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Ⅵ. 박정희 대통령 관련 참고자료
가. 박정희 대통령 프로필
박정희(朴正熙, 1917.11.14.~1979.10.26.)는 대한민국의 제5․6․7․8․9대 대통령이다. 본관은 고령. 호는 중수(中樹)
육군 소장 때 <5.16 군사혁명>을 주도해 제2공화국의 장면 정권을 교체하고 제5대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되어 1963년 대통령에 취임한 이후 1979년 청와대 인근 궁정동에서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에 의해 시해되기까지 18년간 대통령에 재임하며 국가 안보와 산업화를 위한 토대를 구축했다.
젊은 시절 대구사범학교를 졸업하고 3년간 교사로 재직하다 만주국 육군군관학교에 입학하였다. 졸업성적 석차 2등으로 만주국 군관학교를 졸업한 후, 성적우수자 추천을 받아, 일본 육군사관학교에 57기로 입학하여 1944년 수석으로 졸업했다.
일본이 제2차 세계 대전에서 패망할 때까지 일본 제국이 수립한 만주국의 일제 관동군장교로 근무하였다. 병과(兵科)는 포병(砲兵)이다. 일제가 패망하고 1946년 7월에 귀국하여 대한민국 국군 장교를 지내던 중 형인 박상희가 경찰에게 사살되자 이재복의 권유로 남조선로동당에 입당하여 활동하였다가 김창룡이 주도한 숙군에서 여수․순천 사건 연루 혐의로 체포되어 사형을 선고받았다. 정보국에 남조선로동당 조직과 동료들을 증언한 후, 육군본부 정보국장이었던 백선엽의 최종 면담에서 사형을 면하였다.
4.19혁명 이후 정치적, 사회적 혼란을 극복하고자 5.16 군사혁명을 주도하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된 후 군복을 벗고 직선제로 치러진 제5대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당 윤보선 후보를 누르고 당선되어 1963년 12월부터 1979년 10월 26일까지 제5~9대 대통령으로 연임 재직하였다.
이 기간에 월남파병과 한국군 전력강화, 경부고속도로와 서울 지하철 등 사회기반시설 확충, 농촌의 현대화 운동이었던 새마을 운동, 대규모 중화학 공업 육성, 적극적인 수츨 진흥산업 육성, 민둥산의 기적인 산림녹화 사업, 다수 국민의 문맹(文盲) 퇴치, 식량 자급자족 실현 등 국가 근대화 정책을 추진하여 ‘한강의 기적’을 이루고, 국제적 지위 향상 등을 통해 대한민국 발전의 토대를 구축하였다.
그러나 유신헌법 등의 장기 집권을 반대하다 1979년 10월 김영삼(金泳三) 의원 제명 파동을 계기로 부마(釜馬)항쟁이 일어난 후 그해 10월 26일 청와대 인근 궁정동에서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에 의해 시해 당했다.
건국이후 최초로 국장(國葬)으로 거행되었으며,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됐다.
◇ 성명 : 박정희(朴正熙) Park Chung-hee
* 본관 고령(高靈), 아호 중수(中樹)
— 몰락한 양반가의 자손이었던 아버지 박성빈(朴成彬, 1871~1938)과 어머니 백남의(白南儀, 1872~1949) 사이에 5남 2녀 중 5남으로 출생했다.
아버지 박성빈은 조선 후기에 무관직 정9품 효력부위(効力副尉)를 지냈으나 동학 접주 출신으로 연좌돼 가장으로서 경제생활을 할 수 없는 상태에서 맏형 박동희는 독립해 나가고, 둘째 형 박무희와 셋째 형 박상희가 실질적인 가장으로 생계를 꾸려 나갔다.
아버지와 둘째 형은 경기도 관찰사를 지낸 바 있는, 인근에 사는 칠곡군의 갑부 장승원(張承遠)을 찾아가 그의 집안 토지의 소작농으로 생계를 유지했는데, 후일 국무총리를 지낸 장승원의 아들 장택상(張澤相)은 이를 희화화하며 박정희를 공격했고 박정희는 이로 인해 장택상과는 아주 껄끄러운 관계가 유지됐다.
◇ 생몰연월일 : 1917.11.14.~1979.10.26.(향년 62세)
◇ 출생지 : 경상북도 선산군 구미면 상모리 117(현 구미시 상모동 171)
◇ 가족사항
— 첫 배우자 김호남(金好南, 1920.~1991.) * 1950.11. 이혼
장녀 박재옥(朴在玉, 1937.~2020.)
* 사위 한병기(韓丙起, 1931.~2017.) 제8대 국회의원. 칠레/캐나다대사
— 영부인 육영수(陸英修, 1925.~1974.) 충북 옥천 출생
차녀 박근혜(朴槿惠, 1952.~ ) 대한민국 제18대 대통령
삼녀 박근령(朴槿姈, 1954.~ ) 전 사회기관단체 대표
* 사위 신동욱(1968.~ )
장남 박지만(朴志晩, 1958.~ )
* 며느리 서향희(1974.~ ) 변호사
▲가족끼리 게임을 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 모습 (1966.11.19.)<사진/경향신문>
◇ 취미 : 서예, 역사책 읽기, 독서
— 전국의 건물, 교량, 탑 등에 그의 휘호가 많이 남아 있다.
◇ 종교 : 무교(친불교 성향)
<주요 상훈>
— 무궁화대훈장(1963.12.17., 제5대 대통령 취임 시)
— 건국훈장 대한민국장(1979.11.3., 국장 때 추서)
<주요 학력>
1932. 구미보통학교 졸업
1937. 대구사범학교 졸업
1942. 신징 군관학교 2기 졸업
1944. 일본 육군사관학교 57기 졸업
1946. 조선국방경비사관학교(현 육군사관학교) 2기 졸업
1947. 조선경비보병학교 졸업
1952. 미국 육군포병학교 졸업
1957. 육군대학 졸업
<주요 경력>
1936. 대구사범학교 재학 중 3년 연하의 김호남과 결혼
1937. 대구사범학교 졸업, 문경보통학교 교사 부임
1937. 장녀 재옥 출생
1938. 부친 박성빈 사망
1940. 만주국 육군군관학교 제2기 입학
1942. 신징 군관학교를 졸업, 일본 육군사관학교 57기로 편입학
1944. 일본 육군사관학교 졸업, 관동군 견습사관 과정을 거쳐 만주국군 보병 제8단에 소위로 임관
1945. 해방 후 한국 광복군 제3지대 제1대대 제2중대장
1946.9. 조선경비사관학교(현 육군 사관학교의 전신) 2기생으로 입학. 12월 졸업, 소위 임관
1946.10. 대구 폭동 중 셋째 형 박상희 사망
1948. 여순 14연대 반란사건에 연루되어 체포
1949. 육군본부 전투정보과장
1949. 모친 백남의 사망
1950. 한국전쟁 발발 이후 육군소령으로 복직
1950.11. 김호남과 이혼
1950.12. 육영수와 결혼
1955. 제5사단 사단장
1957. 육군대학교 졸업, 제7사단 사단장
1959. 육군 제6관구 사령관
1960.1. 부산 군수기지 사령관, 12월 제2군사령부 부사령관
1961.5.16. 5․16 군사혁명 주도
1961.5.18. 군사혁명위원회 부의장(20일 국가재건최고회의로 개명)
1961.7.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1962.3.22. 윤보선 사퇴로 대통령권한대행, 7월 겸임 내각수반
1963. 민정당 윤보선을 누르고 대통령 당선, 제5대 대통령 취임
1963. 제2대 민주공화당 총재
1963. 서독에 광부, 간호사 보내 임금을 담보로 1억4000만 마르크 차관
1965. 일본과의 외교관계를 정상화하는 한일협정 타결
1965. 한국과학기술연구원 설립
1967. 신민당 윤보선을 다시 누르고 제6대 대통령으로 재선
1968. 1․21사태(북한공비 31명 청와대 습격과 박정희 대통령 암살시도)
1968. 여운형 추모회 고문.
1969. 대통령출마 3선 개헌
1971. 신민당 김대중을 누르고 3선에 성공, 제7대 대통령 취임
베트남 전쟁에 한국군 파병
1970. 경부 고속도로 준공식, 수출 10억 달러 달성,
국방과학연구소 설립, 새마을 운동 제창
1971. 서울 홍릉에 한국과학기술원의 전신, 한국과학원 설립
1972. 7.4 남북 공동 성명
1972. 10월 유신(국회 해산 및 계엄령 선포)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대통령으로 선출
1973. 김대중 납치사건
1974. 광복절 경축식장에서 영부인 육영수 피격 사망
1975. 인혁당 재건 사건
1975. 2차 유신헌법 찬반 재신임 투표에서 재신임 획득(73.1% 찬성)
1977. 1인당 국민소득 1,000달러 돌파, 수출 100억 달러 달성, 부가가치세 시행
1978. 한국정신문화연구원 개관(68년 박종홍 건의로 추진)
1978. 제9대 대통령에 선출, 세계에서 7번째로 국산장거리 지대지 및 중거리유도탄, 다연발로켓 시험 발사 성공
1979.10.26. 오후 8시경 서울 궁정동 안가에서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의 총격을 받고 서거(10․26 사건)
<주요 저서>
— 우리 민족의 나갈 길(1962)
— 국가와 혁명과 나(1963)
— 민족의 저력(1971)
— 민족중흥의 길(1978)
* 박정희 대통령관련 저서
— 군사혁명사편찬위원회, 《5.16군사혁명사》
— 이상우, 《박정권18년 그 권력의 내막》
— 조갑제,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 박정희 일대기 형식
— 이인화, 《인간의 길》
— 김진명,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 백무현, 《만화 박정희》, 박정희에 대한 만화
— 허경영, 《무궁화 꽃은 지지 않았다》
◇ 작사․작곡
— 새마을노래
— 나의 조국
◇ 즐겨 쓴 용어(휘호)
— 내 일생 조국과 민족을 위하여, 조국근대화, 민족중흥, 유비무환, 총력안보, 수출입국(輸出立國), 잘 살아보세, 새마을 운동, 증산 수출 건설 등
<친필 휘호>
◇ 어록
— 내 일생 조국과 민족을 위하여(평소)
— 다시는 이 나라에 본인과 같은 불운한 군인이 없도록 합시다.(전역식 中, 1963.8.30.)
— 우리는 이 각박한 국제사회의 경쟁 속에서 지난날의 감정에만 집착해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아무리 어제의 원수라 하더라도 오늘과 내일을 위해 필요하다면 그들과도 손을 잡아야 하는 것이 국리민복(國利民福)을 도모하는 현명한 대처가 아니겠는가?(한일회담 타결에 즈음한 특별담화문 中, 1965.6.23.)
— 자유는 그것을 위해 투쟁하는 자만이 누릴 수 있는 것이며, 평화는 그것을 지킬 수 있는 자의 것이다.(아태지역각료회의 치사 中, 1966.6.14.)
— 우리는 모두 정의를 지지하며, 정의가 지배하는 사회를 희구한다. 그러나 정의가 힘을 동반하지 못할 때, 그것은 정의일 수 없고, 남는 것은 한낱 굴욕과 노예상태밖에 없을 것이다.(월남지원국 정상회의 기조연설 中, 1966.10.24.)
— 대통령으로서 처음에 취임하던 그 당시나, 오늘 이 시점에 있어서나, 내 가슴 속에 풀리지 않고 맺혀 있는 하나의 소원이 있다면, 그것은 우리도 어떻게 하든지 남과 같이 잘 살아 보아야 하겠다는 염원입니다.(대통령 취임 제3주년 기자회견 中, 1966.12.17.)
— 우리의 후손들이 오늘에 사는 우리 세대가 그들을 위해 무엇을 했고 조국을 위해 어떠한 일을 했느냐고 물을 때 우리는 서슴지 않고 조국 근대화의 신앙을 가지고 일하고 또 일했다고 떳떳하게 대답할 수 있게 합시다.(연두기자회견 中, 1967.2.2.)
— 자신의 자유와 권리만을 주장하기에 앞서, 타인의 권리와 인격을 존중할 줄 알아야 하고, 사랑과 신의, 이해와 존경으로 공동생활을 영위하겠다는 자세를 가다듬을 때 진정한 의미의 인권은 보장된다.(세계인권선언 기념일 치사 中, 1967.12.8.)
— 우리가 서있는 이 땅은 자손만대 이어 받아서 번영과 행복의 땅으로 가꾸어 가야 할 우리들의 고향이요, 선조들의 뼈가 묻혀 있고, 또 우리의 뼈도 언젠가는 이 곳에 묻힐 우리의 향토다. 이 땅을 수호할 사람은 바로 우리들이다. 우리의 생명, 우리의 단란한 가정을 우리 힘으로 지키고, 내 고장, 내 직장을 내 힘으로 수호하는 자기 방위의 사명과 책임감이야말로 진정한 향토애이며, 이것이 곧 조국애의 구현이다.(향토예비군 창설식 유시 中, 1968.4.1.)
—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국민교육헌장 中, 1968. 12.5.)
— 평시(平時)에 땀을 많이 흘리면 전시(戰時)에 피를 적게 흘린다.(공군사관학교 졸업식 유시 中, 1969.3.29.)
— 한 세대의 생존은 유한하나, 조국과 민족의 생명은 영원한 것. 오늘 우리 세대가 땀 흘려 이룩하는 모든 것이 결코 오늘을 잘 살고자 함이 아니요, 이를 내일의 세대 앞에 물려주어 길이 겨레의 영원한 생명을 생동케 하고자 함이다. 서울대학교 총장에게 보내는 친서 中, 1970.3.16.)
— 토지가 국민이라면, 지도자란 비료에 지나지 않는다. 여기서 종자(種子)는 민족의 이상이 될 것이다.(자서전 <민족의 저력> 중)
— 공산당과 대결하는 데 있어서는 무엇보다도 힘이 있어야 한다. 공산당과 입으로 싸워서는 문제 해결이 되지 않는다. 공산당은 상대방의 힘이 강하다고 생각하면 절대 침범하지 않으며, 약하다고 생각했을 때는 언제든지 침범하는 것이 공산당이다. 이것이 지난 20년 동안에 얻은 교훈이다.(광주 유세 연설 中, 1971.4.22.)
— 우리는 우리를 해치지 않는 자에 대해서는 언제나 이들을 우리의 친구로 맞아들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를 해치려는 자에 대해서는 그 누구와도 감연히 대결하여 끝까지 싸울 의연한 자세를 지킬 것이다.(제26주년 광복절 경축사 中, 1971.8.15.)
— 우리에게는 많은 문화유산이 있지만, 우리의 글인 한글이야말로 민족문화의 큰 분수령(分水嶺)을 이루는 찬연한 위업이요, 자랑이라 아니 할 수 없다.(한글날 담화문 中, 1971.10.9.)
— 우리는 비록 남북으로 갈라져 있다 해도 같은 말, 같은 역사, 그리고 하나의 피로 이어져 온 운명공동체다. 이데올로기는 변해도 민족은 영원하다.(제27주년 광복절 경축사 中, 1972.8.15.)
— 나는 물론 인간인 이상 나라를 다스리는 데 시행착오가 없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당대의 인기를 얻기 위해서 일하지 않았고, 후세 사가(史家)들이 어떻게 기록할 것인가를 항상 염두에 두고 일해 왔다. 그리고 “어떻게 하면 우리도 다른 나라 부럽지 않게 떳떳이 잘 살 수 있을까?”하는 생각이 머리에서 떠난 일이 없다.(기자들과 환담 中)
— 미친개는 몽둥이가 약이다.(북한의 판문점도끼만행사건 때 담화 中, 1976.8.18.)
나. 첫 내각 명단
직 위 | 성 명 | 주요 경력 | 비 고 |
대통령 | 박정희(朴正熙) | 예비역육군대장, 5.16군사혁명 주도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 |
국무총리 | 최두선(崔斗善) | 동아일보 사장, 반탁투쟁위 지도위원 | 육당 최남선 동생 |
경제기획원장관 | 김유택(金裕澤) | 한국은행 총재, 재무부장관 | |
외무부장관 | 정일권(丁一權) | 합참의장, 주미국대사, 유엔총회대표 | 후에 국무총리 |
내무부장관 | 엄민영(嚴敏永) | 5대 의원, 경희대 법대학장 | |
재무부장관 | 박동규(朴東奎) | 중소기업은행장, 한국산업은행총재 | |
법무부장관 | 민복기(閔復基) | 법무부차관, 검찰총장 | 후에 대법원장 |
국방부장관 | 김성은(金聖恩) | 해병대 창설, 재향군인회장 | |
문교부장관 | 고광만(高光萬) | 서울사범대 학장, 문교부차관 | |
농림부장관 | 원용석(元容奭) | 4대 의원, 농림부차관, 경제기획원장 | |
상공부장관 | 이병호(李丙虎) | 상공부차관, 내무부차관 | |
건설부장관 | 정낙은(鄭樂殷) | 한전 부사장 | |
보건사회부장관 | 박주병(朴柱秉) | 국립중앙의료원장, 대한의약협회장 | |
교통부장관 | 김윤기(金允起) | 교통부차관, 대한기술연합회 회장 | |
체신부장관 | 홍헌표(洪憲杓) | 내무부차관, 성균관대 부총장 | |
문화공보부장관 | 김동성(金東晟) | 서울대 교수, 대한공연윤리위 이사장 | |
총무처장관 | 이석제(李錫濟) | 국가재건최고회의 법사위원장, 검찰총장, 내각 사무처장 | 후에 감사원장 |
※ 대통령비서실장 이후락(李厚洛, 예비역육군소장, 대한공론사 이사장, 국가재건최고회의 공보실장)
중앙정보부장 김용순(金容珣, 예비역육군소장, 국가재건최고회의 문교사회분과위원장)
서울특별시장 윤치영(尹致瑛, 제헌의원, 국회부의장, 내무부장관)
다. 재임기간 중 주요 사건일지(1963.12.~1967.6.)
<1963년>
11.22. 존 F. 케네디 미국 대통령 암살
린든 B. 존슨(Lyndon B. Johnson) 미국 제36대 대통령(민주당) 취임(~1969.1.20.)
12.17. 제5대 박정희 대통령 취임, <제3공화국> 출범
<1964년>
1. 1. 미터제 실시
1.10. 한-일 어업회담
2. 1. 3분 폭리 사건
5. 2. 민주당-자유민주당-국민의당, 3당 합당
5. 7. 울산정유공장 준공
5. 9. 최두선(崔斗善) 내각 총사퇴, 국무총리에 정일권(丁一權) 임명
6. 3. 한-일회담 반대 데모(6.3사태)
서울 일원 비상계엄령, 서울시내 각급학교 휴교령 선포
8.14. 인민혁명당 사건
9.11. 국정감사권 부활
10.31. 한-베트남 파병협정 체결
11.27. 한-자유중국 우호조약 조인
12. 5. 제1회 수출의 날
12. 7. 박정희 대통령 서독방문, 뤼브케 대통령과 정상회담
<1965년>
1. 8. 국무회의, 비전투병력 2,000명 베트남에 파병 결정
2.15. 제2한강교 개통
1.18. 제7차 한-일 회담
1.26. 국군 월남파병동의안 통과
2. 9. 비둘기부대 파월
2.20. 한-일 기본조약 가조인
3. 1. 충청북도 야간통행금지 해제
5. 3. 민정-민주 통합, 민중당 창당
5.17. 박정희 대통령 미국방문, 존슨 대통령과 정상회담
6.22. 한-일 협정 조인
7. 2. 1개 전투사단 월남파병 의결
7.19. 이승만 전 대통령, 하와이에서 노환으로 서거
— 유해 귀환 7.23, 장례식 7.27.(가족장)
8.11. 한-일 협정 비준
8.12. 민중당의원 사퇴서 제출
8.26. 서울에 위수령 발동
9.24. 파월 맹호부대 1진 출발
9.25. 주월한국군사령부 창설
9.30. 판문점 자유의 집 준공
10. 3. 청룡부대 파월
10.12. 맹호부대 파월
12.18. 한-일 수교
12.24. 민주공화당 항명파동
<1966년>
1. 8. 한독당 내란음모사건
1. 4.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 개소
2. 7. 박정희 대통령 동남아 순방
3.30. 신한당 창당
6. 4. 장면 국무총리 서거(6.10, 국민장 거행)
6.14. 아시아-태평양이사회(ASPAC) 서울에서 발족
7. 8. 제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 발표
8. 중국, 문화대혁명(~1976.12월)
9. 9. 한-미 행정협정 조인
9.22. 김두한(金斗漢) 의원, 국회 오물투척사건
10. 1. 총인구 29,194,379명
10. 2. 간호원 251명 독일 파견
11. 2. 미국 존슨 대통령 방한, 한-미 정상회담
11. 3. 아시아민족반공연맹(APACL) 제12차 총회 서울에서 개최
11. 9. 제1회 전국기능올림픽대회
<1967년>
2. 7. 민중-신한당 통합, 신민당 창당
3. 9. 대중당 창당
3.22. 북한 중앙통신 부사장 이수근(李穗根), 판문점을 통해 귀순
5. 3. 제6대 대통령 선거
— 민주공화당 박정희 후보, 신민당 윤보선 후보 누르고 당선
6. 8. 제7대 국회의원 총선거
— 지역구(총 131석) : 민주공화당 102, 신민당 28, 대중당 1
— 전국구(총 44석) : 민주공화당 27, 신민당 17
6.13 .6.8 부정선거규탄 학생데모, 11개 대학 임시 휴교
6.15. 전국 28개 대학, 57개 고등학교에 휴교령
7. 1. 제6대 박정희 대통령 취임식
라. 관련 유적지 및 단체
<관련 유적지>
◇ 박정희 대통령 생가 : 경상북도 구미시 상모동 박정희로 107
<경상북도 기념물 제86호, 1993.2.25. 지정>
— 박정희 대통령이 1917년 출생해 1937년 대구사범학교 졸업할 때까지 거주한 곳으로, 박정희대통령생가보존회(이사장 전병억) 주관으로 매년 10월 26일에 박정희대통령 추도식을 거행하고 있다.
◇ 서울 신당동 박정희 가옥 : 서울시 중구 다산로36가길 25(신당동)
<국가등록문화재 제412호, 2008.10.10. 지정>
— 1동 건물(건축면적 124m2)이며, 현재 (재)육영수여사 기념사업회에서 관리하고 있다.
박정희 대통령이 1958년 5월부터 1961년 8월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관사로 이주할 때까지 가족과 함께 생활했고, 1979년 <10.26 사태> 이후에는 유족들이 살았던 집이다. 1961년 박정희 장군이 5․16 군사혁명을 계획하고 지휘한 장소로서 한국 현대 정치사에서 있어 중요한 역사의 현장이다.
◇ 묘소 : 국립서울현충원 국가원수묘역
— 1979년 11월 3일, 국장 영결식 후 국립서울현충원 국가원수묘역
— 1974년 8월 15일 광복절 경축식장에서 문세광(文世光)의 총격으로 사망한 영부인 육영수여사 묘소 옆에 안장
<관련 단체>
◇ 박정희대통령기념재단(전 박정희대통령기념사업회)
— 주소 : 서울 마포구 월드컵로 386(상암동) 박정희대통령기념도서관
— 대표 : 이사장 좌승희(전 한국경제연구원장)
◇ 박정희대통령기념도서관
— 소재 : 서울시 마포구 월드컵로 386(상암동)
<홈페이지 : http://www.presidentparkchunghee.org>
— 대표 : 박정희대통령기념재단 이사장 좌승희
◇ 박정희대통령역사자료관
— 소재 : 경북 구미시 상모동 박정희대통령 생가 옆
— 건립 : 연면적 4358㎡, 3층 규모로 경북 구미시 주관으로 건립, (2021.6.30. 개관)
— 구성 : 유품 5670점을 보존․관리하는 수장고, 상설 및 기획전시실, 아카이브실로 구성
◇ 미주 박정희 대통령 기념사업회(회장 이재권) 등
<장례식 및 묘소>
◇ 별세 : 1979년 10월 26일 저녁 8시경, 청와대 인근 궁정동 안가에서 만찬 중에 중앙정보부장 김재규(金載圭)에 의해 시해(弑害) 당함(만 62세)
— 대한민국 건국이후 처음으로 현직 대통령이 유고(有故)를 당한 비상사태를 맞아 최규하(崔圭夏) 국무총리는 시신이 안치된 국군서울지구병원(경복궁 옆)을 찾아 눈으로 직접 확인하였다. 이후 대통령권한대행 자격으로 비상국무회의를 소집하여 북한의 기습 도발에 대비해 전국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하는 등 여러 조치를 취하였다.
— 빈소는 청와대에, 분향소는 중앙청 광장과 지방(시도, 시군구, 읍면동 단위) 1,700개소, 해외공관 112개소에 설치․운영하였으며,
— 정부는 장의위원회(위원장 최규하 대통령권한대행, 부위원장 백두진 국회의장. 이영섭 대법원장)를 구성하고, 장례는 국장(國葬), 9일장으로 하며, 국립현충원에 안장키로 결정하였다.
그리고 장례기간 중에는 전국에 조기(弔旗)를 게양(관공서는 1개월)하며, 국장 당일에는 임시공휴일로 지정하였다.
◇ 장례식
— 1979년 11월 3일 오전에 청와대에서 발인을 마치고 운구행렬이 청와대를 떠날 때 고인의 연세에 맞춰 조총 62발을 발사해 청와대와 작별인사를 나누었으며,
— 오전 10시에 중앙청 광장의 영결식장에 도착해 전국에 묵념 사이렌이 울려 애도하는 가운데 대한민국 건국 후 첫 국장(國葬)으로 거행하였다.
국장 영결식은 박정희 대통령의 유족과 장의위원장인 최규하 대통령권한대행과 장의위원, 그리고 각계인사와 47개국 조문사절 등 3천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 개식선언(사회 : 김창식金昶植 총무처 소청심사위원장>
— 국기에 대한 경례
— 고인에 대한 묵념
— 고인의 약력보고 및 업적 소개
—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추서
— 최규하 장의위원장의 조사(弔辭)
— 종교의식(불교, 천주교, 기독교 순)
— 생전의 육성 근청(월남의 공산화 등 자주국방 관련 말씀)
— 헌화 및 분향(유족, 장의위원장 및 위원, 해외조문사절 순)
— 조가(弔歌)
— 조총 21발 발사
— 폐식 및 운구행렬 이동 순으로 진행했으며,
— 영결식을 마친 후 운구행렬로 편성하여 광화문, 서울역을 거쳐 국립현충원으로 이동하는 연도에는 수백만 명의 국민들이 운집해 고인의 가는 길을 배웅하며 애도했다. 끝
☞ 자료출처/ 대한민국 대통령 취임사(史), 2022년, 현대의전연구소 명의 발간
대한민국 역대 대통령 취임사(辭), 도서출판 예중. 2024년, 정현규 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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