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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설>
실존적 사유와 카이로스 시간의 미학
- 신갑식 시인의 시세계
지은경 (시인·문학평론가·문학박사)
1.
신갑식 시인의 세 번째 시집 『길 위에 시간을 내려놓고』 원고를 받고 시를 꼼꼼히 읽어 보았다. 시인에 대 해서 아는 바가 없으며 오직 약력과 시만 보고 해설을 씀으로 정확하게 시평을 쓰는 것이 될 것이다. 그의 약력을 보면 이미 시와 수필로 데뷔하였으며, 중등교장으로 퇴임한 것으로 보아 60대 중반은 되지 않았을 까 짐작해 본다. 그리고 수필집도 발간하였으며 시집도 이번에 세 번째 출간하는 것이니 중견작가라 칭해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시집의 제목은 첫인상을 강하게 크로즈업 시킨다. 표제 ‘길 위에 시간을 내려놓고’는 시인이 지금까지 살아온 시간을 되돌아보는 카이로스의 시간은 의식의 흐름을 표상하는 성찰의 정신을 보여준다. 시인은 문제의 본질을 내 안에서 찾고자 한 호흡 멈추어서 온 길을 돌아보고 현재와 미래를 분명히 직시하고자 하는 암시의 제목으로 해석된다.
왔다가 스쳐가는/ 무심無心한 세월의 강,/
타박 타박/ 여기까지 왔는데// 흘린 땀 방울/
흘린 눈물/ 웃음의 무게/ 눈물의 무게//
그 모든 게/ 공空으로 돌아갈 터// 떠올리면
참으로/ 행복했던 시간들// 스러져가는 해 질 녘
강변에 앉아/ 가만히 불러보는 추억 한 소절.
존재와 사유는 동일화를 전제로 한다. 위의 ‘시인의 말’은 시인의 내면세계를 보여주는 언술로 한 편의 시로 형상화하고 있다. 시는 글쓴이의 체험과 상상력의 산물로 시인의 영혼에 관한 이야기이다. 정신은 생각과 의식이 끊어지지 않고 연속됨을 보여주는 동시성의 메시지이다. 모든 인간은 시간의 지배를 받고 산다. 일반적인 시간의 의미는 물리적인 시간으로 크로노스의 시간이라고 말한다. 크로노스의 시간은 완전체이며 이 완전체인 시간을 길 위에 내려놓는다는 것은 걸어온 길이 잘못된 것은 아닌지 점검하는 성찰의 시간으로 카이로스의 시간이 된다. 마지막 ‘추억 한 소절’은 인간의 실존과 내적 실체가 마주하는 시간으로 사유는 자기 자 신을 통해 존재를 인식하는 것이다.
2.
급변하는 시대를 사는 현대인들은 엄청난 스트레스에 시달려 몸과 마음이 지쳐있다. 지친 몸과 마음은 본능적으로 일상에서 벗어나 자유롭고 싶다. 이 해방감은 훌쩍 일상을 떠나 편하게 쉬고 싶다. 여행 문화는 놀고먹는 재미도 있지만 진정한 목적은 힐링에 있다. 공간적으로 이동한 여행은 다른 장소에서 자연 풍광도 보고, 세상 사람들 사는 모습을 보고 느끼면서 위안을 얻게 된다. 휴식을 통해 삶에 활력을 되찾아 일상을 재충전하는 것이다. 단순히 공간적인 이동의 경험만으로도 정신적 안정을 가져오기에 연휴가 되면 공항은 엄청난 여행객들로 붐빈다. 어느 철학자는 21세기를 ‘피로 사회’라 진단했다. 현대를 사는 사람들은 성과를 이루기 위해 끊임없이 고군분투하므로 영혼을 갉아 먹는다고 한다. 그래서 ‘피로 사회’의 결과물로 우울증과 자살이 늘고 있다. 그래서 여행을 통해 몸과 마음이 안정을 되찾는다는 것은 생각의 힘을 키우는 것이 된다. 문인에게 여행은 일거양득 삼득의 더할 수 없이 중요한 시간이 될 수 있다.
살다보면 일상에 지쳐
가끔은
세상에서 도망치고 싶어져
그럴 때면
열차를 타고 길을 떠나지
그런저런 사람들
그만 그만한 사연 한 보따리씩
보듬고 가는데
스쳐가는 풍광들은
차창 너머 다가와
내게 귓속말을 건네는 거야
세상은 미지未知의 바다거든
다가올 일
미리 걱정하지 말게나.
- 시 「귓속말」 전문
비열한 이기주의로 치닫는 현대사회는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불안 속에 살고 있다. 숨 쉬고 있다고 사는 것이 아니듯 살아있다고 제대로 사는 것이 아니다. 사람답게 살아야 잘 사는 것이다. 사람답게 살지 못할 때 우리의 일상은 회의하고 절망하며 지치게 된다. 지치게 되면 일상에서 도망치고 싶어진다. 화자는 일상에 지칠 때 “열차를 타고 길을 떠”난다. 차창 밖의 사람들 “그만 그만한 사연 한 보따리씩/ 보듬고 가는” 것을 보게 된다. 타자를 통해 삶을 객관화하며 위안을 받는 부분이다. 그들이 화자에게 귓속말로 건네는 말 “세상은 미지未知의 바다거든/ 다가올 일/ 미리 걱정하지 말게나” 물론 이 말은 화자가 화자에게 건네는 자기 위안의 말이다. 우리는 참과 거짓을 가리기 어려운 혼란스러운 시대를 살고 있다. 매일 도심 한복판에서 총성 없는 전쟁을 벌이고 있다. 의식 있는 사람이라면 어떻게 이런 부조리를 외면할 수 있겠는가. 화자는 자신에게 닥치지 않은 일을 미리 걱정하지 말자며 다독이는 것에서 긍정 적인 생각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나를 위로하고 타인을 위로하게 됨과 인생을 긍정으로 바라보는 시선이며 화자는 여행을 통해 거대한 바다를 건너는 힘을 얻고 있다.
저기 가는 저 나그네
이름을 묻지 마소
벼슬도 싫거니와
세상사 버렸다네
하늘을 지붕 삼아
누우면 내 집이라
조부 희롱 대역죄로
처량쿠나 이 내 몸
그 마음 휑궈내려
방랑하는 하세월*
삿갓 밑에 숨긴 사연
서러워라 눈물 한 줌.
- 시 「김삿갓을 찬讚함」 전문
시는 한 인간의 영혼의 기록이다. 시가 독자의 영혼을 울리는 것은 독자가 시인의 영혼의 언어를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영혼을 울린다는 것은 생명을 잉태한 언어가 살아 움직이는 것이 된다. 위 시의 첫 연에 “저기 가는 저 나그네/ 이름을 묻지 마소// 벼슬도 싫거니와/ 세상사 버렸다네”는 이미 세상의 권력과 욕망을 다 버렸는데 이름은 알아서 무엇 하겠느냐는 반문이 숨어있다. 화자는 세속의 욕망을 버린 김삿갓의 운명에 측은지심이 발동한다. 한세상 삶의 연륜이 쌓이면서 욕망을 채울 수 없음을 깨닫고 일부 체념하거나 포기하면서 불가항력적인 것에 순응하는 것이 보편적 인간이다. 하늘을 지붕 삼아 누우면 내 집이니 걸인이 따로 없는 김삿갓, 그가 바로 ‘조부 희롱 대역죄로’ 방랑객이 된 후손 김병연이다. 화자가 김삿갓을 찬讚한다는 것은 그의 시를 기리고 옹호하며 그의 뜻을 지지한다는 것인데 본질적으로 욕망의 존재인 인간으로 태어나서 욕망을 버리고 바람처럼 풀처럼 산다는 것은 뼈저린 고통을 끌어안는 것이다. 타인의 고통을 외면하는 것은 참혹하다. 화자는 김삿갓의 운명에 공감하며 그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는 인간적인 따스한 마음을 보여준다. “삿갓 밑에 숨긴 사연/ 서러워라 눈물 한 줌”은 김삿갓의 아픔과 고통을 동일시하는 것에서 휴머니즘 정신을 읽게 된다.
그대,
지구라는 둥근 공 위
맨발로 걸어보았는가
발가락이 오글거리고
발바닥이 간질거리지
빙글 빙글
세상은 어지럽게 돌아가는데
휘적 휘적
난 사거리에서 길을 잃고
잃어버린 내 시간
맨발로 찾아 나서는 길
어느 새
해 저물고
고갤 내미는 낯선 달 하나.
- 시 「시간 위를 맨발걷기 」 전문
사람들은 어느 날 갑자기 실직하거나 실연을 당하면 견딜 수 없는 고통에서 현실 도피적인 행동을 한다. 상실감에서 오는 극심한 고독과 절망감에서 헤어나고자 한다. 고독은 현실 도피를 부르고 여행은 도피의 한 방편으로 길을 떠난다. 순례길은 좀 더 심오한 내면세계로 향한다. “지구라는 둥근 공 위/ 맨발로 걸어보았는가”에서 산티아고 성지 순례길을 연상하게 한다. 맨발로 걸으며 “발가락이 오글거리고/ 발바닥이 간질거리지”는 화자가 자연을 온몸으로 체험하며 느끼고 있다. 이러한 경험은 일상에서 느낄 수 없는 특별한 체험이며, 이 특별한 경험은 살아있다는 느낌에 자극을 받게 된다. “빙글 빙글/ 세상은 어지럽게 돌아가는데/ 휘적 휘적 난 사거리에서 길을 잃”으며 견딜 수 없는 고통을 안겨주는 현실에서 불확실한 미래와 불안을 직시하게 된다. “잃어버린 내 시간/ 맨발로 찾아 나서는 길”은 지나온 시간들을 온몸으로 인지하고 확인하는 과정에서 카이로스의 시간적 공간을 만나게 된다. “고갤 내미는 낯선 달 하나”에서 달은 꿈이요 이상이며 창작의 원천이 된다. 달은 새로운 세계의 발견으로 화자에게 미래의 시간이요 신화적인 시간이 될 것이다.
3.
인간 정신의 최고봉에 오르고자 하는 것이 시의 세계이다. 시인은 시를 위하여 교육이나 종교, 과학이나 예술의 힘을 빌어 자신을 업데이트하며 진화하고자 한다. 진화는 보이고 만져지는 것이 아닌 보이지 않고 만져지지 않는 차원 높은 곳으로 향한다. 프로이트의 무의식이, 공자의 도덕의 세계가, 혹은 노자의 무위자연의 세계에서 진실을 탐구하게 된다. 깊은 두려움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고 미래를 예측할 수 없을 때 인간은 본능 저 밑으로 떠내려간다. 극단적인 상황에 닥치면 인간은 무슨 일을 저지를지 모른다. 그러나 시를 쓰는 순간은 삿된 생각이 침입할 수 없다. 그래서 시인에게 시성詩聖이란 대명사를 붙여준 것일 게다.
시詩가 눈을 뜰 땐
나도 살며시 눈을 떠요
함께 아름다운 세상
바라보아요
시詩가 눈을 감을 땐
나도 살며시 눈을 감아요
눈 감아도 보이는 세상
시詩와 함께 바라보아요.
- 시 「시詩와 나」 전문
“시詩가 눈을 뜰 땐/ 나도 살며시 눈을 떠요”는 화자의 일상이 시로 시작되고 있음이다. “함께 아름다운 세상/ 바라보아요”는 평안한 하루가 시작되고 있음이다. 시를 가까이 한다는 것은 품성을 맑게 한다. 세상이 결코 아름다운 것만은 아닐진대 아름다운 세상을 바라본다는 것에서 화자가 선善을 추구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화자의 정신세계가 정서적으로 매우 안정된 긍정적인 내면을 보게 된다. “시詩가 눈을 감을 땐/ 나도 살며시 눈을 감아요”에서 하루의 일과가 시로 시작해서 시로 마감하며 오직 시에 집중하고 있다. “눈 감아도 보이는 세상/ 시詩와 함께 바라보아요” 시와 함께 바라보는 세상은 고통과 괴로움이 없는 행복의 세계일 것이다. 화자가 눈을 감고 시의 세계에 안겨있는 것에서 진정한 선비의식을 보게 된다. 단아하고 정갈한 고결한 시의 세계를 보여주고 있다.
평생 내 글이 쌀이 된 게
몇 됫박이나 될까
애초에 밥 벌어 먹자고
나선 길은 아니었지
그저 봄바람에 휘청이는
프리지아 꽃잎 속
가느다란 길 위에 서 있을 뿐
나뭇가지 걸터앉은 목련 한 잎
그건 아마도
내 오랜 기억 속 행복 한 줌
비가 오면 비가 되고
눈이 오면 눈이 되어
긴 그림자 함께 걷는 길
오늘도
공원 벤치 홀로 앉아
글 한 스푼 건져 올리는
그대는 시인詩人.
- 시 「시인 3」 전문
시인은 무엇으로 사는가. 리얼리스트가 아닌 시인은 죽은 시인이라고 말한다. “평생 내 글이 쌀이 된 게/ 몇 됫박이나 될까” 시인은 자신의 글을 쌀알에 비유하여 몇 됫박이나 될까 묻고 있는 것은 관찰자의 입장에서 현실과 이상의 세계를 확인하고 있다. “애초에 밥 벌어 먹자고/ 나선 길은 아니”라고 부정하는 것에서 이성의 비중을 높게 책정함으로 그의 시적 행위를 고결하게 업그레이드시킨다. 사람은 인센티브에 반응하는 존재이다. 그러나 화자는 애초에 그런 생각에서 시를 쓴 것은 아니라며 확실하게 선을 긋는다. 그의 지성과 올곧은 정신을 보여주는 부분이다. “봄바람에 휘청이는 프리지아 꽃잎”, “빈 나뭇가지 목련 한 잎”은 행복 한 줌 건져 올리는 것에서 시인의 품격과 미덕을 보여준다. 화자는 오늘도 공원 벤치에 홀로 앉아 “글 한 스푼 건져 올리”며 행복도 건져 올리고 있다. 영혼의 양식인 시는 영혼이 배고픈 이에게 밥이 되어 충만하게 해주고 있다. 화자는 스스로 배고픈 시인의 삶을 선택함으로 돼지가 아닌 소크라테스가 될 것이다.
시詩,
스스로 내게 오시더라
해질녘 천천히 걸어오시거나
비 오는 날 비가 되어
내 가슴을 적시거나
애써 호명呼名하지 않아도
슬그머니 내 곁에 앉으시더라
난
사뿐히 다가오는 그댈 맞아
빨간 사각의 원고지에 모시면 되지
보이면 보이는 대로
그 느낌 그대로
그대 위해
노래 한 소절 부르면 되는 거지.
- 시 「시詩, 오시는 날」 전문
무엇이 우리를 쓰게 하는가. 그러므로 시인은 무엇을 쓸 것인가 고뇌하게 된다. 내 안의 소리들이 쏟아져 나와 울고 웃는다. 사랑과 그리움, 외로움, 실존에 관한 이야기들이 시인에게 시를 쓰게 할 것이다. “시/ 스 스로 내게 오시더라”하는 것에서 시가 쓰고 싶어서 쓰는 것이 아니라 시가 쓰여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시인은 “비 오는 날 비가 되어/ 내 가슴을 적시거나/ 애써 호명呼名하지 않아도/ 슬그머니 내 곁에 앉으시더라”는 것에서 시가 절로 쓰여지고 있음을 진술하고 있다. 화자는 “사뿐히 다가오는 그댈 맞아/ 빨간 사각의 원고지에 모시면” 된다고 말하는 것에서 시를 소중히 생각하여 공손히 받들고 있으며 느낌 그대로 기록하겠다는 정직성이 암시된다. 파스칼은 “인간의 모든 불행은 고독한 공간을 고요히 견디지 못하는 데에서 온다”고 말했다. 화자가 시를 쓴다고 하지 않고 ‘모신다’고 하는 것에서 시에 대한 경건한 자세로 임하고 있음을 본다. 위 시를 읽으면 형이상학적 순수한 사유가 경건하여 천박한 사람과의 만남은 인격을 도둑맞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게 한다. 시인이 시를 만나 1급수 청정수가 되고 있는 시이다.
4.
신앙과 사랑과 예술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어린아이와 같은 순수함을 지니지 않으면 결코 그 문을 열고 들어설 수 없다는 점이 공통점이 될 것이다. 신실한 신앙인은, 진실한 사랑은, 최고의 예술은 따지지도 묻지도 않는 것이다. 선입견 고정관념 편견 등을 내려놓고 있는 그대로 순수한 영혼의 만남이어야 한다. 그래서 쇼펜하우어는 “눈물을 모르는 눈으로는 진리를 보지 못하며 아픔을 겪지 않은 마음으로는 사람을 모른다”고 했다. 삶의 에너지가 예술의 완성에 소비된다면 작가로서 진정으로 행복한 사람이 될 것이다.
빵 한 조각 훔친
장발장
징역 19년
내 마음 훔쳐간
넌 종신형
평생 내 곁에서.
- 시 「너의 죄罪」 전문
2연 6행의 짧은 시가 촌철살인의 비수와 같은 화법으로 깊은 의미를 함유하고 있다. “빵 한 조각 훔친/ 장발장/ 징역 19년” 빵 한 조각에 19년의 징역은 결코 짧은 것이 아니다. 아니 너무나도 긴 고통의 형벌이다. 그러나 2연에서 “내 마음 훔쳐간/ 넌 종신형/ 평생 내 곁에서”는 내 사랑에 대한 구형을 ‘종신형’으로 내리고 있다. 이 종신형의 사랑은 얼마나 뜨겁고 순수한가. 종신형을 받은 내 사랑은 평생을 눈물과 고통을 함께한 내 곁에 있는 아내일 것이다. 평생을 내 안에 간직한 이보다 더한 깊은 사랑이 또 어디 있을까. 술에 취하면 마음이 즐겁고 사람에 취하면 영혼이 즐겁다는 말이 있다. 평자는 예술에 취하면 영혼이 행복하다고 말하고 싶다. 짧은 호흡의 문장이 긴 호흡으로 읽히는 우수작이다.
뒤따라 오던지
안 부딪치고 추월을 하던지
결국 부딪쳐
먼저 가라 하니
뒤따라 오겠단다
이 레인 저 레인 들락날락
어느 날은
걷기 수영하는 젊은 할매
자꾸만 내 앞에서 왔다리 갔다리
흰 옷에 한 방울 흔적처럼
떨궈졌으니
그댄
내게 얼룩인가요 무늬인가요.
- 시 「얼룩과 무늬」 전문
사랑의 원죄는 무엇인가. 인간의 원시적 욕망은 죄를 낳고 사망에 이른다. 사랑은 뇌의 쾌락중추를 자극한다. 타자가 소유물은 아니지만 소유함으로 큰 가치를 부여하는 것이 바로 사랑이다. 위 시는 참 재밌게 읽힌다. 1연에서 2연까지 읽으며 이게 뭐지? 3연을 읽으며 수영장에서 노년의 남녀가 연애 줄다리기를 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연애를 고민하는 이들에게 뇌섹남 뇌섹녀가 인기가 있단다. 사랑을 확인받지 못하는 시대에 사랑받는 느낌을 주는 뇌섹남 뇌섹녀, 머리를 잘 굴려 줄다리기를 잘해야 하는가 보다. 노년의 나이에도 알 수 없는 게 사랑이다. 아니 죽는 날까지 진짜 모르는 게 사랑일 것이다. 그녀는 화자를 뒤따라오면서 슬그머니 부딪친다. 어쩌면 일부러 부딪친 걸 눈치 없는 화자가 모른 것일 수도 있다. “자꾸만 내 앞에서 왔다리 갔다리” 하는데 화자는 관심 밖이다. 색기色氣 있는 여자에게 화자는 “흰 옷에 한 방울 흔적처럼/ 떨궈졌으니/ 그댄/ 내게 얼룩인가요 무늬인가요” 참 재밌는 표현이다. 사랑은 훔쳐보는 재미도 솔솔하다. 그러나 화자가 얼룩으로 생각하는 것이 반이요 무늬로 생각하는 것이 반이다. 사랑은 설렘이다. 그 후 진도가 얼마큼 나갔는지 궁금하다.
우리네 인생은 연극
멀리서 보면 희극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라지
눈물 한 방울 대롱 대롱
세상사
눈물 아닌 것이 어디 있간디
눈물 속에 피는 꽃
그게 행복이여
다 그렇게 사는 거여
그게 인생인 거여.
- 시 「인생」 전문
연극은 종합예술이다. 찰리 채플린이 ‘인생은 연극’ 이라고 정의한 것에서 희극이며 비극이란 모순된 정반합의 변증법적 논리를 확장하며 인생은 종합예술이란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세상사/ 눈물 아닌 것이 어디 있간디”, “눈물 속에 피는 꽃/ 그게 행복이여”, “그게 인생인 거여” 철학적인 사유의 이야기이다. 인생을 얼마큼 살아보니 눈물 아닌 것이 없고, 그 눈물 속에 핀 꽃이 행복이며 인생이라는 사유의 결론에 도달하며 찰리 채플린의 인생관과 동일시 된다. 인생에 정답이 없다. 삶은 팩트이며 한 치 앞도 예측할 수 없는 것이 인생이다. 그러니 너무 슬퍼할 것도 너무 즐거워할 것도 없다는 결론에 공감한다. 이 결론은 가치관의 상실이 라고 보기보다는 부조리하고 모순된 인생을 사랑하며 살 수밖에 없다는 암시적인 것이 명시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일상은 꾸준한 도전의 연속이요 승리를 요구한다. 땀과 열정의 결실을 얻기 위해 패배할 수 없다. 승부사가 되기 위해 눈물 속에 꽃을 피우며 우린 그것을 시대적 소명이란 이름으로, 무서운 짐을 진 탄탈로스의 갈증을 죽을 때까지 안고 가야 한다. 그것이 인생이다.
아내여,
잠깐만 빨랫감 더 있어요
나도 빨아줘요
체면과 허위의식에
세상 땟국물 가득 찬 나를
드럼 세탁기로 돌려줘요
세제를
한 통 다 넣어야 될 거예요
말릴 때는
햇볕 쨍쨍한 날
바짝 말려줘요.
- 시 「빨랫감 」 전문
위 시는 윤동주의 ‘서시’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이 없기를” 처럼 고결한 정신을 읽게 한다. 이 시는 신갑식 시인의 정체성과 문학적 세계관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대표적인 시라 할 수 있다. 1연의 “아내 여,/ 잠깐만 빨랫감 더 있어요”는 시간의 흐름을 일시 정지시키는 화자의 강렬한 욕구를 드러낸다. 2연 1행 “나도 빨아줘요”하며 격렬하면서 간절한 호소를 한다. 왜 화자는 자신을 빨아달라고 할까. “체면과 허위의식에/ 세상 땟국물 가득 찬 나”가 괴로워 견딜 수 없는 것이다. 깨끗함으로 돌아가고 싶은 결벽성을 보인다. 그 결벽성은 순수함으로 돌아가고 싶은 신념에 가득한 의지이다. 마지막 3연의 “말릴 때는/ 햇볕 쨍쨍한 날/ 바짝 말려줘요” 티끌 한 점 없이 맑고 깨끗함으로 부활하고 싶은 강한 의지를 보여준다. 세속에 휩쓸려 살아가는 것이 인간이다. 화자는 물리적인 크로노스의 시간을 이상과 꿈의 카이로스 시간으로 환원하고 싶어한다. 자기완성에 도달하고자 하는 고결한 마음이 깊은 울림을 준다. 인간은 사후에도 존엄하다. 시인은 혼탁한 세상에서 부끄럼 없이 맑고 깨끗하게 살기를 원하며 고결하게 살겠다는 결기의 시로 해석할 수 있다.
5.
시의 거품시대에 살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문학에 관심을 갖고 시를 사랑한 것이 죄가 될 수 없다. 공부 하지 않고 일기장 메모장 같은 시를 쓰는 것이 문제일 뿐이다. 문학이 아름다운 것은 깨어있는 정신이 아름답기 때문이다. 예술의 본질은 과거를 부정하고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것이다. 시인이 시를 쓴다는 것은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꿈의 세계를, 잃어버린 시간을 소환하여 꿈을 재현하는 것이며 사라져가는 인간성을 찾고자 하므로 아름다운 것이다.
시는 말이나 이야기를 전달하는데 본질적 기능이 있는 것이 아니다. 시적인 언어는 맑게 살아가고자 하는 인간의 본질을 서정적으로 조화롭게 담아내므로 시인 것이다.
우리는 가슴으로 사는가 머리로 사는가. 현대는 탐욕과 불의로 어지럽다. 시인은 가슴이 따뜻하고 머리가 차가운 사람일 것이다. 한국인의 정신문화는 인간에 대한 존엄성을 인식한다는 점에서 신갑식 시인의 시가 그러한 정신문화를 보여주고 있어 시인의 길이 아름답다. 선진국이란 앞서간다는 뜻이다. 앞서가려면 잘 살피고 통찰해야 한다. 통찰은 인생과 세계 전체를 바라보는 시선이다.
시의 해설은 시의 아름다움을 발견하여 해석해야 한다. 신갑식 시인의 시는 맑고 고결한 정신을 추구함으로 혼탁한 이 사회에 시인의 사명을 다하는 표본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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