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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를 바라보며 / 대상 28:1-10, 엡 2:11-22
요즘 이은성이 쓴 ‘동의보감’을 드리마한 MBC 월요드라마인 허준의 인기가 아주 높다고 한다. 왜 그런가? 여기에도 많은 의견이 있다. 그 하나는 자신의 출세나 명예를 포기하면서까지 환자들을 돕는 헌신적인 의사는 그때나 지금이나 아쉬운 존재이다. 그래서 드라마에서나마 바람직한 의사상을 제시한다는 것에 의미가 있다. 다른 의견은 이렇다. 침 한방을 놓으면 눈이 떠지는 등 과장이 심하고, 한의학을 너무 신비화하는 경향이 있다. 이런 식의 영웅화는 한의학에 대한 일반인의 인식을 왜곡하는 경향이 있다. 어쨌든 허준의 인기가 높은 것은 의사와 환자의 관계, 인간적이고도 헌신적인 의사를 만나기 어려운 현실과 관계가 있다고 본다. 또한 허준을 통해 자가기 맡은 사명에 철저한 것을 본받을 만하다.(의약분업으로 인한 의사들이 파업)
다윗은 이스라엘을 통일한 왕이다. 그는 자신의 사명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그는 사울왕의 자식이 아니다. 다윗의 뒤를 잇는 솔로몬도 다윗이 맏아들이 아니다. 다윗도 솔로몬도 세상적으로 볼 때는 자격이 없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 일을 하셨다. 이스라엘의 왕은 사울도 다윗도 솔로몬도 아니다. 하나님이 왕이셨다. 하나님은 이스라엘뿐 아니라 세상 모든 것의 지배자이다. 그렇다면 그의 뜻에 순종하고 나가는 것이 다윗의 할 일이었다. 하나님은 다윗을 왕으로 만드시고 주위 모든 나라들을 평정하게 만드셨다. 그를 모든 것 위에 높여서 지배하게 하셨다. 하지만 그에게는 하나님을 위한 성전을 짓지 못하게 하셨다. 만약 다윗이 계속 성전을 지으려고 했더라도 결국에는 성공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나님은 피를 많이 흘린 그가 성전 짓기를 원하지 않으셨다. 다윗의 사명은 거기서 그치는 것이다. 이제 성전은 아들 솔로몬이 지어야 한다. 그래서 다윗은 모든 준비만 갖추고는 아들에게 성전 건축을 물려준다. 얼마나 그 성전이 보고 싶었을까? 얼마나 자기 손으로 성전을 짓고 싶었을까? 그러나 그것은 개인의 소원일 뿐이다. 그것도 하나님의 뜻임을 안다면 믿음으로 장차 이루어질 성전을 볼 수 있다.
1. 오늘까지 하나님은 인도하셨다.
다윗은 선포한다. 4절 ‘그러나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께서 전에 나를 내 부친의 온 집에서 택하여 영원히 이스라엘 왕이 되게 하셨나니, 곧 하나님이 유다 지파를 택하사 머리를 삼으시고, 유다의 가문에서 내 부친의 집을 택하시고, 내 부친의 아들들 중에서 나를 기뻐하사 온 이스라엘의 왕을 삼으셨느니라.’ 하나님은 이스라엘 전체에서 유다를 택하셨다. 수백만명이 수십만명으로 축소되었다. 거기서 다시 이세를 택하셨다. 그러자 수십만명이 다시 수십명으로 줄어들었다. 그 중에서 다윗이 택해진다. 축복은 이처럼 수백만명 가운데 바로 나 한사람에게 임한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모든 사람에게 수백만명 중 하나의 축복은 임한다. 남들은 잘되고 나는 잘 안되는 것 같은가? 하나님은 수억만의 사람들 중에 나를 특별하게 만드셨다. 그렇다. 나의 삶은 기적이다. 여러번 죽을 뻔한 경우에서 건져주셨다. 차가 옆을 스쳐간 적이 얼마나 많았던가. 병을 앓은 적이 얼마나 많았던가. 그리고 나를 구원하셔서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셨다. 내가 가진 모든 것이 다 하나님으로부터 왔다. 내가 머무는 가정,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 모두가 하나님이 주셨다. 하나님은 이곳까지 나를 인도하셨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2. 내일 일은 다른 사람에게 맡기신다.
6절 ‘내게 이르시기를 네 아들 솔로몬 그가 내 성전을 건축하고 내 여러 뜰을 만들리니, 이는 내가 그를 택하여 내 아들로 삼고 나는 그의 아버지가 될 것임이라.’ 다윗이 모든 것을 하는 게 아니다. 그는 늙었다. 그리고 그는 성전 건축하는데 적합하지 않은 인물이었다. 하나님은 그 사실을 알려주셨다. 하나님을 위해서 성전을 짓고 싶었으리라. 최고의 성전을 만들고 거기서 하나님께 예배하고 싶었을 것이다. 위대한 성전을 지은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었지 않았겠나?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했다. 거기 대항해서 원망하고 자기가 하겠다고 주장하지 않았다. 순종하는 그 자체가 성전 건축보다 더 기쁘고 감사한 사람이 다윗이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가 할 일이 있고 남이 할 일이 있다. 이것을 분별하는 것도 지혜이다. 그것을 모르고 다 자기가 하려는 것도 미련한 일이다. 성전에 관한 한 다윗의 할 일은 준비하는 것이다. 이렇게 준비하는 사람이 얼마나 귀한가. 요즘 프로 축구가 개막이 되었는데 축구에서 골인시키는 선수 못지 않게 골을 넘겨주는 선수도 귀하다. 오늘날 우리가 잘 된 것은 우리가 잘 한 것이 아니다. 우리 선배들이, 부모들이 고생을 한 결과를 우리가 먹는 것이다, 하나님은 준비하는 사람도 귀하게 여기신다.
3. 그것을 내다보며 감사하게 하신다.
그러나 준비하는 사람은 열매를 먹지 못하는게 아닌가? 골인시킨 선수의 이름 외에 도움을 준 선수는 기억하지 않는다. 우리의 부모들은 오늘의 풍요를 맛보지 못했다. 이것이 세상의 원리인 것은 틀림없다. 그러나 믿음이 사람들은 그렇지 않다. 믿음으로 장자 될 것을 바라보면서 즐거워한다. 히 11:8-10절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 믿음으로 그가 이방의 땅에 있는 것 같이 약속의 땅에 거류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 및 야곱과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 이는 그가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라.’ 아브라함도 이삭도 야곱도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을 한 평도 자기 대에는 얻지 못했다. 단지 자기가 묻힐 매장지를 돈 주고 샀을 뿐이다. 믿음의 사람은 하나님의 약속하신 것을 미리 끌어다 다녀보고 경험하고 기뻐한다. 이미 누리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라고 하였다. 믿음은 장래 될 일을 지금 경험하게 한다. 다윗은 자기가 짓지는 못하지만 장차 이루어질 성전을 보며 말할 수 없는 기쁨으로 하나님께 경배했던 것이다.
4. 오늘도 믿음 속에 살게 하신다.
8절 ‘이제 너희는 온 이스라엘 곧 여호와의 회중이 보는 데에서와 우리 하나님이 들으시는 데에서,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모든 계명을 구하여 지키기로 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이 아름다운 땅을 누리,고 너희 후손에게 끼쳐 영원한 기업이 되게 하리라.’ 믿음은 언제나 현재이다. 지금은 아무렇게나 살다가 죽은 후에 날개 달고 하늘에 올라가는가? 지금은 슬프고 비겁하게 살다가 하늘나라에 가서 위로를 받는가? 신앙은 언제나 현재의 문제이다. 구원은 지금 경험해야 한다. 과거의 모든 죄는 지금 용서받았다. 지나간 아픔과 상처도 지금 다 치유받아야 한다. 지금 주가 주시는 생명과 능력을 맛보아야 한다. 그렇다면 장래의 될 일도 현재로 끌어당겨 볼 수 있다. 경험할 수 있다. 그것이 신앙이다. 모두 이 시간에 다 누리고 맛보는 것이다. 다윗은 성전 완공을 내다보며 기뻐하였다. 성전에서 예배하는 것처럼 지금의 성막에서 하나님을 찬송하였다. 우리도 그렇다. 장차 될 일이 우리 앞에 펼쳐지지 않아도 감사하며 예배할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기도한 내용들을 모두 현재의 것으로 누리고 감사할 수 있으리라. 그리하여 부족함이 없이 항상 넘치는 기쁨 속에 하루하루를 살아갈 수 있으리라.
교회가 전주로 이전을 하는 과정에서 참으로 많은 일들이 있었다. 작년 6월 보상금이 나오고부터 약 10개월간이 10년은 된 것처럼 느껴진다. 교회를 어디에 세우느냐 하는 문제부터 시작해서, 전주에 교회가 거의 7-80% 지어져가는데 김권사님 자녀들이 진안에 교회를 지어야 한다고 나서면서부터 문제가 심각해졌다. 요즘은 교회를 사고팔기도 한다면서 교회를 팔아줄 테니까 팔아버리고 진안에 교회도 짓고 상가도 사서 거기서 나오는 세로 목회자 생활비를 하면 되지 않느냐, 친척 변호사가 장로인데 재판하면 우리가 승산이 있다고 하더라는 등 이런 말 저런 말이 분분했다. 재판을 해서 교회 재산을 나누려면 교인만 소송 자격이 있으니까 교인 자격을 얻기 위해서 권사님 자녀들이 주일마다 교회에 출석하겠다는 말도 있고, 여러 교인들에게 찾아오거나 전화를 하여 귀찮아서 교회에 당분간 빠져야겠다는 말도 들려왔다. 또한 권사님이 희사한 땅 값을 돌려달라고 통장번호를 알려주면서, 여기에 입금시키라는 말도 있고, 지난 번 노회 때 갈보리교회 목사가 대부분의 교인들이 진안에 남는데도 자기 마음대로 교회 돈 다 가지고 전주에 교회를 짓는다는 유인물을 뿌리려 한 일 등등. 그런 와중에 진안에 남는 분들을 위한 배려의 문제로 박연생 장로님이 서운해 하셨다는 말부터 시작하여, 모든 일들이 권사님 자녀들과 박 장로님이 연관이 된 것으로 소문이 소문을 낳게 되었다. 당회에서도 서먹한 관계가 계속되었다. 교인들간에 작은 일에도 신경을 곤두세우게 되고, 사소한 일에도 오해가 생기고, 그 오해가 다시 서로에게 상처를 주었다. 마음을 괴롭히는 많은 이야기가 계속되었지만 저는 모든 일들이 시간이 지나면 서로 이해되겠지 생각했다.
그러나 점점 갈등의 골은 깊어지게 되었다. 저도 박연생 장로님이 서운했다. 박동열 장로님이나 김인권 장로님은 전주로 이사오더라도 진안에 교회를 짓게 되면 진안으로 나오시겠다고 하셨는데, 왜 그런 마음을 갖지 못할까? 어려서부터 다닌 교회이고 장로니까 자가용 차도 있으니 다른 집사님들 모시고 나올 수도 있을텐데... 농촌을 위해 평생을 살겠다고 결심하신 분이라 그런가보다라고 이해하려 애쓰기도 하고... 이런 심정을 가지고 지난 주일 박연생 장로님을 찾아뵙게 되었다. 장로님도 고향교회가 타 지역에 세워진다는 생각에 반대도 했고, 어떻게든 진안에 세워지게 하려고 노력도 했다고 한다. 그리고 권사님 자녀들이 장로님과 상의하기 위해 만나보자고 해서 만나주셨다고 한다. 그러나 그동안 많은 일들이 있었지만, 확실한 것은 자신은 진안에 남더라도 권사님의 자녀들과 같이 재판을 한다거나, 다 지은 교회를 팔아 돈을 나누는 일은 절대 하지 않을 거라는 것이다. 더구나 권사님의 자녀들이 재판을 한다고 앞장을 서달라면 ‘그것은 세상 사람들이 하는 일이지 하나님을 믿는 교회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라고 분명히 말씀을 드렸다 한다. 지난 번 노회 때에도 권사님 자녀들이 ‘갈보리교회 목사가 대부분의 교인들이 진안에 남는데도 자기 마음대로 교회 돈 다 가지고 전주에 교회를 짓는다’는 유인물을 뿌리려 한다고 해서 류후열 목사님과 진안중앙교회 정목사님, 김장로님 등 네명이 함께 가서 그래서는 안된다고 적극 말렸다고 한다. 박 장로님은 우리 인간은 모르지만 하나님의 뜻이 있었기에 전주에 짓게 되지 않았나 생각하신다고 했다. 무엇보다도 이 모든 아픔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우리 갈보리교회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는 기회로 삼자고 하셨다. 마지막으로 장로님이 말씀하셨다. ‘만일 내가 그들과 동조를 했다면 지금쯤 무슨 일이 생겼어도 생겼을 것이다. 그런데 교인들이 인사해도 옛날처럼 같이 웃어주지 않고, 이상한 눈으로 바라보는 것을 보면서, 칼로만 사람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입으로도 사람을 죽일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며 쓸쓸히 웃는 장로님의 얼굴을 보니 정말 부끄럽고 가슴이 저려왔다. 여러분들 중에도 박연생 장로님에 대해 혹 서운한 마음이 있다면 이 시간 ‘그럴 수도 있겠구나’ 하고 장로님의 입장이 되어서 이해하고 기도하기 바란다. 박동열 장로님은 ‘박연생 장로님만 전주에 가도 김권사님 자녀들이 이렇게 못했을 텐데’라고 말씀하지만 그렇지 않다. 박연생 장로님이 전주로 이사가더라도 그 자녀들 입장에서는 그렇게 하고도 남을 것이다.
저는 우리 교회 장로님들을 존경하고 사랑한다. 다른 교회들을 보면 장로님들이 교인들 위에 군림하며 모든 것을 마음대로 하고, 교회에 파당을 만들며, 목사의 말을 무시하는 것들을 많이 보아왔다. 그런데 우리 교회 장로님들은 교회 부서진 것 있으면 망치들고 고치고, 형광등 갈아끼우고, 교회 풀을 깎고, 교회 논 농사지을 때 자신의 일보다 더 앞장서서 힘써 일했다. 장로님들 자신의 집보다 교회가 더 깨끗하고 아름다워야 한다고 생각하시고 물질적으로 아까운 줄 모르고 헌신하셨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갈보리교회는 사랑이 많은 교회라고 부러워했다. 저도 목회자들을 만나면 우리 교회 장로님들 같은 분이 없다고 자랑을 많이 했다. 이런 아름다운 교회가 지금은 나눠지고 찢기고 아파하고 있다. 장로님들, 그리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정말 여러분께 죄송하다. 하나님의 제단에서 서로 사랑하고 용서하라는 말씀을 외치면서도, 제가 먼저 사랑을 실천해지 못했고 용서하지 못했다. 그런 마음을 품도록 여러분의 영적인 의식을 각성시키지 못했다. 장로님들을 비롯한 모든 성도들의 마음을 나누이게 하고 아프게 한 것은 제 탓이다. 서로 하나되게 하지 못하고 지금까지 골을 깊게 한 것도 바로 제 탓이다. 이 일의 모든 배후에 우리 교회를 나누고 쪼개려고 하는 사탄의 세력이 있음을 깨닫게 해주지 못하고, 합심하여 기도하여 물리치지 못한 것이 바로 저의 부족한 탓이다. 너그럽게 용서해 주십시오.
성경에 보면 ‘사탄은 우는 사자처럼 삼킬 자를 찾아다닌다’고 했는데 바로 사탄이 우리의 연약함을 알고 찾아온 것이다. 우리가 서로를 원망하고 서로의 마음을 할퀴는 어둠 속에 있을 때 사탄은 하나님을 조롱하며 기뻐 손뼉치고 춤을 추었을 것이다. 성경은 이렇게 말씀한다. 엡 2:16-18절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시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이는 그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가 고통 속에 아파하며 신음할 때 우리 주님은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께 간구하고 계셨을 것이다. 당신이 여전히 사랑하고 있는 갈보리교회 자녀들을 지켜보며, 우리보다 더 괴로워하시고 안타까워 하셨을 것이다. 우리 교회의 고통을 보시고, 고독을 보시고, 아픔을 보시고, 좌절을 보시고, 괴로움을 보시고, 눈물을 보시고, 허물을 보시고, 우리를 위해 하나님 아버지께 지금도 간구하고 계실 것이다.
이 시간 감히 말씀드릴 수 있다.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 본문 15절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라는 주님의 말씀이 들리지 않는가? 서로 용서하라, 서로 용납하라, 서로 사랑하라,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져라. 그 동안의 모든 갈등은 갈보리교회를 염려하는, 갈보리교회가 더 좋은 교회가 되게 하기 위한 걱정에서 비롯된 일이다. 이제는 서로를 위해 기도해 줘야 할 때이다. 우리와 떨어지게 된 박연생 장로님도 마음이 바뀌어 우리와 함께 전주로 와서 예배드릴 수 있게 해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자. 모두가 한 마음이 될 때 우리 교회를 통해 하나님은 더 큰 영광을 받으실 것이다. 예수님을 보라. 십자가의 모든 고통을 당하시면서도 저들이 모르고 그랬으니 저들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하셨다. 주님은 우리에게도 이것을 원하신다.
이제 우리 교회가 전주로 완전히 이사올 날도 얼마 남지 않았다. 그동안 성전을 짓느라고 수고한 분들이 많다. 김 장로님은 하루에도 몇 번씩 진안에서 전주로 오가면서 많은 신경을 쓰셨다. 박정로님은 불편한 중에도 시간날 때마다 교회를 들려 기도하면서 깊은 관심을 가지셨다. 장인덕 집사님은 이사온 후부터 매일 교회에서 살다시피 하면서 봉사하셨다. 이명환 집사님은 몸이 회복되면서부터 열심을 내셨다. 모두가 감사할 뿐이다. 하나님은 뜻이 있어서 진안 시골 구석에 있는 하나님의 성전을 낯선 이곳 전주 땅으로 이전하게 하셨다. 다윗도 짓지 못한 성전을 우리 교인들의 손으로 짓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하나님을 찬양하며 영광을 돌리자. 전에도 소문이 좋은 갈보리교회였지만 그전보다 더 좋은 소문이 나게 하기 위해서 노력하자. 교회가 곡 해야 할 일이 있다면 함께 의논해서 진행해 나가자. 신앙으로 서로 격려하고 위로하며 기도해 주는 성도들이 되자. (2000-15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