이다. 여기에 와서 앓고 누워있는 것이다. 이사람 저사람이 동정해서 그저 죽지않을 만큼 주는 것을 얻어먹으면서 물이 움직일 때만 기다린다. 그러다가 물이 움직인다고 하면 모두들 ‘와!’ 하고 물속으로 들어간다. 여기 이사람, 엉금엉금 기어가다보면 다른 사람은 이미 다 들어갔다 나오고 있다. 낫든 낫지 않든 들어가 볼 수도 없는 사람이다. 미신에 의존하고 있는 것이다.
소망을 잃어버리고 인간적 여망을 잃어버리면 지푸라기라도 잡으려는 것이 인간의 마음이다. 반드시 낫는다고 해서가 아니다. 물론 과학적인 근거도 없다. 그렇다고 신앙적인 근거가 있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그저 의존해 보는 것이다. 한번 들어가 보자고 와서 누워있는 것이다. 이제는 아예 소원마저 변질되어 버렸다. 한마디로 타락한 소원을 가지고 있다. 낫고 싶다, 꼭 나아야겠다는 것이 아니다. 죽어도 좋으니 물 속에 들어가보고나 죽자는 것이다. 누군가가 도와주어서 나를 맨먼저 물 속에 넣어주는, 더도 아닌 그만큼의 인간적인 것을 바라고 있다. 생각해 보라. 누가 병이 낫는다고 했나? 한번 해보기나 했으면 하는 것이다. 가망이 전혀 없음을 알면서도 수술이나 한번 받아보았으면, 병원에 입원이나 해보았으면 여한이 없겠다는 것이다. 확실한 것이 있어서가 아니다. 마지막 여망, 미신적인 소원일 뿐이다. 이 사람의 소원은 지금 여기까지 와 있다. 한사람을 기다리고 있다. 마음씨 좋은 사람이 나타나 병이 낫든 낫지 않든 나를 맨먼저 물 솓에 넣어주기나 했으면 더 바랄 것이 없는 것이다. 그만큼의 사랑, 그만큼의 인도주의를 바라고 있다. 참으로 대단한 이야기이다. 사형장에 나가는 사람에게 물 한잔 주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미 죽을 사람이지만 그에게 조그마한 동정을 베푸는 것이다. 그런데 이 사람에게는 그 한 사람이 없었다. 사람을 가지지 못했다. 도와줄 한사람이 없다.
예수께서는 이제 이 사람에게 말씀하신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어찌 생각하면 참으로 불필요한 질문이다. 그러나 큰 뜻이 그 말씀 안에 있다. ‘네게 아직도 소망이 있느냐?’라는 말씀이다. 낫고자 하는 소망이 있느냐는 것이다. 소망이 중요한 것이다. 소망이 있는 사람은 살 수 있다. 절대로 소망을 잃어버려서는 안된다. 가장 무서운 죄가 절망이다. 어떠한 경우에라도 소망을 잃어버려서는 안된다. 실망했다, 절망했다라는 말은 마지막에나 하는 말이다. 실망이란 말은 참으로 무서운 말이다. 자녀가 아무리 속을 썩여도 너에게 실망했다는 말을 써서는 안된다. 공부를 잘하건 못하건, 건강하건 약하건, 속을 썩이건 안썩이건, 절대로 써서는 안될 말이다. 엄청난 죄가 된다. 어느 경우에나 소망을 버리지 말 것이다. 스스로에게도 절망하지 마라. 하나님의 사랑이 있고,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하시는 한 절대로 자신에 대하여 실망할 것이 아니다. 실망은 불신앙에서 나온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와 범죄한 것 가운데 가장 큰 죄가 ‘절망죄’였다. 이것이 원망으로 나타났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에 대해서나 타인에 대해서나, 특별히 자기 자신에 대해 실망해서는 안된다.
본문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소망에 대하여 심각한 질문을 하신다. 그런데 이 사람의 대답은 엉뚱한 데로 나간다. ‘주여,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주는 사람이 없어’라고 말한다. 절망적이요, 빈약하고 변질된 병리적 소망이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어떻게 하시나? 예수님은 이 사람의 미신적인 신앙을 꾸짖지 않는다. 만일에 제가 그 현장에 있었다면 어떻게 했을까를 생각해 본다. ‘몸이 병들더니 정신까지 병들었고만. 이제는 틀렸어’라고 했을 것이다. 참으로 어려운 순간이다. 미신적 신앙을 예수님께서는 꾸짖지 않는다. ‘네 신앙이 잘못되었다’라고 책망하시지 않는다. 전혀 다른 차원에서 말씀하신다.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생각하면 참으로 황당하기 그지없는 말씀이다. 보통 병자가 아니다. 38년이나 누워서 지낸 사람이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이 사람, 아마도 이렇게 말했을 법도 하다. ‘누구는 누워있고 싶어서 이러는 줄 아시오? 쓸데없는 소리는 작작하시고 나를 연못에 넣어나 주시오.’
생전 처음보는 낯선 사람이 나타나 무려 38년이나 누워지낸 사람을 보고 거두절미하고 일어나라 한다. 당사자의 소원은 아랑곳없이 말이다. 여기에는 어려운 문제가 있다 바로 믿음이다. 어떤 믿음인가 보자. 먼저, 네가 가졌던 소원을 포기하라는 것이다. 연못에 들어가고자 하는 그 소원은 잘못된 것이니 포기하라는 암시가 있다. 둘째로, 내가 누구냐고 묻지 말라는 것이다. 흔히 우리는 알고서 믿겠다, 생각해 보고 믿겠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 누군지 모른다. 누구냐고 묻지마라. 참 어려운 일이다. 셋째로, 지금까지의 경험에는 없었던 일이다. 내 경험에도 다른 사람들의 경험에도 없었던 일이다. 창조적인 사건이다. 경험에 없었던 것은 믿기가 어렵다. 그런데 이 사람이 일어나라 하신다고 일어날 수가 있겠나? 예수님은 전혀 다른 차원에서 명령하신다. ‘일어나라.’ 지금까지 그가 구했던 소원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그러나 이 사람은 말씀대로 순종한다. 일어난다. 벌떡 일어난다. 38년 동안이나 불가능했던 일이 지금 이루어진다. 모든 추잡하고 비참했던 과거를 다 잊어버리고 오직 하나만을 생각한다. 일어나라 하니 아무 잡념없이 일어난다. 그야말로 직선적인 신앙이다. 자신의 처지나 과거 따위는 생각하지 않는다. 일반적인 경험이나 철학도 하등 상관하지 않았다. 깨끗한 마음이다. 일어나라 하니 ‘예’하고 일어났을 뿐이다. 말씀에 대한 가장 진실한 응답이다. 이제 이 사람은 일어났다. 참으로 능력이요, 기적이다. 기적은 이렇게 나타나는 것이다.
그런데 그 날이 안식일이어서 시비가 된다. 예수님께서는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셨다. 일어났으면 그대로 가라 할 것이지 그까짓 자리는 뭐하러 가지고 가라 하나? 그러나 그를 일으킨 분이 가지고 가라 하니 당연히 가지고 간다. 그대로 순종한다. 안식일이라는 사실은 안중에도 없다. 자리를 들고 가는 이것이 안식을을 범하는 죄가 되었다. 무슨 날인지 상관하지 않은 것이다. 은혜는 모든 율례를 초월하다. 은혜 앞에서는 결코 걸릴 것이 없다. 바리새인이든 제사장이든 서기관이든 상관할 것 없다. 나를 일으키신 그가 가지고 가라니까 그대로 따를 뿐이다. 그가 누구인지는 알바 아니요 알지도 못한다. 그후에 예수님은 성전에서 이 사람을 만났다. 그리고 말씀하신다. ‘보라,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이제 이 사람은 유대인들에게 가서 자기를 고쳐준 사람이 바로 예수라고 증거환다. 마침내 그가 예수님을 안 것이다. 그때까지는 모르고 있었다. 우리는 너무나 알고자 하는 것이 많다. 알겠다고 하는데 믿음이 없다. 이 사람은 아는 바가 없었다. 은혜를 받은 자로서 은혜를 준 자의 말씀에 절대 순종했을 뿐이다. 보통 은혜 받았다고 하면서 순종은 없다. 말씀에 직선적으로 순종하지 못한다. 은혜를 받았으면 순종해야 한다. 교회를 통하여 은혜를 받았나? 교회에 봉사해야 한다. 교회를 사랑해야 한다. 은혜를 받았는데 행동은 엉뚱한 데로 가려하니 문제이다. 오늘 이 사람, 은혜를 준 자에게 깨끗이 순종하고 있다. 그를 높이고 있다. 그에게 어떠한 박해와 비난이 따르든지 상관하지 않는다.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그대로 따를 때에 놀라운 기적이 있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들도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므로 은혜를 체험하는 자들이 되기를 바란다. (1996-0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