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의 의미
2022. 4. 17(주일낮예배) 로마서 5:17-18
강은도목사님의 아버지는 창세기적 삶을 사시는 분이었다. 하나님께서 빛이 있으라 라고 말씀하시면 온 천지가 환하게 밝아진 것처럼 아버지는 집에서 집이 와 이리 더럽노! 라고 한마디 하시면 어머니가 급하게 집을 청소하였다. 배고프다. 밥묵자는 한마디면 밥상이 차려졌다. 그래서 하나님이 말씀하시면 모든 것이 성취되는 것처럼 강은도목사님의 아버지는 집에서 말씀만 하시면 성취되었다. 그러한 아버지는 아침 6시와 저녁 9시에 온가족을 소집하여 예배를 드렸다. 그리고 자녀들에게는 매일 성경 3장, 주일에는 7장을 읽게하고, 문제를 내어서 5문제 중에 4문제를 맞추지 못하면 밥을 굶겼다. 그래서 강은도목사님은 하루에 2번 가정예배를 드리고, 또 매일 성경 3장을 읽고, 5문제를 맞추어서 밥을 먹는 삶을 살았다.
강은도목사님은 어린 시절 어렵게 살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강은도목사님을 정말 힘들게 하는 날이 고난주간이었다. 왜냐하면 고난주간에는 집에서 밥을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배가 너무 고팠던 강은도목사님은 어머니에게 왜 밥을 주지 않는가?를 물었다. 그때 어머니는 그런 게 있다고 말씀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뭐가 있는데? 하고 물었더니 어머니는 예수님이 돌아가셨다는 충격적인 말씀을 하였다. 그래서 살아있는 것이 아니냐?고 물었더니 어머니는 일 년에 한번씩 돌아가신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목사님은 어머니의 그 말을 듣고 굉장히 혼란스러웠다.
이것이 강은도목사님의 어린 시절이었다. 매일 아침 6시와 9시에 예배를 드려야 했고, 또 성경을 읽지 않으면 밥도 얻어먹지 못하는 그런 가정에서 자란 것이다. 그런데 초등학교 4학년 때 전도사님은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처럼 우리도 부활하고, 천국에 가면 영원토록 예배를 드려야 한다는 말씀을 들었다. 그 설교를 듣는 순간 강은도목사님은 드디어 개종해야 할 때가 되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강은도목사님에게 있어서 부활은 그렇게 좋게 여겨지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 여러분 중에 부활에 감격이 없는 신앙을 가지고 있지 않는가? 우리는 고난주간 특별새벽기도를 통하여 마태복음을 살펴보았다.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예수님은 제일 먼저 성전으로 가셨다. 그리고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자를 내쫓으시며 돈바꾸는 자의 상을 엎어버리시며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거늘 너희가 강도의 굴혈을 만들었도다(마 22:13)하고 책망하였다.
그 예수님은 베다니에서 주무시고 이튿날 아침 일찍이 예루살렘으로 올라오시면서 잎만 무성한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였다. 시장하였던 예수님이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자 나무가 말라버린 것이다.
이것이 우리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여 제일 먼저 하신 일들이다.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십자가를 짊어지기 위하여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예수님은 나귀를 타심으로 겸손의 왕이심을 보이셨다. 그리고 예수님에 입성하신 예수님은 성전을 청결케하고, 또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심을 권세와 능력의 왕이심을 나타내신 것이다.
이상하지 않는가?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한 것은 머리에 왕관을 쓰고 백성들의 칭송을 받기 위함이 아니라, 우리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시기 위함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계속하여 왕되심만을 나타내신 것이다.
왜 예수님은 왕되심만을 나타내셨는가? 이제 오늘 본문을 보시기 바란다.
(롬 5:17-18) 한 사람의 범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그 한 사람을 통하여 왕 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은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18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 같이 한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이 말은 우리의 대표되는 아담이 범죄하므로 사망의 우리이 왕노릇한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제 생명이 우리에게 왕노릇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여러분은 이 말이 이해가 되는가? 1945년 8월 15일 일본은 항복 선언문에 서명한다. 그리고 짐은 깊이 세계의 대세와 제국의 현재 상황을 깊이 고려하여 비상의 조치를 통해 시국을 수습하고자 하여 이에 충의롭고 선량한 신민들에게 고하노라 라고 하면서 일본 천황의 옥음방송을 하였다. 그때 일본의 전세는 많이 기울어져 있는 것이 사실이었다. 독일이 이미 패망하였고, 1942년 6월 5일 미드웨이 해전과 1944년 10월 24일 필리핀 레이테만 해전에서 패배하므로 일본 함대는 괴멸상태에 이르렀다. 그리고 1945년 2월에는 마닐라가 함락되었고, 4월에는 일본 오키나와에 미군이 상륙하므로 이미 기세는 꺾인 상태였다. 그런데 히로시마(8월 6일)와 나가사키(8월 9일)에 핵폭탄이 투하되므로 일본 천황은 패전을 인정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일본천황이 패전을 선고한 후 한국, 대만, 만주, 남사할린에 이상한 현상이 벌어졌다. 일본국민들 중에 한국, 대만, 만주, 남사할린에 거주하며 기세등등하게 살던 사람들은 패전 선언이 있은 후에 도망하기 바빴다.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났겠는가? 왕의 패배선언은 일본의 패배였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첫 번째 사람 아담의 패배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모든 인류의 패배였다. 그런데 하나님의 아들되신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성취하심으로 사망권세를 깨뜨리고 승리하신 것은 우리의 승리가 되는 것이다.
그러면 예수님의 승리가 우리에게는 어떤 영향을 미치겠는가? 부활하신 예수님이 엠마오로 내려가는 이야기가 성경에 기록되어져 있다. 그런데 제자들은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는데, 이에 대하여 누가는 눈이 가리어져서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다(눅 24:16)고 하였지만, 마가는 예수님이 다른 모양(막 16:12)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고 기록하였다. 여기서 마가가 말하는 다른(ετερός)모양이란 단어는 예수님이 변화산에서 기도할 때도 사용되었다. 그때 예수님의 용모가 변화되고 그 옷이 희어져 광채가 났다(눅 9:29)고 기록하는데, 변화하다는 단어가 바로 다른(ετερός)과 같은 단어이다. 여기서 다른 모양, 변화의 의미는 재질이 완전히 다른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예수님이 부활하였는데, 예수님의 모습은 모양의 같지만, 재질은 다른 그런 상태였다는 것이다.
그래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살펴보면 우리는 깜짝 놀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몸은 못자국 난 상처를 그대로 가지고 있었고, 또 사람들이 만질 수도 있었다. 아니 제자들에게 떡을 달라고 하여서 떡을 먹는 우리와 똑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부활하신 예수님은 제자들이 문을 굳게 닫고 있었는데, 문을 열지도 않고 그냥 들어가신다.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다른 몸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예수님의 몸을 신령한 몸이라고 표현한다. 요한복음 11장을 보면 죽은 나사로가 다시 살아났다. 그런데 다시 살아난 나사로는 지금 우리가 가진 것과 똑같은 몸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므로 나사로는 다시 죽어야 했던 것이다. 그런데 신령한 몸으로 부활하신 우리 주님은 죽지 않는 몸으로 부활하신 것이다.
그러면 저와 여러분은 어떤 모습으로 부활하겠는가? 스페인의 침략과 전염병으로 전멸의 위기에 있었던 아이티 사람들은 16세기 노예가 되어 아메리카 대륙으로 오게 되었다. 그리고 그들은 고통의 날들을 지내면서 자신들의 토속신앙과 아프리카의 신화적요소, 그리고 카톨릭 제의까지 혼합하여 부두교를 신봉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 부두교에서는 사제인 호운간(Houngan)이나 주술사인 보커(Bokor)는 시체를 움직일 수 있게 하거나 살아있는 사람을 영혼없는 노예로 만들 수 있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이러한 부두교의 주장에서 나온 것이 좀비이다. 공유주연 부산행, 강동원주연 반도, 유아인, 박신혜주연의 살아있다가 다 좀비영화이다. 그리고 오징어게임 이후에 넷플릭스에 최고 인기를 끌었던 지금 우리 학교는도 좀비영화이다. 한국의 최고의 배우들이 주연이고, 또 많은 관객이 있는 인기 영화가 좀비영화라는 것이다. 흉측한 몰골로 사람을 괴롭히고 물어서 또 다른 좀비를 만드는 것을 우리의 부활과 연관시키는 사람이 있다. 그런데 우리의 부활은 그런 부활이 아니다. 가장 온전하고 아름다운 신령한 육체를 가지고 저와 여러분은 부활하게 될 것이다.
여러분은 이 사실을 믿는가? 예수님께서 부활하였을 때 대제사장들은 무덤을 지키던 경비병들에게 돈을 주고 예수님의 제자들이 훔쳐갔다고 소문을 내게 하였다. 그리고 예수 믿는 사람을 잡아 옥에 가두며 박해를 가하였다. 그런데도 제자들은 위협을 무릅쓰고 예수의 부활을 증거하며, 또 이를 증명하려 하였다.
이러한 때에 예수의 부활을 증명하는 것에 걸림이 되는 기사가 4복음서는 다 기록하고 있다. 4복음서의 기자는 모두 한결같이 예수님의 부활을 제일 먼저 본 사람이 막달라 마리아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막달라 마리아는 일곱귀신이 들린 여인이었다. 그러므로 막달라 마리아는 귀신에 완전히 지배된 삶을 살던 여인이었는데, 그 여인이 제일 먼저 주의 부활을 보았다는 것이다.
이 사실이 부활을 증거하는데 도움이 되겠는가?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증인은 남자만 가능하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부활에 대하여 여자인 마리아의 증언은 증거가 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귀신에 완전히 지배받았던 막달라 마리아가 하는 말은 그 누구도 믿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 내용을 그대로 성경에 기록한 것이다.
왜 성경에 그대로 기록했겠는가? 이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성경은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을거야! 하는 것을 중심으로 기록한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보고 체험한 그 놀라운 사실을 증거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의 부활사실을 알림으로 자신들과 같이 소망과 기쁨과 감격이 넘치는 자리로 나아오기를 갈망했던 것이다.
그러면 신령한 몸으로 부활하는 이 사실을 증거하고 싶은 갈망이 있는가? 초대교회는 더 부요해져야지! 세상 자랑거리를 더 많이 삼아야지! 하는 갈망이 아니라, 예수님의 부활로 말미암아 내가 신령한 몸으로 부활케 되는 그 소망이 감격이 되어서 이웃에게 증거하기를 갈망하였던 것이다. 그 갈망이 이제 저와 여러분에게 있기를 바란다. 그래서 신령한 몸으로 부활할 그 기쁨과 소망을 전하는 복이 있기를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