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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부활과 빈무덤 / 사 26:6-12, 막 16:1-8
오늘은 주님께서 무덤 문을 박차고 다시 살아나신 날을 기념하는 날이다. 부활이 있기 위해서는 먼저 죽는 것이 있어야 한다. 예수님이 죽기 1주전의 모습을 잠간 살펴보겠다. 어느 병원 복도에 커다란 거울이 걸려 있었다. 그 거울을 기증한 사람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었는데, 그 이름 곁에는 그 병원 원장님의 수술을 받고 살게 된 은혜를 기억하며 감사한다고 적혀 있었다. 이처럼 물에 빠진 사람이 구조를 받았다든지, 불난 집에서 구조를 받은 사람이 있다면 자기를 살려준 구조원을 잊을 수가 없을 것이다. 생명의 은인이기 때문이다.
막달라 마리아가 옥합을 깨뜨려 주님께 헌신하는 모습이 있다. 죽은 오라비인 나사로를 살려주신 생명의 은인인 예수님을 마리아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최고의 예물로 영접한다. 예루살렘성에 들어가기 전에 베다니를 방문한 예수님은 마리아의 따뜻한 영접을 받는다. 이때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에 3백 데나리온이나 되는 값비싼 향유를 부어드리고 자신의 머리카락으로 닦아드렸다. 이때 많은 유대인들이 베다니로 모여들었다. 이들은 예수님을 보기 위해서 왔으나 그 중의 많은 사람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나사로를 보기위해서 왔다. 반면에 대제사장들은 나사로 때문에 많은 사람들의 마음이 예수님에게로 향하는 것을 보자 나사로까지 죽일 궁리를 하였다. 마리아의 순수한 사랑의 영접에 대해 가룟 유다는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2)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 하며 마리아이 행위를 비난하였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머리아의 행위를 칭찬하셨다. ‘그를 가만 두어 나의 장례할 날을 위하여 그것을 간직하게 하라.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있지 아니하리라.’ 나사로만이 아니라 우리들도 예수님을 통해 구원받은 사람들이다. 예수님은 우리의 생명의 은인이시다. 마리아처럼 값비싼 향유는 드릴 수 없을지라도 우리의 모든 마음과 정성을 주님의 발에 부어드릴 수 있어야 하겠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이 십자가는 실패작이라고 주장한다.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에게 줄 수 있는 두 개의 성구가 있다. 하나는 표적을 구하는 유대인에게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여줄 것이 없다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이다. 또 하나는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보낸 편지 중에 기록된 십자가의 도에 대한 말씀이다. 예수님은 요나가 사흘간 물고기 뱃속에 있다가 나온 것처럼 자신도 십자가에 못박혀 죽고 사흘만에 다시 살아날 것을 예언하셨다. 그리고 또 예언대로 이루어졌다. 이 이상의 표적을 줄 수는 없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 된다고 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그 삶이 절망한 우리들에게 소망을 주고, 끊어진 하나님과의 관계를 다시 이어서 놀라운 기쁨과 새생명을 가져다 주었다. 어찌 이런 십자가가 실패작일 수 있는가? 그런데도 그런 말을 하는 이유는 그들에게 신앙이 없기 때문이다. 십자가는 실패작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공작이다. 반면에 유대인에게 있어서 주님의 십자가는 거리낌이었다. 왜냐하면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기 때문이다. 헬라인에게 있어서 주님의 십자가는 미련한 것이었다. 헬라인이 요구하는 것은 지혜인데, 예수님의 십자가는 그들이 이성과 지혜로는 이해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며 하나님의 지혜이다. 십자가의 도가 그리스도인에게는 얼마나 큰 자랑이요 영광인지 모른다. 왜냐하면 우리를 구원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니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이를 우리만의 자랑거리로 국한시켜야 되겠나? 모든 사람의 자랑거리가 되도록 복음증거에 힘써야 할 것이다.
임실 오수에 가면 농협 옆에 개 동상이 있다. 저는 오수에 있을 때 자주 보면서 왜 개를 이곳에 동상까지 세워 놓았나, 그리고 조그만 공원이 있는가 하고 의문이 있었지만, 그 옆의 비문을 보고 알았다. 제가 있을 때는 둔남면이었는데 지금은 오수면이다. 개 이야기는 천년 전부터 내려오는 이야기이다. 김개인이라는 사람이 어느 날 개를 데리고 장에 갔다가 오면서 술에 취해 산중에 쓰러져 잠이 들었다. 그런데 이때 마침 산불이 났다. 자기 주인이 불에 타 죽게 될 위험에 처하자, 그 개는 냇물에 몸을 적셔 와서 그 주변의 마른 풀을 축축하게 하여 불붙는 것을 막아 주인을 살렸다. 개는 지쳐 죽었고, 술에서 깨어난 주인이 어찌된 상황인지를 깨닫고는 양지바른 곳에 그 개를 묻어주었다. 그리고 그는 개무덤에 지팡이 하나를 꽂아두었는데 그 지팡이에서 싹이 나 큰 나무가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마을의 이름을 개오(獒)자와 나무 수(樹)자를 따서 오수라고 부르게 되었다. 이 이야기의 교훈은 한낱 개도 보은을 하는데 사람은 어떠냐는 것이다. 그래서 배은망덕한 사람을 가리켜 개만도 못하다고 말한다. 한 미물인 개도 길러준 주인의 은혜를 잊지 않고 목숨을 바쳐 갚았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우리들의 삶을 생각해 본다. 특히 예수님을 배신한 가룟 유다를 생각해 본다.
갸륵한 개 이야기의 교훈으로 볼 때 가룟 유다는 미물인 짐승보다 못한 인간 축에 든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최후의 만찬 중에 떡을 떼어 주시며 떡을 받아 먹는 자 중에 자신을 배반할 자가 있다고 하시면서, 넌지시 가룟 유다를 지적하신다. 이에 유다는 예수께서 주시는 떡을 받은 뒤 바로 밖으로 나간다. 가룟 유다는 세가지 면에서 짐승 만도 못한 짓을 범했다. 첫째는 예수님의 은혜의 질책을 받아 들이지 않고 망각했다는 점이다. 둘째는 주께서 부여하신 귀중한 사명을 내던졌다는 점이다, 셋째는 빛과 생명 가운데 있으면서도 그것을 깨닫지 못한 점이다. 이 배신자 가룟 유다의 이야기는 꼭 남의 이야기만은 아니다. 이 시간 내 속에도 유다와 같은 모습은 없는지 돌아보자. 그리고 유다와 같은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늘 기도하자.
1943년 2월 3일 2차 대전 중 미국의 도체스타호라는 군함이 대서양에서 적의 어뢰를 맞고 침몰되었다. 904명이 타고 있었는데 그중 678명이 죽었다. 그 군함에는 다니엘 폴링이라는 군목이 있었다. 이 목사님은 군함에 타기 전에 아버지에게 이렇게 부탁했다고 한다. ‘제가 전쟁에서 살아서 돌아오기를 기도하지 마시고, 어떤 상황 속에서도 신앙인으로 행동할 수 있도록 기도해 주십시오.’ 도체스타호가 대서양에서 침몰하게 되었을 때 풀링 목사님은 몸에 구명의를 입고 있었다. 그러나 목사님은 자기의 구명의를 벗어서 구명의가 없는 다른 병사에게 주었다. 그리고는 배에 남아 있는 다른 전우들과 함께 서로 어깨동무를 하고 찬송을 부르며 함께 가라앉았다.
예수님의 죽음은 대속의 죽음이다. 유월절 어린양의 죽음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탈출할 때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의 집 문설주에 발라진 양의 피를 보고 재난을 비켜가게 하셨다. 유월절에 흠없는 어린양의 죽음, 그러나 어린양이 대신 죽음으로서 다른 생명들이 살아난다. 그래서 우리는 자신을 희생하여 다른 생명을 살리는 아름다운 사람을 볼 때마다 유월절 희생 양을 만나는 것이다.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것이다. 우리는 바로 이 유월절 희생 양의 삶,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늘 기억하며 살아야 한다.
오늘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다가 무덤에 묻히시고 다시 사신 부활절이다. 그러나 우리는 부활의 영광을 보기 전에 십자가의 죽음을 먼저 주목해야 한다. 왜냐하면 부활은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불교의 상징이 만자 만(꺽어진 만)이고, 원불교의 상징이 빈공(O 동그라미)이라면, 기독교의 상징은열십(十)이다. 10이라는 숫자는 인간적인 완전을 의미한다. 십자가는 수직과 수평의 더하기, 곧 만남의 표시이다. 하나님과 인간의 화해의 상징이다. 그러나 이 아름다운 십자가는 참으로 무서운 절망과 고통과 죽음을 뜻하기도 한다. 부할의 새아침은 이같은 십자가의 죽음이라는 어두운 밤을 거쳤기 때문에 맞이할 수 있다. 부활의 영광은 십자가의 수치와 고통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고 외치시며 몸부림치시는 예수님의 고난과 희생의 죽음이 아니었다면 어찌 부활의 기쁨과 승리를 맛볼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우리가 부활의 기쁨을 누리기 전에 먼저 그분의 십자가를 기억해야만 한다.
오늘 본문 말씀은 예수님의 빈무덤에 대한 기록이다. 비어있는 무덤, 그리고 빈무덤을 대하는 여인들이 모습에서 우리는 많은 진리를 알게 된다.
예수님의 빈무덤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의 부활사건이다. 부활의 물적증거가 빈무덤이다. 부활하신 예수께서 무덤 안에 계실 리가 없다. 대적자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와서 예수의 시체를 도둑질해 갔다는 소문을 퍼트렸으나 그 소문은 엉터리(가짜 뉴스)이다. 예수님께서 잡히실 때 다들 도망갔고,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번이나 부인하고 저주하며 맹세까지 했던 겁쟁이 제자들이 위험을 무릅쓰고 시체를 훔쳐갈 리가 없기 때문이다. 또한 무덤 문을 큰 바윗돌로 막았을뿐 아니라 빌라도 총독이 도장을 찍어 인봉하였고, 군병들이 무장하고 지키고 있었기 때문에 그 누구도 예수님의 시신을 훔칠 수가 없었다. 그러기에 빈무덤은 예수님이 틀림없이 부활하셨다는 증거이다.
예수님의 빈무덤에서 들을 수 있는 말씀이 있다. 첫째, 불의가 정의를 이기지 못한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셨을 때는 악과 불의가 이긴 듯 했다. 그러나 사흘만에 예수님은 다시 사셨고, 결코 악이 하나님의 정의를 이길 수 없음을 밝히셨다. 둘째, 미음이 사랑을 이기지 못한다는 것이다. 적대자들은 시기와 질투와 미움으로 예수님을 잡아 정죄하고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지만, 예수님은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인 원수들을 용서하시고 그들을 위해 기도까지 하셨다. 예수님의 부활은 이처럼 미움에 대한 사랑의 승리를 증거하고 있다. 셋째, 거짓이 진리를 이기지 못한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거짓 종교 지도자들에 의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무덤에 묻히셨지만, 부활하심으로 거짓된 것은 그들이며 예수님은 진리 자체임을 증거하셨다.
예수님의 빈무덤에서부터 기독교가 시작됐다. 그래서 우리의 신앙의 중심에는 부활이 있다. 그러므로 이 부활을 증거하고 선포하는 것이 우리들의 삶이어야 한다. 예수님은 우리들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지만, 장사한지 사흘만에 무덤에서 부활하시어 죽음과 불의의 관계를 이기시고 승리하셨다고 증거해야 한다. 우리 삶과 세계에 소망을 주는 것이 부활의 증거이며 선포이고 우리의 삶이어야 한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의 무덤이 빈무덤이 된것처럼 우리들의 무덤도 빈무덤이 될 것을 믿어야 한다. 예수님의 부할은 곧 우리의 부활이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그리스도인들은 무덤의 존재가 아니다. 믿는 자의 무덤은 곧 빈무덤이 될 것을 믿어야 한다. 무덤은 잠든 육체가 잠시 쉬는 안식처요 부활을 기다리는 동굴이다. 장차 주님이 재림하실 때 이 무덤 문을 열고 일어설 것을 믿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무덤 너머의 소망 가운데서 살아야 한다. 사도 바울은 이런 소망을 가졌기에 이렇게 외친다.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그러나 만일 육신으로 사는 이것이 내 일의 열매일진대, 무엇을 택해야 할는지 나는 알지 못하노라. 내가 그 둘 사이에 끼었으니, 차라리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 그렇게 하고 싶으나, 내가 육신으로 있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빌 1:21-24)
성도의 모든 소망은 무덤 너머에 있다. 무덤 너머 하늘나라에서 우리에게 소망을 주신다. 부활 영생이 없는 신앙은 회칠한 무덤이다. 무덤 너머 부활 영생이 없다면 인간의 모든 것은 다 무덤에 회칠한 것에 불과하다. 베드로는 벧전 1:3-4절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 하늘에 간직한 부활의 산 소망으로 우리는 언제나 죽음 너머의 승리를 갖게 된다. 전에 한신대학 학장으로 계셨던 김정준 목사님은 그가 젊은 날 마산 폐결핵 요양소에서 결핵 3기로 희망이 없는 사람이었다. 이 요양소에서는 매일 같이 환자들이 죽어나갔다. 그러나 김 목사님은 죽음에 초연한 사람으로만 보였다, 곁에 있던 사람이 죽음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을 때 그는 이런 시로 답했다고 한다.
“내가 죽는 날”
내가 죽는 날그대들은 저 좋은 낙원 이르리니 찬송을 불러주오또 요한계시록 20장이하 끝까지 읽어주오그리고 나의 묘패에 이것을 새겨주오임마누엘 단 한 마디만을!내가 죽는 날에는 비가와도 좋다.그것은 나의 죽음을 상징하는 슬픔의 눈물이 아니라예수의 보혈로 내 죄 씻음을 맞는 감격의 눈물인 까닭이다.내가 죽는 날에는 바람이 불어도 좋다.그것은 나의 이 세상의 모든 시름을 없이 하고하늘 나라로 올라가는 내 길을 준비함이기 때문이다.내가 죽는 날에는 눈이 부시도록 햇빛이 비치어도 좋다.
그것은 영광의 주님 품에 안긴 얼굴 광채를 보여줌이라.내가 죽는 시간은 밤이 되어도 좋다.캄캄한 하늘이 나의 죽음이라면저기 빛나는 별의 광채는 새 하늘에 옮겨진 나의 눈동자이어라. 내가 죽는날나를 완전히 주님의 것으로 부르시는 날나는 이날이 오기를 기다리노라.다만 주님의 뜻이라면이 순간에라도 닥쳐오기를 번개와 같이 닥쳐와번개와 함께 사라지기를.... 그 다음은 내게 묻지 말아다오내가 옮겨진 그 나라에서만내 소식 알 수 있을 터이니내 얼굴 볼 수 있을 터이니!
김정준 교수는 죽음을 부활생명으로 가는 관문으로 보았고 자신이 빈무덤을 보았다. 그리고 무덤 너머의 영원한 생명을 보는 그리스도인의 승리를 그는 병상에서 고백할 수 있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 12:2) 우리는 부활하신 주님을 바라보아야 한다. 부활하신 주님은 지금도 보좌 우편에 앉아계셔서 우리를 기다리고 계신다. 스데반 집사가 돌에 맞아 죽으면서도 부활하신 주님을 보았기에 그는 죽으면서도 무덤 너머의 자기를 보았고, 자기 무덤을 빈무덤으로 보았기에 그는 죽어도 승리할 수 있었으며, 원수를 물리칠 수 있었으며, 그의 생은 온통 사랑으로 충만했던 것이다. (1995-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