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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27일 [현대사상세미나] [토론 정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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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3기 현대사상세미나 07
류동일: 탈식민주의와 해방운동
토론자: 후기 근대성의 방법론들이 해체주의라든지 상대주의 등을 대체로 지향하고 있습니다. 발제에서 강조한 ‘지정학적’이라는 말은, 노동자 국제주의를 생각할 때, 우선 보편성 및 객관성, 그리고 상대주의에 관한 논쟁을 불러낼 것 같습니다. 둘째로 실천적으로 노동자 정치를 고려할 때, 각각의 민족이 처한 여러 상황에 대한 고민 때문에, 성적으로 갈라치고 편을 나누는 경우와 마찬가지로, 이득을 보는 집단은 여전히 기득권을 가진 자본주의 세력 아닌가요. 첫째 물음과 관련짓자면 상대성을 계속 존중하자는 것이냐, 경제문제는 어쩌자는 것이냐 하는 의문이 듭니다.
발제자: 미뇰로 입장에서는 서구 근대성의 비판적 논의들과 약간 결을 달리합니다. 내부 경계와 외부 경계를 구분을 해서, 내부 경계에서 나오고 있는 비판의 논의와 외부 경계에서 나올 비판의 논의를 글로벌 디자인 속에서 일정 부분 공유할 수 있는 부분을 공유하겠지만, 결국 합치되지 않는 부분들이 있습니다.
지정학적 차이가 있으니까 그냥 각자 갈길을 가자 이렇게 되면 기득권에 유리한 방향으로 갈 것입니다. 그보다는 공유할 수 있는 부분들은 공유하되, 분명한 지정학적 차이가 존재하고 있으므로 절감하는 문제의 지점들이 다르기 때문에 돌파하는 방향이나 방법상 분명한 차이가 존재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부각한다고 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미뇰로의 시각은 근본적이라고도 볼 수도 있습니다. 근대성의 신화가 해방을 가져오지 못했다는 결과보다는 근대성의 출발부터가 잘못됐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근대성/식민성이라는 시각입니다. 근대성이라는 것이 해방을 의도했던 것이 아니라, 타자의 식민화를 빼고 얘기하기 힘들다는 측면에서 이미 출발부터 어두운 면을 내장하고 있는 것이라는 입장입니다. 근대성의 시각에서 익숙하게 지냈던 서구인들은 식민성이라는 어두운 면을 보지 못하고 일면만 보고 있습니다. 미국 독립 전쟁에 환호했지만 그 환호 뒤에 있었던 폭력을 얼마나 감추어 왔는가 하는 부분 등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결국 시각과 관점을 바꿔야 이런 접근이 가능하다는 입장에서, 보편과 상대의 문제보다는 내 시각이 어디에 기초했는지부터 좀 더 따질 필요가 있다는 문제의식 조금 더 강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토론자: 아무튼 억압과 착취, 약자에 대한 이제까지 온갖 야만들이 단순하게 맑스주의 틀 안에서 설명되는 걸 훨씬 넘어서서 다양한 형태로 이루어져 왔고, 인종적 지정학적 차원에서 특히 식민주의 문제가 진행되어 왔다는 데에 공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자본주의가 전 지구를 거의 빈틈없이 뒤덮고 있는 시점에서, 보편성 문제가 좀더 강력히 제기될 수 있지 않은지 물을 수 있습니다. 각각의 위치에서 더 절실하게 겪었던 것을 이제 전 세계가 함께 겪게 된 상황에서 보편성의 관점에서, 자본주의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탈식민주의 운동은 어떻게 기여할 수 있는지 살펴볼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탈식민주의 운동이 반자본주의 운동으로 작동할 수 있는 논리나 실천적 단초들을 찾자면 어떤지요.
발제자: 미뇰로 입장에서는 근대성의 네 가지 계기를 얘기할 때, 개종, 문명, 발전과 함께 또한 세계 시장의 형태로 전개되고 있다고 크게 개관하고 있는데, 개종 등에 논리적 반박에 치중하다 보니까 현재 시점에서 나오고 있는 글로벌 시장에 대한 공격이나 논의들은 여전히 풀어야 할 과제로 남아 있습니다. [라틴 아메리카 만들어진 대륙]을 쓸 때 남미의 분홍 물결이 일어나고, 그래서 좌파 정권들이 미주자유협정의 형태가 아닌 다른 공정거래가 어떻게 가능하냐는 물음이 한창 많이 생산적으로 일어나던 시기였고, 그래서 남미연합과 같은 것이 민족 운동의 한 계기로 부각되었는데, 지금 그게 좀 쪼그라들고 있는 상황이어서 미뇰로가 어떤 답을 내놓고 있는지는 좀 더 연구가 필요한 부분들이기도 합니다. 남미연합이 그 시점에서는 맞았는데 너무 낙관하지 않았나는 생각이 좀 들긴 합니다.
토론자: 미뇰로의 주된 연구 방향이나 관심은 아닐 수 있는데, 어쨌든 2010년대 그때 분홍 물결 일면서 남미 각 국가마다 좌파 정권이 탄생하고 최근에 다시 또 약간 재현되고 있는데 2010년도 그 시점에서 좀 흐지부지된 듯한 그런 게 좀 강하잖아요. 이에 대한 미뇰로의 언급이 있는지요.
발제자: [라틴 아메리카 만들어진 대륙]에서 라틴성이라는 것을 다양한 정치 해방운동과 관련지으면서 남미연합을 거론하고 낙관했던 점이 있는데, 그 시기에는 남미 분홍빛 물결이 실제 미주 자유 협정의 대안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었지만 잘 안 됐죠. 좌파 운동들이 새롭게 자기를 규정하고자 하는 흐름, 아시아 중국 주도의 탈서구화 흐름과 아울러 탈식민화가 영성운동과 결합하는 흐름도 있습니다. 이때의 영성 운동은 탈식민 운동이긴 합니다. 유럽 기독교 중심의 그런 영성이 아닌 흐름들을 추적하는 것인데, 얘기가 좀 거칠게 돼 있어요.
저는 그래도 남미 대륙에서 뭔가 그 가능성들이 좀 있지 않는가라는 생각입니다. 미뇰로가 [라틴아메리카 만들어진 대륙]을 쓸 때는 남미연합이 실제 힘도 가지고 있었고 이게 진짜 대안이 될 수 있구나라는 기대가 있었던 시기여서 그런지 모르겠는데 여기에 대해서 상당히 우호적으로 써요. 그리고 이게 미국 중심 세계 시장과는 다른 세계도 가능하다는 것들을 보여주고 있는 부분들이 있습니다.
토론자: 탈식민성이 인식적 정치적 윤리적 프로젝트라면, 그 동안 자본주의 내지 제국주의가 만들어온 패권적이고 민중을 무자비하게 착취 수탈하고 억압하는 세계적인 흐름을 대체할 수 있는 어떤 프로그램을 제시하는지요. 예컨대 맑스주의라면 기본적으로 사회주의 내지 공산주의라는 이념을 내놓고 평등한 사회와 이를 위한 생산수단의 국유화 사회화라는 프로그램들이 있잖아요. 우리가 당연하게 받아들여 온 많은 것들을 탈식민주의가 비판하는 것까지는 공감할 수 있는데, 현재의 지배 체제인 자본주의를 넘어서기 위해 긍정적 대안으로 제시한 미래상이든 추구하는 바든 그것을 압축해서 말하자면 무엇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발제자: 근대성/식민성이라고 얘기할 수 있는 방향에서 어떤 흐름이 존재해 왔는가, 실제로 몸으로까지 체현하고 있는 그런 방향에 근거해서 접근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서구 중심에 나오는 글로벌 디자인을 단일 보편성이라고 규정하는데, 이를 다양 보편성으로 대체하고 그것에 기초해서 자신의 논의들을 어떻게 발전시켜 나갈 수 있는지 살피자는 것입니다. 미뇰로 논의는 과거 역사에 대한 추적이라든지 그에 대한 비판에 더 집중돼 있어서, 미래상에 대해서는 대략적으로만 논하고 있어 그 부분들에 대해서는 좀 더 고민이 필요하고 모색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토론자: 맑스도 자본론의 상당히 많은 지면을 할애해 노동자들이 시초 축적기부터 어떻게 당해왔는가 지금도 어떻게 당하고 있는가에 대해서 끊임없이 이야기하지만, 그걸로 끝나는 게 아니라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되는가, 앞으로는 어떤 사회로 인류가 가야 되는가에 대한 구상을 곳곳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비판적으로 보는 것은 자기들의 존재 이유를 한번 다시 확인할 수 있고 위로도 되지만, 그럼 앞으로 우리가 무엇을 할 것이냐에 대한 답도 필요하겠지요.
토론자: 다양한 민족적 지정학적 여러 요인들이 어떻게 하면은 인류의 미래상으로 변할 수 있는가에 대한 구상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지금은 자본에 의해 전지구가 획일화되고 있는데, 이를 넘어서기 위해서 일단 자본 권력에는 좌지우지 안 될 수 있는 어떤 사회적 시스템이 만들어져야 될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반자본주의가 기본적으로 전제되어야 다양성이나 차이가 존중될 수 있고 서로 공유하고 나누고 서로 무시하지 않으면서 함께 잘 살 수 있는 다채로운 사회가 가능할 것 같습니다. 각각의 차이들을 억압하거나 무시하거나 자본으로 환원하지 않을 수 있는 단계로 갈 수 있는 과정이 무엇이냐 하는 것이 고민거리입니다.
토론자: 그것은 제국주의 단계를 넘어서야 비로소 열릴 수 있는 일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제국주의와 맞서 싸울 수 있는 그 방법이 무엇이냐, 그런 극복 과정 없이 예컨대 ‘자유로운 민족들의 연합’ 따위가 가능하겠느냐 하는 문제가 있죠.
토론자: 국가권력 장악만으로 모든 문제가 풀리지는 않는다는 것은 누구라도 인정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렇지만 국가권력이 어떤 성격을 띠느냐 하는 문제를 배제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발제문에서 제시한 것처럼 권력 매트릭스가 작동하고 있는데, 이걸 깨는 수단은 무엇이고, 깬다면 그것을 무엇으로 대체할 거냐 하는 문제들이 계속 따라옵니다. 국가 권력 하나 장악한다고 문제가 풀리는 건 절대 아니지만 그렇다고 이제 국가 권력 그대로 둔 채 문제가 해결되는 것도 아니지요. 사회주의 운동을 돌이켜볼 때 국가 권력만 어떻게 하면 다 된다라고 환상을 가졌던 것 같지는 않거든요.
발제자: 탈식민 운동이라고 할 때, 제국으로부터 벗어나더라도 독재정권이 들어서는 경우가 있지요. 이런 이유로 실제로 식민지를 경험했던 사람 입장에서 식민지 문제 해소가 제국으로부터 독립되는 것만으로 안 된다는 건 있죠.
토론자: 물론 인간 해방은 민족해방만으로 끝날 수 없고 계급해방만으로도 끝날 수 없습니다. 다양한 형태의 억압들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현단계에서 강력하게 전 인류를 지배하고 있는 자본주의적 제국주의적 힘 관계를 어떻게 극복할 것이냐 하는 문제는 거의 보편적 문제가 되었습니다. 각각의 개별적 억압 문제도 있지만, 자본의 장벽을 어떻게 넘어서느냐 하는 것이 결국 핵심 아니겠습니까. 이런 측면에서 노동자 국제주의도 주요 단초가 되지 않겠습니까.
토론자: 탈식민주의는 그런 연대를 통해서 제국주의에 저항할 때 밑바탕이 되는 논리나 이데올로기는 꽤 많이 제공합니다. 노예적으로 제국주의 논리에 빠져들어가는 것들을 차단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장치들이 있어요. 거기까지는 긍정적으로 우리가 볼 수 있다고 봐요. 그렇지만 그걸 실천으로 전환할 때는 다시 단결해야 될 거 같은데, 그 단결의 논리는 무엇인지, 혹은 보편과 특수를 어떻게 결합할 것인지가 문제입니다.
발제자: 근대성이라는 유럽이 만들어낸 단일한 논리러 보면 자기의 존재 근거를 다 상실한 사람들은 충분히 근대성/식민성이라는 관점에서 연결이 충분히 가능하다고 봅니다. 구체적인 근대성을 미뇰로는 크게 네 가지 구도로 설명하고 있는데, 좀 더 세분화하면 각 국가마다 편차가 존재합니다. 그래서 스피박 등의 포스트 식민주의 논리를 다 부정하는 것이라기보다는 16세기라는 문제를 건드리지 않고 얘기하고 있다는 점에서 아쉬움을 표현하고 있는 것인데, 그들과 연대나 제휴는 충분히 가능합니다. 문제의식이 약간씩 다르겠지만요. 그리고 포스트 구조주의 논의들도 내부 경계와 외부 경계라는 측면에서 조금 다르지만, 어찌 됐건 근대성이 만들어낸 그 경계들, 그것들을 만들어내는 것에 대한 비판과 반론이라든가 경계 의식이라는 개념으로 묶어내는 점에서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토론자: 단순화하는 것은 무리겠지만, 예를 들어서 맑스 같으면 만국의 프롤레타리아여 단결하라 이렇게 압축해서 얘기하는 부분이 있잖아요. 미뇰로 같은 경우는 뭐라고 얘기할 수 있을까요.
발제자: 미뇰로 주장은 이거예요. 서구의 자본주의가 만든 것은 식민지라는 것, 동전의 이면처럼 식민지가 자본주의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걸 유럽인들은 못 본 거죠.
토론자: 지금 누가 식민화되는가 하면 제국주의 안에, 미국에 있는 자들이 식민화됐고, 그다음에 미국에서 공부하는 매판지식인들, 매판상인, 매판기업 등, 우리가 식민지인이에요.
토론자: 레닌의 구호, 예컨대 ‘제국주의 세계대전을 내전으로 바꿔라’ 하는 말은 머리에 콱 꽂힙니다. 미뇰로의 경우 ‘근대화와 식민성이 하나임을 자각하라’가 그런 구호일까요.
발제자: 엔리케 두셀은 남미에서 계속 살면서 활동하고 있는데 미뇰로는 미국 대학에서 활동하고 있으니까 남미의 많은 생산적 이론들이 미뇰로 입을 경유해서 많이 나오는 공로도 있습니다.
토론자: 미뇰로가 말하는 근대화의 조건 네 가지를 말씀을 해 주셨었는데요, 개종하는 것도 근대화의 조건이라고 하셨습니다. 기독교가 전파되는 과정이 제국주의적인 면이 있었지만 그런 것이 적용되지 않는 나라들도 있고, 우리나라 같은 경우는 그런 과정과 별도로 식민지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이 근대화의 조건이 될 수 있는지요.
발제자: 그것은 16세기에 유럽인들이 아메리카로 갔었던 기본 논리였죠. 아메리카에 가서 선교사의 이름으로 기독교를 전파해 줌으로써 이 땅을 얻을 수 있도록 논리적 기초를 제공한 것입니다.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남미에 가서 한 일이 기독교를 전해주고 모든 것을 빼앗는다는 것이 16세기에 식민지 통치의 논리적 근거였다라는 것이죠. 18세기 19세기쯤 되면 그 논리를 변주한 것이긴 하지만, 문명화 사명, 즉 미개한 지역을 문명화를 시킨다는 논리가 나옵니다. 이게 중첩되기도 하지만 시기마다 주요 논리가 그렇게 변모해 왔다는 것입니다. 이게 어떤 경우에는 중첩되어서 19세기쯤인데 예전의 논리가 나오는 경우도 있고, 어떤 경우에는 한 가지 논리 중심으로만 설명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래서 그 단계들을 다 거쳐야 된다기보다는 근대성의 주요 지배 논리가 이런 식으로 변주되어왔다는 것이 미뇰로의 설명에 가깝습니다.
토론자: 유럽 근대성을 얘기하면서 이렇게 단일 보편성이다라는 표현을 하셔가지고 관심이 생겼습니다. 그렇다면 유럽 중심주의를 단일 보편으로 이렇게 보신 것입니까.
발제자: 대체로 유럽 중심 근대성의 논리, 즉 근대성/식민성 양자를 보는 것보다 근대성 하나를 보는 방향 주로 미뇰로가 비판하는 의미에서 단일 보편성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근대성/식민성이라의 경우 항상 식민성을 전제하고 있고 때문에 그냥 발전의 논리가 아니라, 지정학적으로 어떻게 달리 존재하고 있느냐, 그리고 그것들이 공존하고 있는 여러 가지 측면들을 다양 보편성이라는 식으로 미뇰로는 해명하고 있습니다.
토론자: 그렇다면 우리가 지금 생각하는 보편성이라는 개념은 환상일까요?
발제자: 하나만 존재하고 있다는 방향으로, 유럽이 제시하는 것만이 옳다고 하는 방향으로 가는 것은 억압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것은 환상이고 잘못되었고 그 이면에 존재하고 있는 폭력을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데 미뇰로가 완전히 보편성을 부정하 것은 아니며, 그런 보편이 아니라는 의미에서 다양 보편성이라는 개념을 내세우면서 지금의 지정학적 구도에서 얘기될 수 있는 방안들을 모색하는 용어여서 어색한 용어이긴 합니다.
토론자: 인류 사회가 보편성을 버릴 수도 없지만 다양성이 존중되는 사회로 가야 된다는 문제의식이 압축되어 있는 듯합니다. 서구중심의 단일 보편성을 거부하기 위해 다양성을 강조할 수 있는데, 이는 상대주의로 귀결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인류의 생활 양식은 거의 획일화되다시피 하는 과정에 들어가 있습니다. 이런 과정을 무시할 수는 없지만, 또 살아남아 있는 온갖 생명력들이 있습니다. 이 다양성을 어떻게 살릴 건지가 문제입니다. 자본주의 내지 제국주의가 밀고가는 동안에는 그것들이 살아날 방법이 없겠지요.
토론자: 민족 해방을 맑스주의가 부차적인 문제 혹은 단순한 문제로 보지는 않았습니다. 민족 해방과 사회주의 운동이 따로 놀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각각의 시점에서 지금 누구에게는 어느 쪽이 더 화급하냐 하는 문제가 있습니요. 운동 주체들이 정세 판단을 하면서 전략적으로 오늘 개입할 지점이 어디냐, 주요 모순이 무엇이냐 하는 판단이 필요하지요.
미뇰로 관점에서는 그동안 라틴아메리카가 겪었던 일들에 대한 반성 아니면 비판작업이 핵심적인 사안이었을 수도 있는데 거기서 머물 수는 없습니다. 오늘날 엄청난 힘으로 전 세계를 뒤덮고 있는 자본에 어떻게 대응할 것이냐가 최대 관심사지요.
발제자: 미뇰로도 그 부분을 문제시하고 있습니다. 남미연합을 굳이 거론했던 것도 사실은 그런 것 때문인데, 그러니까 민족 해방이 이루어진다고 해서 그 안에서 또 억압이 사라지는 건 아니잖아요. 남미에서도 브라질이 너무 강대해져 버려서 이게 진짜로 대안으로서의 의미가 되는 것인지 아니면 또 브라질이 또 다른 제국이 되는 것인지 지금 브라질 이상으로 중국이 또 핵심 문제가 되고 있죠. 사실 중국 러시아가 과연 대안 체제가 될 수 있는지요.
토론자: 미뇰로가 말하는 철학자든 아니면 어쨌든 간에 최소한의 실천적인 요구로서의 슬로건 같은 게 있다면 어떤 게 있을까요?
발제자: 결국 계속 강조하고 있는 것은 근대성/식민성이라는 것입니다. 근대성이라는 논리를 깨고 나갈 수 있는 방향으로 경계 사유에 기초한 실천 방안들을 계속 생각해 보니까, 이제는 정신이 식민화가 되고 있는 부분들이 더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계속 억압되었던 경계 사유라고 할 수 있는 그 영역들을 각 영역 안에서 새롭게 발견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다양 보편성도 중요하지만, 그런 부분들이 조금 더 의미 있는 것 같습니다.
토론자: 경계 사유라는 용어에 대해 좀더 설명하시면.
발제자: 경계 사유를 또 다르게 표현하는 용어로, 인식론이 아니라 영지라는 말을 씁니다. 이 영지는 영지주의라는 용어에서 가져온 것입니다. 인식이라는 영역은 항상 배척이라는 측면에서 얘기되는 용어여서, 근대 보편의 학 영역에 포섭이 안 되는 영역들이 단순하게 영지라는 영역을 통해 새롭게 해결될 수 있다는 관점에서 영지학이라는 표현을 쓰기도 합니다.
토론자: 가치의 문제를 어떻게 재수립할 수 있는가라는 문제가 있어요. 그러니까 자본주의의 가치 시스템보다 더 뛰어나거나 이걸 새롭게 재구성할 수 있어야 바깥을 볼 텐데 모든 게 자본주의 시스템 안으로 다 들어가잖아요. 이를테면 제 경험으로도 그나마 학교 다닐 때만 해도 대학 문화라고 하는 가치가 있었다는 거죠. 그런데 대학이 이제 자본안에 던져지니까 없어요. 아무것도 없이 그냥 연구자들조차 돈 많이 따내면 뛰어난 것처럼 돼 버렸죠.
토론자: 막강한 자본권력이 국가권력까지 좌우하고 있지요. 자본권력 자체를 한 번에 제압하기는 어렵습니다. 그 과정에서는 국가권력의 성격을 바꾸는 것이 지렛대 노릇을 할 수 있다고 봅니다. 그러니까 국가권력을 바꾸어 교두보로 삼고 자본권력과 싸우는 것이 그래도 현실성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국가권력을 바꾼 역사적 경험들이 있다는 것도 중요한 고려 사안입니다. 현실 사회주의 운동을 무시할 수 없는 이유도 어쨌든 바꿔 보았다는 경험을 내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 가지 역사적 조건 속에서 실패했지만, 가능성이 있다는 거죠. 그래서 중국을 그냥 자본주의라고 단정하고 끝내고 싶지가 않은 겁니다. 어쨌든 공산당이 국가권력을 장악하고 나름으로 그 이념을 구현하고자 하는 면을 주시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토론자: 길게 보면 한 나라를 넘어서 인류 전체가 먹고 살기 위한 생산 시스템이 어떠해야 하는가가 제일 본질적인 문제 아니겠습니까. 자본주의 시스템은 안 된다는 거는 이미 이제 모두 공감합니다. 개인의 무한한 이윤증식을 위해 소수가 생산 시스템을 장악하고 그걸 보장하기 위해서 국가의 시스템을작동시키는 체제로는 희망이 없습니다. 이게 아닌 생산 시스템을 만들어야 하는데, 국가 권력을 갖더라도 이걸 못하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국가 권력을 가지려면, 억압과 착취가 없는 생산 시스템, 지구 파괴가 없는 생산 시스템을 어떻게 만들 거냐가 고민입니다. 남미도 똑같고 동양이든 서양이든 이거 못하면 인류는 어쨌든 희망이 없습니다. 그러면 지금 남미 연합, 브라질 같은 국가들이 과연 그 내부에서 어떤 생산 시스템을 가지고 있느냐, 노동 착취가 없는 생산 시스템을 과연 모범적으로 만들어내고 있느냐, 그건 아니죠. 그렇기 때문에 아직까지 답이 나온 건 아니고 미국으로부터 독립하기 위한 힘들은 키워왔지만, 이렇게 생산 시스템의 문제를 해결하는 답을 준 것은 아닙니다. 룰라 같은 경우가 브라질에서 최초 사회주의 노동자들 중심으로 해서 만들었지만 신자유주의 체제를 벗어나지 못하고 그거 하다가 또 망했잖아요. 그다음에 좌파 정권의 룰라 뒤로 약간씩 있었고 그래도 미국으로부터독립한 면은 있지만, 국내의 근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셈입니다. 결국 근본적으로 이 문제 해결 못하면 여타 문제 아무리 많이 지적해도 답이 없는 거 아닌가요.
토론자: 현재의 거의 모든 국가들이 자본의 대리인 하수인 아니면 자본과 한 몸으로 돼 있는 그런 형태, 그러니까 자본독재 국가들입니다. 현재 노동자들의 의식이나 욕구가 어떠하든 간에, 자본과 대립하는 개념으로서의 노동, 자본독재국가와 대립하는 이념으로서 노동자국가를 얘기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맑스 시대나 레닌 시대만 해도 아직 노동자들보다 농민이 훨씬 더 많은 상황이었는데 지금은 농민 비중이 훨씬 줄어 옛날과는 비교가 안 되잖아요. 그러니까 여러 형태로 다변화됐긴 했지만, 자기 노동력을 팔아서 사는 사람들이 압도적 다수입니다. 그래서 이제 옛날보다 훨씬 더 현실적인 근거를 갖고 노동자국가를 내세울 수 있습니다.
토론자: 노동자 자신이 자기가 노동자라고 생각하지 않게 만들어온 과정이 결국 자본 독재가 완성되어오는 과정입니다. 이에 효과적으로 저항 못한 것도 이데올로그들의 무능과 게으름의 탓이라고 할 수 있죠.
토론자: 세계화라는 경제 메커니즘 자체는 인류 사회가 가는 과정에서 결코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교류의 확대에 근거한 전 세계 차원의 계획 가능성은 자본주의로부터 우리가 받아들여야 할 부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발제자: 국제주의적인 측면에서 보면 학술적 논의들이 좀 많았고, 미뇰로가 정신이라든지 이런 부분들에 더 집중한 측면들이 있긴 한데, 근대성이라는 폭력적 기재가 작동하는 부분들이 역사 속에서 어떻게 다각도로 이루어졌는지에 대한 비판적 접근, 그리고 그 속에서 사파티스타 얘기한 것처럼 500년간의 저항이라고 할 수 있는 그런 힘들을 찾아내려고 하는 부분들이 있습니다. 국제 자본주의의 흐름에 저항할 수 있는 방향에서 그것들을 어떻게 끌어들일 것인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좀 더 고민이 필요한 부분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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