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2월 25일 수요일
해파랑길 걷기 16일째. 아침 6시에 일어났다.
그러고 보니 오늘이 예수 탄생일…. 그곳 베들레헴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생각하면, 떠올리고 싶지 않은 날이기도….
인근 음식점에서 아침을 먹고, 점심으로 먹을 김밥을 샀다. 성탄절이라는 휴일인데도 식사하는 노동자들이 많았다. 가까이에 9,000원짜리 백반이 있는데도 김밥집에서 4~5천원짜리 싼 음식을 먹고 있었다.
나의 이런 여행이 어쩌면 사치스럽고 미안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항구에서 찬바람을 맞으며 그물을 꿰매고 있는 어부들, 특히 외국 노동자들을 볼 때마다 그런 장면을 담고는 싶었지만… 자신들의 그런 조건에서의 노동 장면을 여유롭게 지나가는 관광객에게 원치 않는 피사체가 되어 피동적으로 찍힐 수밖에 없다는 그 느낌…. 대부분의 경우 스마트폰 셔터를 누르기가 미안해서 그냥 지나치곤 했을 때처럼….
오늘 코스가 어제처럼 산길을 걷는 길이 많아 점심을 사 먹을 곳이 없어 점심거리와 생수를 더 챙겼더니 배낭 무게가 8kg은 되는 것 같다.
버스터미널에서 07:40에 출발하는 250번 버스를 타고 경정3리에서 내려 21코스를 걷기 시작했다. 늘어난 배낭의 무게가 느껴졌다. 축산항 바로 직전의 해안 절벽의 바위들은 멋졌다. 이 일대가 경북동해안국가지질공원으로 지정된 까닭을 이해할 수 있을 만한 경관이었다.
죽도산을 한 바퀴 돈 후 축산항 앞의 카페로 들어가 따뜻한 아메리카노 한잔을 주문해서 마셨다. 카페 이름과 가게 모양이 마음에 들어서 들어갔는데, 주인이 전화 통화를 엄청 시끄럽게, 짜증이 가득한 큰 목소리로 했다. 뒷담화를 친구와 하는 듯했는데, 나의 커피 주문을 받을 때나 커피를 내 줄 때나 여전했다. 손님에 대한 배려가 전혀 없어 불쾌했다. 2층으로 올라가 가장 외진 구석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일정을 정리하려 했지만, 귀청을 때리는 소음은 여전했다. 카페는 커피 맛보다는 분위기를 파는 곳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절감했다. 그러려니 하면서 30여 분을 보내고 있었는데, 아는 동네 지인인 듯한 남자 2명이 들어오자, 그 거칠던 목소리의 전화를 급히 끊더니, 반갑게 맞으면서 태도를 180도 바꾸면서 깔깔거리면서 다정스레 대화를 나누는 게 아닌가~!
순간, 휴리스틱, 편도체란 어휘가 내 뇌리를 스쳤다. 엄청나게 세련된 그 카페의 건축 설계와 기막힌 위치, 여행자의 지친 몸과 마음을 달래줄 카페의 이름과 그 간판의 디자인! 거기에 나의 휴리스틱적 사고체계가 나를 그 카페 안으로 들어서게 한 섣부른 판단을 했던 것이었으리라. 그리고, 아마도 내 대뇌피질보다는 편도체에 그 여성의 목소리와 얼굴 모습이 더 강도 높게 저장되었을 거란 생각을 하면서 그 카페를 나섰다. 그 저장된 정보를 이 나이에 앞으로 활용할 기회는 거의 생기지 않겠지만….
축산항을 지나면서 22코스가 시작되었는데, 산길로 접어들면서 어려운 상황이 발생했다. 입구부터 공사 중이라 진입이 어려웠다. 검색을 해봐도 대안 보행로에 대한 정보가 전무했다. 다행스럽게도 휴일이라, 포크레인과 잘린 소나무 등이 즐비했지만 공사는 중지 상태라 조심스레 발걸음을 내디디며 올라갔다. 힘든 코스였다. 가파른 고갯길에서는 속도를 조절했다. 땀과 체온 조절, 그리고 체력 안배를 하기 위해서.
봉화산(286m)을 지나 대소산 봉화대에 올라 주변을 조망했다. 망월봉(226m)을 지나면서 배가 출출할 때가 한참 지났는데, 때마침 강풍을 막아주는 양지바른 곳이 나타났다. 조망도 좋았다. 김밥을 천천히 먹었다. 풍력발전기의 거대한 날개가 강풍을 맞아 신나게 돌아가며 내는 거친 숨소리만 들려왔다.
목은이색산책로(영덕블루로드길, 해파랑길과 겸하는 길)을 걷다가 길을 잘못 들었다. 부드러운 솔잎이 깔린 솔밭길과 거대한 풍력발전기에 취해 멍하니 정신없이 걷다가 길을 놓친 것이었다. 길안내 앱을 켜고 10여 분간 고생한 끝에야 겨우 제 길로 들어설 수 있었다.
목은기념관을 돌아봤다.
'백설이 ᄌᆞᄌᆞ진 골에 구루미 머흐레라….'
게시되어 있는 이색 선생의 시를 읽으며, 젊은 시절에 이 시를 읽었을 때의 아련한 기억과 느낌이 자연스레 살아났다.
이색 선생이 태어났다는 바로 아래의 괴시리 마을을 둘러본 후, 대진항으로 갔다. 대진항에 도착하여 오늘의 종점인 고래불항 부근의 숙소를 검색해 예약했다.
도로를 따라 긴 거리를 걸은 후에 종점인 고래불항에 도착했다. 고래불이라는 이 지명도 이색 선생이 이곳 해변 모래사장 모양이 고래를 닮았다고 해서 지어놓은 이름이라는 안내문이 있었다.
날이 저물어 저녁을 먹고 숙소로 들어가기로 하고, 가까이 보이는 음식점으로 들어갔다. 우연히 마주친 듯한 사람을 만나, 동석하자는 제안을 받고 같이 저녁을 먹었다. 서로 자기소개를 하고, 저녁을 먹으며 술을 마시며 얘기를 나눴다.
얘기가 점점 길어졌다. 소주 4병에 맥주 2병. 그는 더 마시자고 했지만, 나는 내일 일정이 있기에 단호히 거절하고 계산을 하고 나왔다. 그는 또 따라오면서 더 마시자고 했다. 냉정히 뿌리치고 돌아섰다.
무척이나 외로운 사람일까? 특별한 취향을 지닌 사람일까? 오늘 카페에서 커피만 판 그 60대 여성과 더불어 많은 생각을 불러일으키게 한 사람이었다.
어두운 밤길을 찾아 숙소에 들어와 오늘 일정을 오래도록 정리해 놓고, 내일 일정을 대강 살펴봤다.
알 수 없는 내일의 새로운 여정을 어렴풋이 그려보며 잠을 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